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6 주일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고 있구나!
제 1독서 : 창세 18, 1-10a
제 2독서 : 골로 1, 24-28
복음 : 루가 10, 38-42
해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저자는 그 편지를 받아보게 된느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나그네 대접에 대해 권고하였다 :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히브 13,2). 그 저자는 낯선 세 사람 – 그 중 한사람은 야훼이시고(창세 18,1. 10. 11. 13) 다른 두 사람은 천사들임이(창세 19, 1) 즉시 드러나는 – 을 자기 천막에서 접대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창세 18, 1-15)를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제 1독서를 통해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오늘 전례는 그것에다 두 자매 즉 주님을 자기들의 지벵 맞아들이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에 관한 매혹적인 장면을 대립적으로 제시하면서 오늘날의 크리스탄들에게도 나그네 대접(일반적으로 손님 접대)의 의무를 재차 일깨워주고자 한다.
“너희는 내가 나그네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단순히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인간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보다 깊은 신앙적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다. 즉 다른 사람들 안에서 ‘주님’의 그림자, 아니 더 나아가 그분의 모습 자체를 알아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손님이든 누구이든간에 – 아니 어쩌면 스스로 자제하기 때문에 또는 겁이 나서 문을 두드리지도 못하는사람까지도 – 모두가 다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형제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메시지’를 맡기시는 표지로 삼으시는 그들을 거절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나그네, 가난한 이, 굶주린 이 등으로 나타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내가 나그네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느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35. 40.)
우리에게는 그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하나를 대접하는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실제로는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하느님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거나 또는 베다니아에서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환대를, 그리고 가파르나움과 예리고에서는 마태와와 자캐오의 환대를, 또한 그밖에 달느 많은 사람들의 초대를 무시하거나 거절하시지 않으셨던 그리스도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다.
여기서 대화의 내용은 단순히 도움을 필요로 한는 어떤 경우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깊은 내용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즉 다름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어주어야 할 그리스도교 신자의 자세 자체에 대한 질채과 비난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이기주의의 테두리를 부수어버리고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사랑과 우정의 축제를 거행할 수 있도록 그들의 부족한 바(일반적으로 물질적인 부족)를 알아차리어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함께하는 기쁨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성’이 지니는 의미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 특히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친구로 받아들이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어야 할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대도시에서 – 정체불명의 압박감과 짓눌리는 고통에 직면하고 있다. 가정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우리를 갈라놓고 떼어놓아, 집단적 ‘공포심’을 야기시키고 있는 사회에서 요구되고 있는 개방과 헌신의 필요성을 충족시키기에는 더 이상 충분치가 못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모든 사람들이 보다 폭넓은 형제애와 상호 헌신을 체험하고 생활화할 수 있는 탁월한 조직체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에 관해 생생한 현실적 감각으로 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있다 : “특히 현대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이 그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어주고 누구를 만나든지 적극적으로 봉사해야할 의무가 있다. 예컨대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노인, 불의하게 천대받는 외국인 노동자, 피난민, 불법혼인에서 태어난 부모의 죄 때문에 탓없이 억울하게 고생하는 사생아, ‘나의 이 작은 형제 중에서 한 사람에게 베푼 것이 곧 내게 베푼것’이라 하신 주님의 말씀(마태 25,40)을 상기시키며 우리 양심을 제촉하는 굶주린 사람, 이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줄 의무가 있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자」. 27항).
교회는 이러한 조건을 갖출 때에 비로소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과 하느님을 영접하는 새로운 아브라함의 천막이 될 수 있고 또한 진실한 인간적 열정과 애정을 요구하시는 주님, 바로 그분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새로운 베다니아의 집이 될 수 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내용을 참고로 하면 오늘 복음을 좀더 잘 분석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루가의 서술 계획에 따르면(9,51 참조),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의 긴 여행의 특 안에서 전개되고 있다. 우리가 이 이야기의 배경을 통해 일반적으로 쉽게 이애할 수 있는 내용은 예수께서 당신을 대접해 줄 친구의 집 문을 두드려야 할 처지라든가, 그분에게 방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온통 바쳐드리고자 하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기쁨 등이다.
