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11세 교황 Pius 11.

 298. 비오 11세 교황  Pius Ⅺ.  1922~1939

1922년 2월 6일 추기경들은 밀라노의 대주교로 재직하고 있던 아킬레(Achille Ratti)를 교황 – 비오 11세 – 으로 선출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1857년 5월 31일 몬차(Monza) 근처의 데시오(Desio)에서 출생하였으며, 밀라노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1907년 암브로시오 도서관장을 역임하였고, 1914년에는 바티칸 도서관장으로 임명되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1918년 그를 폴란드 교회에 대한 사도좌 순시자(Apostolischen Visitator)으로 임명하였고, 1919년에는 폴란드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하였다. 1921년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교황 비오 11세의 구상은 스스로 요약하였듯이 ꡐ그리스도의 나라 안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실현하는 것ꡑ이었다. 그 때문에 교황 비오 11세는 전쟁이 끝난 후 백성들 가운데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헌신하였다.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교황 비오 11세는 1925년 성년(聖年, Heilige Jahr)를 활용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계속해서 두 차례에 걸친 성년을 반포하였다. 1929년 자신의 사제 서품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성년을 반포하였고, 그리스도의 죽음 19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933년에 성년을 반포하였다. 인류 사회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쇄시시키기 위해 교황 비오 11세는 가톨릭 활동을 장려하였으며, 모든 계층과 연령층의 신자들이 이러한 활동에 동참하기를 호소하였다.


  교황 비오 11세가 반포하였던 회칙들은 자신의 교도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교황 비오 11세는 1926년 「세계 선교에 관하여」, 1930년 「그리스도교의 결혼에 관하여」, 1931년 「그리스도교의 교육에 관하여」, 1931년 교황 레오 13세의 첫 번째 사회 회칙 Rerum navarum 반포 사십 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Quadragesimo Anno, 1935년 「사제직에 관하여」, 1937년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에 관하여」, 1937년 국가 사회주의를 겨냥한 Mit brennender Sorge 등의 회칙을 반포하였다. 1937년에는 학문 연구를 위한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선교 교황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토인 성직자의 양성과 배출 그리고 본토인 교계 제도의 설정 등은 선교 지역 출신의 주교임명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교황 비오 11세는 동방 교회, 성공회와의 대화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개념에 관한 차이 때문에 대화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황 비오 11세는 500명의 복자를 시복시켰고, 33명의 성인을 시성시켰다. 그 가운데에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베드로 카니시오, 돈 보스코, 대 알베르토, 파르잠의 콘라도, 아르스의 본당 신부 요한 비안네, 영국의 순교자 토마스 모어 그리고 존 피셔 등이 포함되어 있다.


  교황 비오 11세 재임 기간 중에 전쟁의 여파로 인해 새로운 정교 조약이 체결되었다. 1924년 바이에른, 1929년 프로이센, 1932년 바텐, 1933년 독일 등의 국가와 정교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른바 로마 문제의 해결도 교황 비오 11세가 남긴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 볼 수 있다. 1929년 2월 11일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바티칸의 주권을 보장하고, 재정 문제의 해결과 정교 조약의 체결에 합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라테라노 조약으로 교황 비오 11세는 이탈리아 정부와 화해하는 실마리를 잡았다.


  독일의 경우,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는 매우 긍정적으로 출발하였다. 히틀러의 등장으로 종교 자유에 대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박해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1933년 9월 10일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왔던 독일 제국과의 정교 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교황 비오 11세는 1937년에 공표한 회칙 Mit brennender Sorge를 통해 독일 제국의 정부가 정교 조약을 위반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여러 차례에 걸쳐 히틀러에게 서한을 보내어 정교 조약의 준수를 촉구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교회에 대한 박해와 관련해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주교는 뮌헨의 파울하버(Faulhaber) 추기경과 뮌스터의 그라프(Graf von Galen) 주교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교회에 대한 박해는 어느 정도 약화되었다. 독일 제국의 정부가 전쟁의 수행과 승리를 위해 모든 힘을 동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교황 비오 11세의 재임 기간 중 소련과 멕시코 등 지구상의 여러 국가가 박해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교황 비오 11세의 재임 마지막 기간은 곧 발발할 전쟁의 위협으로 인해 어두운 그늘에 덮여 있던 시기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1939년 2월 10일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몇 개월 앞두고 서거하였다. 2월 14일 교황 비오 11세는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교황 비오 11세의 재임 기간은 근대의 교황사와 교회사에 있어서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이른바 로마 문제의 해결을 비롯하여, 수많은 국가와의 정교 조약 체결, 평신도 사도직의 장려 그리고 선교 지역의 본토인 성직자의 양성 등은 다음 세대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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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8. 비오 11세 교황  Pius Ⅺ.  1922~1939

