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가톨릭 교회(4)

 

현대의 가톨릭 교회(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2)




공의회의 진행 과정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준비위원회에서 3분의 2 다수결 원칙의 합의 의결 방법을 채택하면서 세 차례의 회기를 열기로 예정하였으나 네 회기를 끝을 맺었다. 이 네 회기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매년 가을철에 열렸고 제1회기는 교황 요한 23세의 재직시기에, 나머지 세 회기는 교황 바오로 6세 시대에 있었다.


1962년 10월 11일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2778명의 교부(공의회에 참석하는 성직자 즉 추기경, 총대주교, 대주교,교구주교, 명예주교, 수도회장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대부분 유럽 교회의 대표들로 구성되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유럽을 대표하는 교부들이 전체의 34%에 지나지 않았고, 신생 교회의 대표들이 66%를 차지하여 세계적 성격을 띠었다. 불행하게도 공산권의 주교들은 150여 명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더우기 소련, 루마니아, 중공, 월맹 등의 국가들은 주교들의 출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과감하고 혁신적인 특색은 가톨릭 교회에서 떠났던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이 대표로서 참관한 사실이다. 물론 공의회의 첫 회기에는 소수의 대표들, 즉 동방 정교회 7명(놀랍게도 러시아 동방 정교회의 대표가 1명 참석), 영국 성공회 1명, 고(古)가톨릭 교회 1명, 개신교 9명만이 참석하였다.


처음에는 참관인의 위치가 매우 애매하였으나 요한 23세가 교황청 소속 교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관인들의 참석을 중요시하여 어느 참관인들은 분과 위원회나 주교 및 신학자들의 자문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다른 그리스도교회들이 공의회에 더욱 호응하여 폐막식 때에는 참관인의 수자가 늘어나 28개 교회에서 93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교황은 교부들에게 공의회는 사목적 관점에서 교회의 현대화를 위한 쇄신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의 공의회에 대한 보수적이며 방어적인 태도를 지양한다고 선언하엿다. 그는 교부들이 이단적 교리를 찾아내어 단죄하거나 쓸데없는 학술적 신학 논쟁을 피하고 과거의 교리를 재확인하기보다는 그러한 교리를 제시하는 데에 있어서 새롭고 의미 있는 침신한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이러한 강조는 분명히 교부들의 토론을 위한 근거로 교황청 관리들이 준비하여 내놓은 구태의연한 70개의 안건을 겨냥한 비판을 암시하고 있었다. 여기에 힘을 얻은 많은 교부들은 교황의 윈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이미 교황청이 공의회를 지배하려고 닦아놓은 기반을 파괴해야만 했다. 개막식이 끝난 지 이틀 후에 교부들은 교황청에서 선임한 공의회 10개 분과위원회의 위원 명단을 받고 형식적으로 선출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이 분과위원회는 공의회를 지배하는 중요한 기구였다. 따라서 세 추기경, 즉 프랑스의 르나르, 독일의 프링스, 네덜란드의 알프링크는 교부들이 전혀 모르는 위원들을 선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논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요구했고, 이는 교부들의 절대적 찬성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다수 교부들의 뜻이 관철되어 새로운 위원들을 선출하였다.


이것은 교황청의 놀라운 패배였다. 교황청은 교부들이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두려움을 표시하였다. 이제 공의회의 교부들은 ꡐ보수주의자ꡑ또는 ꡐ전통주의자ꡑ로 불리는 소수파와 ꡐ자유주의자ꡑ또는 ꡐ진보주의자ꡑ라고 불리는 다수파로 나누어졌다. 다수파는 통일된 의견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교황의 개혁 의지를 따라 현대 세계에 대응하여 교회를 적응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성서에 입각한 사목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리에 대한 이론적 설명보다는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는 결정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소수파는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도교 국가들(이딸리아, 스페인, 남미)을 대표하는 교부들이었다. 이들은 교회의 안전과 전제적 행정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어떠한 변화에서 오는 위험을 심각하게 느끼고 신앙 교리를 완전하게 보호하고자 열망하였다. 소수파는 후에 교부들이 기본적 진리를 소홀히 취급하는 데에 주의를 환기시켰고 충분한 검토를 받지 않은 문헌이 조급히 선포되는 것을 예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두 파의 의견 차이는 교황의 기지로 거의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였다.


