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 1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14주일




        12. 강길웅 신부(다)/26


        13. 이순성 신부(다)/28                14. 김정진 신부(다)/30            






12        연중 제14주일   루가 10,1-12.17-20 (다) 평화를 빌어 주자


                                                           강길웅 신부




평화는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아니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세상은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평화가 깨졌으며 깨진 평화는 이후로 세상은 다시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성현들이 있었고 또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평화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더 요원해졌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야훼께서는 “나 이제 평화를 강물처럼 예루살렘에 끌어들이리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셨을 때 그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인류에게 평화를 젖먹여 주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복음에서 주님이 장차 찾아가실 여러 마을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는데 그러면서 당부하시기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화를 빌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가져다주는 선물 중의 하나는 바로 평화입니다. 그것도 썩지 않는 영원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평화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얻어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알아야 합니다.




어떤 형제가 도박 때문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는 일종의 도박환자였습니다. 화투짝을 손에서 놓으면 늘 불안했고 곧 돈을 딸 것 같은 착각 때문에 아무 것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늘 딸 것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었습니다. 이제는 건강도, 가정도, 그리고 사업마저도 병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화투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뜻대로 안되었습니다.




부인은 돈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눈물로 호소를 해 보기도 했고 이혼을 하자고 협박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박 자체가 병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제불능의 친구가 어느 성령 세미나에 참석해서는 자기 병을 고쳤습니다. 믿지도 않는 사람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묘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손에서 화투짝을 떼면 생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손에 화투가 있어야 살맛을 느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헛된 평화에서 벗어나 참된 평화를 찾았던 것입니다. 건강도 찾았고 일이 의욕도 찾았으며 또 가정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평화를 가져왔고 예수님이 평화를 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정말 평화롭기를 원하십니다. 아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하늘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고 천사들이 노래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엔 예수님이 오심으로 해서 평화가 비로소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인류 역사에 예수님이 들어오심으로 해서 세상은 평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분의 평화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하고 또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교회부터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합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고 우리 자신이 새로운 예루살렘의 시민이기 때문에 평화의 물결이 우리를 통해 이웃으로 넘쳐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순(?)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 자체이신데 과연 그분의 생애는 평화로우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극심한 불안을 체험하셨습니다. 태어나셨을 때도 그랬고 전도생활 3년은 그야말로 불안과 초조와 공포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 이게 뭐냐?




평화 자체이셨던 분이었지만 예수님은 결코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겟세마니에서는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라는 표현까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당신이 세상의 불안을 혼자서 다 뒤집어쓰셨습니다. 세상의 공포와 불안을 그분이 걷어 가셨기 때문에 세상은 이제 그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참 평화를 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 고통받고 눈물 흘리며 가슴 태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 평화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 5,9)라고 하셨습니다. 묘하게도 평화는 평화를 위해 땀을 흘릴 때 그때 진정한 평화가 주어집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화를 빌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자들은 돈이나 식량이나 옷 등 물건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거짓 평화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서로에게 평화를 빌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13       연중 제14주일   루가 10,1-12.17-20 (다) 댁에 평화를 빕니다


                                                          이순성 신부




사람이면 누구나 평화를 원합니다. 잘 사는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잘 나거나 못난 사람들, 철부지 어린아이들까지도 평화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나 원하는 평화는 과연 어떤 것이며 또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또 어떤 것입니까?


우리 모두는 진정 지금까지 우리가 원했던 평화와 예수께서 오늘 말씀하신 평화의 관념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시기에 도달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평화의 뜻을 간단히 살펴본 후 우리가 원하는 펴와,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구약성서의 전통적인 평화관념은 첫째조건으로 하느님의 선물로서 완전한 행복을 보장해 주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행복을 보장해 주는 상태란 곧 우리가 일상생활을 꾸려가는 실존의 유복(裕福)을 의미하며, 자연, 자기자신, 하느님의 三者가 공동으로 화합하여 삶을 사는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두 번째 조건으로 구약성서의 평화관념은 인간의 구원과 정의의 실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이란 영원한 삶을 말하며 정의의 실현이란 온갖 악이 제거되고 오직 선만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상과 같은 구약성서의 평화관념 즉 평화의 원칙적인 관념을 염두에 두고서 지금까지 우리가 원했던 평화와 예수의 평화를 살펴봅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평화하면 전쟁이 없는 안락하고 온화한 생활 상태로 알고 있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전쟁의 소용돌이가 없게 된지 어언 25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의 평화관념은 사실상 많이도 변질되었습니다.




전쟁 당시만 해도 어서 전쟁이 끝났으면, 어서 평화가 왔으면 하던 시절의 평화관념은 어느덧 우리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돈만 있으면 평화스럽지 한다던가, 그저 높은 자리에만 앉으면 평화라는 것은 바랄 필요 없지 하는가 하면 뭐니뭐니해도 학력이 있어야지, 학력이 없으면 돈도, 권력도 손에 쥐어지지 않는 법이야 하는 사람들로 이 사회는 넘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뿐입니까? 좀더 극단에 가깝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별 것 아니야 정력이 좋아서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고 평소에 원했건 일 성취시키면 그것이 곧 평화야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아무튼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재력 혹은 권력은 평화, 또는 학력 혹은 정력은 평화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관념이 이와 같이 변질된 데는 물론 그만한 원인들이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즉시 손꼽을 수 있는 하나의 원인은 사람들이 생의 목적을 물질에 두고 물질로부터 행복과 삶의 보람을 얻으려 하는 소치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0세기의 물질문명은 과거 지구상에서 그 어느 시대에 이룩했던 물질문명보다 수백배, 수천배 월등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애초에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발명되었던 온갖 물질적인 것들은 이제 와서 사람들의 전신상태 마저 지배하는 괴물, 악마로 둔갑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의 다수 획득을 위해 재력이 어떻고, 권력이 어떻고, 학력이 어떻고, 정력이 어떻다고 왈가왈부하게 만드는가 하면 심지어 평화의 최종 목표가 물질인 양 그 물질을 얻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재력, 권력, 학력, 정력을 확보했을 땐 평화를 얻은 것처럼 소란을 피우는 것입니다.




