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신학 논쟁, 이단과 공의회, 아리아니즘, 에페소공의회, 갈체돈 공의회

 

교리  신학 논쟁




  이 시기에 큰 이단과 이교들이 발생하여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이것은 교회의 평화보다 더 큰 위협이었다.  이는 교회 안에 심한 분열을 일으켜 교회의 일치를 크게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단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별되는데


  첫째,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것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신과의 관계를 잘못 규명한 데서 나온 이          단이다.


  둘째,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것으로 신인(神人)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잘못         설명한 데서 나온 이단이다.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에 관한 이단은 동방에서, 구원에 관한 이단은 서방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동방에서는 신학적인 문제에 전념한 반면, 서방에서는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실제적인 문제에 전념했음을 의미한다. 먼저 삼위일체론 중에서 성자 그리스도를 성부의 피조물로 보는 이단이 생겼는데 이것은 아리우스란 사제가 주장했기 때문에 아리아니즘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음 그리스도의 시성과 인성의 결합에 관한 이단으로  네스토리아니즘, 단성론(單性論), 단의론(單意論) 등 셋이 있는데 특히 네스토리아니즘을 주장한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중시한 나머지 신성이 인간 예수 안에서 마치 성전(聖殿)처럼 거처했다고 주장하며 인성을 신성에서 완전히 분리시켰다.  결과적으로 마리아는 인간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지 천주의 모친이 될 수 없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서방에서는 은총에 관해서 펠라지아니즘이란 이단, 그리고 교회와 성사에 관해 도나티즘이란 이교가 나왔다.






  1-6.  이단과 공의회(公議會)




  아리아니즘 때문에 처음으로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고 또 새로 이단이 나올 때마다 잇따라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공의회에서는 문제의 그릇된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문하는 한편, 정통신앙을 신경(神經)으로 확정지었다.


  이단은 한때 교회에 분열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불행한 일이었으나 신앙을 연구하여 심화시킨 점에서 불행한 일이었으나 신앙을 연구하여 심화시킨 점에서는 다행한 일이기도 했다.  공의회는 8차까지  모두  동방(비잔틴)에서 열렸으며 황제들이 소집하고 주재했다.




  이것은 당시 정치적으로는 물론 신학적으로도 동방이 서방보다 우세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4차례의 공의회 중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제1차)’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제2차)’는 삼위일체론을 다루었고, 431년 ‘에페소 공의회(제3차)’와 451년의 ‘갈체돈 공의회 (제4차)’는 그리스도론을 다루었다.




  공의회로 이단은 극복되었으나 이단자까지 극복되지는 못했다.  이단자들은 파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을 고수하며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때 로마제국을 휩쓰지 않을까 하고 크게 우려했던 아리아니즘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강력한 조처로 로마제국에서는 사라질 수 있었으나 고트족, 반달족등 새로 등장한 게르만민족에게 널리 전파되어 가톨릭 신앙의 가장 큰 적수가 되었다.




  네스토리아니즘도 박해로 제국에서는 사라졌으나 페르시아로 가서 고유한 교회를 세웠고, 나아가서는 인도를 거쳐 7세기에는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경교(景敎)로 불렸다. 




  또한 단성론은 다음 세기에 나타나 553년의 제5차 공의회에서 단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디오피아등지로 널리 전파되어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1-7. 교부의 황금시대




  이단의 출혈과 격렬한 교리논쟁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정통신앙을 옹호하게 했는가 하면 때마침 대거 출현한 교부들을 통해 교리의 연구나 신학을 크게 발전시키는 효과도 아울러 가져왔다.  교부는 그 언어에 따라 그리스 교부와 라틴 교부로 대별된다.


  이 시기에 각기 4명의 대학자가 나왔는데 그리스계는 아타나시오, 바실리오, 나치안즈의 그레고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모이고, 라틴계는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이다.




