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교회의 성직자 청원 운동

 

조선 교회의 성직자 청원 운동


  신유대박해 때 중국인 주 문모 신부가 순교한 이후로 조선 교회는 33년 동안의 “목자 없는 시대”(1801-1834)에 들어섰다. 1802년에 이르러 천주교 박해의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고 신 태보(베드로), 권 기인(요한), 이 여진(요한) 등이 사방으로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모아 기도와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심을 일깨우고 강화시키면서 교회를 재건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재건 운동의 하나로 성직자 청원 운동을 일으켰다. 1811년에 권 기인은 로마의 교황과 북경교구의 주교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내용과 함께 성직자 입국 방법을 제시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신 태보는 북경 교회에 편지를 전달할 밀사를 파견하기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하였고, 이 여진은 밀사로서 편지를 갖고 조선 왕국의 부연사 일행에 끼여 1812년에 북경에서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 영입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성물만 받아 갖고 귀국하였다.


  1812년 말에 이 여진은 다시 한 번 북경에 가서 성직자 파견을 간청하였으나 북경 교회와 프랑스 교회의 사정으로 파견 약속도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렇게 성직자 청원 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해 교회 재건 운동의 지도자들은 더 이상 북경에 가지 않고 다만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보살피는 일에 전념하였다.


  1816년에 정 하상(바오로)이 새로운 교회 지도자로서 유 진길(아우구스띠노)과 조 신철(까롤로)의 도움을 받아 성직자 영입 운동을 재개하였다. 그 결과로 1817년 1월 4일에 남경에서 43세의 신 벨로조 플로리아노 신부와 조선 교회의 부주교(총대리)로 임명된 29세의 밤 신부가 배를 타고 조선과 북경의 국경 지방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안내자가 없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신 신부는 국경 지방에서 사망하였고, 밤 신부는 남경으로 돌아가 병석에 누워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할 수 없었다.


  북경 교회의 성직자 파견이 여의치 않자, 1825년에 정 하상은 유 진길과 함께 직접 로마 교황에게 성직자를 청원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편지에서 교황에게 신유대박해 이후의 조선 교회에 대한 보고를 올리고 포르투갈 국왕이 조선 임금에게 보내는 편지와 선물(의학서, 의약품 등)을 지참한 사절단과 마카오 주재 선교사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그들은 선교사들이 해로를 통하여 경기도 해안 지방에 들어오는 방법도 상세하게 알렸다.




15.1.2 교황청의 조처


  1812년에 북경 교회의 선교사들은 조선 교회의 편지(1811년에 쓴 로마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를 받아 마카오에 있는 북경 교구장인 수자 사라이바 주교에게 전달하였다. 북경 교구장은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한문 편지를 포르투갈어로 번역한 다음에 원본과 함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보냈다. 1814년 8월에 리스본에 도착한 편지는 다시 로마 주재 포르투갈 공사관에 발송되어 포르투갈어에서 이딸리아어로 번역되어 모든 편지는 1815년에 교황 비오 7세(1800-1823)에게 전달되었다. 교황은 조선 교회 신자들의 눈물겨운 호소의 편지를 받았으나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치하에서 교통을 받고 있는 교황청의 사정으로 마카오 주재 선교사의 파견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이때에 로마의 포교성성은 성직자가 매우 필요한 조선 교회에 대한 문제를 여러가지 각도에서 논의하였다. 1808년에 조선 교회의 책임자였던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이미 사망하여, 조선 교회를 포교성성이 직접 관장하여 조선 신자들의 요청대로 선교사를 보내거나 교황청과 포르투갈의 수호사절단을 파견할지 또는 종전과 같이 북경교구의 주교에게 조선 교회를 위임할지에 대해 검토하였다. 결국 교황청은 북경주교에게 선교사를 임명하여 조선 왕국에 파견하도록 조처하였고 북경에서 조선인 신학생을 양성하고 중국과 조선의 국경 지방에 연락처로 교우촌을 형성할 것을 권하였다.


