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여겸(崔汝謙) 마티아는 무장(茂長) 고을의 조그마한 반명(班名)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막연히 듣고 그것을 알기를 매우 원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내포 지방 남쪽에 있는 한산 고을에서 결혼하였다. 그는 미구에 그 근방에 천주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서 복음의 주요한 진리를 배운 다음 무장으로 돌아와, 대단한 열심으로 그것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신앙을 사방에 알게 하고 자기가 받은 은총을 전해 주기 위한 그의 열심과 신앙이 대단하여 많은 외교인을 입교시켰다. 고향에서 박해가 맹렬히 일어나자 최여겸 마티아는 한산 처가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수많은 교우가 거기서 붙잡혔는데, 그 중에는 그가 입교시킨 사람들이 28명이 끼여 있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이 그를 배반하여 관리들에게 그가 숨은 곳을 알려 주었다. 그는 4월 13일 붙잡혀 우선 한산 관아로 끌려가 본관 앞에서 신문을 당해야만 하였다. 관장은 여러번 그를 고문하였으나 소용이 없자, 감사에게 그의 체포를 보고하니, 감사는 그에게 칼을 씌워 무장 본관에게로 압송하라고 하였다. 또다시 새로운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그의 용기를 꺾을 수가 없게 되자, 관장은 어쩔 수가 없어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그를 이송하였는데, 거기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거의 80이 된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시므로 최여겸 마티아는 아무 유한 없이 죽기 위하여 어머니를 한 번 뵈러 갈 허가를 청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그를 매질로 죽이겠다고 위협하므로 그렇게 되면 자기 제헌(祭獻)에 혹시 부족한 것이 없을까 봐 걱정이 되어 여러날 동안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미구에 당신 종의 소원을 들어주시어 그가 충성된 증거자 한정흠(韓正欽) 스다니슬라오와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 곁으로 이송되기를 허락하셨다. 그들이 다시 모였을 때 최여겸 마티아의 기쁨과 그 용맹한 동료들의 기쁨은 매우 컸다. 마침내 형조에서 최종적인 선고가 내려졌고, 최여겸 마티아는 자기 고향인 무장 고을 지갑 장터로 압송되어 7월 19일(8월 27일) 39세의 나이로 참수당하였다.
여기에 같은 전라도의 몇몇 다른 증거자들의 이름을 덧붙이기로 하는데 이들에 대하연즌 자세한 사정이 남아 있지 않고, 또 그들이 순교한 정확한 날짜도 보존되어 있지 않으나, 같은 시기에 고톹을 당하였을 것이 거의 틀림 없다. 이들은 아래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화백, 이사람은 영광 고을의 양반이요 최여겸 마티아의 제자로 자기 고향에서 참수당하였다. 같은 최여겸 마티아의 조카로, 흔히 ‘금노’라고 불리는 최일안이란 사람은 영광스럽게 신앙을 증거한 후 전주에서 당한 형벌로 죽으니, 나이는 40세였다. 영광 고을 복산지의 양반으로 참수당한 오(吳)씨라는 교우, 끝으로 금산 고을 솔티에서 붙잡혀 전주에서 참수당한 원(元)씨라는 또 한 사람의 교우가 있었다.

최여겸(崔汝謙) 마티아는 무장(茂長) 고을의 조그마한 반명(班名)을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막연히 듣고 그것을 알기를 매우 원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내포 지방 남쪽에 있는 한산 고을에서 결혼하였다. 그는 미구에 그 근방에 천주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서 복음의 주요한 진리를 배운 다음 무장으로 돌아와, 대단한 열심으로 그것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신앙을 사방에 알게 하고 자기가 받은 은총을 전해 주기 위한 그의 열심과 신앙이 대단하여 많은 외교인을 입교시켰다. 고향에서 박해가 맹렬히 일어나자 최여겸 마티아는 한산 처가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수많은 교우가 거기서 붙잡혔는데, 그 중에는 그가 입교시킨 사람들이 28명이 끼여 있었다. 그들 중 몇 사람이 그를 배반하여 관리들에게 그가 숨은 곳을 알려 주었다. 그는 4월 13일 붙잡혀 우선 한산 관아로 끌려가 본관 앞에서 신문을 당해야만 하였다. 관장은 여러번 그를 고문하였으나 소용이 없자, 감사에게 그의 체포를 보고하니, 감사는 그에게 칼을 씌워 무장 본관에게로 압송하라고 하였다. 또다시 새로운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그의 용기를 꺾을 수가 없게 되자, 관장은 어쩔 수가 없어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그를 이송하였는데, 거기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거의 80이 된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시므로 최여겸 마티아는 아무 유한 없이 죽기 위하여 어머니를 한 번 뵈러 갈 허가를 청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그를 매질로 죽이겠다고 위협하므로 그렇게 되면 자기 제헌(祭獻)에 혹시 부족한 것이 없을까 봐 걱정이 되어 여러날 동안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미구에 당신 종의 소원을 들어주시어 그가 충성된 증거자 한정흠(韓正欽) 스다니슬라오와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 곁으로 이송되기를 허락하셨다. 그들이 다시 모였을 때 최여겸 마티아의 기쁨과 그 용맹한 동료들의 기쁨은 매우 컸다. 마침내 형조에서 최종적인 선고가 내려졌고, 최여겸 마티아는 자기 고향인 무장 고을 지갑 장터로 압송되어 7월 19일(8월 27일) 39세의 나이로 참수당하였다.
여기에 같은 전라도의 몇몇 다른 증거자들의 이름을 덧붙이기로 하는데 이들에 대하연즌 자세한 사정이 남아 있지 않고, 또 그들이 순교한 정확한 날짜도 보존되어 있지 않으나, 같은 시기에 고톹을 당하였을 것이 거의 틀림 없다. 이들은 아래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화백, 이사람은 영광 고을의 양반이요 최여겸 마티아의 제자로 자기 고향에서 참수당하였다. 같은 최여겸 마티아의 조카로, 흔히 ‘금노’라고 불리는 최일안이란 사람은 영광스럽게 신앙을 증거한 후 전주에서 당한 형벌로 죽으니, 나이는 40세였다. 영광 고을 복산지의 양반으로 참수당한 오(吳)씨라는 교우, 끝으로 금산 고을 솔티에서 붙잡혀 전주에서 참수당한 원(元)씨라는 또 한 사람의 교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