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순교자 볼리외 신부

 

베르나르-루이 볼리외(Bernard-Louis Beaulieu. 1840-1866)


  프랑스 보르도 교구 출신인 볼리외 신부는 1840년 10월 8일, 랑곤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849년에 랑곤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에 중국의 선교사였던 어느 성직자의 경험담을 듣고 선교사가 되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1857년에 그는 보르도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 동안 수학한 후에 부제품(副祭品)을 받고 어린 시절에 세운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교구장에게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입학 허가를 청원하였다. 그러나 교구 이적을 허용치 않는 보르도 교구의 정책과 폐렴에 의한 건강 약화로 한때 볼리외는 그의 소망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곧 건강이 회복되고 교구장의 특별 허가로 그는 1863년 8월 28일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듬해 5월 21일에 평생 동료가 될 브르뜨니애르 신부와 함께 사제 서품을 받았다. 1개월이 못되어 볼리외 신부는 조선 선교의 소임(所任)을 받고 브르뜨니애르 등 세 명의 동료들과 함께 1864년 7월 19일에 프랑스를 떠나 2개월의 항해 끝에 홍콩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다시 요동으로 향하였다.


  1865년 4월 17일에 볼리외 신부는 동료 일행과 함께 요동을 떠나 위에서 언급한 경로를 거쳐 5월 27일에 그의 부임 선교지에 잠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조선 교우들에게는 서 몰례(徐沒禮) 신부라고 불리던 그는 내포 지방의 교우촌에서 하루를 보내고 상경하여 주교댁에서 며칠 머무른 후에 경기도 광주 지방의 묘론리(卯論里) 교우촌으로 가서 장 제철(張濟哲)이라는 신입 교우 집에서 조선어를 배우고 있었다. 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베르뇌 주교는 볼리외 신부가 이제는 어느 정도 조선어를 습득하여 성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작은 교우촌을 맡겼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첫 임지로 출발하려는 준비를 끝내었을 때에 그를 모시러 온 교우촌의 신자들이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볼리외 신부는 새 임지의 신자들을 돌려보내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신앙심이 약한 마을 신자 몇 명이 신부로 인해 피해를 받을까봐 피신을 권유하였다.


  신자들의 성화에 못 견딘 신부는 3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토리)의 이 여습(李汝習)이라는 교우 집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2월 27일 아침에 포졸들이 은신처를 급습하여 신부를 체포하였다. 볼리외 신부는 같은 날에 체포된 도리 신부와 함께 한양 포도청에 압송되었다. 그는 포장의 심문에 입국 경로와 목적을 설명하고 본국 송환보다는 순교하기를 원한다고 명백히 밝히고 아직 조선인과의 언어 장벽이 있어서 교리를 가르친 사람이 없으며 신자들의 이름을 댈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의금부에 4일 동안 구금되어 있으면서 세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는데 그중에서 두 차례는 정강이를 형장(刑杖)으로 아홉 번 때리는 형벌을 받았다. 심문과 고문이 끝난 후에 볼리외 신부는 감옥에 끌려와 이미 구금되어 있던 베르뇌 주교와 브르뜨니애르 신부를 만났다. 그는 3월 7일에 베르뇌 주교와 두 명의 동료 신부들과 함께 새남터 형장에 끌려가 순교하였다. 이때에 그의 나이는 26세로서 가장 어린 순교 선교사가 되었다.


30.1.3 삐에르-앙리 도리(Pierre-H두갸 Dorie. 1839-1866)


  조선 교우들에게 김(金) 신부라고 불리던 도리 신부는 1839년 9월 23일에 뤼쏭 교구 관할 지역인 쌩-띨래르-드 딸몽이라는 어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본당의 보좌신부의 주선으로 1852년 10월에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8년 후 뤼쏭 대신학교에서 2년 동안 수학하던 중,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쉽게 실현될 수 없었다. 본당 신부는 건강을 이유로 추천을 주저하였고 그의 모친은 아들과의 이별의 고통 때문에 반대하였다. 결국 1862년 8월 23일에 도리는 그의 모친과 본당 신부를 설득시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1864년 5월 21일에 이미 언급한 브르뜨니애르와 볼리외와 함께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이 두 동료 그리고 위앵 신부와 함께 조선 선교의 사명을 받고 7월에 프랑스를 떠나 홍콩에 도착하였고 즉시 조선 입국을 대기하기 위해서 요동으로 떠났다.


