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약의 하느님-(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항상 하느님게 예속되어 있으며,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비추어 볼 때 그 왕들은 죽어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에집트만 해도 지상의 왕은 바로 신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게약을 실현해야 하는 도구적 존재로서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고,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체결된 약속의 보증인이었다. 그러나 왕들은 이 임무를 이행하지 못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바쎄바를 훔치고, 솔로몬은 이방인들의 여인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아합 역시 외국 여인 이세벨을 맞아 우상숭배를 전국에 퍼트렸다. 이런 결과로 587년 바빌론 유배라는 왕정의 비참한 종말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예언자들은 이상적인 왕 메시아를 기대하는 희망으로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러한 이상적인 왕정, 메시아에 대한 희망과 신앙없이 이스라엘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애시당초 하느님 자신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어떤 중재적인 인물 메시아로 전환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고, 신약의 그리스도와 연결하게 되는 단계를 보게 된다. 이제 이 하느님의 왕권은 이 메시아라는 중재적 인물을 통해 다시 복구되어 새하늘과 새땅을 이룩하게 되고 거기서 하느님의 하느님이심, 하느님의 왕이심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신앙이 자리잡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또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을 이해하는데서 지혜문학은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 잠언 8장, 집회서 24장, 욥기 28장 이외의 지혜서들은 ‘지혜’를 창조 내재적인 것으로, 인격화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야훼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한 처음에
모든 것에 앞서 나를 지으셨다.
땅이 생기기 전에
그 옛날에 나는 이미 모습을 갖추었다.
깊은 바다가 생기기 전에,
샘에서 물이 솟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잠언 8,22-24)

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으로부터 나왔으며
안개와 같이 온 땅을 뒤덮었다.
나는 높은 하늘에서 살있고
내가 앉은 자리는 구름 기둥이다.
나 홀로 높은 하늘을 두루 다녔고
심연의 밑바닥을 거닐었다.
바다의 파도와 온 땅과
모든 민족과 나라를 나는 지배하였다.(집회 24,3-6)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은 이 ‘지혜’로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 설명된다.

야훼가 지혜로 땅의 터를 놓으시고
슬기로 하늘을 튼튼히 떠받치시며
지식으로 깊은 물줄기를 터뜨리시고
구름에서 이슬이 돋게 하셨다.(잠언 3,19-2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시며 자비로우신 주님,
당신은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으며
당신의 지혜로 인간을 내시어
당신 손에서 생명을 받은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게 하셨읍니다.

지혜는 당신과 함께 있으며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알고 있읍니다.
지혜는 당신께서 세상을 만드셨을 때부터 있었읍니다.
지혜는 당신께서 보시고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읍니다.

맨 먼저 조성된 인류의 아버지가 홀로 창조되었을 때에
그를 보호 해 준 것이 지혜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에 그를 구해 준 것이 또한 지혜였다.
(지혜 9,1 – 10,1)

나중에 교부들에게서 이 지혜는 신약 성서, 특히 요한 복음에서 말씀과 연결시켜 성자 예수와 등일시 하려는 시도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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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약의 하느님-(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 이스라엘의 왕정체험 : 왕정설립 : 사울을 도유함으로써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왕정을 설립한다. 그러나 이 왕정설립에 대해 사물엘에게서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측면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친왕정적 자세로서 원로들과 백성들의 비준을 통해 한 사람을 왕으로 옹립하고 추대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반왕정적인 태도인데 사울왕정을 신정의 거부로 이해하고 있는 점이다(사무 전 8,6; 10,17; 12,12). 이것은 주변의 다른 국가들처럼 이스라엘이 그들의 왕정체제로 동화될 위협을 느끼는 순간 사무엘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사무 전 8,5; 10,17). 어떤든 이스라엘의 경우 왕정제는 팔레스틴족들의 침입으로 인한 긴박성 때문에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사울은 그 이전의 판관들처럼 주님의 성령에 의해점유당한 카리스마적 우두머리였다(사무 전 10,6이하). 그가 사망한 후 다윗이 왕권을 차지하고, 다윗으로 말미암아 와정제가 발전을 이룬다. 나탄에게서 다윗의 가문은 하느님의 약속으로 보장받은 ‘영원한 왕국’의 수탁자가 된다(사무 후 7,5-16). 이렇게 해서 다윗 왕국은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이 된다. 왕들처럼 신의 다스림 내지 지배는 고대 동방지역에 있어서 널리 알려져 있는 바이지만, 신이란 어떠한 일정한 지역에서 통치하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신은 그 지역의 소유주로서 번영과 복지를 이룩하고 조화시키고, 교정시킨다. 신은 다스림 ㅇ벗이 이해될 수 없다. 그의 지상왕국은 그의 신성을 드러내는 장소였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왕으로 부르게 된 것은 왕정제 이후였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느님은 복종을 요구하는 왕으로서, 상관으로서 충실한 부하들인 인간들에게 충성을 받는 대신 부하들에게 보호와 생활보장을 약속하고 허락한다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역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리시다’라는 고백이 자주 등장한다(민수 ㅈㄷ,21; 판관 8,23; 사무 전 8,7; 12,12). 아모스, 제2이사야 예언자 이후 하느님은 모든 나라의 왕이시다(시편 22,29; 자카리아 14,16)라는 고백도 나타난다. 이러한 왕권적인 하느님의 통치는 이스라엘이 아주 어려운 고비를 맞이하는 순간 미래의 희망으로 나탄다(시편 46; 92; 96; 98),. 이러한 하느님의 오아이심에 비추어 이스라엘의 지상적인 왕은 하느님의 대리자로 이해될 뿐이다. 이 점이 다른 나라의 왕들과 다른 점이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항상 하느님게 예속되어 있으며,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비추어 볼 때 그 왕들은 죽어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에집트만 해도 지상의 왕은 바로 신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게약을 실현해야 하는 도구적 존재로서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고,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체결된 약속의 보증인이었다. 그러나 왕들은 이 임무를 이행하지 못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바쎄바를 훔치고, 솔로몬은 이방인들의 여인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아합 역시 외국 여인 이세벨을 맞아 우상숭배를 전국에 퍼트렸다. 이런 결과로 587년 바빌론 유배라는 왕정의 비참한 종말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예언자들은 이상적인 왕 메시아를 기대하는 희망으로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러한 이상적인 왕정, 메시아에 대한 희망과 신앙없이 이스라엘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애시당초 하느님 자신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어떤 중재적인 인물 메시아로 전환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되고, 신약의 그리스도와 연결하게 되는 단계를 보게 된다. 이제 이 하느님의 왕권은 이 메시아라는 중재적 인물을 통해 다시 복구되어 새하늘과 새땅을 이룩하게 되고 거기서 하느님의 하느님이심, 하느님의 왕이심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신앙이 자리잡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또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을 이해하는데서 지혜문학은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 잠언 8장, 집회서 24장, 욥기 28장 이외의 지혜서들은 ‘지혜’를 창조 내재적인 것으로, 인격화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야훼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한 처음에
    모든 것에 앞서 나를 지으셨다.
    땅이 생기기 전에
    그 옛날에 나는 이미 모습을 갖추었다.
    깊은 바다가 생기기 전에,
    샘에서 물이 솟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잠언 8,22-24)

