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순교자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1814-1866)

 

홍 봉주(洪鳳周, 토마스. 1814-1866)


  홍 봉주는 기해대박해(1839) 중에 순교한 홍 재영(洪榟榮, 쁘로다시오)의 큰아들로서 1814년에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어려운 신자들을 집에 맞아들여 헌신적으로 보살펴주던 모범적 교우 가정이었다. 박해 중에 홍 봉주는 그의 부친, 동생, 처자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아내 심 소사(沈召史, 바르바라. 1812-1839)는 시아버지처럼 순교하였다. 심 바르바라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석달 동안 옥중에서 고통을 받다가 1839년 10월 6일(음력)에 병사하였다. 또한 두 살 난 아들(베드로)도 굶주림과 병으로 옥사하였다.


  그러나 홍 봉주 자신은 포도청에 끌려간 후 8월 19일(음력)에 그의 동생과 함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는 후에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교회에 돌아와 교회 활동, 특히 선교사를 입국시키고 복사(服事)일에 헌신하였다. 그는 1855년에 중국 상해에 건너가 그곳에서 심덕성(沈德成)이라는 중국인의 배를 빌어 1866년 1월에 베르뇌 주교, 쁘띠니꼴라 신부, 뿌르티에 신부 등 선교사들을 안내하였다. 홍 봉주는 주교를 자기 집에 모시고 10년 동안 성무와 선교 활동을 도우며 교회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1866년 2월 3일에 홍 봉주는 베르뇌 주교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남 종삼과 함께 모반 죄인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이는 그가 삼국 동맹안을 제안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사실, 그는 이러한 동맹안의 창안자로서 이를 실현하는 데에 있어서 적극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청(淸)과의 애휘(愛暉) 조약과 북경조약(1860)을 통해서 중국 대륙 일부를 자국(自國)의 영토로 편입한 러시아가 1864년부터 두만강 국경을 넘어와 조선 왕국과의 통상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이 사건을 러시아의 남침의 징조로 우려하였다. 여기서 홍 봉주는 1865년에 러시아의 진출에 대한 위험을 여러 차례에 걸쳐 조정에 진정하였고 남 종삼 승지에게 방아책(防俄策)으로 조선과 프랑스 조약 체결을 건의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료와 함께 주교의 주선에 의한 조선 왕국, 프랑스, 영국의 삼국 동맹안에 대한 건의서를 작성하여 대원군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후세의 역사가는 이 제안을 시세(時世)에 순응한 선각자의 행위로서 그 의도는 신교 자유의 획득과 국교 체결을 통한 서구 문물 도입과 이에 따른 부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이는 매국의 행위로 단죄되었고 천주교 신봉과 함께 홍 봉주가 남 종삼처럼 십자가에 결박되어 순교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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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순교자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1814-1866)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홍 봉주(洪鳳周, 토마스. 1814-1866)

      홍 봉주는 기해대박해(1839) 중에 순교한 홍 재영(洪榟榮, 쁘로다시오)의 큰아들로서 1814년에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어려운 신자들을 집에 맞아들여 헌신적으로 보살펴주던 모범적 교우 가정이었다. 박해 중에 홍 봉주는 그의 부친, 동생, 처자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의 아내 심 소사(沈召史, 바르바라. 1812-1839)는 시아버지처럼 순교하였다. 심 바르바라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석달 동안 옥중에서 고통을 받다가 1839년 10월 6일(음력)에 병사하였다. 또한 두 살 난 아들(베드로)도 굶주림과 병으로 옥사하였다.

      그러나 홍 봉주 자신은 포도청에 끌려간 후 8월 19일(음력)에 그의 동생과 함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는 후에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교회에 돌아와 교회 활동, 특히 선교사를 입국시키고 복사(服事)일에 헌신하였다. 그는 1855년에 중국 상해에 건너가 그곳에서 심덕성(沈德成)이라는 중국인의 배를 빌어 1866년 1월에 베르뇌 주교, 쁘띠니꼴라 신부, 뿌르티에 신부 등 선교사들을 안내하였다. 홍 봉주는 주교를 자기 집에 모시고 10년 동안 성무와 선교 활동을 도우며 교회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1866년 2월 3일에 홍 봉주는 베르뇌 주교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남 종삼과 함께 모반 죄인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이는 그가 삼국 동맹안을 제안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사실, 그는 이러한 동맹안의 창안자로서 이를 실현하는 데에 있어서 적극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청(淸)과의 애휘(愛暉) 조약과 북경조약(1860)을 통해서 중국 대륙 일부를 자국(自國)의 영토로 편입한 러시아가 1864년부터 두만강 국경을 넘어와 조선 왕국과의 통상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이 사건을 러시아의 남침의 징조로 우려하였다. 여기서 홍 봉주는 1865년에 러시아의 진출에 대한 위험을 여러 차례에 걸쳐 조정에 진정하였고 남 종삼 승지에게 방아책(防俄策)으로 조선과 프랑스 조약 체결을 건의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료와 함께 주교의 주선에 의한 조선 왕국, 프랑스, 영국의 삼국 동맹안에 대한 건의서를 작성하여 대원군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후세의 역사가는 이 제안을 시세(時世)에 순응한 선각자의 행위로서 그 의도는 신교 자유의 획득과 국교 체결을 통한 서구 문물 도입과 이에 따른 부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이는 매국의 행위로 단죄되었고 천주교 신봉과 함께 홍 봉주가 남 종삼처럼 십자가에 결박되어 순교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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