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초기 신성로마제국의 교황직
프랑크왕국은 오토1세(936-973) 하에서 비로소 전반적인 붕괴에서 회복되었다. 그는 왕위에 등극한 후 국가 통일 사업을 추진하는 주위의 공국(公國)들을 정복하고 통합함으로써 왕국을 확립하였고 슬라브족 등의 침략을 격퇴하고 국력을 증강하였다. 오토1세는 가부장적 통치체제를 통해 국가를 통솔하고자 하였으나 제후들의 반란으로 실패한 후 교회 지배에 의한 집권으로 정책을 수립하였다.
그는 교회의 주교들을 지지 세력으로 확보함으로써 국가 질서를 유지하기를 원하였다. 당시 교회는 지방귀족으로부터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 세력을 필요로 하였고, 오토1세는 관직 세습과 지방 세력의 형성이 불가능한 독신인 주교들이 국가의 붕괴나 정복의 위험이 없음을 깨닫았기 때문에 여기서 교회와 국가의 상호 이해 관계가 성립되었다.
오토1세는 교회에 재산을 증여하고 국왕에게 유보된 특권을 주교에게 부여함으로써 주교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그는 중세 봉건 교회가 탄생할 토대를 놓았고, 그것은 1803년 교회재산이 완전히 국유화될 때까지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이후 오토1세는 국가를 교회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그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이며 두 세력의 이해 관계는 서로 일치되어 있다고 보았다. 어러한 체제는 그의 후계자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제공 하였는데 그것은 후에 제국교회, 즉 93개의 대교구, 교구, 수도원은 독일의 황제들에게 가장 믿음직안 지지자로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도 이러한 제휴로 새로운 가능성을 얻었다. 즉 교회는 일반사회에서 자유롭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니 이때 독일에서는 수많은 훌롱한 주교들이 나와 교회 발전에 공헌하였고, 수도원은 그리스도교 예술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룩한 중심지가 되었다. 962년 교황 요한12세는 오토1세를 황제로 축성 하였는데 이것이 독일에서 1806년까지 지속된 신성로마제국의 기원이 되었다. 이때 오토대제는 [오토특허장]을 공포하였는데 이 문서에 의하며 오토는 교황청에 이탈리아의 3/4을 부여하는 대신에 교황 피선자는 축성되기 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충성 선서를 해야 했다.
이제 로마 교황청은 로마귀족에게 벗어났지만 독일 황제의 지배 아래에 들게 되었다. 이후 로마 교황청을 두고 투쟁하던 로마의 크레센티 가문과 투스쿨룸 가문은 1045년에 이르러 저마다 대립 교황을 세웠다. 그리하여 교황이 3명이 됨으로써 혼란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자 1046년 하인리히3세가 교회 개혁가들의 요청을 받고 이탈리아에 와서 수트리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3명의 교황 모두를 폐위하고 로마인들이 선출한 클레멘스2세를 교황으로 선출시켰다. 교황의 선출에 있어 황제의 권력이 이때처럼 우세하게 드러난 적인 없었다.
그러므로 1064년은 교황권이 최하로 몰락함과 동시에 황제권이 최고로 상승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두 권력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이후 교황권은 상승하고, 황제권은 쇠퇴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황제권의 우위시기인 중세 초기가 끝나고 교황권의 우위시기인 중세 전성기가 시작된다.

2-4. 초기 신성로마제국의 교황직
프랑크왕국은 오토1세(936-973) 하에서 비로소 전반적인 붕괴에서 회복되었다. 그는 왕위에 등극한 후 국가 통일 사업을 추진하는 주위의 공국(公國)들을 정복하고 통합함으로써 왕국을 확립하였고 슬라브족 등의 침략을 격퇴하고 국력을 증강하였다. 오토1세는 가부장적 통치체제를 통해 국가를 통솔하고자 하였으나 제후들의 반란으로 실패한 후 교회 지배에 의한 집권으로 정책을 수립하였다.
그는 교회의 주교들을 지지 세력으로 확보함으로써 국가 질서를 유지하기를 원하였다. 당시 교회는 지방귀족으로부터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 세력을 필요로 하였고, 오토1세는 관직 세습과 지방 세력의 형성이 불가능한 독신인 주교들이 국가의 붕괴나 정복의 위험이 없음을 깨닫았기 때문에 여기서 교회와 국가의 상호 이해 관계가 성립되었다.
오토1세는 교회에 재산을 증여하고 국왕에게 유보된 특권을 주교에게 부여함으로써 주교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그는 중세 봉건 교회가 탄생할 토대를 놓았고, 그것은 1803년 교회재산이 완전히 국유화될 때까지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이후 오토1세는 국가를 교회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그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이며 두 세력의 이해 관계는 서로 일치되어 있다고 보았다. 어러한 체제는 그의 후계자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제공 하였는데 그것은 후에 제국교회, 즉 93개의 대교구, 교구, 수도원은 독일의 황제들에게 가장 믿음직안 지지자로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도 이러한 제휴로 새로운 가능성을 얻었다. 즉 교회는 일반사회에서 자유롭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니 이때 독일에서는 수많은 훌롱한 주교들이 나와 교회 발전에 공헌하였고, 수도원은 그리스도교 예술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룩한 중심지가 되었다. 962년 교황 요한12세는 오토1세를 황제로 축성 하였는데 이것이 독일에서 1806년까지 지속된 신성로마제국의 기원이 되었다. 이때 오토대제는 [오토특허장]을 공포하였는데 이 문서에 의하며 오토는 교황청에 이탈리아의 3/4을 부여하는 대신에 교황 피선자는 축성되기 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충성 선서를 해야 했다.
이제 로마 교황청은 로마귀족에게 벗어났지만 독일 황제의 지배 아래에 들게 되었다. 이후 로마 교황청을 두고 투쟁하던 로마의 크레센티 가문과 투스쿨룸 가문은 1045년에 이르러 저마다 대립 교황을 세웠다. 그리하여 교황이 3명이 됨으로써 혼란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자 1046년 하인리히3세가 교회 개혁가들의 요청을 받고 이탈리아에 와서 수트리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3명의 교황 모두를 폐위하고 로마인들이 선출한 클레멘스2세를 교황으로 선출시켰다. 교황의 선출에 있어 황제의 권력이 이때처럼 우세하게 드러난 적인 없었다.
그러므로 1064년은 교황권이 최하로 몰락함과 동시에 황제권이 최고로 상승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두 권력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이후 교황권은 상승하고, 황제권은 쇠퇴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황제권의 우위시기인 중세 초기가 끝나고 교황권의 우위시기인 중세 전성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