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세례축일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써,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당신의 사명을 공적으로 부여받은 날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종”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하느님의 종”은 뭇 민족들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는 분이며,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지리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 만을 펴는 분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시켜 당신의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평화의 복음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기억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세례를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시작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우리 또한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면서 세례 때의 나의 약속과 결심등을 떠올려보고 세례 받은 후의 나의 모습, 지금의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것마저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을 믿고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이어야 하겠습니까? 어떠한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서야 하겠습니까? 오늘 독서에 비추어서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본다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나는 얼마나 자비로운 사람인지, 하느님께 자비를 바라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자비“를 베풀고 살아가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났기에 예수님의 사랑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개인적으로 자신이 보기에는 다 내세울 것이 있고,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잘났어도 예수님의 발바닥의 때만큼이라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무엇때문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주님 세례 축일
8. 김정진 신부(나)/ 16
9. 변기영 신부(나)/ 17 10. 강길웅 신부(나)/ 19
11. 김영진 신부(나)/ 21 12. 교구주보(나)/ 23
13. 김남조 시인(나)/ 24 14. 현실은 우리 각자(나)/ 25
8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세례와 신앙생활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주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한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아주 중요한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명을 깨닫고 이해하는데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도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할에 관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축일은 우리의 세례와도 직접 관계가 있어 우리의 영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의 세례 기념축일로서 성탄 시기가 끝나고 이제부터 연중 시기라고 부르는 전례상의 새로운 절기가 시작됩니다. 저 성탄날 밤에는 목자들에게 보이시고, 공현의 날에는 이방인들에게 보이신 예수님은 오늘 또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당신의 참모습을 나타내십니다. 수많은 군중앞에서 천주 성부로부터 당신의 사명을 장엄하게 또한 정식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가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구세주께서 이미 오셨음을 선언하고 있을 즈음에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와서 세례를 받으시자 닫혀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시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소리까지 들려왔습니다. 지금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보속하려는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방대한 아니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고 계시며 마치 하느님의 전권대사로 지상에 파견된 분으로서의 신임장을 받고 계시는 엄숙한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적에 예수님을 당신의 친아들로 소개하시고 이 순간부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당신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과 온갖 행동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은 하느님 성령이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독생성자로 또한 인간의 구원 사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파견된 구세주로 알아 받들어 모시고 또한 그분의 가르침과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는데 조금도 의심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적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축일은 성령과 예수님의 생애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구세주를 가르켜 하느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실 분>이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성령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내리셨고 또 예수께서 공생활을 준비하시기 위해 기도와 단식으로 사십 일동안 지내시도록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은 또한 예수님의 전생애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림하심으로써 세말까지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할 것을 교회의 목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성령은 교회를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공적 증거로서 교회의 무류성을 보증하고 계십니다.
끝으로 요르단강에서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이 우리가 세례를 받을 적에도 일어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말하기를 크리스천 세례는 성령 안에서 받는 세례라고 하였습니다(마르 1:8). 세례 때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사도직에 참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에 불과한데 비하면 크리스천의 세례는 이를 훨씬 능가하며 죄를 용서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는 성사입니다.
크리스천의 세례는 영세자로 하여금 교회의 일원(一員)이 되게 합니다. 교회는 주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립된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이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인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단체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도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더욱 개인적인 구원이란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협동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봉사적 활동을 하는 공동체적 신앙생활을 하는 자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을 큰 영예로 여기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니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9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세례로 신자되기 시작한다
변기영 신부
오늘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주께서 세례를 받아야 할만큼 무슨 죄가 있다거나 결함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를 받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하여 두 가지 종류를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세례자 요한이 베풀던 것이고, 하나는 우리 모두가 받은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베풀던 것입니다. 우선 흥미롭게 연구해 볼 만한 것으로서 그 당시 세례자 요한은 무슨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말씀하신 대로, 즉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푸시오(마태오 28,19)하신 말씀처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베풀었던 세례의 목적입니다.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정신개조, 혹은 개과천선의 계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새 출발의 의식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베풀었던 세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악과 그에 대한 벌까지도 용서받고 면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문교우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례로써 완전히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흔히 영세하면 이미 완전한 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더이상 교리 공부도 않고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세례란 예식은 신자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이지 완전히 신자되기를 마쳤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례로써 과거의 죄사함만을 너무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세례의 참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무슨 죄악을 씻기 위해 세례받은 것이 아니고 새로운 생활, 즉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은 세례의 목적은 우리의 죄많은 과거생활을 씻기 위해서보다도 앞으로의 덕스러운 신앙생활의 창조를 위해서 더욱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결국 세례의 주요목적이 각자 인생의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철저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죄많은 과거생활을 잊고 청산하며 양심의 부담을 덜고 용서받았다는 위안을 찾기 위해서 세례를 받고자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물론 이러한 태도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세례를 준비하기 위해 충분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례의 근본 의도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이라도 우리가 받은 세례를 상기하고 미래생활의 창조를 위하여 새롭고 거룩한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세례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참다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하는 것으로서 장래 훌륭하고 위대한 생활 설계보다도 비록 작을지라도 거룩한 인생을 위한 계획과 노력을 짜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로써 우리의 영혼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몇몇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순간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거처가 되고 궁전이 됩니다. 세례받지 않은 상태에서와는 달리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세례받은 영혼은 하느님을 모시고 함께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주만물 어디에나 다 계시지만 어디에나 다 거하시지는 않으신다”고 아우구스띠누스 성인께서는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신다는 이 새롭고 놀라운 사실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용기를 줍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 각자는 결코 혼자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 영혼 심부에 거하시며,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고, 우리 영혼을 누리시며, 우리 영혼을 즐기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기가 낳은, 자기를 닮은 제 2의 자기인 아기를 품에 안고 사랑하며 즐기고 누리는 것 이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당신 모습을 닮은, 지상에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당신을 대리하는 인간, 즉 당신의 거룩하고 높으신 성삼위 이름과 권능으로 말끔히 씻어주고 드높이 올려지고 거룩히 꾸며진 한 인간의 영혼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위하시는 나머지 그 영혼 안에 신비롭게 오시어 영혼과 함께 영혼 안에서 영혼을 통해서 그리고 그 영혼을 위하여 거하고 사시며 활동하십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사실은 햇살이 물 속에 깃들어 함께 거하는 이상으로 또 열이나 전기가 쇠 속에 깃들어서 함께 하는 이상으로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어떠한 사상이나 혹은 사랑이 서려 있으면서 잠재해 있는 그 이상으로 신비로운 영신적인 사실이요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은 바로 지상에서의 신과 인간의 일치이며 인간 개인에게 있어서의 신의 강생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지상에 오셨던 것처럼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서 성령으로서 한 개인의 영혼 안에 강생하사 동거하시며 공생하시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세례의 뜻과 결과를 다시 한번 밝히 깨닫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새롭게 해나갑시다.
