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의 사도 이존창(곤자가의 루도비꼬, 1756-1801)

 

충청도의 사도 이 존창(곤자가의 루도비꼬, 1756-1801)


  이 단원이라고도 불리는 이 존창은 충청도 여사울(지금의 충남 예산군 신앙면 신종리)의 농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서울에 올라왔다가 김 범우 집에서 권 일신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와 계명 그리고 신심생활을 배우고 곤자가의 루도비꼬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동시에 그는 권 일신에게 충청도 선교의 사명을 받고 고향에 돌아와 가족과 친척을 입교시켰고, 이웃들을 영세시켰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주가 있어 입교자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그의 복음 선포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양반층에서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신앙의 말을 듣기 위해 먼곳에서도 사람들이 단체를 형성하여 이 존창의 집에 모여 들었고, 영세한 후에 돌아갔다. 이 단원은 선교활동과 함께 가성직 교계의 교회 시대에 충청도를 담당한 신부로서 신자들의 고백도 들었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1791년에 신해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이 존창은 공주에서 체포되었다가 감옥에서 국왕에게 자신이 못된 종교에 떨어졌다고 후회한다는 배교서를 작성하여 올리고 12월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의 몸이 되자 자기의 잘못을 통회하고 다시 신심생활을 시작하였다. 며칠 후에 그는 새로운 선교활동을 위해서 고향을 떠나 홍산(지금의 부여군 홍산면)으로 이사갔다. 이 존창은 이곳에서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 영세시켜 이곳은 천주교 마을이  되었다.


  주 문모 신부가 귀국한 후에 이 존창은 신부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주 신부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하였다.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히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받게 할 것이오.” 이 존창은 주 신부의 훈계를 항상 명심하고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1795년 말에 이 존창은 공주 감영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그의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 와 가석방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치욕적인 형벌로 죄수에게 곤장을 치는 형리의 일을 맡고 감시 속에서 매달 1일과 15일에 심문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충청도의 사도는 신자의 본분을 공공연하게 완수하였다. 다른 교우들의 배교 소식을 들으면 과거의 자기와 같이 생각되어 마음 아파하였다.


  1801년의 신유대박해가 일어나자 이 존창은 다시 2월 9일에 공주 감영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서울로 이송되어 최 창현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정부는 충청도 도민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공주 감영에서 처형하도록 지시하였다. 충청도의 사도는 그가 열성을 다하여 복음을 전파한 고향에서 1801년 2월 28일(음력)에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50여 세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러 갔을 때에 여섯 번   칼질에 잘라진 목이 다시 굳게 붙었고 목에 실날 같은 흉터가 둘러쳐 있었다고 한다. 이 존창은 한국교회 초기에 복음 전파에 공헌이 많았던 교회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우리 교회 최초의 신부들인 김대건과 최양업의 집안이 바로 이 충청도의 사도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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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의 사도 이존창(곤자가의 루도비꼬, 1756-1801)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충청도의 사도 이 존창(곤자가의 루도비꼬, 1756-1801)

      이 단원이라고도 불리는 이 존창은 충청도 여사울(지금의 충남 예산군 신앙면 신종리)의 농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서울에 올라왔다가 김 범우 집에서 권 일신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와 계명 그리고 신심생활을 배우고 곤자가의 루도비꼬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동시에 그는 권 일신에게 충청도 선교의 사명을 받고 고향에 돌아와 가족과 친척을 입교시켰고, 이웃들을 영세시켰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주가 있어 입교자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그의 복음 선포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양반층에서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신앙의 말을 듣기 위해 먼곳에서도 사람들이 단체를 형성하여 이 존창의 집에 모여 들었고, 영세한 후에 돌아갔다. 이 단원은 선교활동과 함께 가성직 교계의 교회 시대에 충청도를 담당한 신부로서 신자들의 고백도 들었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1791년에 신해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이 존창은 공주에서 체포되었다가 감옥에서 국왕에게 자신이 못된 종교에 떨어졌다고 후회한다는 배교서를 작성하여 올리고 12월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의 몸이 되자 자기의 잘못을 통회하고 다시 신심생활을 시작하였다. 며칠 후에 그는 새로운 선교활동을 위해서 고향을 떠나 홍산(지금의 부여군 홍산면)으로 이사갔다. 이 존창은 이곳에서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 영세시켜 이곳은 천주교 마을이  되었다.

      주 문모 신부가 귀국한 후에 이 존창은 신부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주 신부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하였다.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히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받게 할 것이오.” 이 존창은 주 신부의 훈계를 항상 명심하고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1795년 말에 이 존창은 공주 감영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그의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 와 가석방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치욕적인 형벌로 죄수에게 곤장을 치는 형리의 일을 맡고 감시 속에서 매달 1일과 15일에 심문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충청도의 사도는 신자의 본분을 공공연하게 완수하였다. 다른 교우들의 배교 소식을 들으면 과거의 자기와 같이 생각되어 마음 아파하였다.

      1801년의 신유대박해가 일어나자 이 존창은 다시 2월 9일에 공주 감영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서울로 이송되어 최 창현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정부는 충청도 도민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공주 감영에서 처형하도록 지시하였다. 충청도의 사도는 그가 열성을 다하여 복음을 전파한 고향에서 1801년 2월 28일(음력)에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50여 세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러 갔을 때에 여섯 번   칼질에 잘라진 목이 다시 굳게 붙었고 목에 실날 같은 흉터가 둘러쳐 있었다고 한다. 이 존창은 한국교회 초기에 복음 전파에 공헌이 많았던 교회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우리 교회 최초의 신부들인 김대건과 최양업의 집안이 바로 이 충청도의 사도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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