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3 주일
22. 조순창 신부(다)/ 40
23. 강영구 신부(다)/ 41 24. 변희선 신부(다)/ 45
25. 용하성 신부(다)/ 46 26. 강길웅 신부(다)/ 49
27. 구본영 신부(다)/ 51 28. 한연흠 신부(다)/ 53
29. 큰 사랑은 모든(다)/ 59 30. 예수님의 제자(다)/ 61
22. 연중 제23주일 루가 14,25-33 (다) 신자의 삶의 바른 지혜,
조순창 신부
9월 순교자 성월의 첫 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성전에 모인 교우 여러분께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고, 하느님의 지혜의 말씀에 감동 있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우리는 충격적인 사건의 소용돌이와, 그 안에서 희망적인 기대의 열기와, 또 지난 못된 잔재 뽑는 숙정의 된서리가 엇갈리고 있는 현실에 처해있었습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아직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학원과 사회와 정치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으니, 더욱 하느님의 축복이 필요하며, 하느님의 지혜의 말씀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때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어차피 우리의 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중단 없는 시간 안에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오늘을 우리가 살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우리입니다. 나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을 향해서 지체없이 흘러가고 있기에, 더욱 지혜롭고 알차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하느님의 지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갈수록 약아빠져서 이기적이고 타산적이며, 돈 잘 벌고 출세도 잘 하고, 명예도 얻고, 인심도 얻으며, 잘 살아가는 오늘의 처세술로서의 지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인류의 속죄의 제물이 되어, 어리석게도 십자가에서 처참히 죽어 가는 부활의 지혜를 원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소중합니다. 오늘의 제1독서 지혜서에서 들은 바대로,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부왕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야훼 하느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느님은 장수나 부귀 영화나 적을 무찌를 무력보다 지혜를 청하는 솔로몬을 슬기롭고 명석하게 하여 주시어, 이스라엘이 부강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지혜서 말씀같이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뜻은 변덕스러운데, 하느님 주시는 지혜는 이 세상사는 사람의 길을 곧게 만들어 주시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며, 인간 구원을 주시니, 지혜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 지혜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통치자로서 지혜 없이는 통치할 수 없는 것으로 믿고, 지혜를 구하여 얻었으나, 지혜를 따르지 않고, 영화에 눈이 어두워지고, 여인들에 빠져, 끝내는 반란으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지혜를 깨우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지혜롭게 사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나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고,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4)고 하셨습니다.
제2독서 필레몬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노예제도가 있던 그 시대에 노예인 오네시모를 필레몬에 보내면서, 종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본 정신에 따라서 인권을 존중하여 형제로 받아 줄 것을 부탁함으로써 신자로서의 삶의 지혜를 교훈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는 망대를 짓는 건축사나 전쟁터에 나가는 왕과 같이, “신중하고, 지혜롭고,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부모나 처자나, 재산이나 명예나, 자기 자신이라도 희생하는 결단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신자의 삶의 바른 지혜’라고 교훈 하십니다.
바로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신앙을 지키고 증거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사회적인 지위도 재산도 가족도 희생하였는데, 신앙이 없는 이들이 볼 때 는, 어리석게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참 지혜요 은혜이며 영생의 길이기에,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따라 순교자의 후손답게 신앙과 진리와 사랑과 정의를 위하여, 어떤 위협이나 고난 앞에도 두려움 없이 하느님만을 믿고, 우리 함께 사랑으로 뭉쳐, 믿음의 길을 힘차게 나아갑시다.
23. 연중 제23주일 루가 14,25-33 (다) 그 무엇애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오늘 복음 통해서 우리가 들은 예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당신의 제자가 되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밝힌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금 당장 부모를 외면하고, 남편 혹은 아내와 자식을 버리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정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혈연 관계 혹은 가족 관
계를 떠난 생활이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 형제, 자식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예수의 제자가 되는 신앙 생활과 가정 생활 혹은 사회 생활이 병행해서 동시에 영위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예수의 요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루가 복음 10장 27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은 사랑에도 우선 순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당신보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를 더 사랑하는 사람을 못마땅해 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 위에, 모든 것 위에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를 사랑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혈연 관계나 가족 관계가 대단히 중요하지만, 하느님은 가족보다 더 중요하며, 온갖 인간적인 권리는 하느님의 권리 앞에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째 편지 4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말하
자면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감싸 안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늘같지 않습니다. 이 세상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도 하늘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물론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도 아주 작은 그릇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나 재물이나 권세, 명예에 사로잡히면 거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들에게 사로잡히면, 우선은 사람이 옹졸해집니다. 그릇이 작아지는 것이지요.
그 다음으로는 눈이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눈에 보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밖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재물이나 권세를 좋아하는 사람은 재물이나 권세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늘같은 하느님이 보이지 않게 됨은 물론입니다.
돈이나 재물이나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모든 것을 이해타산에 맞추어서 득이 되면 받아들이고, 손해가 되면 배척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늘같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자기 가족뿐 아니라 이웃과 형제들, 특별히 사랑을 필요로 하는 버림받은 사람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편협한 사랑에 자신을 옭아매게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모, 자기 가족, 자기 자식, 자기 고향사람들, 자기 학교 출신들, 자기와 이해 관계가 있는 사람들만 좋아하게 됩니다. 곧 편가름이 시작되고, 여기에 불화와 분열의 씨앗이 싹트게 됩니다. 여기에 담쌓기가 시작되고 사랑의 단절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서로 나누고 베풀고 용서하는 일이 어렵게 됩니다. 여기에 지옥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잠겨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편협한 편가르기와 담쌓기를 멈출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구원이 있고 천국이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당신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를 미워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만, 그것은 그들을 증오하고 싫어하고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마저도 미워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의 제자가 되어서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데 부모나 처자식이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돈이나 재물, 권력이나 향락이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걸림돌은 “나”라는 존재입니다.
