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2 주일






        1. 최기산 신부(가)/ 2                 2. 변희선 신부(가)/ 3


        3. 김현준 신부(가)/ 5                 4. 강길웅 신부(가)/ 7


        5. 김창석 신부(가)/ 9                 6. 이원규 신부(가)/ 11


        7. 윤경철 신부(가)/ 13               8. 김정진 신부(가)/ 14


        9. 김몽은 신부(가)/ 16       10. 유재국 신부(가)/ 18


        11. 조순창 신부(가)/ 20              12. 고건선 신부(가)/ 22


        13. 황영욱 신부(가)/ 23              14. 최인호 작가(가)/ 24


        15. 세상의 죄를(가)/ 25             


1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하느님의 어린 양


                                         최기산 신부 




우리에겐 양, 양고기 등이 익숙지 않다. 처음 먹어보는 사람들은 코를 막으며 누린내가 난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중동 사람들에게 있어 양은 없어서는 안될 단백질, 탄수화물, 기름기의 주요 보급원이다. 그들은 축제 때 양을 잡아 바치고, 먹을 뿐만 아니라 매일 젖을 짜서 마신다. 나머지로는 버터나 치츠를 만든다. 어디 그뿐인가! 가죽으로는 옷과 텐트를, 털로는 양탄자를 만든다. 그야말로 양은 생활과 직결된 동물이다. 한국인에게는 다양한 동물들이 친숙하다. 소나 돼지, 닭 등이 모두 익숙하고, 심지어 개고기가 입맛을 돋운다고 여름철만 되면 인기가 높다. 음식만 보더라도 우린 너무 욕심쟁인가 보다.




희생 양(羊)


양은 음식으로, 옷이나 텐트를 만드는 재료로 쓰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제사 때 중요한 용도인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부족간, 어떤 계약을 체결할 때도 양이 요긴하게 쓰였다. 오늘날엔 양국의 국가원수 혹은 외무장관이 각서를 쓰고, 사인한 다음 서로 웃으면서 악수와 함께 각서를 교환하면 공적인 계약이 체결되지만, 옛날엔 그렇지 못했다. 부족간 언어가 다르고, 또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 부족의 언어도 모르는데, 양쪽의 언어를 모두 알고 통역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옛날 부족간에는 공식 계약의 형식이 양을 잡아 반을 갈라놓고, 그 가운데를 양쪽 대표가 지나가거나, 양의 피를 뿌림으로써 계약의 표시를 했다. 무시무시한 계약의 표시다. 계약을 어기면 이렇게 피를 볼 수도 있고, 양이 갈라졌듯이 그렇게 갈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부족간의 계약 때에도, 양은 피를 흘려 봉사하였다. 참으로 귀하고 고마운 동물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


세례자 요한은,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날에, 어린양 한 마리씩을 잡아 문설주에 그 피를 바름으로써, 이집트의 맏자식들은 다 죽었으나, 죽음의 사신이 피묻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거르고 지나가서, 이스라엘 맏자식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이집트인들의 집에서는 곡성이 터져 나왔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결국 파라오 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켰다. 이는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설명이다. 여기서도 어린양은 이스라엘의 맏자식을 대신하여 죽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은 바로 이 어린양처럼 그렇게 인간을 위해서 대신 죽어줄 어린양 같은 존재라고 증언하고 있다. 남은 .리고 자신은 죽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예수님이라고 증언하는데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다. 즉 하느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 위에 성령이 내려와 머물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 즉 구세주이심을 알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나는 그분에게 성령이 내렸음을 보았기에, 나의 증언은 진실하다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오늘도 계속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을 할 수 있기까지는 많은 기도와 체험이 있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주님 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성령의 속삭임 을 들을 수 있을 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라고 누구에게라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사에만 얽매여 영적인 귀가 막힌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주님의 말씀이 들려온들 쇠귀에 경읽기가 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체험한 광야를, 우리도 가금 경험 해봐야 할 것 같다. 조용히 모든 소음을 끄고, 얼마 동안 눈을 감고 있어 보는 것도 귀한 체험이 될 것이다.


눈으로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귀로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려해도 들을 수 없기에 답답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눈과 귀가 트이게 해주심으로써, 주님의 모습을 영의 눈으로 보고, 그분의 목소리를 영적인 귀로 듣게 하신다.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하느님의 어린양은 예수님이시다”라는 이 고백은, 우리 신앙인들에겐 너무도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짧은 단어 속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우린 그 의미를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면서, 주님 곁으로 나아가야 한다. 끝내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는 날, 우린 화두가 열리는 것 같은 기쁨을 맛볼 것이다. “하느님의 어린양, 저기 성체 안에 계시며, 미사 때마다 내 마음에 오신다. 하느님의 어린양, 여기 지금 우리 곁에 함께 계신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신앙인으로 백미를 맛보는 사람일 것이다.












2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이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변희선 신부




사제관에 함께 사시는 선배 신부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흥미 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겠다. 하와이 섬에는 거대한 동물원이 있는데,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다양한 우리 안에서 관람객들에게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우리의 문은 열려 있고, 그 속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다. 거울에 작은 글씨로,「밑구멍을 닦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적혀있다. .


용변 후에-화장지를 사용해야만 하는 이유는 인간(영장류)만이 과식을 하기 때문이란다. 과도한 식사는 단순히 음식물(식량)의 낭비이고, 건강을 해친다는 점에서, 그 해악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과식이 탐욕의 원인이며 결과라는 점이다. 인간의 끊임 없는 탐욕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일류의 조상들의 첫 범죄행위의 원인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누리던 아담과 하와가, 단지 하나의 금기였던 지선악과를 탈취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 탐욕인 뿌리를 엿볼 수 있다.


 


인간들의 탐욕은 급기야 지구촌 생명체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종(種)을 멸종시켰으며, 인류끼리의 불필요한 경쟁과 다툼으로 현재 인류의 30%는 굶주리고, 그 중의 30%는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강간, 낙태, 마약, 아동 학대, 살인과 각종 폭력으로 매년 1억 명 이상의 지구인들이 희생당하고 있으며, 가정은 파괴되고, 낙태는 당연시되고, 부정과 부패는 점점 더 기승을 부린다.


 


이렇게 죄와 악으로 물든 이 세상에서「지구여 멈춰라. 차라리 이 더러운 지구를 떠나겠다!」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더욱 한심스러운 현상은, 이토록 심각한 죄악에 대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감각할뿐더러, 죄악 자체를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사실을 왜곡하거나 진실을 과장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훔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장시간 빌리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간음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시간을 낭비하거나 추월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태아를 살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임신을 끝내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의 잘못과 죄악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은, 인류를 더욱 더 비참하게 만 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죄가 없고, 그래서 그분의, 용서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슬픔과 후회 속에서 인정할 수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초점은 우리의 죄가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초점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인 예수님이시다.


최악의 악마는 단순히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최악은 죄를 짓고, 그 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인들이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분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작은 죄까지도 더욱 민감하고 깊게 깨닫고, 통회하는 분들을 말한다.


요한 복음사가는 강하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1요한 1,10)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러분들은 전혀 죄를 짓지 않을 만큼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오히려 겸손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죄를 자비로이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오십시오. 아버지는 사랑이십니다.”












