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聖) 루까 황 석두(黃錫斗, 1813-1866)
보령 수영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 등 선교사들과 함께 순교한 황 석두는 1813년에 충청도 연풍 지방의 부유한 양반 집안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황 재건이라고도 불리던 그는 부친의 소망대로 입신 출세를 위해 오직 과거 공부에 힘썼고 급제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게 되었을 때에 집을 떠나 한양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황 석두는 상경 도중에 어느 주막에서 유식한 교우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이제까지 공부한 유학에서 들어보지 못한 진리에 매혹되었다. 그는 좀더 자세하게 탐구하기 위해서 그 천주교인을 따라가 과거 여비를 털어 몇 가지 중요한 교회 서적을 구입하여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귀가하였다. 이후로 그는 두문불출하고 교리 연구에 전념하였다. 부친은 아들이 그의 소망을 저버렸을뿐 아니라, 양반 가문을 파멸로 끌고 있다고 생각, 대노하여 그를 학대하였다.
황 석두는 아버지가 입을 열기만 하면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고 벙어리 행세에 들어가서 가정의 개종을 기도하였다. 이 동안에 집안에서는 그가 병이 든 것으로 생각하고 갖가지 약으로 치료하고자 노력하였다. 기해대박해(1839)가 지난 후 벙어리 노릇 3년 만에 황 석두는 집안 식구의 천주교 입교를 성공시켰다.
1845년에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에 황 석두는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주교는 그를 신부로 만들려고 고려하였고 이에 대해 그의 아내도 별거하여 독신 생활을 하기로 동의하였으나 이는 성취되지 못하였다. 한편 황 석두의 집안은 가장의 별세 이후에 가세가 기울어져 그는 가사를 돕기 위해 그를 신용하던 교우들에게 돈을 꾸어 투기 사업을 하였으나 채권자들만 파산시켰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황 석두의 신용 보증에 이용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그를 신자 공동체에서 추방하였다. 10년 후인 1858년에 황 루까는 페롱 신부의 권고로 사업을 포기하였다. 그는 죠안노 신부를 돕다가 신부의 별세(1863) 이후에 베르뇌 주교의 복사가 되었고 이어서 다블뤼 보좌 주교의 저술 활동을 도왔다. 이 동안에 그는 검소하게 살면서 모든 빚을 갚아 피해 입었던 채권자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866년 3월에 다블뤼 주교 등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을 때에 주교의 주선으로 풀려날 수 있었으나 황 루까는 고집하여 순교길에 동행하였다. 1866년 3월 23일에 선교사들과 함께 신문과 고문 중에서 신앙을 고백한 후 치명하였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이 찾아가 매장하였다. 황 석두 역시 1968년에 복자위에 오른 후 1984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聖) 루까 황 석두(黃錫斗, 1813-1866)
보령 수영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 등 선교사들과 함께 순교한 황 석두는 1813년에 충청도 연풍 지방의 부유한 양반 집안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황 재건이라고도 불리던 그는 부친의 소망대로 입신 출세를 위해 오직 과거 공부에 힘썼고 급제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게 되었을 때에 집을 떠나 한양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황 석두는 상경 도중에 어느 주막에서 유식한 교우를 만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이제까지 공부한 유학에서 들어보지 못한 진리에 매혹되었다. 그는 좀더 자세하게 탐구하기 위해서 그 천주교인을 따라가 과거 여비를 털어 몇 가지 중요한 교회 서적을 구입하여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귀가하였다. 이후로 그는 두문불출하고 교리 연구에 전념하였다. 부친은 아들이 그의 소망을 저버렸을뿐 아니라, 양반 가문을 파멸로 끌고 있다고 생각, 대노하여 그를 학대하였다.
황 석두는 아버지가 입을 열기만 하면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고 벙어리 행세에 들어가서 가정의 개종을 기도하였다. 이 동안에 집안에서는 그가 병이 든 것으로 생각하고 갖가지 약으로 치료하고자 노력하였다. 기해대박해(1839)가 지난 후 벙어리 노릇 3년 만에 황 석두는 집안 식구의 천주교 입교를 성공시켰다.
1845년에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에 황 석두는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주교는 그를 신부로 만들려고 고려하였고 이에 대해 그의 아내도 별거하여 독신 생활을 하기로 동의하였으나 이는 성취되지 못하였다. 한편 황 석두의 집안은 가장의 별세 이후에 가세가 기울어져 그는 가사를 돕기 위해 그를 신용하던 교우들에게 돈을 꾸어 투기 사업을 하였으나 채권자들만 파산시켰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황 석두의 신용 보증에 이용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그를 신자 공동체에서 추방하였다. 10년 후인 1858년에 황 루까는 페롱 신부의 권고로 사업을 포기하였다. 그는 죠안노 신부를 돕다가 신부의 별세(1863) 이후에 베르뇌 주교의 복사가 되었고 이어서 다블뤼 보좌 주교의 저술 활동을 도왔다. 이 동안에 그는 검소하게 살면서 모든 빚을 갚아 피해 입었던 채권자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866년 3월에 다블뤼 주교 등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을 때에 주교의 주선으로 풀려날 수 있었으나 황 루까는 고집하여 순교길에 동행하였다. 1866년 3월 23일에 선교사들과 함께 신문과 고문 중에서 신앙을 고백한 후 치명하였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이 찾아가 매장하였다. 황 석두 역시 1968년에 복자위에 오른 후 1984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