신태보(베드로)

 

신태보(베드로)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입교하였는지, 입교한 초기에 그의 신앙 생활이 어떠하였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그의 집이 서울에서 1백 4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니, 아마도 경기도 어디에서 생활하였던 듯하다.


  실제로 베드로의 행적이 조선 천주교회 역사에 나타나는 것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부터이다. 그는 친척인 이여진(요한)과 가깝게 지내면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기 위하여 수차 서울을 내왕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한 분의 목자인 주신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비밀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지 4년 후인 1805년 이여진(요한)이 밀고되어 체포를 당하자, 신태보는 서울로 달려가 청탁을 하고 뇌물도 써서 요한을 석방시켰다. 이렇게 되어 그 후 요한은 북경을 왕래하면서 조선에 성직자를 모셔 오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신 베드로는 북경을 왕래하는 교우들을 위하여 여비를 마련하는 한편, 교회 서적을 베끼고 신자들을 보살펴 주며, 신자들 서로 간의 왕래를 도와 주면서 교회 재건에 힘쓰기도 하였다. 이렇게 재건 운동에 헌신하고 난 베드로는 그 이상 교회 사업에 참여하지 않고 이제는 자신의 구령에만 몰두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여러 곳으로 다니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현 경상북도 우동면 신흥리)에 자리잡고, 다른 교우들과는 별로 상종도 아니하면서 살고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 그가 교회서적을 많이 베낀 탓으로 박해 때에는 자연히 주목을 받게 되어 있었다.


  1827년, 정해 교난의 박해가 널리 번져 나간다는 것을 안 그는 집안 식구들과 함께 안전한 곳에 숨어 있을 준비를 시작하였다. 4월 22일, 모든 준비가 끝나고 길을 떠나려고 하였을 때 전주의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베드로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전주 감영에서 발행한 체포 영장을 보고 처음에는 따라가기를 거절하였으나, 끝내 그들과 함께 본관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다. 본관은 포졸들의 서류를 검토하고 나서 베드로를 인도하였다. 전주의 포졸들은 상주의 관헌들과 함께 다시 베드로의 집으로 가서 법 절차에 따라 그를 체포하였다.


  전주로 가던 도중, 포졸들은 어느 마을에 들러 위협과 완력으로 술과 밥을 얻어 먹으며 가난한 백성들에게 폐를 끼쳤다. 그런 다음 길을 떠난 4일째 되던 날에는 전주 땅 근처에서 쉬게 되었다. 거기서 밤을 지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마소를 탄 천주교인들이 포졸들에게 호송되어 왔다. 그들은 문초를 당하는 중에 교회서적을 가지고 있노라고 자백한 사람들이었다. 이미 고문을 당하여 스스로 걸을 수 없는 그들은 이렇게 마소에 태워져 관가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포졸들이 술을 마시고 떠드는 사이에 그 교우들에게 정세를 물어 보았다. 여기에서 그는 그 교우들이 바친 책 중에는 이미 자기가 손수 베낀 교회서적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사실을 더 오래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이튿날 그는 전주 감영에 들어가 관장 앞에 출두하였다.


  관장은 베드로에게 우선 다음과 같이 물었다.  


  ꡒ네가 3도를 돌아다니며 사교를 전파하여 백성들을 현혹시켰다는 것이 진실이냐?ꡓ


  ꡒ저는 사교를 믿지 않고 다만 천주의 교를 따를 뿐입니다.ꡓ


  ꡒ저놈이 사교라는 말을 하기가 싫어서 천주의 교라고 하는구나. 그래, 천주의 교를 믿으면서 그 교가 엄금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느냐?ꡓ


  ꡒ어떻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제가 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한 것입니다.ꡓ


  ꡒ알고서 왕명을 어겼으니, 너는 죽어 마땅치 않겠느냐?ꡓ


  ꡒ제가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ꡓ


  ꡒ이제 상감께서 너희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하시니 마음을 돌리지 않겠느냐?ꡓ


  ꡒ순경에 있을 때에는 왕을 섬기다가 역경에 처해서는 왕명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겁한 자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에만 천주의 진리를 따르고 어려운 세월을 당하면 그것을 버리는 자는 그보다 더 비겁한 자입니다. 관장님은 법대로 처리하십시오. 저는 제 신념을 따라 행동하겠습니다.ꡓ


