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권(베드로)

 

김대권(金大權) 베드로는 청양고을 수단이에 사는 집안에 태어났는데, 보령고을 청라동으로 이사해 와서 사는 터였다. 그는 1816년에 순교한 김화준 야고보의 형으로 어렸을 때에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는 하였으나 별로 수계는 하지 않다가 양친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천주의 각별한 은혜로 교회의 모든 본분을 확실히 지키게 되었다. 그 내력은 이러하다. 그가 공주고을에 가서 살며 어떤 옹기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 때, 아내와의 언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하루는 부부가 모두 성이 잔뜩나서 베드로는 안방에서 자고 아내는 부엌에서 눈을 좀 붙여볼까 하였다. 베드로는 막 잠이 들었는데 그때 마침 천주께서 부르시는 것같아 벌떡 일어나 보니 호랑이가 아내를 물고 달아나는 참이었다. 베드로는 즉시 소시소리 지르며 호랑이를 쫓아가 아내를 구할 수는 있었으나 아내는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었다. 이튿날 김 베드로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번 일은 우리가 불화하기 때문에 생긴 것인데 천주께서 당신의 생명을 건질 수 있게 해 주셨으니 우선 감사를 올려야 하겠고 또 이 지엄하신 교훈을 할 수 있는대로 잘 이용해서 이제부터는 우리 잘못을 고치고 착한 일을 하면서 죽을때까지 화목하게 살아가야 하겠소.” 그들은 이렇게 결심한 것을 잘 지켜 그떄부터는 완전히 화목한 가운데 살아 나갔다. 주일마다 김 베드로는 자기 집안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많이 권면하고, 가르치고 하였다. 예수성탄 축일에는 언제나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한 마리 앞에 와 앉아서 으르렁 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김 베드로는 별로 겁내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보통 때나 마찬가지로 기도를 드리다가 해가 돋아 오르자 천천히 집으로 내려오고, 호랑이는 또 제 굴을 찾아갔다. 사순절(四旬節)때에는 여느 때보다도 더 열심으로 기도와 묵상을 하고 하루에 한끼만 먹는데 그것도 밥 반사발을 찬 물에 말아 아무 반찬도 없이 그저 소금을 조금 찍어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체력은 이렇듯 심한 고신극기에도 조금도 쇠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에 진정으로 순교할 원을 품고 있었으며 1816년에 동생이 처형된 후 그의 머리를 벨때에 사용한 나무토막을 집에 가져다가 밤에 가끔 그 위에 턱을 고이곤 했으니 그것은 죽음을 더 절실히 생각하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그 후 김대권 베드로는 고산(高山)고을로 이사해 갔다. 1827년에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른 교우들에게는 피신하라고 권고하면서도 자기는 천주의 뜻이 드러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백명도 더 되는 포졸들이 그가 사는 마을을 포위하고 가엾은 신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김 베드로는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웃는 얼굴로 그들 앞으로 마주나가 오라로 결박되어 고산(高山) 아문(衙門)으로 압송되었다. 김 베드로는 무슨 잔치에라도 가는 것 같았다. “네가 그 사교를 믿는단 말이냐?” 하고 관원이 물으니 김 베드로는 “ 저는 절대로 사교(邪敎)를 믿지 않고 다만 하늘과 땅의 참 천주를 공경할 뿐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목에 칼을 쓰고 전주(全州)관장에게로 압송되어 갔는데 관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너도 임금님과 관장들이 금하시는 저 사교(邪敎)를 믿는다는 말이냐? 천주를 배반하면 너와 네 자식들을 놓아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다.” 이때에 베드로는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아래와 같은 훌륭한 대답을 하였다고 목격한 증인들이 전하고 있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살과 뼈에 사무쳐 있어서 사지를 자르면 그 하나 하나에 이 생각이 배어 있고, 뼈를 부수면 뼈 한 조각 한 조각에 그것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안됩니다. 만번 안될 말씀입니다.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김 베드로는 전에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은 것처럼 관원들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관장(官長)은 김대권 베드로가 이렇게 답변하는 것을 듣고 화가 치밀어 베드로의 옷을 벗기고 할 수 있는대로 혹독하게 매질하라고 명령하였다. 