더 편하고 더 잘 먹고 더 잘살려고 하는 욕망 덩어리인 “나”,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위에 서고 싶어하는 바로 “나”라는 존재야말로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나”라는 이 걸림돌을 넘어서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에 우승한 황영조라는 선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마라톤에서 세계를 제패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가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하게 된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결코 가만히 앉아서 우연스럽게 우승을 차지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세계를 제패한 것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그리고 마라톤에서 우승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남들이 편히 쉬고 잠잘 때 뜀박질을 했을 것이고, 게을러지려는 자신을 호되게 채찍질하면서 자기와 싸웠을 것입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그는 세계 제패라는 엄청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나”라는 걸림돌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와 싸움을 해야 하겠지만 그 노력만으로는 사실상 “나”라는 걸림돌을 넘어서기가 불가능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마라톤에서 세계를 제패하는 일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주님께로의 철저한 귀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위로부터 오는 손길이 없이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나”라는 걸림돌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철저히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온갖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욕망의 덩어리이며 동시에 나약한 본성을 지닌 죄인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나”라는 걸림돌을 넘어서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을 주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전적으로 그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나보다
는 예수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나를 주장하고 나를 고집하고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뜻대로 한다면 나는 이미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욕망 덩어리인 “나”라는 존재의 노예일 뿐입니다. 내가 “나”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주님께 의지할 때 비로소 나는 주님의 권능과 능력에 참여하게 되고 내가 하
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송두리째 차지하도록 내어 주는 일이고, 그래서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혈연과 지연, 학연과 이해 관계 등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끝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을 닮는 사람이 됩니다.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면서, 그 누구의 편도 아니면서 모든 것을 감싸는 하늘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는 그 누구를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팔을 벌리고 매달리셔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그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온 인류를 사랑하시기에 모든 사람을 감싸 안으시고자 십자가에 팔을 벌리고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는 자기를 주장하시거나 자기의 뜻을 고집하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늘같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하늘같이 모든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두 팔을 벌리고 죽으셨습니다. 나자렛의 목수였던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요 구세주가 되신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도 당신을 닮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이 세상에 분열과 불화와 미움과 증오가 끝이 없는지를, 왜 서로 빼앗고, 죽이고, 사기 치고, 공갈하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하는지를, 왜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져서 분단의 고통을 당해야 하며, 영남이 어떻고 호남이 어떻고 하면서, 동서로 갈라져 있는지를, 왜 네 것과 내 것을 가리면서 지척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형제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이 모든 불행의 근원은 바로 욕망의 덩어리인 나를 극복하지 못해서이고, 네 편 내 편 하면서 편가르기를 하기 때문이고, 네 가족 내 가족 하면서 편협한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그 옹졸함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집단 이기주의의 담벽을 헐어야 하겠습니다. 끝내 철잠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고 온갖 욕망과 아집의 틀을 깨부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팔을 벌리고 매달리신 예수처럼 우리 자신도 가슴을 열고 넓게 팔을 벌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모두를 사랑하는 새 생명으로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24. 연중 제23주일 루가 14,25-33 (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변희선 신부
1960년대에 영세를 받으려면 교리문답 360조목을 다 외워야 했다. 문답 1번. 문:「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답 : 「사람은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사에 났느니라」 1770년대 서울의 대학 입시생을 둔 어미니의 첫 문답은 이렇다. 문:「어떻게 하면 내 아들이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나?」 답 :「무조건 정성을 다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다한다.」 이 답 속에는 불법 고액과외, 족집게 과외, 100일기도, 아들 방에 기대어 잠자기, 생미사 봉헌, 촌지 전달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찬다.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과 가치구조가 병들어 있다는 점이다. 서울 강남의 어느 본당 주일하교 교사의 하소연을 들어보자.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은 중고생 자녀들이 주일학교에서 교리를 배우는 것을 꺼린다. 그 이유는 대학입시에 지장이 있을 것을 우려한 때문이란다. 이 부모들은 자녀가 신앙적으로 성숙하여 참된 행복의 길을 가는 것보다는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예수님은 오늘의 복음에서, 누가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도전적인 말씀을 하신다. 우선 가족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은, 가족을 무조건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가치의 우선 순위에 대한 질문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가족주의적 이기주의에서 초월해, 모든 이웃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라는 보편적 사랑, 즉 하느님의 나라에의 초대이다.
8.15 해방 이후에 많은 부모들이 소 팔고 논 팔아서까지 자녀를 대학에 보냈던 이유는 무엇인가? 주된 이유는, 자식 하나라도 출세시켜서 온 집안이 잘 되고, 편하게 살아보자는 욕심이었다. 이러한 가족주의적 이기주의는 수십년간의 입시 지옥의 발원지이며, 결국 더 살기 좋은 사회, 부강한 국가의 발전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으니, IMF경제 난국의 주범이기도 하다.
그러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십자가는 고통이며 불편함의 상징이다. 대입을 앞둔 어머니는 아들 방 옆에서 잠을 자초 엄청난 비용, 정성, 불편함, 마음 고생 등등, 온가족이 십자가를 지고서 그의 대학 입학을 위하여,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른다. 그러면 우리는 자기 자신의 구원과 참된 행복을 위해서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 있는가? 고작 주일 미사와 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하늘나라에 대한 투자가 다 끝난 것으로 오판하고 있지는 않나?
결국 신앙생활의 발전은 예수님의 사업에 자기 자신을 얼마나 투자하고 헌신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러한 헌신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단계 : 재미로 성당에 다닌다. 많은 분들이 신부님이 좋아서 미사에 나가고 그분이 싫으면 안 나간다고 말한다. 상당수의 신자들은 성당의 단체 활동이 재미없어서 냉담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신앙인의 길이 아니다.
둘째 단계 : 무조건 열심히 다닌다. 신부님의 눈치를 보지 않는 소신과 신자다. 단체 활동에도 꾸준하다. 그러나 문제는 일종의 맹목적인 열심이다. 결국 자기 구원 중심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한다.
셋째 단계 : 현실적인 신앙인으로 산다. 매일 매일의 현실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특별히 작은 일들을 통해 신앙을 실천하려 한다.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마음이다. 마음 안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참 신앙인이다.
25. 연중 제23주일 루가 14,25-33 (다)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
용하성 신부
오늘 제1독서인 지혜서 9장의 말씀은, 솔로몬이 하느님께 바친 기도문의 일종으로 여겨지는 부분으로서, 야훼 하느님께 신적인 지혜를 빌어 얻으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느님의 지혜야말로 다른 모든 선의 조건이자 원천임을 깨닫고 이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지혜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지혜를 얻는 길은 하느님께 겸손되이 기도하여,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종말론에 미혹되는 사회적 원인
제1독서의 내용을 보면, 구구절절이 하느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인간 존재의 나약성과 한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지혜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 어떤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일을 짐작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며, 우리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을 찾아내기도 힘든 일인데, 하물며 누가 하늘에 있는 것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지혜 9,16) 하는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컬어지고, 모든 우주를 지배할 듯이 보이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란 참으로 적습니다.
참된 신앙인이라면, 이러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지혜는 출발하며, 즉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부복하여 순종하는 것이 바로 참된 지혜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이러한 자기 한계성의 인정과 겸손의 자세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강대국간의 세력 다툼,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압력과 이에 따른 약소국의 강대국에 대한 증오심의 심화, 약소국간의 도토리 키재기 식의 경쟁과 분쟁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고, 국내적으로는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냉소적인 무관심과, 이에 아랑곳없이 권력쟁취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지도자들의 한심한 작태, 빈부 격차의 심화와 계층간의 위화감 조성, 한시도 마음놓을 수 없는 극도의 사회혼란과 가치관의 타락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타락된 모습들이 도처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모습들은, 결국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인간들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속에서 육체와 영혼의 안식처를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허무맹랑한 사이비 종교의 종말론에 현혹되어 가정과 사회를 버리고, 현실도피적인 삶을 추구하게 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종말론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이며, 그 책임은 어느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면, 신앙인의 입장에서 결코 가볍게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이비 종교집단의 종말론을, 신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무너뜨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러한 사회적인 현상이 왜 일어나게 되었으며, 그 대책은 무엇인가를 오늘 복음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즘 횡행하는 종말론 문제는, 그 자체보다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인 배경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시각이라고 믿습니다. 앞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국내외의 많은 문제들이, 구조적으로 얽히고 설켜서 사회불안 요소가 되었고, 그에 대한 역작용으로 나타난 하나의 지엽적인 현상이, 바로 종말론의 대두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의 대두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처벌하고 격리시킨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는 결국 사회 전반에 걸친 자기 반성과 쇄신이 요구되는 문제라고 봅니다. 이러한 자기 반성과 쇄신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
제1독서의 말씀처럼 “지혜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길을 곧게 만들어주었고, 사람들에게 당신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을 가르쳐주었으며, 사람들을 구원해주었습니다”(지혜 9,18).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연유하고, 하느님의 뜻을 알게끔 하는 그러한 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묘책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묘책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이미 신앙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진리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6-27).