10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예수님 생애의 이정표
강길웅 신부
교회는 연중 제 1주일을 ‘주의 세례 축일’로 정하여 사생활에서 공생활로 건너가시는 주님의 새 이정표를 묵상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세례를 상기함으로써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된 모습을 재음미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되새긴다는 것은 새해를 첫 출발하는 우리의 삶의 자세에 큰 격려요 용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선 대략 30년 동안 나자렛에 머물러 계셨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때까지의 주님의 생활에 대해선 성서에 잘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12살 때에 예루살렘에 다녀오신 사건만이 그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전 행적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집에서 부모를 돕고 자기 일에 충실했으리라는 짐작입니다. 다만 요셉의 이름이 일찍 자취를 감춘 것을 볼 때 홀어머니와 함께 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이 서른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합니다. 우리가 추측하는 마리아는 아마 14,5세에 약혼을 하여 그 이듬해에 결혼을 했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예수님은 나이 서른이 되도록 그 삶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한마디로 그분이 때를 기다리셨다는 뜻이 됩니다. 큰 일을 하시기에는 어떤 여건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뛰쳐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성부도 성자도 함께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때가 왔고 소식이 들렸습니다. 남쪽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날마다 듣게 됩니다. 그것은 굉장한 뉴스요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메시아라고 하며 사람들 둘만 모이면 예언자의 말과 요한의 행적에 대해 말하면서 요한에게 희망을 겁니다. 말하지만 요한은 삽시간에 전국의 화제 인물이 되며 드디어 올 사람이 왔다는 것을 누구나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 나자렛의 후미진 목공소에서 요한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때’를 확신하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시간이었습니까? 이제는 나자렛을 떠나는 시기요 이제는 모친 마리아와 이별하는 시기며 또한 이제는 악의 세력에 들어가서 그 모순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는 소리는 다시 말해 예수님보고 어서 나오시라는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바로 당신께서 나가셔야 할 때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주님의 세례는 그래서 예수님의 사(私)생활과 공(公)생활의 분기점이 됩니다. 당신의 세례를 통해서 공생활로 들어가시기 때문에 세례 이전을 사생활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태어나실 때부터 유다의 법을 지키셨듯이 스스로 낮춰서 세례를 받으시며 강물 속으로 잠기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때를 대신 벗기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보시고 성부께서 아주 기뻐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물 속이 아니라 죽음 속이라도 뛰어들 수 있는 자녀가 바로 아버지의 맘에 들고 사랑받는 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순명하셨으며 세례를 통해서 자신의 생애가 변화됨을 체험하셨습니다. 이제는 사인이 아니라 공인이었으며 나와 내 가정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모든 백성이 그 활동 대상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당신의 새로운 출발을 장엄하게 내디디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 자신도 어떻게 변화되어 새 출발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은 실로 새로운 탄생이었으며 장엄한 축복이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라는 목소리는 예수님만 경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실제로 체험했던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얼마나 뜨거운 감동으로 그날을 맞이했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의 많은 사람은 또 그날의 감격을 쉽게 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 보면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야훼께서 사랑하시는 종이 오면 세상이 그처럼 바른 질서 안에 새 희망이 있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그 축복에 우리의 미래가 있고 구원이 있으며 마지막 희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새해가 이미 밝았는데도 여전히 어둡고 음침한 과거에 묶여 방황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 새롭게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실 것이며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손을 직접 잡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그분 마음에 드시는 딸입니다.
11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내리막 길에서 만난 예수
김영진 신부
며칠 전, 본당에 있는 6개 공소 중 막내둥이 공소격인 골지리 공소 회장의 모친께서 운명하셔서, 장례미사를 드리러 교우들과 함께 갔었는데, 동네 사람 중 한분이 술에 취하여, 우리가 미사와 연도를 바치는 동안 우리를 향하여 궁둥이를 흔들며, “아가 동산, 아가 동산”하고 놀려댔다.
그 사람이 보기에, 신부는 아가 동산 교주같은 길고 하얀 옷을 입고 있고, 여교우들은 하얀 수건을 머리에 썼으니, 천주교가 무엇인지, 아가 동산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그 사람으로서는, ‘초록은 동색’이니 그게 그거다 싶어, 입에 넣었던 굴 껍데기를 이리 던지고 저리 던지며, 우리의 신경을 건드린 것 같다.
생각 같아서는 ‘버릇없는 촌 늙은이 어디다 대고 함부로 아가 동산 운운하며 떠들어대느냐’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 사람이 천주교가 무엇인지 모를 뿐더러, 많은 외교인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 꾹 참았다. 그러나 신부인 나와 교우들을 얕잡아 보고 한 짓거리 같아서, 여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나는 덕이 부족하고 성격이 급하여, 누가 신부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하거나, 천주교에 대해 얕잡아 보는 행위를 하면 참지 못하여, 곧잘 시비에 휘말리곤 한다.
군종신부 시절, 본인이 개신교 신자라 하여 천주교 병사들을 소홀히 하던 대대장의 따귀를 때려 헌병대 조사를 받기도 했고, 광산촌에 있을 땐 술에 취하여 공소 벽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 자기 집 장롱에 숨겨 놓았던 사람을 땅에 엎어놓고 발로 차 곤욕을 당하기도 했다.
신부이기 전에 인간이어야 하는 것이거늘, 으스대고 잘난척하고 교만하여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오히려 아프게 해주었다.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신 예수
입으로는 겸손을 말하면서도, 아직도 하늘을 찌를 듯한 교만을 꺾지 못하고 있고, 가장 봉사적이고 희생적인 듯한 말을 하면서도, 마음과 행동은 여전히 이기적인 나 자신을 보노라면, 이 나이 먹도록 아직 사람이 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십수년 전에 신부가 되어 버렸구나 하는 자책을 해보기도 한다.
하느님과 그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좀더 겸손하고 엎드릴 줄 아는 사제가 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것은 나만의 일인지 모르나, 고심하고 노력해도, 교만과 이기심, 위선과 허세는 좀처럼 나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복음(마르 1, 7-11)에서 보면, 예수님은 죄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스스로 죄인임을 자청하며, 죄인들이 받는 세례성사를 받으심으로써 스스로를 인간과 동등하게 만드시는 겸손을 보여주고 계신다.
세례자 요한 역시 요즘 말로, 눈 한번 찔끔 감고 몰러온 군중 앞에서 으스대고 뽑낼만도 하였건만,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지극한 겸손으로 낮추신다.
몇 년 전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였던 「헨리누에」 박사가 갑자기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 박약자 수용시설에 들어가서, 여러가지 허드렛일을 하는 직원이 되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그의 저서 20여권은 모두 베스트 셀러였다.
그가 높은 보수와 명예를 보장하는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정신 박약자 시설에 들어가서 정박아들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여 주고, 정박아들과 같이 놀아 주는 등, 잡일을 하면서 받는 봉급이란 생계에도 타격을 입을 만큼 적은 봉급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려운 고생과 낮은 봉급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고 만족했다. 사람들이 왜 이런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물을 땐, 언제나 웃음과 침묵으로 대답하던 그가, 최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책을 내면서 대답을 주었다.
그는 책에서 말하기를 “나는 올라가는 길만 신경을 썼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듣고, 언제나 1등으로 달렸으며,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에까지 왔다. 나의 저서 20여권은 뭇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으며, 오직 성공을 위하여 더 높이, 더 크게 꼭대기만을 향하면서 오르막길만 달려왔다.
그러나 한 정신박약아를 만나면서, 인간이란 어렵고 고통스럽게 사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하 여, 내리막길을 갈 때 더 성숙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는데, 내리막길에서는 복음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라고 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
하느님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며, 내리막길을 달리는 중에 인간은 성숙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요즘처럼 주연만 원하고, 1등만 요구하며, ‘왕자병’, ‘공주병’에 길들여진 우리 세대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겸손은 연약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닮는 것이다. 요한은 인간과 동등하게 되려고 죄있는 자의 모습으로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을 지극히 겸손된 자세로 맞이함으로써, 예수님의 겸손을 닮고 있다.
내가 지니고 있는 작은 권력, 작은 재물, 작은 명예로 인하여, 엎드리기를 힘들어하는 우리는, 무엇으로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
엎드려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예수님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신발 끈을 엎드려 풀어 줄 예수님을 지금까지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는가.
12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
교구주보
1. 예수님의 세례
오늘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듬뿍 받으시고 나자렛에서의 사생활을 청산하고 메시아로서의 공적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 두 가지 신비스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내려온 것과 둘째,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늘의 음성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 강한 소명의식을 지니셨기에 세례를 받으신 다음부터 고향, 가족을 멀리하고 이스라엘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룩하는 일에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십니다.