몸에선 피가 시냇물 흐르듯 하는데 김 베드로는 열심으로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얼굴에는 여전히 웃는 빛과 기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베드로는 거기서 다시 옆방으로 옮겨가 포졸들과 하인들에게서 더욱 심한 형벌을 당해야 하였으나 그의 결심은 확고부동하였다. 이튿날 다시 관장앞으로 불려나가니 관장은 천주교 서적을 갖다 바치고, 같은 교우들의 이름을 실토하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하자 관장은 꼬챙이로 찌르는 형벌을 세 차례나 가하게 하였다. 이 혹독한 형벌을 받는 동안에 김 베드로는 까무러쳐서 다시 옥에 갇혔는데 한참만에 정신이 들어 제몸이 온통 상한 것을 보고는 “이것으로 천주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통회와 감사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포졸들은 그와 함께 잡혀 온 그의 아들을 아버지 앞에 데려다가 그 목에 칼을 겨누면서 즉시 배교하지 않으면 아들의 목을 찌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 아들이 이런 일로 목이 잘리면 이 애에게나 내게나 큰 영광이 될 것이니 절대로 배교는 못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결국 그의 아들은 귀양가고 말았다. 관장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베드로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여 보았으나 여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마니 여러 차례에 걸쳐 주뢰를 틀게 한 후 감사에게로 보냈다. 바로 그 날과 그 이튿날 감사는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든 나졸 80명을 거느리고 앉아 다시 문초를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고문을 당하는 중에도 베드로는 전과 다름없이 꿋꿋한 의지와 평온한 기색을 잃지 않고 주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며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은혜를 다만 머리털 한 가닥 만큼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마침내 관장은 그의 마음을 굽힐 수가 없음을 깨닫고 다른 증거자들과 함께 다시 옥에 가두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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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김대권(金大權) 베드로는 청양고을 수단이에 사는 집안에 태어났는데, 보령고을 청라동으로 이사해 와서 사는 터였다. 그는 1816년에 순교한 김화준 야고보의 형으로 어렸을 때에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는 하였으나 별로 수계는 하지 않다가 양친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천주의 각별한 은혜로 교회의 모든 본분을 확실히 지키게 되었다. 그 내력은 이러하다. 그가 공주고을에 가서 살며 어떤 옹기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 때, 아내와의 언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하루는 부부가 모두 성이 잔뜩나서 베드로는 안방에서 자고 아내는 부엌에서 눈을 좀 붙여볼까 하였다. 베드로는 막 잠이 들었는데 그때 마침 천주께서 부르시는 것같아 벌떡 일어나 보니 호랑이가 아내를 물고 달아나는 참이었다. 베드로는 즉시 소시소리 지르며 호랑이를 쫓아가 아내를 구할 수는 있었으나 아내는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었다. 이튿날 김 베드로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번 일은 우리가 불화하기 때문에 생긴 것인데 천주께서 당신의 생명을 건질 수 있게 해 주셨으니 우선 감사를 올려야 하겠고 또 이 지엄하신 교훈을 할 수 있는대로 잘 이용해서 이제부터는 우리 잘못을 고치고 착한 일을 하면서 죽을때까지 화목하게 살아가야 하겠소.” 그들은 이렇게 결심한 것을 잘 지켜 그떄부터는 완전히 화목한 가운데 살아 나갔다. 주일마다 김 베드로는 자기 집안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많이 권면하고, 가르치고 하였다. 예수성탄 축일에는 언제나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한 마리 앞에 와 앉아서 으르렁 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김 베드로는 별로 겁내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보통 때나 마찬가지로 기도를 드리다가 해가 돋아 오르자 천천히 집으로 내려오고, 호랑이는 또 제 굴을 찾아갔다. 