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일
1. 내 이웃을 버려둘 것인가? / 2 2. 김 추기경 메시지(1993)/ 12
3. 김 추기경 메시지(1994)/ 15 4. 김 추기경 메시지(1995)/ 17
5. 김 추기경 메시지(1996)/ 20 6. 김 추기경 메시지(1997)/ 22
7. 김 추기경 메시지(1998)/ 25 8. 삶이란? / 28
9. 정 대주교 메시지(1999)/ 36 10. 정 대주교 메시지(2000)/ 39
11. 정 대주교 메시지(2001)/41 12. 교황 담화문(2001)/ 44
13. 사순절(세례준비)/ 46 14. 사순절의 생각/ 48
15. 사순 시기/ 49 16. 사순절의 의미/ 52
17. 김보록 신부(가)/ 55 18. 김영남 신부(가)/ 56
19. 이근영 신부(가)/ 57 20. 강근신 신부(가)/ 59
21. 사순절을 맞으며/ 61 22. 안충석 신부(가)/ 65
23. 이동섭 신부(가)/ 68 24. 최인호 작가/ 69
25. 함세웅 신부(가)/ 71 26. 하느님의 자리(가)/ 73
27. 강길웅 신부(가)/ 75 28. 김창석 신부(가)/ 78
1. 사순절 강론 내 이웃을 버려 둘 것인가? 1980. 3.22
김수환 추기경
“내 이웃을 버려둘 것인가?” 이것은 제가 오늘 드릴 말씀의 제목입니다.
이 말은, 물질보다도 정신적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보고서 외면하고, 그냥 지나쳐버릴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말할 것도 없이,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이웃사랑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웃사랑을 우리는 흔히, 신자로서 닦아야 할 여러 가지 덕행 중에서 가장 좋은 덕행이지만, 그래도 여러 덕행 중에 하나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서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적으로 보면, 이웃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함께,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 또 중심적인 계명입니다. 뿐더러, 첫째 계명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이웃사랑의 실천 없이는 완성 될 수 없다고 성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 관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웃 사랑의 실천 없이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로는 갈라 5,14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한 마디에 요약됩니다. 구약에서도 이미, 이웃사랑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지만, 신약에서는 이웃사랑이야말로 유일한 계명이라고 할 만큼 반복됩니다.
예수님 친히 요한 14,3에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라. 내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세상이 그것을 보고, 내 형제임을 알리라.”
또 다른데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사랑이라는 것은 결코, 여러 계명 중에 하나에 불과한 것이거나, 여러 덕목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모든 덕목, 모든 덕행의 중심이며, 완성이며, 그 전부입니다.
이웃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본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이며, 두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웃사랑과 하느님 사랑과는 절대로 대립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핑계삼아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만큼 이웃사랑은, 믿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그렇게 성서는 이웃사랑을 직접간접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 에 대한 문제를 놓고, 깊이 설명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방금 들은 루가 10장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 말씀을 순서대로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한번은 율법학자, 그 당시 여러 가지 계명을 지키는 사람, 책, 법규를 공부한 사람인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성서말씀대로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다시 반문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희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이 반문하시는 것은, 율법학자들의 속셈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가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스스로 율법을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답을 직접 내려보라는 뜻으로 유도하는 반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 율법학자는 바른대로 답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해서,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사랑입니다. 이웃에 대한 전적인 사랑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로는 정답이었습니다. “옳다, 그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질문 같은데서 “생명과 사랑”이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는다 해도, 자기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얻는다 해도 내가 생명을 잃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 영원한 생명은, 우리는 돈으로나 권력으로도, 세상의 어떤 지식으로도,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지식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이 생명을 주고서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으로써만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율법학자에게 “가서 그대로 실천하라. 네가 말 한대로 사랑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더구나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랑 없는 삶은 기쁨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참된 삶이 아닙니다. 이만큼 “사랑과 삶”이 뗄 수 없이 계속적으로 밀접하게, 내적으로, 본질적으로, 존재론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본디, 인간이 사랑을 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서 지녀야 할 근본적인 자세입니다.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자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제일 필요한가? 역시 사랑입니다. 우리 서로간에 상호존경과 상호신뢰와 상호 돕는 이웃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우리 삶이 필요한—- 우리 모두가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도 좋을 만큼, 그런 가치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계속해서, 율법학자는 바리세이파 사람으로서, 언제나 자기가 옳다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누가 제 이웃입니까?”하고 되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는 속뜻이 숨어 있섰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은 생각도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율법학자나 바리세이파 사람들 사이에는 “누가 내 이웃인가?”하는 문제를 두고서, 견해차이가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본래 구약의 율법서에서 보면, 사랑의 계명인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됩니다. 이스라엘 사람 안에서 이 사랑의 계명이 의무가 있섰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에게 한한 것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사는 이방인, 나그네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본디는 그랬는데, 후기 유대교에서는 말하자면,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가까이 옴으로서는 이웃에 대한 계명이 달라져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함께 사는 외국인 중에서도 같은 하느님을 믿고, 유대 율법을 따라서 할례를 받은 삶에 한해서, 이웃사랑 계명이 적용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세이파 사람들에게, 특별히 실천적인 면에서는 이것이 더욱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가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도 이 율법을 모르는 일밥 백성 중에서 무식한 대중과 천민이 여기서 제외됩니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 미사 때에 읽은 요한 7장을 여러분이 봤습니다. 바리세이파 사람들이 성전 경비병들을 예수를 잡으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잡으러 갔다가 돌아 올 때 맨손으로 왔습니다. “가서 보니, 그렇게 기막히게 놀라운 말을 한 사람을, 그 전에 본 일이 없었습니다.”하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성이 나서 하는 말이, “이 율법도 모르는 무식하고 저주받을 족속—-”하고 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성전 경비병은, 아주 천민이 아닌데도 그들에게 “이 율법도 모르는 무식하고 저주받은 족속 등!”하고 욕을 했으니까, 바리세이파 사람, 일반 백성, 율법학자, 그들에게까지도 천민, 저주받은 사람들까지도 이웃사랑이 해당된다고 성서는 보도합니다. 그러니까 더구나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원수에게까지 이웃사랑이 해당될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바리세이파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먼저 같은 핏줄과 같은 종교의 테두리 안에, 같은 파벌에 속해 있어야 하고, 그 중에서도 친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핏줄, 종교, 파벌, 혹은 친분 이것들은 이웃사랑에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그러나 바리세이파인은 본디 율법정신에 비교해 볼 때, 자기들의 실천이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안 했습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상당한 견해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진 율법학자는, 예수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하는 의견을 듣고 싶어“누가 애 이웃이냐?”고 예수께 되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웃 개념”은 얼마나 넓은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핏줄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친분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우리의 “이웃 개념”도 달라지지 않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께서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하는 이 질문에 대해서, 한 비유를 들면서 대답하십니다. 그것은 곧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에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겼다. 두들겨 맞아 반쯤 죽게되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비유의 전개를 보면,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을 우리이웃으로 내 세웁니다. “어떤 사람”으로 말씀하시는 데에는 뜻이 깊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으로써 그가 예루살렘에서 에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두들겨 맞았다! 상처를 입었다! 고 표현하지만, 그 사람의 국적도 말하지 않았고, 그 사람의 종교도 말하지 않았고, 그의 신분도 말하지 않았고, 그냥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란 그것이,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제가 지나갔습니다. 그는 보았지만, 피해 갔습니다. 그리고 역시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레위는 구약시대에 사제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역시 지나가다가 보고 지나쳤습니다.
이 사제! 이 레위! 두 사람은 다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와 제사를 드리고, 에리고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리고는 당시 사제들이 사는 고장입니다.
왜, 그들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갔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예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겁이 났는지! 부정을 탈까 그냥 지나갔는지! 자기도 강도를 당할까 두려웠는지! 그냥 지나갔습니다. 사람을 보고도 그를 도와주고 싶은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 옆을 지나면서도, 아무런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사제나 레위나 같은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주 본질적으로 처음부터 어떤 문제성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보면, 예수께서는 비유를 드시는데 비유의 내용도, 비유를 쓰는 용도도, 예수께서는 고의적으로, 선택적으로 그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그냥 지나친 사람들이 하필이면 사제∙레위인인가? 그냥 “어떤 나그네”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사제∙레위인인가? 왜? 사제∙레위라는 신분을 여기에 등장시키는가? 그것도 예루살렘에서 에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서란? 그 깊은 뜻은 무슨 뜻인가? 예루살렘에서 에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던 것은, 상상으로도 그들은 쉽게 사제와 레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경건한 태도로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란 것을 연상시킵니다.
사제와 레위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성전에서 엄숙하게 제사를 드리고,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라도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실천했어야 했습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정신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르코는 말합니다 : — 아무리 훌륭한 기도를 바치고, 제사를 바쳐도, 그와 같은 예배의 정신에 곧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를 등장시키고, 또 그들이 강도 당함을 보고도 피해 지나가는 것으로 묘사하시는 것은, 바로 이 같은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그 당시 사제∙레위∙율법학자인 바리세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그들이 빠져있는 신앙과 실천의 거리를 지적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고의로 사제∙레위를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야고보 서한을 보면,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로는 1고린 13장에서 사랑이 없이는 어떤 좋은 법규도, 어떤 깊은 신학 지식도, 어떤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심지어 큰 자선행위도, 영웅적인 행위도 소용이 없다고! 바로 이 점을 예수께서는 지적하시기 위해서, 이 비유에서 사제∙레위를 등장시킵니다. 오늘 날 우리 자신도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저도, 성당에서는 기도를 바치고, 미사를 열심히 봉헌하지만, 이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에서 우리 실생활이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이 같은 반성은, 곧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줍니다.
이제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웃사랑”을 참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하나 등장시킵니다. 그런데 그는 사제, 레위 그리고 유대인도 아닙니다. 그는 사마리아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 땅에서는 나그네입니다. 먼 지방에 사는 사람입니다. 뿐더러 그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과는 아주 사이가 나빴습니다. 서로 원수같이 여겨지고, 민족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혼혈아처럼 여겨지고, 하느님도 믿지만 다른 이단도 믿고, 유대인들로부터 천시 당하는 사마리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다가 같은 강도를 만난 자를 보고서, 아주 처절한 마음, 가엾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가 그를 위로하고, 치료해 주고, 자기 나귀에 태워 데리고 여관에 데려가 간호하고, 그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의 돈을 주었습니다. 이틀 분의 임금에 해당합니다. 2만원에 해당됩니다. 그렇게 하고는 주인에게 말하기를 “만일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그것까지 갚아주겠으니, 잘 돌봐주십시오!”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 상처받은 사람에게 현재 뿐 아니라, 내일 모레까지, 그것을 내다보고 걱정하고 돌봐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이웃사랑”의 실천자를 사제, 레위, 유대인도 아닌, 하필이면 사마리아인을! 곧 나그네요, 먼 길을 여행하는 유대 땅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한 자”로 등장시킵니다.
이 말씀은 곧,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참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에 대한 시사요, 그 답니다. 아무리 성당에 다니다 하더라도, 신자, 사제, 수도자도 만일의 경우“이웃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에, 사랑을 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사제,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평신도 가운데서도 본당회장이나 사목위원이 아닐지라도, 또한 신자가 아닐지라도, 오히려 그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을 많이 들을 수 있다는, 이러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이것을 어떻게, 하필이면 그 사마리아 사람! 사제도, 레위도, 유대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신자요, 사제요, 수도자라는 것은 헛되다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반문하는 그런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신자로서의 신분, 사제 수도자로서의 신분에 대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하느님으로부터 귀한 사랑을 받고,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서, 우리는 온 세상을 향해, 우리 처지를 자랑해도 좋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우리는 누구보다도 앞서, 참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뜻을 행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만일“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신자 아닌 사람들보다도 못하다면, 더욱이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고 행실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은 옛날 바리세이 사람과 같이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가 그랬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참으로 이웃사랑을 교회가 증거하고 있는가? 이렇게도 반성해야 합니다. 이 사랑의 증거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수난하시고 부활하시어 오늘 우리 가운데 살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서로간의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늘 주장하는 교회의 쇄신, 특히 우리 교구의 목표인 “하느님 백성의 일치”는 바로 이 사랑 실천에 여하가 달렸습니다.
또한 앞으로 우리가 하는 우리의 발전인 선교 200주년기념도, 이 점을 떠나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200주년을 우리가 어떤 외적인 큰 행사를 할 수 없다 치더라도, 만일 우리 모두에서 한국교회 전체의 삶이 외적으로 이웃사랑이 충만되어 있다면, 우리 마음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열려있다면, 그리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과 진정으로 고통을 나눌 줄 안다면, 그래서 모두 특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 종교나 자기신념에 관계없이 이 교회 안에서만은 사랑과 자비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이 교회에서만은 복을 받고 위로와 용기를 받을 수 있다면, 그럼으로써 이 교회가 선포한 복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면,—– 한 마디로 이 교회를 보고서 모든 이를 위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교회는 그것으로써 선교 200주년을 기념하고 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교회는 진실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누룩이 될 수 있고, 땅에 소금이 되고, 또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 신자요, 이 땅에 그리스도교회인 우리의 사명은 “이웃사랑”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자!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율법학자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이 질문 장면도 중요합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비해, 예수님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인가?”하고 반문했습니다.
이 두 가지 질문에서, 생각의 중심점이 다르고, 생각의 중심이 율법학자는 “나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인가?” 물음으로써, 나아가 내 자신이 생각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냐?”고 함으로써, 곤경에 처한 사람, 강도 만난 사람이 생각의 중심입니다.
이것은 사랑에 있어서도 중심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사랑은 남을 중심으로 할 때 “참 사랑”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남을 위한 것이 못됩니다. 자신을 바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남이 중심적인 사랑은 진실로 헌신적이며, 봉사적이며, 몰아적입니다. 남을 위해서 자신을 조건 없이 내어 줍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율법학자는 이번에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잠시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잠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 개개인에게 있어서도, 인류 전체에 있어서도, 도대체 인간은 “원죄 이후” 강도를 만나서 상처를 입은 사람이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죄로 말미암아 좋은 것은 다 빼앗기고,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입니다. 사랑 없이는 구원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실존적으로 지닌 고독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삶의 고달픔, 그리고 죽음이 깃든 존재입니다.
누가 인간에게 이 깊은 상처와 죽음의 고해에서 건져줄 것인가?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일을 다른 모든 이가 외면해도,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신∙구약 성서전체가 말하는 내용은, 참으로 이 하느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상처를 고치고, 그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하여 이 하느님은 얼마나 자비를 베푸시는지! 말해주는 것이 성서입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이 “인간에게 이웃이 되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모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성서의 하느님은 이 인간의 친구가 되어주신 하느님이십니다. 뿐더러 하느님은 이 상처받은 인간을 보시고, 너무나 측은하게 생각하신 나머지, 바로 당신 자신이 혈육을 취하시어, 이 상처받은 인간과 같은 인간이 되시어, 세상 속에 인생과 역사 안에 깊숙이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상처받은 인간의 친구, 이웃사람이 아니라, 그 상처받은 인간의 형제이십니다. 뿐더러 더욱 깊이 있는 것은, 당신 자신이 “상처받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모든 상처받은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배척받은, 버림받은 예수! 드디어 십자가에 못 박혀 참혹히 죽으신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마태 25,31-42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은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그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중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이고, 그 굶주린 사람, 헐벗은 사람, 그 병고 신음하는 사람, 그 옥고를 치르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나입니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성체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은 믿음으로써, 가난과 굶주림, 병과 고통 중에 버림받고 배척받는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고 또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그리스도를 외면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누구도 감히 외면하고, 버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누구인가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버리고서”라는 이 질문은,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를 버릴 것인가? 하느님을 버릴 것인가?”하는 이 질문입니다.
가난과 병고, 소외와 천시, 우는 이웃을 버리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은 곧 하느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내가 내 자신을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사랑”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내가 너희를 사랑함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사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되지 않고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느님은 우리에게 강요하십니다. 바로 그분은 우리를 간호해 주시기 위해서, 하느님은 본디 우리를 당신 모습에 따라서 창조하셨고, 또 성자께서 그리스도 사람이 되시어 오시게 하시고, 오신 성자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은 사람, 하느님의 아들 딸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또 이것을 이룩하기 위해서, 당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에제키엘서에서 말씀하고 있듯이,“우리의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빼어내어,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를 바꾸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로는 로마 5,5에서,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신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성령을 받은 우리는, 우리 이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사랑해야 합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사랑의 실천”, 사도 바울로처럼,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려는 그 성령 안에 우리 마음을 열고, 그 성령의 뜻에 따릅시다! ———– 대단히 감사합니다.
2. 1993년 사순절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은 본래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하시는 분이신 데,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사람이 되어 오셨고, 복음선교를 하실 때에는 머리 둘 곳도 없을 만큼 청빈의 삶을 사셨으며, 이재 다시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인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가난과 고통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까? 가난과 고통이 좋은 것입니까? 성경에 보면 적어도 구약에서는 가난도 고통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일 수는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저주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 중에 누구도 이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난과 고통은 우리에게도 큰 불행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 길을 가시는 것입니까?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이 길을 가신 근본적 이유는 우리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고통으로 치유되고 구원된 인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있습니다. 그분의 생각, 그분의 마음, 그분의 말씀, 그분의 활동, 그분의 삶의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서이고, 그분의 존재 자체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위하여는 아무 것도 없고, 완전히 남을 위한 존재,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당신을 남김없이 비울 수밖에 없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아낌없이 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더러 거기다가 우리의 잘못, 우리의 죄, 우리의 탓, 그 모든 것을 당신이 대신 지시는 것입니다. 그분 스스로 “나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기 위해 왔다”(마태 20,28)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끝날까지의 인류가 범한 모든 죄를 주님은 당신 두 어깨에 지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주님의 이 모습을 고통받는 야훼의 종으로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ꡒ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이사 53,2-4). 그렇습니다. 이렇듯이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이어서 말한 대로 ꡒ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습니다”(이사 53,5).
고통받는 야훼의 종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불타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박해당하시고, 고독하신 그리스도 하느님의 침묵 속에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때 그토록 철저히 버림받으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믿고 의탁할 수 있는 형제이며 친구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또는 그 이상을 이미 다 겪으시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는 치유되고 구원되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분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다 사하여주시고, 무죄 선언을 하였습니다(로마5,18참조).
이제 우리는 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의 삶을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삶도, 존재도 다 우리를 위해서 바치셨는데,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철두철미 이타적인데 우리는 철두철미 이기적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부하게 만들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가장 가난한 자 되셨는데(2고린 8,9) 우리는 남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뿐더러 우리는 청빈보다는 물질적 부를 추구하고 희생보다는 안락을 추구합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는데(마태 20,28), 우리는 정반대로 봉사하기보다 봉사받기를 원합니다.
사순절은 진실히 이런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황금만능의 가치관 전도로 말미암아 정치, 경제는 물론이요 교육계, 종교계까지 썩어가는 구조적 망국병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병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망국병이라는 표현 그대로 우리나라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 다행히 새로 출범한 새정부는 이 망국병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새 대통령은 이 병을 고치는 데에 모든 국민이 동참해주기를 촉구하면서, 국민 모두 함께 고통을 나누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그것은 먼저 정직하고 성실하며 가진 것을 서로 나눌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계층과 지역간의 격차를 좁혀가면서, 국민 모두가 대화함으로 하나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솔선수범해야 할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란 존재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닳아야 합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와 함께 생각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행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기적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런 뜻으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5)라고 호소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곁에서 “목마르다” 탄식하는 예수
우리는 사순절을 뜻깊게 지내기 위해 매일 재를 지키며 고신극기를 할 수 있고, 또는 매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서 참으로 이웃 사랑을 사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 소외된 이웃,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의 형제 되어, 그들을 돕고 그들과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동시에 마음 상한 이웃이 있으면 서로 용서함으로써 화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같은 이웃 사랑 실천이 없으면 고신 극기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해도, 사도 바울로의 말씀대로 소용이 없습니다(1고린 13 참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올해 사순절 담화문을 통하여, 실제로 물이 없어서 목타는 아프리카 대륙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에게 교회 구성원 모두 가 도움의 손길을 뻗치도록 호소하십니다. 그들 안에서 십자가상의 예수는 오늘도 “목마르다”(요한 19,28)라고 탄식하십니다. 우리는 교황님의 이 호소에 구체적으로 응답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이 날로 사막화되어 가고 있는 원인은 교황님이 이 담화문에서 지적하시듯이 “자연의 균형을 파괴하는 무분별한 산업개발과 기술 이용이 환경에 심대한 손상을 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탓으로 “비옥하고 풍요로웠던 대지가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환경 오염의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합니다. 이 문제를 우리 역시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오늘의 아프리카의 문제는 바로 내일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목마르다”라고 탄식하는 이는 비단 사막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여러 모양으로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인정이 메마른 우리 사회에 사랑과 자비에 목말라 하는 이가 많습니다. 생명의 말씀, 삶의 참된 가치에 목말라 하는 이, 아직도 정의에 목타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의 목마름을 적셔줄 수 있습니까? 이는 교회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입니다.