3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예수를 증언하는 삶 


                                                      김현준 신부




우리 가정에서 많이 기르고있는 개와 고양이는 언제 만나도 싸운다. 서로 싸우는 그 이유는 마음이 나빠서도 아니고, 서로 미워해서도 아니란다. 서로 신호(sign)가 달라서 싸운다는 것이다. 개는 꼬리로 표현한다. 꼬리로 웃고 꼬리로 화를 낸다.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들고 흔든다. 기분이 나쁘면 낮춘다. 겁이 나면 두 발 사이에 사려 넣는다. 그런데 고양이는 개와 정반대다,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낮추고, 기분이 나쁠 때 꼬리를 위로 올린다,


 


개와 고양이는, 신체의 일부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알리고 상대방과 의사소통을 한다. 사람은 말로써 이 모든 것을 표현한다. 말로써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소통을 할 뿐 아니라, 누가 어떻다고 증언도 한다. 그러하기에 사람의 의사 표현 가운데 가장 창조적이고 명시적인 것이 말이라고 한다. 그 증언하는 사람의 말이 진실되고, 그 말에 인품이 더해지면 가장 힘있고 믿을 만한 증언이 된다.


 


예수님이 누구라고 증언하는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적절한 인품과 삶을 갖춘 인물이 또 있을까?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한테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증언한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29)




세례자 요한의 증언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이름으로 가리켜 부르면서, 예수님의 이미지와 사명을 알려주고 증언한다. ‘어린양‘하면 일반적으로 어리다, 순하다, 깨끗하다, 흠이 없다는 이미지를 갖는다. 오늘을 사는 한국 사람들은 ’비자금’ 하면 아, 노태우 그리고 아무리 통치자금이라고 우겨도 돈의 질서를 벗어난 뇌물이라고 알아듣는다.




요한의 동시대 사람들은 ‘하느님의 어린양’ 하면, 이집트에서의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게 한 과월절의 어린양,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 전승에 따른 고난받는 아훼의 종을 떠올리게 된다.


고난받는 야훼의 종은, 자기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온갖 굴욕을 받고 죽어가면서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6-7)


요한 복음사가는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시고(요한 19,9),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요한 19,17)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과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이미지와 사명을 연결시켜 준다.


 


과월절의 어린양은, 하느님에서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을 때 잡도록 명하셨던 그 “역사적인 어린양”이다, 이스라엘은 “흠이 없는 일년 된”(출애 12,5)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그들의 집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천사들이 이집트인들의 모든 맏이들을 치러 올 때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이스라엘은 매년 이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여 과월절 예식을 거행하며 희생제물로 어린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곤 했다.


 


우리 그리스도교 전승은 예수 그리스도가 파스카(과월절)의 ‘참된 어린양’이시고(부활 미사 감사송), 그분이 흘린 희생의 피로 우리는 구원되었다고 믿는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매 미사 때 주님을 받아 모시며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며, 사제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는 이는 복되도다”라고 선포한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그렇다, 누가 누구를 알아 증언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생각해보면 나는 얼마나 나를 잘 아는가? 언제나 나란 존재와 함께 있는 나 자산도 나를 잘 모르는데 하물며, 자라온 환경과 배워온 교육이 틀리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잘 알아 증언할 수 있는가?




세례자 요한도 그분이 누구신지 잘 몰랐으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할 수 있었다. (요한1,33)’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계속 증언되어야 한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증언한 것처럼, 오늘의 시대에도 우리의 역사와 오늘의 시대에 맞는 이름으로 증언하여야 한다.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 성체대회에서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증언한 것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참된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어린양이 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49,3.5~6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


제2독서 Ⅰ고린 1,1~3 (은총과 평 화를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복 음 요한 1,29~34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여러 사람을 죽 이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는 사람은 또 여러 사람을 살리게 됩니다. 실제로 부정과 부패가 만연된 세상이 용서받고 있는 것도 누군가의 희생과 죽음 때문이며, 역사가 발전하며 전진할 수 있는 것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슬픔과 아픔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죽음의 의미를 보다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1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둘째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 보면 야훼의 종은 불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야훼의 종은 정말 힘들여 고생했지만 그저 모든 일이 다 실패하였고 결국 헛수고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바로 그 실패한 자를 만국의 빛으로 세우시며 그가 땅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을 전하 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 야훼의 종이 누구냐.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는 대단히 무능한 자였고 인간의 지혜로 봤을 때는 완전히 실패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원을 가져오는 빛이 됩니다. 그러면 이처럼 백성에게 빛과 희망과 구원을 줄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이 수백 년 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그가 누군가에 대해서는 베일에 가려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자 대뜸 “하느님의 어 린 양이 저기 오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어린양이야말 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있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어린양의 의미가 뭐냐.




첫째는 빠스카 양입니다. 이스라엘이 에집트를 탈출하기 전날밤에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써 자신들이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어린양은 사실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없는 양이 죽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이스라엘 이 구원받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그 속죄양이 되 는 어린양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이사야서(53,7)에 나오는 어린양입니다. 그 양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인데,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 지 않고 참았다고 했으며 결국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백성을 위 해 말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의 모습에서 요한은 예수님 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오래 전에 노래했던 그 억울하지만 당당하고, 그리고 만방의 빛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야훼의 종은 바로 예수님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예수님 오시기 이미 수백 년 전에 예언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서 속에 깊이 감춰진 보물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실제로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셨고 진정으로 기쁜 소식을 소리 높이 들려주셨지만 결국 백성은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고 아우성을 칠 뿐이었습니다. 제자들마저도 그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분은 영락없는 야훼의 종 그분이었습니다. 영락없는 어린양이었습니다.




이처럼 빛나는 이름이었던 ‘야훼의 종’은 고난받는 종이었으며 요한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어린양도 역시 희생 제물로서의 처절한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몫이었으며 그리고 위대한 종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삶을 배워야 합니다. 내 이익만 찾고 내 편리만 주장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양보하고 희생해서 누군가의 빛이 되고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신문에 보니까 어떤 소녀 가장이 서울 모 대학의 야간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 가셨고 중학교도 선생님의 도움으로 다녔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보니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아 바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집안을 살렸으며 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야간에 들어가 결국은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대신 죽으면 여러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그러나 처지야 어떻든 자기만 살려고 하면 그는 또 여러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우리는 정말 이웃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지 죽이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내가 죽는 사람이 큰 손해인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이익도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새해가 활짝 열렸습니다. 이 새해를 우리가 복 되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야훼의 종이 되고 또 어린양이 되 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비록 인간적으로는 굉장히 어렵지만 그러나 그것이 진정 나를 살리는 길이요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심하게는 하느님까지도 살리는(?) 은혜로운 길입니다.













5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상의 죄를 없애시는-


김창석 신부




지금으로부터 약 6백 60년 전에 세기의 명작「신곡」을 쓴 단테에 대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른 아침에 어느 수도원의 문지기 수사가 수도원 문을 열었을 때, 그는 한 늙은이가 문안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았다. “누구를 찾고 계십니까?” 그 수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 늙은이가 대답했다. “나는 단테요. 평화를 찾고 있소.” “아! 선생님이 그 유명한 단테 선생님……” 수사가 말끝을 미처 맺기도 전에, 단테는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단테는 늘 평화를 찾아다녔던 것이다.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평화! 그러나 그 평화는 참으로 지키기 힘든 것이다. 1984년 유엔 보고에 의하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쟁에 대한 통계가 나와 있다.


1983년 한 해에만도 75개국에서 4백만 명이 전투를 벌였다. 40개국의 지역 분쟁이 있었고, 해외에 군대를 파견한 나라는 8개국이나 되었다. 1945년 이후 전사자의 수는 주로 비정규군에서 월 평균 4만 명이었고, 전사자 5명 중 3명 꼴이 민간인이었다.


1983년의 군사비는 8천억 불 이상이었는데, 이것은 지구 전체 인구 1인당 1백 30불 이상이 되는 것으로서, 1인당 수입보다 더 많고 1인당 위생비의 43배나 되는 액수이다.




