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8주일 강론 자료 모음

 

연중 제8주일






               5. 정진석 추기경(나)/ 10                   6. 김승주 신부(나)/ 11


         7. 김몽은 신부(나)/ 13                   8. 배세영 신부(나)/ 15


         9. 김성배 신부(나)/ 16                   10. 단식에 대한 질문(나)/ 17


         11. 교구 주보(나)/ 19                    12. 민병숙 작가(나)/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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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중 제8주일   마르 2,18-22 (나) 사랑의 기쁨


                                                          정진석 추기경




오늘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애인들이 기쁨을 누리는 것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심통 사나운 사람들과 마주치셨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의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그들이 시비를 걸었다.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대답하셨다. “혼인잔치 집에서 어떻게 단식을 하겠느냐? 신랑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그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는 말씀도 하셨으나, 이 말씀이 없어도, 예수님은 신랑이시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이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기에 단식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로서는 즐거운 시절이었다. 예수께서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들은 꿈에도 짐작 못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호세아 예언자는 변덕스러운 아내에게 접근하여 새삼스럽게 사랑을 호소하면서 외롭고 쓸쓸한 사랑의 오솔길로 유인하는 남편을 모사하고 있다. 그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말을 해서, 그녀가 옛날 절었던 시절에 서로 사랑하고 기뻐했던 때의 그 표정을 되살려내려고 애쓰고 있다. 이번에 남편의 진정이 아내의 호응을 얻을 것이고, 아내는 남편을 좀더 깊이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고신 극기할 때가 아니고 경축할 때이다. 단식을 할 때가 아니고 잔치할 때이다. 신랑이 규수와 함께 있는 때이다. 신랑은 주님이고 규수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로 애틋하게 불러들이신 백성들이다. 이 백성들이 불성실하고 변덕스러운 죄인들일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당신의 규수라고 부르신다.




호세아와 예수님께서 사용한 사랑의 언어를 결혼한 어른들은 모두 다 이해한다. 연애한 경험이 없는 어린이들만이 오늘 성경의 주제를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연애시절은 인생의 독특한 시절이요,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는 황홀한 좋은 시절이다. 그런데 예수님과 호세아 예언자는 이러한 연애 시절을 상상케 하여, 이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성실하며 자상한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고자 하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고자 하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신앙으로 체험한 이들은 이 뜻을 잘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인생은 구혼 기간이나 신혼 시절이 결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인생에는 여러 단계가 있을 뿐 아니라 비극의 위험도 있다. 한 가지 비극의 위험은 애인과 강제로 이별해야 될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애인이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호세아와 예수님은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사랑에 있어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들이요, 잘못을 저지르고서 죄책감에 비열을 느끼는 자들임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도 비록 무죄한 때일지라도, 하느님을 멀리 느끼거나 혹은 악의 판을 치는 것을 보고 상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때는 축제 기분이 아니라 단식할 기분을 느낀다. 예를 들면 잔인 무도한 전쟁이나 악독한 낙태법이나 불의한 정치적 탄압 같은 공공연한 악에 대항하기 위해 공개적인 단식투쟁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가지를 분명히 밝히셨다. 제자들의 단식이 종교적인 데모가 되어서는 절대로 아니 되며, 오로지 회개와 뉘우침의 진정한 표현으로서만 옳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다른 모든 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만사를 새롭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사람이 없다는 비유를 들어, 구습을 새로운 것으로 대치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다.




오늘 제2독서에서 성 바오로는 성령의 계약을 법률적인 편지로 표현할 수는 없다는 것과, 우리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의 소개장이요 연애편지라고 가르치고 있다. 주님과 함께 지내는 기쁨을 명심함으로써, 장차 어두운 때가 닥쳐오더라도 영원한 혼인잔치에 참석할 굳은 희망을 가지고 회개하고 단식할 수 있도록 대비하자.












6               연중 제8주일   마르 2,18-22 (나) 기뻐하십시오


                                                       김승주 신부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구원의 때에 살고 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기에, “모든 것”을 얻은 우리는 기쁨의 생활을 해야 한다.




요즈음 우리나라에도 레저를 즐기는 인구가 꽤나 많아졌습니다. 도심에서, 혹은 일상의 복잡한 생활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함께, 혹은 가족들과 함께 산이나 바다, 유원지 등을 찾아서 모든 근심 걱정을 떨쳐버리고, 대자연의 산뜻함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우리는 곧잘 미아들을 봅니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잃고 길가에 서서 울고있는 어린아이들. 정말 그 모습은 가련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런 어린이에게는 어떤 재미있는 놀이도, 어떤 맛있는 과자도 모두 소용이 없어집니다.