모든 본당과 수도 단체들이 진실로 사귐과 섬김과 나눔으로, 지역사회 속에서 목말라 하는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 정의와 펑화의 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2000년대 복음화입니다. 그러면 그 샘터에서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목마른 이를 통하여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실 것입니다. 사순절에 여러분 모두에게 이같은 은혜가 충만하기를 빕니다.
3. 1994년 사순절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도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고를 고쳐주었구나”(7l사 53,5).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은 이처럼 상처 입으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은 상처 입으셨습니다. 이 상처는 참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의 의지가 되고 피난처가 됩니다. 우리는 죄 많은 인간들이고, 하느님 앞에 고개도 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위하여 상처 입은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느님 앞에 서 계십니다. 하느님은 이 예수님을 보시고 우리에게 무죄 선언을 하십니다(2고린 5,21;로마 8,34; 1베드 2,24 참조).
즉 하느님은 이 예수님을 보시고 죄 많은 우리를 죄 없는 자로, 의인으로 판정하십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로마 3,25).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구하시러 당신 아들을 내놓으셨고, 그 아들 그리스도는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될 길 없는 우리, 영원히 죽음의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당신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그 절망에서 구하여주십니다.
이렇게 상처 입은 예수님이 계시어,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비록 죄인일지라도”(로마 4,5) 언제나 용서받고 구원됩니다. 그분이 계셔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려졌습니다(로마 5,20). 이 얼마나 큰 위로요 기쁨이요 해방이요, 펑화입니까?
이제 이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은 2000년 전에 수난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현재의 나를 위해서 수난하신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 내 안에서 나를 위해 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수난하시고 죽으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의 사순절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는 참으로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때문에 상처 입으시고 죽으시기까지 하시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주님 친히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에 앞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분을 위해서 말뿐이고
구체적으로는 아무 것도 드린 것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큰 배은망덕입니까?
셋째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정말로 남을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원수까지 용서하십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을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에 용서를 비셨습니다(루가 23,34).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복음화란 바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이렇게 서로 진실히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더 나아가 평화통일을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우리 가정에서부터 이 용서와 사랑을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부부간에, 부모자식과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올해는 UN이 정한 가정의 해입니다. 가정은 우리 자신의 가장 기본적 삶의 터전이요, 생명과 사랑의 샘터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이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도덕과 윤리의 타락으로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가정에서 상처받고 있습니다. 피흘리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우리 가정이 다시 생명과 사랑의 샘터가 되고, 우리 자신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사랑을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4. 1995년 사순절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에서는 원수되어 있는 유다인과 이방인을 화해시켜 하나의 새 민족을 만드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에페 2,15-16).
그리스도는 이처럼 온 세계 모든 이가 인종, 피부색, 민족, 계급 등 모든 차이를 넘어서,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되고, 서로 형제 자매되어 사랑함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의 일치 속에 하나될 수 있도록, 당신을 온전히 희생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
12,32). 교회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사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가슴이 찔려 피와 물이 흘러내릴 때, 거기서 나왔습니다(교회헌장 4참조).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도처에 만연되어 있는 이기주의, 물질주의, 퇴폐풍조와 아울러 극단적 종교적 원리주의, 민족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찢어진 세계에는, 어느 때보다도, 상처의 치유와 모든 분쟁과 다툼의 종식과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수난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분의 몸인 교회가 이 시대에 용서와 화해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교회는 사실 언제나 인류세계를 구하기 위한 십자가의 소명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우리 조국의 현실을 볼 때에 더욱 그렇습니다. 올해는 이른바 광복 50주년입니다. 광복의 기쁨,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그 기쁨을 다시 새기게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큰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올해는 또한 이 땅과 이 겨레가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광복 50년의 기쁨보다 분단 50년의 슬픔과 아픔이 더 큽니다. 우리는 같은 핏줄, 같은 민족인데 왜 이렇게 서로 미움과 불신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까?
상식적으로는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비극이요 슬픔입니다.
그러기에 광복 50주년을 참으로 뜻깊게 기리기 위해서, 우리는 올해 어떤 일이 있어도 분단의 벽을 허무는 일에 착수하여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동족으로서 서로 미워하지 말고, 비방하지 말며, 서로 만나서 함께 펑화통일의 길을 모색하는 데 뜻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회, 종교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이들이 나름대로 그 길을 모색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도 교회대로 평화통일의 길을 모색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이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수난하신 주님의 그 수난을 깊이 본받고 사는 것입니다.
주께서 원수되어 있는 유다인과 이방인을 화해시키고,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기 위하여 당신을 십자가상에 제물로 바치셨듯이, 올해 우리 믿는 이들은 이 땅에서 같은 핏줄이요, 동족이면서 원수되어 있는 남과 북이 화해하고 하나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 이기주의를 버리고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마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북한 동포들은 연변을 통하여 우리 남쪽 사정을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변을 통해서 북한 동포들이 아는 남쪽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잘 살지만, 그것 때문에 너무나 물질주의, 이기주의에 빠져 있고, 과소비와 사치로 사람들이 타락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더러 인정이 메마르고 없는 이들, 약한 이들을 업신여기며 심지어 연변에서 온 동포들을 불법체류 등의 약점을 악용해 착취하고 학대하는 등, 비인간적인 짓을 예사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연변에서 온 동포들을 우리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한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적인 인식밖에 가질 수 없는 북한 동포들이, 물질주의 이기주의로 타락한 남쪽과 평화통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반대로 이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물든 남한을 공산혁명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남북간에 왜 이렇게까지 대화의 길이 막혀 있는지, 왜 북의 체제가 극단적 폐쇄주의와 이로 말미암은 심각한 경제난,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는지를 단편적으로나마 설명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현재와 같이 돈만 알고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한 우리가 바라는 평화통일을 결코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통일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 시기에 촉구하신 대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물질보다는 인간을 존중할 줄 알고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 약한 이, 연변 동포들, 또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진실로 인간다운 인간이 될 때 이 소식이 또한 자연히 연변이나 기타 경로를 통해서 이북에 그대로 전달될 것입니다.
“남쪽의 우리 동포들은 잘 살 뿐 아니라, 그렇게 후덕하고, 동포애도 많고, 없는 이들과 고통을 나눌 줄 안단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동포들에게 왜 총을 겨누고 있어야 하는가?” “빨리 통일되어, 이런 동포들과 함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우리의 살 길이 아닌가?” 북한 동포들의 생각이 이렇게 변화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엄청난 통일의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통일의 길은 결코 먼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 곁에 그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바로 옆에 있는 가난한 형제, 고통받는 형제, 굻주리고 헐벗은 형제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칠 줄 알 때 거기 통일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가 마음 상한 이웃과 서로 화해하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손잡을 때 거기 통일의 길이 있습니다. 사실 남쪽에 사는 우리 모두가 진정 인간으로서 남을 존중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나눌 줄 안다면, 그것이 곧 통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통일의 힘입니다. 그럴 때에는 통일비용이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같은 인간존중과 이웃 사랑이 또한 세계화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정신적 바탕이 없는 세계화는, 일등만이 살아남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무서운 현상을 나타낼 것입니다.
“내가 너회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b).
주님은 죄 많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죄를 다 용서하여주시고 원수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습니다”(마태 8,17). 그분은 우리를 위해 당신을 아낌없이 주시고 또 주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이처럼 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 1996년 사순절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1. 친해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시금 주님의 수난을 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어, 당신과 함께 하느님 안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끔 수난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런 죄도 없이, 당신을 시기하고 미워하던 인간들로부터 하느님을 모독한 죄, 백성을 선동한 죄 등, 여러가지 죄목으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채찍으로 치고 가시관을 씌워 조롱하면서 갖은 모욕을 주었습니다. 마침내 극악무도한 대죄인처럼 사형 언도를 받으신 그분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까지 고통의 길을 오르셨으며, 그 십자가에 못박혀 참혹하게 죽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렇듯이 모욕과 고통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2.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죽음입니다.
시몬느 베이유(Simony Weil)의 말대로, 예수님은 이같은 죽음을 결코 영웅적으로 위풍 당당하게 맞이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악인들 중의 하나로 몰렸다”는 예언 말씀대로, 두 강도와 같이 못박혀 죽으셨습니다(루가 22,37).
이사야는 이 야훼의 종을 두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모습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고, 인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우리라. 이런 일을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 본 사람도 없다”(이사 52,14-15). 주님이 겪으신 수난과 십자가 죽음은, 참으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치욕의 극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수난과 죽음을 세 번이나 예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 스스로 “내 마음이 죽기까지 괴롭다”(마르 14,34)고 고통을 실토하셨습니다. 또한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너무나 괴로워 피땀을 흘리셨고(루가 22,44),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가 22,42)라고 간절히 빌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로부터는 아무런 답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홀로 버려졌습니다.
참으로 성경 말씀대로 “때는 밤이었습니다”(요한 13,30). 감옥이든 죽음이든 선생님과 함께라면 무멋이든지 달게 받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와 제자들도 주님을 모른다며 배반하고, 도
망쳤습니다. 너무나 무서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무서운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1고린 1,23)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이방인들만이 아닌 오늘의 우리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3. 왜 하느님이 하필이면 이 치욕적인 십자가,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야말로 바로 우리의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고린 1,24)라고 설파하였습니다. 어떻게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의 구원이 오고, 하느님의 힘과 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까? 우리는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답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주님 친히 말씀하신 그 가장 큰 사랑만이 죄로써 붉게 물든 인간의 마음을 회개시킬 수 있고,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참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이 사랑을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4. 이제 우리는 이 십자가의 이치를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뿐더러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었을 때 그분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마르 8,3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잃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25참조). 이런 이치의 말씀은 복음에서 거듭 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떠난 제자의 길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주님의 제자됨에 있어서 필수 요건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역사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안이한 생활에 젖은 나머지 십자가가 우리 구원의 길이요, 주님을 본받
고 따르는 길임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고통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어려운 일을 피하고, 편히 살고싶어 하며,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를 하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떠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절대로 따를 수 없고, 본받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십자가 없는 인생이 없고,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는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이 가장 먼저 외친 말씀이오(루가 3,3), 예수님 또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회개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마태 4,17). 우리는 진정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수난하신 주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주님, 그 주님의 사
랑을 깊이 깨달음으로써 회개히여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나를 구하시고자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
시고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찌 이 병고를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불치병으로 죽음의 고통을 겪은 한 젊은이가 남긴 말입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젊은이의 이 말은 바로 우리의 말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역시 사도 바울로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갈라 6,14)라는 인식 아래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6. 사순절 메시지 (1997년)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심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악인들의 손에 넘겨져 참혹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미 말하였듯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1고린 1,23). 뿐더러 십자가는 본래 살인 강도, 반역자 등 극악무도한 대죄인들을 처형하는 형틀입니다. 그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요, “치욕”입니다(히브 12,2: 13,13)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거룩하신 분이, 한 인간으로서도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 고통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극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미 이사야가 ‘야훼의 종’에 대해 예언한 바대로 온갖 모욕과 학대로 수난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모습은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갈 만큼”,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다”(이사 53, 2-4 참조)고 말할 만큼 참혹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사람들로부터는 멸시와 조롱 속에 버림받았고, 더하여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도 절대적 침묵 속에 버림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하신 그 예수님, 언제나 벗과 형제로 모든 이를 사랑하실 만큼 겸손하고 착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이렇듯이 배척과 고독 속에 버림받아야 하였습니까? 우리 구원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이 필요하였다는 것입니까? 아무튼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습니다”(이사 53, 4).
2. 당신이 겪으실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고통이 이렇듯이 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생전에 세 번이나 예언하였습니다(마태 16,21, 17,22-23: 20.18 등 공관복음참조). 그러나 시몬 베드로를 비롯하여 사도들은 이를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하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자신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한 그 스승이, 치욕적인 십자가형 죽음을 당하신다는 자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마71 16,22)라며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시며 꾸짖으셨습니다(마태 16,23).
하지만 제자들은 끝내 스승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주님이 수난하실 때 주님이 예언한대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고, 베드로는 자신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마태 26,69-74) .
이렇게 십자가는 제자들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그 뜻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의 필요성을 높이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유다인들 특히 대사제나 율법학자 등 바리사이파들의 미움 때문이었으나, 예수님 친히 당신이 십자가 죽음을 거듭 예언하신 것, 또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시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시며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신 것”을 보면(루가 24,26-27)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데는, 하느님의 섭리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일” 이었습니다.
3.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1고린 15.3)고 말합니다. 뿐더러 그는 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깊이 묵상한 나머지, 여기에 하느님의 깊은 뜻과 지혜가 있다고 믿고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1고린 2.2)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일편단심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랐으며, 그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1고린 1,23).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유다인, 그리스인 할 것 없이 모든 이의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1고린 1,24).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한 마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의 죄를 당신이 대신 지시고, 당신 자신을 속지의 제물로 십자가에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 죄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로마 5,6).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무죄 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2고린 21).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우리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페 319)을 깊이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신 바로 그 가장 큰사랑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을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못났고, 죄많은 존재들입니다. 뿐더러 주님은 나의 못남, 나의 죄, 나의 모든 것을 다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내는”(1고린 13,7) 그 사랑이 우리에 대한 주님 사랑입니다. 주님은 실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는 어떤 고통도 어떤 박해나 치욕과 죽음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로마 5,20)라고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수난은 우리에게 이 말씀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의 죄 때문에 사람이 되어 오시고 상처 입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 베르나르도가 말씀한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해줄 수 없는 죽음으로 이끄는 그런 죄가 있겠습니까?” 그런 죄는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 모든 죄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4. 우리는 이 사순절에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나는 이 사랑을 참으로 깊이 묵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회개를 요구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실로 절대적이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며,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는데, 우리는 이 주님을 지금까지 어떻게 대하였는지 깊이 반성하고 지금까지의 배은망덕을 뉘우치는 회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동시에 우리 역시 주님의 제자되기 위하여는 주님 스스로 거듭 말씀하였듯이, 우리 자신을 끊고 매일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함을 아울러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히 그리스도께로 회개하고 그분의 뒤를 따름으로, 그분을 닳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미 잘 아시는 바대로 올해 1997년은 교황 성하께서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성자 그리스도께 봉헌한 해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 나의 구세주이심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마음 깊이 새기며 그분의 뒤를 따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상의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간곡히 부탁하십니다.
이같은 회개와 사랑의 실천은 우리 자신을 구할 뿐 아니라 우리 이웃과 우리 사회, 우리나라를 구하고 세계를 구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가치관 부재와 도덕의 타락 속에 정치 경제적으로 너무나 혼미에 빠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는 현재의 혼미와 타락에서 구원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살 때,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나라와 겨레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분 아니라 속죄의 십자가를 지고 갈 줄 알 때, 그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큰 빛, 희망의 빛이 되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누룩이 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생명의 힘이 될 것입니다.
7. 1998년 사순절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다시 주님의 수난을 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시어, 수난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수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며, 또한 이를 오늘 우리 자신의 삶 속에 구체화시키는 것이 이 시기의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른바 IMF의 구제금융 없이는, 나라 전체가 부도를 내고 도산을 면치 못하는 참으로 엄청난 총체적 경제난국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자체의 힘만으로는 1,500억 달러가 넘는 외채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정부도 기업도 노동자도 가정도 마치 부자인 양 착각하고, 너무나 부실했던 탓으로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큰 시련을 겪고 있고, 그 중에서도 많은 중소기업이 부도를 내고 쓰러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어떻게 살면 좋을지 모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실망과 좌절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난국을 극복해야 한다는 정신 아래 우리의 삶을 깊이 반성하고, 국민의 힘을 합하여 경제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이 난국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런 나라 살리는 정신이, 국민 운동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나라 살리기 금모으기’는 좋은 예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 모두가 위아래 없이 공동체 의식에 눈을 뜨고, 서로 위하는 마음으로 고통을 분담하고, 가진 것도 나누는 애국애족심입니다. 바로 이웃사랑 실천입니다.
그 때문에 사순절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 사랑의 극치인 그분의 수난의 의미는 어느 때보다도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도 깨닫지 못합니다. ‘왜 하필 내가 이 고통을, 이 병고를, 이 불행을 겪어야 하느냐?’고 묻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왜 하느님의 아들되시고 죄없으신 그리스도가 악당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십자가에 참혹히 처형되어야 하였는지, 하느님은 왜 이것을 막지 않으셨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은 알아듣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친히 당신이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함을 거듭 예언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고린 1,23-24)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참혹히 처형된 그리스도가, 아무것도 몸에 걸친 것 없을 뿐 아니라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고,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이사 52,14), 인간의 마지막 존엄성마저 빼앗긴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힘이 되며, 하느님의 지혜란 말입니까? 우리가 이 사순절에 이것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깨달을 수 있다면, 진정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고, 세상의 잣대로 잴 때,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바로 비극 자체입니다 그 이상의 불행, 그 이상의 패배, 그 이상의 고통이 있을 수 없고, 그것은 곧 죽음과 암혹과 절망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를 사도 바울로는 – 한때는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바울로가 – 하느님의 힘이요, 하느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뿐더러 바울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1고
린 2,2)고 말할 만큼,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였고, 그분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목숨바쳐 전하였습니다. 바울로에게 있어서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십자가 없는 복음도 구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 3,8-10)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로는 결국, 그리스도처럼 자기도 같은 고난을 나누고, 같이 죽는 것을 가장 소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고 영원히 사는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죽음을 이긴 생명, 불사불멸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의 힘과 지식, 지혜, 기술 등 온 세상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능력, 곧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만이 줄 수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고, 그 아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인간의 상상과 지식을 초월하는 절대적이요 조건없는 사랑, 우리를 가이없이 사랑하시는 이 사랑이 십자가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25).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힘이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이 힘과 지혜는 오늘 우리들이 당면한 문제, 곧 총체적 난국으로부터 나라를 구해내는 데 있어서도 참으로 힘이요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때에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 욕심을 따르기 쉽고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재기와 매점매석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 다수가 이렇게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빠진다면, 이 나라는 망하고 이기주의에 빠진 국민 자신도 망한다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고 나라를 살릴 길은 국민 모두가 이미 서두에 언급한 대로 같은 운명 공동체임을 깨닫고, 모두가 서로를 위하고 고통을 분담할 줄 알며 가진 것도 내놓을 줄 아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로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그 정신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이렇게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웃 사랑, 나라 사랑을 할 줄 안다면 우리는 기필코 이 난국을 극복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더욱 아름답고 빛나는 나라로 다시 일으킬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힘과 지혜는 나라를 구하는 데도 최선의 길입니다.
성령의 해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이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체험하고,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8. 삶이 란? (인간성 회복의 길과 신 지성인의 사명)
1999. 5. 20.
가톨릭 대학 성심교정 김수환 추기경
1. 시작 인사
학생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이렇게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기쁩니다.
