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일에도 지난 주일의 독서 내용을 이어받아 계속해서 기도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자, ‘가난한 자’의 기도에 더 마음을 두신다고 하는 특별한 관점을 다루고 있기는 한지만 기실 여전히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집회서에 의한 제 1독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거기서 저자 벤시라(기원전 2세기)는 자기 독자들에게 마치 하느님이 보다 큰 희생제물 – 대개는 불의와 억압을 통해서 얻어지는 -을 즐겨 받으시는 듯이 여기는 전례 태도에 말려들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자, 과부, 억압받는 자들이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는 진실 되고 소박하기 때문이다. 사실, 공정하신 ‘심판관’이신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진실성 여부를 보시기 때문에 부자가 바치는 뇌물에 매수되실 수 없다 : “주님께 뇌물을 바칠 생각은 하지 말아라. 물리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공저하신 분이시라, 누구에게도 한 쪽에 치우친 판단을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그리스도반대편을 두둔하시지 않고 억울한 사람의 호소를 들어주신다. 그분은 고아의 간청을 흘리지 않으시고 과부의 억울한 호소를 모른 체하지 않으신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 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 또한 그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의로운 사람의 무고함을 판단하시어 그를 돌보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집회 35,11. 12.-14. 17-18).
여기서 기도가 인격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라.
기도의 힘은 ‘구름’까지도 뚫으며 또 하느님께서 그 기도하는 가난한 이들을 만족시켜 주실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아무런 장비도 갖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께 대해서는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로 믿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와 유사한 내용을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에 관한 루가의 아주 효과적인 비유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가난한 자(세리) – 물질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신적 종교적 사회적 의미에서 – 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반면, 자기의 공로와 선행을 내세우는 자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는 거절하신다.
그러나 이 비유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도라는 특별한 주제에 관련시켜 보든지 또는 곧 보게 될 것처럼 기도 자체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신학적 직관에 비추어 보든지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본문을 통해 보다 뚜렷이 제시되고 있는 바에 의하면, 비유의 전체적 의의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하는 ‘자만심’과 ‘자기 합리화’의 태도를 고발하는 데 있다. 사실, 루가복음사가는 이 비유의 첫머리에서 예수께서 이 비유를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9절)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네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지는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즉 그 다음 계속 이어지고 있는 비유의 내용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올바름’의 형태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보다 조금 앞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난하셨다 :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16,15).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끝부분에서 더욱 명백히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자만심을 비난하고 계시다 :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며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절).
또한 루가는 ‘올바르다’라는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의 스승사도 바울로에 근접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신학적 사고의 중심주제로 삼고 있다 :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이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로마 3,21-26).
그러므로 바울로에게 있어서 신앙의 근거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다”(23절)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람이 의(의(義))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그 자신의 것일 수가 없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구원해 주심으로써 그에게 거저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의’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이교도들의 역사적 체험에 비추어 볼 때 거짓된 것이라는 사실 외에도 이미 인용한 사도 바울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1,18-3,20) 극적인 표현을 통해 나타나 있듯이 실로 하느님을 단순히 인간의 공로를 계산하는 ‘회계원’으로 전락시켜 버리거나, 더 나가서는 아무 쓸데없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다. 사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느님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확실히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보다 뛰어난 한 지도적 인물이긴 하겠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의 중심점도 될 수 없고 역사 자체를 초월하는 어떤 초월적 인물일 수도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로를 괴롭혔던 이런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들 가운데 현실적으로 긴박한 상황에 부딪히고 있는 문제는 현대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 안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고 있고 또한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빼놓은 채 나름대로의 ‘의’를 이룩하려 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비유에 나오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그가 걸치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 겉옷을 벗겨 버리고 본다면 바로 오늘날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다만 자신이 행한 많은 선행과 업적들을 자랑할 일밖에 없다 :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11-12절). 그는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등등), 율법이 명하는 그 이상의 것을 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율법은 1년에 단 한 번 즉 속죄의 날(레위 16,29 참조)에 단식을 하도록 정하고 있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월요일과 목요일)이나 단식을 한다든가, 밀과 술과 기름을 구입할 시에는 생산자에게만 십일조의 의무가 부과되었는데(신명 12,17 참조)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든가(마태 23,23 참조) 하는 것 등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자신만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보증을 받을 수 있는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11절)
모든 내용이 그 자신만을 들어 높이기 위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 자신의 자기 만족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요소가 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주장하듯이 참으로 불의하고 죄스런 상태에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을 거기서 해방시켜 줄 도움과 자선행위를 그로부터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올바름(의)’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는 데 정신을 집중시킨다. 보다시피, 그는 하느님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영광스럽게 드러내고 다른 형제들을 내리깎기 위한 하나의 구실로 삼고 있을 뿐이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은 세리의 겸손하고도 순박한 모습 – 히브리 사람들이 기도할 때 보통으로 취하는 태도 즉 서서 하늘을 향해 팔을 뻗치는 그런 태도도 취할 줄 모르는 – 과 견주어 볼 때 더욱더 구역질나는 모습이다. 사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13절).