신형 핵잠수함 1척을 건조하는 데 드는 비용은 23개 개발 도상국들의 학령 아동 1억 6천만 명을 위한 연간 교육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다. 이 모든 통계는 평화와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무력적 평화가 참된 평화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흔히 말하기를 국제적으로 동맹을 맺고 무력의 균형을 이루어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평화는 불안한 평화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가 우리의 적이었고, 소련과 중공과 베트남은 전쟁까지 할 정도로 서로 적대관계에 있다. 국제적인 동맹 관계는 이해에 얽힌 것이기 때문에 신의에 의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유럽 전토를 석권했던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게 패한 후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었다. 그는 52세를 일기로 죽기 전에 “무력으로 세워진 나라는 정복자와 더불어 망하지만, 사랑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나라만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대체 무력으로 평화를 달성하겠다는 생각 자체부터가 위험한 것이다.




우리 한반도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인데, 무력으로 남침을 노리고 있는 북한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집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무력으로 3천리 강산을 정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7천만 동포의 마음은 정복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외지의 보도에 의하면,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북쪽의 월맹이 남 베트남 사람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정치적 평화는 어떤가? 국제적으로 볼 때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국제연맹이,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유엔이 평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둘다 평화를 이룩하지는 못했다. 도대체 이러한 국제기구의 규약을 지키는 나라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한 번도 평화적 정권 교체를 해본 적이 없다. 민주적 합의보다는 물리적 힘이 난무하였다. 이런 상황은 아프리카의 신생국에나 있을 법한 일인데,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국민들은 이 나라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불안해하고 있다. 여당이 과연 민주적인 방법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킬지, 야당과 재야 세력과 학생들이 지금까지처럼 지나치게 성급하게 굴다가 또 불행한 수레바퀴를 굴리지나 않을까 불안에 떨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무력에 의한 평화나 정치에 의한 평화는 잠정적으로는 몰라도 항구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적 평화만이 참된 평화라는 말이 되겠는데, 복음적 평화는 근본적으로 타애적 평화이다. 무력이나 정치에 의한 평화는 자애적 사랑에 입각한 것이다. 남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자기 생각만 하는 입장이다. 반면에 타애적 사랑에 입각한 복음적 평화는 자기보다는 남 생각을 우선적으로 하는 입장이다.




국제적으로는 나라끼리 서로 상대방 나라의 입장을 생각해 줄 때,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여당은 자기네 정권 유지만 생각하지 말고 국민의 행복을 위주로 생각하는 정치를 하고, 야당은 자기네 인기나 정권 쟁취에만 급급하지 말고 피차 평화적 방법으로 성급하지 않게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갈 때 참된 복음적 평화가 이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남북 대화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남북 적십자 회담 등 회의가 잦아지니까 남북의 기자들이 서로 내왕하게 되는데, 너무 상대방을 헐뜯고 약점을 노출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심한 것 같다. 남북 관계도 타애적인 자세가 있어야 서로 이해와 교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중공에 다녀온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곳에 사는 동포들은 남한이 좀 나은 위치에 있으니까 북쪽에 대한 비방을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한다.




타애적 사랑의 원칙은 가정이나 이웃끼리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사회에는 예수의 양부(養父) 성 요셉 같은 이들이 많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셉은 숨어서 드러나지 않게 성 가정을 돌보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우리나라에는 대통령 감들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은데 각 분야에 숨어서 착실히 일할 사람들은 적다.


사회 구석구석에 숨어서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겨레를 위하여 이기심을 버리고 착실히 일할 사람들이 많아야 이 나라 이 사회가 보다 더 평화스럽고 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겠는가. –


6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이원규 신부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내신 서간에서 말씀하시듯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고 여기에 인간이 응답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의 자세로서 내 영육간의 모든 것을 내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께 바칠 때 신앙인으로서의 참된 의미가 있고 값어치가 있는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값진 대가를 치루시고서 우리를 사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금, 은, 보화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 가정에서 귀중한 물건일수록 더욱 잘 보관하고 항상 관심을 갖고서 그 물건을 조심스럽게 다룰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물건이 아닌 하나의 인격을 갖고 있는 존재가 있다고 할 때 이 존재를 인격이 없는 물건과 비교하여 본다면 월등한 가치가 있을 것이며, 감히 그러한 물건들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차원이 다른 뛰어난 존재일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기의 자녀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제삼자인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볼 때, 그 대상인 자녀들은 같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볼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친밀한 관계가 있는가에 따라서 그들을 대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성세성사를 통하여서 우리들을 당신의 가장 사랑받는 자녀로서 부르신 것입니다. 또한 성체성사와 그 외의 다른 성사들과 기도와 전례 등을 통해서 계속 우리와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시고 하나의 몸으로 되기를 원하시며 항상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더욱이 가장 귀중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으셨으므로 하느님 앞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귀여운 자녀로 보일 것은 당연한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값진 대가를 치루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를 만드시고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게 하시기 위해 천사들에게도 주시지 않은 구속의 은혜와 당신의 자녀가 되는 특전을 주셨으며, 하느님이신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것은 사랑받는 자녀인 우리들의 도리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하느님의 자녀다운 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성령의 궁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얼마나 잘 사용했으며 외교인들에게 자신의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자기 나름대로 각자가 걷고 있는 길 안에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면 숭고한 길이며 하느님께서도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걷고 있는 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채워드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한 생활이 되도록 노력할 때, 보람을 가질 수 있고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이며 자녀들이면서도 자녀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이 성당 안에서만 아니면 미사 중에만 그런 것이다고 생각하거나 행동할 때 그것은 신앙을 우리의 생활과 분리시켜 놓는 결과가 되는 것이며,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도 전폭적인 혹은 전인격적인 것으로서가 아닌, 다만 사회 생활의 한 부분으로써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신앙을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 거치장스럽고, 부담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외교인들이 갖고 있지 않는 어떤 취미같은 것을 한가지 더 갖고 있다는 식으로서의 생각을 갖게까지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이며 사랑받는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부조리한 생각을 갖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성세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입니까? 교회를 인생의 도피처로 생각해서 입니까? 아니면 하나의 멋으로서 한번 영세를 받아본 것입니까?




결코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좀더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참다운 삶의 목적을 알아 후회없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서 즉 우리는 하느님께서 악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는 식으로서의 자세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본받아 적극적인 자세로서 주님과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하도록 노력하여 자기의 현 위치에서 가장 하기 쉬운 조그만 선행부터 실천할 때 이러한 일이 가능할 것이며 이것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을 알아들을 수 있고, 우리도 세례자 요한과 같이 “이 세상의 죄를 없애버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영성체 전에 뿐 아니라 항상 그런 말을 할 수 있고, 또한 그런 자세를 어디에서나 갖추고 있을 때에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며, 이것은 하나의 이상만이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서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당신의 백성이며, 사랑받는 자녀로 우리를 부르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크리스챤의 진정한 행복과 참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멘. –


7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윤경철 신부






한 나라의 대통령이 선출되어 취임하게 되면 주어진 기간 동안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되고 주위 국가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이제껏 전 인류가 기다려온 구세주로서 취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내용은 대단히 감동적입니다. 예수께서 30세가 되었을 때 나자렛 생활을 청산하시고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르단 강으로 찾아 내려가셨습니다. 요한은 이미 구약의 최후 예언자로서 백성의 커다란 신망 속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혹시 요한이 자기네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줄 해방자, 메시아가 아닌가하고 몰려 왔습니다.