저를 초대해 주신 가톨릭 大學校 성심교정 부총장 신부님과 담당교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우리가 살아가는 人生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삶이란? 하고 제목을 붙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제로 인간성 회복의 길과 新 知性人의 사명이라는 것이 붙어있습니다. 위의 제목은 제가 붙인 것이고, 뒤의 것은 학교 당국의 바램입니다. (삶이란? 만득이 이야기)
2. 누가 살아야 하나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제가 읽은 어떤 책의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이야기 내용은 이렇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 버나드 쇼가, 유람선을 타고 여행을 하다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어 침몰하게 되었고, 모두가 목숨을 잃었고, 쇼와 한 정신박약자만이 살아 남았습니다. 그런데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 앞에는, 한 사람만이 탈 수 있는 구명보트가 있었습니다. 둘 중에 누가 이 보트를 타고 살아남아야 하겠습니까? 쇼입니까? 정신박약자입니까?
쇼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을 들어보십시오. 정신박약자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을 들어보십시요.
쇼가 살면, 아직 知的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박약자는 살아도, 그 자신 남에게 도움되는 일은 거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누가 살아남아야 하는지 판단은 쇼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정신박약자에게 그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쇼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정신박약자를 밀쳐내고, 그 구명보트를 차지하느냐? 아니면 정신박약자를 구명보트에 태워 살리고, 자신은 죽느냐 하는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쇼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겠습니까? 쇼가 살아야 한다는 분? 정신박약자가 살아야 한다는 분?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의미로, ① 우리 자신이 어떤 가치관에 살고 있느냐 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고, ② 뿐더러 人生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도 생각하게 됩니다.
3. 새로운 천년기
우리는 머지않아 서기 2,000년을 맞게 됩니다. 2,000년이면 새로운 世紀가 시작됩니다. 21세기이지요. 이로써 새로운 千年紀(Millennium)가 시작된다고도 말합니다. 이제부터의 새 時代는, 분명히 이른바 국제화 또는 정보화와 세계화의 시대입니다. 세계화는 이미 시작되어있습니다.
세계화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맞이하면 좋겠는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세계화 시대는 엄청난 경쟁의 시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이 경쟁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쟁을 해야 할 내일의 走者들은 누구냐? 그것은 바로 여러분 젊은이들, 특히 大學生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大學生들이 내일에 있을 치열한 경쟁에서 실제로 뛰어야 딴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두고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 한국인은 내일의 세계화에서 – 치열한 경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대처할 준비는 하고 있는가? 자세
는 갖추어져 있는가? 잘 대처하려면, 우리는 참으로 생각도 깊이 해야하고, 부지런히 일하고 공부해야합니다. 우리가 나태하면 그만큼 우리는 세계화 속의 경쟁에서 밀려 날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일본에 사는 한 교포로부터 E-mail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일본 사회에서 살면서 – 특히 최근에 와서 일본인들과 같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느낀 소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와 함께 일하는 日本의 젊은이들은 참으로 성실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든지 말든지 관계없이,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부지런히 일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올해 들어, 두 번이나 일본에 일이 있어서 가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 일본 역시 같다면 같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거의 완벽하리 만큼 잘 해놓고 있습니다. 특히 공항에 내리
면, 누구나 그 나라의 첫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일본은 너무나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해놓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철도 System은 세계에서 최고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런 가운데서도 움직이는 일본인들의 친절과 질서의식, 공중도덕심과 公益의식 역시 나무랄 데 없을 만큼 완벽하고 부럽기까지 합니다. (例: Escalator나 전차 탈 때의 질서 )
여러분은 제가 이렇게 일본을 얘찬하니, 親日派가 아닌가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倭政때를 산 사람이고, 그들의 植民地 통치에 대하여 강한 적개심까지 품었던 사람입니다. 일본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크고, 해방 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되어서, 나중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民族감정이긴 하지만 – 이렇게 까지 미워하는 마음은 옳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계 되어서 그런 미움을 없애주십시오. 하고 기도까지 한 일 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갈구하고 저는 그때도 지금도, 그들의 長點은 長點대로 인정하고, 단점은 단점으로 알고 分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런 두 민족 사이에 歷史에 대한 관점을 비롯하
여 여러 가지 未해결의 문제가 있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좀더 客觀的으로 오늘의 일본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世界化와 競爭
이제 세계화에 있어서, 우리의 相對는 비단 일본만이 아니고, 中國도 있고, 러시아도 있고, 구라파 여러 나라, 아세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가 있습니다.
제가 굳이 일본을 대표적인 상대로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민족적 감정 때문인지, 언제나 일본에 져서는 안 된다는 잠재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Sports에 있어서 이 경쟁심이 강하여, 예를 들면, 축구 같은 경기에서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일본에게만은 저서는 안된다는 의식이 강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으로 世界化의 경쟁에 있어서도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世界化에 있어서 일본에 맞설 수 있는가? 그들은 이미 우리보다도 경제력을 비롯하여 과학기술 학문 기타 모든 분야에 있어서 훨씬 앞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본의 젊은이들이, 오늘날 직장에서 그렇게 부지런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도 부지런히 공부를 하고 硏究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어떠한가? 저는 우리 대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며칠 전에도 총장 신부님으로부터, 또한 여기 여러분을 직접 가르치는 교수 신부님으로부터, 여러분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도서관은 늘 공부하는 학생들로 차 있다는 말씀을 듣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서 우리는 아직도 이른바 3D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dangerous, difficult, dirty 위험함 일, 어려운 일, 더러운 일은 되도록 피하는 심리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부지런히 일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우리 젊은이들은 정직하냐? 질서의식, 공익정신에 있어서 탓할 바 없느냐? 여러분 자신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그 어느 질문에도 自身있게 믿어도 좋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거리에서 보는 교통의 무질서를 비롯한 우리․사회의 모습,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 방송매채가 비추어 주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오히려 그것과는 전혀 다른, 우려되는 면이 더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일 이어지는 각종 범죄 이야기, 청소년 범죄 특히 사기사건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남을 속이는 일에 능하고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는 좋게 말하면 才能이 맡습니다. lQ가 높은 편이지요. 그런데 이 才能과 IQ를 좋은데 쓰기보다 좋지 못한데 더 쓰고 있는데서, 남을 속이는 일, 사기와 같은 범죄가 맡은 것이 아니냐? 생각하계 됩니다.
또 우리는 어디 가든 먹고 마시는 집이 너무 맡습니다. 서울의 대학로의 밤거리? 얼마 전 春川에 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저녁 좀 늦게 서울로 돌아오는데, 낮에 갈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간판들이, 네온사인으로 번쩍거리는 화려한 거리가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먹고 마시는 집들이었습니다. 이런 경춘가도 모습 때문에, 옛날에 가졌던 그 詩的이고 아름다운 정경은 모두 살아졌습니다. 무언지 쓸쓸한 느낌을 아니 가질 수 없고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고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쩐지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荒廢되어가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일의 세계화 속에서 과연 일본을 위시한 선진국들과의 경쟁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실로 염려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참된 價値
그런데 저는 우리는 지금 갑자기 돈이나 기술에 있어서 그들과 맞설 수 있는 힘을 갖출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으로 그들과 경쟁을 하겠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짚은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人間性에 있어서만은 그들에게 뒤져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 생각을 우리는 함께 가지고, 또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조선일보는 지금 아마도 몇 달째 (오늘아침 138) “겸손하고, 교양 있고, 예의 바른 세계인이
되는 길”이라는 칼럼을 새로 만들어, 독자들의 글이 실리고 있습니다. 그 칼럼이 의도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고, 교양 있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될 때에, 비로소 世界人이 될 수 있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조금 읽어본 글 중에는, 좋은 경험을 한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 사회에는 겸손하고, 교양 있고, 예의 바른 사람들은 너무나 적다는 느낌을 주는 것들입니다.
저는 여러 번 이런 맡을 공개적으로 한 일이 있습니다. 정직과 성실 이것이 세계화에 있어서, 우리들이 지녀야할 가장 큰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세계화와 관계없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참 인간이 되어야하고, 정직하고, 성실해야합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 세계화의 세계는 경제력과 과학기술이 경쟁을 이겨내는데 큰 힘이 될 것임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이 제일이라 생각하고, 온 세계 모든 나라가 이것에 치중하여 나아간다면 – 그리고 치열한 경쟁을 부린다면 – 세계는 참으로 不幸한 세계가 될 것이고, 가진 나라와 가지지 못한 나라의 격차 富益富 貧益貧의 格差는 날로 深化될 것이고, 그런 가운데 나라 사이에 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갈등은 심화되고, 분쟁도 격화될 염려가 없지 알습니다. 그리하여 세계는 弱肉强食의 場으로 변하고, 우리 個個人은 人間性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세계가 그렇게 물질위주, 기술위주 다시 말해서 힘 위주가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빠지지 말자 – 우리는 물론 경제성장과 과학기술 발전에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그것은 참된 人間性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창된 인간성은 잊어버리지 말자.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간으로써 진실하자. 정직하고 성실하자” 이렇게 우리가 다짐하고 산다면, 그리고 동시에 우리와 뜻을 같이하여 人間性을 추구하고 있는 다른 민족, 다른 나라 사람들과 손을 잡는다면, 우리는 세계화에서 반드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뿐 아니라, 우리 자신 더욱 인간다운 인간이 될 것이요, 더 나아가 온 세계의 善意의 사람들과 힘을 합하면, 우리는 분명히 “세계를 밝히는 빛이 되고, 구하는 힘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은 정직하고 성실하다. 한국인에게는 인간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기만을 생각지 않고, 이웃을 위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실제로 이렇게 살고, 이런 인간성을 온 세계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우리 안에서 소중하게 인식되고 함양해 간다면 – 저는 이것이 바로 세계화를 맞이하는 우리의 살 길, 오늘의 젊은이들 내일의 主人公인 여러분이 세계인으로서 살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분명히 인간다움이 있어야 참으로 값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기술이 훌륭해도,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가진 것이 아무리 적고 무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참으로 사람답고, 정직하고, 성실하며, 인정이 있다 할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이 참된 人間이다 할 것이고, 우리만이 아니고, 온 세계 어디가나 그런 사람이 참 인간이다 할 것입니다.
6. 人間은?
여기서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이런 도덕적 가치관이 요구되고, 거기에 걸맞는 삶이 요구되는가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안 되는가? 自由는 무엇인가? 왜 욕망을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면 오리려 滿足보다는 허무감만 더 느끼는가? 그와는 달리 욕망을 절제할 줄 알고, 인간으로서 양심을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바른대로 살면, 더 큰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가?
인간은 무엇입니까? 철학은 – 특히 西洋哲學은 오랜 세월 人間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던지며, 계속 그 답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人間과 人生의 의미 탐구는 철학의 주제였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Aristotels는 “인간은 理性的 動物이다”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이것이 오랫동안 인간의 정의로서 만족할만한 것이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人間이 무엇이냐? 는 질문을 새롭게 던집니다. Paschal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人間은 비록 肉體的으로는 작은 存在이지만 – 큰 動物보다 작고, 지구나 별들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작지만 – 그러나 자기를 의식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能力을 가지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는 宇宙보다도 더 위대하다. 그러나 人間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없이 나약하다.” 이런 人間의 양면성을 말한 것이지, 人間本質을 정의한 말은 아닙니다.
아무튼 人間에 대한 탐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哲學뿐 아니라 인류학(인간학), 심리학, 의학 등 여러 가지 학문을 통하여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宇宙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 과학이 발달하였지만, 아직도 人間의 本質을 정확히 학문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분명히 그 육신으로 보면 다른 物體와 같은 물질의 元素(原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단순한 물체는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단순한 생물도 아니요, 동물만도 아니요, 이 모든 것과 유대를 가지면서도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精神的存在요 또한 靈的存在입니다. 정신과 靈은 한편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면서도, 科學的硏究方法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양심과 양심의 소리, 善을 행하고 惡을 피하라는 道德律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이 가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도덕률이 있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인간을 오늘날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수많은 학문으로 온갖 각도에서 연구하고 연구했지만, 아직도 인간은 무엇이냐에 대한 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참된 과학자들은 겸허해져서, 인간의 신비 앞에 어떤 경외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과학적 탐구보다도 종교적 초월적 조명으로써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신비가 있습니다.
7. 인간 존엄성과 평등은 하느님에 근거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지각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간의 尊嚴性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그가 누구이든, 어떻게 생겼든, 잘랐든 못랐든, 불구자든 천치 바보든, 인간인 한 神聖不可侵의 尊嚴性을 지녔다는 것을 거의 대부분의 인류 사회가 인정합니다. 나라의 권력도 침해할 수 없는 것 또한 인정합니다.
신앙인은 물론이요, 불신앙인, 무신론자, 유물론자들까지도 인간 존엄성을 인정합니다. 적어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계의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이 존엄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평등과 인간의 기본권리, 자유를 憲法에 명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9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또 <제10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尊嚴性이나 平等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학문으로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인간에겐 -그가 아무리 못 생겼을지라도- 이런 존엄성이 있다는 것입니까? 법률이 그렇게 말해서 존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법 이전의 天賦的인 것입니다. 천부적인 존엄성을 법이 천명하였을 뿐입니다.
평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이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한 것은, 법 이전에 인간은 天賦的으로 平等하고, 그러므로 平等하다는 것을 밝힌 것 뿐입니다.
“천부적인 것”이란, 곧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
이 존엄성과 평등은 사실상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믿고, 인정할 떼에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인간을 참으로 깊이 알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인간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배제하면, 우리는 끝내 인간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신학은 신, 곧 하느님에 관한 학문이면서, 바로 그 때문에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특히 존엄성과 관계하여 성경말씀을 요약하면,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이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신다.’ ‘또한 그 사랑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영원히 살리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성경말씀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느님이 인간을 절대적이오, 조건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합니다.
8. 하느님의 사랑 : 여기 지금
이같은 내용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뿐 아니라 우리들 하나 하나에게 구체적이요, 현실적인 일로 받아들일 때, 즉 하느님이 나를, 현재 있는 그대로의 나를, 즉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못났다 하더라도, 그런 나를 여기 지금 (Hic et nunc) 사랑하신다는 것을 인식할 떼, 인간 존엄성과 평등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구체적인 사랑을 빼면 인간이 존엄할 이유도, 평등할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이 존엄합니까? 어떤 분은 인간존엄의 근거를 지성에 둘 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성의 능력을 잃은 천치바보는 존엄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더구나 병으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면, 더욱이 존엄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이미 만인 평등은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느님은 그를 어떤 처지에 있든지 버리지 않으신다. 하느님에게는 누구도, 흉악범일지라도 쓸모 없는 인간은 없다. 그 때문에 존엄하고, 또한 평등하다.” 이렇게 해석해야 타당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 인간도 서로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알 때에, 또 하느님이 진실하시듯이, 우리도 진실할 때에 우리는 참 인간이 됩니다.
9. 사랑
그렇다면 시작의 이야기로 돌아가, 버나드 쇼는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하고, 정신 박약자를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는 그동안 자기가 글로나 말로써 강조한 참된 Humanism을 산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의 육신은 죽더라도, 인류 사회 전채를 빛으로 밝히는 꺼지지 않는 등불로 남을 것입니다.
이런 사회나, 이런 가치관에 서 있는 사회는 가난하더라도 참으로 인간다운 사회입니다. 또한 행복하고 미래가 밝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아무리 經濟大國이고 기술이 발달되었어도 그것은 非人間的인 불행한 사회로서 – 未久에 세계 사람들의 멸시 속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느 길을 갈 것인가? 그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우리 사회와 나라의 참된 發展과 번영을 위해, 또 世界化에 참으로 이바지하기 위해, 어느 길을 갈 것입니까?
신명기 30장 19절-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 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9. 1999년 사순절 메시지
정진석 대주교
“너희는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라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어라.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라”(요엘 2,12-13).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사순절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수난을 깊이 새기는 회개의 때입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간곡한 부르심을 지금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절제와 단식, 희생과 극기를 통하여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에 동참하도록 우리는 엄중한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 우리는 회개와 더불어 희생과 극기를 더욱 철저히 실천해야 합니다. 나라는 겨우 국가부도라는 파국을 모면하였으나, 그 충격과 상처는 여전히 국민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막막하고 안타까운 일은, 일터에서 쫓겨난 이들의 아픔입니다.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실직자의 긴 행렬이 줄어들지 않는 한, 우리 각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좌절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난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이지만, 그 과정 중에 결코 인간 존엄성의 침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아울러 경제난을 불러온 첫번째 원인이었던 총체적 부패의 뿌리가 곳곳에 온존해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런 어려움을 외면한 채 자신들만의 삶을 즐기기도 합니다.
또한 죽음의 문화라고 불릴 수 있는 반(反)생명 현상이 만연하고, 지역분열을 부추기는 시대역행적인 갈등과 불화 등, 어두움의 현장도 여전히 널려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고통스럽고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겹쳐 있기에, 2000년 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하시려 자신을 십자가상의 희생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 그 사랑의 극치인 수난 사건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소중한 의미로 우리를 일깨워줍니다. ‘가슴을 치고 심장을 찢는’ 참회가 요청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올해 1999년은 2000년 대희년을 목전에 두고, 교황성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한 ‘성부의 해’입니다. 또한 제삼천년기라고 하는 미지의 새 시대를 여는 막바지 대전야(大前夜)이기도 합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어지며 지나온 천년기와 새로운 천년기가 교차하는 거대한 시공(時空)의 길목에 우리의 삶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저 우연하다거나 범상한 일만은 아닌 듯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성부의 해’를 맞이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태 5,45)의 전망 안에서, 이 세상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의 전망 안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으며 이 땅에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드러낼 것인지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교황성하께서 제시한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제삼천년기 51항)이라는 관점은, 우리에게 매우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가난한 이, 버림받은 이,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감은 주님의 절대적인 가르침이기에, ‘교회의 우선적 선택’은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가 만약 그들을 위해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절제와 극기,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1고린13)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의심할 바 없이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까?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라며 주님께서는 이미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굻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이사 댈,6-7). 이 말씀은 이번 사순절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향한 주님의 엄중한 메시지입니다.
이는 단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풀고 부수고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참된 의미를 실천하는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없이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한 인간으로서도 아무런 죄가 없으시면서도, 마치 극악무도한 대죄인처럼 십자가 형틀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모욕과 조롱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에게서조차 절대적 침묵으로 외면당하셨습니다. 육신의 고통보다 더한 외로움 속에서 고통의 극한을다 견디신 끝에, 참혹한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이를 내다보고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우리라”(이사 52,14-15).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이사 53,2-3). 심지어는 “천벌을 받는 줄로만”(이사 53,4)여길 만큼, 비참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본래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신데, 어떻게 이처럼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셔야 하신것입니까? 그 누구 때문입니까?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이사 53,5).
그렇습니다. 이 모든 고통과 상처와 죽임이 바로 ‘우리의 악행’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통과 상처와 죽음을 통해 우리를 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시고, 구원으로 이끌어주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성 대 레오 교황님의 말씀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분의 육신이, 우리 자신의 육신인 것처럼 느껴야 합니다”.
그분의 고통, 그분의 죽음을 우리의 것으로 느낄 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2고린 4,10)이며, “새 마음 새 뜻”(에제 18,31)을 품는 “새 사람”(로마 12,2)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 방황하는 많은 분들에게 “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야말로 바로 우리의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1고린 1,24)임을 고백하는 사순절의 위로를 보냅니다. 우리는 진실한 뉘우침과 절제와 사랑의 나눔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10. 2000년 사순절 메시지
정진석 대주교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 입자!”(골로 3,9-10)
1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00년 대희년에 우리는 사순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사순시기는 인류 구원의 신비인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때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축제는 전례 주년의 중심이 됩니다. 사순시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도와 회개, 단식과 자선,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도록 하며, 예비신자들에게는 세례 준비의 시기이고, 참회자들에게는 화해를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 수난과 죽음을 겪으셨고, 이로 인해서 부활의 영광에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할 때 그분의 영광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세례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시기이자,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이 받은 세례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는 시기입니다.
2.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이 시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새로운 모습으로 가다듬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양심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새롭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는 회개함으로써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골로 3,9-10) .