이와 같은 자기 잘못에 대한 겸손하고도 순박한 고백 – 분명히 시편 51(Miserere)의 시작부분의 영향을 받았을 – 자체가 곧 그 사람이 보통 사람들이 세금징수원이라고 부를 때 연상하게 되는 ‘대’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하느님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울 만한 어떤 ‘올바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오로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만일 마침내 그가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면서 그를 새롭게 해주시는 사랑뿐일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그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은총’이요 ‘선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그리스도론적으로 말씀하신다 :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14절).
세리의 태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최고의 사랑과 용서의 모습을 되찾으신다. 인간들은 그분의 사랑과 용서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잘못을 탓하며 모욕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를 모든 죄악과 이기주의적 폐쇄적 삶에서 구원하여 들어 높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의 경우처럼 자기 만족을 채우고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시편 115,4) 우상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대로 오로지 자신의 ‘올바름(의)’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며 그러기에 기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란 세리의 기도처럼 항상 겸손한 기도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기도를 통해 당신의 은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현대인 – 때때로 소위 ‘체제’와 정치 활동의 쇄신 또는 기술발전에 의한 현세의 ‘자기 구원’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크리스찬도 포함해서 – 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기도를 하더라도 마치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한다.
이것이 오늘날 크리스찬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기도의 위기요인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교리교육에 관한 주교 시노드 제 4차 총회(1977. 9.30-10.29) 때에 몇몇 교부들도 우리 각자의 마음을 바꾸어 구원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신데 사람들이 자신들에게서 비롯되는 ‘의’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점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는’ ‘거짓’과 ‘위선’으로 싸여 있는 인간 부류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으로 차 있는 인간 부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잘못된 인간적, 종교적 상황은 언뜻 보기보다도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다. 이상하게도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은 자기 형제들과 교회 자체의 바리사이즘을 맹렬히 비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 하느님과 복음은 어느 누구의 자기 찬양을 위한 도구가 될 수는 없다.
오늘의 제 2독서 – 아마도 사도 바울로가 마지막으로 쓴 것이라고 해서 그의‘영적 유언’으로 취급되고 있은 – 는 하느님께로부터 구원됨을 깨닫고 동시에 자신의 구원에 협력해야 할 의무를 깨닫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ca된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디모 4,7-8).
이번 주일에도 지난 주일의 독서 내용을 이어받아 계속해서 기도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자, ‘가난한 자’의 기도에 더 마음을 두신다고 하는 특별한 관점을 다루고 있기는 한지만 기실 여전히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집회서에 의한 제 1독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거기서 저자 벤시라(기원전 2세기)는 자기 독자들에게 마치 하느님이 보다 큰 희생제물 – 대개는 불의와 억압을 통해서 얻어지는 -을 즐겨 받으시는 듯이 여기는 전례 태도에 말려들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자, 과부, 억압받는 자들이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는 진실 되고 소박하기 때문이다. 사실, 공정하신 ‘심판관’이신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진실성 여부를 보시기 때문에 부자가 바치는 뇌물에 매수되실 수 없다 : “주님께 뇌물을 바칠 생각은 하지 말아라. 물리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공저하신 분이시라, 누구에게도 한 쪽에 치우친 판단을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그리스도반대편을 두둔하시지 않고 억울한 사람의 호소를 들어주신다. 그분은 고아의 간청을 흘리지 않으시고 과부의 억울한 호소를 모른 체하지 않으신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 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 또한 그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의로운 사람의 무고함을 판단하시어 그를 돌보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집회 35,11. 12.-14. 17-18).