과연 물질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약속해 주고 있습니까? 물질을 풍성하게 소유한 사람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산더미 같은 물질을 획득한 부자가 평화스럽게 살아보자고 다짐했을 때 세상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비극적인 예화를 루가복음 12장 16-21절에서 읽어보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물질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를 마치 물질의 선물과 같이 생각하게 되는 데서, 즉 사람의 어리석은 마음이 나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물질을 얻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재력, 권력, 학력, 정력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예로 들면 옛 속담에 “금관자 서슬에 큰기침한다”는 말이 있듯이 권력을 잡으면 권력을 남용한 물질의 확보에 현안이 되고 그러다가 물질에 눈이 어두어진 권력자는 정의를 무시한 폭력을 휘두르다가 스스로의 구원을 포기하고 영원한 삶을 저버리게 되기 때문에 역시 권력 자체보다도 권력자의 어두운 마음을 우리는 질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는 학력이나 정력의 경우에도 같이 해당되고 있습니다. 결국 평화관념에 대한 변질 여부는 결코 여타의 원인이라기 보다도 오직 한가지 바로 사람들의 간사한 마음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예수의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 봄으로써 지금까지 잘못 생각해 왔던 우리들의 평화관념과 비교할 뿐 아니라 우리들의 잘못된 평화관념을 수정함으로써 새로운 평화관념을 갖고 그 평화관념에 의한 진정한 평화를 얻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평화에 대하여 루가 복음사가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라고 2장 29절에서 기록하고 있으며 정력에 의해 평화를 얻고자 했던 행실 나쁜 여인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을 때 구원과 함께 주시는 선물이라고(7,50) 기록했고 저녁으로 평화를 얻고자 했던 가련한 병자 부인이 재산을 다 버린 후 마지막으로 예수께로부터 평화를 기대했을 때 틀림없이 생명과 함께 역시 평화를 선물로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8,48)




아무튼 루가 복음사가는 평화란 곧 예수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24,36), 또한 그 평화는 오직 좋은 일만을 지칭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기는 평화는 구약성서에서 전통적으로 말하는 평화관념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우리 생활에 있어서 가져야 할 평화관념과 그 평화의 실현을 위해 취해야 할 태도가 명백해 짐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즉 평화는 물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에게서 얻을 수 있으며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물질을 목적으로 한 재력, 권력, 학력, 정력의 매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다고 재력, 권력, 학력, 정력을 포기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도 얼마든지 예수의 평화를 얻는 데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복음으로 간직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서 다같이 평화를 얻도록 한다면,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해 그러한 것들을 합당하게 사용한다면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하트마 간디가 말하는 평화의 조건, “한분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정녕 예수의 평화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14         연중 제14주일  루가 10,1-12.17-20 (다) 그리스도의 평화


                                                  김정진 신부




오늘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우리 신자 가정에 깃들어 길이길이 머물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진실한 평화는 하느님의 귀한 선물이며 값진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이류를 심판하고 책벌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용서와 자비와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찾고 신봉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항상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멀리하며 양심의 생활을 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하며 언제나 불안과 초조와 혼미 속에서 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여,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내셨으니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평안할 수 없사옵나이다”(「고백록」 1장)하고 독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 바오로가 사도가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라고 말씀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진정 우리의 평화이시며 평화를 주시려 오셨고 또한 평화를 우리에게 선물로 남겨 두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사 중 영성체 전 기도문 중에서 “주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서로 평화의 축복을 나누십시오” “진심으로 축복합니다”하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화목과 평화는 신앙생활의 특징이며 신자들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주여 우리 죄를 보지 마시고 오직 성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성교회로 하여금 화목하여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하며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은 72인의 제자들을 사방에 파견하시면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 말하자면 희소식을 전하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리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라고까지 하십니다.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라고 하시며 평화는 누구에게나 쉽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십니다.




참다운 평화는 악이 없는 곳에, 죄의 용서를 받은 곳에 깃드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류가 화해하고 가까워지고 친밀할 적에 진실한 평화는 오는 것입니다. 부모가 서로 화목하며 원만한 가정생활을 할 적에 평화의 천사는 찾아오는 것이고 기도하는 가정, 나을 동정하며 도울 줄 아는 가정, 양심을 따라 사는 가정에 진정한 평화는 머물게 마련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 역시 오늘 제2독서에서 당시의 신자들에게 참다운 평화를 빌어줍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대로 살며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이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성 바오로 사도의 여러 편지의 모두(冒頭)를 유심히 보십시오. 어느 편지에든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를 빌고 있습니다. 이처럼 평화와 은총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소망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오늘도 평화의 기쁜 소식을 세계 방방곡곡에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평화와 은총의 선물을 받은 이는 모름지기 이것을 또한 이웃 사람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믿음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해 줌으로써, 죄악을 피하고 유혹에 빠지지 않음으로써, 내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듯이 우리 이웃에게 대해서 관심을 갖고 도와줌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평화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평화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이 세상의 궁핍을 모르고 노래부르며 즐거워하는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평화는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싹트는 확신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거절과 능욕과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는 가치가 있는 그런 평화입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은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 축일의 외부행사의 주일입니다.