또한 이 시기에 신자들은 단식과 자선을 실천합니다. 단식은 주님의 수난 고통에 참여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든 단식에는 자선과 선행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자선은 구약시대부터 시작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물이 불을 끄는 것처럼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30)는 말씀처럼, 자선은 세례성사, 고해성사와 더불어 우리의 죄를 씻어 줍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자선은 당신께 해준 것과 똑같다고 하셨습니다(마태 25,31-46참조).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인간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인아 고통 당하는 이웃이 많습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어려운 이웃에 관심을 갖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이 시기에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며, 화해의 삶을 가꾸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수없이 용서받고 있음을 체험하게 될 때, 비로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용서를 통하여 화해의 삶을 가꿀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용서는 죄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죄지은 사람에 대한 긍정입니다. 따라서 용서란 잘못한 사람을 다시 우리의 소중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사순시기에 개인적인 회개와 보속 뿐 아니라 공동체적인 회개와 보속도 함께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들이 주님을 믿으면서도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가족 이기주위에 사로잡혀 생명을 경시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한 점에 대해서도 뉘우칩니다. 특히 6.25동란 때 남북한이 서로에 대해서 저질렀던 비인도적인 죄악에 대해서도, 우리 신자들이 먼저 민족 전체를 대신해서 회개와 보속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현재 식량난을 겪으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북한동포를 돕는 것은 회개와 보속의 표현이며, 나아가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앞당기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전반에는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올바른 삶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지에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선조들이 소중히 여겼던 도덕과 윤리 등 정신적인 가치는 소홀히 취급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 사회에는 각종 부정과 부패, 거짓과 불의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정치․경제․교육․사회 지도자들 안에서 이 같은 부정적인 모습이 더욱 자주 발견됩니다.
4. 다가오는 4.13총선거는 새 천년기를 위한 국가 장래의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지금 국민들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민족이면서도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나라는, 선거 때만 되면 동서로 갈라지는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정치인들은 지역 감정을 자극하여 총선에 악용하고 있습니다 4.13 총선거에서는 혈연과 인연, 학연과 지연 등에 얽매여 투표했던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성숙한 정치의식을 가진 국민만이 성숙한 정치 현실을 만들 수 있습니다. 국민들은 각 정당의 정책과 후보자의 인격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양심에 따라서 올바른 주권을 행사함으로써, 정치의 선진화와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40일 후면 우리는 2000년 대희년에 부활 대축일을 맞이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사순시기에도 일상적인 생활을 하지만, 마음은 피정을 하는 사람처럼 거룩하게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장차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새봄의 햇살처럼 온 누리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주님의 은총이 남북으로 갈라진 채 오랜 세월을 살고 있는 우리 민족과, 이 땅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두루 내리기를 기원하며 기도드립니다.
11. 사순절 메시지 (2001년)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정진석 대주교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삼천년기의 첫 번째 사순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사순 시기는 주님의 부활을 합당하게 맞이하기 위하여 40일 동안 준비하는 특별한 때입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수난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고, 자신을 정화하며 기도와 선행을 실천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첫 설교에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참다운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밭에 익어 가는 곡식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셨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와 들에 핀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고 보살피면서 살리시는 하느님을 깊이 깨달은 분입니다. 예수님은 평생동안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큰사랑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도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라는 기도를 바치면서까지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사랑”(1요한 4,9)이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우리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그분의 은총 속에서 살다가 마침내 그분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생활 안에서 실천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여 세상을 하느님 나라처럼 구원된 모습으로 변화시키기를 권고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은 우리 주변이 더욱 따뜻해지고, 감사로운 자리가 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리면, 눈앞의 이익과 안일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있는 부정과 부패, 불신과 죄악 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몫을 챙기기에만 급급한 결과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 무신론과 세속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죄의식이나 자기반성 없이 부정과 부패, 사기와 거짓, 향락과 사치, 투기와 과소비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역간, 계층간, 빈부간의 갈등과 대립이 점점 심화되는 가운데 정신적인 황폐를 겪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배운 삶의 방식은 다른 사람을 이겨야 하고, 많이 가져야 하고,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방식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돕는 것이며,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며,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사순 시기는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찾아 나서는 거룩한 여행과도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사순 시기에 회개와 기도, 용서와 화해, 자선과 금식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올바로 영접하기 위해서는 죄악에 물들었던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첫 자리에 두고 새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회개란 낡은 인간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는”(에페 4,22-24) 것입니다.
이 시기에 강조하는 기도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인의 특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앙인이 기도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그의 믿음은 약화되고 메마른 생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항상 새로운 힘을 얻고 세상의 온갖 유혹 속에서도 하느님의 방식으로 올바로 살 수 있는 은총과 힘을 얻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과 이웃, 일상적인 생활과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웃사랑인 자선은 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재산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필요 이상의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몫일 것입니다. 자선은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베푸는 사람에게도 내적인 풍요로움을 안겨줍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눔으로써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또한 사순 시기에 신자들은 금식과 금육제를 지킵니다. 신자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절제하는 금식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고통과 사랑을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이웃이 겪는 고통과 아픔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구조 조정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금식을 통해서 모은 재화를 주위에 있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실직자나 노숙자, 북한 동포와 외국인 노동자 등과 나눔으로써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70일 후면, 우리는 주님의 부활축제를 맞이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순 시기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금년의 부활축일이 갖는 의미는 각각 다를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축제에 온전히 동참하기 위해서 사순 시기에 기도와 회개, 자선과 금식을 통해 주님과 이웃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며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사순 시기의 여정에 참여하고 있는 교형 자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남북한에 있는 우리 민족 모두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이 골고루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1년 사순 시기를 맞이하면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 진 석 대주교
12. 사순절 교황 담화문 요약 :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1.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마르 10,33) .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도 함께 길을 떠나자고 초대하신다. 그 길은 갈릴래아에서 출발해 주님께서 구원 사명을 완수하시게 될 장소에 이르는 길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주님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며,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깊이 참여하기 알맞은 때인 사순 시기에 특별히 초대를 하신다. 이런 초대를 받은 우리는 이 사순시기에 주님께서 섭리하시는 은혜로서, 우리 내부로 시선을 돌려 우리 안에 울리는 그 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야한다.
2.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고도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방해받지 않으려고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어라?(루가 6, 27)는 말씀을 흘려버리거나 무시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용서와 화해가 진정한 인간적 쇄신과 사회적 쇄신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 이는 대인 관계뿐 아니라, 공동체와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3. 종교적 오해. 민족들 사이의 증오와 폭력, 파벌간 갈등 등에서 비롯되는 인류를 괴롭히는 수많은 비극적 갈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력감을 갖게 하고,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평화에 대한 염원을 저버리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그런 까닭에 대희년에 교회와 교회의 자녀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소리 높이 하느님께 용서를 청했다. 회개하는 얼굴에서 악을 생각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신뢰할 때,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 길로 되돌아갈 수 있다.
4.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용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4-45 참조)는 말씀을 잊지 말자. 자신의 마음을 돌려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길을 가려면 내적 회개를 경험해야 하며 예수님의 명령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시대에 용서는 진정한 사회 쇄신과 세계 평화 증진을 위해 그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는 다소 힘들지만 희망으로 가득한 방식이다.
5.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1 (1고린 13,5). 사순시기는 사랑을 실천하는 고귀한 형태인 용서라는 덕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고해성사를 통하여 성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주시는 용서로 우리는 사랑 안에 살아가게 되고 다른 이들을 형제로 여기게 된다. 참회와 화해의 이 사순 시기에, 신자들은 진정한 사랑의 표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하며, 이러한 마음의 태도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갈라 5,22 참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마음으로 물질적 도움을 주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마음은 관대한 마음이다. 이 거룩한 사순 시기에,「베품」은 깊은 의미를 지닌다. 수많은 형제 자매들의 고통스러운 얼굴과 비참한 상황을 바라볼 때, 우리는 가진 것의 일부만이라도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행동으로 친교와 연대의 증인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사순 시기에 주님에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기 바란다. 기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은 주님의 자비를 체험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즐거이 또 아낌없이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2001년 1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3. 사순절 : 세례준비로서의 사순절
교회의 전례 중 부활절 다음으로 가장 역사가 깃은 사순절의 근본 취지는 세례와 속죄와 주의 수난이라는 세 가지가 주된 주제였다.
첫째 사순절은 세례 준비자들의 결정적 준비기간으로 당시 성인예비신자들은 2-3년의 예비기간이 지난 다음 사순절동안에 본격적으로 재를 지키면서 부활전야의 세례를 준비했다
이때에는 일반 신자들도 그들과 함께 다시 교리교육을 받으며, 재를 지키면서 세례 때의 맹세를 갱신했다.
둘째로는 공동 속죄자들의 보속 기간이다. 초세기에는 공공연하게 중죄를 범한 자는 일생에 한번만 사죄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와 같이 파문당한 죄인은 사순절 동안 고행의 옷을 입고 속죄자 모임에 참가하여 교회가 지정한 엄격한 속죄의 고행을 해야 했다.
그래야만 성목요일 아침 화해의 예식을 거쳐 사죄를 받고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세째 사순절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여 우리 신앙생활의 쇄신을 이루는 기간으로, 사순 시기 동안 육체적 극기를 통해 주님의 수난에 동참한다. 구원의 신비를 앞두고 자발적인 기도와 고행, 애덕의 실천으로 생활을 반성하고 자신의 내적 쇄신을 위해 노력하도록 설정된 기간이 바로 사순절이다. 이 때문에 사순시기는 전 신자들의 피정기간이자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정화하는 시기인 것이다.
이 세가지 주제 중에서도 사순절은 먼저 세례 준비기간으로서 강조되어왔다. 오랫동안 예비신자의 상태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자들이 사순절 시초에 등록을 하고 선발자(electi)의 대열에 들게 된다.
이때가 예비신자의 마지막 단계이자 최종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청하는 지를 돌아보는 시기이기도 하다.
선발예식은 사순 제1주일에 치르는데, 이때부터 예비신자들은 일반적인 공동체의 공적인 경신례 중에서 가르칠 순 없었던 특수한 수업을 받았다.
로마에서는 그들에게 4복음서와 신경, 그리고 주님의 기도문을 화려한 축제를 통하여 수여하고, 그 기도들과 친숙하게 했다.
이 세가지 교육과정은 외교인들에게는 공개해서는 안되며, 영세한 자들만이 공적으로 하던 기도였으므로, 이제 곧 세례를 받을 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이 수여식은 3-5주일에 행해지는데 수여식의 목적은 정신과 마음을 정화하고 죄의 유혹을 뿌리칠만한 힘을 기르고 지향을 바꾸며 의지를 단련함으로써 예비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더욱 깊이 결합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노력이 더욱 진보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순 제3주간 평일에는 신경을 수여하고, 사순 제5주간 평일에는 주님의 기도를 수여했다.
예비신자들이 결혼을 하였다면 이들은 사순시기 동안 모두 자제 속에서 금욕을 해야 했다. 또한 예비신자들은 목욕이 허락되지 않았고 저녁 때까지 매일 완전한 단식을 해야했다.
무엇보다 예비신자들을 열렬한 기도를 실천해야 했으며, 과거의 모든 죄를 성실하게 통회해야했다.
예비신자들은 성당 안에서 신자들과 격리되었고, 공복재를 지키고, 주교로부터 계속 권고를 받아야 했다. 예비신자들은 마지 막 목요일에서야 단식을 중단했고, 목욕을 했다.
세례성사는 부활전야 장엄예절 때 거행됐는데, 이러한 세례준비기로서의 사순시기 성격은 전례헌장 109항에 잘 나타나 있다.
「사순시기는 두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무엇보다도 세례의 회상과 세례의 준비를 통해서, 또한 다른 편으로는 보속을 통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여느 때 보다 더 큰 열성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에 전념하면서, 빠스카 신비의 경축을 준비하게 한다. 따라서 전례에 있어서나 전례교육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성격을 더욱 현저하게 드러내야 한다?
14. 사순절에 생각한다 : 온 몸이 상처, 피 투성이신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본다. 가시관을 쓰시고 은 몸이 상처투성, 피투성이 되신 예수님 얼굴은 형리들의 주먹질로 인한 타박상으로 일그러진 채 고개를 숙이시고 눈감으신 예수님‥‥ 이 비참한 죽음은 과연 무엇을 보여 주고 무엇을 말해 주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 주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시는 분이시다. 목숨을 내어놓는 것은 전부를 내어놓음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당신을 전부 남김없이 우리에게 내어놓으시는 분이시다. 사랑으로‥‥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에는 하느님의 목숨이 걸려 있다. 나의 인생에는 하느님의 목숨까지 다하시는 정성이 담겨 있다. 이처럼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일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요한I 4,16)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예수님의 죽음만큼 잘 드러내는 모습은 없다. 하느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아끼시는지를, 우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 지를 예수님의 죽음만큼 뚜렷이 보여 주는 것은 없다.
과연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예수님의 죽음은 가장 아름답게 보여 준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드러남」,하느님 사랑의 「절대적인 계시(啓示)」인 것이다.
참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하느님 사랑이 압축되어 있고, 그리스도교 신앙이 농축되어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하느님의 죽음을 맞이하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모순을 실현케 한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원래 당신에게 불가능하고 모순이 되는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써 당신이 얼마나 진정으로 사랑이신지를 보여 주셨다.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에 드러난 하느님사랑, 특히 그분의 죽음에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영원히 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그 은혜를 영원히 다 갚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신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은혜를 천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힘쓴다. 한편생, 끊임없이 ‥‥ 이것이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단 하나의 이유이자 목적인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바치신 분을 하느님으로 모시게 된 것을 영원히 감사해야 한다. 우리를 당신의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시는 분을 하느님으로 모시게 된 것을 한없이 고마워해야 한다. 만약 이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깨달았다면, 우리는 어떤 고통과 역경을 겪는다 해도 하느님께 오로지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이다.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무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역경 속에 하느님 사랑을 믿기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 어떠한 고통과 역경 속에도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의 목숨만큼 사랑하고
계심을 우리가 의심하지 않도록 하느님은 목숨을 바치신 것이다.
하느님 사랑은 예수님의 죽음이란 고통으로 드러났듯이,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모양의 고통으로 드러난다. 하느님 사랑은 고통이란 「베일」로 덮인 채 주어진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고통과 역경 안에 하느님 사랑을 보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더 복된 사람이다.
한 걸음 나아가, 고통과 역경을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시로 감사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성인이다.
우리가 믿는 종교가「십자가의 종교」이며 우리가 모시는 구세주가「십자가의 예수님」이심을 거듭 거듭 자기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하느님이 당신의 고통과 죽음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두고두고 감사해야 한다.
15. 사순시기 ( 유혹, 변모, 갈증, 소경 )
사순시기의 성격 :—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을 통하여, 사순시기 전례의 특성을 제시하고 있다.
“사순절은 두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무엇보다도 성세의 회상과 성세의 준비를 통해서/ 또한 다른 편으로는 보속을 통해서/ 신자들로하여금 여느 때보다도 더 큰 열성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에 전념하면서, 빠스카 신비의 경축을 준비케 한다.
따라서 전례에 있어서나 전례 교육에 있어서, 이 두가지성격을 더욱 현저하게 드러내야한다”
(전례헌장 109항) .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될 것입니다”(사도 2:38) .
사도 베드로의 외침에 따라 모였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그리스도교는, 세례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세례받은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새로 태어나고, 죽을 때가지 회개와 보속과 기도와 사랑의 실천에 힘써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사순시기의 주일에 특별히 강조되고 있고, 주일 복음은 이를 뒷받침하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사순 제1주일은 : 광야에서 단식하고 유혹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마태 4:1-11). 감사송은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쩨서 “사순절의 재계양식을 마련하시고, 악의 세력을 극복하도록 가르치셨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올바른 정신으로 빠스카 축제를 지내며, 마침내 영윈한 빠스카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음을 감사하고 있다.
따라서 사순 제1주일은, 그리스도의 4가지 싸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즉, 광야, 단식, 굶주림, 유혹의 싸움이다. 이어서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는 빠스카 신비를 간직한 부활축제의 한 전주곡인 셈이다.
사순 제2주일은 : 빠스카 신비를 좀더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즉,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전해준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처음으로 자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설명하셨다(마태 16:21-23). 그러나 오늘 복음의 그리스도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광에 이르는 과정임을 가르쳐 준다.
신자들이 빠스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영광에 동참한다는 뜻이며, 영광과 은총을 얻기 위하여, 고통과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렇게 사순절 첫주일과 둘째 주일은/ 빠스카 신비가 우리 신자생활의 길이요 목표임을 명시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필요한 힘과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한다.
그 다음 사순 제3주일과 4-5주일은 : 물과 세례, 회개가 중심을 이루는 복음으로 이루워 진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에 있는 야곱의 우물 옆에서, 물을 길으러 나온 여자와 대화하셨다.
사순 제3주일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물임을 깨닫도록 하신다.
예수께서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3-14) .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좀더 신학적으로 설명하였다.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로마 5:6).
그러므로 우리는, 본기도에서 재계와 기도와 희사를 죄를 사하는 방법으로 보여주신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며, 자비로이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참회 고행의 날 : ‥‥‥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하느님의 법률에 의하여, 가가 나름대로 참회와 고행을 하여야 하지만, 모든 신자들이 어떤 공동적인 참회 고행의 실행으로 서로 결합되도록, 참회 고행의 날이 규정된다. 이런 날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특별한 방식으로 기도에 몰두하고 신심과 애덕의 사업을 실행하며, 또한 자기들의 고유한 의무를 더욱 충실히 완수하고, 특히 아래의 교회법 조문들의 규범에 따라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들을 극기하여야 한다”(교회법 제 1249조).
모든 신자들이 참회고행을 해야한다는 것은/ 사적인 의무인 동시에, 하느님 백성 전체의 일치된 행위이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전례헌장 제 110항에서도/ 보속은 단지 개인적인 생활영역에서만 행하는 것이 아니고, 공적이며 사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사순절의 보속은, 다만 내적이고 개인적이어서는 아니 되며, 동시에 외적이요 사회적이기도 해야한다. 보속의 관행은, 우리 시대와 각 지방에서의 실천 가능성 및 신자들의 처지를 참작해서 조장되고, 제22조에 명기된 당국에 의해 장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빠스카 대재는, 주의 수난과 죽으심의 성금요일에 어디서나 지켜야 하며, 합당하다고 생각되면, 성토요일까지 연장하여, 고상하고 감수적인 심정으로 주의 부활의 즐거움에 다다르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을 교회법 제1251조(:연중 매 금요일의 금육 /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의 금식 및 금육에 관한 규정)일의 금식 및 금육에 관한 규정)제1252조 (:- 만 14세에서 60세 시초까지 지켜야 할 금육, 금식재의 규정)
제1253조 (:-금육, 금식재의 준수와 참회 고행, 특히 애덕 사업과 심신수련으로의 대체에 관한규정)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지난 1989년 10월 19일 추계 정기총회를 마치면서, 모든 신자들이 교회법전의 규정을 다 지켜야 한다고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그중 금육재 관면 취소 내용도 들어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전교지역으로서 빈곤한 경제사정과 노동계의 형편 등을 고려하여, 주일 파공과 금육재를 관면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한국은, 국력이 신장되고 교회도 성숙한 교회로 성장,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주일 파공과 금육재 관면을 취소하고, 이에 관한 교회 공법을 준수하여야 할 것입니다”(주일과공과 금육재 관면 취소에 즈음한 담화문) .
앞으로 주일에는, 예배의 몸과 마음에 필요한 휴식을 방해하는 노동이나 사업을 삼가해야 한다. 그리고 연중 모든 금요일에는, 어느 대축일과 겹치지 않는 한 육식을 자제해야 한다.
16. 사순절의 의미와 자세 :
( 재의수요일부터 성목요일 미사전까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묵상하며, 영과스러운 부활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2월 28일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재의 수요일이다. 이날로부터 성목요일 주님의 만찬 저녁 미사 전까지, 즉 4월 12일까지가 바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회개와 기도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전세계의 모든 가롤릭 신자들은 부활의 참된 기쁨과 환희에 이르기 위해서, 나약한 인간인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보속의 행위를 하며, 겸손하게 기도와 자선과 희생을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시기를 기다리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를 기리는 대림과 성탄에 버금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때이며, 그런 만큼 우리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기도와 전례 생활에 충실해야하며, 사랑의 실천과 나눔에도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주님 성탄 대축일을「범국가적」으로 들뜬 분위기 속에서 더 큰 축제로 잘못 이해하는 경향도 없지 않으나, 사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부활 대축일을 향한 준비기간으로서의 사순 시기는 전례적으로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성탄에 못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사순시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로마 8,17)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을 명심해야한다. 이 시기에 강조되는 고행과 단식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의 파스카신비와 연결될 때 참된 의미를 갖는다.