  ꡒ저놈은 아주 간사하다. 저놈은 사교의 두목 중의 하나일 것이 틀림없다. 그래, 네가 법대로 다스려지기를 원한다니 네 원을 풀어 주마.ꡓ


  그러고 나서 관장은 베드로에게 가장 엄한 고문을 가하라고 명령하였다. 팔을 뒤로 결박하고 팔과 등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놓고는, 포졸 하나가 그것을 다룰 참이었다. 그뿐 아니라 말총으로 꼬은 밧줄을 가지고 양무릎과 복숭아뼈 있는 데를 묶어 놓고는 양쪽 정강이 사이에 굵다란 몽둥이를 열시자로 끼워 놓고서 두 사람이 각각 한쪽 몽둥이 끝을 타고 앉아 내리누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가 정신을 잃자 결박을 좀 늦추었으나 의식을 회복한 후 고문은 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절대 배교의 말을 하지 않고 아무런 밀고도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관장은 일단 심문을 멈추게 하였다.


  밤이 이슥해지자 그를 전주로 압송해 온 포졸들의 우두머리가 찾아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ꡒ관장은 이여진이 당신 집에 있던가, 당신 집에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를 당신은 알고 있는 걸로 확신하고 있단 말이오. 그래서 내일은 이일 때문에 무서운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내 생각에는 솔직하게 사실을 고해 바치고 목숨을 건지는 것이 나을 것 같소.ꡓ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ꡒ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오. 그 사람을 보면 혹시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내 아버지도 아니고 형제도 아닌데야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을 숨기느라고 목숨을 잃겠소. 하지만 당신이 내 집에 가 보았으니 사정을 알 게 아니오?ꡓ


  ꡒ나는 이제 더 할 말이 없소마는 당신은 분명히 여기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을 거요. 그러니까 아는 대로만 말하시오. 또 한가지는 당신 집에서 책을 한 권도 압수해 오지 않았다고 나를 비난하오. 나는 당신 집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대답했소. 여기 대해서도 문초을 할테니 책은 가진 것이 없었다고 딱 잘라 대답하시오.ꡓ


  이러고 나서 그는 신베드로의 목에 씌운 큰 칼을 매달아 덜 고통스럽게 하여 주었다. 그리고는 간수를 불러서 상처가 이러니 깨끗하게 다루도록 하라고 이르며, 그 신세를 잊지 않겠노라고 덧붙여 말하였다. 베드로는 많은 위로를 받았고 그렇게 동정을 표해 주는 것을 보고 몹시 감격하였다.


  이튿날, 관장은 베드로를 데리고 오도록 한 다음 이여진에 대하여 물었다. 그는 절대로 알지못하는 사람이라 대답하였다. 이에 더욱 심한 고문이 그에게 가해졌다. 고문을 가하는 몽둥이가 부러졌으나 그의 마음은 신앙의 힘을 입어 이를 버틸 수 있었다.


  저녁 때가 되어 결박이 풀려지고 옥으로 돌아왔으나 베드로가 밥을 먹지 못하자 술 한 잔을 갖다 주며 그것으로 하룻밤을 지내도록 하였다. 아침이 되자 나졸들이 다시 그를 데리러 왔다. 그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아무런 조심성과 사정도 없이 베드로를 지렛대에 말태우듯 올려 메다가 관장 앞에 내려놓으니, 관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ꡒ자, 여기 네가 쓴 책이 많이 보이지. 너는 3도의 두목으로 다른 교인들에게 많은 서적을 공급했다고 지목받는 터이다. 그러니 솔직히 자백하고 형벌중에 죽으려고 고집을 부리지 말라.ꡓ


  이 문초중에 베드로는 길에서 만난 교우들이 일러준 대로 그들에게 책 몇 권을 베껴 주었다고 고백하고 자신의 집에 책이 없었다는 것은 집을 뒤진 포졸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ꡒ제가 그 책들을 베낀 것은 그 교우들 집에서 거기있는 낡은 책을 보고 베낀 것입니다ꡓ하고 해명했다.


  관장은 ꡒ거짓말 마라. 너는 사실을 죄다 말하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끝장을 내고야 말겠다.ꡓ하고 을러메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고문을 더 당하지는 않고 이내 옥으로 다시 끌려 들어갔다.