김 신부님은 하느님의 진리와 신앙을 이 땅에 심으려고 얼마나 많은 고통과 학대와 박해를 받았습니까. 그는 짧은 인생을 통하여 또한 얼마나 많은 업적과 공적을 남겨 주었는지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그의 생애를 눈물 없이 읽어나갈 수 없으며 그의 하느님께 향한 일편단심은 우리의 심중에 깊이 사무치는 바가 있고 그의 영웅적인 순교정신은 우리의 간담을 서늘케 해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참다운 평화와 기쁨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되리니 당신들도 영복을 얻고자 하거든 천주를 공경하시오” 하는 마지막 설교를 남기고 안드레아 김 신부님은 태연한 모습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예수님의 진실한 평화를 몸소 느꼈고 이웃과 동포에게 하느님의 평화와 은총을 푸짐하게 베풀어준 사실을 우리는 깊이 명심하고 그분의 후손답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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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 14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 14 주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제 1독서 : 아사 66,10-14c


    제 2독서 : 갈라 6,1-18


    복음 : 루가 10,1-12. 17-20


    해설

    오랜 귀양살이 후에 있게 될 예루살렘의 중흥을 알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기쁜 소식의 선포(이사 66,10-14)와 루가에 의해 서술되고 있는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관한 이야기(루가 10,1-12. 17-20) 사이에는 내용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논조상의 차이가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구원의 사명을 맡겨 파견하시지만 그들에게 희열보다는 고통을 예고하신다. 그들은 마치 ‘이리떼 가운데 있는 어린 양’(3절)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사야 예언자는 새 예루살렘에 넘쳐흐르게 될 기쁨에 대해 강조한다 :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나 이제 평화를 강물처럼 예루살렘에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평화를 개울처럼 쏟아져 들어오게 하리라. 젖먹이들은 그의 등에 업혀 다니고 무릎에서 귀여움을 받으리라’”(이사 66,12)

    그러나 실제로는 루가복음에서도 비록 예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의 전교사명이 끝났을 때이기는 하지만 기쁨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몸소 기쁨에 들떠 지나치게 흥분하는 제자들을 진정시키신다 :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가 10,20).

    하지만 복음의 분위기가 훨씬 더 엄숙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복음 내용 자체가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발과 낙담과 위기 그리고 회피와 실망의 감정이 일게 된다.

    자 , 이제 이번 주일에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말씀을 좀더 정확히 분석해 보기로 하자.


    “그때에 주께서 달리

    일흔 두 제자를 뽑아 미리 앞서 보내셨다”


    루가는 조금 전(9,1-6) 열두 사도의 파견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코(6,8-11)와 마태오(10,1-39)와 더불어 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관한 에피소드는 단독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에피소드가 마치 빵을 많게 한 기적에 관한 이야기의 경우에서와 같이 똑같은 이야기가 갈라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의 역사적 가치를 의심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루가는 열두 사도의 파견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 적어도 보다 더 길게 다루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 이 이야기를 더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점은 그의 복음 가운데 특히 9장과 10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선교’ 신학의 분위기에서 더 잘 이해된다. 앞서 언급되고 있는 사도들의 파견(9,1-6) 외에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행해 가시는 그 유명한 여행과 또한 죽은 이들에게 애도의 인사조차 하지 말고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의 근본적 요구에 관한 내용(9,51-61)을 상기해 보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보다 큰 제자들의 집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전교 ‘체험’의 구체적이 예를 대하고 있다 : “그때에 주께서 달리 일흔 두 제자를 뽑아 앞으로 찾아가실 여러 마음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10,1).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진정 복음 선포를 강화시키시기에 마음을 쓰시고 염려하시어 계속해서 더 많은 협력자들과 소식 전달자들을 확보해 나가시는 것 같다.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하고 또한 예수께서는 이미 예루살렘에서의 정해진 운명을 가셔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복음선포활동을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72라는 숫자는 유다 전승과 관련이 있는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 전승에 의하면 세계에 흩어진 이방인들의 나라 숫자가 그만큼 된다고 한다(창세 10장 참조). 이와 같은 식으로 루가는 처음에 그리스도께서 훨씬 넘어서 있는 구원의 보편적 차원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루가는 실제로 사도행전을 통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로부터 ‘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복음이 점차적으로 전파되어 나아간다는 사실을 서술한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신뢰할’ 수 있는 복음의 전달자가 되기에 필요한 요건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2절). 이 추수의 장면은 원래 예언서(요엘 4,13 참조)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사람들과 세상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다가옴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9절에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11절도 참조)고 전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종말론적’ 사업에 있어서 제자들을 당신께 결합시키고 계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분분만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도 ‘종말’을 선포하고 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자들의 선교도 미룰 수 없는 결정적 의무에 대한 책임과 결단을 요구하며 또한 촉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추수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그 복음선포자들을 일으켜 세우실 수 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특히 그들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사업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기에’ 필요한 힘으로 무장시키실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인간적 매개체를 통해 일하시지만 ‘추수의 주인’은 변함없이 구분이시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선포자들이 이렇듯 조금밖에 안되어 보이는 것은 어쩐 일일까? 아마도 그것은 복음의 제자들이 그만큼 복음으로 덜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달려 있지 않을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


    실제로 ‘전교’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말씀하신다 :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3절). 이 대목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너무나 명백하다. 우리는 여기서 온순한 어린양과 공격적이고 사나운 이리 사이의 뚜렷한 힘의 불균형을 본다. 싸움은 시작하자마자 끝이 날 것이다. 어린양이 그를 보내시는 ‘분’의 보호와 힘을 받지 못한다면 결과는 뻔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당신 제자들에게 어떤 인간적 ‘안전대책’을 미리 마련하라고 권고하시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런 것을 철저히 거절하라고 하신다 :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말라”(4절).