언뜻 들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에서 숨어버리고, 스스로를 순교자라고 자처하는 요즘의 종말론 추종자들과 같이 되라는 말씀처럼 들리겠지만, 여기서 부모, 형제, 자식을 미워한다는 것은, 하느님보다 그들을 더 위에 두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느님보다 인간적인 여러 가지 것들에, 더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십자가를 푸념하고 불평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의 뒤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 누구도 자신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팽개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다만 운명이나 팔자라고 할 뿐입니다.
현세적으로 말해서 운명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운명이란, 피하기보다는 그것을 극복하고, 개척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극복하는 방법이 좀 다를 뿐, 이것은 신앙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 자신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올바른 방법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며, 이때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자신의 십자가를 아무 말 없이 지고 가는 것이, 요즘의 가치관으로 보아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보다 더 현명한 판단과 선택은 없습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세상의 눈에는 더없이 어리석게 보였지만, 인간구원을 위한 가장 훌륭한 선택이었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은 우리들을 어리석은 십자가 선택을 통해, 구원이라는 가장 훌륭한 선물을 받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단호한 선택과 전적인 투신을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초대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다는 것은 곧 십자가의 선택입니다. 우리의 십자가 선택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며,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부패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 커다란 힘이 되어줄 것이며, 마침내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여러 가지 병적인 현상들을 종식시키는 치료제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루가 14,26-27. 22).
26. 연중 제23주일 루가 14,25-33 (다) 하느님 지혜의 어리석음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지혜 9,13~18 (누가 주님의 의사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제2독서 필레 8a.10.12~17 (이제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교우로서 그를 맞아 주시오)
복 음 루가 14,25~33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지혜서는 기원전 1세기의 작품으로서 지혜 문학에선 아주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지혜서를 성서로 인정하지 않으나 가톨릭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솔로몬으로 나와 있지만, 솔로몬의 작품으로는 보지 않으며 오랫동안 내려오던 무명 저자의 것을 솔로몬의 이름을 따서 권위를 부여한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은, 누가 감히 하느님의 뜻을 생각이나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지혜란 인간의 상상이나 판단을 초월한다는 내용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어른의 생각과 아이의 생각은 다릅니다. 더구나 하느님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아주 기묘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뛰어난 방법이요 최고의 방법이었지만 그러나 인간의 눈에는 그것이 한없이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를테면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도대체 주인이 종을 건지기 위해서 종노릇까지 한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 본 일도 없고 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가장 어리석고 천대받는 죄인의 십자가를 그분이 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습니다. 역겨우니까 안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지혜에 의존하고 있는 자들도 안 믿습니다. 너무도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죽음의 길인 줄 아셨으나 군중들은 그분이 나라를 세우러 가시는 길인 줄 착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본능적으로 소유의 욕망을 불태웠으며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보시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당신을 따라가기 위해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하셨으며 또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부모나 처자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기 포기의 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단 하루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돈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 힘에 대한 야망, 걷잡을 수 없는 성질, 불타오르는 성욕, 그리고 흥청망청 놀면서 쓰고 싶은 사치와 낭비의 유혹. 우리는 이런 것을 하루라도 버리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넘어지고 맙니다. 이처럼 자기를 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정말 묘합니다. 성서에도 저주받은 자의 것이라 나와 있는데도 그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면 십자가가 내 인생을 짊어져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도 훌륭한 지혜이지만, 또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는 하느님의 오묘한 지혜를 터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래서 자신의 십자가를 구원의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의 병이 십자가라면 그 병을 은혜로 받아들여야 하고 가난이 십자가라면 가난을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편이 십자가라면 남편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고 자식이 십자가라면 또 자식을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하느님의 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도 주저하시고 괴로워하시던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면 그 짊어지지 않는 어리석음 때문에 인생이 고달프게 됩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포기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지옥입니다.
많은 이들이 십자가를 내던지기 위해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부흥회다 기도회다 쫓아다니면서 “할렐루야!”, “아멘!”하고 열광하는 것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로 올라가겠다는 의지보다는 십자가를 내던지고 산에서 도망치겠다는 저의가 깊게 깔려 있습니다. 교회가 또 그런 식으로 신자들을 유도도 합니다.
예를 들면, 자기 교회에 나오면 병 고친다는 얘기를 밥먹듯이 합니다.
사람이 너무 똑똑하면 하느님의 지혜를 밑으로 내려보며 깔보게 됩니다. 신앙은 어리석은 자의 길입니다. 많은 순교자와 성인 성녀들이 그렇게 사셨고 성모님도 그렇게 사셨으며 지혜 자체이신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따라서 참 지혜를 찾읍시다. 그것이 어리석게 보여도 거기에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27. 연중 제23주일 루가 14,25-33 (다)
구본영 신부
교형 자매 여러분 한 주일 동안 안녕 하셨습니까?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이제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한 꺼풀 수그러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계절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환절기일수록 한층 더 건강에 유념하셔야 하겠습니다.
옛 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미 일을 그르친 뒤엔 아무리 뉘우쳐도 소용이 없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즉 말과 행동에 있어서의 무책임과 불성실을 꾸짖는 말인 것입니다.