  이튿날, 베드로가 다시 끌려 나가자 관장은 성난 목소리로 질책하였고 교우들은 그들의 집에서 나온 많은 상본과 성물들이 베드로에게서 나온 것처럼 뒤집어씌우려고 하였다. 베드로는 ꡒ전에들은 이야기입니다마는 1801년 이후 어떤 사람이 그 당시에 처형된 사람의 집을 샀는데 그 집을 헐다가 담 속에서 이 물건들을 발견했답니다. 그 책을 이 사람 저 사람이 나누어 가지고 여기저기로 흩어졌더니 이 책들은 틀림없이 거기서 나왔을 것입니다.ꡓ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ꡒ이 모양으로 하다가는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하겠으니, 우선 그 신자들을 고문하라.ꡓ


  이리하여 형리들은 교우들에게 줄톱질을 시작하였고, 교우들은 또 전보다 더 강력하게 베드로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시작하였다. 형세가 이러하니 형리들이 그에게 사정을 둘 리 없었다. 


  ꡒ이래도 이실직고하지 않을테냐! 이 물건들이 처음에 누구 손에 들어갔고, 다음에는 누구에게 넘어갔느냐?ꡓ


  ꡒ1801년에 살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고, 혹 남아 있는 사람은 교우들이 아닙니다.ꡓ


  ꡒ누가 처음에 그 물건들을 받아 가지고 누구에게 넘겨 주었느냐 말이다!ꡓ


  ꡒ모릅니다. 이 물건이나 다른 모든 물건은 주인이 죽었거나, 거저 주었거나 샀거나 해서 주인이 바뀌었을 겁니다. 누구의 손에서 누구의 손으로 넘어갔는지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ꡓ


  관장은 서리에게 명단을 하나주고, 그것을 부르는 대로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그에게 대답하라고 하였다. 그는 아는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이고 모두 모른다고만 대답하였다. 이윽고 관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ꡒ야소도 모르느냐?ꡓ


  그는 이번에도 역시 모른다고 고개짓을 하였다. 저녁이 되어 결박을 풀어 주는데 밧줄이 살속으로 들어가서 풀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뽑아 내는 동안에 베드로는 까무러치기도 하였다. 그가 감옥으로 들어와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것을 보자, 포졸들은 큰 칼에 머리를 얹어 놓고 몸을 뉘어 주었다.


  베드로는 관청에서 듣던 무서운 소리가 귀에 쟁쟁하고 몸이 괴로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문득 정신이 들면서 ꡒ야소도 모르느냐ꡓ고 다그치던 관장의 말이 생각났다. 그때 비로소 예수의 성명을 표시하는 한자를 조선 말로는 ‘야소’라고 발음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벌벌떨며 괴로워하고 이 일을 한탄하기 시작하였다.


  이날 간수들이 와서 식사를 하라고 강요하였으나, 이제는 죽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풀이 죽고 실망이 되어 밥을 갖다 주는 사람들을 와락 밀어젖혔다. 그리고 나서 마음을 좀 위로하여 보려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비록 관장이 예수를 가리키려 했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아소‘라고 들렸는데, 천주께서 용서하여 주실 것인가?’ 마침내 그는 이튿날 이 말을 취소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내 군수 앞에 나갔기 때문에 취소를 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이 일에 대한 뉘우침은 뼈 속까지 사무쳤다.


  이튿날인 5월 5일에는 군수앞에 인도되었다. 그 자리에는 무주, 고산, 익산 고을 군수들이 있었는데, 익산 군수가 난간 옆으로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ꡒ당신이 만일 건전한 윤리의 법칙을 따라 행동하고 싶다면 공자와 맹자와 그 밖의 성현들의 책을 읽으면 넉넉할 터인데, 왕명을 거역하여 외국교를 따르다가 붙잡혔으니 죽어 마땅한 죄가 아니겠소?ꡓ그의 말은 자상하였으며, 이에 베드로는 더 공손히 대답하였다. ꡒ나라에서는 우리교가 외국에서 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금합니다. 그러나 관장님들 댁에는 어딜 가나 책이며 옷이며 세간 등 외국에서 온 물건들을 볼 수 있습니다.ꡓ