    이리떼 가운데 어린양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나 또는 선택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복음선포의 여정을 걸으며 살아가기에 필요한 인간적 도구의 부족함들은 아무런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이미 가난을 근본적으로 선택했으며 우리를 보내시는 그분께만 의탁하기를 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이리떼가운데서 구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면 아마도 당신 섭리를 통해 그 기쁜 소식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누군가를 통해 우리가 먹을 매일의 양식도 마련해주시지 않겠는가! :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7절).

    여기서 우리는 어째서 주님의 제자가 그를 보내신 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는 조건하에서만 복음을 전할 수 있는지를 본다. 그는 이렇게 할 때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항상 승리자가 될 수 있다. 바울로는 이 점에 관해 자기 자신을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사도직)를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2고린 4,7-10).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어째서 소식의 전달자이며 동시에 ‘평화’의 건설자가 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을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가 10,5-6절).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서로 만날 때 주고받는 평범한 인사가 아니라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선물’이며 또한 말의 소리를 통해 흩어져버림이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러한 ‘선물’이다. “살롬(Shalôm)이라고 하는 그 인사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다. 즉 그 나라의 능력과 힘의 표지이며 그 나라가 인류에게 자져다주는 생명과 새로움과 쇄신의 표지이다…. 그래서 루가는 평화를 ‘전교’의 목표로 삼는다”(J. Comblin). 그리스도의 제자는 곧 ‘이리떼 가운데 어린 양’이며 모든 사람을 위해 사랑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평화의 건설자이며 선사자이다. 그러므로 평화를 기원할 뿐만 아니라 치명자적인 자세로 주님께 대한 충실로써 그 평화를 이루어내는 자이다.


    “일흔 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왔다.”


    비록 극적이긴 하지만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이 환희의 외침으로 끝나고 있다 : “일흔 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하고 아뢰었다. 예수께서 ‘나는 사타니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17-20절).

    제자들이 주님께 아뢰는 것은 그들의 전교활동의 성공에 대한 통속적인 자만심의 표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악령들까지도 쫓아내시며 행사하신 ‘능력’에 대한 기쁨에 찬 입증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보다 더 의미 깊은 사실을 상기시키신다. 즉 제자는 자신의 전교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하늘의 영광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성공 자체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만 오는 그 성공에 대한 공로를 독점하게 하는 유혹이 될 수가 있다. 사실 사탄을 번갯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시다(이사 14,12 ; 묵시 12,8 등 참조). 하느님의 선물들은 개인적 고양이나 특권의 동기가 될 수 없고 오직 ‘공동이익’(1고린 12,7 참조)을 바라는 사람에게 그것들을 베푸시는 성령께 대한 감사의 동기가 될 뿐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진정시키고 계시긴 하지만 이 ‘기쁨’에 관한 것도 역시 ‘전교’의 영역에 들어간다. 만일 전교가 위험스럽고 자기 포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또한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면’(20절) 우리가 이리떼에게 잡혀 먹힌다 한들 고통스러운 일이겠는가!

    우리가 말한 이 모든 것은 교회 안에서 전교사명을 맡고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전교사명”(「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2항)을 띠고 있으므로 우리 모두가 지금 말한 모든 내용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 14 주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제 1독서 : 아사 66,10-14c


    제 2독서 : 갈라 6,1-18


    복음 : 루가 10,1-12. 17-20


    해설

    오랜 귀양살이 후에 있게 될 예루살렘의 중흥을 알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기쁜 소식의 선포(이사 66,10-14)와 루가에 의해 서술되고 있는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관한 이야기(루가 10,1-12. 17-20) 사이에는 내용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논조상의 차이가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구원의 사명을 맡겨 파견하시지만 그들에게 희열보다는 고통을 예고하신다. 그들은 마치 ‘이리떼 가운데 있는 어린 양’(3절)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사야 예언자는 새 예루살렘에 넘쳐흐르게 될 기쁨에 대해 강조한다 :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나 이제 평화를 강물처럼 예루살렘에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평화를 개울처럼 쏟아져 들어오게 하리라. 젖먹이들은 그의 등에 업혀 다니고 무릎에서 귀여움을 받으리라’”(이사 66,12)

    그러나 실제로는 루가복음에서도 비록 예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의 전교사명이 끝났을 때이기는 하지만 기쁨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몸소 기쁨에 들떠 지나치게 흥분하는 제자들을 진정시키신다 :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가 10,20).

    하지만 복음의 분위기가 훨씬 더 엄숙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복음 내용 자체가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발과 낙담과 위기 그리고 회피와 실망의 감정이 일게 된다.

    자 , 이제 이번 주일에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말씀을 좀더 정확히 분석해 보기로 하자.