여기 “사랑하는 아들”은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와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부자간의 돈독하고 각별한 관계를 뜻합니다.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이사 42,1참조)는 하느 님께서 일정한 사명, 곧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시려고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아들 예수가 아버지의 전권을 물려받았으며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아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42절 1장은 “야훼의 종”이라는 신비스러운 인물이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고난을 겪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3. 우리의 이해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단순히 유대 민족의 해방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입니다. 예수께서는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시고, 정의를 세우시고, 가난한자, 억눌린 자, 갇힌 자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메시아의 사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듬뿍 받아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종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성령이 없는 교회는 하나의 단체에 불과할 뿐이며, 섬기는 모습이 없는 교회는 교우들에게 짐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새 천년에는 모든 교회가 하느님의 영을 듬뿍 받고 종의 모습으로 예수께서 행하셨던 메시아의 사명을 이룩함으로써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교회), 나는 너를(교회) 어여삐 여겼노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13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주님의 세례
김남조 막달레나/ 시인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이사 55,1)
물은 네 가지 원소 중의 하나로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이슬이나 눈물같이 작은 물에서부터 바다나 대양에 이르는 큰물까지 그 수량이나 수질 또는 상징성을 살피는 여러 기준이 있겠으나 사람의 심령을 씻어 거듭나게 하는 성세의 물은 별격의 신비한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은 물로 세례를 받으나 주님은 물로 세례를 받으신 외에도 수난의 피를 흘리심으로 “증언자가 셋입니다. 곧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서로 일치합니다”(요한 1,33 참조)의 진리를 이루셨고,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도 물과 피의 일치에 달하여 성인 계보에 들게 되었습니다.
원자로가 통제기능을 잃게 되면 미국에서 파생한 사고의 결과가 중국 대륙의 지구표면에 솟 아날 수 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합니다만 물의 위력에도 놀라운 바가 있습니다.「땅 속의 바다」라는 짧은 글(분도 소책자 5) 속엔 사하라 사막 아래 거대한 저수지가 있고 그 지하 수가 위로 솟구쳐서 오아시스를 형성함을 논하면서 “어디서나 모래 층을 파서 물을 뽑아 기름진 낙원을 조성할 수는 있다. 다만 충분히 깊이 파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 포 등의 경이로운 수량이 지구의 내부에 스며들어 수백만 년 동안 비축되었을 일을 생각할 때, 지층 깊은 데서 물이 분출하거나 불이 치받아 활화산의 현상을 일으키는 사례를 능히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감탄스러운 일은 수천 년의 시간대를 화살촉처럼 꿰뚫어 진리가 전승되어 왔고 살아있는 복음의 말씀을 생명수처럼 오늘의 우리가 마시고 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너무나도 비통하며 하느님의 아들이 고통과 외로움으로 피땀을 흘리신 골고타의 비극은 이 천년의 시공을 관통하여 오늘도 바로 현 시각에 이루어지는 일인 듯이 만인의 심령에 각인을 새겨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 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이사 42,6)는 소명과 축복을 새 천년 벽두에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부어 내리십니다. 이 시대 기술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의 홍수 속에서 마음과 영혼이 자칫 위축되기 쉽고 철학의 부재와 사랑의 품귀현상이 두드러지는 이 위급지경에서 우리는 주님이 맡기시는 소명을 경건히 받아 충실히 일해야 하겠습니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는”(이사 42,3) 주님께서 자애와 권능으로 우리를 가호(加護)해 주실 것입니다.
물과 피와 성령으로 치르신 주님의 세례를 묵상하며 부디 저희가 소명을 다하기 위해 함께 매진하도록 도와주소서.
14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현실은 우리 각자 삶과 수준의 반영
오늘은 예수 세례 축일로 성탄시기가 끝나고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의 세례는 삶의 새로운 한 단계로 모든 사람을 위한 봉헌과 봉사를 다짐하는 공적 약속입니다. 인류를 구원키 위한 하느님 계획의 첫 실현이 예수의 강생이라면, 예수의 세례는 이 강생을 현실 속에서 보다 구체화시키는 첫 작업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세례가 지닌 단계적 의미, 봉헌과 봉사, 그리고 현실의 성화(聖化)라는 관점에서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어떤 단계와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일의 순위(順位)이며 또 과정상 꼭 필요한 일정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일에는 순서와 시간이 요구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며 현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삶과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그 사람과 현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때로 삶의 현실은 고통과 갈등, 고뇌의 장(場)이기도 합니다. 그러함에도 세례는 이러한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락하여 그것을 하느님의 은총이며, 나아가 세상을 개혁하고 성화시키는 작업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는 나와 현실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시 봉헌하며, 이웃을 위하여 완전히 봉헌할 것을 다짐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다짐과 약속은 결코 사적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고 공적이며 공동체의 의미를 지녔기에 모두와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받은 신앙인들입니다. 세례 때의 우리의 약속, 우리의 다짐은 바로 이러한 공적 및 공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의 약속에 대하여 늘 책임을 지며 사는 성숙한 크리스천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과 증언을 통하여 현실은 더욱 밝아지며 그만큼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현실은 바로 우리 각자의 삶과 수준의 반영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성실한 그만큼, 우리가 의롭고 겸허한 그만큼, 우리가 봉헌하고 봉사하는 그만큼, 우리가 노력하고 투자하는 그만큼, 우리가 관심을 갖고 가꾸는 그만큼, 그 비례를 따라 현실도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불의한 현실 앞에서의 실망과 좌절을 정당화시키는 포기적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렴하면서 은총의 힘으로 변화시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상으로 창조해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천년 전에 당시의 상황을 모두 수락하시고, 그것을 뛰어넘는 회개와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시면서 그 사회를 내적으로 변혁하신 것입니다. 그 첫 표지가 바로 예수의 세례입니다.
예수는 스스로 물로 씻겨지면서 깨끗하고 겸허한 삶을 몸소 보여주셨고, 깨끗이 씻는 이 작업이 모두에게 요구됨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예수와 함께 우리는 더럽고 묵은 것을 말끔히 씻어버리며, 깨끗하고 새로운 삶을 이룩해야 합니다.
주님 세례 축일
8. 김정진 신부(나)/ 16
9. 변기영 신부(나)/ 17 10. 강길웅 신부(나)/ 19
11. 김영진 신부(나)/ 21 12. 교구주보(나)/ 23
13. 김남조 시인(나)/ 24 14. 현실은 우리 각자(나)/ 25
8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세례와 신앙생활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주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한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아주 중요한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명을 깨닫고 이해하는데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도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할에 관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축일은 우리의 세례와도 직접 관계가 있어 우리의 영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의 세례 기념축일로서 성탄 시기가 끝나고 이제부터 연중 시기라고 부르는 전례상의 새로운 절기가 시작됩니다. 저 성탄날 밤에는 목자들에게 보이시고, 공현의 날에는 이방인들에게 보이신 예수님은 오늘 또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당신의 참모습을 나타내십니다. 수많은 군중앞에서 천주 성부로부터 당신의 사명을 장엄하게 또한 정식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가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구세주께서 이미 오셨음을 선언하고 있을 즈음에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와서 세례를 받으시자 닫혀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시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소리까지 들려왔습니다. 지금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보속하려는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방대한 아니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고 계시며 마치 하느님의 전권대사로 지상에 파견된 분으로서의 신임장을 받고 계시는 엄숙한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적에 예수님을 당신의 친아들로 소개하시고 이 순간부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당신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과 온갖 행동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은 하느님 성령이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독생성자로 또한 인간의 구원 사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파견된 구세주로 알아 받들어 모시고 또한 그분의 가르침과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는데 조금도 의심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적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축일은 성령과 예수님의 생애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구세주를 가르켜 하느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실 분>이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성령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내리셨고 또 예수께서 공생활을 준비하시기 위해 기도와 단식으로 사십 일동안 지내시도록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은 또한 예수님의 전생애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림하심으로써 세말까지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할 것을 교회의 목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성령은 교회를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공적 증거로서 교회의 무류성을 보증하고 계십니다.
끝으로 요르단강에서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이 우리가 세례를 받을 적에도 일어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말하기를 크리스천 세례는 성령 안에서 받는 세례라고 하였습니다(마르 1:8). 세례 때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사도직에 참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에 불과한데 비하면 크리스천의 세례는 이를 훨씬 능가하며 죄를 용서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는 성사입니다.
