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베네딕토 13세 교황 Benedikt ⅩⅢ. 1394~1417
대립 교황으로서 매우 어려운 시기에 교황직을 수행하였다. 교황들은 아비뇽에 정주하였고 교회는 분열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교황과 대립 교황이 동시에 통치하였다.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 서거 후 추기경들은 아비뇽에서 1394년 9월 28일 페드로(Pedro de Luna)를 그의 후임자로 선출하였다. 베네딕토 13세라는 이름을 선택한 베드로는 스페인 출신으로서 특히 교회법에 정통한 매우 박학한 인물이었다. 그는 1328년에 출생하였고 1375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베네딕토 13세는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하였고, 아울러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필요할 경우 교황직으로부터 퇴위할 것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교황으로 선출된 후 자신의 약속을 외면하였고, 그 대신 로마에 정주하고 있던 보니파시오 9세 교황과 개인적으로 만날 것을 제안하였다.
그사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시노드는 두 교황의 퇴위 문제를 논의하면서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모색하였다. 그래서 프랑스의 국왕은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에게 퇴위를 종용하였으나 교황은 퇴위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국왕은 이러한 모색에 동의하는 추기경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아울러 독일, 영국 그리고 스페인도 동의를 표명하였다. 그래서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와 담판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사이 파리의 시노드는 베네딕토 13세의 퇴위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결의하였다. 시노드의 이러한 결의는 일반적인 지지를 얻었고, 18명의 추기경들이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398년에 시작된 교황궁(아비뇽)에 대한 공격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토 13세는 사실상 교황궁에 감금된 상태에 있다가, 1403년 3월에는 프로방스로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와의 회담을 제안하였으나 보니파시오 9세는 1404년에 서거하고 말았다. 이에 베네딕토 13세는 로마에 모인 추기경들에게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으나, 추기경들은 그레고리오 12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두 교황의 만남은 실현되지 않았다. 원래 사보나(Savona)에서 두 교황은 만날 것을 약속하였고, 실제로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까지 도달하였으나 만남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베네딕토 13세는 페르피냔(Perpignan)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자기를 지지하던 대부분의 추기경들조차도 참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추기경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의 지지자들과 함께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피사의 공의회는 1409년 두 교황을 이간자, 이단자 그리고 서약 파기자 등의 죄목으로 단죄하였고, 하나의 교회가 제시하는 신앙의 정식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교황직으로부터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교황으로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세 명의 교황이 공존하게 되었다. 1417년 6월 26일 콘스탄츠 공의회가 베네딕토 13세의 퇴위를 거듭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토 13세는 자신의 교황직을 포기하지 않았다. 베네딕토 13세는 1423년 5월 23일 서거하였다.

238. 베네딕토 13세 교황 Benedikt ⅩⅢ. 1394~1417
대립 교황으로서 매우 어려운 시기에 교황직을 수행하였다. 교황들은 아비뇽에 정주하였고 교회는 분열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교황과 대립 교황이 동시에 통치하였다.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 서거 후 추기경들은 아비뇽에서 1394년 9월 28일 페드로(Pedro de Luna)를 그의 후임자로 선출하였다. 베네딕토 13세라는 이름을 선택한 베드로는 스페인 출신으로서 특히 교회법에 정통한 매우 박학한 인물이었다. 그는 1328년에 출생하였고 1375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베네딕토 13세는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하였고, 아울러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필요할 경우 교황직으로부터 퇴위할 것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교황으로 선출된 후 자신의 약속을 외면하였고, 그 대신 로마에 정주하고 있던 보니파시오 9세 교황과 개인적으로 만날 것을 제안하였다.
그사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시노드는 두 교황의 퇴위 문제를 논의하면서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모색하였다. 그래서 프랑스의 국왕은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에게 퇴위를 종용하였으나 교황은 퇴위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국왕은 이러한 모색에 동의하는 추기경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아울러 독일, 영국 그리고 스페인도 동의를 표명하였다. 그래서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와 담판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사이 파리의 시노드는 베네딕토 13세의 퇴위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결의하였다. 시노드의 이러한 결의는 일반적인 지지를 얻었고, 18명의 추기경들이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398년에 시작된 교황궁(아비뇽)에 대한 공격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토 13세는 사실상 교황궁에 감금된 상태에 있다가, 1403년 3월에는 프로방스로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와의 회담을 제안하였으나 보니파시오 9세는 1404년에 서거하고 말았다. 이에 베네딕토 13세는 로마에 모인 추기경들에게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으나, 추기경들은 그레고리오 12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두 교황의 만남은 실현되지 않았다. 원래 사보나(Savona)에서 두 교황은 만날 것을 약속하였고, 실제로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까지 도달하였으나 만남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베네딕토 13세는 페르피냔(Perpignan)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자기를 지지하던 대부분의 추기경들조차도 참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추기경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의 지지자들과 함께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피사의 공의회는 1409년 두 교황을 이간자, 이단자 그리고 서약 파기자 등의 죄목으로 단죄하였고, 하나의 교회가 제시하는 신앙의 정식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교황직으로부터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교황으로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하였다. 이로써 세 명의 교황이 공존하게 되었다. 1417년 6월 26일 콘스탄츠 공의회가 베네딕토 13세의 퇴위를 거듭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토 13세는 자신의 교황직을 포기하지 않았다. 베네딕토 13세는 1423년 5월 23일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