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과 교회 , 나폴레옹과 교황청, 1801년 종교조약

 

프랑스 대혁명과 교회: 교회의 세속화


1.프랑스 교회


   1)교회재산의 국유화


     프랑스 국민회의의 극단파는 교회재산 문제에 있어서 반교회적 경향으로 기울기 시작. 샤를르 모리스 드 딸레랑빼리고르드 주교가 국가의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공채를 지불하는 데에 사용하자는 제의를 하였다.(대부분의 성직자들은 반대) 이후에 국민의회는 교회를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 휩쓸렸고, 의회는 1790년 2월에 자선사업을 하지 않는 수도단체를 해산시켰고, 4월에는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법을 공포하였다.


   2)성직자 공민헌장


     7월 14일에는 프랑스 성직자 기본법인 성직자 공민헌장이 선포되었는데, 이 법에 의하면, 교구의 수를 줄이고, 성직자는 국가의 봉급을 받으며 교구 주민의 대표로 선출되는 세속 관리로 바뀌어졌다.


   3)프랑스 교회


     이제 프랑스 교회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국가적 기반위에 새로 조직되어 국가에 예속되는 국가교회(국교)가 되었다. 이러한 조처에 대해 교황이 비난, 항의하자 국민의회는 11월에 모든 성직자들에게 헌장을 지지한다는 선서를 강요, 그러나 전체 성직자들중 2/3에 달하는 성직자들이 거부하자 박해가 일어났고, 4만여 명의 성직자들이 투옥 또는 국외 추방을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 박해는 혁명당국과 국민 사이에 거리를 두는 기회를 주었다. 선량한 많은 국민들이 선서를 거부한 성직자 편에 몰렸고, 이는 반란과 내란의 기원이 되었다. 결국 성직자 공민헌장은 프랑스 대혁명이 처음으로 저지른 대실책이었다.




   4)나폴레옹과 교황청


      ①1801년 정교조약


        1799년 11월에 나폴레옹이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독재정권은 무너지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개심도 사라졌다. 나폴레옹은 종교적인 면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종교를 정치적 요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국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1801년 7월에 교황과 정교조약을 맺었다. 여기서 프랑스 국민의 대부분이 신봉하는 종교로서 가톨릭 교회를 수복하기로 확정하였고 교회는 몰수된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국가가 성직자들을 돌보기로 결정하였다.


      ②77항의 파생 조문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조약에 비밀히 반가톨릭적 요소를 내포한 77항의 파생조문을 첨부하였다. 교황 비오7세는 이에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나폴레옹에게 많은 고초를 당했고, 나포레옹의 대관식에서 그를 황제로 도유하였다. 새 황제는 바티칸 시를 점령하고, 교황은 나폴레옹을 파문하였으나, 나폴레옹은 교황을 파리의 퐁땐블로에 감금하고서 바티칸시를 포기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은 패전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2.독일교회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침입한 곳에는 어디서나 사회적 혁명이 수반되었다. 1803년 2월에 레겐스부르그에서 독일제국의 대의원들은 결의문을 선포하였다. 이 결의무은 교회의 재산몰수와 국유화를 명령하였다.  이로써 독일교회는 물질적 기반을 상실하였고 국가적 뒷받침도 잃고 말았다. 이제 제국 교회의 멸망과 함께 교회는 절망적인 열세로 몰리게 되었다.


3.교회의 세속화의 긍정적인 면.


  1.이제 교회는 고루한 폐습에서 벗어날 수있었고,


  2.귀족들의 주교좌 독점과 과대한 성직록이 폐지되었다.


  3.고위 성직자와 하급 성직자의 심한 차별 의식이 사라졌고,


  4.가난해진 교회는 대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5.제국교회가 국가와 분리됨으로써 독일 주교들은 로마 교회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6.교회의 세속화는 로마 교황에게는 종교적 승리를 가능케 해주었다.


  7.19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단결되었고 국가주의와 국교회 사상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하는      움직임을 일으켰다.


  8.이제 가톨릭 교도들의 공동체 의식이 깨어나 수많은 조직체가 신설되었고,


  9.수도회가 재건, 새로운 수도회가 독일에 도입.