실제로 이러한 것들이 두 자매 즉 마르타와 마리아에 의해, 비록 표현 방법은 다르지만 근봊적으로는 똑같이 너그럽고 사랑에 찬 마음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오늘 복음 참조).
정성과 사랑으로 가득찬 나그네 대접의 표본이 되고 있는 두 자매의 예수께 대한 이 관심 지극한 영접이 아브라함에 의해 베풀어진 그것과 유사성이 있긴 하지만 오늘 복음의 강조점은 이 점에 있다기보다느 아마도 훨씬 더 중요한 다른 점들에 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관심의 대상이 되는 점은 예수께 대한 두 자매의 서로 다른 태도이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만 다를 뿐 둘다 예수를 자신들의 헌신적 봉사를 통해 영접해드리고자 하며 그분께 대한 자신들의 사랑의 표지를 바쳐드리고자 한다. 그 순간 마르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갑작스레 도착하신 주님께 훌륭한 식사를 마련해드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동생이 도와주지 않는 것이 짜쯩스러웠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게 자신의 뜻을 거둘어주시기를 청한다 : “주님, 제 동새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40절). 이에 반해, 마리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현존과 말씀으로 자신을 풍요롭게 채우는 일이었다. 즉 그녀는 예수께서 그의 환대를 필요로 하시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그분의 현존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분이 찾아오시는 것은 받으시기 이해서보다는 주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어떤 사람의 발치에 앉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로도 가믈리엘 선생 아래서(발치에서) 교육을 받았고(사도 22,3), 그보다 앞서 예수 자신도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성전에서 학자들과 한 자리에 앉아 계셨다(루가 2,46). 말하자면 그것은 스승 앞에서 제자가 취하는 전형적 태도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예수 앞에서 가장 적합한 태도, 즉 순종하는 자세로 진리와 사랑의 가르침을 듣는 제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동생의 태도를 나무라며 그녀를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마르타 앞에서 마리아를 옹호해 주신다 :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41-42절).
그녀를 두둔하실 뿐만 아니라 오해려 입장을 바꾸어놓으신다. 즉 올바른 태도를 마르타의 태도가 아니라 마리아의 태도라고 보신다. 왜냐하면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42절) 즉 예수를 통해서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수수께끼같은 말은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loghion)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예수를 통해 만나게 되는 하느님 나라의 실체와 접하게 되면 식사 문제난 음식 종류같은 것은 이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마리아는 “빼았어서는 안될 참으로 좋은 몫을 택했다”(42절). 즉 어떤 일순간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지는 물질적 음식처럼 상해버리거나 없어져버리게 되지 않을 그러한 몫을 택한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에 완성될 종말론적 실체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관심이 물질적 음식에서 ‘말씀’을 듣는 영신적 음식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잘 알아듣지 못함으로 인해 잘못된 사본들이 많은데 그 사본들은 이 대목을 ‘필요한 것은 많지 않고 오직 한 가지가 필요하다“(B.S. 33 등)는 식으로 알아들어서 마치 예수께서 음식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마르타에게 꼭 필요한 어떤 음식을 준비시키고자 하시는 것처럼 해석한 경우도 있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두 자매는 주님을 영접하고 모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법을 대변하고 있는데 그 방법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완적 관계에 있다. 마르타의 잘못은 주님을 위해 노동을 하고 봉사하는 데(diakonein) 몰두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고 걱정함’(41절)에 있다. 온통 ‘일하는 데’ 몰두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그 일의 결과가 돌려져야 할 대상인 ‘그분’을 동한히하게 된다.
항상 그렇지만 특히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떨어직 쉬운 위험은 행동주의 내지는 실용성위주의 생활에 몰두함으로써 하느님보다는 사람들을 더 중요시하고 세상 사물을 만드신 분보다 그 사물들을 더 중요시하는데 있다. 마르타의 경우에서처럼 우선 많은 것을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그가 베푸는 봉사가 고귀한 것이긴 하지만 잘못하면 뚜렷한 내용이 없는 행동이 되어버리거나, 하느님 나라를 위해 유익한 것이지 또는 꼭 필요한 것인지를 판단해 볼 때 헛된 수고가 되어버릴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 뿐이시다. 사람들은 ‘행동을 함’에 있어서 너무나 자주 자기 자신만을 찾곤 한다.