  1823년에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의 극동 책임자인 움삐에레스 신부가 조선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건의서를 로마의 포교성성에 발송하였다. 그는 북경교구의 책임자인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주장하고 북경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조선에 잠입하기를 주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중국 황제에게 고발당하여 북경 교회가 멸망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보고하였다. 따라서 그는 다른 수도회의 선교사들을 남경을 통해서 조선 왕국에 파견하는 것이 낫다고 건의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포교성성은 1824년, 유럽의 여러 수도회에 조선 선교의 자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계획하였다. 그런데 1826년에 움삐에레스 신부는 북경교구를 통해서 정 하상과 유 진길의 편지를 받고는 라틴어로 번역하여 자기의 건의서도 동봉해서 로마의 교황청으로 보냈다. 그는 조선 교회의 신자들이 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제의한 서구의 사절단 파견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세계 일주를 항해하는 프랑스 군함에 선교사들을 동승시켜 조선에 상륙시킬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움삐에레스 신부는 조선 교회를 북경교구에서 분리시켜 예수회원을 이 교회의 교황 대리 감목으로 임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하였다.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로마의 포교성성 장관인 바르톨로메오 까뻴라리 추기경은 1827년 9월 1일에 우선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랑글로아 신부에게 조선 선교를 위촉하였다. 그러나 랑글로아 신부는 9월 28일에 보낸 답장에서 선교사가 부족하고 기존 선교 지방에도 급선무가 많으며 조선은 입지 조건이 좋지 않아 교통이 불편하여 선교사가 입국하기 어렵고, 포교성성의 요청에 대답하기 위해 파리 외방 전교회의 주교들과 마카오 경리부의 답변을 얻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난색을 표명하였다.


  이에 대해 까뻴라리 추기경은 그해 11월 17일에 보낸 편지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가 제시한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즉 사제성소의 증가에 노력하면 선교사의 파견은 가능하고 파리 외방 전교회의 주교들도 조선 선교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며 선교활동에 필요한 경비는 포교성성에서도 일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조선 입국의 어려움은 예상되나 조선 교회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가능하다고 보고 조선 교회의 편지도 동봉하여 보냈다.


  랑글로아 신부는 다시 답장을 통해 조선 교회의 입장은 딱하지만 조선 교회의 편지에 나타난 선교사의 입국 절차는 안전하지 않아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 전교회 책임자인 바루덴 신부에게 조선 입국 방법을 문의하겠다고 보고하였다. 따라서 포교성성도 움삐에레스 신부에게 좀더 자세하게 입국 방법에 대해 보고하도록 조처하였고 조선 선교 문제에 있어서 파리 외방 전교회와의 교섭을 일단 연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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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교회의 성직자 청원 운동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조선 교회의 성직자 청원 운동

      신유대박해 때 중국인 주 문모 신부가 순교한 이후로 조선 교회는 33년 동안의 “목자 없는 시대”(1801-1834)에 들어섰다. 1802년에 이르러 천주교 박해의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고 신 태보(베드로), 권 기인(요한), 이 여진(요한) 등이 사방으로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모아 기도와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심을 일깨우고 강화시키면서 교회를 재건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재건 운동의 하나로 성직자 청원 운동을 일으켰다. 1811년에 권 기인은 로마의 교황과 북경교구의 주교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내용과 함께 성직자 입국 방법을 제시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신 태보는 북경 교회에 편지를 전달할 밀사를 파견하기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하였고, 이 여진은 밀사로서 편지를 갖고 조선 왕국의 부연사 일행에 끼여 1812년에 북경에서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 영입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성물만 받아 갖고 귀국하였다.

      1812년 말에 이 여진은 다시 한 번 북경에 가서 성직자 파견을 간청하였으나 북경 교회와 프랑스 교회의 사정으로 파견 약속도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렇게 성직자 청원 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해 교회 재건 운동의 지도자들은 더 이상 북경에 가지 않고 다만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보살피는 일에 전념하였다.

      1816년에 정 하상(바오로)이 새로운 교회 지도자로서 유 진길(아우구스띠노)과 조 신철(까롤로)의 도움을 받아 성직자 영입 운동을 재개하였다. 그 결과로 1817년 1월 4일에 남경에서 43세의 신 벨로조 플로리아노 신부와 조선 교회의 부주교(총대리)로 임명된 29세의 밤 신부가 배를 타고 조선과 북경의 국경 지방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안내자가 없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신 신부는 국경 지방에서 사망하였고, 밤 신부는 남경으로 돌아가 병석에 누워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할 수 없었다.

      북경 교회의 성직자 파견이 여의치 않자, 1825년에 정 하상은 유 진길과 함께 직접 로마 교황에게 성직자를 청원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편지에서 교황에게 신유대박해 이후의 조선 교회에 대한 보고를 올리고 포르투갈 국왕이 조선 임금에게 보내는 편지와 선물(의학서, 의약품 등)을 지참한 사절단과 마카오 주재 선교사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그들은 선교사들이 해로를 통하여 경기도 해안 지방에 들어오는 방법도 상세하게 알렸다.