    1922년 2월 6일 추기경들은 밀라노의 대주교로 재직하고 있던 아킬레(Achille Ratti)를 교황 – 비오 11세 – 으로 선출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1857년 5월 31일 몬차(Monza) 근처의 데시오(Desio)에서 출생하였으며, 밀라노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1907년 암브로시오 도서관장을 역임하였고, 1914년에는 바티칸 도서관장으로 임명되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1918년 그를 폴란드 교회에 대한 사도좌 순시자(Apostolischen Visitator)으로 임명하였고, 1919년에는 폴란드 주재 교황 대사로 임명하였다. 1921년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교황 비오 11세의 구상은 스스로 요약하였듯이 ꡐ그리스도의 나라 안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실현하는 것ꡑ이었다. 그 때문에 교황 비오 11세는 전쟁이 끝난 후 백성들 가운데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헌신하였다.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교황 비오 11세는 1925년 성년(聖年, Heilige Jahr)를 활용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계속해서 두 차례에 걸친 성년을 반포하였다. 1929년 자신의 사제 서품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성년을 반포하였고, 그리스도의 죽음 1900년을 기념하기 위해 1933년에 성년을 반포하였다. 인류 사회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쇄시시키기 위해 교황 비오 11세는 가톨릭 활동을 장려하였으며, 모든 계층과 연령층의 신자들이 이러한 활동에 동참하기를 호소하였다.

      교황 비오 11세가 반포하였던 회칙들은 자신의 교도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교황 비오 11세는 1926년 「세계 선교에 관하여」, 1930년 「그리스도교의 결혼에 관하여」, 1931년 「그리스도교의 교육에 관하여」, 1931년 교황 레오 13세의 첫 번째 사회 회칙 Rerum navarum 반포 사십 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Quadragesimo Anno, 1935년 「사제직에 관하여」, 1937년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에 관하여」, 1937년 국가 사회주의를 겨냥한 Mit brennender Sorge 등의 회칙을 반포하였다. 1937년에는 학문 연구를 위한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선교 교황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토인 성직자의 양성과 배출 그리고 본토인 교계 제도의 설정 등은 선교 지역 출신의 주교임명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교황 비오 11세는 동방 교회, 성공회와의 대화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개념에 관한 차이 때문에 대화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황 비오 11세는 500명의 복자를 시복시켰고, 33명의 성인을 시성시켰다. 그 가운데에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베드로 카니시오, 돈 보스코, 대 알베르토, 파르잠의 콘라도, 아르스의 본당 신부 요한 비안네, 영국의 순교자 토마스 모어 그리고 존 피셔 등이 포함되어 있다.

      교황 비오 11세 재임 기간 중에 전쟁의 여파로 인해 새로운 정교 조약이 체결되었다. 1924년 바이에른, 1929년 프로이센, 1932년 바텐, 1933년 독일 등의 국가와 정교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른바 로마 문제의 해결도 교황 비오 11세가 남긴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 볼 수 있다. 1929년 2월 11일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바티칸의 주권을 보장하고, 재정 문제의 해결과 정교 조약의 체결에 합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라테라노 조약으로 교황 비오 11세는 이탈리아 정부와 화해하는 실마리를 잡았다.

      독일의 경우,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는 매우 긍정적으로 출발하였다. 히틀러의 등장으로 종교 자유에 대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박해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1933년 9월 10일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왔던 독일 제국과의 정교 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교황 비오 11세는 1937년에 공표한 회칙 Mit brennender Sorge를 통해 독일 제국의 정부가 정교 조약을 위반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여러 차례에 걸쳐 히틀러에게 서한을 보내어 정교 조약의 준수를 촉구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교회에 대한 박해와 관련해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주교는 뮌헨의 파울하버(Faulhaber) 추기경과 뮌스터의 그라프(Graf von Galen) 주교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교회에 대한 박해는 어느 정도 약화되었다. 독일 제국의 정부가 전쟁의 수행과 승리를 위해 모든 힘을 동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교황 비오 11세의 재임 기간 중 소련과 멕시코 등 지구상의 여러 국가가 박해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교황 비오 11세의 재임 마지막 기간은 곧 발발할 전쟁의 위협으로 인해 어두운 그늘에 덮여 있던 시기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1939년 2월 10일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몇 개월 앞두고 서거하였다. 2월 14일 교황 비오 11세는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교황 비오 11세의 재임 기간은 근대의 교황사와 교회사에 있어서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이른바 로마 문제의 해결을 비롯하여, 수많은 국가와의 정교 조약 체결, 평신도 사도직의 장려 그리고 선교 지역의 본토인 성직자의 양성 등은 다음 세대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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