    “그때에 주께서 달리

    일흔 두 제자를 뽑아 미리 앞서 보내셨다”


    루가는 조금 전(9,1-6) 열두 사도의 파견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코(6,8-11)와 마태오(10,1-39)와 더불어 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관한 에피소드는 단독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에피소드가 마치 빵을 많게 한 기적에 관한 이야기의 경우에서와 같이 똑같은 이야기가 갈라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의 역사적 가치를 의심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루가는 열두 사도의 파견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 적어도 보다 더 길게 다루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 이 이야기를 더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이 모든 점은 그의 복음 가운데 특히 9장과 10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선교’ 신학의 분위기에서 더 잘 이해된다. 앞서 언급되고 있는 사도들의 파견(9,1-6) 외에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행해 가시는 그 유명한 여행과 또한 죽은 이들에게 애도의 인사조차 하지 말고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의 근본적 요구에 관한 내용(9,51-61)을 상기해 보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보다 큰 제자들의 집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전교 ‘체험’의 구체적이 예를 대하고 있다 : “그때에 주께서 달리 일흔 두 제자를 뽑아 앞으로 찾아가실 여러 마음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10,1).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진정 복음 선포를 강화시키시기에 마음을 쓰시고 염려하시어 계속해서 더 많은 협력자들과 소식 전달자들을 확보해 나가시는 것 같다.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하고 또한 예수께서는 이미 예루살렘에서의 정해진 운명을 가셔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복음선포활동을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72라는 숫자는 유다 전승과 관련이 있는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 전승에 의하면 세계에 흩어진 이방인들의 나라 숫자가 그만큼 된다고 한다(창세 10장 참조). 이와 같은 식으로 루가는 처음에 그리스도께서 훨씬 넘어서 있는 구원의 보편적 차원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루가는 실제로 사도행전을 통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로부터 ‘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복음이 점차적으로 전파되어 나아간다는 사실을 서술한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신뢰할’ 수 있는 복음의 전달자가 되기에 필요한 요건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2절). 이 추수의 장면은 원래 예언서(요엘 4,13 참조)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사람들과 세상만물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다가옴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9절에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11절도 참조)고 전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종말론적’ 사업에 있어서 제자들을 당신께 결합시키고 계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분분만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도 ‘종말’을 선포하고 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자들의 선교도 미룰 수 없는 결정적 의무에 대한 책임과 결단을 요구하며 또한 촉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추수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그 복음선포자들을 일으켜 세우실 수 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특히 그들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사업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기에’ 필요한 힘으로 무장시키실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인간적 매개체를 통해 일하시지만 ‘추수의 주인’은 변함없이 구분이시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선포자들이 이렇듯 조금밖에 안되어 보이는 것은 어쩐 일일까? 아마도 그것은 복음의 제자들이 그만큼 복음으로 덜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달려 있지 않을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


    실제로 ‘전교’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말씀하신다 :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3절). 이 대목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너무나 명백하다. 우리는 여기서 온순한 어린양과 공격적이고 사나운 이리 사이의 뚜렷한 힘의 불균형을 본다. 싸움은 시작하자마자 끝이 날 것이다. 어린양이 그를 보내시는 ‘분’의 보호와 힘을 받지 못한다면 결과는 뻔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당신 제자들에게 어떤 인간적 ‘안전대책’을 미리 마련하라고 권고하시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런 것을 철저히 거절하라고 하신다 :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말라”(4절).

    이리떼 가운데 어린양이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나 또는 선택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복음선포의 여정을 걸으며 살아가기에 필요한 인간적 도구의 부족함들은 아무런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이미 가난을 근본적으로 선택했으며 우리를 보내시는 그분께만 의탁하기를 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이리떼가운데서 구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면 아마도 당신 섭리를 통해 그 기쁜 소식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누군가를 통해 우리가 먹을 매일의 양식도 마련해주시지 않겠는가! :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7절).

    여기서 우리는 어째서 주님의 제자가 그를 보내신 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는 조건하에서만 복음을 전할 수 있는지를 본다. 그는 이렇게 할 때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항상 승리자가 될 수 있다. 바울로는 이 점에 관해 자기 자신을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사도직)를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2고린 4,7-10).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어째서 소식의 전달자이며 동시에 ‘평화’의 건설자가 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을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가 10,5-6절).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서로 만날 때 주고받는 평범한 인사가 아니라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선물’이며 또한 말의 소리를 통해 흩어져버림이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러한 ‘선물’이다. “살롬(Shalôm)이라고 하는 그 인사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다. 즉 그 나라의 능력과 힘의 표지이며 그 나라가 인류에게 자져다주는 생명과 새로움과 쇄신의 표지이다…. 그래서 루가는 평화를 ‘전교’의 목표로 삼는다”(J. Comblin). 그리스도의 제자는 곧 ‘이리떼 가운데 어린 양’이며 모든 사람을 위해 사랑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평화의 건설자이며 선사자이다. 그러므로 평화를 기원할 뿐만 아니라 치명자적인 자세로 주님께 대한 충실로써 그 평화를 이루어내는 자이다.


    “일흔 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왔다.”


    비록 극적이긴 하지만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이 환희의 외침으로 끝나고 있다 : “일흔 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하고 아뢰었다. 예수께서 ‘나는 사타니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17-20절).

    제자들이 주님께 아뢰는 것은 그들의 전교활동의 성공에 대한 통속적인 자만심의 표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악령들까지도 쫓아내시며 행사하신 ‘능력’에 대한 기쁨에 찬 입증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보다 더 의미 깊은 사실을 상기시키신다. 즉 제자는 자신의 전교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하늘의 영광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성공 자체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만 오는 그 성공에 대한 공로를 독점하게 하는 유혹이 될 수가 있다. 사실 사탄을 번갯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시다(이사 14,12 ; 묵시 12,8 등 참조). 하느님의 선물들은 개인적 고양이나 특권의 동기가 될 수 없고 오직 ‘공동이익’(1고린 12,7 참조)을 바라는 사람에게 그것들을 베푸시는 성령께 대한 감사의 동기가 될 뿐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진정시키고 계시긴 하지만 이 ‘기쁨’에 관한 것도 역시 ‘전교’의 영역에 들어간다. 만일 전교가 위험스럽고 자기 포기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또한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의 행복을 위해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면’(20절) 우리가 이리떼에게 잡혀 먹힌다 한들 고통스러운 일이겠는가!