  ꡒ그런 물건은 어느 나라에서나 쓰는 것이니 금할 이유가 도무지 없소. 그러나 교로 말하면 공자와 맹자로 넉넉하지 않소?ꡓ


  ꡒ육신이 병들었을 때에 우리나라 약을 써서 효력이 없으면, 중국에서 들어온 약을 써서 가끔 병을 고치게 됩니다. 사람은 각기 일곱 가지 죄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영혼의 병입니다. 그런데 우리 종교 없이는 이것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장님들이 아시다시피, 이런 성현들이나 그들과 비슷한 다른 이들의 사당에서는 밥 한 그릇이나 고기 한 덩어리를 가지고 무지무지한 욕설까지 퍼부어 가며 싸웁니다. 그들은 이 성현들의 가르침이나 행한 것을 별로 아랑곳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끔 이 성현들을 욕되게 하며, 또 그 사당은 덕을 가르치기는 고사하고 혼란을 조장하는 배움터가 됩니다. 외면만으로라도 자제를 해서 체면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은 몇이 되지 않고, 또 그들이라 할지라도 마음속은 역시 남 못지않게 악합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 교는 우선 마음속을 다스리고 칠극과 천주 십계로 안과 밖을 모두 지도합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우리 교는 공자와 다른 성현들의 가르치심을 완성한것입니다.ꡓ


  ꡒ그대의 말이 틀림이 없다면 그 교가 사교일 리 없겠지마는, 그러나 상감께서 금하시니 그러면 상감께서 잘못이라고 말할 터인가?ꡓ


  ꡒ학자들의 가르침과 더불어 천주의 가르치심이 모습을 나타낸 지금, 참된 것과 거짓 것의 구별을 하게 될 때까지 상감께서 그것을 일시적으로 금하시는 것이 잘못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유일한 진교인 우리 교를 따르는 사람도 잘못일 수는 없습니다. 교가 참된 것이었으니 그들은 옳았습니다. 만일 교가 거짓이었다면 그들이 잘못이었을 것입니다.ꡓ


  이렇게 베드로는 천주교가 올바른 교임을 주장하면서,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은 영혼의 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며칠 후에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니, 교우들도 모두 거기 모여 있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제사와 위패에 관한 감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ꡒ위패를 모셨느냐?ꡓ


  ꡒ위패는 없습니다.ꡓ


  ꡒ어째서 없는고?ꡓ


  ꡒ몰락한 가정에 독신으로 남아 집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신세라, 모실 자리도 없어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ꡓ


  ꡒ그럼, 조상에게 제를 드리지 않느냐?ꡓ


  ꡒ제삿날이 되면 그저 음식이나 제 처지에 맞게 준비해 가지고 이웃 사람과 나누어 먹습니다.ꡓ


  ꡒ그러면 꿇어 엎디어 절도 하지 않고 먹는단 말이냐?ꡓ


  ꡒ절은 하지 않습니다.ꡓ


  이렇게 그가 대답하자, 감사는 더 이상 신문을 하지 않고 다시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이튿날 신 베드로가 다시 곤장을 맞고 옥으로 끌려갔을 때에 관장은 그의 상태를 보고 부하 관리에게 말하여 큰 칼을 벗기고 그보다 가벼운 작은 칼을 씌우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처음으로 큰 칼을 벗게 되었다. 다리는 하도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지도 밥을 먹지도 못하였다. 상처는 곪아서 견딜 수 없는 악취를 풍기었으며, 더구나 방은 벌레와 이가 우글거려 아무도 그에게 근접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신태보(베드로)는 체포를 당한 후 이렇게 줄곧 고문으로 인한 고통을 겪으면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훗날 샤스땅 신부의 요청으로 그가 옥중에서 쓴 수기에 잘 나타나 있다.


  전주의 옥중에서 베드로가 육신의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조선에는 모방, 샤스땅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였고, 이들과 조선 교우들의 활동으로 교회는 부흥되어 갔다. 그러나 조정에는 항상 박해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반대 세력을 척결하기 위하여 표면상으로 천주교 탄압을 내세우고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기해 교난은 전주의 옥에도 그 여파를 몰고 왔다. 옥중에 있던 베드로는 사형의 소식을 들은 후, 생명에 대한 애착을 용감한 신앙심으로 이겨내고 순교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839년 5월 29일 전주의 장터에서 참수를 당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ata2020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신태보(베드로)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신태보(베드로)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입교하였는지, 입교한 초기에 그의 신앙 생활이 어떠하였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그의 집이 서울에서 1백 4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니, 아마도 경기도 어디에서 생활하였던 듯하다.