오로지 부모님을 찾는 것밖에는… 그러다가, 어머니나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모든 것이 일시에 바뀌게 됩니다. 모든 슬픔은 사라지고 기쁨과 안도감에 어린이는 다시 평화를 되찾습니다. 그만큼 어린이에게는 부모님이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있어서의 “모든 것”을 찾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이름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수없이 많은 종류로 등장하였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찾아 갈팡질팡합니다. 2000년 전의 사도들도 사실 그 “모든 것”을 찾아 헤맸을 겁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모든 것”을 얻은 사도들은 이제 다른 무엇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바로 “행복”을 누리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자신을 혼인잔치의 신랑에 비유하셨습니다. 이 세상과 합하여 구원의 나라로 데려가시는 신랑이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혼인잔치에 참석한 신랑의 친구들입니다. 혼인잔치는 즐거운 것이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기쁨 그 자체입니다. 혼인잔치에 참석한 제자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차지한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한 단식을 할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기쁨의 생활을 해야 마땅한 겁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로 이 세상의 구원을 완성하셨고, 언제 까지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께 결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을 방황하는 미아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 “모든 것”을 되찾은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았고, 구원의 길에 불려졌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천상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 잔치를 미리 맛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 역시 기쁨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얻었으니 만큼 이제 다른 아무 것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사실 구원받은 크리스천의 특징은 기쁨의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기쁨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과 평화를 얻으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걱정이 많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낫게 살 수 있을까? 우리는 하고많은 나날을 근심 걱정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것을 찾는 욕심 때문일 겁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모든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이 세상의 짧은 생명에 더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나갈 현세의 생활에 더욱 눈길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련으로 주어지는 어려움은 고통 그대로 남아있게 될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눈길을 이 세상에서 돌이켜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의미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은 구원의 때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는 구원의 성취되지 않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미 구원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빛 안에 놓여 있기에, 우리는 굳은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신앙인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시련의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하느님께 모든 희망을 걸며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할 때 우리는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행복의 원천이며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구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십시오.












7         연중 제8주일   마르 2,18-22 (나) 신랑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


                                                       김몽은신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단식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는 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잔치 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같이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습니까?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옵니다. 그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켕겨 더 심하게 찢어집니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 때문에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부대도 다 버리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이 주일의 초점




오늘 (B해 연중 제8주일)은 2월 마지막 주일로서 교회 출판물 보급 주일 인 동시에, 금년 사순절을 1주일 앞둔 주일이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은 슬픈 날, 즉 <신랑을 빼앗긴 날>을 앞둔 마지막 축제(잔치)의 날임을 은유적(隱喩的)으로 전해준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단식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히려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그 일을 항의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단식을 한다는 것은 율법에 정해진 엄격한 규율의 하나였다. 그것은 신심의 모범으로서 소의 열심 하다는 자는 1주일에 두 번식이나 단식했다(루가 18,12;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인 내용 없는 신심 행위로서, 고행이나 정신적 정진(精進)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자기의 열심함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 효과를 위한 행위였다.




예수께서는 단식을 반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단식 행위를 비난하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시아로 임하신 당신이 지상(地上)에 계시는 동안, 즉 <메시아의 날>에 단식할 수는 없는 일이라 천명하신다.




예수님의 길잡이였던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 불렀고, 자신을 신랑의 친구라고 말한 바 있었다. (요한 3,28참조). 구약의 예언자들도 메시아를 신랑이라고 불렀다(호세아 2,18-22; 이사야 54,5 이하 참조).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잔치는 계속되는 것이며, 함께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신랑의 뜻이며, 또 신랑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손님들은 초대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단식을 한다던가 슬픈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을 한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단식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단순히 슬픈 표정을 지음으로서 남에게 보이기 위한 허영적인 형식적 선전 효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신랑의 빼앗김을 슬퍼하고, 그분이 전해 준 구원(救援)의 희생을 기념하는 행위로서의 경건함을 다한 단식이다.




다음주일부터 우리 교회는 수난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사순절로 접어든다. 지금은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지만, 그때에 가서 우리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절제와 희생으로써 주님의 구세수난을 묵상한다.




한편 오늘의 복음 후반에서는 완전히 형식화된 낡은 신앙 태도를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기풍과 경건한 메시아의 내림에 입각한 구원 시대에 맞는 신앙 태도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제 구약의 시대는 지나고 신약의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으니, 새로운 믿음과 사랑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 요구된다.