    우리가 말한 이 모든 것은 교회 안에서 전교사명을 맡고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전교사명”(「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2항)을 띠고 있으므로 우리 모두가 지금 말한 모든 내용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3. user#0 님의 말: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음을 기뻐하시오.

    <말씀연구>

    추수할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추수할 일꾼이 그렇게 열심히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고, 급한 것도 없는 것 같고, 일꾼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더러는 추수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일꾼들도 있습니다. 일꾼인 내가 누구로부터 파견 받은지 잊어먹기 때문입니다. 추수할 것은 참으로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께로 향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굶주려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매 맺으려 하지만 그 방법을 몰라서 고민하고 있습니까?

    조금만 잡아주고, 조금만 더 관심 가져 주고, 조금만 더 이해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혼자 본당 신자들을 사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목자는 없을 것입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서로 보완하면서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인사이동 되면 전 신부님이 하시던 것은 없어지고,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곳도 있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자들을 위해서 파견 받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파견 받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  그 후 주님은 다른 제자 일흔 [두] 명을 지명하여, 당신 친히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마을로 당신에 앞서 [둘씩] 둘씩 파견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뿐만 아니라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셨습니다. 일흔이라는 숫자는 성서에 나타난 민족들의 명부에 따라(창세기 10장) 전 인류를 이루는 일흔 국가의 숫자와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전체에 대한 전권을 내세우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파견된 일흔 두 제자는 예수님보다 앞서 가서 예수님께서 부여해 주신 사명을 수행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 또한 일흔 두 제자 중의 하나가 되었으면 합니다. 비록 열두 사도처럼 이름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기초 작업을 해 놓을 수 있는 신자. 나를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신자. 그런 신자가 나였으면 좋겠습니다. 구역이나 반 모임을 위해서, 직장 모임이나 기타 신앙인들의 모임을 위해서 일흔 두 제자가 되어 미리 기본 작업을 해 놓은 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들이 적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추수 주인에게 빌어 그의 추수(밭)에 일꾼들을 보내시라고 하시오.

    추수와 관계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감을 허락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인간을 제자로 부르시는 분은 또한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에 불러들이는 데 온 마음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시도록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을 달라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하는 기도는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그들 자신이 받은 소명과 선교 사명이 하느님의 은총이었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여러분은 떠나가시오. 이제 내가 여러분을 파견하는데 마치 어린양들을 이리들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1)

    “떠나가시오”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떠나는 것, 여행하는 것, 행동하는 것은 하나의 사명입니다. 제자들의 가장 중요하고도 우선되는 자격은 예수님께로부터 파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인간적인 모든 수단을 박탈당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마치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지는 어린양처럼 그렇게 파견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스스로를 “일흔 마리의 이리떼 가운데 있는 양”으로 자처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한 그들의 위대한 목자가 그들을 지켜 주고 안전하게 보살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일흔 두 제자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핵심이 됩니다.

    “이리”라는 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론가, 열광자, 괴변가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리떼 가운데 보낸다는 것은 모욕과 박해 속으로 내보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주머니도 자루도 신발도 들고 다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시오.

    사도들은 하늘에서 받은 선물을 이 세상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간다는 것이 대책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엣날이나 지금도 팔레스티나인들은 지갑을 허리춤에 넣고 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아무것도 지니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생활에 방해가 되고, 혹은 섭리에 대한 불신의 표시가 되는 것들, 혹은 하느님 나라를 전하면서 무슨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위험을 내포하는 쓸 데 없는 세속적인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가르치십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유다인은 속옷을 두 벌씩 입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만 입는 사람은 앙주 가난한 사람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절대적 청빈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파견 받은 제자들은 가난해야 했습니다. 가난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며,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 것들을 그렇게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에 온전히 투신하기 위해서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거나, 어깨에 힘을 주면서 자신을 과시하거나, 복음전파에 장애되는 어떤 일들에 참견하기 위해서 걸음을 멈추거나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우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시오.  6  거기에 평화의 아들이 있으면 여러분의 평화가 그에게 내리겠고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 방법은 단순하고 직접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집으로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집 안에서부터 온 마을 전체로 퍼져 나가야 합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인사한다는 것입니다. 이 인사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는 보통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였습니다. “평화”란 구약 성서나 탈무드를 보면, 정신적, 물질적 축복을 의미하는 대단히 넓은 뜻을 지닌 말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는 기도로 청해 준 사람에게 머뭅니다. 만일 그 사람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면 그 평화가 기도드린 사람에게로 돌아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평화를 빌어주고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얼마만큼 평화 속에 머물고 있는 사람인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7  여러분은 같은 집에 머물면서 그들의 음식을 먹고 마시시오. 사실 일꾼은 마땅히 제 품삯을 받을 만합니다.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시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하느님의 선물을 돈을 받고 팔아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선교사들의 생활을 당연히 돌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씨를 심어 주었는데 이제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을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살며 제단을 맡아 보는 사람들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그 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제정해 주셨습니다”(1고린9,11-14).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영리와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을 우선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거처를 끊임없이 옮기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락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8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여러분을 받아들이거든 여러분에게 차려 주는 음식을 먹고 

    제자들을 환영하는 동네는 그들의 마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동네에서는 자기들이 받은 사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주는 음식을 먹으라는 것은 그런 것들에 연연해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음식이 정결한 음식인지 부정한 음식인지를 가리지 말고 그들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님이 나환자촌에 봉사를 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밥 먹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나병에 걸린 손으로 밥을 퍼서 주는데 그걸 먹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먹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그들과 더욱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음식은 주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초대받았을 때 음식이 간이 안 맞는다든지, 나는 회를 좋아하는데 왜 고기를 주냐느니, 나는 이런 음식은 안먹는다느니…그런 말을 하면 다시는 초대할 생각도 안들고, 나를 사람 취급도 안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9  거기 있는 병든 이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다가왔습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시오.