여기서 기도가 인격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라.
기도의 힘은 ‘구름’까지도 뚫으며 또 하느님께서 그 기도하는 가난한 이들을 만족시켜 주실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아무런 장비도 갖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께 대해서는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로 믿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와 유사한 내용을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에 관한 루가의 아주 효과적인 비유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가난한 자(세리) – 물질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신적 종교적 사회적 의미에서 – 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반면, 자기의 공로와 선행을 내세우는 자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는 거절하신다.
그러나 이 비유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도라는 특별한 주제에 관련시켜 보든지 또는 곧 보게 될 것처럼 기도 자체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신학적 직관에 비추어 보든지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본문을 통해 보다 뚜렷이 제시되고 있는 바에 의하면, 비유의 전체적 의의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하는 ‘자만심’과 ‘자기 합리화’의 태도를 고발하는 데 있다. 사실, 루가복음사가는 이 비유의 첫머리에서 예수께서 이 비유를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9절)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네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지는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즉 그 다음 계속 이어지고 있는 비유의 내용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올바름’의 형태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보다 조금 앞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난하셨다 :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16,15).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끝부분에서 더욱 명백히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자만심을 비난하고 계시다 :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며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절).
또한 루가는 ‘올바르다’라는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의 스승사도 바울로에 근접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신학적 사고의 중심주제로 삼고 있다 :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이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로마 3,21-26).
그러므로 바울로에게 있어서 신앙의 근거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다”(23절)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람이 의(의(義))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그 자신의 것일 수가 없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구원해 주심으로써 그에게 거저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의’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이교도들의 역사적 체험에 비추어 볼 때 거짓된 것이라는 사실 외에도 이미 인용한 사도 바울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1,18-3,20) 극적인 표현을 통해 나타나 있듯이 실로 하느님을 단순히 인간의 공로를 계산하는 ‘회계원’으로 전락시켜 버리거나, 더 나가서는 아무 쓸데없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다. 사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느님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확실히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보다 뛰어난 한 지도적 인물이긴 하겠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의 중심점도 될 수 없고 역사 자체를 초월하는 어떤 초월적 인물일 수도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로를 괴롭혔던 이런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들 가운데 현실적으로 긴박한 상황에 부딪히고 있는 문제는 현대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 안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고 있고 또한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빼놓은 채 나름대로의 ‘의’를 이룩하려 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비유에 나오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그가 걸치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 겉옷을 벗겨 버리고 본다면 바로 오늘날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다만 자신이 행한 많은 선행과 업적들을 자랑할 일밖에 없다 :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11-12절). 그는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등등), 율법이 명하는 그 이상의 것을 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율법은 1년에 단 한 번 즉 속죄의 날(레위 16,29 참조)에 단식을 하도록 정하고 있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월요일과 목요일)이나 단식을 한다든가, 밀과 술과 기름을 구입할 시에는 생산자에게만 십일조의 의무가 부과되었는데(신명 12,17 참조)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든가(마태 23,23 참조) 하는 것 등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자신만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보증을 받을 수 있는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11절)
모든 내용이 그 자신만을 들어 높이기 위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 자신의 자기 만족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요소가 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주장하듯이 참으로 불의하고 죄스런 상태에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을 거기서 해방시켜 줄 도움과 자선행위를 그로부터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올바름(의)’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는 데 정신을 집중시킨다. 보다시피, 그는 하느님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영광스럽게 드러내고 다른 형제들을 내리깎기 위한 하나의 구실로 삼고 있을 뿐이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은 세리의 겸손하고도 순박한 모습 – 히브리 사람들이 기도할 때 보통으로 취하는 태도 즉 서서 하늘을 향해 팔을 뻗치는 그런 태도도 취할 줄 모르는 – 과 견주어 볼 때 더욱더 구역질나는 모습이다. 사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13절).
이와 같은 자기 잘못에 대한 겸손하고도 순박한 고백 – 분명히 시편 51(Miserere)의 시작부분의 영향을 받았을 – 자체가 곧 그 사람이 보통 사람들이 세금징수원이라고 부를 때 연상하게 되는 ‘대’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하느님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울 만한 어떤 ‘올바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오로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만일 마침내 그가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면서 그를 새롭게 해주시는 사랑뿐일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그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은총’이요 ‘선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그리스도론적으로 말씀하신다 :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14절).