즉 그리스도가 인류 구원이라는 위업을 이루기 위해서 수난과 죽음을 겪었듯이, 그리스도인들 역시 각자의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할 때 그 영광에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순시기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집중적으로 묵상하고, 이를 생활 속에 구현하는 시기이며, 따라서 사순시기는 그저 주님의 고통과 죽음만을 슬퍼하는 시기가 아니라, 참된 구원의 기쁜 소식인 부활의 영광에 비추어 고통과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자선 없는 단식은 무의미
사순시기에는 회개와 자선의 행위로서 단식을 실천한다. 단식은 기도를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자선과 연계되지 않은 단식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가르쳐진다. 따라서 사순절은 단식 등 자기 희생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과의 나눔, 사랑을 구체적으로 행하는 의미로서의 자선을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교회는 사순시기 때마다 전체 교회 차원에서 또는 본당이나 각 단체 차원에서 다양한 형태의 모금운동을 펼치고, 각 가정에서나 주일학교 어린이들은 사순절 저금통을 마련해 40일 동안 희생한 것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랑의 실천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사순시기의 또 하나 중요한 가르침은 회개이다. 훼손된 하느님과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를 본래대로 회복하는 것이 바로 회개라고 할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올해 사순절 담화문에서 사순시기를 맞아 우리에게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회개의 초대를 강조했다. 교황은 이 담화에서 개인만 아니라 공동체와 국가 간에서도 회개와 용서만이 평화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당부하고 있다.
교황은 부당하게 모욕을 받고 공격을 당했다고 생각할 때에도,「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마태오 복음 5장의 말씀을 강조하면서, 이를 실제로 행하라고 권고했다.
따라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시기가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해줌으로써 참된 평화 건설에의 기초를 놓는 시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와 정신은 우리 매일의 일상 안에서 그대로 실천돼야 한다.
사순시기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실천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식하고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내가 잘못한 것에 용서를 청하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꺼이 용서함으로써 참된 평화를 가정과 사회 안에서 건설할 때, 사순절의 고통과 죽음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순절이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 안에서 특별한 전례적 의미를 지니는 이 시기가 전통으로 서서히 자리잡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40일의 정화 기간
동방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금요일과 토요일의 엄격한 단식 이전에 덜 엄격한 단식을 하며, 부활 대축일을 며칠 동안 준비하는 관행이 있었다. 니체아 공의회 역시 부활 이전 40일 동안의 준비 기간이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을 제외하면 6주간은 정확히 40일이 된다. 40이란 숫자는 성서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가지는 정화의 기간을 뜻하는 상징적 숫자이다. 즉 이스라엘의 40년 동안의 시나이 사막에서의 방랑,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동안의 단식, 그리스도의 40일 동안의 단식 등이다.
처음부터 부활 축제 준비 기간으로서의 40일이 오늘날과 같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부활축제는 본래 부활전야제, 즉 토요일 밤에 시작해서 일요일까지 거행됐다. 그런데 4세기부터 성삼일이 생겨났고 이 후 성서 상에서 성스러운 준비기간으로 증언하고 있는 40일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재의 수요일
사순 첫 주 이전의 수요일부터 단식이 시작됐으며, 이로써 사순절의 시작이 재의 수요일이 되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사순 제1주일 전 수요일에, 재의 수요일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교회가 이 날 미사 중에 참회의 상징으로 재의 축성과 재률 머리에 얹는 예식을 행하는데서 생겨났다.
머리에 재를 얹는 행위는 참회와 슬픔을 나타내는 것으로, 구약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초대교회에서도 이러한 관행은 자주 개인적으로 행해졌다. 이것이 10세기경에 로마로 들어왔고, 11세기말경 공의회에서 재의 수요일에 모든 신자들이 머리에 재를 얹는 것으로 전례에 도입됐다.
교황 성 그레고리오 1세는 재의 수요일을 사순절 첫날로 선언했고, 바오로 6세는 이날 전세계 교회가 단식과 금육을 지킬 것을 명했다.
단식과 금육
과거에는 연중 매 금요일과 사순절 토요일 그리고 재의 수요일에는 금육재를 지키고, 사순절 동안에는 매일 단식재를 지켜야 하는 등 규정이 까다로웠다.
그러나 현 교회법에 따르면 대축일이 아닌 연중 모든 금요일과 사순절을 참회 고행의 시기로 규정(1250조)하고 있으며, 대축일이 아닌 모든 금요일에는 금육재를 지키고,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은 금육과 금식재를 함께 지켜야 한다(1251조). 금육재는 만 14세를 넘은 이는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며, 금식재는 만18세부터 60세 시작(환갑날)까지 지켜야 한다. (1251조) 이외에도 사목자와 부모는,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킬 의무가 없는 미성년자들 역시 참회 고행의 의미를 깨닫도록 보살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7. 사순절 : (가) 예수님의 죽음에 감동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김보록 신부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요한 15, 13).
예수님은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하신다. 목숨을 바치라고 가르치시고, 몸소 실천하신 예수님의 죽음만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다.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람이라 해도, 예수님의 죽음을 똑바로 보고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완고하고 고집 센 사람이라 해도,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볼 때는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이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의 잔인한 마음을 부수고, 완고한 마음을 녹이고, 고집 센 마음을 부드럽게 하려고 하신 그분의 간절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이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당신의 사랑으로 끌어당기시려는, 하느님의 「눈물겨운」노력을 볼 수 있다.
이 하느님의 간절한 마음과 눈물겨운 노력을 헤아릴 때 사람은 마음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감동, 감격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부끄럽고 죄송스럽게 느끼게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목숨까지 몽땅 내어놓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께 아무 것도 내어놓지 못했음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이 감동, 감격은 사람으로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로 몰아넣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의 원인은 우리의 죄였으며, 죄로 인하여 예수님께 끊임없이 죽음의 고통을 일으켜드리고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감동, 감격으로 사람은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마음의 밑바닥에서 변화되고 온전한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감동. 감격이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바치고 모든 일에 사랑을 행하는 완덕
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감동, 감격은 참 소중하다. 막상 피려는 꽃 한 송이를 보고 감동하고, 아기의 웃는 얼굴을 보고 감격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는 것 ‥‥ 감동, 감격함으로써 생명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신선함을 만끽하고 삶의 의욕과 희망을 유지할 수 있다. 요즈음 사람은 감동, 감격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다.
감동. 감격하지 않으면 마음이 차가워지고 바싹 말라버린다. 자기 만족을 채우는 데에 급급해지고 행동을 타산과 요령과 체면을 하게된다.
세상의 진선미(眞善美) ,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에 감동, 감격하는 마음을 기르고 심화시키면서 마침내 예수님의 모습에 감동, 감격하기에 이르러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진선미는 결국 예수님 안에 농축되어 있으며 모든 진선미에 대한 감동. 감격은 예수님께 대한 감동, 감격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참으로 예수님의 모습에 감동, 감격해서야 비로소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참 보람과 살아가는 참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이 감동, 감격
과 비교하면 다른 모든 감동, 감격은 어느새 지나가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하다.
예수님께 대한 감동, 감격 없이 다른 모든 감동. 감격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결국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에 감동. 감격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는 것이다.
18. 사순절 특강 : 십자가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고통을 견뎌내야
김영남 신부
그리스도 수난과 세상의 고통 그리고 교회
하느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면 도대체 세상의 고통은 왜 있는가?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창세기 3장을 근거로 고통의 원인은 아담의 죄로 시작됐다고 본다. 아담의 불순종의 죄(원죄)로 인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 죄에 대한 벌로 고통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해석이다.
그런데 “세상의 여러 고통들은 직․간접적인 죄의 결과”라는 구약성서의 일반적 이해는 고통에 관한 모든 문제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러한 도식적 설명으로는 인류 역사에서 그토록 자주 발생하는 ‘무죄한 이들의 고통’이 제기하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상당수의 경우 죄를 지은 사람과 그 죄의 결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이 다르다.
또 홍수, 지진, 가뭄 등 인간의 자유의지와 무관한 고통도 엄연히 존재한다,
무죄한 이들의 고통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전능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의지로 당신의 사랑을 깨닫고 살아가도록 이끌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신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역시 하느님께서 왜 그런 방법을 택하셨는지 그 이유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고통 문제는 명쾌한 논리로 설명이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고통에 대해 성서는 논리적 설명이 아닌, ‘증언’을 하고 있다. 성서는 신앙인들이 겪은 고통과 그 고통 속에서 만난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그 고통에서의 해방을 증언하고 있다.
성서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고통을 원하시는 잔인한 분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고통까지 함께 나누시려는 이런 ‘사랑의 하느님상’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에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우리는 고통문제에 대한 ‘하느님? 해결방식’을 분명히 본다. 그분의 백성인 교회는 이 방법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그 방법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분 예수님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고통을 견디어 내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굳센 믿음의 자세를 보여준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2고린 4,8-10)
19. 사순 제1주일 마태 4,1-11 (가) 유혹의 갈림길에 선 인간,
이근영 신부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끊임없는 갈림길에서 결단해야만 합니다. 아마 이 결단은 생명이 부지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헤라클레스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영웅적이었으며, 어떠한 큰 고난에 직면해도 물러설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용감하던 그도 중대한 결정을 앞에 놓고는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번민은 두 요정의 인도함에 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요정이 이끄는 길은 지금 당장 그가 그녀의 친구가 되면, 백화만발한 길로 인도되어 호의호식하며 맘대로 육욕을 취할 수 있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가시밭과 고통의 길을 걸어야 하지만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두 요정의 길을 결단해야만 하는 헤라클레스의 번민은 오늘날 우리들의 번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유혹 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원조들이 저지른 죄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강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받아야 할 유혹을 몸소 체험하시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우리에게 당신을 따라야 됨을 가르치십니다. 마귀는 인간의 약점인 물질적 탐욕과 권세욕과 교묘한 타협으로 예수를 유혹합니다.
첫 번째 유혹인 기아는 물질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은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존재하기 위하여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먹기 위하여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먹는 것이 인간 존재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한때 전교에 큰 차질을 가져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구호품이 외국으로부터 우리 교회에 계속 들어 왔습니다. 이 구호품은 수많은 신자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6.25로 인한 재난이 복구되어감에 따라 그 많던 신자들도 구호품과 함께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물질적인 것은 영속성이 없고 영원한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물질적인 것보다 영신적인 것을 추구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썩어 없어질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인 권세욕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모든 권위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법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은 모든 법의 원천인 하느님께 의탁해야만 심부름꾼으로서의 본분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몰지각한 통치자들은 그들 자신의 야심을 마치 주님의 뜻인양 위장하고있습니다. 이들은 양의 탈을 쓴 이리에 불과합니다. 주님의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권위를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게쎄마니 동산에서 또 다시 이 유혹을 당하셨습니다. 마귀는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시는 주님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하며 감언이설로 유혹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최후의 결단인 갈림길에서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멀리 하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로써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뜻대로 하시지 않으시고 성부의 뜻대로 그 사명을 완수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교묘한 타협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악을 타협으로 이길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세상과의 비타협적 엄격성을 요구하시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굽실거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에게로 들어 올려야 합니다. 세 번째 유혹인 타협에서 주님은 세속의 어떠한 매수도 인기전술로, 타협도 다 거부하시고 오직 당신을 송두리째 성부의 뜻에 맡기심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은 비록 우리가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해도 하느님의 뜻에 마음을 둔다면 유혹에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유혹을 받습니다. 그것은 마치 헤라클레스의 번민과도 같습니다. 그 유혹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방황 속에서 확고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확고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만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집과 너의 아내와 가진 것 모두를 버려야 된다”는 말씀은 수난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세속의 쾌락을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어기고 일시적 부귀 영화와 쾌락을 추구하는 눈먼 사람은 잠시 동안에는 호의 호식하면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겠지만 마침내 완전히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따르고, 선을 추구하는 길은 모멸과 가시밭의 연속입니다만 그 길이 끝나는 날에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될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갈래 길의 기로선상에 선 우리들은 항상 깨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이 기도하는 생활을 영위한다면 어떤 유혹을 당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바로 은총의 시기요, 구원의 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깨어 기도합시다. 아멘.
20. 사순 제1주일 마태 4,1-11 (가) 유혹을 받으신 예수,
강근신 신부
오늘 복음성경은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후 곧 성령에 의해 광야에 이끌려가 40일간 단식을 하시며 기도를 드린 후 마귀의 유혹을 받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에 대해 잠시 생각하여 봅시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유혹은 40일간의 단식으로 허기지신 예수님께 “당신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시오”하는 유혹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빵 즉 인간의 본능을 만족시켜 주는 쾌락이 더 중요하느냐 아니면 정신이 더 중요하느냐 즉 육체냐, 영혼이냐 하는 문제에 고민을 하게 됩니다. 제가 며칠동안 가정방문을 하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먹고살기에 바빠서 신앙생활을 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육신의 평안함, 배부름, 물질적인 것 등을 생각한 후에 영신적인 것이나 영혼에 관한 것을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영신적인 문제나 영혼에 관한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육신의 쾌락만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유혹에서 예수님께서는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심으로써 육신적인 것, 지상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 영신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신의 생명이나 재산을 멸시하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지상에 살고있는 한 이것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히려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잘 살아야 되겠습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그러나 지상적인 것 때문에 하느님의 것을 잃어버린다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으로써 하느님을 시험해 보는 유혹입니다. 우리도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느님을 시험해 보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술집 앞을 지나게 되면 꼭 술을 마시게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루러 그 앞을 지나면서 주님! 오늘만큼은 술을 먹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한다든지 또 어떤 사람은 한 평생 그럭저럭 살다가 죽을 때쯤에서 회개․통회하고 열심히 살면은 하느님이 설마 지옥에 보내시려고…… 하는 등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느님을 상대로 시험해 보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네, 주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도록 조심하기로 합시다.
세 번째 유혹은 권세와 명예에 관한 유혹입니다. 마귀는 세상의 모든 왕국을 보이며 내게 절하면 저 모든 왕국을 다스릴 권세와 명예를 주겠소 하고 유혹을 하였습니다. 권세라는 것은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느님의 뜻대로 권세를 쓰려고 하지 않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즉 권세를 이용하여 자기 사리사욕을 채움이 나쁜 것입니다.
참으로 권세에는 끊을 수 없는 매력이 있나 봅니다. 그러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권세를 잡게 되면 권세의 매력에 취해서 그만 둘 생각을 못하고 발버둥치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권세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마귀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주님이신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신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당하는 평범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악 둘 중에 하나를 택하셔야 됐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선, 악의 쌍갈래길에서 어느 하나만을 택하여야 됩니다. 즉 영원한 삶으로 가는 선이냐, 아니면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악이냐 둘 중 하나만을 택하여야 됩니다. 누구도 이 길을 피하거나 타협하여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유혹 자체는 죄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유혹에 우리가 동의한다거나 빠져든다면 죄가 되고 동의를 안하고 물리친다면 오히려 공로가 됩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가 쉽게 유혹에 걸려들도록 별 수단을 다 씁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겠으며 특별히 이 사순절 동안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형태의 유혹을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며 물리쳐 보다 더 열심히 살기로 노력합시다.
21. 사순 제1주일 마태 4, 1-11 (가) 사순절을 맞으면서
마태오 복음 5장 1-16절의 말씀은 하느님 백성의 내적 생활과 외적 생활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즉 1-12절의 내용은 안으로는 온전한 마음, 통회, 온유, 의(義)의 사모, 긍휼, 평화, 정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고, 13-16절의 내용은 밖으로는 부패한 세상에 대하여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크리스천의 세상에 대한 관계, 지위, 입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히 소금과 빛이라 하신 것은 크리스천의 가치가 귀하고 그 임무가 크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하늘의 복이 있다」(10절)고 색다른 인간의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고통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생 가운데 가장 값있는, 하늘이 가장 값지게 인정하는 인생의 고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전서 2장 20절에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로 영광스러울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으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정의가 없어지면 자멸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옳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세상은 핍박의 몽둥이와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은 이 세상이 악한 마귀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절대의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 당연한 운명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복음 1장 5절)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에 커다란 위안을 안고 이 세대를 위해 인류의 고난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이 거룩한 사순절에 우리는 인류의 부활을 힘차게 악에 도전할 것을 굳게 다짐해 보지 않으렵니까? 보십시오! 공자 상받은 일 없고, 석가모니 상 받은 일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렸고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습니다. 신라 망할 때 바른 말을 했다면 마의태자보다 더한 사람 없었건만 결국 그는 금강산 골짜기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이조에 들어와 바른말 한 사람이 있다면 사육신(死六臣) 생육신(生六臣)이겠는데 그들의 운명 또한 어떠했습니까?
이와 같이 예나 지금이나 진실된 말에는 상이 없는가 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상을 받지 말라고……. 땅에서 상받으면 하늘에서 상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네 가슴에 훈장 채워주마. 내 머리에 네가 관을 씌워라”하는 것은 썩어질 족(族)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인간의 보통 경험은 기쁨으로 출발하여 눈물로 끝납니다. 희망에서 시작하여 허무로 마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삶은 자기 부정의 눈물에서 시작하여 기쁨으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 탄식과 고난과 절망에서 시작하여 만족과 용기와 희망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지닌 신비한 기적의 원리입니다.
루가 복음 16장 19-31절까지의 말씀은 부자는 살아있을 동안에 온갖 좋은 것을 마음껏 누렸기에 죽어 상받지 못하고 영원한 벌을 받는 것이었고, 거지 라자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기에 그는 죽어 영원한 복을 차지하였음을 들려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생(生)에 대해 애착이 크고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친 바와 같이 골고타의 언덕을 향해 죽음의 십자가를 지고 몸소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밀 한알이 죽지 않고 끝까지 혼자 살아보려고 애쓰며 발버둥치는 현상은 없을까요?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선 신의도 저버리고 도의(道義)마저도 헌신짝처럼 차버리는 일은 없는지요? 입과 붓으론 정의와 진리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어두운 뒷구석으로 온갖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는 “지킬 박사”는 없는가요?
오늘의 세계의 현실은 정말 물질주의의 극단에 이르렀고 인간의 존엄성은 일락천장(一落天丈)의 형편으로 비인간화의 길로 줄달음치고 있습니다. 정의는 빛을 잃고 그 대신에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있으며 평화는 겉모양으로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부자와 강자가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짓누르는 억압 아래서 질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우리가 가장 강조하고 있는 사랑에 대하여도 말만이 풍성할 뿐이고 실은 시기와 미움이 가득한 이 세상입니다.
사회는 결코 나만을 위하거나, 나의 가족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강하고 배부를 때 그와 반대의 상황에서 괴로워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내가 권력을 누리고 명예를 자랑할 때 그 권력과 명예 때문에 무시를 당하고 때로는 억울하게 희생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또 내가 행복에 겨워 세상을 낙관하여 불로초(불로초)라도 구하고 싶을 때 세상이 너무 슬프고 괴로워 울부짖는 이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는 그 긴 역사에서 사회를 향한 사랑의 행동보다는 전통적 권위를 앞세웠고, 또 신자들 중에서도 부귀와 명예를 가져야만 더 눈에 띄는 인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비천한 이웃을 위해 가난한 신분이었고 억울하게 희생되는 이웃을 위해 몸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적인 면만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모든 상황을 통탄하셨습니다. 그는 무수한 군중들 앞에서 칭송을 받을 때마다 마음속으로는 등뒤로 찾아오는 연약한 여인의 남 모르는 슬픈 호소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천국의 희열은 생각하지만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에는 무관심한 신앙이 아니었던가요? 부활의 환희는 생각하지만 수난의 고통을 생각지 않는 신자들이 아닌가요? 즉 봄에 씨를 뿌려놓고 긴긴 여름의 시간을 게으름으로 보내면서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기다리는 얌치족속들이 아닌가요? 바라는 것은 많지만 대가는 지불하지 않으려는 심사인 것 같습니다.