공의회는 기초적 작업이 끝난 후인 1962년 10월 22일에 본격적으로 안건토의에 들어갔다. 우선 어느 정도 혁신의 정신이 들어 있는 전례 안건은 더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비판의 소리가 있기도 하였지만 일반적 원칙은1962년 11월 14일에 승인되었다. 그러나 두번째의 안건인 계시의 원천에 대한 토의에 있어서는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날카로운 대립을 보였다. 제출된 안건은 전통적 교리의 개념이 지배하고 개신교에 대해 방어적 정신이 다분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이는 과거의 계시교리를 베낀 것에 니자니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일주일 동안의 토의 끝에 표결에 붙여졌는데 교부들은 1368대 822로 신학위원회에 되돌려 보내어 작성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1368표는 3분의 2의 다수표에 모자라 반송의 결정이 관철될 수 없었다. 이때에 교황이 개입하여 직권으로 계시 안건을 재검토하도록 신학위원회와 그리스도교일치사무국 합동위원회에 보냈다. 그 다음에 교부들은 ꡐ매스 메디아ꡑ동방 정교회와의 일치에 대한 안건을 검토한 후에 12월 1일에 교회에 대한 안건을 토의하였다. 이 안건은 신학위원회에서 제출된 가장 훌륭한 안건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아 수정되어야 한다는 여러가지 제안들이 나오면서 공의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때에 일부 고위 성직자들, 즉 쉐넨스 추기경, 레제르 추기경, 몬띠니 추기경(후의 교황 바오로 6세) 등은 교황과 협의한 후에 공의회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재검토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들은 ꡒ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을 위한 공의회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교회를 위한 공의회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부들은 교회의 내적 신비를 연구하고 다음에 교회의 세계와의 관계를 고찰해야 한다ꡓ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세 가지 대화, 즉 가톨릭 신앙인들과의 대화,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과의 대화, 현대세계와의 대화를 제의하는 것이었다. 교부들은 공의회의 진행 규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열렬한 박수로서 이 제의에 찬동하였다. 이제 공의회는 새로운 방향으로 돌입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는 공의회의 전문가 또는 교부들의 자문으로 로마에 와 있었던 프랑스, 벨지움, 독일, 네덜란드 출신의 학자들의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다. 결국 공의회는 의제를 70개에서 20개로 줄이고 의제의 수정 작업을 담당할 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12월 8일에 제1회기를 끝내고 1963년의 제2회기를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이 설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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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현대의 가톨릭 교회(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2)


    공의회의 진행 과정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준비위원회에서 3분의 2 다수결 원칙의 합의 의결 방법을 채택하면서 세 차례의 회기를 열기로 예정하였으나 네 회기를 끝을 맺었다. 이 네 회기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매년 가을철에 열렸고 제1회기는 교황 요한 23세의 재직시기에, 나머지 세 회기는 교황 바오로 6세 시대에 있었다.

    1962년 10월 11일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2778명의 교부(공의회에 참석하는 성직자 즉 추기경, 총대주교, 대주교,교구주교, 명예주교, 수도회장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대부분 유럽 교회의 대표들로 구성되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유럽을 대표하는 교부들이 전체의 34%에 지나지 않았고, 신생 교회의 대표들이 66%를 차지하여 세계적 성격을 띠었다. 불행하게도 공산권의 주교들은 150여 명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더우기 소련, 루마니아, 중공, 월맹 등의 국가들은 주교들의 출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과감하고 혁신적인 특색은 가톨릭 교회에서 떠났던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이 대표로서 참관한 사실이다. 물론 공의회의 첫 회기에는 소수의 대표들, 즉 동방 정교회 7명(놀랍게도 러시아 동방 정교회의 대표가 1명 참석), 영국 성공회 1명, 고(古)가톨릭 교회 1명, 개신교 9명만이 참석하였다.