크리스천의 세례는 영세자로 하여금 교회의 일원(一員)이 되게 합니다. 교회는 주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립된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이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인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단체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도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더욱 개인적인 구원이란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협동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봉사적 활동을 하는 공동체적 신앙생활을 하는 자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을 큰 영예로 여기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니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9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세례로 신자되기 시작한다
변기영 신부
오늘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주께서 세례를 받아야 할만큼 무슨 죄가 있다거나 결함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를 받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하여 두 가지 종류를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세례자 요한이 베풀던 것이고, 하나는 우리 모두가 받은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베풀던 것입니다. 우선 흥미롭게 연구해 볼 만한 것으로서 그 당시 세례자 요한은 무슨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말씀하신 대로, 즉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푸시오(마태오 28,19)하신 말씀처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베풀었던 세례의 목적입니다.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정신개조, 혹은 개과천선의 계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새 출발의 의식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베풀었던 세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악과 그에 대한 벌까지도 용서받고 면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문교우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례로써 완전히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흔히 영세하면 이미 완전한 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더이상 교리 공부도 않고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세례란 예식은 신자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이지 완전히 신자되기를 마쳤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례로써 과거의 죄사함만을 너무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세례의 참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무슨 죄악을 씻기 위해 세례받은 것이 아니고 새로운 생활, 즉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은 세례의 목적은 우리의 죄많은 과거생활을 씻기 위해서보다도 앞으로의 덕스러운 신앙생활의 창조를 위해서 더욱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결국 세례의 주요목적이 각자 인생의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철저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죄많은 과거생활을 잊고 청산하며 양심의 부담을 덜고 용서받았다는 위안을 찾기 위해서 세례를 받고자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물론 이러한 태도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세례를 준비하기 위해 충분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례의 근본 의도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이라도 우리가 받은 세례를 상기하고 미래생활의 창조를 위하여 새롭고 거룩한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세례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참다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하는 것으로서 장래 훌륭하고 위대한 생활 설계보다도 비록 작을지라도 거룩한 인생을 위한 계획과 노력을 짜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로써 우리의 영혼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몇몇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순간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거처가 되고 궁전이 됩니다. 세례받지 않은 상태에서와는 달리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세례받은 영혼은 하느님을 모시고 함께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주만물 어디에나 다 계시지만 어디에나 다 거하시지는 않으신다”고 아우구스띠누스 성인께서는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신다는 이 새롭고 놀라운 사실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용기를 줍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 각자는 결코 혼자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 영혼 심부에 거하시며,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고, 우리 영혼을 누리시며, 우리 영혼을 즐기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기가 낳은, 자기를 닮은 제 2의 자기인 아기를 품에 안고 사랑하며 즐기고 누리는 것 이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당신 모습을 닮은, 지상에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당신을 대리하는 인간, 즉 당신의 거룩하고 높으신 성삼위 이름과 권능으로 말끔히 씻어주고 드높이 올려지고 거룩히 꾸며진 한 인간의 영혼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위하시는 나머지 그 영혼 안에 신비롭게 오시어 영혼과 함께 영혼 안에서 영혼을 통해서 그리고 그 영혼을 위하여 거하고 사시며 활동하십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사실은 햇살이 물 속에 깃들어 함께 거하는 이상으로 또 열이나 전기가 쇠 속에 깃들어서 함께 하는 이상으로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어떠한 사상이나 혹은 사랑이 서려 있으면서 잠재해 있는 그 이상으로 신비로운 영신적인 사실이요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은 바로 지상에서의 신과 인간의 일치이며 인간 개인에게 있어서의 신의 강생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지상에 오셨던 것처럼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서 성령으로서 한 개인의 영혼 안에 강생하사 동거하시며 공생하시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세례의 뜻과 결과를 다시 한번 밝히 깨닫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새롭게 해나갑시다.
10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예수님 생애의 이정표
강길웅 신부
교회는 연중 제 1주일을 ‘주의 세례 축일’로 정하여 사생활에서 공생활로 건너가시는 주님의 새 이정표를 묵상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세례를 상기함으로써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된 모습을 재음미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되새긴다는 것은 새해를 첫 출발하는 우리의 삶의 자세에 큰 격려요 용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선 대략 30년 동안 나자렛에 머물러 계셨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때까지의 주님의 생활에 대해선 성서에 잘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12살 때에 예루살렘에 다녀오신 사건만이 그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전 행적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집에서 부모를 돕고 자기 일에 충실했으리라는 짐작입니다. 다만 요셉의 이름이 일찍 자취를 감춘 것을 볼 때 홀어머니와 함께 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이 서른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합니다. 우리가 추측하는 마리아는 아마 14,5세에 약혼을 하여 그 이듬해에 결혼을 했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예수님은 나이 서른이 되도록 그 삶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한마디로 그분이 때를 기다리셨다는 뜻이 됩니다. 큰 일을 하시기에는 어떤 여건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뛰쳐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성부도 성자도 함께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때가 왔고 소식이 들렸습니다. 남쪽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날마다 듣게 됩니다. 그것은 굉장한 뉴스요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메시아라고 하며 사람들 둘만 모이면 예언자의 말과 요한의 행적에 대해 말하면서 요한에게 희망을 겁니다. 말하지만 요한은 삽시간에 전국의 화제 인물이 되며 드디어 올 사람이 왔다는 것을 누구나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 나자렛의 후미진 목공소에서 요한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때’를 확신하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시간이었습니까? 이제는 나자렛을 떠나는 시기요 이제는 모친 마리아와 이별하는 시기며 또한 이제는 악의 세력에 들어가서 그 모순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는 소리는 다시 말해 예수님보고 어서 나오시라는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바로 당신께서 나가셔야 할 때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주님의 세례는 그래서 예수님의 사(私)생활과 공(公)생활의 분기점이 됩니다. 당신의 세례를 통해서 공생활로 들어가시기 때문에 세례 이전을 사생활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태어나실 때부터 유다의 법을 지키셨듯이 스스로 낮춰서 세례를 받으시며 강물 속으로 잠기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때를 대신 벗기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보시고 성부께서 아주 기뻐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물 속이 아니라 죽음 속이라도 뛰어들 수 있는 자녀가 바로 아버지의 맘에 들고 사랑받는 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순명하셨으며 세례를 통해서 자신의 생애가 변화됨을 체험하셨습니다. 이제는 사인이 아니라 공인이었으며 나와 내 가정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모든 백성이 그 활동 대상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당신의 새로운 출발을 장엄하게 내디디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 자신도 어떻게 변화되어 새 출발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은 실로 새로운 탄생이었으며 장엄한 축복이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라는 목소리는 예수님만 경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실제로 체험했던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얼마나 뜨거운 감동으로 그날을 맞이했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의 많은 사람은 또 그날의 감격을 쉽게 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 보면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야훼께서 사랑하시는 종이 오면 세상이 그처럼 바른 질서 안에 새 희망이 있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그 축복에 우리의 미래가 있고 구원이 있으며 마지막 희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새해가 이미 밝았는데도 여전히 어둡고 음침한 과거에 묶여 방황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 새롭게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실 것이며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손을 직접 잡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그분 마음에 드시는 딸입니다.
11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내리막 길에서 만난 예수
김영진 신부
며칠 전, 본당에 있는 6개 공소 중 막내둥이 공소격인 골지리 공소 회장의 모친께서 운명하셔서, 장례미사를 드리러 교우들과 함께 갔었는데, 동네 사람 중 한분이 술에 취하여, 우리가 미사와 연도를 바치는 동안 우리를 향하여 궁둥이를 흔들며, “아가 동산, 아가 동산”하고 놀려댔다.