저 형리들의 포악한 고함소리, 당신을 내리치는 채찍소리, 군중의 아우성, 히히덕거리는 웃음소리, 그 모든 소음이 마치 다른 세계의 일과도 같이 당신은 너무나도 묵묵히 이 무서운 십자가를 지신 채 “골고타”로, 수난의 고개길을 걸어 오르십니다. “골고타”언덕에 서있는 세틀의 십자가가 똑같은 십자가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 지니고 있는 가치는 각각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자체의 효력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개선과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십자가로되 좌도의 십자가는 그의 영원한 멸망을 막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욕하여 그 죄책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도의 십자가는 그 자체에 아무런 가치가 없었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합류함으로써 우도에게 영생에의 부활을 가져왔다고 바로 그리스도께서 증언하셨습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오늘 당신은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요”(루가 23:43)라고……. 이 얼마나 숭고한, 인(仁)과 자비의 사상을 초월한 사랑의 구원사업일까요?
2천년전 팔레스타인의 예수가 가롯 유다에게 배반당하여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들이 검과 몽둥이로 그에게 가해케 된 순간 측근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베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네 칼을 도로 집에 꽂으라. 칼을 쓰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고 일러주십니다. 이같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랑”으로 일관한 그 가르침이었습니다.
동양의 공자가 인(仁)을 강조하고, 석가가 자비(慈悲)를 내세운 반면, 그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 곧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랑으로 그는 일생동안 뭇 사람을 섬겼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크게 되려고 하면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누구든지 주인이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온 것이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과연 그는 비천한 어부들인 그의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는 “섬기는 마음과 몸가짐”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교회 안에 있는 십자가는 불구가 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아니면 응접실 귀퉁이에 놓인 관상목과도 같지 않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이 사회적 사명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책임이건간에 우리는 마치 사회 문제가 또 하나의 다른 분야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그 복잡하고 무거운 과제를 자기 밖의 다른 어느 누가 해야 할 것으로 처리해 버립니다.
우리는 세속을 살고 있습니다. 세속은 욕망의 도가니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세속이 더럽다고 하여 오늘의 과제를 내어 팽개치고 나물 먹고 물 마시던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이 세상의 빛, 소금, 산 위의 성, 촛불, 누룩의 힘 즉 항상 떡가루 속에서 일해야 할 오늘의 현실이 이러하다면 우리의 선열들이 피흘려 쌓아올린 성탑이 허물어질 위경에 놓인 감이 없지 않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오늘의 시대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싹을 돋우듯이, 그리고 소금이 녹아 그 맛을 내고, 초가 녹아 타서 불빛을 발하듯이 스스로를 사회의 밑거름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 한층 가까이할 수 있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크리스천으로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길을 얼마나 가까이하고 살아왔던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언제나 부활의 승리가 동반하듯 우리도 희생이 없이는, 십자가의 가시밭길 없이는 부활의 승리도 있을 수 없음을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없다”라는 크리스천의 인생관을 다시 한번 묵상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22. 사순 제1주일 마태 4, 1-11 (가)
안충석 신부
지난 재의 수요일 우리는 “사람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줄을 생각하라.”고 기구하면서 우리 머리에 재를 받고, 40일 봉재 때인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어떤 큰 일을 앞두고서 힘 자라는 데까지 모든 준비를 잘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이성과 의지를 가진 인간의 행위입니다. 우리의 모범이신 인간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살이를 바치는 준비를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여야 하겠습니까? 전능하지도 무한하지도 못한 한계 지어진 인간이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느님께 꿇어 도움을 청하는 몸가짐과 마음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인간 본래의 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복음 성경에서는 이런 장면을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줍니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서 기구하시며 유혹을 물리치시는 장면은 눈물겹도록 인간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부활절이란 약속된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의 축소판인 사순절에 그리스도처럼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유혹도 바로 그리스도께서 받은 것과 같이 천주 성부의 계획을 포기하고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 편하고 쉬운 악의 길로 바꾸고 싶은 유혹인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어느 누가 뭇 사람의 미움을 받아 저 십자가의 사형수로 죽음을 당하기를 원할 사람은 온 세상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죽일 인간이라 해도 그분은 진리를 말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마귀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나약성을 사정없이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천주의 길은 결국 실제적인 것이 못된다. 너는 백성의 기대를 충족시켜 줌으로써 그들에게 훨씬 더 큰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네 자신도 또한 백성들도 위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라고 속삭입니다.
오늘날 바로 내게도 “야! 집어쳐! 양심이고 신앙이고 진리고 사랑이고 너도 네 식구도 네 백성도 잘 사는 길은 악과 타협하는 적당한 길 뿐이다.”라고 뱀의 혀처럼 내 영혼을 죽이는 독을 뿜고 있습니다.
세상은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기적으로써 그들에게 세속적 권력과 재산을 안겨 줄 구세주를 고대할 것만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돌을 떡이 되게 한다든지 성전 꼭대기에서 아래로 뛰어 내린다든지 하는 것은 아주 단수 높은 유혹의 수법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느끼신 진실한 아주 인간적 욕망을 그대로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오늘날도 이런 수법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쁜 욕망을 이성과 자기 의지로 누르고 있으나 유혹은 조금씩 이 욕망을 끌어올립니다.
처음부터 큰 유혹을 해서 단번에 대죄를 지어 영혼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즉시 본성적으로 놀라 처음부터 물리칠 테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것을 가지고 차츰차츰 맛 들여서 단계적으로 빠지게 하는 유혹 작전을 씁니다. 그래서 우리 양심을 조금씩 늘어뜨리거나 빠뜨려지게 하고 심하게는 나쁜 양심으로 갈아 끼웁니다.
이런 사실이 있었답니다. 아주 높은 감방에 갇힌 어떤 죄수가 도저히 탈옥할 수가 없어서 매일 자기의 긴 머리털을 몇 개씩 뽑아서 창 밖으로 내려보내고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친구가 명주실을 그 머리털 끝에 달아 올려 보냈던 것입니다. 그는 그것으로 노끈을 짜서 다시 내려보내 그 끝에는 아주 튼튼하고 굵은 밧줄을 달아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자! 이 얼마나 교활한 수법입니까? 우리 영혼을 죽이는 유혹도 처음에는 한낱 머리카락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우리 눈에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꼬리 달린 뱀의 유혹은 위와 같은 수법으로 우리 영혼을 죽입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유혹을 크게 두 가지로 살펴봅시다.
그 한가지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하셨듯이 천주 성부의 뜻을 포기하고 우리 자신 내 멋대로 편안하고 쉬운 적당한 길로 바꾸고 싶은 유혹입니다. 즉 제 멋대로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천주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엄청난 사랑의 배신자 유다처럼 자학으로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절망으로 자기 자신을 목매달아 죽은 극단의 이기주의입니다. 번다한 세상악인 유혹에 빠져 신앙과 사랑을 등지고 여봐라는 듯이 사는데, 신앙과 사랑을 간직한 채 나 홀로 걸어가야만 했던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들은 점점 큰 십자가의 짓눌림만 느끼며 또 그들은 우리를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거기에다 나날이 쉴 사이도 없이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빈곤한 생활의 무거운 짐 혹은 그처럼 제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했는데도 그 순수한 사랑이 무참하게도 배반당한 그러한 불행이 겹쳐 짓눌려 올 때 도시 그런 유혹을 우리는 어떻게 견디어내란 말입니까? 주께서 갈바리아 산상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 경건한 부인들이 통곡할 때 주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오직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 바로 이 말씀 속에서 40일 사순절 때 우리가 울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즉 너희들이 통곡해 주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나를 죽음에 부치는 통회할 줄 모르는 인간들을 위해서 울라. 이미 슬픔의 가시로 씌워져 찔릴 대로 찔린 내 가슴에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기쁨의 오아시스가 샘솟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신앙과 사랑 때문에 받는 고통을 조롱하는 악인들에게 “보아라! 나에겐 사랑의 십자가의 평안함이 있다.” 정작 슬프고도 가슴 아플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조금도 통회할 줄 모르고 엇가는 사랑의 대신 행위인 것입니다. 자기만을 내세우고 자기만 아는 사람은 항상 다른 이들의 결점만을 찾아서 비난만을 일삼습니다.
바가지만을 긁는 아낙네, 옹졸한 샌님 또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밉살스러운 사람들, 항상 책임만은 다른 사람에게 그 누구에게 씌우게 마련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막히는 모함을 뒤집어쓰고서 부당하게 당하지만 마음 속 깊이 신앙과 사랑의 힘으로 주님처럼 고통의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당해 나갈 길 없는 고통을 당할지라도 결코 사랑의 십자가만은 잃지 않고 자기와 다른 사람의 벌까지 기워 갚는 짝사랑의 뜨거움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유다와 베드로 두 사도의 경우가 이를 대표적으로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유다는 극단의 이기주의로 결국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저주 속에 제 손으로 목매달았습니다. 즉 그는 끝까지 자기를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께 대한 신뢰하는 입장에서 후회하고 주의 사랑과 자비에 매달려 통회의 눈물로써 더럽혀진 영혼을 다시 깨끗이 씻을 수가 있었습니다.
유혹 그 자체는 결코 죄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충동은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생리적인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런 유혹의 충동에 우리의 자유 의지가 동의하느냐에 따라 죄악이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죄보다 더욱 나쁜 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부정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죄인은 항상 내가 그렇듯이 못잡아 먹겠다고 헐뜯던 바로 그 사람이고 자기 자신만은 항상 천주님 대전에 무죄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과욕 때문에 일년을 하루같이 남들과 싸우다 보면 살 수 없게 됩니다.
지금이 바로 은총의 시기요,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지금은 바로 나에게 가까운 이웃 사람들과 싸우는 때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 싸우는 때입니다. 정말로 나를 죽이는 인간은 내가 사랑할 내게 가까운 인간이 아니라 바로 그들을 못잡아 먹어하는 표독스러운 ‘거짓 자기’란 인간이올시다. 나의 참된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저 감옥이나 철창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묶고 있는 여러 가지 과욕 즉 사치, 허영, 이기심, 권리욕, 명예욕, 물욕, 육욕, 교만 들입니다. 이런 거짓 자기와 피흘리며 싸워서 극기하며 절제하여 오로지 이성과 의지와 양심에 따라 자신의 지나친 과욕과 싸워야만이 피흘리는 십자가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서대문 시립 마약 중독자 수용소엘 구경가 본 적이 있습니다. 아편장이들, 마약의 노예로 참된 자유를 잃고서 철창 속에 갇혀 있는 그들은 정말로 불쌍했습니다. 악에 물든 영혼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나쁜 쾌락과 물질에 빠진 그들은 악의 노예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행복하단 말입니까? 저 길가에서 술이 만취가 되어서 이성을 잃고 알콜의 노예가 된 주정뱅이에게서 여러분은 참된 자유를 볼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우리가 싸울 인간이란 네게 가까운 이웃 사람이 아니라 너무나 과불급으로 온전치 못한 거짓 자기 자신이란 인간임을 40일 봉재 때인 이 사순절 생각 뿐만 아니라 뼈저리게 느끼셔야만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내게 가까운 이웃 사람들을 괴롭히는 엄청나게 엇가는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나를 구하소서. 아멘.”하고 주께서 친히 일러주신 주의 기도를 뜨겁게 열렬히 바치십시다. “영신은 날래나 과연 육신은 연약하도다. 깨어 기구하여 빠지지 않도록 하라.” 아멘.
23. 사순 제1주일 <마태 4,1-11> (가) 주님의 방식대로 살아가게 되기를
이동섭 신부
주님, 또다시 당신의 때가 되었습니다.
저 스스로 주님의 방식대로 살려고 노력했다고 자만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제 삶에서 당신의 길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저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좌절 안에서 바라본 제 모습은 거짓이었습니다. 제게 아픔을 주는 이들에게 거짓을 들어내고 옳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제 껍데기일 뿐 속은 거짓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저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치도 낭비도 하지 않으며 다른 이들보다는 가난하게 살고있다고 자만했습니다. 하지만 제 속은 자기애와 집착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저 스스로 너그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 속은 이들을 향한 미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자신에게는 너그럽기를 바라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너그럽지 못했습니다. 쉽게 분노하고 또 분노한 마음을 쉽게 표현했습니다. 제 마음은 언제나 열려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과 좋은 말과 좋은 일들에만 열려있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과 듣기 싫은 말과 하기 싫은 일들에는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주님, 이렇게 또 당신의 때를 맞이했습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이 제 욕심만을 채우고 잘난 척하며 한 해를 보냈습니다. 세상에서 당신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항상 사랑하라,
감사하라, 용서해라, 겸손하라고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세상에서 바보같이 살라는 말이라고 제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두시면서도 세상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십자가 위에서도 사람들을 향해 구멍 뚫린 손바닥을 펴셨던 당신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움켜쥔 채 주님의 방식대로 살고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고 이렇게 또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치는 군중 속에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틀에서 탈출하여 당신을 바라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움켜쥐었던 것들을 버리고 당신 앞에 빈손으로 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제게 주시는, 구멍 뚫린 펼쳐진 손의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평화롭게 살고 평화를 전하려고 합니다.
언제나 기뻐하고,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언제나 평화롭도록 하겠습니다. 때로는 멸시당하고 때로는 싫은 소리를 듣고, 때로는 오해를 받더라도 주님을 생각하면서 항상 기쁨에 젖을 것입니다. 이번만은 정말로 낮아질 수 있고, 비울 수 있는 사순시기가 되도록 당신처럼 구멍 뚫린 손을 이웃에게 펼치는 삶이 되도록 다시 한번 나약한 결심을 해봅니다.
24. 사순 제1주일 <마태 4,1-11> (가) 제4의 유혹
「파우스트」는 독일의 문호 괴테(1749-1832)가 전생애를 바쳐서 쓴 희곡입니다.
노력하는 사람을 구제하려는 신에 대해 부정적인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유혹할 수 있다고 내기를 겁니다. 온갖 지식에 절망하고 있던 파우스트가 자살하기 직전 악마가 나타나 유혹을 합니다. 악마가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체험하게 해주는 대신 파우스트가 어느 한순간에 대해서 “멈춰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말한다면 영혼을 영원히 악마에게 내어주기로 계약을 맺습니다.
그리하여 20대의 청년으로 젊어진 파우스트는 소녀와 사랑을 하기도 하고, 전설 속의 미녀를 만나 결혼도 합니다. 파우스트는 전공을 세우고 하사받은 불모지를 개발하여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100살이 되었는데 마침내 맹인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심안은 더욱 밝아지고 이렇게 외치면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멈춰서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이 말을 들은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착각하지만 천사들이 파우스트를 천상으로 데려가며 다음과 같은 합창으로 끝납니다.
“모든 회개하는 연약한 자들아/ 구원의 눈초리를 우러러 보라/ 거룩하신 신의 섭리를 따라서/ 감사하며 스스로를 변모시키기 위해/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누구나 받들어 모시는 동정녀요 어머니요 여왕이시여/ 길이길이 베푸소서/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갖 비유일 뿐/ 미칠 수 없는 것 여기서는 실현되고/ 말할 수 없는 것 여기서는 이룩되었네/ 영원한 여성은 우리를 이끌어 올리리라”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하시고 악마의 유혹을 받는 주님의 모습은 파우스트보다 훨씬 소설적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주님을 인간 누구나 지니고 있는 세 가지 욕망 ‘재물과 인기와 권력’을 미끼로 유혹하려는 악마의 모습 역시 메피스토펠레스보다도 훨씬 극적입니다. 악마와 싸우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최대의 교훈은 악마의 실재입니다. 그러나 악마가 던지는 최고의 유혹은 악마 스스로가 외치는 자신의 부재(不在)인 것입니다. 악마는 분명히 실존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하나의 상징일 뿐이라고 끊임없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악마가 없다고 믿지만 악마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느님은 한번도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세가 물었을 때 하느님은 “나는 곧 나다”(출애 3,14)라고 말씀하신 후 “나는 너희들의 하느님 야훼다”(출애 3,15)라고 분명히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악마는 자신의 본성인 거짓말(요한 8,44)을 통해서 ‘나는 곧 없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악마가 ‘자신은 없는 자’라고 정의함으로써 하느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의 동반부재(同伴不在)를 성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0세기의 비극은 악마의 이 거짓말이 하나의 정설이 되어 가공스러운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폭력, 빈곤, 성적 타락 등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악마의 독소가 대유행을 보이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제4의 유혹,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악마는 없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25. 사순 제1주일 <마태 4,1-11> (가) 하느님의 은총
함세웅 신부
오늘의 전례 말씀은 인류의 기원과 타락(제 1독서), 죄와 은총과의 관계(제 2독서), 그리고 죄를 극복해 나가는 방법으로 하느님께 향하기 위하여 자신을 끊어야 함(복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제 1독서(창세기 2,7-9: 3,1-7)는 인간을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 있어서 아담(사람이란 뜻이며 어원적으로는 히브리어의 아다마<흙>에서 파생된 듯함)은 제일 관심사이며, 가장 중요한 걸작품입니다. 사람은 물론 흙으로 창조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을 지녔더라도 지상의 다른 존재와는 달리 새로운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생명의 숨결’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담이란 집합적인 의미로서 전 인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인간이면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보편 공통성을 성서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흙에서 온 인간, 그렇지만 하느님의 숨결을 받은 인간, 이 인간은 별개의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 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다만 이 귀절의 해석이 희랍의 이원론적 사상(특히 아리스토렐레스)의 영향을 받아 육과 영으로 구별되어 알아듣게 되었지만 본래의 의미 및 긍정적인 관점에서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 사실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숨쉬고 있는 나는 누구의 숨결을 받았을까? 숨이 끊어지면 어떻게 되고 어디로 가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여자에게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뱀의 유혹이 있었고 이 유혹과 호기심, 교만 등으로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에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뱀이란 상징적 의미로, 옛 가나안 지방의 우상을 가리킵니다. 이 뱀이 여자를 꾈 때의 질문은 하느님의 올바른 계명을 그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해서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인간은 언제나 사실과는 달리 또는 과장해서, 심지어는 없는 것도 만들어내기까지 하면서 남을 모함하는데, 이 모든 것에 대한 반성 자료로서 성서는 유혹과 범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열매를 먹고 난 아담과 여자는 알몸인 것을 부끄러워하였고 그래서 자신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기만, 하나의 위선, 하나의 가면, 하나의 허위는 언제나 또 다른 기만, 위선, 가면, 허위를 만들어냅니다. 부끄러울 때 그것을 고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은폐하며 숨기고 가립니다.
나는 몇 가지의 옷을 입고 있는가? 아름다운 의복을 입었다고 허위의 내가 감추어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서 사순절의 작업, 진실한 나를 발견하도록 노력합시다.
제 2독서(로마 5, 12-19)의 로마서간의 말씀은 율법과 은총 또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등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생긴 죄악은 은총의 힘으로 회복되며, 아담의 범죄는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으로 보속된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절망이나 좌절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범죄와 잘못을 능가할 자비와 은총의 힘이 인류에게 보장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체적으로 현실을 사는 나에게 이 말씀을 적용시킨다면, 내가 어떠한 역경이나 환난이나 곤경, 고민, 병고 중oil 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은총과 힘을 아울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인간적 지혜만 가지고서는 이해되기 어렵지만, 적어도 우리는 신앙인이기에 이 신비를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부조화, 죽음, 죄, 좌절, 기만, 허위의 존재가 되었지만, 그리스도는 조화, 삶, 은총, 희망, 진실과 올바름을 가져다 주었기에 이 표본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입고 하느님 앞에 깨끗한 신앙인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리스도, 그것은 곧 진흙과, 하느님 생명의 숨결을 의미합니다. 진흙의 아담은 필연코 생명의 그리스도로 변화되고 완성되어야 합니다. 나는 흙의 아담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생명의 그리스도로 존재하는가 스스로 자문해 보면서 은총의 길을 걷기로 다짐합시다
복음(마태오 4, 1-11)은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신 예수님의 행적과 세 가지의 유혹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세 가지 유혹 모두 능력 및 힘에 대한 유혹으로 첫째는 물질에 대한 유혹, 둘째는 기적 및 표징에 대한 유혹, 셋째는 세속적 메시아니즘에 대한 유혹으로, 인간 및 교회가 늘 빠질 수 있는 함정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극복해내셨고, 따라서 신앙인도 그것을 본받아야 함을 가르쳐 주고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되기까지 40년간 사막과 광야에서 유혹에 빠져 걸려 넘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그 실패를 기워 갚기 위하여 스스로 자원하여 광야로 가셨고, 모든 것을 이겨내신 것입니다.
