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자유 이후의 교회 발전
35.1.1 교회와 국가
조선 천주교회는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의 조인 및 비준(1886/1887)으로 국가로부터 신교 자유에 대한 암시적 공인을 받아 내어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어느 정도 자유롭게 성무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들은 1백여 년 동안의 지하 교회에서 나와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입고 다니던 상복과 머리에 쓰고 있던 방갓을 벗어 버리고 얼굴을 가리우던 포선(布扇)도 거두고서 검은 수단의 성직자 복장으로 나다닐 수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선교사들 중에서 뽀아넬 신부가 제일 먼저 상투를 자르고 수단을 입었고 블랑 주교는 상투를 자를 때에 섭섭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891년에 뮈뗄 주교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성직자들은 프랑스의 국민으로서 호조(護照, 오늘날의 여권)를 갖고서 조선 국내의 어느 곳에든지 다닐 수 있었지만 선교사로서 활동하기에 필요한 완전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고 조선-프랑스 조약에 의해 조선 정부가 지정한 장소인 제물포(인천), 원산, 부산 등의 개항지와 한양 및 양화진 통상 지역에서만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선교 자유가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조선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점진적으로 개선되었다. 1864년 갑오경장의 정치 개혁을 통해서 조선 정부는 만인 평등 사회를 주창하면서 과거에 누명으로 구속된 사람을 석방하고 이미 죽은 이들에 대해서는 복권시키는 조처를 취하여 천주교 신봉으로 처형된 남 종삼(요한)과 그 일가가 이 특사의 혜택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 왕가도 천주교에 대한 적의(敵意) 태도에서 호의적 자세로 전환하였을 뿐 아니라 국왕의 묵인 아래에 입교하는 왕족이 나타났다. 우선 1895년에 국왕 고종은 뮈뗄 주교를 초청하여 만난 자리에서 과거의 천주교 박해(병인대박해)는 자기와 무관한 사건이며 이를 유감으로 생각한다면서 조선 왕국과 천주교의 우호 관계 성립에 대한 희망 의사를 밝혔다. 아울러 국왕의 제의로 이루어진 알현 후에도 고종은 조선에서 일본과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프랑스의 보호와 영향력 강화를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주교의 중재 협조를 요청하였고, 뮈뗄 주교는 국왕과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의 회담을 주선하였다. 그리고 1897년에 조선 국왕이 어떠한 외세의 간섭없이 황제에 즉위할 수 있다는 뮈뗄 주교의 자문을 받고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한편 1896년 10월 11일에 국왕의 모친이며 병인대박해의 장본인인 흥선 대원군의 부인인 민부대인(閔府大人)이 뮈뗄 주교에게 세례를 청하여 비밀히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고 견진을 받았으며 선종하기 1년 전에 주교에게 고해 성사를 받고 성체를 모셨다. 대부인은 사망하기 전에 뮈뗄 주교에게 그의 남편 대원군을 만나 줄 것을 권유하여 뮈뗄 주교는 면회 요청 서신을 보냈으나 대원군에게 감사의 답장을 받았을 뿐 심방은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왕가 및 중앙 정부의 호의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 천주교는 관리 및 주민들과 충돌하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이러한 긴장 사태를 해소하기 위하여 교회는 조선 정부와 ‘교민 조약’(1899년) ‘교민 화해 조약’(1901년), ‘선교 조약’(1904)등을 체결하는 법적 조처를 취하였다. 이러한 조약은 국내 차원에서 교회와 국가가 동등한 입장을 취하면서 정교(政敎)외분리 원칙을 확인하고 이에 따라 정교 분쟁의 해결을 모색하기 위한 조치였다. 동시에 조약 체결의 당사자는 로마 교황청과 대한제국이 아니라 조선교구의 책임자인 교구장이나 국내에 머물고 있는 자국의 거류민을 보호하는 프랑스 공사와 조선 정부의 내부 대신 또는 외부 대신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들은 국제적 규약이기보다 국내에 관계되는 행정적 조처였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 보호 조약은 일본의 헌법적 신교(信敎) 자유가 적용되어 국가 정책적 신교 자유의 보장이 헌법상 종교 자유의 공인으로 발전하였고, 이로써 천주교는 신생 개신교와 함께 급속적 발전의 길에 들어섰다.