진정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살기 위해, 우리 모두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나야하며, 이기심이나 편견이 없는 소박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8             연중 제8주일   마르 2,18-22 (나) 새술은 새부대에


                                                           배세영 신부




가파르나움에 사람이 많이 모여들고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행하셨는데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물론 수많은 사람이 모세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보고, 말씀을 듣고 오해를 하며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있었던 일을 상기해 보면 먼저 중풍 환자를 회복시키시고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인간의 의사이시고 용서를 주시는 신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안식일에 두 번이나 환자를 돌봐 주셨습니다. 여기서 유다인들이 안식일에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시시하게 금지하던 것들이 많아서 주님이 보여주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제8주일에는 단식에 관한 논쟁의 이야기입니다. 그날 선언하신 것을 요약하면 나를 믿고 받아들이면, 나를 따르면 인생이 새로워진다, 계약 시대에 예언자들이 신랑으로 하느님을 소개했는데 이제 “신랑이 나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류의 신랑이시라면 우리 세상에 찾아오신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단식을 잘하던 유다인들에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내가 인류의 신랑이라면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이상 나를 잃으면 단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단식의 참뜻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단식과 선행도 받아들이는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식은 겸손한 마음을 드러내고 무엇을 얻기 위해서 그분께 압력을 놓는 것이기 보다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다만 우리 마음을 채워 주시는 분을 원하는 의미에서 만유 위에 사랑하는 그분과 있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단식은 또한 아모스 예언자가 말한 바와 같이 가지고 있는 잔을 비우고 새 포도주를 받는 것입니다(아모 9,13).




신앙안에 주님과 합심과 사랑의  포도주랍니다. 성찬 때에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다만 이 지상의 것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화되었고 다 말해주었고 다시 아버지께 가셨고 바로 여기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 시대에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는데 그러나 그때에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간 헤아릴 수 없는 무리에게 도움을 받고 있고 통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신랑이 남의 손에 넘어가서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볼 수 없으나 계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제자들이 신앙 생활로써 현존케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때까지(1고린 15,28) 단식이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갔다 오실 신랑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을 전례가 전해 줍니다.


크리스찬 희망을 드러내면서 자기 마음을 준비시킨 것입니다.


9              연중 제8주일   마르 2,18-2 (나) 인간의 욕망과 단식


                                                                  김성배 신부




영원하신 하느님의 의지는 한없이 완전하게 사랑하는 능력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마음온 무한한 사랑의 열정으로 충만하고, 따라서 하느님은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헤아릴 길 없는 무한한 사랑의 바다이시다. 그러므로 한없이 선하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상호간에는 자신을 상대 위격에게 완전히 내어주는 무한한 사랑이 오고 가고, 삼위 상호간에 오고 가는 이 무한한 사랑의 심연 속에서 하느님은 완전하고 영원한 지복을 누리신다.


그리고 사람에게 유일하고 참된행복은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과 결합함으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지복을 누리게 되는 데 있다.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사람도 완전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의지는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의 의지와 결함함으로써 완전한 사랑에 이르게 된다. 사람이 자기의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더 완전히 순종할 수록 사람의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와 더 완전히 결합하게 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인간의 의지에 부어 주심으로써, 사람이 더 완전한 사랑의 능력율 지니게 하신다.




사랑의 능력이 커질수륵 사람의 의지는 더 강해져서 자기의 욕망과 감정을 더 완전히 지배하고 다스리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사랑의 열정이 너무도 커서 사랑을 배려하는 일체의 욕망과 감정이 사람의 마음에 발붙일 수 없게 되면, 사람의 마음엔 언제나 사랑의 열정만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써 사람온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과 영원히 결합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의 뜻을 버리고, 교만과 탐욕과 육욕이라는 삼중의 욕망을 따르면 타락하게 된다. 타락한 사람의 의지는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고 약해져서,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러면 사람은 배타적으로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가 된다.




교만은 사람이 자기자신을 우상으로 섬기게 만든다. 그래서 언제나 자기가 각광을 받고, 두각을 나타내고, 중요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며, 자기가 더 많이 알려지고, 칭찬받고, 존경받기를 바란다. 교만한 사람은 모든 일을 하느님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한다. 한편 탐욕에 빠진 사람은, 마음이 인색해져서 받기만을 좋아하고 베풀 줄 모른다. 그리고 재물이 그의 우상이기때문에 친하는 재물을 얻기위해서라면 악을 행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이런 사람은 성덕이라는 영원하고 참된 재산을 불리는 데는 전혀 무관심하고, 오직 일순간만 자기에게 만족을 즐 뿐인 보잘 것 없는 재물을 불리는 데만 전념한다.