물욕, 금욕, 권력욕, 명예욕, 교만 등 빠지기 쉬운 유혹에 대하여, 마태오 복음은 단연코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리라.” “하느님이 천사를 시켜 시중들게 하리라.” “사탄아, 물러가라! 오직 주님만을 섬기라!”
이 복음의 의미는 예수님의 메시아 사상 즉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일깨워 주는 것으로, 예수님의 행동 원칙은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 기인하여 하느님께로 귀의한다는 것입니다.
사순절 첫 주일인 오늘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진실로 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고 있는지 진실로 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시험하지 않고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는지, 진실로 나는 사탄의 숭배, 우상 숭배를 떨쳐 버리고 주님만을 섬기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사업, 기업, 경제, 교제, 기타 등등의 이유로 부끄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서 사탄을 떨쳐 버리고 그리스도를 입어야 합니다. 절제와 회생을 통하여 이웃을 돕는 사랑을 실천하도록 결심해야겠습니다.
26. 사순절 제1주일 강론 요지 (가) “하느님의 자리 “
오늘은 사순절 제 1주일 입니다.
지난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40일 동안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묵상하며 , 그동안 잘못 살아온 삶과 신앙생활을 반성하고 참회하며 회개합니다. 또한 그 어느 때 보다도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편안함과 안락함을 멀리하고 절제의 생활을 하도록 단식과 금욕을 실천합니다.
특히 이 40일 동안 전세계적으로 시행되는 사순절 운동에 참여하여야 하는데, 이는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처럼 오늘날에도 빈곤과 소외와 불의로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과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운동입니다. 사순절 기간 절제한 것, 단식한 몫, 희생한 것, 잘못한 것을 기워 갚는 정신으로, 각 가정에서 매일 조금씩 모아서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의 수난주일에 봉헌하시면,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을 위하여 일하는 단체를 지원하는데 쓰게 됩니다. 미리미리 준비하셔서, 뜻 있는 봉헌이 되기 바랍니다.
사순절을 쉽게 표현하면, “40일 동안의 피정이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셔서 40일을 지내신 것처럼 , 우리도 비록 몸은 보통 때와 다름없이 일상생활에 종사하지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피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피정은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것이며, 주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도 새롭게 태어남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이 40일 동안, 이 피정기간 동안 우리가 준비와 예비를 잘 하면, 진정 기쁨의 부활을 맞이할 것이며, 그렇지 못한다면 부활대축일은 하나의 연중 행사로서 밖에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 40일 피정인 사순절의 매 주일마다 한 주일을 사시면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실천하실 주제를 드리겠습니다. 사순절 첫째주 묵상주제는 “나의 삶에 있어서, 하느님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가”입니다. 이 주제를 묵상하는 데 알맞는 성서의 말씀이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이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고, 성부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세례 후 예수께서는 요한이 자신의 공적생활을 준비하기 위하여 지냈던 광야로 가셔서, 자신의 소명과 사명에 대하여 준비를 하십니다. 일종의 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성부도 성령도 함께 하시지 않는 고독과 외로움과 혼자만의 결단만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때 유혹자가 나타납니다. 유혹자의 의도는 단 한가지 목적밖에 없습니다.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아버지이신 성부와 영이신 성령으로부터 차단시키고, 당신의 소명과 사명을 망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빵의 유혹은 물질, 돈,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하느님 대신 이들을 삶의 중심에 놓으라는 유혹입니다. 성전에서의 유혹은 명예와 영광과 갈채에 대한 유혹입니다. 하느님 대신 이들을 삶에 중심으로 삼으라는 유혹입니다.
세번째 유혹은, 산꼭대기에서의 유혹인데,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바로 하느님 자리에 이를 앉히라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그 모두가 하느님 자리에 이들을 대신 놓으라는 유혹입니다. 하느님 대신 이들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께 대한 섬김, 하느님을 시험치 않는 일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결단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에덴동산에 살던 최초의 남녀 인간이, 바로 이 유혹자에게 넘어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자리에 자신이 앉으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이와같은 유혹 속에서 삽니다. 이제는 마비가 되어서 이런 것이 유혹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삽니다. 왜냐하면 유혹은 항상 좋은 이유와 정당한 이유로 설득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거절하기가 용이치 않습니다. 또한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는 가지면 가질 수록 더욱 갖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이라는 절제를 하기가 힘이 듭니다. 사실로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는 그 자체로써 악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선용하면 좋은 것이며, 필요한 것이며, 남용하거나 과도히 탐할 때 악과 죄를 불러올 뿐입니다.
예수께서도 이 유혹은 거절하시면서도 그 후에 빵을 많게 한 기적이나, 남을 치유한 능력이나, 예언자 보다 낫다는 칭송을 들으셨습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쓸 때, 그 선한 가치가 드러납니다. 재물은 남을 위하여 써야 하는 것이며, 명예나, 학식이나, 영광도 남을 위하여 바쳐져야 하고, 권세나, 권력도, 남과 공동선을 위하여 봉사할 때 그 선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이 갖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남을 위하여 어떻게 쓸지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이 중요합니다. 이
렇게 잘 쓸 때, 우리는 이들을 섬기는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들을 섬기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 즉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을 하느님 자리에 앉히는 것입니다.
자,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느님보다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을 더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재물도 섬기고 명예나 권력도 추구하면서, 하느님도 섬기는 것은 아닙니까? 하느님의 말씀은 명확하십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출애 20,3)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이 사순절 첫째 주간인 한 주일 동안 “나의 삶에서 하느님 자리는 어디인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 한 주일 동안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아멘.
27. 사순 제 1 주일 (가해) 사순절, 그 광야와 유혹
강길웅 신부
우리는 다시 또 은혜의 사순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이란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40일 동안의 긴 평일을 말하며(주일은 포함되지 않음), 이 ’40’이라는 숫자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단식하신 기간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던 40년을 기억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40’이라는 숫자상 의 의미로는, 부활 대축일을 준비할 수 있는 최대의 숫자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나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제 ‘사순 절’이라는 광야에 들어가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주님을 인도하셨고 아버지께서 직접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셨듯이 주님 은 또 우리를 ‘사순절’이라는 황량한 벌판으로 보내시어 당신을 만나 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 사순 시기를 은혜와 감사로 맞이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절대로 공짜는 아닙니다. 은총을 만나기 위해선 벽을 뚫고 지나가야 하며 높은 산을 올라 넘어가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유혹의 강물을 건너 가셨듯이 우리도 유혹이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우리 나름의 십자가를 이 시기에 새롭게 짊어져야 합니다.
1독서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아담 과 하와에게는 낙원이 거저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영원히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유혹의 도전에 그만 넘어 지게 됩니다. 사탄이 너무도 교활하게 걸고 넘어오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무너지게 됩니다.
오늘 사탄이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 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사탄은 시치미를 떼고 슬쩍 돌려 물어 봄으로써 하와로 하여금 유혹에 말려들게 합니다. 이에 낚시밥에 걸린 아담은 그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헛된 세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눈이 밝아지자 인간의 순수함이 파괴되며 하느님의 모상이 가려지게 됩니다. 하느님이 더 이상 안 보이고 세속만 보입니다. 바로 그 시간부터 인류는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되며 원조들뿐만 아니라 후 손들 모두에게 타락된 본성을 유산으로 물려주게 됩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불러온 것입니다 (야고 1,15).
그야말로,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이 엄청나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낙원의 문은 닫혔고 인간의 평화는 깨졌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 죽음의 길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세상의 미래는 완전히 절망이었으며 그리고 수백만 년 동안 그 비참한 현실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아담이 망가뜨린 세상을 누가 원상으로 복구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40주야를 단식하시며 앞으로 전개될 당신의 전도 여행에 대한 구상을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아담의 무절제한 감정을 단식으로 보속하시며 또 원조들이 걸려 넘어졌던 유혹을 성서의 말씀으로 이겨내십니다.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왔는데 이제 예수 한 사람 때문에 인간은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방법이 아주 놀랍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그 메시아의 길을 알아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기대하는 것이 오로지 빵뿐이요 또한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뿐이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된 소식은 한낱 허구일 수 있으며 또한 철옹성 같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뚫고 지나간다는 것은 불가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빵 문제로 백성에게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을 통해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난다는 복을 가르치셨으며 또 한, 기존 정치 권력이나 종교 세력에 아부하지 않고 핍박받는 길을 스스로 걸어감으로써 십자가나 죽음의 은혜로써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시기에 하느님의 지혜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인간의 지혜로 이기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그 지혜로 이기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들의 교활함과 그 술수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순절이라는 넓은 광야에서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담처럼 자주 헛된 것에만 정신과 관심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에게 가끔 문제되는 유혹이 무엇입니까. 성서를 읽고 하느님의 지혜를 찾읍시다. 그러면 지금부터 부활의 영광을 깊이 체험할 것입니다.
28. 사순 제1주일 마르 1,12-15 (가) 회개
김창석 신부
“나는 아무 죄도 없으니까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과연 그런가?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회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개를 그리스 원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하는데, 성서에 나오는 이 낱말의 뜻은 죄를 뉘우친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에게로 마음의 방향을 돌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까 회개보다는 회심(回心)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물론 죄를 뉘우치기도 해야 하겠지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하느님에게로 마음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한항공 007기가 미리 방향 조정을 제대로 했더라면 불의의 피격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마음의 방향을 가끔 재조정해야 한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무엇을 뉘우쳐야 하나? 우선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공동체의 죄악을 뉘우쳐야 한다. 독일의 유명한 선교사․철학박사․신학박사․음악박사․의학박사였던 알버트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의 밀림 지대에 자원해 가서 흑인 나환자들을 돌보면서 일생을 지낸 사람이다. 슈바이처가 독일 명문 대학의 교수직을 마다하고 아프리카로 간 것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팔아먹고 짐승처럼 학대하는 등 과거 백인들이 저지른 엄청난 죄를 대신 보속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얼마 전 아는 사람이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어서 그의 부인과 함께 찾아갔는데, 교도소 간수가 부인을 마치 죄인처럼 취급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아내는 자신은 아무 죄도 없으면서 죄를 지은 남편 때문에 죄인 취급을 받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도 응분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죄가 없어도 회개하는 것은 순교하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회개하는 그리스도!” 듣기에 이상한 말이다. 이 말은 몇 해 전에 우리나라에 왔던 스페인의 신학자 고메즈가 한 말이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지만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크리스천들의 믿음이다. 하느님에게서 떠나는 것이 죄라면, 그리스도는 그런 죄를 지을 수 없었다는 것이 크리스천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나 죄가 없어야 했던 그리스도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리스도에게 무슨 죄가 있었기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단 말인가. 죄가 없으면서도 죄인인 척하고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세례를 받았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위선자였을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에게는 개인적인 죄는 없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당시의 사회적 죄악을 자기의 죄라고 여기고, 세례자 요한이 주도하는 회개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는 것이 고메즈의 주장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의 독재와 탄압, 로마 총독의 앞잡이 세관원들의 횡포와 착취, 그 밖의 여러 가지 사회적 구조악 – 이 모든 죄악을 그리스도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남들의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죄라고 여기고 회개하였다. 자기도 그 당시 사회악의 일부요, 그 당시 사회악에 대하여 자기도 마땅히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념이었다.
“회개하는 그리스도!”
지금 우리나라 이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악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각자 자기의 죄요 탓이라 여기고 반성하며 회개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엄청나게 큰 사고들이 계속해서 일어나 정신 차릴 겨를이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경찰관이 수사 과정에서 수표를 훔치는가 하면, 스승이 제자를 인질로 하여 돈을 요구하려다 살해하고, 끔찍한 총격 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엄청난 경제 사건과 실직 상태가 국민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다 자체로 끔찍스런 일들이지만, 공교롭게도 정부가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하여 의식 개혁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때에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실망은 더 크지 않은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다.
신문이나 텔레비젼을 보면 모두들 반성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은 한결같이 남들을 보고 반성하라는 논조다.
자기가 먼저 반성해야 한다는 소리는 들을 수가 없다. 서로 ‘네 탓’이라고 남의 가슴만 치고 있다. ‘내 탓’이라고 자기의 가슴을 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웃사람은 아랫사람보고만 잘못했다고 탓하고, 아랫사람은 웃사람이 아니고는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종교인들까지도 현재의 사회악이 다 남의 탓인 양 떠들썩하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남을 탓하고 있는지 모른다.
남북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북한은 다 잘못하고 남한만 다 잘 한단 말인가? 문호 괴테는 말하기를 “남이 나를 쳐부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를 쳐부수는 것이다”고 하였다. 우리는 항상 우리 스스로를 먼저 뉘우쳐야 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회개하는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모두 스스로를 먼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하지 않을까?
가정이나 사회, 그리고 나라의 변화는 남이 아니라 나의 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런 자세에서만 공동체가 잘 되어나갈 수 있다.
공동체는 ‘나’와 ‘너’의 모임이 아니고 ‘우리’의 모임이다. 이 사회, 이 나라가 잘 되려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다 ‘나’를 포함하는 ‘우리’의 문제라고 각자가 생각해야 한다.
며칠 전에 만난 일본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세계 각국을 상대로 무역을 하는 사람인데, 한국 사람은 매우 우수해서 일대일로 맞서면 일본 사람이 당해낼 수 없지만, 여럿이 모이면 자기는 안심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은 모이기만 하면 서로 헐뜯고 단결을 못해서 서로 자멸하고 말기 때문이라 한다.
종
교인들끼리도 마찬가지이다.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 종교인들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매우 우수하고 외국어도 잘 하는데, 창피할 정도로 서로 헐뜯고 뭉치질 못한다.
남에게 손가락질을 하면 둘째 손가락은 상대방을 겨누지만 다른 손가락들은 자기를 겨누고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이 남에게 하는 욕이 결국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우리나라의 속담에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성서에도 그런 말이 있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고 하겠느냐?’(마태 7,3-4)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유혹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행동으로 하느님을 택하고, 헛된 사탄의 약속을 물리쳐 버리라고 귀중한 모범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십니다. 위대한 사업은 항상 엄격한 내적 준비로 시작되는 법입니다. 전 세계를 개혁하실 예수님의 공생활에도 그것에 어울리는 준비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섭리의 계획인 동시에 또 악마가 바라고 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비범하고도 위대한 사명을 띤 위대한 성인들도 기도하고 묵상하기 위해 적막한 땅으로 물러갔었습니다. 거기에는 협박과 감언이설로 그들의 위대한 사명을 좌절시키려고 집요하게 공격해 온 악마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 유혹에서 특히 그리스도인의 인간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예수님의 싸움과 승리는, 우리 도덕생활과 같은 심리적 과정을 거쳐 가고 있습니다. 불신의 유혹 뒤에 갑자기 지나친 믿음의 유혹이 있고 마지막에 오만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 오만은 경계를 늦춘 인간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가장 무서운 함정입니다.
1 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사탄은 히브리말로 반대자, 적, 특히 재판상의 적, 곧 고소인이란 뜻이 있습니다. 유다 후기 신학에서는 악마의 고유명사는 “사마엘”입니다. 사마엘은 본래 제1급 대천사였으나 타락하여 사탄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신학에 따르면 사탄의 우두머리의 소임은 사람을 죄로 유인하는, 죄인을 하느님의 법정에 고소하는, 죄의 벌로서 죽음을 내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의 천사”라고 하는 이름이 나왔다. 그렇다면 이 사탄이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 ☞ 예수님께서 메시아인가? 이 메시아는 하느님의 아들인가? 또 어떤 뜻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인가? 이것을 알아내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악마는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만이 할 수 있는 기적을 하도록 시켜보자. 만일 이것을 행한다면 함정에 빠지는 것이 되고, 예수님의 진상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2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유다인은 단식을 할 때 낮 동안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밤이 되어서야 식사를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라마단 >의 단식을 한 회교의 아라비아인도, 낮 동안에는 절대로 먹는 것에 손을 대지 않으나 사막 지평선에 해가 지면 먹고 싶은 대로 식사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십 주야를 단식하셨습니다. 감각이 이성을 앞서면 감각적인 요구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서 단식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3 유혹하는 자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악마는 만일 예수님께서 메시아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그의 사명에 역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아직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어떤 본성을 가지셨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명을 거스르게 하고 없애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아담을 빠뜨렸던 같은 책략을 쓰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손에서 태어난 아담은 그 때 인류의 으뜸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고, 전 인류의 희망과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탄은 아담을 하느님께로부터 떼어내고 단 일격으로 전 인류의 원천을 흐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완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4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사탄은 교묘합니다. 이 유혹은 유혹받는 자의 가장 아픈 급소를 찌릅니다. 남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려고 할 경우에도, 또 은총으로 남을 구하려고 할 경우에도 상대의 상태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굶주렸을 때 먹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예수님의 위력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있어서는 자신이 하느님이시기에,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자기 사명을 확인하기 위해 새로운 증거를 보인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부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 생애를 아버지의 섭리와 뜻에 맡겨야 함을 확신하셨고 갈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굶주림에 대해서도 아버지의 사랑에 맡겨야만 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표현으로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다.
악마는 예수님을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갑니다. 예루살렘을 거룩한 도시라고 부른 것은 이사야와 다니엘 시대부터인데 요한의 묵시록에도 볼 수 있습니다. 옛 화폐 세겔에는 거룩한 예루살렘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현대의 아라비아인도 아직 예루살렘을 거룩한 도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높은 탑 아래에는 성전의 광장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각양 각색의 몸치장을 한, 다른 풍속을 보여 주는 많은 군중이 축일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때 악마는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몸을 던지시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군중 속으로! 그대들을 로마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실 그리스도, 구세주는 나다 하고 그들에게 외치시오. 그들은 환호하며 당신을 환영할거요. 메시아라면 찬란하게 세상에 드러내야 할 것 아니오! 그것이 메시아이신 분의 사명이 아니오!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소.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에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이것이 당신에 대한 말씀이 아니오! 자 뛰어 내려 보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기적의 위력을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강제로 회개시키고, 또 열광적인 국가주의자가 생각한 것처럼,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구세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치욕과 고통과 죽음으로써 이 세상을 죄의 사슬에서 풀어 준다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7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6,16)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인용한 성서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가르치십니다. 사람 편에서 억지로 기적을 강요하는 오만을 하느님께서 결코 반갑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오만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섭리 외에 쓸모없는 기적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예지와 약속을 의심하는 것 같은 ”떠보는“ 행위는 결코 칭찬받을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느님을 떠보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탄의 모습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사탄은 완패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완승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8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을 제 부하로 삼아 보겠다는 이 무모한 악마의 계획을 보면, 그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몰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악마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다면 “내 종이 되라, 하늘 대신에 이 세상을 주겠다”고 유혹할 용기를 내지 못 했을 뿐 아니라 그런 계획조차 떠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탄은 한편의 영화를 보여주듯 그렇게 세상을 보여주며 유혹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언제나 써먹는 유혹이요 거짓말입니다. 사탄은 이런 약속을 실행할 힘이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 조상에게도 하느님과 같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겠다고 유혹을 합니다. 감히 예수님께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또는 메시아로 유혹하다가 성서의 말씀에 의지하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보고 사탄의 눈은 초점이 흐려졌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날카롭기는 했지만 성서에 정통하고 마음이 곧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악마는 예수님을 단순한 사람, 또는 성서학자의 한 사람으로 다루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율법학자나 성서학자의 이름은 탐욕과 같은 뜻으로 쓰인 일조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약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사탄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유다인은 메시아의 큰 사업이라는 것이 다윗의 왕좌를 되찾아 세상 끝까지 그 세력을 확장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이사9,7). 만일 예수님이 세속적 메시아라면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해 그와 동맹을 맺는 것이 자기에게는 유리한 일이라고 사탄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부르는 악마는 메시아를 돕기에 충분한 세력과 재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절만 하면 다 주겠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10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 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고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권리를 빼앗고 하느님 대신 자기에게 절을 하게 하려고 하는 사탄. 그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지극히 무례한 짓입니다. 하느님께만 드릴 경배(절)를 자기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얼마나 많이 그 유혹에 넘어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 못하고 얼마나 많은 절을 올리고 있는가?