한데 요즈음 우리 주변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의 사고 방식에 젖어있음을 쉽게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진지하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에 따라, 욕심에 따라 쉽고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무책임한 정권욕에 빠져있는 정치인이 그렇고, 물욕에 젖어 있는 무자비한 사용자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기분만 생각하는 몰 이해적인 아빠, 엄마가 그렇고, 얕은 행동으로 부모의 애를 태우는 자녀들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분명 쉽고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아주 힘들고 복잡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가볍고 무책임하게 대할 순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가볍고 무책임하게 대할 순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진지함과 신중함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진지함과 신중함을 보일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사실에 눈을 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눈 뜬 사람만이 함부로 쉽게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되며 오히려 남의 삶에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신사가 지하도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벌 기업의 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지하도에는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연필 몇 자루를 놓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사는 그에게 500원 짜리 동전을 하나 건네주고는 급히 지나쳤 가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앞에서 연필 두 자루를 집어들고서 아주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나와 같은 사업가시군요. 연필을 상품으로 팔고 있으니까요.” 몇 개월 훌 외모가 단정한 세일즈맨이 그 사장을 찾아 왔습니다. “선생님,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저는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저에게 잃었던 자존심을 되찾게 해 주셨고 그래서 덕분에 저는 새사람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구차하게 연필을 팔고 있는 저에게 사업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저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에서 신사는 사나이를 대함에 있어서 구차하고 우습게 대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진지하고 신중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그 사나이를 새 사람으로 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진지함이 있는 곳에 바로 구원이, 하느님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무렇게 되는대로 살아가라고 생명을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각자에게는 남모르는 상처가 저마다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아픔을 외면하고 무마시키기 위해서 마땅히 지녀야 할 진지함과 신중함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부끄럽게 하고 하느님을 저버리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한 치 앞을 못 보는 무지와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래서 하늘 우러러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진지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책임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재산으로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아니면 진리와 자유와 자존심으로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로 즉 삶의 진지함과 성실성으로만 우리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기의 삶을 사랑하고 아낀다면 속 들여다보이는 얄팍한 계산을 버리고, 자기 기분만을 내세우는 유아적인 태도를 버리고 자신과 하느님께 거짓은 버리고 솔직한, 진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과 얕은 행동을 언제인가 밝혀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를 삶의 진지함에 초대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소흘히 하고 자기에게 닥쳐오는 십자가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집착하고 피하려 하는 만큼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서 그만큼 타인에게 고통을 안겨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즉 자기 삶에 무책임하고 경솔할 때 남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단 한 번뿐인 이 삶을 진지함과 진실함으로 살아갑시다. 당장은 힘들지만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 진지하고 진실한 그만큼 우리의 앞날은 밝을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들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뿐임을 기억합시다. 그렇게 해서 각자 자기 자리에서 진지함과 진실함을 보이도록 최선을 다 합시다.
28. 연중 제23주일 루가 14,25-33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
한연흠 신부
“누구든지 너희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정말로 이 말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혹독한 말씀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연중 제23주일, 특별히 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행 중에서 가르치신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여기서 당신 제자가 되기 위해서 4가지 요구조건이 있음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상은 물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가운데서 동행하던 군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좀 더 분명히 신학적 해석을 내리자면은 당신의 제자가 되고자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제자가 된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해석함이 더 좋을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을 따르려고 모인 우리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지요.
이제 그 4가지 요구조건을 보면은…
첫째로, 진정 나를 따르고자 하면은 나에게 올 때는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 그런 사람들 모두를 미워하지 않으면, 심지어는 자기 자신 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재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미워한다’는 말을 조금 더 신학적으로 해설을 하고 우리가 묵상을 해야겠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께서 쓰신 용어가 히브리어지요. 또 구약시대에는 아람어이구요. 그 두 언어는 비교급이 없지요. 그러기에 결국 표현을 한다는 것이 ‘미워하지 않으면’ 이렇게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를 하느님 보다 더 사랑할 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감히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이렇게 지금 모였는데,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주님을 나 자신, 내 부모, 형제, 처자 모두 보다 더 주님을 사랑합니까?
대답을 모사는 그 아픈 마음을 이해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제 조금 더 설명을 한다면 우리가 묵상을 한다면, 부모, 내 처자, 형제, 자매를 미워하라고 적대시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는 하느님을 더 윗자리에 놓고 흠숭의 예를 드려라 그러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께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임을 이야기하시면서, 미워하고 적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이니까 그렇게 하되 하느님을 좀 더 첫 자리에 놓을 수 있는 그래야 당신의 제자가 될 수가 있다.
두 번째,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말씀을 하는데, ‘자기 자신을 버리라’, 참 무척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무조건 자기 자신을 거부하거나 학대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사랑의 이중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중요한 두 계명이 크리스천의 핵심사상인데,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고…
그렇지만 이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랑을 하되 먼저 이기적인 자아를 끊어버리라는 것, 그래야 만이 참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굳이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만이 아니고 수양을 쌓고 도를 닦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방법을 제일 먼저 해야 됩니다.
우리가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때 ‘이탈’이라는 말을 무척 많이 사용을 하셨습니다. ‘이탈’-자기에게서 떠나야 된다. 성인 성녀들이 그 하나의 수련에 최고로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이탈’-자기를 떠나는 것.
너무 지나치게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 있을 때, 너무 지나치게 자기를 생각하고, 너무 지나치게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하고 자기 안에 폐쇄되어 있을 때 우리는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모시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제자가 될 수가 없다는 이야기예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를 끊어버리는 것, 그때 우리는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실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엄벙덤벙 적당히 하는 신자 생활은 쉽지만 정말로 이렇게 내 자신마저도 이기적인 자아를 끊고 하느님을 제일 윗자리를 놓고 그 깊은 신비 안에서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진실 되이 믿는다는 것, 나를 끊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끊임없이 내 자신과의 지독한 싸움이 늘 우리 안에 있지요.
이제 3번째로는 심사숙고해서 책임 있는 선택을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비유까지 들어주시지요. “망대를 지을 때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계산해 보고, 내가 얼마나 가지고 잇는지 알고 시작해야 되지 않겠는가. 또 적군이 이만 명이 쳐들어올 때 내가 만 명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냉철하게 내 자신을 통찰하고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그리고 나의 능력을 인정하면서 그 유한한 존재, 또한 나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온전히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 분을 선택하는 각오, 엄청난 결단, 실천할 수 있는 과감한 용기, 이러한 것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 쉬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여러분 그런 각오로 지금 오늘 이 미사에 오신 겁니까?
이제 4번째로, 마지막으로 정말로 괴로운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고 하거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된다.” 여기서 버린다고 그랬는데 내가 차고 있는 시계도, 반지도 모든 걸 다 몽땅 버리라는 그러한 말씀이 아니고 여기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소유욕에서 해방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제물의 노에가 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소유하고자하는 열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재물이 많은 사람이 얼마나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냐? 오죽하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 보다 더 어렵다고 하시겠습니까?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십계명을 다 잘 지켰다고, 자기는 그럼 하늘나라에 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예수님이 유심히 보더니 돈이 많은 것을 눈치 채고는 “아니다. 십계명을 아무리 잘 지켰어도 너는 돈이 많기 때문에 그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그리고 나를 따라라. 그러면 너 하늘나라에 갈거다.” 이 부자청년은 도저히 그것만은 자신이 없어서 침울한 얼굴을 하고 예수님을 떠났다고 성서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욕심입니다. 욕심으로 가득 찰 때, 이기적인 자아에 폐쇄되어 있을 때, 내 마음을 열어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려 하는 그러한 진실한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결국 무엇입니까?
아주 시커먼 먹구름이 끼어서 참 빛을 차단시키는, 그래서 우리는 어두움에 살게되는 그러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신자인데, 신자인데…. 그냥 너무 나만을 생각하고, 거기에 그냥 급급한 인생, 그리고 현세 재물에 너무 지나치게 빠져서 거기에 급급한 인생… 그러면 그러한 것이 결국은 나를 장님이 되게 하고, 마음을 닫히게 해서 그 좋은 하느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러한 모든 작업이 필요한 것이지요. 거기서 해방되어야 됩니다. 중요한 것,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중요한 것, 중요한 것은 정말로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마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됩니다.