또한 욕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육체의 감각적 쾌락에만 탐닉함으로써, 자신을 짐승 이하의 수준으로 타락시킨다. 육욕은 요구를 들어주면 즐수록 더 강해지고, 그래서 더 자극적인 쾌락을 요구하게 된다. 육욕은 그 강렬하고 자극적인 쾌락 때문에, 언제나 사람을 가장 쉽게 악으로 끌어들이는 유흑의 수단이 된다. 절제되지 않은 육욕만큼 사람의 영흔에 위험하고 해로운 것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들을 경계하셨다.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것을 찍어 던져 버려라.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마태오 18,8).




사람이 완전한 사랑에 이르려면 욕심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리고 반감을 갖지않고 겪는 고통만큼 사람을 욕심에서 더 완전히 이탈시키는 것은 없다. 십자가의 길은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속죄와 성화을 위해 사람에게는 자발적인 고행이 필요고, 그 전형적인 수단이 단식이다. 오늘 복음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실천했던 바리사이파사람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제자들이 단식할 때가 아니지만 당신의 수난 이후부터는 제자들도 단식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대로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면서 고행과 단식을 실행했다. 제자들의 단식은 그들을 더 거룩하게 했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은 사랑을 가지고 단식을 했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사랑이 없이 단식을 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하는 고행은, 사람의 마음을 겸손하고 가난하고 순결하게 만들지만, 사랑이 없이하는 고행은, 오히려 교만을 더 키우게 된다. 고행은 속죄와 성화를 위해 필요하지만 고행의 가치는 고행자체의 크기가 아니라, 고행을 하는 사랑의 크기로 절정된다. 성덕은 사랑의 크기로 측정되지, 고행의 크기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주는 것온 사랑이다. 기도도 선행도 고행도 하느님께 받은 특은조차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하다.




「내가 하느님의 말쑴을 받아 전할 수 있다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해 불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I 고린토 13,2-3).












10            연중 제8주일  마르 2,18-22 (나) 단식에 대한 질문




누구나 죽음 앞에선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죽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반면 인간이 강할 때는 죽음을 넘어설 때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때다. 그럴 때 인간은 의연해진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죽음은 무엇일까. 질문은 확실해도 대답은 간단치 않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워낙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단식은 작은 죽음이다. 단식에도 두려움이 있다. 음식을 안먹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먹기 싫어서 안먹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먹고 싶은데 안먹는 것은 아무나 못한다. 이것이 단식이다. 그러니 단식의 동기는 정말 중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겼을 때 단식하라 하셨다. 신랑은 예수님이다. 말씀의 깊은 뜻은 차츰 묵상할 일이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의 단식이 예수님과 연관되어야 올바른 단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변화는 많은 것을 잃거나 포기했을 때 강하게 나타난다. 스스로 놓아버렸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본능과 연관된 것이라면 정말 힘들다.




본능 가운데서도 식욕과 성욕은 피할 수 없다. 아무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본능을 무엇으로 조절할 수 있겠는가. 본능을 조절할 수 있는 길은 절제를 통한 훈련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음식의 절제를 강조했다. 하느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겠는가. 교회가 무슨 욕심이 나서 신자들로 하여금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겠는가. 단식을 통해 본능을 조절하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많은 종교들은 음식에 대해 까다로웠다. 지금도 많은 종교가 그런 관습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음식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것을 취급하는 인간에게 문제가 있을 뿐이다. 먹지 못할 음식이 어디 있겠는가. 먹으면 죄가 되는 음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 음식 자체가 윤리적으로 선이 되거나 악이 될 수는 없다. 이 세상에 먹기만 하면 선이 되는 음식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그런 음식이 있다면 아무 일도 안하고 그 음식만 먹으면 될 것 아닌가. 같은 이치다. 먹기만 하면 악이 되는 그런 음식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음식의 금기가 많을수록 저급종교다. 그런 종교일수록 신자들을 어린 아이 취급한다. 이것은 먹어도 되고 저것은 먹으면 안된다고 지시한다. 다 큰 어른에게 아직도 음식을 왈가왈부하고 있다면 이것은 성숙한 종교의 자세가 아니다. 다만 음식을 통해 얼마만큼 본능을 조절하며 희생할 수 있는가, 이것이면 족한 것이다. 음식을 절제함으로써 그 희생과 봉헌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음식의 절제는 우리에게 자유로움을 준다.




음식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면 그만큼 삶은 기쁨으로 바뀐다. 그러니 먹지 않으면 못배기는 음식이 있다면 빨리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이 단식에 숨겨진 깊은 가르침이다. 그렇게 하는 데 힘이 든다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술과 담배와 커피에서 우리는 이 연습을 실제로 해야 한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적게 먹거나 안 먹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무엇이든 절제함으로 내 본능을 주님께로 향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참된 의미의 단식인 것이다. 신랑과 함께 한다면 단식도 즐거움이 될 수 있음을 묵상하자.












