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초대 교부
3.1. 초대 교부의 규정 조건
그리스도교에는 3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를 변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시를 바탕으로 하여 신앙 조목을 보다 깊이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초대 교부라고 부른다. 대부분 주교들이었지만 사제(힙폴리투스)와 평신도(테르툴리아누스)도 있었지만 초대교부의 특징으로 교회는 4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한다.
1) 정통교리를 주창하는 학자
2) 거룩한 생활을 하는 신앙인
3) 교회의 승인을 받은 사람
4) 고대 교회에 속하는 인물이어야 비로소 초대교부라는 명칭이 부여된다.
3.2. 대표적 교부들과 저서및 주요 사상
1)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
그는 소년시절에 스미르나의 주교인 폴리카르푸스 밑에서 지냈으며, 로마에서 공부하다가 리옹에서 사제가 되어 활동을 하였고, 177년에 리옹에서 박해가 일어나 포티우스 주교가 순교하자 178년에 이레네우스는 리옹에 돌아가 주교직에 올랐다.
① 이단 논단
5권으로 된 이 저서에서 그는 영지주의 이단, 특히 발렌티누스 사상의 허위성을 자세하게 밝혔고, 몬타누스 이단에 속하는 ‘지복천년왕국도래설’을 반박하면서 세상종말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규범이 되는 ‘사도적 전승’을 내세워 반증하였다. 그는 요한과 바울로의 신학에서 출발하였으나 그의 그리스도론은 체계적이지는 못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로고스 즉 神(성부)의 말씀으로서, 신의 사랑을 완전히 드러낸 로고스는 성부와 영원히 공존하므로 세계 창조와 인간 구원은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 작업임을 주창함으로써 삼위의 일치성을 강조하였다.
② 회복설
이 용어는 바울로 사도의 “때가 차면……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에페 1,10)라는 말에서 채용된 것이다. 회복설이란 예수그리스도가 제2의 아담으로 이 세상에 재현하여 십자가 상에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원죄로 상실한 인간과 신의 친교를 회복시켰고, 그리스도의 육화 안에서 신이 과거에 내린 계시가 요약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③ 기타….. 그는 성서학자로서 신약성서를 구약성서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 계시로 규정하였고, 4개의 복음서를 확정하였다. 또한 그는 이단과 투쟁하면서 신앙의 순수성과 교리의 견고성을 보장하는 사도적 전승을 증명하기 위해 교황의 명단을 제시하였다.
2) 테르툴리아누스
그는 193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202년에 윤리적으로 광신적 엄격파인 몬타누스 이단에 가담하여 교회를 떠났다.
① 호교서 : 호교서에서 그는 이교의 미신 행위를 공격하였고, 그리스도교의 비윤리성을 조작하여 모함하는 비난에 대해 반증을 들어 항변하고 그리스도인이 국가에 위해가 되기 보다는 선량하고 유용한 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 국가 통치자에게 교회에 대한 관용정책을 호소하였다. 그는 법률가답게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불법적이며 인권침해라고 단정하였다. 또한 그는 윤리적 측면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교도의 우상숭배, 미신행위, 이교사상등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교와 이교사회와의 격리를 주창하였다. 그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성서와 사도적 전승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는 역사적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참된 유일한 종교로서 역사속의 가시적 교회요, 이 교회는 사도적 전승에 의해 성서의 해석권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영지주의의 이단을 반박하면서 구약과 신약의 신을 동등시 하여 역사속에서 이루어진 신의 역사는 모두 사랑을 지니고 있는 의로운 행위이며 인간으로 태어난 그리스도는 바오 구약의 메시아라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양태론을 비성서적이며 비윤리적 이단이라고 밝히면서 신의 단일성 안에서 성삼을 구분하기 위해 본체와 위격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삼위일체 대한 교리의 기본적 윤곽을 제시하였다.
3) 힙폴리투스
그는 제피리누스(199-217) 교황 재위기간 동안에 로마 교회의 사제로서 활동하였고, 교황이 사벨리우스 이단과 타협한다고 비난하며 교황을 이단자로 비난하였다. 217년에 대부제인 갈리스트스 1세가 교황에 오르자 그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떠났고,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디랩교회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첫 대립교황으로 기록되었다. 후에 막시미누스 황제의 교회박해로 폰시아누스 교황과 함께 사르디니아로 귀양갔다가 귀양중에 회개하고 교황과 화해하였으며 그의 추종자들에게 로마 교회와 일치하도록 권유하였다.
① 그는 유스티누스 영향을 받아 로고스 신학을 전개하였고, 또한 교리를 신학과 철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며, 양태론 이단을 거슬러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구별지었다.