인기와 명예로 말한다면 요한은 그 절정에 있었습니다. 영예와 영광이 절정에 있을 때 겸손하게 자기의 영광을 남에게 돌려주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신분을 망각하는 우리나라의 “나로다”하는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헛된 야망에 야합하여 진실을 왜곡하거나 교만을 부려 그때까지 이름없는 사람으로서 군중 가운데 감추어 계신 예수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줄 자격조차 없다.” 혹은 “내 뒤에 오실 분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고백하며, 우리에게 예수의 참 모습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요한은 빛이 아니었고 빛이신 예수를 증거하러 온 하느님의 사자요, 주님의 종으로서 자기는 구세주가 아니요 예수께서 구세주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렸다고 오늘 복음 전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취임할 때 한 연설은 그 사람의 인품이 나타나고 재임기간 동안 할 모든 일을 요약하여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이처럼 죄악이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고 구원의 시대가 예수로 말미암아 열렸음을 “하늘이 열렸다”는 말로 복음은 전하고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라는 말로써 예수님의 사명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인품은 어떠하였으며 그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일찍이 예언자들과 하느님의 종들 안에서 활동하여 놀라운 일들을 이루게 하신 성령께서 예수 안에 온전히 일치하여 그분의 영이 되시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만방에 하느님의 사랑과 공의를 베푸시는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은 상한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꺼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이 넘치는 주님이십니다. 죄와 악으로 말미암아 비천해진 우리의 고통을 맡아지심으로써 우리를 이롭게 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천주성에 해당하는 권세와 권능을 포기하시고 당신의 인간성을 통해서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의 제약을 통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성부께 순명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케 하신 수난의 왕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성삼위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부께서 예수에게 오시는 자랑과 사랑과 인준의 말씀을 성령을 통하여 예수께 전하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성자의 봉헌을 성부께 이르도록 하시며, 사랑하는 성자가 인류구원을 위한 희생의 첫 열매가 되시게 하십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충실하게 세례 때의 약속을 지키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죄인들과 뒤섞여 세례를 받으러온 군중 속에서 예수께서 “구세주”이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 처럼, 겸손한 마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바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체험케 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 가운데서 혼자서 선한 체 한다는 욕과 비약거림을 당해도 우리가 밝히는 정의와 사랑의 작은 불은 결코 약하지 않고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용기를 가집시다. 이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있기에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목적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박해와 굶주림과 헐벗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도살당하는 양처럼 천대를 받고 죄악에 가담하지 않는다 하여 괴로움을 받습니다. 또한 내 안에 있는 악의 뿌리와 처절한 싸움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시련을 능히 이겨냅니다.




이제 우리도 사도들처럼 담대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와 사랑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힘으로는 소금이 될 수 없으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우리는 짠맛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8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김정진 신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적엔 하느님은 천사로 하여금 목동들에게 알리셨고 이교 백성들인 세 박사들에게는 별의 인도로 경배케 하셨고 예수님의 세례식에는 성부의 말씀과 성령이 비둘기 모습으로 강림하심으로 예수님을 참된 하느님의 아들로 현양케 해 주셨습니다. 이에 이어서 오늘 복음에는 세자 성 요한의 여러 가지 점을 들어 예수님이 바로 성령으로 세계를 베푸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증언하기를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이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았습니다.>(요한 1,32)고 하였고, 이에 앞서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들메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습니다.>(요한 1,27)고 퍽 겸허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증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 요한 세자는 어떠한 분이기에 이분의 증언이 그처럼 중요하고 힘이 있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였으며 여러 해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고 궁핍생활을 하며 대과업을 준비하였습니다. 성 요한은 힘 있는 설교를 하였고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성 요한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의 비행이나 위선적 행동에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그들을 보고 「독사의 족속들」이라고 질타하였으며 이제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말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그 사실을 행동으로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성 요한은 헤로데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헤로데왕이 자기 동생의 아내와 동거하는 부정행위에 대하여 대 놓고 솔직히 책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성 요한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급기야 사형까지 받았습니다. 이같이 솔직 담백하고 강직한 성 요한이 메시아가 오심을 선포하고 준비시키고 메시아가 막상 오셨을 적에도 그분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세주이시란 것을 백성들에게 똑똑히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게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다음은 우리 신자들이 예수님께 관한 증언을 해야 할 차례가 왔습니다. 신자라는 호칭은 얼마나 영예로운 것이겠습니까?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는 말하기를 <나에게 주교라 하는 칭호는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지만 신자라 하는 칭호는 달갑고 영광된 불리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맏형이시며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성인 성녀들은 우리의 형제 자매이며 동료들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신자들은 하느님의 일에 관해서 절대로 무관심할 수가 없고 우리 이웃에 대해서 냉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온갖 힘을 다하여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고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예수님이 행하시고자 하는 것을 대신 해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사랑으로 점철되었고 예수님의 생각과 행실은 우리들 인간에게 영원한 행복과 평화의 나라인 천국을 얻게 하시는 데 시종일관하였습니다. 우리는 우선 회개하여 하느님과 화해하며 가까이 그리고 친밀히 지내야 하겠으며 또한 하느님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가정에서 혹은 직장에서 말과 행동으로 좋은 점을 보여 주며 하느님을 증명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미신자들에게 하느님을 전해 주며 하느님을 증명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미신자들에게 하느님을 전해 주며 냉담자를 회두시켜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이같은 증언이 없다면 진실한 신자 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말로나 혀 끝으로만 섬길 뿐이다.>라는 주님의 책망이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신자 여러분! 여기 두 학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적으로 가정 면으로 뛰어난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이고, 또 하나는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매우 보기 흉한 꼴을 한 이냐시오 로욜라 군인입니다. 군인은 길을 가다가 프란치스꼬 학생을 만날 적마다 번번이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소.>하고 인사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되풀이한 보람이 있어 급기야 프란치스꼬는 세속적으로 입신 출세하려던 생각을 돌리고 앞으로는 하느님께만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하느님의 인간 구원사업에 종사하는 데 일생을 바쳐 가장 뛰어난 선교사가 되었답니다. 우리는 모두 이름만의 신자가 아니라 명실공히 진실한 신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9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김몽은 신부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贖罪羊) 이심을 증언한다.


인류는 그 조상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하느님을 거역한 후부터 하느님을 등지고 자기들 멋대로 살아왔다. 그 결과로 이 세상에는 죄악이 만연되었고, 인류는 상호간에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면서,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본래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류인데 하느님을 거역함으로써, 하느님의 속성을 잃고, 사탄의 조종을 받고 사는 마귀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랑을 잃고 평화를 상실했으며, 참다운 기쁨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서로 돕고 살아가야 할 이웃들끼리 서로 다투며 미워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삐뚤어진 마음을 다시 하느님의 속성을 닮은 사랑하는 마음, 즉 고든 마음이 되게 하기 이해서는, 인간에게 짊어지워진 죄(原罪)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죄를 사(赦)해 줄 능력이 없으며, 또한 마귀(사탄)를 이길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능력으로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을 거역한 인간을 그래도 버리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없애게 하시었다.




오늘의 복음의 핵심은, 바로 그 사실을 세례 요한이 증언한 것을 말한다.


세례 요한은 그가 요르단에서 회개하는 세례를 베풀 때, 예수께서 친히 오시어 그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바 있었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마태 3,17; 루가 3,22)하는 성부의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요한은 사실대로 증언한 것이다.




사실 요한도 예수님을 인간적인 면에서 뛰어난 분이라는 것과, 또 친척 관계이기 때문에 외면적인 면만을 알고 있었을 뿐, 그분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지, 즉 “하느님의 아드님”이신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그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고는 그분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다고 솔직히 증언한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이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분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라’고 말씀해 주셨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곧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죄의 사함만을 받아가지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거듭 새로 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죄가 있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신” 후에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 말씀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 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사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요한 3,6).




육의 인간은 아무리 교육을 해도 여전히 죄악 속에서 살며,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성령으로 인하여 영적인 인간으로 중생(重生)한 자들이다. 그에 합당하게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로써 죄 사함을 받은자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야 할 것이다.