세리의 태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최고의 사랑과 용서의 모습을 되찾으신다. 인간들은 그분의 사랑과 용서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잘못을 탓하며 모욕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를 모든 죄악과 이기주의적 폐쇄적 삶에서 구원하여 들어 높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의 경우처럼 자기 만족을 채우고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시편 115,4) 우상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대로 오로지 자신의 ‘올바름(의)’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며 그러기에 기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란 세리의 기도처럼 항상 겸손한 기도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기도를 통해 당신의 은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현대인 – 때때로 소위 ‘체제’와 정치 활동의 쇄신 또는 기술발전에 의한 현세의 ‘자기 구원’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크리스찬도 포함해서 – 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기도를 하더라도 마치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한다.
이것이 오늘날 크리스찬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기도의 위기요인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교리교육에 관한 주교 시노드 제 4차 총회(1977. 9.30-10.29) 때에 몇몇 교부들도 우리 각자의 마음을 바꾸어 구원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신데 사람들이 자신들에게서 비롯되는 ‘의’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점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는’ ‘거짓’과 ‘위선’으로 싸여 있는 인간 부류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으로 차 있는 인간 부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잘못된 인간적, 종교적 상황은 언뜻 보기보다도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다. 이상하게도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은 자기 형제들과 교회 자체의 바리사이즘을 맹렬히 비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 하느님과 복음은 어느 누구의 자기 찬양을 위한 도구가 될 수는 없다.
오늘의 제 2독서 – 아마도 사도 바울로가 마지막으로 쓴 것이라고 해서 그의‘영적 유언’으로 취급되고 있은 – 는 하느님께로부터 구원됨을 깨닫고 동시에 자신의 구원에 협력해야 할 의무를 깨닫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ca된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디모 4,7-8).
연중 제 30 주일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제 1독서 : 집회 35,12-13. 16-18
제 2독서 : 2디모 4,6-8. 16-18
복음 : 루가 18,9-14
해설
이번 주일에도 지난 주일의 독서 내용을 이어받아 계속해서 기도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자, ‘가난한 자’의 기도에 더 마음을 두신다고 하는 특별한 관점을 다루고 있기는 한지만 기실 여전히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집회서에 의한 제 1독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거기서 저자 벤시라(기원전 2세기)는 자기 독자들에게 마치 하느님이 보다 큰 희생제물 – 대개는 불의와 억압을 통해서 얻어지는 -을 즐겨 받으시는 듯이 여기는 전례 태도에 말려들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자, 과부, 억압받는 자들이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는 진실 되고 소박하기 때문이다. 사실, 공정하신 ‘심판관’이신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진실성 여부를 보시기 때문에 부자가 바치는 뇌물에 매수되실 수 없다 : “주님께 뇌물을 바칠 생각은 하지 말아라. 물리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공저하신 분이시라, 누구에게도 한 쪽에 치우친 판단을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그리스도반대편을 두둔하시지 않고 억울한 사람의 호소를 들어주신다. 그분은 고아의 간청을 흘리지 않으시고 과부의 억울한 호소를 모른 체하지 않으신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 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 또한 그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의로운 사람의 무고함을 판단하시어 그를 돌보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집회 35,11. 12.-14. 17-18).
여기서 기도가 인격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라.
기도의 힘은 ‘구름’까지도 뚫으며 또 하느님께서 그 기도하는 가난한 이들을 만족시켜 주실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아무런 장비도 갖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께 대해서는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로 믿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와 유사한 내용을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에 관한 루가의 아주 효과적인 비유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가난한 자(세리) – 물질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신적 종교적 사회적 의미에서 – 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반면, 자기의 공로와 선행을 내세우는 자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는 거절하신다.
그러나 이 비유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도라는 특별한 주제에 관련시켜 보든지 또는 곧 보게 될 것처럼 기도 자체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신학적 직관에 비추어 보든지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본문을 통해 보다 뚜렷이 제시되고 있는 바에 의하면, 비유의 전체적 의의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하는 ‘자만심’과 ‘자기 합리화’의 태도를 고발하는 데 있다. 사실, 루가복음사가는 이 비유의 첫머리에서 예수께서 이 비유를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9절)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네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지는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즉 그 다음 계속 이어지고 있는 비유의 내용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올바름’의 형태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보다 조금 앞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난하셨다 :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16,15).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끝부분에서 더욱 명백히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자만심을 비난하고 계시다 :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며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절).
