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찡거의 삼위일체 요약-중심과 주변

 

3) 부정신학으로서의 삼위일체론 :


인간의 말로써 가두어 둘 수 없는 神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부정의 방법이 더 나을 것이다. 즉, “최소한 이러이러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가 해결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증명하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단들은 이단인 동시에 어떤 영원한 진리를 거꾸로 말해주는 것이다. 자연과학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해의 도움을 받는다.


첫째, 한계성을 지닌 우리의 시야는 전체를 볼 수 없다. 물리학의 세계나 철학에서처럼 삼위일체(신학) 역시 그러하다. 서로 모순되는 듯한 것들이 모여 전체의 각 부분들을 보여주며, 어렴풋이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둘째, 우리는 유비적으로 神의 존재는 “관계(relatio)”라는 본질, 즉 관계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충만하게 됨을 알 수 있다. 물질은 파동이라는 움직임이 실체성을 지닌 입자로 보이는 것과 같다. 셋째, 불확정성의 원리를 통해, 우리는 관찰자로서 그 실험에 참가하며, 그 실험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 그것이 우리가 보기 전의 그 자연상태(?)와 같다고 확정할 수 없다. 神이라는 현실은 신앙이라는 실험 속에 神과 함께 들어가야 그 실험이 성립된다. 즉, 자신은 방관자요, 순수한 제3자로서 神을 관찰해낼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신앙이라는 실험 속에 들어가면, 약간은 변화된 값을 얻겠지만, 그 근사치는 神을 제대로 이해할 길을 연다. 분명 인간은 神을 확정해낼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神은 자신이 인간적임을, 또 체험될 수 있도록 자신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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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찡거의 삼위일체 요약-중심과 주변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 부정신학으로서의 삼위일체론 :

    인간의 말로써 가두어 둘 수 없는 神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부정의 방법이 더 나을 것이다. 즉, “최소한 이러이러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가 해결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증명하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단들은 이단인 동시에 어떤 영원한 진리를 거꾸로 말해주는 것이다. 자연과학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해의 도움을 받는다.

    첫째, 한계성을 지닌 우리의 시야는 전체를 볼 수 없다. 물리학의 세계나 철학에서처럼 삼위일체(신학) 역시 그러하다. 서로 모순되는 듯한 것들이 모여 전체의 각 부분들을 보여주며, 어렴풋이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둘째, 우리는 유비적으로 神의 존재는 “관계(relatio)”라는 본질, 즉 관계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충만하게 됨을 알 수 있다. 물질은 파동이라는 움직임이 실체성을 지닌 입자로 보이는 것과 같다. 셋째, 불확정성의 원리를 통해, 우리는 관찰자로서 그 실험에 참가하며, 그 실험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 그것이 우리가 보기 전의 그 자연상태(?)와 같다고 확정할 수 없다. 神이라는 현실은 신앙이라는 실험 속에 神과 함께 들어가야 그 실험이 성립된다. 즉, 자신은 방관자요, 순수한 제3자로서 神을 관찰해낼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신앙이라는 실험 속에 들어가면, 약간은 변화된 값을 얻겠지만, 그 근사치는 神을 제대로 이해할 길을 연다. 분명 인간은 神을 확정해낼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神은 자신이 인간적임을, 또 체험될 수 있도록 자신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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