      실제로 베드로의 행적이 조선 천주교회 역사에 나타나는 것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부터이다. 그는 친척인 이여진(요한)과 가깝게 지내면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기 위하여 수차 서울을 내왕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한 분의 목자인 주신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비밀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지 4년 후인 1805년 이여진(요한)이 밀고되어 체포를 당하자, 신태보는 서울로 달려가 청탁을 하고 뇌물도 써서 요한을 석방시켰다. 이렇게 되어 그 후 요한은 북경을 왕래하면서 조선에 성직자를 모셔 오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신 베드로는 북경을 왕래하는 교우들을 위하여 여비를 마련하는 한편, 교회 서적을 베끼고 신자들을 보살펴 주며, 신자들 서로 간의 왕래를 도와 주면서 교회 재건에 힘쓰기도 하였다. 이렇게 재건 운동에 헌신하고 난 베드로는 그 이상 교회 사업에 참여하지 않고 이제는 자신의 구령에만 몰두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여러 곳으로 다니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현 경상북도 우동면 신흥리)에 자리잡고, 다른 교우들과는 별로 상종도 아니하면서 살고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 그가 교회서적을 많이 베낀 탓으로 박해 때에는 자연히 주목을 받게 되어 있었다.

      1827년, 정해 교난의 박해가 널리 번져 나간다는 것을 안 그는 집안 식구들과 함께 안전한 곳에 숨어 있을 준비를 시작하였다. 4월 22일, 모든 준비가 끝나고 길을 떠나려고 하였을 때 전주의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베드로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전주 감영에서 발행한 체포 영장을 보고 처음에는 따라가기를 거절하였으나, 끝내 그들과 함께 본관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다. 본관은 포졸들의 서류를 검토하고 나서 베드로를 인도하였다. 전주의 포졸들은 상주의 관헌들과 함께 다시 베드로의 집으로 가서 법 절차에 따라 그를 체포하였다.

      전주로 가던 도중, 포졸들은 어느 마을에 들러 위협과 완력으로 술과 밥을 얻어 먹으며 가난한 백성들에게 폐를 끼쳤다. 그런 다음 길을 떠난 4일째 되던 날에는 전주 땅 근처에서 쉬게 되었다. 거기서 밤을 지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마소를 탄 천주교인들이 포졸들에게 호송되어 왔다. 그들은 문초를 당하는 중에 교회서적을 가지고 있노라고 자백한 사람들이었다. 이미 고문을 당하여 스스로 걸을 수 없는 그들은 이렇게 마소에 태워져 관가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포졸들이 술을 마시고 떠드는 사이에 그 교우들에게 정세를 물어 보았다. 여기에서 그는 그 교우들이 바친 책 중에는 이미 자기가 손수 베낀 교회서적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사실을 더 오래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이튿날 그는 전주 감영에 들어가 관장 앞에 출두하였다.

      관장은 베드로에게 우선 다음과 같이 물었다.  

      ꡒ네가 3도를 돌아다니며 사교를 전파하여 백성들을 현혹시켰다는 것이 진실이냐?ꡓ

      ꡒ저는 사교를 믿지 않고 다만 천주의 교를 따를 뿐입니다.ꡓ

      ꡒ저놈이 사교라는 말을 하기가 싫어서 천주의 교라고 하는구나. 그래, 천주의 교를 믿으면서 그 교가 엄금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느냐?ꡓ

      ꡒ어떻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제가 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한 것입니다.ꡓ

      ꡒ알고서 왕명을 어겼으니, 너는 죽어 마땅치 않겠느냐?ꡓ

      ꡒ제가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ꡓ

      ꡒ이제 상감께서 너희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하시니 마음을 돌리지 않겠느냐?ꡓ

      ꡒ순경에 있을 때에는 왕을 섬기다가 역경에 처해서는 왕명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겁한 자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에만 천주의 진리를 따르고 어려운 세월을 당하면 그것을 버리는 자는 그보다 더 비겁한 자입니다. 관장님은 법대로 처리하십시오. 저는 제 신념을 따라 행동하겠습니다.ꡓ