또한 루가는 ‘올바르다’라는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의 스승사도 바울로에 근접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신학적 사고의 중심주제로 삼고 있다 :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이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로마 3,21-26).
그러므로 바울로에게 있어서 신앙의 근거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다”(23절)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람이 의(의(義))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그 자신의 것일 수가 없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구원해 주심으로써 그에게 거저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의’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이교도들의 역사적 체험에 비추어 볼 때 거짓된 것이라는 사실 외에도 이미 인용한 사도 바울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1,18-3,20) 극적인 표현을 통해 나타나 있듯이 실로 하느님을 단순히 인간의 공로를 계산하는 ‘회계원’으로 전락시켜 버리거나, 더 나가서는 아무 쓸데없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다. 사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느님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확실히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보다 뛰어난 한 지도적 인물이긴 하겠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의 중심점도 될 수 없고 역사 자체를 초월하는 어떤 초월적 인물일 수도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로를 괴롭혔던 이런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들 가운데 현실적으로 긴박한 상황에 부딪히고 있는 문제는 현대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 안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고 있고 또한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빼놓은 채 나름대로의 ‘의’를 이룩하려 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비유에 나오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그가 걸치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 겉옷을 벗겨 버리고 본다면 바로 오늘날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다만 자신이 행한 많은 선행과 업적들을 자랑할 일밖에 없다 :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11-12절). 그는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등등), 율법이 명하는 그 이상의 것을 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율법은 1년에 단 한 번 즉 속죄의 날(레위 16,29 참조)에 단식을 하도록 정하고 있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월요일과 목요일)이나 단식을 한다든가, 밀과 술과 기름을 구입할 시에는 생산자에게만 십일조의 의무가 부과되었는데(신명 12,17 참조)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든가(마태 23,23 참조) 하는 것 등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자신만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보증을 받을 수 있는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11절)
모든 내용이 그 자신만을 들어 높이기 위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 자신의 자기 만족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요소가 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주장하듯이 참으로 불의하고 죄스런 상태에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을 거기서 해방시켜 줄 도움과 자선행위를 그로부터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올바름(의)’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는 데 정신을 집중시킨다. 보다시피, 그는 하느님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영광스럽게 드러내고 다른 형제들을 내리깎기 위한 하나의 구실로 삼고 있을 뿐이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은 세리의 겸손하고도 순박한 모습 – 히브리 사람들이 기도할 때 보통으로 취하는 태도 즉 서서 하늘을 향해 팔을 뻗치는 그런 태도도 취할 줄 모르는 – 과 견주어 볼 때 더욱더 구역질나는 모습이다. 사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13절).
이와 같은 자기 잘못에 대한 겸손하고도 순박한 고백 – 분명히 시편 51(Miserere)의 시작부분의 영향을 받았을 – 자체가 곧 그 사람이 보통 사람들이 세금징수원이라고 부를 때 연상하게 되는 ‘대’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하느님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울 만한 어떤 ‘올바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오로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만일 마침내 그가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면서 그를 새롭게 해주시는 사랑뿐일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그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은총’이요 ‘선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그리스도론적으로 말씀하신다 :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14절).
세리의 태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최고의 사랑과 용서의 모습을 되찾으신다. 인간들은 그분의 사랑과 용서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잘못을 탓하며 모욕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를 모든 죄악과 이기주의적 폐쇄적 삶에서 구원하여 들어 높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의 경우처럼 자기 만족을 채우고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시편 115,4) 우상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대로 오로지 자신의 ‘올바름(의)’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며 그러기에 기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란 세리의 기도처럼 항상 겸손한 기도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기도를 통해 당신의 은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현대인 – 때때로 소위 ‘체제’와 정치 활동의 쇄신 또는 기술발전에 의한 현세의 ‘자기 구원’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크리스찬도 포함해서 – 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기도를 하더라도 마치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한다.