10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이스라엘


                                                            유재국 신부




이스라엘은 얼마나 고귀한 이름인가. 이스라엘이란 “하느님이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성서에 따르면 이 승리의 이름은 야곱의 도성장(창세 32,23-30)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밤새껏 투쟁한 유목민 야곱에게 주어졌다.


이스라엘은 12지파의 백성으로서 유일한 하느님과 메시아를 예언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백성은 그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적이 많았다. 그리하여 언제나 다른 백성과 같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참된 이스라엘은 신비로운 선택으로 유다와 벤자민의 두 지파로 또는 다윗 왕국으로 형성되었다.




그 후 바빌론 귀향살이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남았고, 그 다음에는 겸손하고 가난한 “작은 무리”만이 예루살렘에 남았으며, 야훼의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의 사람으로서 나자렛의 예수가 나타났다. 하느님의 아들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났고 예수는 하느님의 백성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며, 예언자의 말을 그대로 실현시킬 분이다. “너는 나의 중,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예수로부터 새로운 이스라엘이 형성될 것이다. 먼저 예루살렘과 다마스꼬와 안티오키아의 유다-크리스천들이며 다음은 지중해를 둘러싼 이방인들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는 곧 “하느님의 이스라엘”(가라 6,16)인 보편적인 교회를 선포한다.




고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


앞으로 몇주일 동안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를 읽을 것이다. “고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라는 단순한 구절에 유의해야 한다. 고린토는 아카이아의 수도로서 50만의 인구를 갖고 있었고, 3/4이 노예들이었다. 지중해의 중심에 자리잡은 이 항구에는 모든 인종, 여러 종교,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로마제국 내에서 이 도시는 온갖 사치와 음탕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고린토는 대리석 성전 안에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다에게 봉헌된 곳이었다. 창녀들이 들끓는 도시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사도 바울로는 이 도시를 크리스천 공동체로 만들었다.




복음의 힘과 누룩으로써 이 이방인 도시를 변화시켰다. 그렇기에 바울로는 하느님의 교회인 고린토라고 부르면서 하느님에 의해 태어난 이 거룩한 공동체에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지역적인 교회였지만 세계적인 교회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짤막한 말에 교회의 신비가 표현되어 있지 않은가?




하느님의 어린 양


28년 요르단강가의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95년경 에페소 공동체의 요한 복음사가 때까지 메시아를 지적하는 어린양이라는 명칭은 구속신학을 내포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지적하면서 분명히 원수들을 제헌하며 복수하는(루가 3,7-9) 메시아를 선포하려고 하였다. 유다교에서 흔히 메시아를 어린양이나 숫양으로 지적하고 있다.




예수는 일생동안 이사야(53,7)와 예레미아(11,19)를 인용하면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을 지적하였다. 또한 제자들에게는 자신이 메시아로서 수난의 종으로 보도록 그들을 준비시켰다. 성전에서 사람들이 빠스카 잔치의 어린양을 봉헌할 (요한 18,28; 19,31-37) 그 때를 택하면서, 당신이 바로 어린양으로서 죽음으로 백성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계약(루가 22,20)을 맺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는 예수가 부활로써 승리하신 다음 예수를 빠스카의 어린양이라고 불렀다. 예수는 제헌되고 부활하신 분이며 죽음과 죄악을 승리하신 분이라고 믿었다. 요한의 묵시록에서는 희생되고 승리하신 어린양의 잔치를 베풀 것이라고 계시하고 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하다.”(묵시 19,9)




세상의 죄


요한복음사가는 명상가로서 예수의 빠스카 신비를 찬양하면서 예수가 바로 이 말씀을 실현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예수는 아무 죄도 없는 결백한 분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다. 세상의 죄는 인간들이 저지른 온갖 죄악을 내포하는 것이다. 어린양의 속죄의 죽음은 죄악의 권세를 무찔렀다.




예수는 죽으심으로써 죄가 도사린 인간 실존에까지 내려 가신다. 그는 역사와 공간의 끝변까지 당신 구속능력을 실행하신다. 죄를 없애신다는 것은 인간을 억누르는 무거운 멍에를 없앤다는 뜻이다(2,16; 5,8-12; 10,18; 1요한 3,5).


예수의 세계는 요한 복음서에서는 공관복음서보다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선 구속사명에 있어서 예수의 희생을 볼 수 있다. 전례에서는 같은 의미로 예수의 죽음을 “그이 세례의 성취와 완성”이라고 표현한다.




하느님의 보증


세례자 요한은 두 번씩(1,31-33)이나 예수를 몰랐다고 한다. 정말 몰랐을까? 그들은 사촌간이 아니었는가? 가족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지 못했을까? 예루살렘으로 순례할 때 그들은 만난 적이 없었을까? 요한 복음사가에게 누가 말해서 들은 것과 아는 것과를 구별한다.


세례자의 증인은 풍문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보증에 근거를 둔 것이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그를 메시아로 깨닫는다는 것을 뜻한다. 요한복음서에서 본다, 안다, 믿는다라는 동사는 도의어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나는 보았다”라고 두 번이나 선언한다.




여기에서는 하느님의 보증으로써 증명된 신앙을 두고 말한다. 그는 하느님의 성령이 나자렛 예수에게 내리신 것을 보았다(이사 11,1; 42,1; 61,1). 하느님의 성령은 입김, 바람처럼 물질적인 요소로 표현되어 있다. 비둘기가 성령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4복음사가가 모두 같은 표현을 하지만, 요한은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그에게 머물렀다고 명백히 한다. 예수는 장치 “아낌없이 주실”(3,34) 성령을 받으셨다.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 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신심적인 모습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 상징은 강생하신 하느님의 말씀의 모든 신비를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11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조순창 신부




성탄절과 신정의 즐거운 시간이 지난 이제, 인생의 큰 관문인 대학 입학 예비 고사 합격자의 발표로 희비가 엇갈린 가운데, 또 나름대로 다음 단계의 대처에 분주한 때입니다. 한편, 정치 일정의 발표와 아울러 각종 선거에 대비한 마음도 바쁜 계절이 됐습니다.


또, 멀지 않아 맞이할 구정에 고향을 찾으실 분은 귀향 차비도 해야 하는 이때,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천국행 열차에 일행으로 함께 한 이 자리, 마음이 아주 분주한 때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야훼의 종이요,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요, 그리스도는 분열의 불행에서 일치로 구원을 주시는 일치의 징표이심을 보여 주십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야훼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


“하느님께서는 야훼의 종을 만국의 빛으로 세우시고, 그는 땅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이 이르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는 실상 우리가 앓는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으며, 우리의 반역죄를 대신 쓰고 사형을 당하였으며, 자기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으며,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 이 세상의 죄를 뒤집어 쓰고, 이를 대신 속죄하기 위하여 조용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죽어가시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출현을 예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받으신 예수님 위에 성령이 내리심을 보고,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구약에서 미리 예언된 ‘야훼의 종’이심을 증언하였습니다. 요한은 자기보다 앞서 계시어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증언하는 것이며, 믿고 세례받은 우리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실 뿐 아니라,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주님이시기에, 그리스도를 일치의 표지로 모시고, 하나를 이루어 가는 것이 우리들의 도리요, 하느님의 뜻이며 구원의 지름길이다.”고 가르치십니다. 사도 바울로는 또 고린토 교회의 분열을 보시고, “갈라지지 말고 서로 일치하라.”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호소하십니다.


인류 원조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죄를 지어서, 하느님과 등지고 살면서, 형이 아우를 죽이는 살인 비극과, 바벨탑을 쌓는 오만한 민족이나, 국가간의 전쟁과 교회의 분파로 서로 비방하는 불행을 낳게 되었습니다.