      ꡒ저놈은 아주 간사하다. 저놈은 사교의 두목 중의 하나일 것이 틀림없다. 그래, 네가 법대로 다스려지기를 원한다니 네 원을 풀어 주마.ꡓ

      그러고 나서 관장은 베드로에게 가장 엄한 고문을 가하라고 명령하였다. 팔을 뒤로 결박하고 팔과 등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놓고는, 포졸 하나가 그것을 다룰 참이었다. 그뿐 아니라 말총으로 꼬은 밧줄을 가지고 양무릎과 복숭아뼈 있는 데를 묶어 놓고는 양쪽 정강이 사이에 굵다란 몽둥이를 열시자로 끼워 놓고서 두 사람이 각각 한쪽 몽둥이 끝을 타고 앉아 내리누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가 정신을 잃자 결박을 좀 늦추었으나 의식을 회복한 후 고문은 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절대 배교의 말을 하지 않고 아무런 밀고도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관장은 일단 심문을 멈추게 하였다.

      밤이 이슥해지자 그를 전주로 압송해 온 포졸들의 우두머리가 찾아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ꡒ관장은 이여진이 당신 집에 있던가, 당신 집에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를 당신은 알고 있는 걸로 확신하고 있단 말이오. 그래서 내일은 이일 때문에 무서운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내 생각에는 솔직하게 사실을 고해 바치고 목숨을 건지는 것이 나을 것 같소.ꡓ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ꡒ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오. 그 사람을 보면 혹시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내 아버지도 아니고 형제도 아닌데야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을 숨기느라고 목숨을 잃겠소. 하지만 당신이 내 집에 가 보았으니 사정을 알 게 아니오?ꡓ

      ꡒ나는 이제 더 할 말이 없소마는 당신은 분명히 여기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을 거요. 그러니까 아는 대로만 말하시오. 또 한가지는 당신 집에서 책을 한 권도 압수해 오지 않았다고 나를 비난하오. 나는 당신 집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대답했소. 여기 대해서도 문초을 할테니 책은 가진 것이 없었다고 딱 잘라 대답하시오.ꡓ

      이러고 나서 그는 신베드로의 목에 씌운 큰 칼을 매달아 덜 고통스럽게 하여 주었다. 그리고는 간수를 불러서 상처가 이러니 깨끗하게 다루도록 하라고 이르며, 그 신세를 잊지 않겠노라고 덧붙여 말하였다. 베드로는 많은 위로를 받았고 그렇게 동정을 표해 주는 것을 보고 몹시 감격하였다.

      이튿날, 관장은 베드로를 데리고 오도록 한 다음 이여진에 대하여 물었다. 그는 절대로 알지못하는 사람이라 대답하였다. 이에 더욱 심한 고문이 그에게 가해졌다. 고문을 가하는 몽둥이가 부러졌으나 그의 마음은 신앙의 힘을 입어 이를 버틸 수 있었다.

      저녁 때가 되어 결박이 풀려지고 옥으로 돌아왔으나 베드로가 밥을 먹지 못하자 술 한 잔을 갖다 주며 그것으로 하룻밤을 지내도록 하였다. 아침이 되자 나졸들이 다시 그를 데리러 왔다. 그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아무런 조심성과 사정도 없이 베드로를 지렛대에 말태우듯 올려 메다가 관장 앞에 내려놓으니, 관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ꡒ자, 여기 네가 쓴 책이 많이 보이지. 너는 3도의 두목으로 다른 교인들에게 많은 서적을 공급했다고 지목받는 터이다. 그러니 솔직히 자백하고 형벌중에 죽으려고 고집을 부리지 말라.ꡓ

      이 문초중에 베드로는 길에서 만난 교우들이 일러준 대로 그들에게 책 몇 권을 베껴 주었다고 고백하고 자신의 집에 책이 없었다는 것은 집을 뒤진 포졸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ꡒ제가 그 책들을 베낀 것은 그 교우들 집에서 거기있는 낡은 책을 보고 베낀 것입니다ꡓ하고 해명했다.

      관장은 ꡒ거짓말 마라. 너는 사실을 죄다 말하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끝장을 내고야 말겠다.ꡓ하고 을러메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고문을 더 당하지는 않고 이내 옥으로 다시 끌려 들어갔다.