사순절(四旬節)때에는 여느 때보다도 더 열심으로 기도와 묵상을 하고 하루에 한끼만 먹는데 그것도 밥 반사발을 찬 물에 말아 아무 반찬도 없이 그저 소금을 조금 찍어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체력은 이렇듯 심한 고신극기에도 조금도 쇠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에 진정으로 순교할 원을 품고 있었으며 1816년에 동생이 처형된 후 그의 머리를 벨때에 사용한 나무토막을 집에 가져다가 밤에 가끔 그 위에 턱을 고이곤 했으니 그것은 죽음을 더 절실히 생각하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그 후 김대권 베드로는 고산(高山)고을로 이사해 갔다. 1827년에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른 교우들에게는 피신하라고 권고하면서도 자기는 천주의 뜻이 드러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백명도 더 되는 포졸들이 그가 사는 마을을 포위하고 가엾은 신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김 베드로는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웃는 얼굴로 그들 앞으로 마주나가 오라로 결박되어 고산(高山) 아문(衙門)으로 압송되었다. 김 베드로는 무슨 잔치에라도 가는 것 같았다. “네가 그 사교를 믿는단 말이냐?” 하고 관원이 물으니 김 베드로는 “ 저는 절대로 사교(邪敎)를 믿지 않고 다만 하늘과 땅의 참 천주를 공경할 뿐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목에 칼을 쓰고 전주(全州)관장에게로 압송되어 갔는데 관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너도 임금님과 관장들이 금하시는 저 사교(邪敎)를 믿는다는 말이냐? 천주를 배반하면 너와 네 자식들을 놓아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다.” 이때에 베드로는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아래와 같은 훌륭한 대답을 하였다고 목격한 증인들이 전하고 있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살과 뼈에 사무쳐 있어서 사지를 자르면 그 하나 하나에 이 생각이 배어 있고, 뼈를 부수면 뼈 한 조각 한 조각에 그것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안됩니다. 만번 안될 말씀입니다.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김 베드로는 전에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은 것처럼 관원들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관장(官長)은 김대권 베드로가 이렇게 답변하는 것을 듣고 화가 치밀어 베드로의 옷을 벗기고 할 수 있는대로 혹독하게 매질하라고 명령하였다. 몸에선 피가 시냇물 흐르듯 하는데 김 베드로는 열심으로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얼굴에는 여전히 웃는 빛과 기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베드로는 거기서 다시 옆방으로 옮겨가 포졸들과 하인들에게서 더욱 심한 형벌을 당해야 하였으나 그의 결심은 확고부동하였다. 이튿날 다시 관장앞으로 불려나가니 관장은 천주교 서적을 갖다 바치고, 같은 교우들의 이름을 실토하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하자 관장은 꼬챙이로 찌르는 형벌을 세 차례나 가하게 하였다. 이 혹독한 형벌을 받는 동안에 김 베드로는 까무러쳐서 다시 옥에 갇혔는데 한참만에 정신이 들어 제몸이 온통 상한 것을 보고는 “이것으로 천주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통회와 감사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포졸들은 그와 함께 잡혀 온 그의 아들을 아버지 앞에 데려다가 그 목에 칼을 겨누면서 즉시 배교하지 않으면 아들의 목을 찌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 아들이 이런 일로 목이 잘리면 이 애에게나 내게나 큰 영광이 될 것이니 절대로 배교는 못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결국 그의 아들은 귀양가고 말았다. 관장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베드로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여 보았으나 여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마니 여러 차례에 걸쳐 주뢰를 틀게 한 후 감사에게로 보냈다. 바로 그 날과 그 이튿날 감사는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든 나졸 80명을 거느리고 앉아 다시 문초를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고문을 당하는 중에도 베드로는 전과 다름없이 꿋꿋한 의지와 평온한 기색을 잃지 않고 주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며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은혜를 다만 머리털 한 가닥 만큼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마침내 관장은 그의 마음을 굽힐 수가 없음을 깨닫고 다른 증거자들과 함께 다시 옥에 가두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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