② 모든 이단을 반박함 : 이 저서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이단을 열거한 다음 이들은 그리스도, 성서, 사도전승을 따르지 않고 외교 철학의 허구성을 추종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였다.
③ 노에투스 논박 : 로고스 교리를 반대하고 성부만이 신이라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단인 일신론 학파에 대한 반박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④ 사도전승 : 로마 교회에서 거행하고 있던 전례를 전해주고 있다.
⑤ 기타 : 다니엘 주해서는 내용 전부가 전해지고 있으며, 간음과 같은 커다란 죄악에 대해서는 사죄를 극력 반대하였고, 입교자에게 너무 힘겨운 참회와 극기실천을 교회가 완화하자 그는 교회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4) 치프리아누스
그는 북아프리카의 유복한 외교 상류가정에서 출생하여 법학을 연구하고 명망이 있는 법률가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2년 만에 신자들의 요청으로 주교가 되었다. 249년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1년간 숨어 지냈으며, 257년에 다시 박해가 일어났을 때 귀양갔다가 1년후에 카르타고로 돌아와 순교하였다.
그는 이단자 세례 문제로 교황 스테파누스 1세와 충돌하였는데 그는 이단자가 베푼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세례가 교회의 행위임에 반해 이단자는 의미상으로 볼 때에 교회 밖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누구든지 교회를 그의 어머니로 모시고 있지 않다면 하느님을 그의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255-256년 사이에 두차례에 걸쳐 지방 공의회를 열어 아프리카 주교들의 지지를 받아 이단자에게 영세한 이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스테파누스 교황은 재세례를 반대하여 그 주창자들을 파문하였다. 이러한 재세례 논쟁에 있어서 치프리아누스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아니고 교회의 본질에 관심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교회, 교계, 성사에 대한 학설을 전개하여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완벽하게 설명하였다. ‘교회일치’라는 저서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치의 본질과 주교의 위치를 논하였다. 교회의 일치는 성삼의 일치에서 연유하며, 이는 주교단의 일치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주교의 권위는 각 지방 주교들이 대표하는 공동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주교들은 각각 전체 교회의 집단적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 교회는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도권의 집단적 특성에 의해 제시된 것이다.

3. 초대 교부
3.1. 초대 교부의 규정 조건
그리스도교에는 3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를 변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시를 바탕으로 하여 신앙 조목을 보다 깊이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초대 교부라고 부른다. 대부분 주교들이었지만 사제(힙폴리투스)와 평신도(테르툴리아누스)도 있었지만 초대교부의 특징으로 교회는 4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한다.
1) 정통교리를 주창하는 학자
2) 거룩한 생활을 하는 신앙인
3) 교회의 승인을 받은 사람
4) 고대 교회에 속하는 인물이어야 비로소 초대교부라는 명칭이 부여된다.
3.2. 대표적 교부들과 저서및 주요 사상
1)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
그는 소년시절에 스미르나의 주교인 폴리카르푸스 밑에서 지냈으며, 로마에서 공부하다가 리옹에서 사제가 되어 활동을 하였고, 177년에 리옹에서 박해가 일어나 포티우스 주교가 순교하자 178년에 이레네우스는 리옹에 돌아가 주교직에 올랐다.
① 이단 논단
5권으로 된 이 저서에서 그는 영지주의 이단, 특히 발렌티누스 사상의 허위성을 자세하게 밝혔고, 몬타누스 이단에 속하는 ‘지복천년왕국도래설’을 반박하면서 세상종말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규범이 되는 ‘사도적 전승’을 내세워 반증하였다. 그는 요한과 바울로의 신학에서 출발하였으나 그의 그리스도론은 체계적이지는 못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로고스 즉 神(성부)의 말씀으로서, 신의 사랑을 완전히 드러낸 로고스는 성부와 영원히 공존하므로 세계 창조와 인간 구원은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 작업임을 주창함으로써 삼위의 일치성을 강조하였다.
② 회복설
이 용어는 바울로 사도의 “때가 차면……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에페 1,10)라는 말에서 채용된 것이다. 회복설이란 예수그리스도가 제2의 아담으로 이 세상에 재현하여 십자가 상에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원죄로 상실한 인간과 신의 친교를 회복시켰고, 그리스도의 육화 안에서 신이 과거에 내린 계시가 요약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③ 기타….. 그는 성서학자로서 신약성서를 구약성서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 계시로 규정하였고, 4개의 복음서를 확정하였다. 또한 그는 이단과 투쟁하면서 신앙의 순수성과 교리의 견고성을 보장하는 사도적 전승을 증명하기 위해 교황의 명단을 제시하였다.