    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으로부터 나왔으며
    안개와 같이 온 땅을 뒤덮었다.
    나는 높은 하늘에서 살있고
    내가 앉은 자리는 구름 기둥이다.
    나 홀로 높은 하늘을 두루 다녔고
    심연의 밑바닥을 거닐었다.
    바다의 파도와 온 땅과
    모든 민족과 나라를 나는 지배하였다.(집회 24,3-6)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은 이 ‘지혜’로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 설명된다.

    야훼가 지혜로 땅의 터를 놓으시고
    슬기로 하늘을 튼튼히 떠받치시며
    지식으로 깊은 물줄기를 터뜨리시고
    구름에서 이슬이 돋게 하셨다.(잠언 3,19-2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시며 자비로우신 주님,
    당신은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으며
    당신의 지혜로 인간을 내시어
    당신 손에서 생명을 받은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게 하셨읍니다.

    지혜는 당신과 함께 있으며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알고 있읍니다.
    지혜는 당신께서 세상을 만드셨을 때부터 있었읍니다.
    지혜는 당신께서 보시고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읍니다.

    맨 먼저 조성된 인류의 아버지가 홀로 창조되었을 때에
    그를 보호 해 준 것이 지혜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에 그를 구해 준 것이 또한 지혜였다.
    (지혜 9,1 – 10,1)

    나중에 교부들에게서 이 지혜는 신약 성서, 특히 요한 복음에서 말씀과 연결시켜 성자 예수와 등일시 하려는 시도를 본다.
    3.5. 구약의 하느님 이해의 종합적 결론