      이튿날, 베드로가 다시 끌려 나가자 관장은 성난 목소리로 질책하였고 교우들은 그들의 집에서 나온 많은 상본과 성물들이 베드로에게서 나온 것처럼 뒤집어씌우려고 하였다. 베드로는 ꡒ전에들은 이야기입니다마는 1801년 이후 어떤 사람이 그 당시에 처형된 사람의 집을 샀는데 그 집을 헐다가 담 속에서 이 물건들을 발견했답니다. 그 책을 이 사람 저 사람이 나누어 가지고 여기저기로 흩어졌더니 이 책들은 틀림없이 거기서 나왔을 것입니다.ꡓ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ꡒ이 모양으로 하다가는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하겠으니, 우선 그 신자들을 고문하라.ꡓ

      이리하여 형리들은 교우들에게 줄톱질을 시작하였고, 교우들은 또 전보다 더 강력하게 베드로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시작하였다. 형세가 이러하니 형리들이 그에게 사정을 둘 리 없었다. 

      ꡒ이래도 이실직고하지 않을테냐! 이 물건들이 처음에 누구 손에 들어갔고, 다음에는 누구에게 넘어갔느냐?ꡓ

      ꡒ1801년에 살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고, 혹 남아 있는 사람은 교우들이 아닙니다.ꡓ

      ꡒ누가 처음에 그 물건들을 받아 가지고 누구에게 넘겨 주었느냐 말이다!ꡓ

      ꡒ모릅니다. 이 물건이나 다른 모든 물건은 주인이 죽었거나, 거저 주었거나 샀거나 해서 주인이 바뀌었을 겁니다. 누구의 손에서 누구의 손으로 넘어갔는지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ꡓ

      관장은 서리에게 명단을 하나주고, 그것을 부르는 대로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그에게 대답하라고 하였다. 그는 아는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이고 모두 모른다고만 대답하였다. 이윽고 관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ꡒ야소도 모르느냐?ꡓ

      그는 이번에도 역시 모른다고 고개짓을 하였다. 저녁이 되어 결박을 풀어 주는데 밧줄이 살속으로 들어가서 풀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뽑아 내는 동안에 베드로는 까무러치기도 하였다. 그가 감옥으로 들어와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것을 보자, 포졸들은 큰 칼에 머리를 얹어 놓고 몸을 뉘어 주었다.

      베드로는 관청에서 듣던 무서운 소리가 귀에 쟁쟁하고 몸이 괴로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문득 정신이 들면서 ꡒ야소도 모르느냐ꡓ고 다그치던 관장의 말이 생각났다. 그때 비로소 예수의 성명을 표시하는 한자를 조선 말로는 ‘야소’라고 발음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벌벌떨며 괴로워하고 이 일을 한탄하기 시작하였다.

      이날 간수들이 와서 식사를 하라고 강요하였으나, 이제는 죽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풀이 죽고 실망이 되어 밥을 갖다 주는 사람들을 와락 밀어젖혔다. 그리고 나서 마음을 좀 위로하여 보려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비록 관장이 예수를 가리키려 했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아소‘라고 들렸는데, 천주께서 용서하여 주실 것인가?’ 마침내 그는 이튿날 이 말을 취소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내 군수 앞에 나갔기 때문에 취소를 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이 일에 대한 뉘우침은 뼈 속까지 사무쳤다.

      이튿날인 5월 5일에는 군수앞에 인도되었다. 그 자리에는 무주, 고산, 익산 고을 군수들이 있었는데, 익산 군수가 난간 옆으로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ꡒ당신이 만일 건전한 윤리의 법칙을 따라 행동하고 싶다면 공자와 맹자와 그 밖의 성현들의 책을 읽으면 넉넉할 터인데, 왕명을 거역하여 외국교를 따르다가 붙잡혔으니 죽어 마땅한 죄가 아니겠소?ꡓ그의 말은 자상하였으며, 이에 베드로는 더 공손히 대답하였다. ꡒ나라에서는 우리교가 외국에서 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금합니다. 그러나 관장님들 댁에는 어딜 가나 책이며 옷이며 세간 등 외국에서 온 물건들을 볼 수 있습니다.ꡓ