오늘 우리는 편하게 부담 없이 신자생활을 하고 있어요. 성당에 나간다는 것, 이제는 다 보편화되고 어떻게 보면 세련된 사람의 모습, 그래도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
정말로 이제는 누구나 신앙을 가져야 된다는 일반화된 사고방식, 또 예비자 교육 적당히 받고 그냥 세례만 받으면 된다는 사고방식,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단을 의미하는지를 강조하고, 또 그러한 아주 엄청난 아픔의 진통을 겪고, 결단을 통해서 진실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는데도 우리들은 결국은 정말로 내가 크리스천인가 하고 생각을 할 때 과연 어떠한 모습인지…
놀라운 것은 말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발전해오면서 근세에 들어서서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범람으로 인해 가지고 묘하게 역사의 사생아로서 무신론과 공산주의를 파생시킨 것이 바로 우리 가톨릭의 맹점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지만 하느님을 닮지 않은 크리스천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무신론자가 나왔고 공산주의가 파생되었다는 것, 놀라운 역사의 교훈입니다.
니체는 대단히 열심한 신앙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할 때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긴 서구에 있어서도 이러한 아픈 역사의 과정이 있다면, 200년밖에 안되는 한국, 여기에 몸답고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은 과연 어떠한 모습인지…
오늘 사회가 혼돈과 무질서와 불신의 풍조가 심하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하는 크리스천들이 이 교회 안에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면 지나친 단정일까?
금세기의 저명한 신학자 한스 큉 교수는 현실의 이러한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신자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를 보고, 그러한 신앙인들의 삶을 보고, 진실 되이 자기 자신에게 자문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 인가?’, 물론 이것은 책으로도 나왔습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 인가?”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리스도인 입니까? 주일 미사 한 번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스도인 입니까? 고백성사 한 번 보았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 입니까?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믿음의 생활을 하지 말라고 경고를 합니다. 물론 여러분들 대단히 열심하십니다. 더 열심하고,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지금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착각하셔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실천적인 진실한 삶을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길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럴만한 용기가 우리 안에 있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일들 많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 외에 무엇이 중요합니까? 오늘 응답송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종락은 먼지로 돌아간다는 것,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정말로 믿는다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참된 크리스천인가를 다시 한번 되묻게 하면서 정말로 하느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이제 저 자신도 사제생활을 이쯤 하면서 정말 부족한 것도 많고 아직도 더 많은 덕을 쌓아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 시편 15편의 말씀이 요즈음 제 온 몸을 우리고 있습니다.
시편 15편에 처음에 나오는 말씀이, ‘야훼께 아뢰오니 당신은 나의 주님, 내 좋은 것 당신밖에 없나이다.’ ‘당신은 나의 주님, 내 좋은 것 당신밖에 없나이다.’
전 정말 아직 나이가 젊습니다. 그러면서도 왠지 이 말씀이 저의 온 몸을 울리고 있습니다.
정말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제생활을 하면서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런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일을 많이 하고 활동을 많이 하고, 과연 그런 것인가?
그런 것보다는 좀 더 조용한 시간에 하느님을 묵상하면서 그 신비 안에 깊이 절여지지 않을 때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하느님을 가장 좋은 분으로 선택하지 않는 한 도대체 사제의 삶이란 무엇인가? 정말로 요즈음 아주 많이 이런 어떤 울림이 내 온몸 안에 타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 내 좋은 것 당신밖에 없나이다.”
그리스도를 다른 그 누구보다 더, 다른 그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고 흠숭을 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진정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나 자신을 정말로 포기하고 이제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러한 삶일 때 우리는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는 너 자신마저도 나랑 비교해서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너희는 절대로 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하늘 나라에 갈 수도 없다. 심지어는 너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보다도 나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9월 순교자 성월에 순교자적인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이 대단한 용단, 그 결단, 그리고 하느님을 제일로 선택할 수 있는 그 믿음, 우리 좀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29. 연중 제23주일 루가 14,25-33 (다)
이재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제1독서에서는 지혜가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참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세상만사의 모든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참 지혜는 하느님의 의도하심입니다.
지혜서에서는 “당신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지 않고 누가 당신의 의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십니다.
지혜는 세상사람의 길을 곧게 하고 바르게 해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철학적 지혜를 지엽적이고 부분적이라고 하시고 참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밝히십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는 세상에 대해 당신이 먼저 십자가를 지셨고 누구든지 예외 없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고서는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단 한번의 생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으로 생명을 받고 살면서도 모든 이들은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 고통입니다.
구약에서는 십자가가 형벌, 형틀, 죽음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십자가로서 자손 만대에 책임이 부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약속하셨고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비신자들은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고통을 알지 못하기 떄문입니다. 그들은 고통에 대해 실망하고 쉽게 좌절하고 원망을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이 고통에 대해서 받아 드리며 자심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꿉니다.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이 고통을 회피하지 말고 수락하고 순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복음에서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 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형제나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하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과 애착까지 끊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하느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하고 바쳐드려야 합니다.
한가지 더 말씀을 드린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명예, 지식, 권력 그리고 자기 생명 까지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며 자기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부당한 일입니다. 자신의 것으로 만 생각하고 남용한다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질 책임을 면하지 못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남용과 교만입니다. 이런 행위는 하느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떄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하느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남용하고는 자신이 하느님인 양 처신합니다. 그 예로는 타락의 천사와 우리의 원조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의 죄는 교만의 죄였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남용하였기에 벌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과 일들을 남용하고 그 분에 대한 교만한 처신을 한다면 영원한 불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선조들은 순교의 피로써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들은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의 마음이 가득 찬 분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분들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걸어갑시다. 그분들의 모범을 배웁시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 모두 하느님께 돌려 드릴 때 그 분들이 가신 길을 걸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순교 성월에 주님을 어떻게 따라야 할지 생각하고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없앱시다.
30. 연중 제23주일 루가 14,25-33 (다) 큰 사랑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
묵상 : 수도자나 성직자들의 독신생활은 단순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사도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큰 사랑은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게 한다. 여기에 값진 십자가의 의미가 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나는 교리반에 나오는 예비신자 부부와, 그 부부를 교리반에 안내한 신자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러 식당을 찾았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에, 예비신자 자매가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하고 질문을 하였다. 내가 곧장 대답을 않자, 다른 신자 자매가 열심히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그거야 “처자
식이 있으면 자신이 맡은 신자들을 열심히 돌보며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하자, 예비신자도 이해가 간다는 듯이, “목사님들은 가족이 있으니까 신자들의 부담도 많고, 일반인들도 신부님들을 목사들과는 다르게 본다”는 등등, 정작 신부인 나는 그 이야기에 끼어 들 겨를도 없다.
아마 많은 이들의 생각도 이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에 100% 동의할 수는 없다, 수녀나 수사들이 독신을 지키는 것과 사제들이 독신생활을 하는 이유가,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러면 수도자들도 자신이 하는 일(사도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독신생활을 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면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이다. 물론 사제가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독신생활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이지, 목적은 아닌 것이다. 사제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사랑의 증거이다
요즘 신문에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성추문이 화젯거리다.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이 클린턴의 추문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통령직 수행 능력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있음이 사실이다. 직무수행 능력과 도덕성과는 별개로 취급하는 것이다. 수도자나 사제들의 독신을 단순히 효과적인 사목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효과주의나 경제 마인드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목활동만 잘 한다면 독신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지닐 것이 아닌가?