가정의 불화는 불행입니다. 민족의 분단은 비극입니다. 교회의 분파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일치는 행복의 길이요, 하느님의 뜻이기에, 그리스도를 일치의 표지로 삼고,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일치를 위해서는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일치를 위해서는 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일치를 위해선 하느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일치를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항상 내가 최고요, 내 주장이 옳고, 내 이익만을 생각하다 보면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며, 일치의 길이 막히고 맙니다. 그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유리한 것은 따르고, 불리하거나 필요치 않은 것은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전적으로 따를 때에 자연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화와 분쟁과 독선이 있을 때에 ‘하느님이 안 계신다’는 징표요, 화해와 일치와 협력이 있을 때에 ‘하느님이 거기 계시다’는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심은 천심이라” 하였습니다. 남이 가니까 나도 의미없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 강이 얼음으로 굳게 덮여도, 그 깊은 저류에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진정한 민심이 ‘하늘의 뜻’이며, 둘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대화와 이해로 많은 이의 뜻이 하나될 때에, 그를 하느님께서 밀어 주시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12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고건선 신부




오늘 복음말씀은 요한 복음사가가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어 요한 복음 전체를 통하여 나타내고 있는 그리스도론을 전개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러한 증언은 구약에 예시된 메시아가 현재의 예수님 안에서 모두 이루어져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이시며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없애실 어린양이시며 영원으로부터 계신 분으로서 인류를 구원하실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세례자 요한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생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시다. –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국내외적으로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여 현실에 적용시키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현재의 위기에 대하여 뉴욕대학의 정치학 교수 한스 모겐스는 한 마디로 “현대위기는 중세 봉건국가들이 직면했던 위기보다 더욱 심각하다”고 74년 3월 18일자 뉴스 위크지에서 말한 것으로 보아서도 잘 알 수 있겠지만 현재의 위기는 우리들 자신들이 피부로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더 논할 필요조차 없겠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모두들 자기 살기에 바쁘다 보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인정은 메말라 들어가고 인심은 사나와지기 쉽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말은 하나의 옛 이야깃거리밖에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이 꽁꽁 얼어붙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구세 역사를 살펴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이 세상이 어수선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풍부한 은총을 내려 주신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 위기가 심각할수록 위대한 구원자를 파견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야말로 가장 위대한 구원자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움이 많은 때이므로 가장 위대한 구원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필요한 구원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하느님께 협조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현대는 다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세상을 붙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차가와져 가는 세상을 다시 뜨겁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메말라 가는 인간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 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마음에 사랑의 씨앗을 움트게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예수님만이 붙들어주실 수 있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야만 할 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잘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잘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명백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증거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이 예수님의 생활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우리와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들,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쉽게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에게서 어떤 뜨거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뜨겁지 않다면 그들의 차가움은 뜨거워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고 이것만이 우리와 우리 이웃을 심각한 현실로부터 구원하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일하고 먹고 마시며 놀고 잠자는 것까지 모두 예수님을 닮기로 합시다. 우리의 사명 완수는 말로써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예수님을 닮음으로써 실현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을 명심합시다.












13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요한이 바라 본 광경


                                                          황영욱 신부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조그만 미술관에 한 소녀가 서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사탕을 오도독오도독 깨물면서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짜고짜 옆에 있던 저에게 물어왔습니다.“아저씨, 이 그림 있잖아, 이 그림 속에 있는 꽃이 무슨 꽃인지 알아?”“…….”




처음 보는 소녀가 난데없이 이렇게 질문을 해오는 바람에 저는 당황했습니다. 이 소녀가 정말로 무슨 꽃인지 궁금해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것인지 잠시 혼란스러웠던 것입니다. 그 소녀는 제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손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혼잣말처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슨무슨 꽃인데 주위의 구도가 어떻고 색깔의 조화가 어떠해서 조형적으로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저 많이 알죠?”“…….”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데 왠지 그 소녀가 재잘거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금이라도 소녀에게 대답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느 서양화 화집에 적혀 있는 대로 그 그림의 표면적인 것보다 그 이면에 작가가 고뇌하면서 나타내려고 했던 제작의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니? 또 르네상스 시대와 같은 옛날의 그림들은 분명히 지금 그림들과는 달리 나름대로의 표현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눈으로 감상하려고 노력하면 더 좋을 텐데.”




예수님께 물로 세례를 베풀면서 이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한 요한에게서는 이 소녀처럼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이나 자기 자신을 전면에 드러내려고 잔꾀를 부리는 모습을 전혀 엿볼 수 없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이 오시기를 열망하고, 오시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한 흔적이 오늘 복음 전반에 흐르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의 삶은 이사야서 52장에서 예고한 고난받는 야훼의 종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이 예수님 머리 위에 머무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면서도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을 고통이 가득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에게서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평범한 청년 예수로 보일 수 있는 표면적인 그림 속에서 주님이신 당신의 아들을 그려내시는 화가 아버지 하느님의 의도를 요한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은 요한이 바라보는 이 광경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14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앞선 분


   최인호 베드로/ 작가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하루가 천년이지요.” “그렇단다.” “그럼 하느님에게는 일 원이 일억 원이겠네요.” “물론 그렇지.” 하느님이 대답하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하느님 아버지, 저 일 원만 주세요.” 이는 단순한 농담 같지만 실은 진리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에게 우리의 천년은 하루도 아닌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요한복음의 첫장면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이라면 아마도 수천억 년 전일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영겁(永劫)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은 다만 ‘한처음’이란 말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이런 요한복음의 독특한 시제(時制)표현은 각 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것으로 잘 알 수 있습니다.‘다음날’, ‘그 이튿날’, ‘사흘째 되던 날’, ‘얼마 뒤에’, ‘그 뒤’, ‘그날 저녁때’, ‘이때부터’, ‘한편’… 요한은 각 장을 이처럼 독특한 때매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이튿날’은 실제로 하루가 지난 그 다음날은 아닙니다. 요한이 ‘사흘째 되던 날’이라고 표현했다 하더라도 실제로 3일째 되는 날은 아닌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음날’ 예수께서 자신에게 오시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다음날’이 무엇의 다음날인지 요한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영원이신 주님에게 정확한 시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요한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 말이야말로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다.” 이는 분명 모순입니다. 나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나보다 앞선 사람일 수 있겠습니까. 유다인들이 예수께 “당신이 아직 쉰 살도 못되었는데 어째서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고 하셨습니다. 이는 정말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입니다.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를 치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함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토록 계실 분입니다. 요한복음 각 장이 애매모호한 시작으로 표현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며 세례자 요한의 위대성은 바로 그러한 모순을 영성으로 꿰뚫어 봄에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두 번씩이나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고 경탄하면서 자신의 사촌 예수께서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던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알아본 최초의 증인으로 주님으로부터 이런 찬사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일찌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11).


그렇습니다. 주님은 모든 존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알파요 오메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위엄과 권세와 권위를 천지창조 이전부터 이제와 또 영원토록 누리시기를 바랍니다(유다 1,25). 아멘.                       












15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이는 새해가 되면 으레 주고 받는 인사말이다. 무슨 복을 받으라는 것인지 심히 궁금하지만 듣기에도 반갑고 정말 고마운 인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복을 받는 일보다 화를 입는 일이 더 많음을 어찌하랴.


십 여 년 전, 어느 여름이던가 자신들의 집에서 꽃을 성당으로 가져오는 교우가 많았다. 너무 많은 꽃을 선물받은 수녀님은 그 꽃처리에 곤란을 겪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중 좋은 것만 골라서 제단을 아름답게 꾸몄다. 이렇게 되니 제단에 꽂히지 않은 꽃의 주인공은 수녀님에게 와서 불평을 하곤 했다.