    15.1.2 교황청의 조처

      1812년에 북경 교회의 선교사들은 조선 교회의 편지(1811년에 쓴 로마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를 받아 마카오에 있는 북경 교구장인 수자 사라이바 주교에게 전달하였다. 북경 교구장은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한문 편지를 포르투갈어로 번역한 다음에 원본과 함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보냈다. 1814년 8월에 리스본에 도착한 편지는 다시 로마 주재 포르투갈 공사관에 발송되어 포르투갈어에서 이딸리아어로 번역되어 모든 편지는 1815년에 교황 비오 7세(1800-1823)에게 전달되었다. 교황은 조선 교회 신자들의 눈물겨운 호소의 편지를 받았으나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치하에서 교통을 받고 있는 교황청의 사정으로 마카오 주재 선교사의 파견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이때에 로마의 포교성성은 성직자가 매우 필요한 조선 교회에 대한 문제를 여러가지 각도에서 논의하였다. 1808년에 조선 교회의 책임자였던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이미 사망하여, 조선 교회를 포교성성이 직접 관장하여 조선 신자들의 요청대로 선교사를 보내거나 교황청과 포르투갈의 수호사절단을 파견할지 또는 종전과 같이 북경교구의 주교에게 조선 교회를 위임할지에 대해 검토하였다. 결국 교황청은 북경주교에게 선교사를 임명하여 조선 왕국에 파견하도록 조처하였고 북경에서 조선인 신학생을 양성하고 중국과 조선의 국경 지방에 연락처로 교우촌을 형성할 것을 권하였다.

      1823년에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의 극동 책임자인 움삐에레스 신부가 조선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건의서를 로마의 포교성성에 발송하였다. 그는 북경교구의 책임자인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주장하고 북경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조선에 잠입하기를 주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중국 황제에게 고발당하여 북경 교회가 멸망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보고하였다. 따라서 그는 다른 수도회의 선교사들을 남경을 통해서 조선 왕국에 파견하는 것이 낫다고 건의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포교성성은 1824년, 유럽의 여러 수도회에 조선 선교의 자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계획하였다. 그런데 1826년에 움삐에레스 신부는 북경교구를 통해서 정 하상과 유 진길의 편지를 받고는 라틴어로 번역하여 자기의 건의서도 동봉해서 로마의 교황청으로 보냈다. 그는 조선 교회의 신자들이 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제의한 서구의 사절단 파견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세계 일주를 항해하는 프랑스 군함에 선교사들을 동승시켜 조선에 상륙시킬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움삐에레스 신부는 조선 교회를 북경교구에서 분리시켜 예수회원을 이 교회의 교황 대리 감목으로 임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하였다.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로마의 포교성성 장관인 바르톨로메오 까뻴라리 추기경은 1827년 9월 1일에 우선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랑글로아 신부에게 조선 선교를 위촉하였다. 그러나 랑글로아 신부는 9월 28일에 보낸 답장에서 선교사가 부족하고 기존 선교 지방에도 급선무가 많으며 조선은 입지 조건이 좋지 않아 교통이 불편하여 선교사가 입국하기 어렵고, 포교성성의 요청에 대답하기 위해 파리 외방 전교회의 주교들과 마카오 경리부의 답변을 얻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난색을 표명하였다.

      이에 대해 까뻴라리 추기경은 그해 11월 17일에 보낸 편지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가 제시한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즉 사제성소의 증가에 노력하면 선교사의 파견은 가능하고 파리 외방 전교회의 주교들도 조선 선교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며 선교활동에 필요한 경비는 포교성성에서도 일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조선 입국의 어려움은 예상되나 조선 교회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가능하다고 보고 조선 교회의 편지도 동봉하여 보냈다.

      랑글로아 신부는 다시 답장을 통해 조선 교회의 입장은 딱하지만 조선 교회의 편지에 나타난 선교사의 입국 절차는 안전하지 않아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 전교회 책임자인 바루덴 신부에게 조선 입국 방법을 문의하겠다고 보고하였다. 따라서 포교성성도 움삐에레스 신부에게 좀더 자세하게 입국 방법에 대해 보고하도록 조처하였고 조선 선교 문제에 있어서 파리 외방 전교회와의 교섭을 일단 연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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