우리 주변에는 수도자나 사제가 아니더라도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스님들이나 수도자들처럼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학문이나 예술을 사랑하여 거기에 전념하여 투신하다 보니,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이들이다. 이렇게 어떤 것을 사랑하고 거기에 정열을 바치다 보면 다른 것들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어떤 것을 버리는 것은 더 큰 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발현을 체험한 사도 바오로는 ‘세상 모든 것을 장애물로 여긴다’고 하셨다,(필립 3,8)
버리고 비운만큼 채워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집짓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 집을 완성할 힘이 있는지를 미리 따져보고, 전쟁에 이길 가망이 없으면 먼저 화평을 청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길은 자신의 것을 모두 버려야 하는 어려운 십자가의 길이기에 그것을 알고 미리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 속담에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확신도 없이 섣불리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어설픈 태도를 경계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길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3,35) 하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따르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임종을 앞둔 사람에겐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별하는 고통이 큰 것이라고 한다.
세상 것에 많은 애착을 가진 그만큼 더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세속적이고 시간 속에 사라져갈 세상 것들을 많이 버리면 버릴수록 하느님은 당신의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르 10,29-37) 아멘,
31. 연중 제23주일 루가 14,25-33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교육을 받거나 배운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인생은 사실 배움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고, 사람이 죽을 때까지 배워도 모든 것을 배울 수 없다는 표
현은, 역시 인간은 모든 것을 배울 수도 없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도 없는 한정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교육이라는 것을 받게 된다. 이러한 교육은 사회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사회화라는 과정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으로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어린이는 우선 태어나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환경에 적응하는 훈련을 스스로 하거나 주위의 도움을 받으면서 하게 된다.
그리고 남과 상통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고, 나이가 들면서 학교에 다니게 되며, 신체적으로 성장하고, 사회문화의 여건에 따른 지식과 삶의 방법을 습득하게 된다.
이러한 배움의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사회의 성원이 되며,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게되고 위치에 따른 역할을 이행하면서 인생이라는 여정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인 위치와 그에 따른 역할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거나, 동일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타고난 자질이나, 또는 나면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은 그 사람의 인생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현실적인 상황이다.
인생은 배움의 연속
왕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과 거지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처음부터 적어도 사회적인 삶의 조건에서 볼 때에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물론 둘이 가지는 인간이라는 기본원칙에서는 동일하지만, 사회
적인 면으로 보면 많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동등하다고 볼 수 있지만, 사회적인 가치에 있어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한 계속해서 반복되는 현상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차별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고, 또한 이러한 시도가 실행에 옮겨진 적도 있었지만, 범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례를 우리는 아직 볼 수가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한 한 조건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요구되는 조건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첫째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안되고, 둘째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조건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에 속한다. 특히 첫 번째 조건인 형제 자매 모두를 버리라는 요구는, 마치 인간이 되지 말라는 요구처럼 여겨지므로 사실 받아들이기가 불가능하게만 보인다.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
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은 계획을 세울 것을 우리에게 당부하시기 위하여, 두 가지 예를 물으신다. 집 짓는 자가 집짓기 전에 계산하는 것이나, 또는 임금이 싸움에 임하기 전에 계산하는 것은,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자신의 상태를 잘 살펴보고,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면 예수님을 따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 다음에 결심이 서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른 후에는 이러한 예수님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아이가 직접 어른으로 도약할 수는 없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인생은 연습을 통해 완성에 이를 수 있는 과정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놓은, 세상 포기에 대한 요구도 조금씩 연습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어차피 죽을 때에는 타의에 의해서라도 이것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으므로, 조금씩 연습하여 자신이 이룩할 때에 더욱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연중 제 23주일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미워하지 않으면….
제 1독서 : 지혜 9,13-18
제 2독서 : 필레 1,8a. 10. 12b-17
복음 : 루가 14,25-33
해설
제 1독서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 바치는 솔로몬(이 지혜서는 가상저자)의 지극히 아름다운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전해 주고 있다. ‘지혜’는 지성과도 슬기와도 다른 것으로, 사람들과 사물들, 그리고 생활환경과 또 크고 작은 사건들로 점철되는 역사 자체를 하느님의 빛에 비추어 평가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직 하늘로부터만 오며 인간이 혼자의 힘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누가 하느님의 의도를 알 수 있으며…. 썩어 없어질 육체는 영혼을 내리누르고 이 세상살이는 온갖 생각을 일으키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무섭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일을 짐작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며 우리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을 찾아내기도 힘든 일입니다. 하물며 누가 하늘에 잇는 것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지 않고, 당신께서 하늘에서부터 보내시는 성령을 받지 않고 누가 당신의 의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지혜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길을 곧게 만들어 주었고 사람들에게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을 가르쳐 주었으며 사람들을 구원해 주었습니다”(지혜 9,13-19).
마지막 구절들은 오직 하느님의 항구하신 ‘가르침’만이 사람들을 구원에로 인도해 주셨음을 명백히 말해 주고 있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장들(10-19장)에서 하느님이 이루실 이스라엘의 전(全)역사를 지혜의 빛에 비추어 읽고 있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보다시피, 지혜는 지성과 통찰력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함정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실현시켜 나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지혜’를 이와 같이 이해할 때 어째서 그것의 최고 완전한 표현을 그리스도에게서 찾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1고린 1,24)라고 부른다. 실제로, 우리 인간들의 계산과는 자주 일치하지 않는 신비스러운 논리를 담고 있는 하느님의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고 또 드러난다.
유일한 절대자로서의 그리스도
루가에 의한 오늘 복음(14,25-33)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들의 지혜와 일치하지 않는 구체적인 하나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에 필요한 조건들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그 이야기 전체의 밑바닥에는 그리스도라는 분은 그 무엇도 대적할 수 없는 유일한 절대자시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앞에 나오는 대잔치에 초대된 이들에 관한 비유와 뚜렷이 연결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읽는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비유에서 초대받은 이들은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하고 있다.(14,15-24). 거기에서 이미 물질적 차원에서의 어떤 장해요소(나는 밭을 샀소…. 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소…) 내지는 가족들 상호간의 애정적 차원에서의 어떤 장해요소(나는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그런 요소들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다른 여러 문장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난다.