  특히 아우구스티노는 원죄를 부인한 펠라지우스 이단과 대항하여 유명한 ‘은총론’을 전개함으로써 ‘은총의 박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미로에서 구해주신 은총을 찬양하면서 [고백록]을 저술했고, 뿐만 아니라 유명한 [신국론(神國論)]을 통해 중세 역사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노의 사람됨과 그 역사적 의의는 오늘에까지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 글은 카테고리: catholicdata2020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교리 신학 논쟁, 이단과 공의회, 아리아니즘, 에페소공의회, 갈체돈 공의회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교리  신학 논쟁


      이 시기에 큰 이단과 이교들이 발생하여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이것은 교회의 평화보다 더 큰 위협이었다.  이는 교회 안에 심한 분열을 일으켜 교회의 일치를 크게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단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별되는데

      첫째,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것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신과의 관계를 잘못 규명한 데서 나온 이          단이다.

      둘째,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것으로 신인(神人)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잘못         설명한 데서 나온 이단이다.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에 관한 이단은 동방에서, 구원에 관한 이단은 서방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동방에서는 신학적인 문제에 전념한 반면, 서방에서는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실제적인 문제에 전념했음을 의미한다. 먼저 삼위일체론 중에서 성자 그리스도를 성부의 피조물로 보는 이단이 생겼는데 이것은 아리우스란 사제가 주장했기 때문에 아리아니즘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음 그리스도의 시성과 인성의 결합에 관한 이단으로  네스토리아니즘, 단성론(單性論), 단의론(單意論) 등 셋이 있는데 특히 네스토리아니즘을 주장한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중시한 나머지 신성이 인간 예수 안에서 마치 성전(聖殿)처럼 거처했다고 주장하며 인성을 신성에서 완전히 분리시켰다.  결과적으로 마리아는 인간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지 천주의 모친이 될 수 없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서방에서는 은총에 관해서 펠라지아니즘이란 이단, 그리고 교회와 성사에 관해 도나티즘이란 이교가 나왔다.



      1-6.  이단과 공의회(公議會)


      아리아니즘 때문에 처음으로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고 또 새로 이단이 나올 때마다 잇따라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공의회에서는 문제의 그릇된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문하는 한편, 정통신앙을 신경(神經)으로 확정지었다.

      이단은 한때 교회에 분열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불행한 일이었으나 신앙을 연구하여 심화시킨 점에서 불행한 일이었으나 신앙을 연구하여 심화시킨 점에서는 다행한 일이기도 했다.  공의회는 8차까지  모두  동방(비잔틴)에서 열렸으며 황제들이 소집하고 주재했다.


      이것은 당시 정치적으로는 물론 신학적으로도 동방이 서방보다 우세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4차례의 공의회 중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제1차)’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제2차)’는 삼위일체론을 다루었고, 431년 ‘에페소 공의회(제3차)’와 451년의 ‘갈체돈 공의회 (제4차)’는 그리스도론을 다루었다.


      공의회로 이단은 극복되었으나 이단자까지 극복되지는 못했다.  이단자들은 파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을 고수하며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때 로마제국을 휩쓰지 않을까 하고 크게 우려했던 아리아니즘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강력한 조처로 로마제국에서는 사라질 수 있었으나 고트족, 반달족등 새로 등장한 게르만민족에게 널리 전파되어 가톨릭 신앙의 가장 큰 적수가 되었다.


      네스토리아니즘도 박해로 제국에서는 사라졌으나 페르시아로 가서 고유한 교회를 세웠고, 나아가서는 인도를 거쳐 7세기에는 중국에까지 전파되어 경교(景敎)로 불렸다. 


      또한 단성론은 다음 세기에 나타나 553년의 제5차 공의회에서 단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디오피아등지로 널리 전파되어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1-7. 교부의 황금시대


      이단의 출혈과 격렬한 교리논쟁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정통신앙을 옹호하게 했는가 하면 때마침 대거 출현한 교부들을 통해 교리의 연구나 신학을 크게 발전시키는 효과도 아울러 가져왔다.  교부는 그 언어에 따라 그리스 교부와 라틴 교부로 대별된다.

      이 시기에 각기 4명의 대학자가 나왔는데 그리스계는 아타나시오, 바실리오, 나치안즈의 그레고리오 요한 크리소스토모이고, 라틴계는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이다.


      특히 아우구스티노는 원죄를 부인한 펠라지우스 이단과 대항하여 유명한 ‘은총론’을 전개함으로써 ‘은총의 박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미로에서 구해주신 은총을 찬양하면서 [고백록]을 저술했고, 뿐만 아니라 유명한 [신국론(神國論)]을 통해 중세 역사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노의 사람됨과 그 역사적 의의는 오늘에까지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