  1865년 5월 27일에 도리 신부는 동료들과 함께 내포 지방에 상륙하였다가 볼리외 신부와 함께 상경하여 베르뇌 주교의 지시로 교우집이 10여 채 있는 손골 마을(경기도 용인군 손곡리)에서 어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볼리외 신부가 머물고 있는 묘론리가 ‘하우 고개’라는 산등성이 하나를 사이로 인접해 있어서 서로 격려하며 지낼 수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도리 신부는 어학 학습의 진도는 다른 선교사들보다 뒤졌지만 조선 풍습에는 가장 쉽게 적응하였고 신자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866년 2월 27일 오전에 그는 볼리외 신부가 조금 전에 포졸들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신자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집에 머물러 있기로 하고 신자들에게는 피신을 지시하였다. 이미 한양에서 주교댁 하인이었던 이 선이(李先伊)가 신부들의 거처를 제보하였기 때문에 같은 날 오후 1시에 포졸들은 도리 신부의 숙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음날인 2월 28일에 도리 신부는 볼리외 신부와 함께 각기 들것에 실려 죄인 압송의 관습대로 양손이 홍사(紅絲)로 가슴 위에 묶이고 중죄인이 쓰는 갓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한양 포도청에 도착하였다.


  도리 신부는 의금부로 이송된 후에 볼리외 신부처럼 세 차례의 심문을 받으면서 두 차례에 걸쳐 형추(刑推)의 고문을 받았다. 그는 심문에서 입국 경로와 목적을 밝히고 자기는 조선어를 잘하지 못하여 신자들과 접촉한 일이 없고 다만 새해를 맞이하여 볼리외 신부와 함께 상경하여 주교댁에 며칠 지내고 귀가하였다가 잡혀온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당시에 조정에서는 과거와는 달리 선교사들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처형 이전에 국외 축출, 즉 본국 송환의 조처를 취하기로 하였다. 도리 신부는 이러한 본국 송환보다는 이 땅에서 순교하기를 원한다고 분명히 뜻을 밝혔다. 3월 6일에 그는 베르뇌 주교와 2명의 동료와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 선고를 받고 다음날 새남터에서 주교, 브르뜨니애르 신부, 볼리외 신부의 처형을 순서대로 목격한 후에 마지막으로 2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3명의 순교자의 시체와 함께 신자들이 외고개에 매장하였다가 유해는 용산 대신학교와 명동 대성당을 거쳐 오늘날에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의 지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브르뜨니애르 신부, 볼리외 신부와 함께 1968년에 복자 대열에 들었고 1984년에는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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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베르나르-루이 볼리외(Bernard-Louis Beaulieu. 1840-1866)

      프랑스 보르도 교구 출신인 볼리외 신부는 1840년 10월 8일, 랑곤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849년에 랑곤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에 중국의 선교사였던 어느 성직자의 경험담을 듣고 선교사가 되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1857년에 그는 보르도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 동안 수학한 후에 부제품(副祭品)을 받고 어린 시절에 세운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교구장에게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입학 허가를 청원하였다. 그러나 교구 이적을 허용치 않는 보르도 교구의 정책과 폐렴에 의한 건강 약화로 한때 볼리외는 그의 소망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곧 건강이 회복되고 교구장의 특별 허가로 그는 1863년 8월 28일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듬해 5월 21일에 평생 동료가 될 브르뜨니애르 신부와 함께 사제 서품을 받았다. 1개월이 못되어 볼리외 신부는 조선 선교의 소임(所任)을 받고 브르뜨니애르 등 세 명의 동료들과 함께 1864년 7월 19일에 프랑스를 떠나 2개월의 항해 끝에 홍콩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다시 요동으로 향하였다.

      1865년 4월 17일에 볼리외 신부는 동료 일행과 함께 요동을 떠나 위에서 언급한 경로를 거쳐 5월 27일에 그의 부임 선교지에 잠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조선 교우들에게는 서 몰례(徐沒禮) 신부라고 불리던 그는 내포 지방의 교우촌에서 하루를 보내고 상경하여 주교댁에서 며칠 머무른 후에 경기도 광주 지방의 묘론리(卯論里) 교우촌으로 가서 장 제철(張濟哲)이라는 신입 교우 집에서 조선어를 배우고 있었다. 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베르뇌 주교는 볼리외 신부가 이제는 어느 정도 조선어를 습득하여 성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작은 교우촌을 맡겼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첫 임지로 출발하려는 준비를 끝내었을 때에 그를 모시러 온 교우촌의 신자들이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볼리외 신부는 새 임지의 신자들을 돌려보내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신앙심이 약한 마을 신자 몇 명이 신부로 인해 피해를 받을까봐 피신을 권유하였다.