    병자의 치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들이 선포하는 구원의 때를 준비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병자의 치유는 이 구원의 때가 힘차게 도래하였다는 실제적인 증거가 될 것입니다. 대머리가 아무리 발모제를 팔아도 팔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0  그리고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여러분을 받아들이지 않거든 그 길거리에 나가 말하기를 11  ‘당신들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를 당신들한테 털어 놓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이 사실만은 알아야 합니다’ 하시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제자들도 믿지 않는 동네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당신네 동네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표시로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지역을 벗어날 때나 팔레스티나의 거룩한 땅에 발을 들여놓을 때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곤 했습니다. 이제 그 동네가 망했다 해서 제자들이 책임을 물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배척하고 예수님께 마음을 닫아 버리는 사람은 스스로를 징벌하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만을 알려 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12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그 날에 소돔이 그 고을보다 수월할 것입니다.”

    소돔은 유다인들에게는 범죄와 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한 동네의 책임은 소돔의 범죄보다 큽니다. 그날은 심판하는 날입니다. 이 날,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한 동네가 소돔보다 엄한 벌을 받는 것은, 보다 풍부한 은총을 받으면서도 하느님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17  그런데 일흔 [두]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와서는 “주님, 귀신들조차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순종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18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사탄이 번갯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흔 두 제자는 선교 여행에서 겪은 일들을 예수님께 보고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질병들이 제자들의 명령에 복종하였고,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사탄의 권세까지도 제자들에게 복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일흔 두 제자는 기쁨에 넘쳐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를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낸 것은 사탄의 세력에 대한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표징이었습니다.


    19  보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뱀과 전갈을 짓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짓밟는 권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것도 여러분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20  그러나 여러분은 (악)령들이 여러분에게 순종한다고 기뻐하지 말고,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음을 기뻐하시오.”

    사도들은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함께 누렸습니다. 뱀과 전갈은 그 사악한 본성과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성서나 성서적인 용어에서는 사탄의 부하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구세주는 전갈들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실 분이십니다. 즉 나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세력들로부터 구해주실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도록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각 동네가 그 동네 주민의 명단을 보존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그 동네가 제공하는 모든 특혜를 누렸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생명에 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내가 일흔 두 제자중의 하나가 되기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 복음을 전하면서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며, 보람된 것은 무엇이 있었습니까?

  4. user#0 님의 말: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음을 기뻐하시오.

    <말씀연구>

    추수할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추수할 일꾼이 그렇게 열심히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고, 급한 것도 없는 것 같고, 일꾼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더러는 추수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일꾼들도 있습니다. 일꾼인 내가 누구로부터 파견 받은지 잊어먹기 때문입니다. 추수할 것은 참으로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께로 향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굶주려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매 맺으려 하지만 그 방법을 몰라서 고민하고 있습니까?

    조금만 잡아주고, 조금만 더 관심 가져 주고, 조금만 더 이해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혼자 본당 신자들을 사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목자는 없을 것입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서로 보완하면서 일을 추진해야 합니다. 인사이동 되면 전 신부님이 하시던 것은 없어지고,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곳도 있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자들을 위해서 파견 받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파견 받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1  그 후 주님은 다른 제자 일흔 [두] 명을 지명하여, 당신 친히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마을로 당신에 앞서 [둘씩] 둘씩 파견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뿐만 아니라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셨습니다. 일흔이라는 숫자는 성서에 나타난 민족들의 명부에 따라(창세기 10장) 전 인류를 이루는 일흔 국가의 숫자와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전체에 대한 전권을 내세우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파견된 일흔 두 제자는 예수님보다 앞서 가서 예수님께서 부여해 주신 사명을 수행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 또한 일흔 두 제자 중의 하나가 되었으면 합니다. 비록 열두 사도처럼 이름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기초 작업을 해 놓을 수 있는 신자. 나를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신자. 그런 신자가 나였으면 좋겠습니다. 구역이나 반 모임을 위해서, 직장 모임이나 기타 신앙인들의 모임을 위해서 일흔 두 제자가 되어 미리 기본 작업을 해 놓은 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들이 적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추수 주인에게 빌어 그의 추수(밭)에 일꾼들을 보내시라고 하시오.

    추수와 관계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감을 허락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인간을 제자로 부르시는 분은 또한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에 불러들이는 데 온 마음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시도록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을 달라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하는 기도는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그들 자신이 받은 소명과 선교 사명이 하느님의 은총이었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여러분은 떠나가시오. 이제 내가 여러분을 파견하는데 마치 어린양들을 이리들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1)

    “떠나가시오”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떠나는 것, 여행하는 것, 행동하는 것은 하나의 사명입니다. 제자들의 가장 중요하고도 우선되는 자격은 예수님께로부터 파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인간적인 모든 수단을 박탈당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마치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지는 어린양처럼 그렇게 파견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스스로를 “일흔 마리의 이리떼 가운데 있는 양”으로 자처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한 그들의 위대한 목자가 그들을 지켜 주고 안전하게 보살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일흔 두 제자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핵심이 됩니다.