    처음에는 참관인의 위치가 매우 애매하였으나 요한 23세가 교황청 소속 교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관인들의 참석을 중요시하여 어느 참관인들은 분과 위원회나 주교 및 신학자들의 자문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다른 그리스도교회들이 공의회에 더욱 호응하여 폐막식 때에는 참관인의 수자가 늘어나 28개 교회에서 93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교황은 교부들에게 공의회는 사목적 관점에서 교회의 현대화를 위한 쇄신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의 공의회에 대한 보수적이며 방어적인 태도를 지양한다고 선언하엿다. 그는 교부들이 이단적 교리를 찾아내어 단죄하거나 쓸데없는 학술적 신학 논쟁을 피하고 과거의 교리를 재확인하기보다는 그러한 교리를 제시하는 데에 있어서 새롭고 의미 있는 침신한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이러한 강조는 분명히 교부들의 토론을 위한 근거로 교황청 관리들이 준비하여 내놓은 구태의연한 70개의 안건을 겨냥한 비판을 암시하고 있었다. 여기에 힘을 얻은 많은 교부들은 교황의 윈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이미 교황청이 공의회를 지배하려고 닦아놓은 기반을 파괴해야만 했다. 개막식이 끝난 지 이틀 후에 교부들은 교황청에서 선임한 공의회 10개 분과위원회의 위원 명단을 받고 형식적으로 선출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이 분과위원회는 공의회를 지배하는 중요한 기구였다. 따라서 세 추기경, 즉 프랑스의 르나르, 독일의 프링스, 네덜란드의 알프링크는 교부들이 전혀 모르는 위원들을 선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논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요구했고, 이는 교부들의 절대적 찬성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다수 교부들의 뜻이 관철되어 새로운 위원들을 선출하였다.

    이것은 교황청의 놀라운 패배였다. 교황청은 교부들이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두려움을 표시하였다. 이제 공의회의 교부들은 ꡐ보수주의자ꡑ또는 ꡐ전통주의자ꡑ로 불리는 소수파와 ꡐ자유주의자ꡑ또는 ꡐ진보주의자ꡑ라고 불리는 다수파로 나누어졌다. 다수파는 통일된 의견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교황의 개혁 의지를 따라 현대 세계에 대응하여 교회를 적응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성서에 입각한 사목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리에 대한 이론적 설명보다는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는 결정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소수파는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도교 국가들(이딸리아, 스페인, 남미)을 대표하는 교부들이었다. 이들은 교회의 안전과 전제적 행정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어떠한 변화에서 오는 위험을 심각하게 느끼고 신앙 교리를 완전하게 보호하고자 열망하였다. 소수파는 후에 교부들이 기본적 진리를 소홀히 취급하는 데에 주의를 환기시켰고 충분한 검토를 받지 않은 문헌이 조급히 선포되는 것을 예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두 파의 의견 차이는 교황의 기지로 거의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였다.

    공의회는 기초적 작업이 끝난 후인 1962년 10월 22일에 본격적으로 안건토의에 들어갔다. 우선 어느 정도 혁신의 정신이 들어 있는 전례 안건은 더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비판의 소리가 있기도 하였지만 일반적 원칙은1962년 11월 14일에 승인되었다. 그러나 두번째의 안건인 계시의 원천에 대한 토의에 있어서는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날카로운 대립을 보였다. 제출된 안건은 전통적 교리의 개념이 지배하고 개신교에 대해 방어적 정신이 다분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이는 과거의 계시교리를 베낀 것에 니자니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일주일 동안의 토의 끝에 표결에 붙여졌는데 교부들은 1368대 822로 신학위원회에 되돌려 보내어 작성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1368표는 3분의 2의 다수표에 모자라 반송의 결정이 관철될 수 없었다. 이때에 교황이 개입하여 직권으로 계시 안건을 재검토하도록 신학위원회와 그리스도교일치사무국 합동위원회에 보냈다. 그 다음에 교부들은 ꡐ매스 메디아ꡑ동방 정교회와의 일치에 대한 안건을 검토한 후에 12월 1일에 교회에 대한 안건을 토의하였다. 이 안건은 신학위원회에서 제출된 가장 훌륭한 안건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아 수정되어야 한다는 여러가지 제안들이 나오면서 공의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때에 일부 고위 성직자들, 즉 쉐넨스 추기경, 레제르 추기경, 몬띠니 추기경(후의 교황 바오로 6세) 등은 교황과 협의한 후에 공의회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재검토하자고 제의하였다. 이들은 ꡒ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을 위한 공의회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교회를 위한 공의회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부들은 교회의 내적 신비를 연구하고 다음에 교회의 세계와의 관계를 고찰해야 한다ꡓ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세 가지 대화, 즉 가톨릭 신앙인들과의 대화,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과의 대화, 현대세계와의 대화를 제의하는 것이었다. 교부들은 공의회의 진행 규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열렬한 박수로서 이 제의에 찬동하였다. 이제 공의회는 새로운 방향으로 돌입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는 공의회의 전문가 또는 교부들의 자문으로 로마에 와 있었던 프랑스, 벨지움, 독일, 네덜란드 출신의 학자들의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다. 결국 공의회는 의제를 70개에서 20개로 줄이고 의제의 수정 작업을 담당할 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12월 8일에 제1회기를 끝내고 1963년의 제2회기를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이 설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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