    1. 구약의 하느님 이해는 체험에서 비롯된다. 계속적으로 장소를 이동하며 생활하는 그들은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가능케해 주는 미지의 세력을 체험하고 자연스럽게 이를 하느님으로 공경하였고, 그들의 능력을 벗어나는 만사를 하느님께 돌렸다. 비록 그 것이 악일지라도. 즉 하느님을 만사를 통괄하는 실재로서 체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구약에서 일차적으로 인간의 선물체험이며 해방체험이다.
    2. 아브라함이 체험한 하느님은 토재신이 아니라 대인신이었으며, 인격신이었다. 떠돌이였던 그들을 보호해주고 촉복해준 실재로서의 하느님은 이방인들처럼 어떤 장소의 신이 아니라 인간들의 신이었다. 그렇기에 어디든지 사람이 있는 곳이면 존재하면서 권능을 드러내시며 인간과 함께 하시는 신이었다.
    3.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즉 선조들의 하느님은 ‘길의 신’, ‘초원의신’으로 ‘엘’ 또는 ‘엘로힘’으로 불리웠다. 엘신은 이방인들의 만신전에서 임금으로 군림하고 있는 엘신의 이미지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제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요, 세계의 창조주며, 우호적이고, 거룩하고, 인간에게 연민적이고, 품위있는 모습의 신으로서)
    4.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약속의 신이었다. 이방인들의 신화에서 나타나듯이 신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우주의 자연법칙을 따라 기계 돌아가듯 살게 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신의 역사가 향해가고 있는 미래의 현실을 가르키고, 궁극적 의의와 목표를 제시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살도록하고 그렇게 도와 주는 계약의 하느님이였다.
    5. 야훼라는 하느님은 모세로부터 이해된 하느님이다. 야훼신이 미디안 사람들의 신이었다는 학설도 있지만, 모세로부터 체험한 야훼 하느님은 출애급 사건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계시된 하느님이다. 이 사건을 통해 조상들의 하느님 엘의 약속의 하느님, 대인신으로서의 인격신의 모습을 체험하며 쉽게 엘=야훼의 동일성을 보았다.
    6.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해석하는데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있다)라는 어근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아서 <존재자>, <내가 있노라>하는 풀이가 있다. 이 <존재자>로서의 풀이는 희랍철학가들이 모든 현상 이면에 이 현상을 받쳐주는 근원으로서의 포괄적 개념과 만나며, 여기서 철학자들의 신과 신앙인들의 신이 교류될 수 있는 교량을 보게 된다. 여기에 대해 체험을 무시하고 신을 개념화, 신앙을 철학화, 이스라엘의 그리이스화에로의 전락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다.
    또 하느님의 이름을 ‘있다’(to be)의 사역형으로서, ‘있는것을 생기게 하는’(He causes to be, creates) 뜻을 가졋다고 해설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불가사의한 표현은 하느님의 창조적 행위를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내가 있게 하는 것을 있게 한다’(I cause to be what I cause to be), 또는 ‘나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창조한다’(I create what I create)는 것으로서, 달리 말하면 자연현상과 역사의 사건들이 창조주요 주님인 하느님의 뜻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또 여기서의 동사의 단순형을 미래시제로 번역하기도 한다. ‘나는 있을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14절의 선포를 그 다음 구절과 연관시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음 구절에서는 조상들의 하느님이 모세와 함께 있고 함께 가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3,12); “나는 너희 입과 함께 있을 것이다”(4,12.15)“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 주리라”(6,7)
    “나는 ‘있노라’하는 자이다”라는 이 야훼의 이름의 신학적 의미는 누구를, 무엇을 위한 존재로서 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훼라는 이 이름이 인간을 돕고 보호하시는 분으로서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이심을 제대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또 한편 야훼라는 이 이름은 본격적인 이름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나는 곧 나다”라고 해석되는 이 뜻은 판관 13,18이나 창세 32,30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름을 알려 주었다기보다 미지의 현실로 숨기는 부정적인 답변으로서, 야훼 하느님은 굳이 주변의 이방인들 신처럼 이름을 밝혀야만 드러날 수 있는 그런 존재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 거절의 표정에서 이방인들의 신들과는 달리 무한한 거리에 존재하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진술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신에 대한 상(우상)을 만들 수 없다는 이야기도 된다.
    7. 가나안 정착과 더불어 가나안 주민들의 신인 바알로 인해 이스라엘은 야훼 신앙의 위기를 맞이한다. 여호수아가 이끈 세켐 대집회에서 이스라엘 12부족은 새롭게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쇄신하는 의미로 계약갱신을 하면서 12부족 공동 연맹체를 결성하였지만, 주변 국가의 경제, 문화가 앞서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풍산신인 바알에게 매력을 느껴 자주 야훼신앙를 저버리며, 바알과 야훼 사이에서 갈등을 느껴왔다. 이런 갈등속에서 극복된 야훼신앙을 야훼가 바알처럼 성(性)을 지닌 신이 아니라 성 역시도 야훼 하느님은 초월하시는 존재요, 인간의 마술로도 조정되거나 지배되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바알 신신앙과의 갈등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사실은 야훼 하느님의 끊임없는 용서와 사랑에 대한 체험이다. 이 사랑의 신체험 역시 이스라엘 민족이 조상들의 하느님으로부터 일관성 있게 연결해주는 신 이해의 요소다.
    8. ‘질투하는 신’, 또는 ‘복수자’로 소개되는 야훼의 모습은 주변의 바알 신앙과 조금도 타협되거나 절충될 수 없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낸다.
    9. 주변의 제국들의 출현과 조우는 가족 수호신의 모습을 보여 주었던 조상들의 하느님 엘신, 민족의 수호신의 면모를 드러내셨던 모세의 하느님 야훼가 그 한계를 넘어 만방의 하느님, 더 나아가 우주의 하느님,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으로 소개된다. 이러한 점진적인 하느님의 이해는 예언자들에 의해 절정을 이룬다. 아모스, 호세아, 제2 이사야 등의 예언자로 말미암아 “나 이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라는 신조는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온 우주에도 해당되는 신앙고백으로 본격적인 유일신 신앙이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다른 신들은 그 권위가 실추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선언되고 배제된다.
    10. 지혜문학은 하느님이 인간과 자연의 창조주 이심을 고백하면서 창조활동에 있어서 어떤 인격화된 말씀, 또는 지혜하는 중재자를 언급하면서 신약의 제2 위격인 ‘말씀’(Logos)에 대한 사상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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