그 사람이 보기에, 신부는 아가 동산 교주같은 길고 하얀 옷을 입고 있고, 여교우들은 하얀 수건을 머리에 썼으니, 천주교가 무엇인지, 아가 동산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그 사람으로서는, ‘초록은 동색’이니 그게 그거다 싶어, 입에 넣었던 굴 껍데기를 이리 던지고 저리 던지며, 우리의 신경을 건드린 것 같다.
생각 같아서는 ‘버릇없는 촌 늙은이 어디다 대고 함부로 아가 동산 운운하며 떠들어대느냐’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 사람이 천주교가 무엇인지 모를 뿐더러, 많은 외교인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 꾹 참았다. 그러나 신부인 나와 교우들을 얕잡아 보고 한 짓거리 같아서, 여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나는 덕이 부족하고 성격이 급하여, 누가 신부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하거나, 천주교에 대해 얕잡아 보는 행위를 하면 참지 못하여, 곧잘 시비에 휘말리곤 한다.
군종신부 시절, 본인이 개신교 신자라 하여 천주교 병사들을 소홀히 하던 대대장의 따귀를 때려 헌병대 조사를 받기도 했고, 광산촌에 있을 땐 술에 취하여 공소 벽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 자기 집 장롱에 숨겨 놓았던 사람을 땅에 엎어놓고 발로 차 곤욕을 당하기도 했다.
신부이기 전에 인간이어야 하는 것이거늘, 으스대고 잘난척하고 교만하여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오히려 아프게 해주었다.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신 예수
입으로는 겸손을 말하면서도, 아직도 하늘을 찌를 듯한 교만을 꺾지 못하고 있고, 가장 봉사적이고 희생적인 듯한 말을 하면서도, 마음과 행동은 여전히 이기적인 나 자신을 보노라면, 이 나이 먹도록 아직 사람이 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십수년 전에 신부가 되어 버렸구나 하는 자책을 해보기도 한다.
하느님과 그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좀더 겸손하고 엎드릴 줄 아는 사제가 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것은 나만의 일인지 모르나, 고심하고 노력해도, 교만과 이기심, 위선과 허세는 좀처럼 나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복음(마르 1, 7-11)에서 보면, 예수님은 죄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스스로 죄인임을 자청하며, 죄인들이 받는 세례성사를 받으심으로써 스스로를 인간과 동등하게 만드시는 겸손을 보여주고 계신다.
세례자 요한 역시 요즘 말로, 눈 한번 찔끔 감고 몰러온 군중 앞에서 으스대고 뽑낼만도 하였건만,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지극한 겸손으로 낮추신다.
몇 년 전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였던 「헨리누에」 박사가 갑자기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 박약자 수용시설에 들어가서, 여러가지 허드렛일을 하는 직원이 되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그의 저서 20여권은 모두 베스트 셀러였다.
그가 높은 보수와 명예를 보장하는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정신 박약자 시설에 들어가서 정박아들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여 주고, 정박아들과 같이 놀아 주는 등, 잡일을 하면서 받는 봉급이란 생계에도 타격을 입을 만큼 적은 봉급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려운 고생과 낮은 봉급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고 만족했다. 사람들이 왜 이런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물을 땐, 언제나 웃음과 침묵으로 대답하던 그가, 최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책을 내면서 대답을 주었다.
그는 책에서 말하기를 “나는 올라가는 길만 신경을 썼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듣고, 언제나 1등으로 달렸으며,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에까지 왔다. 나의 저서 20여권은 뭇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으며, 오직 성공을 위하여 더 높이, 더 크게 꼭대기만을 향하면서 오르막길만 달려왔다.
그러나 한 정신박약아를 만나면서, 인간이란 어렵고 고통스럽게 사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하 여, 내리막길을 갈 때 더 성숙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는데, 내리막길에서는 복음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라고 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
하느님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며, 내리막길을 달리는 중에 인간은 성숙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요즘처럼 주연만 원하고, 1등만 요구하며, ‘왕자병’, ‘공주병’에 길들여진 우리 세대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겸손은 연약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닮는 것이다. 요한은 인간과 동등하게 되려고 죄있는 자의 모습으로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을 지극히 겸손된 자세로 맞이함으로써, 예수님의 겸손을 닮고 있다.
내가 지니고 있는 작은 권력, 작은 재물, 작은 명예로 인하여, 엎드리기를 힘들어하는 우리는, 무엇으로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
엎드려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예수님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신발 끈을 엎드려 풀어 줄 예수님을 지금까지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는가.
12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
교구주보
1. 예수님의 세례
오늘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듬뿍 받으시고 나자렛에서의 사생활을 청산하고 메시아로서의 공적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 두 가지 신비스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내려온 것과 둘째,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늘의 음성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 강한 소명의식을 지니셨기에 세례를 받으신 다음부터 고향, 가족을 멀리하고 이스라엘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룩하는 일에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십니다.
여기 “사랑하는 아들”은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와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부자간의 돈독하고 각별한 관계를 뜻합니다.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이사 42,1참조)는 하느 님께서 일정한 사명, 곧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시려고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아들 예수가 아버지의 전권을 물려받았으며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아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42절 1장은 “야훼의 종”이라는 신비스러운 인물이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고난을 겪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3. 우리의 이해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단순히 유대 민족의 해방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입니다. 예수께서는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시고, 정의를 세우시고, 가난한자, 억눌린 자, 갇힌 자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메시아의 사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듬뿍 받아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종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성령이 없는 교회는 하나의 단체에 불과할 뿐이며, 섬기는 모습이 없는 교회는 교우들에게 짐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새 천년에는 모든 교회가 하느님의 영을 듬뿍 받고 종의 모습으로 예수께서 행하셨던 메시아의 사명을 이룩함으로써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교회), 나는 너를(교회) 어여삐 여겼노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13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주님의 세례
김남조 막달레나/ 시인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이사 55,1)
물은 네 가지 원소 중의 하나로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이슬이나 눈물같이 작은 물에서부터 바다나 대양에 이르는 큰물까지 그 수량이나 수질 또는 상징성을 살피는 여러 기준이 있겠으나 사람의 심령을 씻어 거듭나게 하는 성세의 물은 별격의 신비한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은 물로 세례를 받으나 주님은 물로 세례를 받으신 외에도 수난의 피를 흘리심으로 “증언자가 셋입니다. 곧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서로 일치합니다”(요한 1,33 참조)의 진리를 이루셨고,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도 물과 피의 일치에 달하여 성인 계보에 들게 되었습니다.
원자로가 통제기능을 잃게 되면 미국에서 파생한 사고의 결과가 중국 대륙의 지구표면에 솟 아날 수 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합니다만 물의 위력에도 놀라운 바가 있습니다.「땅 속의 바다」라는 짧은 글(분도 소책자 5) 속엔 사하라 사막 아래 거대한 저수지가 있고 그 지하 수가 위로 솟구쳐서 오아시스를 형성함을 논하면서 “어디서나 모래 층을 파서 물을 뽑아 기름진 낙원을 조성할 수는 있다. 다만 충분히 깊이 파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 포 등의 경이로운 수량이 지구의 내부에 스며들어 수백만 년 동안 비축되었을 일을 생각할 때, 지층 깊은 데서 물이 분출하거나 불이 치받아 활화산의 현상을 일으키는 사례를 능히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감탄스러운 일은 수천 년의 시간대를 화살촉처럼 꿰뚫어 진리가 전승되어 왔고 살아있는 복음의 말씀을 생명수처럼 오늘의 우리가 마시고 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너무나도 비통하며 하느님의 아들이 고통과 외로움으로 피땀을 흘리신 골고타의 비극은 이 천년의 시공을 관통하여 오늘도 바로 현 시각에 이루어지는 일인 듯이 만인의 심령에 각인을 새겨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 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이사 42,6)는 소명과 축복을 새 천년 벽두에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부어 내리십니다. 이 시대 기술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의 홍수 속에서 마음과 영혼이 자칫 위축되기 쉽고 철학의 부재와 사랑의 품귀현상이 두드러지는 이 위급지경에서 우리는 주님이 맡기시는 소명을 경건히 받아 충실히 일해야 하겠습니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는”(이사 42,3) 주님께서 자애와 권능으로 우리를 가호(加護)해 주실 것입니다.