반면에, 오직 귀기울여 들으려는 자세와 인내심을 통해서만 자신을 비울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복음에 근거하고 있는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사람들은 또한 자신의 행동에 진실한 내용과 가치있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째서 마르타가 마리아의 모습 즉 스승의 메시지를 무엇보다도 먼저 내면 깊숙이에 새겨듣는 제자의 모습으로 채워져야 할 필요가 있는지, 그리고 그분(예수)을 조용히 침묵 속에서 사랑해야 되는지, 또한 어째서 그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외쳐 알리고 진정으로 그분을ㅇ 특별한 생활 환경과 처지에 있는 가난한 이들ㅇ,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 안에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교부들의 전승과 또한 일반적 영성생활의 전승에서는 두 자매의 모습에서 각각 활동생활과 관상생활 – 예수께서는 분명히 전자보다는 후자에 우위성을 부여하신다고 여기면서 – 의 상징을 보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발전ㄴ에 따라 윤곽이 잡혀지게 될 계속 이어지는 역사적 상황에다 폭넓게 복음을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무리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엄격한 성서주석학적 방법론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여기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하시는 바는 진정한 복음적 제자란 무엇보다도 먼저 ‘스승’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그분의 발치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 다음에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마르타가 주님을 합당하게 모시려면 보다 더깊은 관상적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42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무익하고 쓸데없는 일들에 시간을 덜 낭비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예수께서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신다는 사실과 그분으로 자신을 채울 뿐만 아니라, 그분의 형상을 닮고 또한 그분의 모상을 간직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 그분도 채워드려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마르타와 마리아가 라자로라는 중요인물의 누이동생들인데(요한 11,1-14 ; 12,1-3 참조) 복음사가는 이제까지 언급한 고귀한 진리와 숭교한 사랑 그리고 사려깊은 마음씨를 표현하기 위해 그 두 자매만을 무대에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여기서 예수께서는 여자를 완전한 제자의 ‘상징’으로 택하고 계신다.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여자를 차별대우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오해려 크리스찬 생활을 가장 드높이 체험하고 증거하는 존재의 차원에까지 들어높이신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을 자주 입에 올리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 이 복음 장면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닐수 있다. 즉 예수께서 보실 때 ‘가정’이라는 것조차도 여성의 모든 능력과 풍부한 활력을다소모시킬 수는 없다. 마르타가 국자와 남비에 둘러싸여 온통 자기 자신을 소모시키고 있다고 한다면, 마리아는 이 세상보다도 더 큰 진리와 사랑에 대한 탐구와 관상에 자신을 열어 깊이 참여하고 있다.

마리아는 그 좋은 몫을 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말씀연구>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생각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몫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해 시중을 들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둘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집에서 두 가지의 영예를 받으십니다. 활동으로 당신을 섬기는 마르타와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 활동 생활과 관상 생활. 나 또한 행동으로 주님을 찬미하고 기도 안에서 주님을 향한다면 마리아와 마르타의 모습으로 주님께 영예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38 그들이 여행하던 중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그분을 모셔들였다.
요한복음에 따르면(11,1) 이곳은 라자로와 두 자매가 살고 있는 베다니아입니다. 아마도 가깝게 지냈던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이는 마르타(주부란 뜻)이빈다. 그녀는 마리아의 언니인데 아직 미혼입니다. 만일 결혼했다면 손님 대접은 주인이 맡을 일이기 때문에 마르타가 부각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9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아우가 있었는데 그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리아는 손님 대접에는 무관심한 채, 제자가 스승을 대하듯, 예수님 앞에 앉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그분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유다인 율법학자들은 여자들에게는 율법을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신 스승께서는 여자들에게도 당신의 메시지를 설교하셨습니다. 교회는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의 말씀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여러 가지 시중을 드느라고 분주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가서 “주님, 제 아우가 저 혼자만 시중들게 버려 두는데도 가만히 계십니까? 그더러 저를 도와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여쭈었다.
마르타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소중한 손님의 접대를 잘 하려고 더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불평을 하게 됩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으니. 마르타에게는 음식 시중을 드는 일이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것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으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예수님을 섬기는 최상의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르타는 자신의 일에만 너무 집착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해 버린 것입니다.