우리는 좋은 것이 많을 때는 의례히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다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 복과 하느님 복 중 어느 것 하나를 골라야 할 우리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복은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것만이 참된 복이다.  그 복을 제대로 받으려면 다른 것은 그 무엇이든 버려야 한다. 주님 말씀대로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29).




어린이에게 사탕이나 과자를 주면 주는 대로 받는다. 자꾸 받아 양손에 가득한데, 그래도 더 주면 그 때에는 하는 수 없이 먼저 받았던 것을 내려놓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것으로 차있는 세상 복을 내려놓아야 천상복을 받을 수 있다. 없고 궁한 가난한 자는 언제나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5,3). 하느님이 주시는 복은 이미 가진 것을 버려야 받고, 버린 만큼 받을 수 있다.




세상 것으로 마음이 찼거나, 그것에 골몰하면 하느님 복이 보이지도 않고 보인다 해도 받을 수 없다. 미구에 변해버릴 세상 것에만 애착을 갖는다면 그것이 없어졌을 때 우리는 빈털털이가 되고 말 것이다. 항상 지닐 수도 없고, 떠날 때는 어차피 버려야 할 세상 복 때문에 하느님 복을 놓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하고 불행하랴? 정말로 세상에 난 보람이 없게 된다.




아브라함이 악한 부자에게 사람은 현세와 후세에서 두 번 다 복을 받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는데(루가 16,24), 이 말씀대로 현세복은 없어도 후세복만은 충만히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새해에 서로 이런 복을 기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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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2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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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 2 주일


    제 1 독서 : 이사 49, 3. 5-6

    제 2 독서 : 1고린 1, 1-3

    복     음 : 요한 1, 29-34


    제 1 독서 : 고통받는 두 번째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첫 번째 노래(이사 42,1-8)의 주제를 다시 다루지만 특별히 종의 사명에 역점을 둔다.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비추는 것이다. 그들에게 빛과 구원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비록 실패와 좌절이 있겠지만(이사 49,4.7) 오직 주님께 믿을 두면( 49,4-5) 결국 승리할 것이다( 49,7).


    제 2 독서 : 바오로 사도는 50-52년 사이 약 1년 반 동안 고린토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다( 사도 18,1-8 참조). 사도가 활동할 당시 고린토는 새로이 건설된 신도시였고, 항구라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모든 항구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고린토 역시 갖고 있었다.

    바오로의 복음 전파로 형성된 고린토 교회는 열심하고 활동적인 공동체였지만, 주변 여건상 윤리적 생활이나 신앙 상의 문제에서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를 올바로 지도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고, 그 흔적을 고린토 전후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린토 전서를 시작하며 바오로 사도는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소개한다. 사도의 자격으로 그는 고린토 교회의 문제에 개입한다. 교회의 모든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중심을 두고 있고 그분이야말로 신자들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별볼 일없던 고린토 신자들을(1고린 1,26 참조)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복    음 :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른다. 어린양은 무죄함의 상징으로 이사 53,7을 암시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보다’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29.32.33.34절), 구슬이 꿰어지듯 요한의 증언이 이어진다. 직접 목격한 세례자 요한의 용기, 솔직히 털어놓는 그의 단순성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증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초탈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오려 하지 않는 자유인이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천주의 어린양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제 성탄과 주의 공현 시기를 모두 보내고 연중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그분의 지상 생애의 각부분을 묵상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천주의 어린양”이라고 말합니다. 천주의 어린양은 세례자 요한이 이 세상에 오기 훨씬 전에 계셨으며 이 세상에 오시기로 예언되신 분이셨습니다. 이 어린 양은 이 세상의 놀랍고도 엄청난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상에 바쳐질 천주의 어린양, 속죄양이신 것입니다. 이 어린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옛 해방을 기념하고 또 매년 그것을 재현할 때 봉헌 제물로 삼았던 과월절 어린양이나,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전에서 행했던 어린양의 봉헌을 연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어린양은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야훼의 고난받는 종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야훼의 고난받는 종, 둘째 편을 노래하는 오늘의 독서는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고 하면서 “고난받는 종은 ‘만국의 빛’으로서 야훼 하느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해야 한다.”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어린양’과 ‘야훼의 고난받는 종’은 어떤 의미에서 서로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은 아무런 희생이나 대가 없이 치러지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생명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자기도 살리고 모든 이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없애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자기의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라는 뜻과 연결된다고 합니다.

    책임 회피나 변명 내지 불가피성을 이유로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비겁하고도 비열한 자세가 아니라, 기꺼이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어린양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죄를 벗기 위해 수없는 희생과 제물을 바쳐 왔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예수의 몸을 받음으로써 그의 죽음을 통하여 온 세상이 구원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사야 53,12의 말씀처럼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굴욕적이기까지 한 자세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은 자기 봉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봉헌은 자신을 거저, 조건 없이 내어 주는 당신의 겸손과 순종과 무구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 즉 죄사함과 이에 따른 성령의 충만함이 이뤄지기 위해 어린양이 죽임을 당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인간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단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말입니다.

    물론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정치적 야합에 의해서 5․18과 관련한 전직 대통령과 관계자들의 엄청난 죄를 사해 줄 수 있었는지 모르나 역사는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진정으로 회개하지 못한 권력자들의 잘못에 대해 그냥 눈감고 계시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서 누구든지 이 세상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앞에 우리 죄를 고백하고 겸손되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할 때에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 주실 것이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죄인임을 인정하고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각오와 마음가짐 즉 새로운 생활로 우리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 2 주일


    제 1 독서 : 이사 49, 3. 5-6

    제 2 독서 : 1고린 1, 1-3

    복     음 : 요한 1, 29-34


    제 1 독서 : 고통받는 두 번째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첫 번째 노래(이사 42,1-8)의 주제를 다시 다루지만 특별히 종의 사명에 역점을 둔다.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비추는 것이다. 그들에게 빛과 구원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비록 실패와 좌절이 있겠지만(이사 49,4.7) 오직 주님께 믿을 두면( 49,4-5) 결국 승리할 것이다( 49,7).


    제 2 독서 : 바오로 사도는 50-52년 사이 약 1년 반 동안 고린토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다( 사도 18,1-8 참조). 사도가 활동할 당시 고린토는 새로이 건설된 신도시였고, 항구라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모든 항구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고린토 역시 갖고 있었다.

    바오로의 복음 전파로 형성된 고린토 교회는 열심하고 활동적인 공동체였지만, 주변 여건상 윤리적 생활이나 신앙 상의 문제에서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를 올바로 지도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고, 그 흔적을 고린토 전후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린토 전서를 시작하며 바오로 사도는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소개한다. 사도의 자격으로 그는 고린토 교회의 문제에 개입한다. 교회의 모든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중심을 두고 있고 그분이야말로 신자들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별볼 일없던 고린토 신자들을(1고린 1,26 참조)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복    음 :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른다. 어린양은 무죄함의 상징으로 이사 53,7을 암시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보다’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29.32.33.34절), 구슬이 꿰어지듯 요한의 증언이 이어진다. 직접 목격한 세례자 요한의 용기, 솔직히 털어놓는 그의 단순성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증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초탈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오려 하지 않는 자유인이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천주의 어린양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제 성탄과 주의 공현 시기를 모두 보내고 연중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그분의 지상 생애의 각부분을 묵상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천주의 어린양”이라고 말합니다. 천주의 어린양은 세례자 요한이 이 세상에 오기 훨씬 전에 계셨으며 이 세상에 오시기로 예언되신 분이셨습니다. 이 어린 양은 이 세상의 놀랍고도 엄청난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상에 바쳐질 천주의 어린양, 속죄양이신 것입니다. 이 어린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옛 해방을 기념하고 또 매년 그것을 재현할 때 봉헌 제물로 삼았던 과월절 어린양이나,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전에서 행했던 어린양의 봉헌을 연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어린양은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야훼의 고난받는 종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야훼의 고난받는 종, 둘째 편을 노래하는 오늘의 독서는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고 하면서 “고난받는 종은 ‘만국의 빛’으로서 야훼 하느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해야 한다.”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어린양’과 ‘야훼의 고난받는 종’은 어떤 의미에서 서로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은 아무런 희생이나 대가 없이 치러지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생명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자기도 살리고 모든 이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없애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자기의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라는 뜻과 연결된다고 합니다.