    “이리”라는 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론가, 열광자, 괴변가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리떼 가운데 보낸다는 것은 모욕과 박해 속으로 내보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주머니도 자루도 신발도 들고 다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시오.

    사도들은 하늘에서 받은 선물을 이 세상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간다는 것이 대책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엣날이나 지금도 팔레스티나인들은 지갑을 허리춤에 넣고 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아무것도 지니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생활에 방해가 되고, 혹은 섭리에 대한 불신의 표시가 되는 것들, 혹은 하느님 나라를 전하면서 무슨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위험을 내포하는 쓸 데 없는 세속적인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가르치십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유다인은 속옷을 두 벌씩 입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만 입는 사람은 앙주 가난한 사람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절대적 청빈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파견 받은 제자들은 가난해야 했습니다. 가난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며,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 것들을 그렇게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에 온전히 투신하기 위해서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거나, 어깨에 힘을 주면서 자신을 과시하거나, 복음전파에 장애되는 어떤 일들에 참견하기 위해서 걸음을 멈추거나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우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시오.  6  거기에 평화의 아들이 있으면 여러분의 평화가 그에게 내리겠고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 방법은 단순하고 직접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집으로 찾아가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집 안에서부터 온 마을 전체로 퍼져 나가야 합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인사한다는 것입니다. 이 인사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는 보통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였습니다. “평화”란 구약 성서나 탈무드를 보면, 정신적, 물질적 축복을 의미하는 대단히 넓은 뜻을 지닌 말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는 기도로 청해 준 사람에게 머뭅니다. 만일 그 사람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면 그 평화가 기도드린 사람에게로 돌아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평화를 빌어주고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얼마만큼 평화 속에 머물고 있는 사람인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7  여러분은 같은 집에 머물면서 그들의 음식을 먹고 마시시오. 사실 일꾼은 마땅히 제 품삯을 받을 만합니다.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시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하느님의 선물을 돈을 받고 팔아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선교사들의 생활을 당연히 돌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씨를 심어 주었는데 이제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을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살며 제단을 맡아 보는 사람들은 제단 제물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그 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제정해 주셨습니다”(1고린9,11-14).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영리와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을 우선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거처를 끊임없이 옮기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락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8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여러분을 받아들이거든 여러분에게 차려 주는 음식을 먹고 

    제자들을 환영하는 동네는 그들의 마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동네에서는 자기들이 받은 사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주는 음식을 먹으라는 것은 그런 것들에 연연해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음식이 정결한 음식인지 부정한 음식인지를 가리지 말고 그들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님이 나환자촌에 봉사를 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밥 먹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나병에 걸린 손으로 밥을 퍼서 주는데 그걸 먹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먹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그들과 더욱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음식은 주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초대받았을 때 음식이 간이 안 맞는다든지, 나는 회를 좋아하는데 왜 고기를 주냐느니, 나는 이런 음식은 안먹는다느니…그런 말을 하면 다시는 초대할 생각도 안들고, 나를 사람 취급도 안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9  거기 있는 병든 이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다가왔습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시오.

    병자의 치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들이 선포하는 구원의 때를 준비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병자의 치유는 이 구원의 때가 힘차게 도래하였다는 실제적인 증거가 될 것입니다. 대머리가 아무리 발모제를 팔아도 팔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0  그리고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여러분을 받아들이지 않거든 그 길거리에 나가 말하기를 11  ‘당신들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를 당신들한테 털어 놓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이 사실만은 알아야 합니다’ 하시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제자들도 믿지 않는 동네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당신네 동네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표시로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지역을 벗어날 때나 팔레스티나의 거룩한 땅에 발을 들여놓을 때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곤 했습니다. 이제 그 동네가 망했다 해서 제자들이 책임을 물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배척하고 예수님께 마음을 닫아 버리는 사람은 스스로를 징벌하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만을 알려 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12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그 날에 소돔이 그 고을보다 수월할 것입니다.”

    소돔은 유다인들에게는 범죄와 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한 동네의 책임은 소돔의 범죄보다 큽니다. 그날은 심판하는 날입니다. 이 날,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한 동네가 소돔보다 엄한 벌을 받는 것은, 보다 풍부한 은총을 받으면서도 하느님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17  그런데 일흔 [두]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와서는 “주님, 귀신들조차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순종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18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사탄이 번갯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흔 두 제자는 선교 여행에서 겪은 일들을 예수님께 보고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질병들이 제자들의 명령에 복종하였고,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사탄의 권세까지도 제자들에게 복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일흔 두 제자는 기쁨에 넘쳐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를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낸 것은 사탄의 세력에 대한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표징이었습니다.


    19  보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뱀과 전갈을 짓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짓밟는 권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것도 여러분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20  그러나 여러분은 (악)령들이 여러분에게 순종한다고 기뻐하지 말고,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음을 기뻐하시오.”

    사도들은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함께 누렸습니다. 뱀과 전갈은 그 사악한 본성과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성서나 성서적인 용어에서는 사탄의 부하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구세주는 전갈들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실 분이십니다. 즉 나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세력들로부터 구해주실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도록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각 동네가 그 동네 주민의 명단을 보존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그 동네가 제공하는 모든 특혜를 누렸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생명에 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내가 일흔 두 제자중의 하나가 되기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 복음을 전하면서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며, 보람된 것은 무엇이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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