지금 우리가 대하고 있는 복음 대목의 첫 구절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 “그때에 예수께서 군중들로 하여금 당신을 따르도록 부추기시기보다는 용기를 꺾어 놓으시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지혜로운 스승답게 당신께 대한 쓸데없이 경박한 열광적 태도가 일지 않기를 원하시는 듯하다. 그분이 제시하시는 목표는 너무나 높다. 그래서 그분은 군중들이 그분과 함께 길을 가기 전에 각자의 능력을 가늠해 보기를 바라신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즉시 이어서 사람들에게 엄격한 요구를 제시하시며 다음과 같이 단호한 말씀으로 글을 맺으신다 :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 자신의 마음을 헛된 감상에 젖게 해서는 안 된다 :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루가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마태오보다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태오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10,37)이라고 하고 있고, 루가는 ‘미워하는’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히브리적 개념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의 애정을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잇는 사람들로부터의 결별을 강하게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말이다. 또한 루가는 ‘아내’라는 말을 첨가시킴으로써 하늘 나라란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혼인까지도 포기하기를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당신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이렇듯 준엄한 요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설명하고 있듯이 그분께 대한 우리의 충실성과 비록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서로 대립되는 경우에는 그분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와 같은 가정도 해볼 수는 있지만 그런 일은 항시 있는 일이 아니다. 반면에 예수의 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항구한’ 생활 태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으로써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항구하고도’ 철저하게 당신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 선택은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분 ‘하위에 둠’을 뜻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마치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요한과 바울로 등 여러 사람에게 하신 것처럼 내게도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 그리고 내 생명까지도 진정 포기하기를 요구하실 수 있다는 사실 외에도, 그분은 언제나 가치의 서열에 있어서 또 우리 마음을 봉헌함에 있어서 항상 ‘첫자리’에 계셔야 한다는 사실이 제시되고 있다. 내가 이와 같이 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내가 믿는 이로서의 생활을 통해 내 아내나 자녀나 나 자신에게 할애하는 공간과 같은 크기의 공간을 그리스도께 바쳐 드리고 있는지 어떤지를 숙고해 볼 때 쉽게 드러난다.
그리스도께 다른 사람들에게 할애하는 것과 ‘똑같은’ 공간을 바쳐 드린다는 것은 물론 그분을 다른 어떤 대상과도 바꿀 수 있는 일반적 사물의 서열로 격하시켜 버리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지만,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면서도 윌 중에 거의 아무도 하고 있지 못한 이 최소한의 일 즉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큼이라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먼저 비용을 따져 보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리스도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보다 더 어려운 요구를 하신다 :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이 말은 루가복음에서 조금 앞서 나오고 있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9,23)는 내용의 완화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그 스승을 마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 되게 닮고 따르려고 할 때에는 십자가의 그림자가 그의 생활을 뒤덮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비천하게 태어나서 십자가상에서의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분의 삶의 매순간 순간이 구원의 의미로 충만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형태의 그리스도교 사상은 위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그리스도를 따를 용기를 잃게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데’ 뒤따르는 어려움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곧 이어서 사람들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당신과 철저한 관계를 맺기 전에 계산을 정확하게 잘 해야 한다고 권고하신다.
바로 이것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 개의 비유의 내용이다 :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은 집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 못하는구나!’하고 비웃을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만일 당해 낼 수 없다면 적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청할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28-33절).
예수께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그 두 개의 비유를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하는’ 제자의 태도에다 특별히 연결시키시어 구체적으로 적용하신다. 여기서 예수께서 한 발 더 앞서 나가시며 요구하시는 세 번째 요구는 가지고자 하는 열망,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라는 것이다.
우리는 루가복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제일 큰 장애요소로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들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루가 18,24 ; 12,13-34 ; 16,1-13 등도 참고)고 예수께서는 그 부자청년이 당신을 따르기를 포기한 직후에 말씀하신다. 사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애착심은 사람의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보다 고귀한 모든 감정 – 부모와 형제 자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까지도 – 에의 길을 막아 버린다. 그러므로 비록 그 두 비유의 의미가 주님께서 앞서 제시하신 요구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만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당신 제자가 되기 위해 제거해야 할 가장 중대한 장애요소로서 이 세 번째 요구, 즉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아주 현실적으로 지적하신다.
‘참된 가치’로서의 그리스도를 위한 ‘포기’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한다. 실망하지 않도록 당신을 따르기 전에 모든 것을 잘 계산하라고 하시는 예수의 권고는 아무 거리낌없이 그분을 따르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성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면(요한 14,6 참조) 그분을 등지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분을 ‘따르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분을 따름은 다른 생활, 다른 요구, 다른 유혹 등을 철저히 거부하고 또한 그런 것들과의 결렬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거나 또 포기할 마음을 갖추어야 하는 현실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교 신자가 신자답게 살기 위해 하느님의 작품 자체인 세상 사물을 포기해야 하는 것과 같다 – 그리스도께서 만물이 종속되어야 할(골로 1,18 참조) ‘만물보다 앞서 계신 분’(골로 1,15)이라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다른 무엇보다도 더 그리고 그 어느 것보다 먼저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모든 사물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여 그것들을 우상화 내지는 도구화될 위험에서 해방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도자가 속세를 떠나는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고,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궁극적 가치로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 대한 신앙의 행위는 인가의 모든 현실 즉 육체적 차원에서부터 사회적, 역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실현되고 구체화된다. 공동체 안에서 당신 자신을 실현시키시며 현실과 현실적 제가치를 철저히 포기하고 희생하기를 요구하시는 그분과의 일치는 존재의 의미 앞에서 체념하거나 절망하는 행위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상의 질서를 은총과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느님의 실체에로 개방시키는 행위이다. 세상을 포기함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당신 자신을 은총으로 베풀어주신다는 사실과 또한 그 은총은 이 쌍에 몰입함으로써도 또한 거기서 단순히 탈피함으로써도 얻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만이 가능한 행위이다. 다시말하자면, 세상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만이 신앙의 행위를 통해 적극적 가치로서의 이 세상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K. Rahner).
연중 제 23주일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미워하지 않으면….
제 1독서 : 지혜 9,13-18
제 2독서 : 필레 1,8a. 10. 12b-17
복음 : 루가 14,25-33
해설
제 1독서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 바치는 솔로몬(이 지혜서는 가상저자)의 지극히 아름다운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전해 주고 있다. ‘지혜’는 지성과도 슬기와도 다른 것으로, 사람들과 사물들, 그리고 생활환경과 또 크고 작은 사건들로 점철되는 역사 자체를 하느님의 빛에 비추어 평가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직 하늘로부터만 오며 인간이 혼자의 힘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누가 하느님의 의도를 알 수 있으며…. 썩어 없어질 육체는 영혼을 내리누르고 이 세상살이는 온갖 생각을 일으키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무섭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일을 짐작하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며 우리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을 찾아내기도 힘든 일입니다. 하물며 누가 하늘에 잇는 것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지 않고, 당신께서 하늘에서부터 보내시는 성령을 받지 않고 누가 당신의 의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지혜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길을 곧게 만들어 주었고 사람들에게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을 가르쳐 주었으며 사람들을 구원해 주었습니다”(지혜 9,13-19).
마지막 구절들은 오직 하느님의 항구하신 ‘가르침’만이 사람들을 구원에로 인도해 주셨음을 명백히 말해 주고 있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장들(10-19장)에서 하느님이 이루실 이스라엘의 전(全)역사를 지혜의 빛에 비추어 읽고 있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보다시피, 지혜는 지성과 통찰력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함정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실현시켜 나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지혜’를 이와 같이 이해할 때 어째서 그것의 최고 완전한 표현을 그리스도에게서 찾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1고린 1,24)라고 부른다. 실제로, 우리 인간들의 계산과는 자주 일치하지 않는 신비스러운 논리를 담고 있는 하느님의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고 또 드러난다.