이것이 오늘날 크리스찬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기도의 위기요인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교리교육에 관한 주교 시노드 제 4차 총회(1977. 9.30-10.29) 때에 몇몇 교부들도 우리 각자의 마음을 바꾸어 구원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신데 사람들이 자신들에게서 비롯되는 ‘의’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점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는’ ‘거짓’과 ‘위선’으로 싸여 있는 인간 부류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으로 차 있는 인간 부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잘못된 인간적, 종교적 상황은 언뜻 보기보다도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다. 이상하게도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은 자기 형제들과 교회 자체의 바리사이즘을 맹렬히 비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 하느님과 복음은 어느 누구의 자기 찬양을 위한 도구가 될 수는 없다.
오늘의 제 2독서 – 아마도 사도 바울로가 마지막으로 쓴 것이라고 해서 그의‘영적 유언’으로 취급되고 있은 – 는 하느님께로부터 구원됨을 깨닫고 동시에 자신의 구원에 협력해야 할 의무를 깨닫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ca된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디모 4,7-8).
연중 제 30 주일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제 1독서 : 집회 35,12-13. 16-18
제 2독서 : 2디모 4,6-8. 16-18
복음 : 루가 18,9-14
해설
이번 주일에도 지난 주일의 독서 내용을 이어받아 계속해서 기도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자, ‘가난한 자’의 기도에 더 마음을 두신다고 하는 특별한 관점을 다루고 있기는 한지만 기실 여전히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집회서에 의한 제 1독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거기서 저자 벤시라(기원전 2세기)는 자기 독자들에게 마치 하느님이 보다 큰 희생제물 – 대개는 불의와 억압을 통해서 얻어지는 -을 즐겨 받으시는 듯이 여기는 전례 태도에 말려들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자, 과부, 억압받는 자들이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는 진실 되고 소박하기 때문이다. 사실, 공정하신 ‘심판관’이신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진실성 여부를 보시기 때문에 부자가 바치는 뇌물에 매수되실 수 없다 : “주님께 뇌물을 바칠 생각은 하지 말아라. 물리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공저하신 분이시라, 누구에게도 한 쪽에 치우친 판단을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그리스도반대편을 두둔하시지 않고 억울한 사람의 호소를 들어주신다. 그분은 고아의 간청을 흘리지 않으시고 과부의 억울한 호소를 모른 체하지 않으신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 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 또한 그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의로운 사람의 무고함을 판단하시어 그를 돌보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집회 35,11. 12.-14. 17-18).
여기서 기도가 인격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라.
기도의 힘은 ‘구름’까지도 뚫으며 또 하느님께서 그 기도하는 가난한 이들을 만족시켜 주실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아무런 장비도 갖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께 대해서는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로 믿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와 유사한 내용을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에 관한 루가의 아주 효과적인 비유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가난한 자(세리) – 물질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신적 종교적 사회적 의미에서 – 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반면, 자기의 공로와 선행을 내세우는 자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는 거절하신다.
그러나 이 비유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도라는 특별한 주제에 관련시켜 보든지 또는 곧 보게 될 것처럼 기도 자체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신학적 직관에 비추어 보든지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본문을 통해 보다 뚜렷이 제시되고 있는 바에 의하면, 비유의 전체적 의의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하는 ‘자만심’과 ‘자기 합리화’의 태도를 고발하는 데 있다. 사실, 루가복음사가는 이 비유의 첫머리에서 예수께서 이 비유를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9절)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네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지는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즉 그 다음 계속 이어지고 있는 비유의 내용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올바름’의 형태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보다 조금 앞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난하셨다 :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16,15).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끝부분에서 더욱 명백히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자만심을 비난하고 계시다 :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며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절).
또한 루가는 ‘올바르다’라는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의 스승사도 바울로에 근접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신학적 사고의 중심주제로 삼고 있다 :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이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로마 3,21-26).