삶이 기도요 일이 기도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삶은 절대로 기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기도가 되기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일해야 합니다. 일하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41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당신은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부산을 떨지만 2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그 좋은 몫을 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거듭 해서 두 번 부르십니다. 그것은 당신 말씀에 그녀의 정신을 집중시켜, 생각해 보아야 할 깊이 있는 가르침을 깨우쳐 주려고 하신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구원에 마음을 쓴다는 것.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한 것입니다.
마르타도 마리아와 같은 것을 구하고는 있으나, 그것을 분주한 접대를 함으로써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종종 위험이 따릅니다. 어느 순간 예수님은 사라지고 일만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과는 달리 마리아는 주님 앞에 앉아서 필요한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녀가 마음을 기울인 한가지 일은 예수님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택한 것은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있어서 인간의 행복이란 하느님을 바라보고 밀접하게 일치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안에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활동생활과 기도와 하느님께 마음을 온전히 기울이는 관상 생활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는 활동 생활도, 만일 그것을 잘 해 낸다면 결코 관상 생활과 엇갈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님은 이 두가지 생활을 완전히 일치시켰습니다. 성모님은 마르타보다 더 분주하게 산 주님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길러냈습니다. 동시에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간직하였습니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이여!”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지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2. 내 활동(본당활동, 직장활동, 봉사활동)이 기도가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마리아는 그 좋은 몫을 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말씀연구>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생각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몫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해 시중을 들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둘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집에서 두 가지의 영예를 받으십니다. 활동으로 당신을 섬기는 마르타와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 활동 생활과 관상 생활. 나 또한 행동으로 주님을 찬미하고 기도 안에서 주님을 향한다면 마리아와 마르타의 모습으로 주님께 영예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38 그들이 여행하던 중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그분을 모셔들였다.
요한복음에 따르면(11,1) 이곳은 라자로와 두 자매가 살고 있는 베다니아입니다. 아마도 가깝게 지냈던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이는 마르타(주부란 뜻)이빈다. 그녀는 마리아의 언니인데 아직 미혼입니다. 만일 결혼했다면 손님 대접은 주인이 맡을 일이기 때문에 마르타가 부각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9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아우가 있었는데 그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리아는 손님 대접에는 무관심한 채, 제자가 스승을 대하듯, 예수님 앞에 앉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그분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유다인 율법학자들은 여자들에게는 율법을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신 스승께서는 여자들에게도 당신의 메시지를 설교하셨습니다. 교회는 영광스럽게 되신 주님의 말씀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여러 가지 시중을 드느라고 분주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가서 “주님, 제 아우가 저 혼자만 시중들게 버려 두는데도 가만히 계십니까? 그더러 저를 도와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여쭈었다.
마르타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소중한 손님의 접대를 잘 하려고 더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불평을 하게 됩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으니. 마르타에게는 음식 시중을 드는 일이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것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으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예수님을 섬기는 최상의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르타는 자신의 일에만 너무 집착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해 버린 것입니다.
삶이 기도요 일이 기도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삶은 절대로 기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기도가 되기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일해야 합니다. 일하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41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당신은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부산을 떨지만 2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그 좋은 몫을 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거듭 해서 두 번 부르십니다. 그것은 당신 말씀에 그녀의 정신을 집중시켜, 생각해 보아야 할 깊이 있는 가르침을 깨우쳐 주려고 하신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구원에 마음을 쓴다는 것.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한 것입니다.
마르타도 마리아와 같은 것을 구하고는 있으나, 그것을 분주한 접대를 함으로써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종종 위험이 따릅니다. 어느 순간 예수님은 사라지고 일만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과는 달리 마리아는 주님 앞에 앉아서 필요한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녀가 마음을 기울인 한가지 일은 예수님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택한 것은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있어서 인간의 행복이란 하느님을 바라보고 밀접하게 일치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안에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활동생활과 기도와 하느님께 마음을 온전히 기울이는 관상 생활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는 활동 생활도, 만일 그것을 잘 해 낸다면 결코 관상 생활과 엇갈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님은 이 두가지 생활을 완전히 일치시켰습니다. 성모님은 마르타보다 더 분주하게 산 주님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길러냈습니다. 동시에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간직하였습니다.
“행복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이여!”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지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2. 내 활동(본당활동, 직장활동, 봉사활동)이 기도가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