유일한 절대자로서의 그리스도
루가에 의한 오늘 복음(14,25-33)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들의 지혜와 일치하지 않는 구체적인 하나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에 필요한 조건들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그 이야기 전체의 밑바닥에는 그리스도라는 분은 그 무엇도 대적할 수 없는 유일한 절대자시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앞에 나오는 대잔치에 초대된 이들에 관한 비유와 뚜렷이 연결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읽는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비유에서 초대받은 이들은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하고 있다.(14,15-24). 거기에서 이미 물질적 차원에서의 어떤 장해요소(나는 밭을 샀소…. 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소…) 내지는 가족들 상호간의 애정적 차원에서의 어떤 장해요소(나는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그런 요소들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다른 여러 문장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난다.
지금 우리가 대하고 있는 복음 대목의 첫 구절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 “그때에 예수께서 군중들로 하여금 당신을 따르도록 부추기시기보다는 용기를 꺾어 놓으시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지혜로운 스승답게 당신께 대한 쓸데없이 경박한 열광적 태도가 일지 않기를 원하시는 듯하다. 그분이 제시하시는 목표는 너무나 높다. 그래서 그분은 군중들이 그분과 함께 길을 가기 전에 각자의 능력을 가늠해 보기를 바라신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즉시 이어서 사람들에게 엄격한 요구를 제시하시며 다음과 같이 단호한 말씀으로 글을 맺으신다 :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 자신의 마음을 헛된 감상에 젖게 해서는 안 된다 :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루가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마태오보다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태오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10,37)이라고 하고 있고, 루가는 ‘미워하는’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히브리적 개념으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의 애정을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잇는 사람들로부터의 결별을 강하게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말이다. 또한 루가는 ‘아내’라는 말을 첨가시킴으로써 하늘 나라란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혼인까지도 포기하기를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당신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이렇듯 준엄한 요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설명하고 있듯이 그분께 대한 우리의 충실성과 비록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서로 대립되는 경우에는 그분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와 같은 가정도 해볼 수는 있지만 그런 일은 항시 있는 일이 아니다. 반면에 예수의 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항구한’ 생활 태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으로써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항구하고도’ 철저하게 당신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 선택은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분 ‘하위에 둠’을 뜻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마치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요한과 바울로 등 여러 사람에게 하신 것처럼 내게도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 그리고 내 생명까지도 진정 포기하기를 요구하실 수 있다는 사실 외에도, 그분은 언제나 가치의 서열에 있어서 또 우리 마음을 봉헌함에 있어서 항상 ‘첫자리’에 계셔야 한다는 사실이 제시되고 있다. 내가 이와 같이 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내가 믿는 이로서의 생활을 통해 내 아내나 자녀나 나 자신에게 할애하는 공간과 같은 크기의 공간을 그리스도께 바쳐 드리고 있는지 어떤지를 숙고해 볼 때 쉽게 드러난다.
그리스도께 다른 사람들에게 할애하는 것과 ‘똑같은’ 공간을 바쳐 드린다는 것은 물론 그분을 다른 어떤 대상과도 바꿀 수 있는 일반적 사물의 서열로 격하시켜 버리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지만,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면서도 윌 중에 거의 아무도 하고 있지 못한 이 최소한의 일 즉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큼이라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먼저 비용을 따져 보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리스도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보다 더 어려운 요구를 하신다 :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이 말은 루가복음에서 조금 앞서 나오고 있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9,23)는 내용의 완화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그 스승을 마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 되게 닮고 따르려고 할 때에는 십자가의 그림자가 그의 생활을 뒤덮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비천하게 태어나서 십자가상에서의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분의 삶의 매순간 순간이 구원의 의미로 충만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형태의 그리스도교 사상은 위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그리스도를 따를 용기를 잃게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데’ 뒤따르는 어려움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곧 이어서 사람들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당신과 철저한 관계를 맺기 전에 계산을 정확하게 잘 해야 한다고 권고하신다.
바로 이것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 개의 비유의 내용이다 :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은 집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 못하는구나!’하고 비웃을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만일 당해 낼 수 없다면 적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청할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28-33절).
예수께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그 두 개의 비유를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하는’ 제자의 태도에다 특별히 연결시키시어 구체적으로 적용하신다. 여기서 예수께서 한 발 더 앞서 나가시며 요구하시는 세 번째 요구는 가지고자 하는 열망,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라는 것이다.
우리는 루가복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제일 큰 장애요소로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들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루가 18,24 ; 12,13-34 ; 16,1-13 등도 참고)고 예수께서는 그 부자청년이 당신을 따르기를 포기한 직후에 말씀하신다. 사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애착심은 사람의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보다 고귀한 모든 감정 – 부모와 형제 자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까지도 – 에의 길을 막아 버린다. 그러므로 비록 그 두 비유의 의미가 주님께서 앞서 제시하신 요구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만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당신 제자가 되기 위해 제거해야 할 가장 중대한 장애요소로서 이 세 번째 요구, 즉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아주 현실적으로 지적하신다.
‘참된 가치’로서의 그리스도를 위한 ‘포기’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한다. 실망하지 않도록 당신을 따르기 전에 모든 것을 잘 계산하라고 하시는 예수의 권고는 아무 거리낌없이 그분을 따르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성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면(요한 14,6 참조) 그분을 등지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분을 ‘따르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분을 따름은 다른 생활, 다른 요구, 다른 유혹 등을 철저히 거부하고 또한 그런 것들과의 결렬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거나 또 포기할 마음을 갖추어야 하는 현실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교 신자가 신자답게 살기 위해 하느님의 작품 자체인 세상 사물을 포기해야 하는 것과 같다 – 그리스도께서 만물이 종속되어야 할(골로 1,18 참조) ‘만물보다 앞서 계신 분’(골로 1,15)이라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다른 무엇보다도 더 그리고 그 어느 것보다 먼저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모든 사물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여 그것들을 우상화 내지는 도구화될 위험에서 해방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도자가 속세를 떠나는 것은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고,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궁극적 가치로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 대한 신앙의 행위는 인가의 모든 현실 즉 육체적 차원에서부터 사회적, 역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실현되고 구체화된다. 공동체 안에서 당신 자신을 실현시키시며 현실과 현실적 제가치를 철저히 포기하고 희생하기를 요구하시는 그분과의 일치는 존재의 의미 앞에서 체념하거나 절망하는 행위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상의 질서를 은총과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느님의 실체에로 개방시키는 행위이다. 세상을 포기함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당신 자신을 은총으로 베풀어주신다는 사실과 또한 그 은총은 이 쌍에 몰입함으로써도 또한 거기서 단순히 탈피함으로써도 얻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만이 가능한 행위이다. 다시말하자면, 세상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만이 신앙의 행위를 통해 적극적 가치로서의 이 세상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K. Rah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