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순교자 샤를르-앙또안 뿌르티에

 

샤를르-앙또안 뿌르티에(Charles-Antoine Pourthie 1830-1866)


  조선 교우들이 ‘신(申) 신부’라 부르던 뿌르티에 신부는 1830년 12월 20일에 알비 교구의 발랑스 앙 알비즈와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854년 6월 11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7우러 1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들어가 1년 동안 선교사로서의 활동을 위한 수련 과정을 마친 후에 중국 귀주(貴州)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55년 6월 27일에 뿌르티에 신부는 프랑스를 떠나 6개월의 항해 끝에 홍콩에 도착하였다. 이때에 외방전교회 지부장 리보아 신부는 조선 파견 선교사 긴급히 필요하였기 때문에 뿌르티에 신부의 포교지를 변경하여 그를 쁘띠니꼴라 신부와 함께 베르뇌 주교가 기다리고 있는 상해로 보냈다. 그곳에서 뿌르티에 신부는 주교를 따라 새 부임지인 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였다.


  뿌르티에 신부는 한양에 도착하자 베르뇌 주교로부터 조선 교구의 부주교로 임명을 받고 동시에 1885년에 매스뜨르 신부가 배론에 설립한 성(聖) 요셉 신학교에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쁘띠니꼴라 신부의 도움을 받으며 신학생들을 돌보았다. 그는 자기의 신학교 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나는 감옥, 즉 내게 신학교 구실을 하는 오두막집에 8년 동안 갇혀 있었기 때문에 내 건강은 완전히 약화되었다. 학생들과 나는 두 개의 방을 갖고 있었는데 두 방 사이의 문은 잘 닫혀지지도 않고 환기도 되지 않아 방 안의 냄새는 고약하고 한 사람이라도 병에 걸리면 모두 전염되는 시설이 나쁜 병원에 있는 셈이다.” 사실, 그는 쁘띠니꼴라 신부와 함께 발진 티푸스에 걸려 죽을 위험에 처하였었고 1864녀부터는 폐병으로 각혈까지 하였다. 동시에 뿌르티에 신부는 신학교 근처에 살고 있는 3백여 명의 신자들에 대한 사목도 담당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두터운 신심으로 배론의 신자 공동체는 조선 교회에서 모범적 공동체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1857년부터는 다블뤼 주교가 거의 중단하고 있던 사전 편찬 사업을 도우면서 「조선어 연구」라는 문법책도 저술하였다. 이외에 그는 자연 과학에 취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지질과 동식물을 연구하여 식물 표본 일부는 빠리에 있으나 노트는 분실되었다.


  1866년 3월 2일, 체포 당시에 뿌르티에 신부는 병석에 누워 있엇다. 포졸들이 신학교 집주인 장 주기(요셉) 회장을 결박하였을 때에 그는 돈을 주며 여생이 얼마 되지 않는 불쌍한 노인을 풀어주라고 부탁하여 회장은 풀려났다. 그는 불편한 몸으로 쁘띠니꼴라 신부와 함께 한양에 압송되었다. 그는 포도청에서 세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으나 기력이 없어 쁘띠니꼴라 신부가 대변하였다. 뿌르티에 신부는 동료와 함께 의금부로 이송, 신문을 받는 절차가 생략된 채 3월 8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새남터에서 3일 후에 군문효수의 처형으로 순교하였다. 두 성직자의 시신은 전날 순교한 베르뇌 주교 등 4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새남터 근처에 묻혀 있다가 6개월 후에 신자들에 의해 왜고개에 매장된 후에 1899년 10월에 용산의 대신학교에 이장되었다. 1년 후에 선교사들의 유해는 명동 대성당에 안치되었다가 뿌르티에 신부와 쁘띠니꼴라 신부는 병인 순교자 시복에서 빠져, 다른 선교사들의 유해만 절두산 순교관 지하 성당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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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순교자 샤를르-앙또안 뿌르티에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샤를르-앙또안 뿌르티에(Charles-Antoine Pourthie 1830-1866)

      조선 교우들이 ‘신(申) 신부’라 부르던 뿌르티에 신부는 1830년 12월 20일에 알비 교구의 발랑스 앙 알비즈와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854년 6월 11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7우러 1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들어가 1년 동안 선교사로서의 활동을 위한 수련 과정을 마친 후에 중국 귀주(貴州)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55년 6월 27일에 뿌르티에 신부는 프랑스를 떠나 6개월의 항해 끝에 홍콩에 도착하였다. 이때에 외방전교회 지부장 리보아 신부는 조선 파견 선교사 긴급히 필요하였기 때문에 뿌르티에 신부의 포교지를 변경하여 그를 쁘띠니꼴라 신부와 함께 베르뇌 주교가 기다리고 있는 상해로 보냈다. 그곳에서 뿌르티에 신부는 주교를 따라 새 부임지인 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였다.

      뿌르티에 신부는 한양에 도착하자 베르뇌 주교로부터 조선 교구의 부주교로 임명을 받고 동시에 1885년에 매스뜨르 신부가 배론에 설립한 성(聖) 요셉 신학교에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쁘띠니꼴라 신부의 도움을 받으며 신학생들을 돌보았다. 그는 자기의 신학교 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나는 감옥, 즉 내게 신학교 구실을 하는 오두막집에 8년 동안 갇혀 있었기 때문에 내 건강은 완전히 약화되었다. 학생들과 나는 두 개의 방을 갖고 있었는데 두 방 사이의 문은 잘 닫혀지지도 않고 환기도 되지 않아 방 안의 냄새는 고약하고 한 사람이라도 병에 걸리면 모두 전염되는 시설이 나쁜 병원에 있는 셈이다.” 사실, 그는 쁘띠니꼴라 신부와 함께 발진 티푸스에 걸려 죽을 위험에 처하였었고 1864녀부터는 폐병으로 각혈까지 하였다. 동시에 뿌르티에 신부는 신학교 근처에 살고 있는 3백여 명의 신자들에 대한 사목도 담당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두터운 신심으로 배론의 신자 공동체는 조선 교회에서 모범적 공동체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1857년부터는 다블뤼 주교가 거의 중단하고 있던 사전 편찬 사업을 도우면서 「조선어 연구」라는 문법책도 저술하였다. 이외에 그는 자연 과학에 취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지질과 동식물을 연구하여 식물 표본 일부는 빠리에 있으나 노트는 분실되었다.

      1866년 3월 2일, 체포 당시에 뿌르티에 신부는 병석에 누워 있엇다. 포졸들이 신학교 집주인 장 주기(요셉) 회장을 결박하였을 때에 그는 돈을 주며 여생이 얼마 되지 않는 불쌍한 노인을 풀어주라고 부탁하여 회장은 풀려났다. 그는 불편한 몸으로 쁘띠니꼴라 신부와 함께 한양에 압송되었다. 그는 포도청에서 세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으나 기력이 없어 쁘띠니꼴라 신부가 대변하였다. 뿌르티에 신부는 동료와 함께 의금부로 이송, 신문을 받는 절차가 생략된 채 3월 8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새남터에서 3일 후에 군문효수의 처형으로 순교하였다. 두 성직자의 시신은 전날 순교한 베르뇌 주교 등 4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새남터 근처에 묻혀 있다가 6개월 후에 신자들에 의해 왜고개에 매장된 후에 1899년 10월에 용산의 대신학교에 이장되었다. 1년 후에 선교사들의 유해는 명동 대성당에 안치되었다가 뿌르티에 신부와 쁘띠니꼴라 신부는 병인 순교자 시복에서 빠져, 다른 선교사들의 유해만 절두산 순교관 지하 성당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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