      신자들의 성화에 못 견딘 신부는 3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토리)의 이 여습(李汝習)이라는 교우 집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2월 27일 아침에 포졸들이 은신처를 급습하여 신부를 체포하였다. 볼리외 신부는 같은 날에 체포된 도리 신부와 함께 한양 포도청에 압송되었다. 그는 포장의 심문에 입국 경로와 목적을 설명하고 본국 송환보다는 순교하기를 원한다고 명백히 밝히고 아직 조선인과의 언어 장벽이 있어서 교리를 가르친 사람이 없으며 신자들의 이름을 댈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의금부에 4일 동안 구금되어 있으면서 세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았는데 그중에서 두 차례는 정강이를 형장(刑杖)으로 아홉 번 때리는 형벌을 받았다. 심문과 고문이 끝난 후에 볼리외 신부는 감옥에 끌려와 이미 구금되어 있던 베르뇌 주교와 브르뜨니애르 신부를 만났다. 그는 3월 7일에 베르뇌 주교와 두 명의 동료 신부들과 함께 새남터 형장에 끌려가 순교하였다. 이때에 그의 나이는 26세로서 가장 어린 순교 선교사가 되었다.

    30.1.3 삐에르-앙리 도리(Pierre-H두갸 Dorie. 1839-1866)

      조선 교우들에게 김(金) 신부라고 불리던 도리 신부는 1839년 9월 23일에 뤼쏭 교구 관할 지역인 쌩-띨래르-드 딸몽이라는 어촌의 가난한 집안에서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본당의 보좌신부의 주선으로 1852년 10월에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8년 후 뤼쏭 대신학교에서 2년 동안 수학하던 중,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쉽게 실현될 수 없었다. 본당 신부는 건강을 이유로 추천을 주저하였고 그의 모친은 아들과의 이별의 고통 때문에 반대하였다. 결국 1862년 8월 23일에 도리는 그의 모친과 본당 신부를 설득시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1864년 5월 21일에 이미 언급한 브르뜨니애르와 볼리외와 함께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이 두 동료 그리고 위앵 신부와 함께 조선 선교의 사명을 받고 7월에 프랑스를 떠나 홍콩에 도착하였고 즉시 조선 입국을 대기하기 위해서 요동으로 떠났다.

      1865년 5월 27일에 도리 신부는 동료들과 함께 내포 지방에 상륙하였다가 볼리외 신부와 함께 상경하여 베르뇌 주교의 지시로 교우집이 10여 채 있는 손골 마을(경기도 용인군 손곡리)에서 어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볼리외 신부가 머물고 있는 묘론리가 ‘하우 고개’라는 산등성이 하나를 사이로 인접해 있어서 서로 격려하며 지낼 수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도리 신부는 어학 학습의 진도는 다른 선교사들보다 뒤졌지만 조선 풍습에는 가장 쉽게 적응하였고 신자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866년 2월 27일 오전에 그는 볼리외 신부가 조금 전에 포졸들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신자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집에 머물러 있기로 하고 신자들에게는 피신을 지시하였다. 이미 한양에서 주교댁 하인이었던 이 선이(李先伊)가 신부들의 거처를 제보하였기 때문에 같은 날 오후 1시에 포졸들은 도리 신부의 숙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음날인 2월 28일에 도리 신부는 볼리외 신부와 함께 각기 들것에 실려 죄인 압송의 관습대로 양손이 홍사(紅絲)로 가슴 위에 묶이고 중죄인이 쓰는 갓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한양 포도청에 도착하였다.

      도리 신부는 의금부로 이송된 후에 볼리외 신부처럼 세 차례의 심문을 받으면서 두 차례에 걸쳐 형추(刑推)의 고문을 받았다. 그는 심문에서 입국 경로와 목적을 밝히고 자기는 조선어를 잘하지 못하여 신자들과 접촉한 일이 없고 다만 새해를 맞이하여 볼리외 신부와 함께 상경하여 주교댁에 며칠 지내고 귀가하였다가 잡혀온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당시에 조정에서는 과거와는 달리 선교사들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처형 이전에 국외 축출, 즉 본국 송환의 조처를 취하기로 하였다. 도리 신부는 이러한 본국 송환보다는 이 땅에서 순교하기를 원한다고 분명히 뜻을 밝혔다. 3월 6일에 그는 베르뇌 주교와 2명의 동료와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 선고를 받고 다음날 새남터에서 주교, 브르뜨니애르 신부, 볼리외 신부의 처형을 순서대로 목격한 후에 마지막으로 2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3명의 순교자의 시체와 함께 신자들이 외고개에 매장하였다가 유해는 용산 대신학교와 명동 대성당을 거쳐 오늘날에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의 지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브르뜨니애르 신부, 볼리외 신부와 함께 1968년에 복자 대열에 들었고 1984년에는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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