2) 테르툴리아누스
그는 193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202년에 윤리적으로 광신적 엄격파인 몬타누스 이단에 가담하여 교회를 떠났다.
① 호교서 : 호교서에서 그는 이교의 미신 행위를 공격하였고, 그리스도교의 비윤리성을 조작하여 모함하는 비난에 대해 반증을 들어 항변하고 그리스도인이 국가에 위해가 되기 보다는 선량하고 유용한 국민이라고 주장하면서 국가 통치자에게 교회에 대한 관용정책을 호소하였다. 그는 법률가답게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불법적이며 인권침해라고 단정하였다. 또한 그는 윤리적 측면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교도의 우상숭배, 미신행위, 이교사상등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교와 이교사회와의 격리를 주창하였다. 그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성서와 사도적 전승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는 역사적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참된 유일한 종교로서 역사속의 가시적 교회요, 이 교회는 사도적 전승에 의해 성서의 해석권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영지주의의 이단을 반박하면서 구약과 신약의 신을 동등시 하여 역사속에서 이루어진 신의 역사는 모두 사랑을 지니고 있는 의로운 행위이며 인간으로 태어난 그리스도는 바오 구약의 메시아라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양태론을 비성서적이며 비윤리적 이단이라고 밝히면서 신의 단일성 안에서 성삼을 구분하기 위해 본체와 위격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삼위일체 대한 교리의 기본적 윤곽을 제시하였다.
3) 힙폴리투스
그는 제피리누스(199-217) 교황 재위기간 동안에 로마 교회의 사제로서 활동하였고, 교황이 사벨리우스 이단과 타협한다고 비난하며 교황을 이단자로 비난하였다. 217년에 대부제인 갈리스트스 1세가 교황에 오르자 그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떠났고,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디랩교회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첫 대립교황으로 기록되었다. 후에 막시미누스 황제의 교회박해로 폰시아누스 교황과 함께 사르디니아로 귀양갔다가 귀양중에 회개하고 교황과 화해하였으며 그의 추종자들에게 로마 교회와 일치하도록 권유하였다.
① 그는 유스티누스 영향을 받아 로고스 신학을 전개하였고, 또한 교리를 신학과 철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며, 양태론 이단을 거슬러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구별지었다.
② 모든 이단을 반박함 : 이 저서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이단을 열거한 다음 이들은 그리스도, 성서, 사도전승을 따르지 않고 외교 철학의 허구성을 추종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였다.
③ 노에투스 논박 : 로고스 교리를 반대하고 성부만이 신이라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단인 일신론 학파에 대한 반박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④ 사도전승 : 로마 교회에서 거행하고 있던 전례를 전해주고 있다.
⑤ 기타 : 다니엘 주해서는 내용 전부가 전해지고 있으며, 간음과 같은 커다란 죄악에 대해서는 사죄를 극력 반대하였고, 입교자에게 너무 힘겨운 참회와 극기실천을 교회가 완화하자 그는 교회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4) 치프리아누스
그는 북아프리카의 유복한 외교 상류가정에서 출생하여 법학을 연구하고 명망이 있는 법률가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2년 만에 신자들의 요청으로 주교가 되었다. 249년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1년간 숨어 지냈으며, 257년에 다시 박해가 일어났을 때 귀양갔다가 1년후에 카르타고로 돌아와 순교하였다.
그는 이단자 세례 문제로 교황 스테파누스 1세와 충돌하였는데 그는 이단자가 베푼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세례가 교회의 행위임에 반해 이단자는 의미상으로 볼 때에 교회 밖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누구든지 교회를 그의 어머니로 모시고 있지 않다면 하느님을 그의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255-256년 사이에 두차례에 걸쳐 지방 공의회를 열어 아프리카 주교들의 지지를 받아 이단자에게 영세한 이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스테파누스 교황은 재세례를 반대하여 그 주창자들을 파문하였다. 이러한 재세례 논쟁에 있어서 치프리아누스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아니고 교회의 본질에 관심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교회, 교계, 성사에 대한 학설을 전개하여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완벽하게 설명하였다. ‘교회일치’라는 저서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치의 본질과 주교의 위치를 논하였다. 교회의 일치는 성삼의 일치에서 연유하며, 이는 주교단의 일치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주교의 권위는 각 지방 주교들이 대표하는 공동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주교들은 각각 전체 교회의 집단적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 교회는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도권의 집단적 특성에 의해 제시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