물과 피와 성령으로 치르신 주님의 세례를 묵상하며 부디 저희가 소명을 다하기 위해 함께 매진하도록 도와주소서.
14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현실은 우리 각자 삶과 수준의 반영
오늘은 예수 세례 축일로 성탄시기가 끝나고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의 세례는 삶의 새로운 한 단계로 모든 사람을 위한 봉헌과 봉사를 다짐하는 공적 약속입니다. 인류를 구원키 위한 하느님 계획의 첫 실현이 예수의 강생이라면, 예수의 세례는 이 강생을 현실 속에서 보다 구체화시키는 첫 작업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세례가 지닌 단계적 의미, 봉헌과 봉사, 그리고 현실의 성화(聖化)라는 관점에서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어떤 단계와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일의 순위(順位)이며 또 과정상 꼭 필요한 일정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일에는 순서와 시간이 요구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며 현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삶과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그 사람과 현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때로 삶의 현실은 고통과 갈등, 고뇌의 장(場)이기도 합니다. 그러함에도 세례는 이러한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락하여 그것을 하느님의 은총이며, 나아가 세상을 개혁하고 성화시키는 작업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는 나와 현실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시 봉헌하며, 이웃을 위하여 완전히 봉헌할 것을 다짐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다짐과 약속은 결코 사적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고 공적이며 공동체의 의미를 지녔기에 모두와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받은 신앙인들입니다. 세례 때의 우리의 약속, 우리의 다짐은 바로 이러한 공적 및 공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의 약속에 대하여 늘 책임을 지며 사는 성숙한 크리스천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과 증언을 통하여 현실은 더욱 밝아지며 그만큼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현실은 바로 우리 각자의 삶과 수준의 반영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성실한 그만큼, 우리가 의롭고 겸허한 그만큼, 우리가 봉헌하고 봉사하는 그만큼, 우리가 노력하고 투자하는 그만큼, 우리가 관심을 갖고 가꾸는 그만큼, 그 비례를 따라 현실도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불의한 현실 앞에서의 실망과 좌절을 정당화시키는 포기적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렴하면서 은총의 힘으로 변화시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상으로 창조해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천년 전에 당시의 상황을 모두 수락하시고, 그것을 뛰어넘는 회개와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시면서 그 사회를 내적으로 변혁하신 것입니다. 그 첫 표지가 바로 예수의 세례입니다.
예수는 스스로 물로 씻겨지면서 깨끗하고 겸허한 삶을 몸소 보여주셨고, 깨끗이 씻는 이 작업이 모두에게 요구됨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예수와 함께 우리는 더럽고 묵은 것을 말끔히 씻어버리며, 깨끗하고 새로운 삶을 이룩해야 합니다.
주님 세례 축일
8. 김정진 신부(나)/ 16
9. 변기영 신부(나)/ 17 10. 강길웅 신부(나)/ 19
11. 김영진 신부(나)/ 21 12. 교구주보(나)/ 23
13. 김남조 시인(나)/ 24 14. 현실은 우리 각자(나)/ 25
8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세례와 신앙생활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주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한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아주 중요한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명을 깨닫고 이해하는데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도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할에 관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 축일은 우리의 세례와도 직접 관계가 있어 우리의 영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의 세례 기념축일로서 성탄 시기가 끝나고 이제부터 연중 시기라고 부르는 전례상의 새로운 절기가 시작됩니다. 저 성탄날 밤에는 목자들에게 보이시고, 공현의 날에는 이방인들에게 보이신 예수님은 오늘 또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 당신의 참모습을 나타내십니다. 수많은 군중앞에서 천주 성부로부터 당신의 사명을 장엄하게 또한 정식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과 같이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가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구세주께서 이미 오셨음을 선언하고 있을 즈음에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와서 세례를 받으시자 닫혀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시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소리까지 들려왔습니다. 지금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보속하려는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방대한 아니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고 계시며 마치 하느님의 전권대사로 지상에 파견된 분으로서의 신임장을 받고 계시는 엄숙한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적에 예수님을 당신의 친아들로 소개하시고 이 순간부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당신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과 온갖 행동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은 하느님 성령이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독생성자로 또한 인간의 구원 사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파견된 구세주로 알아 받들어 모시고 또한 그분의 가르침과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는데 조금도 의심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적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축일은 성령과 예수님의 생애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구세주를 가르켜 하느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실 분>이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성령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내리셨고 또 예수께서 공생활을 준비하시기 위해 기도와 단식으로 사십 일동안 지내시도록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은 또한 예수님의 전생애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림하심으로써 세말까지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할 것을 교회의 목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성령은 교회를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공적 증거로서 교회의 무류성을 보증하고 계십니다.
끝으로 요르단강에서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이 우리가 세례를 받을 적에도 일어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말하기를 크리스천 세례는 성령 안에서 받는 세례라고 하였습니다(마르 1:8). 세례 때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사도직에 참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에 불과한데 비하면 크리스천의 세례는 이를 훨씬 능가하며 죄를 용서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는 성사입니다.
크리스천의 세례는 영세자로 하여금 교회의 일원(一員)이 되게 합니다. 교회는 주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립된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이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인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단체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도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더욱 개인적인 구원이란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며 협동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봉사적 활동을 하는 공동체적 신앙생활을 하는 자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을 큰 영예로 여기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니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9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세례로 신자되기 시작한다
변기영 신부
오늘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주께서 세례를 받아야 할만큼 무슨 죄가 있다거나 결함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를 받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하여 두 가지 종류를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세례자 요한이 베풀던 것이고, 하나는 우리 모두가 받은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베풀던 것입니다. 우선 흥미롭게 연구해 볼 만한 것으로서 그 당시 세례자 요한은 무슨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들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말씀하신 대로, 즉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푸시오(마태오 28,19)하신 말씀처럼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베풀었던 세례의 목적입니다.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정신개조, 혹은 개과천선의 계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새 출발의 의식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베풀었던 세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악과 그에 대한 벌까지도 용서받고 면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문교우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례로써 완전히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흔히 영세하면 이미 완전한 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더이상 교리 공부도 않고 신앙생활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세례란 예식은 신자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이지 완전히 신자되기를 마쳤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례로써 과거의 죄사함만을 너무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세례의 참뜻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무슨 죄악을 씻기 위해 세례받은 것이 아니고 새로운 생활, 즉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은 세례의 목적은 우리의 죄많은 과거생활을 씻기 위해서보다도 앞으로의 덕스러운 신앙생활의 창조를 위해서 더욱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결국 세례의 주요목적이 각자 인생의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철저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죄많은 과거생활을 잊고 청산하며 양심의 부담을 덜고 용서받았다는 위안을 찾기 위해서 세례를 받고자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물론 이러한 태도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세례를 준비하기 위해 충분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례의 근본 의도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이라도 우리가 받은 세례를 상기하고 미래생활의 창조를 위하여 새롭고 거룩한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세례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참다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하는 것으로서 장래 훌륭하고 위대한 생활 설계보다도 비록 작을지라도 거룩한 인생을 위한 계획과 노력을 짜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로써 우리의 영혼에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몇몇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순간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거처가 되고 궁전이 됩니다. 세례받지 않은 상태에서와는 달리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세례받은 영혼은 하느님을 모시고 함께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주만물 어디에나 다 계시지만 어디에나 다 거하시지는 않으신다”고 아우구스띠누스 성인께서는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거하신다는 이 새롭고 놀라운 사실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용기를 줍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 각자는 결코 혼자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 영혼 심부에 거하시며,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고, 우리 영혼을 누리시며, 우리 영혼을 즐기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기가 낳은, 자기를 닮은 제 2의 자기인 아기를 품에 안고 사랑하며 즐기고 누리는 것 이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당신 모습을 닮은, 지상에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당신을 대리하는 인간, 즉 당신의 거룩하고 높으신 성삼위 이름과 권능으로 말끔히 씻어주고 드높이 올려지고 거룩히 꾸며진 한 인간의 영혼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위하시는 나머지 그 영혼 안에 신비롭게 오시어 영혼과 함께 영혼 안에서 영혼을 통해서 그리고 그 영혼을 위하여 거하고 사시며 활동하십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사실은 햇살이 물 속에 깃들어 함께 거하는 이상으로 또 열이나 전기가 쇠 속에 깃들어서 함께 하는 이상으로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어떠한 사상이나 혹은 사랑이 서려 있으면서 잠재해 있는 그 이상으로 신비로운 영신적인 사실이요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은 바로 지상에서의 신과 인간의 일치이며 인간 개인에게 있어서의 신의 강생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지상에 오셨던 것처럼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서 성령으로서 한 개인의 영혼 안에 강생하사 동거하시며 공생하시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세례의 뜻과 결과를 다시 한번 밝히 깨닫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새롭게 해나갑시다.