선교 자유 이후의 교회 발전
35.1.1 교회와 국가
조선 천주교회는 ‘조선-프랑스 수호 통상 조약’의 조인 및 비준(1886/1887)으로 국가로부터 신교 자유에 대한 암시적 공인을 받아 내어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어느 정도 자유롭게 성무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들은 1백여 년 동안의 지하 교회에서 나와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입고 다니던 상복과 머리에 쓰고 있던 방갓을 벗어 버리고 얼굴을 가리우던 포선(布扇)도 거두고서 검은 수단의 성직자 복장으로 나다닐 수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선교사들 중에서 뽀아넬 신부가 제일 먼저 상투를 자르고 수단을 입었고 블랑 주교는 상투를 자를 때에 섭섭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891년에 뮈뗄 주교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성직자들은 프랑스의 국민으로서 호조(護照, 오늘날의 여권)를 갖고서 조선 국내의 어느 곳에든지 다닐 수 있었지만 선교사로서 활동하기에 필요한 완전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고 조선-프랑스 조약에 의해 조선 정부가 지정한 장소인 제물포(인천), 원산, 부산 등의 개항지와 한양 및 양화진 통상 지역에서만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선교 자유가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조선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점진적으로 개선되었다. 1864년 갑오경장의 정치 개혁을 통해서 조선 정부는 만인 평등 사회를 주창하면서 과거에 누명으로 구속된 사람을 석방하고 이미 죽은 이들에 대해서는 복권시키는 조처를 취하여 천주교 신봉으로 처형된 남 종삼(요한)과 그 일가가 이 특사의 혜택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 왕가도 천주교에 대한 적의(敵意) 태도에서 호의적 자세로 전환하였을 뿐 아니라 국왕의 묵인 아래에 입교하는 왕족이 나타났다. 우선 1895년에 국왕 고종은 뮈뗄 주교를 초청하여 만난 자리에서 과거의 천주교 박해(병인대박해)는 자기와 무관한 사건이며 이를 유감으로 생각한다면서 조선 왕국과 천주교의 우호 관계 성립에 대한 희망 의사를 밝혔다. 아울러 국왕의 제의로 이루어진 알현 후에도 고종은 조선에서 일본과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프랑스의 보호와 영향력 강화를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주교의 중재 협조를 요청하였고, 뮈뗄 주교는 국왕과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의 회담을 주선하였다. 그리고 1897년에 조선 국왕이 어떠한 외세의 간섭없이 황제에 즉위할 수 있다는 뮈뗄 주교의 자문을 받고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한편 1896년 10월 11일에 국왕의 모친이며 병인대박해의 장본인인 흥선 대원군의 부인인 민부대인(閔府大人)이 뮈뗄 주교에게 세례를 청하여 비밀히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고 견진을 받았으며 선종하기 1년 전에 주교에게 고해 성사를 받고 성체를 모셨다. 대부인은 사망하기 전에 뮈뗄 주교에게 그의 남편 대원군을 만나 줄 것을 권유하여 뮈뗄 주교는 면회 요청 서신을 보냈으나 대원군에게 감사의 답장을 받았을 뿐 심방은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왕가 및 중앙 정부의 호의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 천주교는 관리 및 주민들과 충돌하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이러한 긴장 사태를 해소하기 위하여 교회는 조선 정부와 ‘교민 조약’(1899년) ‘교민 화해 조약’(1901년), ‘선교 조약’(1904)등을 체결하는 법적 조처를 취하였다. 이러한 조약은 국내 차원에서 교회와 국가가 동등한 입장을 취하면서 정교(政敎)외분리 원칙을 확인하고 이에 따라 정교 분쟁의 해결을 모색하기 위한 조치였다. 동시에 조약 체결의 당사자는 로마 교황청과 대한제국이 아니라 조선교구의 책임자인 교구장이나 국내에 머물고 있는 자국의 거류민을 보호하는 프랑스 공사와 조선 정부의 내부 대신 또는 외부 대신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들은 국제적 규약이기보다 국내에 관계되는 행정적 조처였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 보호 조약은 일본의 헌법적 신교(信敎) 자유가 적용되어 국가 정책적 신교 자유의 보장이 헌법상 종교 자유의 공인으로 발전하였고, 이로써 천주교는 신생 개신교와 함께 급속적 발전의 길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