      ꡒ그런 물건은 어느 나라에서나 쓰는 것이니 금할 이유가 도무지 없소. 그러나 교로 말하면 공자와 맹자로 넉넉하지 않소?ꡓ

      ꡒ육신이 병들었을 때에 우리나라 약을 써서 효력이 없으면, 중국에서 들어온 약을 써서 가끔 병을 고치게 됩니다. 사람은 각기 일곱 가지 죄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영혼의 병입니다. 그런데 우리 종교 없이는 이것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장님들이 아시다시피, 이런 성현들이나 그들과 비슷한 다른 이들의 사당에서는 밥 한 그릇이나 고기 한 덩어리를 가지고 무지무지한 욕설까지 퍼부어 가며 싸웁니다. 그들은 이 성현들의 가르침이나 행한 것을 별로 아랑곳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끔 이 성현들을 욕되게 하며, 또 그 사당은 덕을 가르치기는 고사하고 혼란을 조장하는 배움터가 됩니다. 외면만으로라도 자제를 해서 체면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은 몇이 되지 않고, 또 그들이라 할지라도 마음속은 역시 남 못지않게 악합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 교는 우선 마음속을 다스리고 칠극과 천주 십계로 안과 밖을 모두 지도합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우리 교는 공자와 다른 성현들의 가르치심을 완성한것입니다.ꡓ

      ꡒ그대의 말이 틀림이 없다면 그 교가 사교일 리 없겠지마는, 그러나 상감께서 금하시니 그러면 상감께서 잘못이라고 말할 터인가?ꡓ

      ꡒ학자들의 가르침과 더불어 천주의 가르치심이 모습을 나타낸 지금, 참된 것과 거짓 것의 구별을 하게 될 때까지 상감께서 그것을 일시적으로 금하시는 것이 잘못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유일한 진교인 우리 교를 따르는 사람도 잘못일 수는 없습니다. 교가 참된 것이었으니 그들은 옳았습니다. 만일 교가 거짓이었다면 그들이 잘못이었을 것입니다.ꡓ

      이렇게 베드로는 천주교가 올바른 교임을 주장하면서,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은 영혼의 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며칠 후에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니, 교우들도 모두 거기 모여 있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제사와 위패에 관한 감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ꡒ위패를 모셨느냐?ꡓ

      ꡒ위패는 없습니다.ꡓ

      ꡒ어째서 없는고?ꡓ

      ꡒ몰락한 가정에 독신으로 남아 집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신세라, 모실 자리도 없어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ꡓ

      ꡒ그럼, 조상에게 제를 드리지 않느냐?ꡓ

      ꡒ제삿날이 되면 그저 음식이나 제 처지에 맞게 준비해 가지고 이웃 사람과 나누어 먹습니다.ꡓ

      ꡒ그러면 꿇어 엎디어 절도 하지 않고 먹는단 말이냐?ꡓ

      ꡒ절은 하지 않습니다.ꡓ

      이렇게 그가 대답하자, 감사는 더 이상 신문을 하지 않고 다시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이튿날 신 베드로가 다시 곤장을 맞고 옥으로 끌려갔을 때에 관장은 그의 상태를 보고 부하 관리에게 말하여 큰 칼을 벗기고 그보다 가벼운 작은 칼을 씌우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처음으로 큰 칼을 벗게 되었다. 다리는 하도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지도 밥을 먹지도 못하였다. 상처는 곪아서 견딜 수 없는 악취를 풍기었으며, 더구나 방은 벌레와 이가 우글거려 아무도 그에게 근접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신태보(베드로)는 체포를 당한 후 이렇게 줄곧 고문으로 인한 고통을 겪으면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훗날 샤스땅 신부의 요청으로 그가 옥중에서 쓴 수기에 잘 나타나 있다.

      전주의 옥중에서 베드로가 육신의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조선에는 모방, 샤스땅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였고, 이들과 조선 교우들의 활동으로 교회는 부흥되어 갔다. 그러나 조정에는 항상 박해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반대 세력을 척결하기 위하여 표면상으로 천주교 탄압을 내세우고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기해 교난은 전주의 옥에도 그 여파를 몰고 왔다. 옥중에 있던 베드로는 사형의 소식을 들은 후, 생명에 대한 애착을 용감한 신앙심으로 이겨내고 순교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839년 5월 29일 전주의 장터에서 참수를 당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