10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예수님 생애의 이정표
강길웅 신부
교회는 연중 제 1주일을 ‘주의 세례 축일’로 정하여 사생활에서 공생활로 건너가시는 주님의 새 이정표를 묵상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세례를 상기함으로써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된 모습을 재음미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되새긴다는 것은 새해를 첫 출발하는 우리의 삶의 자세에 큰 격려요 용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선 대략 30년 동안 나자렛에 머물러 계셨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때까지의 주님의 생활에 대해선 성서에 잘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12살 때에 예루살렘에 다녀오신 사건만이 그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전 행적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집에서 부모를 돕고 자기 일에 충실했으리라는 짐작입니다. 다만 요셉의 이름이 일찍 자취를 감춘 것을 볼 때 홀어머니와 함께 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이 서른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합니다. 우리가 추측하는 마리아는 아마 14,5세에 약혼을 하여 그 이듬해에 결혼을 했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예수님은 나이 서른이 되도록 그 삶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한마디로 그분이 때를 기다리셨다는 뜻이 됩니다. 큰 일을 하시기에는 어떤 여건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뛰쳐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성부도 성자도 함께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때가 왔고 소식이 들렸습니다. 남쪽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날마다 듣게 됩니다. 그것은 굉장한 뉴스요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메시아라고 하며 사람들 둘만 모이면 예언자의 말과 요한의 행적에 대해 말하면서 요한에게 희망을 겁니다. 말하지만 요한은 삽시간에 전국의 화제 인물이 되며 드디어 올 사람이 왔다는 것을 누구나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 나자렛의 후미진 목공소에서 요한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때’를 확신하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시간이었습니까? 이제는 나자렛을 떠나는 시기요 이제는 모친 마리아와 이별하는 시기며 또한 이제는 악의 세력에 들어가서 그 모순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는 소리는 다시 말해 예수님보고 어서 나오시라는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바로 당신께서 나가셔야 할 때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주님의 세례는 그래서 예수님의 사(私)생활과 공(公)생활의 분기점이 됩니다. 당신의 세례를 통해서 공생활로 들어가시기 때문에 세례 이전을 사생활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태어나실 때부터 유다의 법을 지키셨듯이 스스로 낮춰서 세례를 받으시며 강물 속으로 잠기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때를 대신 벗기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보시고 성부께서 아주 기뻐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물 속이 아니라 죽음 속이라도 뛰어들 수 있는 자녀가 바로 아버지의 맘에 들고 사랑받는 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순명하셨으며 세례를 통해서 자신의 생애가 변화됨을 체험하셨습니다. 이제는 사인이 아니라 공인이었으며 나와 내 가정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모든 백성이 그 활동 대상이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당신의 새로운 출발을 장엄하게 내디디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우리 자신도 어떻게 변화되어 새 출발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은 실로 새로운 탄생이었으며 장엄한 축복이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라는 목소리는 예수님만 경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실제로 체험했던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얼마나 뜨거운 감동으로 그날을 맞이했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의 많은 사람은 또 그날의 감격을 쉽게 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 보면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야훼께서 사랑하시는 종이 오면 세상이 그처럼 바른 질서 안에 새 희망이 있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그 축복에 우리의 미래가 있고 구원이 있으며 마지막 희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새해가 이미 밝았는데도 여전히 어둡고 음침한 과거에 묶여 방황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권고합니다. 새롭게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실 것이며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손을 직접 잡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그분 마음에 드시는 딸입니다.
11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내리막 길에서 만난 예수
김영진 신부
며칠 전, 본당에 있는 6개 공소 중 막내둥이 공소격인 골지리 공소 회장의 모친께서 운명하셔서, 장례미사를 드리러 교우들과 함께 갔었는데, 동네 사람 중 한분이 술에 취하여, 우리가 미사와 연도를 바치는 동안 우리를 향하여 궁둥이를 흔들며, “아가 동산, 아가 동산”하고 놀려댔다.
그 사람이 보기에, 신부는 아가 동산 교주같은 길고 하얀 옷을 입고 있고, 여교우들은 하얀 수건을 머리에 썼으니, 천주교가 무엇인지, 아가 동산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그 사람으로서는, ‘초록은 동색’이니 그게 그거다 싶어, 입에 넣었던 굴 껍데기를 이리 던지고 저리 던지며, 우리의 신경을 건드린 것 같다.
생각 같아서는 ‘버릇없는 촌 늙은이 어디다 대고 함부로 아가 동산 운운하며 떠들어대느냐’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 사람이 천주교가 무엇인지 모를 뿐더러, 많은 외교인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 꾹 참았다. 그러나 신부인 나와 교우들을 얕잡아 보고 한 짓거리 같아서, 여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나는 덕이 부족하고 성격이 급하여, 누가 신부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하거나, 천주교에 대해 얕잡아 보는 행위를 하면 참지 못하여, 곧잘 시비에 휘말리곤 한다.
군종신부 시절, 본인이 개신교 신자라 하여 천주교 병사들을 소홀히 하던 대대장의 따귀를 때려 헌병대 조사를 받기도 했고, 광산촌에 있을 땐 술에 취하여 공소 벽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 자기 집 장롱에 숨겨 놓았던 사람을 땅에 엎어놓고 발로 차 곤욕을 당하기도 했다.
신부이기 전에 인간이어야 하는 것이거늘, 으스대고 잘난척하고 교만하여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오히려 아프게 해주었다.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신 예수
입으로는 겸손을 말하면서도, 아직도 하늘을 찌를 듯한 교만을 꺾지 못하고 있고, 가장 봉사적이고 희생적인 듯한 말을 하면서도, 마음과 행동은 여전히 이기적인 나 자신을 보노라면, 이 나이 먹도록 아직 사람이 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십수년 전에 신부가 되어 버렸구나 하는 자책을 해보기도 한다.
하느님과 그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좀더 겸손하고 엎드릴 줄 아는 사제가 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것은 나만의 일인지 모르나, 고심하고 노력해도, 교만과 이기심, 위선과 허세는 좀처럼 나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복음(마르 1, 7-11)에서 보면, 예수님은 죄 없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스스로 죄인임을 자청하며, 죄인들이 받는 세례성사를 받으심으로써 스스로를 인간과 동등하게 만드시는 겸손을 보여주고 계신다.
세례자 요한 역시 요즘 말로, 눈 한번 찔끔 감고 몰러온 군중 앞에서 으스대고 뽑낼만도 하였건만,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지극한 겸손으로 낮추신다.
몇 년 전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였던 「헨리누에」 박사가 갑자기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 박약자 수용시설에 들어가서, 여러가지 허드렛일을 하는 직원이 되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그의 저서 20여권은 모두 베스트 셀러였다.
그가 높은 보수와 명예를 보장하는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정신 박약자 시설에 들어가서 정박아들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여 주고, 정박아들과 같이 놀아 주는 등, 잡일을 하면서 받는 봉급이란 생계에도 타격을 입을 만큼 적은 봉급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려운 고생과 낮은 봉급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고 만족했다. 사람들이 왜 이런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물을 땐, 언제나 웃음과 침묵으로 대답하던 그가, 최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책을 내면서 대답을 주었다.