11 마침내 악마는 물러 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 다음 기회는 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가리킵니다. 그 때가 되면 악마는 또 다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 와 그분의 사업을 파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악마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을 보겠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참으로 악마에게는 결정적인 패배가 될 것입니다.
2.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서 유혹을 받으십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라는 유혹. 물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묘한 순간에 유혹은 파고들어서 그것을 하게 만듭니다. 내가 만일 예수님이었다면 그런 유혹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2. 일상 삶 안에서 수많은 유혹들이 나에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유혹들에 어떻게 넘어가고 있으며, 어떻게 그 유혹들을 물리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기묘한 방법으로 남을 유혹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3. 공지사항
1.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는 학생회가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2. 셀 모임에 적극 참여 합시다.
4. 말씀으로 기도하기(적어봅시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유혹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행동으로 하느님을 택하고, 헛된 사탄의 약속을 물리쳐 버리라고 귀중한 모범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십니다. 위대한 사업은 항상 엄격한 내적 준비로 시작되는 법입니다. 전 세계를 개혁하실 예수님의 공생활에도 그것에 어울리는 준비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섭리의 계획인 동시에 또 악마가 바라고 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비범하고도 위대한 사명을 띤 위대한 성인들도 기도하고 묵상하기 위해 적막한 땅으로 물러갔었습니다. 거기에는 협박과 감언이설로 그들의 위대한 사명을 좌절시키려고 집요하게 공격해 온 악마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 유혹에서 특히 그리스도인의 인간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예수님의 싸움과 승리는, 우리 도덕생활과 같은 심리적 과정을 거쳐 가고 있습니다. 불신의 유혹 뒤에 갑자기 지나친 믿음의 유혹이 있고 마지막에 오만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 오만은 경계를 늦춘 인간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가장 무서운 함정입니다.
1 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사탄은 히브리말로 반대자, 적, 특히 재판상의 적, 곧 고소인이란 뜻이 있습니다. 유다 후기 신학에서는 악마의 고유명사는 “사마엘”입니다. 사마엘은 본래 제1급 대천사였으나 타락하여 사탄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신학에 따르면 사탄의 우두머리의 소임은 사람을 죄로 유인하는, 죄인을 하느님의 법정에 고소하는, 죄의 벌로서 죽음을 내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의 천사”라고 하는 이름이 나왔다. 그렇다면 이 사탄이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 ☞ 예수님께서 메시아인가? 이 메시아는 하느님의 아들인가? 또 어떤 뜻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인가? 이것을 알아내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악마는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만이 할 수 있는 기적을 하도록 시켜보자. 만일 이것을 행한다면 함정에 빠지는 것이 되고, 예수님의 진상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2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유다인은 단식을 할 때 낮 동안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밤이 되어서야 식사를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라마단 >의 단식을 한 회교의 아라비아인도, 낮 동안에는 절대로 먹는 것에 손을 대지 않으나 사막 지평선에 해가 지면 먹고 싶은 대로 식사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십 주야를 단식하셨습니다. 감각이 이성을 앞서면 감각적인 요구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서 단식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3 유혹하는 자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악마는 만일 예수님께서 메시아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그의 사명에 역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아직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어떤 본성을 가지셨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명을 거스르게 하고 없애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아담을 빠뜨렸던 같은 책략을 쓰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손에서 태어난 아담은 그 때 인류의 으뜸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고, 전 인류의 희망과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탄은 아담을 하느님께로부터 떼어내고 단 일격으로 전 인류의 원천을 흐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완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4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사탄은 교묘합니다. 이 유혹은 유혹받는 자의 가장 아픈 급소를 찌릅니다. 남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려고 할 경우에도, 또 은총으로 남을 구하려고 할 경우에도 상대의 상태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굶주렸을 때 먹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예수님의 위력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있어서는 자신이 하느님이시기에,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자기 사명을 확인하기 위해 새로운 증거를 보인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부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 생애를 아버지의 섭리와 뜻에 맡겨야 함을 확신하셨고 갈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굶주림에 대해서도 아버지의 사랑에 맡겨야만 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표현으로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다.
악마는 예수님을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갑니다. 예루살렘을 거룩한 도시라고 부른 것은 이사야와 다니엘 시대부터인데 요한의 묵시록에도 볼 수 있습니다. 옛 화폐 세겔에는 거룩한 예루살렘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현대의 아라비아인도 아직 예루살렘을 거룩한 도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높은 탑 아래에는 성전의 광장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각양 각색의 몸치장을 한, 다른 풍속을 보여 주는 많은 군중이 축일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때 악마는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몸을 던지시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군중 속으로! 그대들을 로마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실 그리스도, 구세주는 나다 하고 그들에게 외치시오. 그들은 환호하며 당신을 환영할거요. 메시아라면 찬란하게 세상에 드러내야 할 것 아니오! 그것이 메시아이신 분의 사명이 아니오!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소.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에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이것이 당신에 대한 말씀이 아니오! 자 뛰어 내려 보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기적의 위력을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강제로 회개시키고, 또 열광적인 국가주의자가 생각한 것처럼,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구세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치욕과 고통과 죽음으로써 이 세상을 죄의 사슬에서 풀어 준다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7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6,16)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인용한 성서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가르치십니다. 사람 편에서 억지로 기적을 강요하는 오만을 하느님께서 결코 반갑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오만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섭리 외에 쓸모없는 기적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예지와 약속을 의심하는 것 같은 ”떠보는“ 행위는 결코 칭찬받을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느님을 떠보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탄의 모습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사탄은 완패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완승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8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을 제 부하로 삼아 보겠다는 이 무모한 악마의 계획을 보면, 그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몰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일 악마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다면 “내 종이 되라, 하늘 대신에 이 세상을 주겠다”고 유혹할 용기를 내지 못 했을 뿐 아니라 그런 계획조차 떠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탄은 한편의 영화를 보여주듯 그렇게 세상을 보여주며 유혹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언제나 써먹는 유혹이요 거짓말입니다. 사탄은 이런 약속을 실행할 힘이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 조상에게도 하느님과 같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겠다고 유혹을 합니다. 감히 예수님께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또는 메시아로 유혹하다가 성서의 말씀에 의지하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보고 사탄의 눈은 초점이 흐려졌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날카롭기는 했지만 성서에 정통하고 마음이 곧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악마는 예수님을 단순한 사람, 또는 성서학자의 한 사람으로 다루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율법학자나 성서학자의 이름은 탐욕과 같은 뜻으로 쓰인 일조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약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사탄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유다인은 메시아의 큰 사업이라는 것이 다윗의 왕좌를 되찾아 세상 끝까지 그 세력을 확장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이사9,7). 만일 예수님이 세속적 메시아라면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해 그와 동맹을 맺는 것이 자기에게는 유리한 일이라고 사탄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부르는 악마는 메시아를 돕기에 충분한 세력과 재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절만 하면 다 주겠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10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 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고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권리를 빼앗고 하느님 대신 자기에게 절을 하게 하려고 하는 사탄. 그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지극히 무례한 짓입니다. 하느님께만 드릴 경배(절)를 자기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얼마나 많이 그 유혹에 넘어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 못하고 얼마나 많은 절을 올리고 있는가?
11 마침내 악마는 물러 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 다음 기회는 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가리킵니다. 그 때가 되면 악마는 또 다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 와 그분의 사업을 파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악마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을 보겠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참으로 악마에게는 결정적인 패배가 될 것입니다.
2.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서 유혹을 받으십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라는 유혹. 물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묘한 순간에 유혹은 파고들어서 그것을 하게 만듭니다. 내가 만일 예수님이었다면 그런 유혹들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2. 일상 삶 안에서 수많은 유혹들이 나에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유혹들에 어떻게 넘어가고 있으며, 어떻게 그 유혹들을 물리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기묘한 방법으로 남을 유혹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3. 공지사항
1.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는 학생회가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2. 셀 모임에 적극 참여 합시다.
4. 말씀으로 기도하기(적어봅시다)
사순 제 1 주일
제 1 독서 : 창세 2, 7-9; 3, 1-7
제 2 독서 : 로마 5, 12-19
복 음 : 마태 4, 1-11
제 1 독서 : 인간의 창조와 인간의 첫 범죄에 대한 이야기이다. 죄의 원인이 아니라 죄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뱀은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함으로써 여자를 유혹한다.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했다는 질문(창세 3,1)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왜곡된다(창세 2, 16과 비교하라!). 뱀의 왜곡된 말로 인해 하느님은 인간을 못살게 구는 하느님,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뱀의 질문에 대한 여자의 답변은 하느님 말씀에 쓸데없는 첨가를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창세 2, 16 참조). 그러므로 죄의 시작은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첨가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뱀의 유혹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불신의 유혹, 하느님의 신성에 대한 도전의 유혹, 모든 것을 알게된다는 유혹이다. 이 유혹에 넘어간 첫 사람들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가 아니라 자기네들 뜻대로 살기를 원했다.
제 2 독서 : 후기 유대교는 모세법을 철저히 지키는 데서 구원의 길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세밀한 법 규정을 준수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보답을 보장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런 생각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출발점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악의 문제는 법 규정에 대한 불복종에서가 아니라 더욱 멀리서 온다는 것이다. 즉 첫사람 아담에게까지 근원이 거슬러 올라가며,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가 놀랍게 들어맞는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듯이,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은총과 의화(義化)가 이루어졌다.
이 텍스트에서는 두 개의 법이 서로 대치되어 나타난다. 즉 죄의 법과 은총의 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분의 업적이 이 텍스트의 구심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구심점을 중심으로 아담이 이 세상에 죄와 죽음을 끌어들인 장본인으로 제시되었다.
복 음 : 예수께서 당하신 세 가지 유혹은 정치성을 띤 메시아적 유혹이다. 당시의 사회는 예수께 메시아의 역할을 수행해 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예수께서는 이 압력에 굴복하든지 백성을 실망시키든지 양자 택일을 해야 했다. 이 유혹 이야기는 예수의 이런 난처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기를 거부하시지만, 압력과 갈등(유혹하는 악마와의 싸움)은 계속되고 결국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싸움이 끝난다.
이 유혹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받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명기의 말씀(8, 3; 6, 16, 6, 13)으로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셨고, 그 어느 것도 그분을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스웨터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구원과 은총의 시기인 사순절이 지난 재의 수요일 이마에 재를 바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 인간의 처지를 생각하고 지나온 나날들을 반성하고 속죄하는 시기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속죄해야 할 점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탐욕주의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헛된 욕심이라 할 수 있는데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욕심을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불러일으킨다.”는 가르침을 상기한다면 이런 욕심에서 벗어나 죽음이 아닌 생명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늘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당한 세 가지 유혹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대표적인 유혹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은 물질에 대한 유혹이며, 높은데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지켜 줄 것이라는 유혹은 헛된 만용과 명예에 대한 유혹입니다. 세 번째 유혹, 즉 높은 곳에 올라가서 화려한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절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는 유혹은 권력과 영광에 대한 유혹입니다. 물질, 명예, 권력에 대한 이 세 가지 유혹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산물로서 바로 악마가 노리고 있는 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남과 더불어 만들어가는 아름답고 밝은 세상을 위해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자기를 비워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공자가 말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 다른 사람의 처지와 형편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입니다. 가장 가난한 이에게 베푸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한 일이요, 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보화를 쌓는다는 정신과도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에 실천해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모든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 공동체의 구성원을 위한 것이며 또한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캐나다의 군인인 알렉산더는 독일 전선에 있었습니다. 1945년 3월, 아직 바람 끝이 매운 그 즈음, 영국에 다녀오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영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군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측은한 생각에 그는 덜컥 외투를 벗어 군인의 어깨에 덮어주고는 곧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살갗을 에는 추위가 만만치 않아 적십자사를 찾아갔습니다. 운이 좋으면 세계 각지의 부인들이 짜서 보낸 옷을 얻어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두툼한 스웨터 한 벌이 남아 있었습니다. 스웨터를 입는 순간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 왔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일을 마치고 다시 독일 전선으로 돌아갔고 전쟁이 끝난 후 무사히 조국 캐나다로 돌아왔습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아들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날 밤, 아들의 짐을 정리하면서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얘야, 너의 옷을 빨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믿어지지 않는구나.” 그런데 아들의 가방에서 옷가지를 꺼내던 어머니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아들이 한달음에 달려오니 어머니가 허름한 스웨터와 쪽지를 꺼내 보였습니다. 그 쪽지에는 스웨터를 입는 이름 모를 병사가 무사히 귀향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가 쓰여 있었습니다. “얘야, 이 스웨터는 내가 직접 짜서 적십자사에 보낸 것이구나. 너를 생각하며 스웨터를 입을 병사의 건강과 귀향을 바라는 쪽지를 써서 깃 한쪽에 넣어 두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어머니를 가만히 껴안았습니다. 새처럼 작은 어머니의 몸이 오래도록 들먹거렸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어머니와 병사의 이야기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란 것을 여기서 실감하게 됩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뱀의 유혹에 빠져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하와와 그의 반려자 아담,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채 자신들의 욕심만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욕심의 노예가 된 그들에게 내려진 것은 낙원에서의 추방이었고 그 결과로 우리는 원죄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첫 조상과 달리 모든 욕심을 벗어버리고 남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고 십자가상에 달려 죽기까지 아버지 성부께 순명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병사가 자신보다 더 헐벗은 이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 주고, 어머니가 아들을 생각해서 이름 모를 병사를 위해 옷을 만들고 그 안에 기도문까지 넣어 준 사랑이 있었기에 아들을 극적으로 다시 상봉하게 되었고 남을 위한 자신의 사랑이 곧 자신들에게 돌아옴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순절은 바로 이처럼 남을 위해 나를 내어 줌으로써 모든 욕심을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주님 안에 하나되어 이것이 결국 나를 위한 길임을 깨닫는 시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영생을 얻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그러한 나날이 되어야겠습니다.
사순 제 1 주일
제 1 독서 : 창세 2, 7-9; 3, 1-7
제 2 독서 : 로마 5, 12-19
복 음 : 마태 4, 1-11
제 1 독서 : 인간의 창조와 인간의 첫 범죄에 대한 이야기이다. 죄의 원인이 아니라 죄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뱀은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함으로써 여자를 유혹한다.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했다는 질문(창세 3,1)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왜곡된다(창세 2, 16과 비교하라!). 뱀의 왜곡된 말로 인해 하느님은 인간을 못살게 구는 하느님,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뱀의 질문에 대한 여자의 답변은 하느님 말씀에 쓸데없는 첨가를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창세 2, 16 참조). 그러므로 죄의 시작은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첨가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뱀의 유혹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불신의 유혹, 하느님의 신성에 대한 도전의 유혹, 모든 것을 알게된다는 유혹이다. 이 유혹에 넘어간 첫 사람들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가 아니라 자기네들 뜻대로 살기를 원했다.
제 2 독서 : 후기 유대교는 모세법을 철저히 지키는 데서 구원의 길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세밀한 법 규정을 준수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보답을 보장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런 생각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출발점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악의 문제는 법 규정에 대한 불복종에서가 아니라 더욱 멀리서 온다는 것이다. 즉 첫사람 아담에게까지 근원이 거슬러 올라가며,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가 놀랍게 들어맞는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듯이,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은총과 의화(義化)가 이루어졌다.
이 텍스트에서는 두 개의 법이 서로 대치되어 나타난다. 즉 죄의 법과 은총의 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분의 업적이 이 텍스트의 구심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구심점을 중심으로 아담이 이 세상에 죄와 죽음을 끌어들인 장본인으로 제시되었다.
복 음 : 예수께서 당하신 세 가지 유혹은 정치성을 띤 메시아적 유혹이다. 당시의 사회는 예수께 메시아의 역할을 수행해 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예수께서는 이 압력에 굴복하든지 백성을 실망시키든지 양자 택일을 해야 했다. 이 유혹 이야기는 예수의 이런 난처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기를 거부하시지만, 압력과 갈등(유혹하는 악마와의 싸움)은 계속되고 결국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싸움이 끝난다.
이 유혹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받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명기의 말씀(8, 3; 6, 16, 6, 13)으로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셨고, 그 어느 것도 그분을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스웨터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구원과 은총의 시기인 사순절이 지난 재의 수요일 이마에 재를 바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 인간의 처지를 생각하고 지나온 나날들을 반성하고 속죄하는 시기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속죄해야 할 점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탐욕주의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헛된 욕심이라 할 수 있는데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욕심을 죄를 낳고 죄는 죽음을 불러일으킨다.”는 가르침을 상기한다면 이런 욕심에서 벗어나 죽음이 아닌 생명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늘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당한 세 가지 유혹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대표적인 유혹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은 물질에 대한 유혹이며, 높은데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지켜 줄 것이라는 유혹은 헛된 만용과 명예에 대한 유혹입니다. 세 번째 유혹, 즉 높은 곳에 올라가서 화려한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절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는 유혹은 권력과 영광에 대한 유혹입니다. 물질, 명예, 권력에 대한 이 세 가지 유혹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산물로서 바로 악마가 노리고 있는 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남과 더불어 만들어가는 아름답고 밝은 세상을 위해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자기를 비워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공자가 말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 다른 사람의 처지와 형편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입니다. 가장 가난한 이에게 베푸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한 일이요, 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보화를 쌓는다는 정신과도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에 실천해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모든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 공동체의 구성원을 위한 것이며 또한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캐나다의 군인인 알렉산더는 독일 전선에 있었습니다. 1945년 3월, 아직 바람 끝이 매운 그 즈음, 영국에 다녀오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영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군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측은한 생각에 그는 덜컥 외투를 벗어 군인의 어깨에 덮어주고는 곧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살갗을 에는 추위가 만만치 않아 적십자사를 찾아갔습니다. 운이 좋으면 세계 각지의 부인들이 짜서 보낸 옷을 얻어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두툼한 스웨터 한 벌이 남아 있었습니다. 스웨터를 입는 순간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 왔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일을 마치고 다시 독일 전선으로 돌아갔고 전쟁이 끝난 후 무사히 조국 캐나다로 돌아왔습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아들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날 밤, 아들의 짐을 정리하면서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얘야, 너의 옷을 빨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믿어지지 않는구나.” 그런데 아들의 가방에서 옷가지를 꺼내던 어머니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아들이 한달음에 달려오니 어머니가 허름한 스웨터와 쪽지를 꺼내 보였습니다. 그 쪽지에는 스웨터를 입는 이름 모를 병사가 무사히 귀향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가 쓰여 있었습니다. “얘야, 이 스웨터는 내가 직접 짜서 적십자사에 보낸 것이구나. 너를 생각하며 스웨터를 입을 병사의 건강과 귀향을 바라는 쪽지를 써서 깃 한쪽에 넣어 두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어머니를 가만히 껴안았습니다. 새처럼 작은 어머니의 몸이 오래도록 들먹거렸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어머니와 병사의 이야기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란 것을 여기서 실감하게 됩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뱀의 유혹에 빠져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하와와 그의 반려자 아담,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채 자신들의 욕심만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욕심의 노예가 된 그들에게 내려진 것은 낙원에서의 추방이었고 그 결과로 우리는 원죄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첫 조상과 달리 모든 욕심을 벗어버리고 남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고 십자가상에 달려 죽기까지 아버지 성부께 순명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병사가 자신보다 더 헐벗은 이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 주고, 어머니가 아들을 생각해서 이름 모를 병사를 위해 옷을 만들고 그 안에 기도문까지 넣어 준 사랑이 있었기에 아들을 극적으로 다시 상봉하게 되었고 남을 위한 자신의 사랑이 곧 자신들에게 돌아옴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순절은 바로 이처럼 남을 위해 나를 내어 줌으로써 모든 욕심을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주님 안에 하나되어 이것이 결국 나를 위한 길임을 깨닫는 시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영생을 얻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그러한 나날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