    책임 회피나 변명 내지 불가피성을 이유로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비겁하고도 비열한 자세가 아니라, 기꺼이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어린양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죄를 벗기 위해 수없는 희생과 제물을 바쳐 왔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예수의 몸을 받음으로써 그의 죽음을 통하여 온 세상이 구원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사야 53,12의 말씀처럼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굴욕적이기까지 한 자세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은 자기 봉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봉헌은 자신을 거저, 조건 없이 내어 주는 당신의 겸손과 순종과 무구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 즉 죄사함과 이에 따른 성령의 충만함이 이뤄지기 위해 어린양이 죽임을 당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인간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단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말입니다.

    물론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정치적 야합에 의해서 5․18과 관련한 전직 대통령과 관계자들의 엄청난 죄를 사해 줄 수 있었는지 모르나 역사는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진정으로 회개하지 못한 권력자들의 잘못에 대해 그냥 눈감고 계시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서 누구든지 이 세상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앞에 우리 죄를 고백하고 겸손되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할 때에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 주실 것이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죄인임을 인정하고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각오와 마음가짐 즉 새로운 생활로 우리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3. user#0 님의 말: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말씀연구>

    세례자 요한의 증언.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고,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하지 않도록 말했습니다. 그는 빛이 아니라고. 그는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을 했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의 전부에 대해서 증언을 합니다. 그분을 위해서 세상에 나왔기에 그분을 알리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 보면서 나는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29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두 번째의 만남. 요한은 변함없이 예수님을 알아 뵈었습니다. 태중에서도 예수님을 알아 뵈었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당신에게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이 예고한 하느님의 종, 인간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쳐야 하는 어린양이십니다. 인류를 죄의 노예살이에서 끄집어 내어 자유로운 삶으로 인도하러 오신 어린양이십니다. 또한 어린양은 온유, 체념,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닌 복종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인간이 되어 세상에 내려오신 어린양이신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고 오신 깨끗함 그 자체이신 어린양이십니다.

    “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명칭에 대한 배경은 세상에서 악을 파멸시킬 묵시록적인 승리의 어린양(묵시5-7장;17,14)이나, 피로써 이스라엘ㅇ르 구한 과월절 양(출애12), 또는 희생물로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고난받는 종(이사53,7.10)의 반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이 예언한 하느님의 종이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 형제 자매인 모든 인간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쳐야만 하는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빠스카의 어린 양을 대신하는 참된 어린 양이십니다(마르14,22).


    30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 그분은 사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유다인들의 눈에는 아직 숨겨져 있지만 예수님의 인격은 요한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요한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한 처음부터 계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31  나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친척 관계 였기에 요한이 그 때까지 예수님을 전혀 몰랐다고는 상당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공적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이 드러난 것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였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와 이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요한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권능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는 것을 요한은 보았습니다.

    옛날부터 비둘기는 연애와 사랑의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비둘기의 암수가 곧잘 서로 입을 맞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 결과 동방세계에서는 사랑의 여신의 상징이 온통 비둘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아가에 보면 “그대, 내 사랑. 아름다워라, 비둘기 같은 눈동자” 라든가(1,15) ” 산과 들엔 꽃이 피고 나무는 접붙이는 때 비둘기 꾸르륵 우는 우리 세상이 되었소”(2,12)등, 특히 연가에 비둘기가 곧잘 나옵니다.

    신약성서에서도 비둘기는 매우 귀중한 상징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보였다.  그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3,16-17).

    성령께서는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금단의 나무열매를 먹은 죄의 결과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분열이 끝났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아담(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듯이(2,7) 이제 또 한번 당신의 숨(영)을 인간에게 내려주십니다. 이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되돌아온 것입니다.


    33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 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라’ 고 말씀해 주셨다.

    요한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계시가 자신의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예를 또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누구신지 몰랐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위에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영광을 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34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제 요한은 증언합니다. 요한이 증언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임을 알았고, 그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은 장면이 빠져 있습니다. 마태3,13-17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본다면 이 말씀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 오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시는 대로 하였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 오시는 것이 보였다. 그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신앙으로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증언하고 있습니까?


    2. “어린 양”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린양이 주는 느낌은 어떤 느낌을 줍니까?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4. user#0 님의 말: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말씀연구>

    세례자 요한의 증언.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고,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하지 않도록 말했습니다. 그는 빛이 아니라고. 그는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을 했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의 전부에 대해서 증언을 합니다. 그분을 위해서 세상에 나왔기에 그분을 알리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 보면서 나는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29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두 번째의 만남. 요한은 변함없이 예수님을 알아 뵈었습니다. 태중에서도 예수님을 알아 뵈었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당신에게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이 예고한 하느님의 종, 인간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쳐야 하는 어린양이십니다. 인류를 죄의 노예살이에서 끄집어 내어 자유로운 삶으로 인도하러 오신 어린양이십니다. 또한 어린양은 온유, 체념,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닌 복종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인간이 되어 세상에 내려오신 어린양이신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고 오신 깨끗함 그 자체이신 어린양이십니다.

    “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명칭에 대한 배경은 세상에서 악을 파멸시킬 묵시록적인 승리의 어린양(묵시5-7장;17,14)이나, 피로써 이스라엘ㅇ르 구한 과월절 양(출애12), 또는 희생물로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고난받는 종(이사53,7.10)의 반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이 예언한 하느님의 종이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 형제 자매인 모든 인간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쳐야만 하는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빠스카의 어린 양을 대신하는 참된 어린 양이십니다(마르14,22).


    30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 그분은 사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유다인들의 눈에는 아직 숨겨져 있지만 예수님의 인격은 요한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요한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한 처음부터 계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31  나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친척 관계 였기에 요한이 그 때까지 예수님을 전혀 몰랐다고는 상당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공적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이 드러난 것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였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와 이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요한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권능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는 것을 요한은 보았습니다.

    옛날부터 비둘기는 연애와 사랑의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비둘기의 암수가 곧잘 서로 입을 맞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 결과 동방세계에서는 사랑의 여신의 상징이 온통 비둘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아가에 보면 “그대, 내 사랑. 아름다워라, 비둘기 같은 눈동자” 라든가(1,15) ” 산과 들엔 꽃이 피고 나무는 접붙이는 때 비둘기 꾸르륵 우는 우리 세상이 되었소”(2,12)등, 특히 연가에 비둘기가 곧잘 나옵니다.

    신약성서에서도 비둘기는 매우 귀중한 상징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보였다.  그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3,16-17).

    성령께서는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금단의 나무열매를 먹은 죄의 결과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생긴 분열이 끝났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아담(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듯이(2,7) 이제 또 한번 당신의 숨(영)을 인간에게 내려주십니다. 이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되돌아온 것입니다.


    33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 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라’ 고 말씀해 주셨다.

    요한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계시가 자신의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예를 또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누구신지 몰랐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위에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영광을 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34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제 요한은 증언합니다. 요한이 증언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임을 알았고, 그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은 장면이 빠져 있습니다. 마태3,13-17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본다면 이 말씀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 오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시는 대로 하였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 오시는 것이 보였다. 그 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신앙으로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증언하고 있습니까?


    2. “어린 양”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린양이 주는 느낌은 어떤 느낌을 줍니까?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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