그러므로 바울로에게 있어서 신앙의 근거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다”(23절)고 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람이 의(의(義))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그 자신의 것일 수가 없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구원해 주심으로써 그에게 거저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비롯되는 ‘의’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이교도들의 역사적 체험에 비추어 볼 때 거짓된 것이라는 사실 외에도 이미 인용한 사도 바울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1,18-3,20) 극적인 표현을 통해 나타나 있듯이 실로 하느님을 단순히 인간의 공로를 계산하는 ‘회계원’으로 전락시켜 버리거나, 더 나가서는 아무 쓸데없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다. 사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느님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확실히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보다 뛰어난 한 지도적 인물이긴 하겠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의 중심점도 될 수 없고 역사 자체를 초월하는 어떤 초월적 인물일 수도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로를 괴롭혔던 이런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들 가운데 현실적으로 긴박한 상황에 부딪히고 있는 문제는 현대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 안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고 있고 또한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빼놓은 채 나름대로의 ‘의’를 이룩하려 한다는 점이다.
사실상, 비유에 나오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그가 걸치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 겉옷을 벗겨 버리고 본다면 바로 오늘날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다만 자신이 행한 많은 선행과 업적들을 자랑할 일밖에 없다 :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11-12절). 그는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등등), 율법이 명하는 그 이상의 것을 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율법은 1년에 단 한 번 즉 속죄의 날(레위 16,29 참조)에 단식을 하도록 정하고 있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월요일과 목요일)이나 단식을 한다든가, 밀과 술과 기름을 구입할 시에는 생산자에게만 십일조의 의무가 부과되었는데(신명 12,17 참조)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든가(마태 23,23 참조) 하는 것 등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자신만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보증을 받을 수 있는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11절)
모든 내용이 그 자신만을 들어 높이기 위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 자신의 자기 만족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요소가 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주장하듯이 참으로 불의하고 죄스런 상태에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을 거기서 해방시켜 줄 도움과 자선행위를 그로부터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올바름(의)’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는 데 정신을 집중시킨다. 보다시피, 그는 하느님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영광스럽게 드러내고 다른 형제들을 내리깎기 위한 하나의 구실로 삼고 있을 뿐이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은 세리의 겸손하고도 순박한 모습 – 히브리 사람들이 기도할 때 보통으로 취하는 태도 즉 서서 하늘을 향해 팔을 뻗치는 그런 태도도 취할 줄 모르는 – 과 견주어 볼 때 더욱더 구역질나는 모습이다. 사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13절).
이와 같은 자기 잘못에 대한 겸손하고도 순박한 고백 – 분명히 시편 51(Miserere)의 시작부분의 영향을 받았을 – 자체가 곧 그 사람이 보통 사람들이 세금징수원이라고 부를 때 연상하게 되는 ‘대’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가 하느님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울 만한 어떤 ‘올바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오로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만일 마침내 그가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면서 그를 새롭게 해주시는 사랑뿐일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그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은총’이요 ‘선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그리스도론적으로 말씀하신다 :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14절).
세리의 태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최고의 사랑과 용서의 모습을 되찾으신다. 인간들은 그분의 사랑과 용서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잘못을 탓하며 모욕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를 모든 죄악과 이기주의적 폐쇄적 삶에서 구원하여 들어 높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의 경우처럼 자기 만족을 채우고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시편 115,4) 우상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대로 오로지 자신의 ‘올바름(의)’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며 그러기에 기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란 세리의 기도처럼 항상 겸손한 기도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기도를 통해 당신의 은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현대인 – 때때로 소위 ‘체제’와 정치 활동의 쇄신 또는 기술발전에 의한 현세의 ‘자기 구원’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크리스찬도 포함해서 – 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기도를 하더라도 마치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한다.
이것이 오늘날 크리스찬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기도의 위기요인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교리교육에 관한 주교 시노드 제 4차 총회(1977. 9.30-10.29) 때에 몇몇 교부들도 우리 각자의 마음을 바꾸어 구원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신데 사람들이 자신들에게서 비롯되는 ‘의’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점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는’ ‘거짓’과 ‘위선’으로 싸여 있는 인간 부류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으로 차 있는 인간 부류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잘못된 인간적, 종교적 상황은 언뜻 보기보다도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다. 이상하게도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은 자기 형제들과 교회 자체의 바리사이즘을 맹렬히 비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 하느님과 복음은 어느 누구의 자기 찬양을 위한 도구가 될 수는 없다.
오늘의 제 2독서 – 아마도 사도 바울로가 마지막으로 쓴 것이라고 해서 그의‘영적 유언’으로 취급되고 있은 – 는 하느님께로부터 구원됨을 깨닫고 동시에 자신의 구원에 협력해야 할 의무를 깨닫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ca된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디모 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