10.신심생활과 활성화와 더불어 여러 곳에서 교회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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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과 교회 , 나폴레옹과 교황청, 1801년 종교조약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프랑스 대혁명과 교회: 교회의 세속화

    1.프랑스 교회

       1)교회재산의 국유화

         프랑스 국민회의의 극단파는 교회재산 문제에 있어서 반교회적 경향으로 기울기 시작. 샤를르 모리스 드 딸레랑빼리고르드 주교가 국가의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공채를 지불하는 데에 사용하자는 제의를 하였다.(대부분의 성직자들은 반대) 이후에 국민의회는 교회를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 휩쓸렸고, 의회는 1790년 2월에 자선사업을 하지 않는 수도단체를 해산시켰고, 4월에는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법을 공포하였다.

       2)성직자 공민헌장

         7월 14일에는 프랑스 성직자 기본법인 성직자 공민헌장이 선포되었는데, 이 법에 의하면, 교구의 수를 줄이고, 성직자는 국가의 봉급을 받으며 교구 주민의 대표로 선출되는 세속 관리로 바뀌어졌다.

       3)프랑스 교회

         이제 프랑스 교회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국가적 기반위에 새로 조직되어 국가에 예속되는 국가교회(국교)가 되었다. 이러한 조처에 대해 교황이 비난, 항의하자 국민의회는 11월에 모든 성직자들에게 헌장을 지지한다는 선서를 강요, 그러나 전체 성직자들중 2/3에 달하는 성직자들이 거부하자 박해가 일어났고, 4만여 명의 성직자들이 투옥 또는 국외 추방을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 박해는 혁명당국과 국민 사이에 거리를 두는 기회를 주었다. 선량한 많은 국민들이 선서를 거부한 성직자 편에 몰렸고, 이는 반란과 내란의 기원이 되었다. 결국 성직자 공민헌장은 프랑스 대혁명이 처음으로 저지른 대실책이었다.


       4)나폴레옹과 교황청

          ①1801년 정교조약

            1799년 11월에 나폴레옹이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독재정권은 무너지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개심도 사라졌다. 나폴레옹은 종교적인 면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종교를 정치적 요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국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1801년 7월에 교황과 정교조약을 맺었다. 여기서 프랑스 국민의 대부분이 신봉하는 종교로서 가톨릭 교회를 수복하기로 확정하였고 교회는 몰수된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국가가 성직자들을 돌보기로 결정하였다.

          ②77항의 파생 조문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조약에 비밀히 반가톨릭적 요소를 내포한 77항의 파생조문을 첨부하였다. 교황 비오7세는 이에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나폴레옹에게 많은 고초를 당했고, 나포레옹의 대관식에서 그를 황제로 도유하였다. 새 황제는 바티칸 시를 점령하고, 교황은 나폴레옹을 파문하였으나, 나폴레옹은 교황을 파리의 퐁땐블로에 감금하고서 바티칸시를 포기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은 패전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2.독일교회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침입한 곳에는 어디서나 사회적 혁명이 수반되었다. 1803년 2월에 레겐스부르그에서 독일제국의 대의원들은 결의문을 선포하였다. 이 결의무은 교회의 재산몰수와 국유화를 명령하였다.  이로써 독일교회는 물질적 기반을 상실하였고 국가적 뒷받침도 잃고 말았다. 이제 제국 교회의 멸망과 함께 교회는 절망적인 열세로 몰리게 되었다.

    3.교회의 세속화의 긍정적인 면.

      1.이제 교회는 고루한 폐습에서 벗어날 수있었고,

      2.귀족들의 주교좌 독점과 과대한 성직록이 폐지되었다.

      3.고위 성직자와 하급 성직자의 심한 차별 의식이 사라졌고,

      4.가난해진 교회는 대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5.제국교회가 국가와 분리됨으로써 독일 주교들은 로마 교회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6.교회의 세속화는 로마 교황에게는 종교적 승리를 가능케 해주었다.

      7.19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단결되었고 국가주의와 국교회 사상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하는      움직임을 일으켰다.

      8.이제 가톨릭 교도들의 공동체 의식이 깨어나 수많은 조직체가 신설되었고,

      9.수도회가 재건, 새로운 수도회가 독일에 도입.

    10.신심생활과 활성화와 더불어 여러 곳에서 교회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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