그는 책에서 말하기를 “나는 올라가는 길만 신경을 썼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듣고, 언제나 1등으로 달렸으며,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에까지 왔다. 나의 저서 20여권은 뭇사람들의 인기를 끌었으며, 오직 성공을 위하여 더 높이, 더 크게 꼭대기만을 향하면서 오르막길만 달려왔다.
그러나 한 정신박약아를 만나면서, 인간이란 어렵고 고통스럽게 사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하 여, 내리막길을 갈 때 더 성숙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는데, 내리막길에서는 복음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라고 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
하느님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며, 내리막길을 달리는 중에 인간은 성숙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요즘처럼 주연만 원하고, 1등만 요구하며, ‘왕자병’, ‘공주병’에 길들여진 우리 세대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겸손은 연약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닮는 것이다. 요한은 인간과 동등하게 되려고 죄있는 자의 모습으로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을 지극히 겸손된 자세로 맞이함으로써, 예수님의 겸손을 닮고 있다.
내가 지니고 있는 작은 권력, 작은 재물, 작은 명예로 인하여, 엎드리기를 힘들어하는 우리는, 무엇으로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
엎드려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예수님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신발 끈을 엎드려 풀어 줄 예수님을 지금까지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는가.
12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
교구주보
1. 예수님의 세례
오늘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듬뿍 받으시고 나자렛에서의 사생활을 청산하고 메시아로서의 공적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 두 가지 신비스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내려온 것과 둘째,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늘의 음성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는 순간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 강한 소명의식을 지니셨기에 세례를 받으신 다음부터 고향, 가족을 멀리하고 이스라엘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룩하는 일에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십니다.
여기 “사랑하는 아들”은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와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부자간의 돈독하고 각별한 관계를 뜻합니다.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이사 42,1참조)는 하느 님께서 일정한 사명, 곧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시려고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아들 예수가 아버지의 전권을 물려받았으며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아들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42절 1장은 “야훼의 종”이라는 신비스러운 인물이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고난을 겪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3. 우리의 이해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단순히 유대 민족의 해방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입니다. 예수께서는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시고, 정의를 세우시고, 가난한자, 억눌린 자, 갇힌 자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메시아의 사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듬뿍 받아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종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성령이 없는 교회는 하나의 단체에 불과할 뿐이며, 섬기는 모습이 없는 교회는 교우들에게 짐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새 천년에는 모든 교회가 하느님의 영을 듬뿍 받고 종의 모습으로 예수께서 행하셨던 메시아의 사명을 이룩함으로써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교회), 나는 너를(교회) 어여삐 여겼노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13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주님의 세례
김남조 막달레나/ 시인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이사 55,1)
물은 네 가지 원소 중의 하나로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이슬이나 눈물같이 작은 물에서부터 바다나 대양에 이르는 큰물까지 그 수량이나 수질 또는 상징성을 살피는 여러 기준이 있겠으나 사람의 심령을 씻어 거듭나게 하는 성세의 물은 별격의 신비한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은 물로 세례를 받으나 주님은 물로 세례를 받으신 외에도 수난의 피를 흘리심으로 “증언자가 셋입니다. 곧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서로 일치합니다”(요한 1,33 참조)의 진리를 이루셨고,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도 물과 피의 일치에 달하여 성인 계보에 들게 되었습니다.
원자로가 통제기능을 잃게 되면 미국에서 파생한 사고의 결과가 중국 대륙의 지구표면에 솟 아날 수 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합니다만 물의 위력에도 놀라운 바가 있습니다.「땅 속의 바다」라는 짧은 글(분도 소책자 5) 속엔 사하라 사막 아래 거대한 저수지가 있고 그 지하 수가 위로 솟구쳐서 오아시스를 형성함을 논하면서 “어디서나 모래 층을 파서 물을 뽑아 기름진 낙원을 조성할 수는 있다. 다만 충분히 깊이 파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 포 등의 경이로운 수량이 지구의 내부에 스며들어 수백만 년 동안 비축되었을 일을 생각할 때, 지층 깊은 데서 물이 분출하거나 불이 치받아 활화산의 현상을 일으키는 사례를 능히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감탄스러운 일은 수천 년의 시간대를 화살촉처럼 꿰뚫어 진리가 전승되어 왔고 살아있는 복음의 말씀을 생명수처럼 오늘의 우리가 마시고 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너무나도 비통하며 하느님의 아들이 고통과 외로움으로 피땀을 흘리신 골고타의 비극은 이 천년의 시공을 관통하여 오늘도 바로 현 시각에 이루어지는 일인 듯이 만인의 심령에 각인을 새겨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 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이사 42,6)는 소명과 축복을 새 천년 벽두에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부어 내리십니다. 이 시대 기술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의 홍수 속에서 마음과 영혼이 자칫 위축되기 쉽고 철학의 부재와 사랑의 품귀현상이 두드러지는 이 위급지경에서 우리는 주님이 맡기시는 소명을 경건히 받아 충실히 일해야 하겠습니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는”(이사 42,3) 주님께서 자애와 권능으로 우리를 가호(加護)해 주실 것입니다.
물과 피와 성령으로 치르신 주님의 세례를 묵상하며 부디 저희가 소명을 다하기 위해 함께 매진하도록 도와주소서.
14 주의 세례축일 마르 1,6-11 (나) 현실은 우리 각자 삶과 수준의 반영
오늘은 예수 세례 축일로 성탄시기가 끝나고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의 세례는 삶의 새로운 한 단계로 모든 사람을 위한 봉헌과 봉사를 다짐하는 공적 약속입니다. 인류를 구원키 위한 하느님 계획의 첫 실현이 예수의 강생이라면, 예수의 세례는 이 강생을 현실 속에서 보다 구체화시키는 첫 작업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세례가 지닌 단계적 의미, 봉헌과 봉사, 그리고 현실의 성화(聖化)라는 관점에서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어떤 단계와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일의 순위(順位)이며 또 과정상 꼭 필요한 일정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일에는 순서와 시간이 요구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며 현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삶과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그 사람과 현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때로 삶의 현실은 고통과 갈등, 고뇌의 장(場)이기도 합니다. 그러함에도 세례는 이러한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락하여 그것을 하느님의 은총이며, 나아가 세상을 개혁하고 성화시키는 작업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는 나와 현실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시 봉헌하며, 이웃을 위하여 완전히 봉헌할 것을 다짐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다짐과 약속은 결코 사적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고 공적이며 공동체의 의미를 지녔기에 모두와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받은 신앙인들입니다. 세례 때의 우리의 약속, 우리의 다짐은 바로 이러한 공적 및 공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의 약속에 대하여 늘 책임을 지며 사는 성숙한 크리스천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과 증언을 통하여 현실은 더욱 밝아지며 그만큼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현실은 바로 우리 각자의 삶과 수준의 반영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성실한 그만큼, 우리가 의롭고 겸허한 그만큼, 우리가 봉헌하고 봉사하는 그만큼, 우리가 노력하고 투자하는 그만큼, 우리가 관심을 갖고 가꾸는 그만큼, 그 비례를 따라 현실도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불의한 현실 앞에서의 실망과 좌절을 정당화시키는 포기적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렴하면서 은총의 힘으로 변화시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상으로 창조해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천년 전에 당시의 상황을 모두 수락하시고, 그것을 뛰어넘는 회개와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시면서 그 사회를 내적으로 변혁하신 것입니다. 그 첫 표지가 바로 예수의 세례입니다.
예수는 스스로 물로 씻겨지면서 깨끗하고 겸허한 삶을 몸소 보여주셨고, 깨끗이 씻는 이 작업이 모두에게 요구됨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예수와 함께 우리는 더럽고 묵은 것을 말끔히 씻어버리며, 깨끗하고 새로운 삶을 이룩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