11         연중 제8주일   마르 2,18-22 (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오늘 복음(마르 2,18-22)은 ‘단식논쟁’(18-20절)과 ‘새것과 헌것’의 이중 단구(短句: 21-22절) 로 구성됩니다.




1. 단식논쟁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영향으로 자주 단식했으며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습니다(루가 18,12 ;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8,1). 이와는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속죄의 날을 제외하고서는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께 “어째서 당신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신랑이 혼인잔치에 함께 있는데 어떻게 손님들이 단식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여기에는 깊은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즉, 지금은 구약의 약속이 실현되어 구원이 이룩되는 혼인잔치 시대로서 예수님은 신랑이요 제자들은 손님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시기이니 만큼 먹고 즐길 때이지 단식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며  당신이 죽으면 제자들이 단식하게 될 것을 예언하십니다. 즉, 신랑이신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혼인잔치가 깨지게 되며 손님들인 제자들은 단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새것과 헌 것




이 말씀(마르 2,21-22)에는 상징적인 표현이 들어 있는데, ‘새것’(생베 조각, 새 포도주)은 강하고 ‘헌것’(헌 옷, 헌 가죽부대)은 약해서 서로 어울리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새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룩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또한 유다교의 테두리(헌 것) 안에서 그리스도교(새것) 신앙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헌것(유대교 전통)’을 버리고 ‘새것(그리스도교 전통)’만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도 “단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사람들에게 과시하지 말라”(마태 6,16-18) 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단식한다는 것을 숨겨야만 숨은 것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먹고 마시고 즐기며 복음을 따라 기쁘게 살고, 홀로 있을 때는 기도와 단식으로써 하느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신앙생활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따라서 새 천년에 맞는 신앙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과감하게 낡은 전통을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바꾸어 가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12         연중 제8주일   마르 2,18-22 (나)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워


민병숙 작가




예수님, 어느덧 세월이 흘러 예수님이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아들처럼 여겨지는 나이가 됐네요. 방 벽지가 떨어진 자리에 ‘레이닝 스톤스’ ‘인생은 아름다워’ 포스터와 나란히 붙여놓았던 ‘가든 오브 에덴’이 저절로 떨어져서 부엌에 붙여 놓았더니, 부엌에 들어갈 때마다 웃으면서 맞아주시니 저도 같이 웃을 수 밖에요. 웃기는 사람하면 그저 찰리 채플린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인생은 아름다워’ 비디오를 빌려다 보니까 로베르토 베니니야말로 온 영혼을 송두리째 웃기는 익살적인 코미디언이더군요. 오죽하면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탔을까요! 포스터에서 웃음을 터트리시는 예수님을 보면 마치 예수님도 이 영화를 보시고 박장대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거야! 내가 그처럼 온갖 비유들을 들어가면서 전해주고 싶어하는 천국의 분위기가 바로 이런 것이라니까!”




금새 천국으로 떠날 것 같던 남편이 사방에서 쇄도하는 사랑에 맛을 들여서인지 출발 날짜를 마냥 미루고 있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노라니, 말씀하신 대로 과연 사람이 빵만 먹고 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황도를 한 백 통은 먹었을 겁니다. 그래서 황도를 달라고 할 때마다 우리가 ‘황도야 우지마라, 아빠가 있다’ 하고 읊어 주지요. 물론 황도만 먹고도 못살겠지요. 토마토도 먹고 딸기도 먹고, 무엇보다도 엔돌핀이 나오려면 웃음을 먹어야겠지요.




이쯤 되면 ‘웃으면 복이 와요’ 정도가 아니라, ‘웃어야 산다’를 구호로 외칠 만큼 웃음은 절실한 양식인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서둘러 파안대소하는 포스터를 내놓으신 건 아닌지요. 그런데 수십 년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만 보아온 저희 어머니가 이 포스터를 보다 참지 못해 이러더군요 “저런 가짜 예수님 만든 거 누군지 알면 가만 안 둘 거다.” 그래서 제가 빨리 “이건 영화라니까!”라고 말했지요.


평화방송에서 즐거운 성가가 나오면 꺼버리는 신자가 아닙니까. 된장도 안 담그고 이불도 안 만드는 천국에 가서 뭘 할건지 걱정이네요. 전에 동네 교회에 ‘신바람’ 박사가 와서 같이 갔더니 얼마나 화를 내던지요. 예수님도 혹시 경건한 회당에서 웃기는 얘기를 자주 해서 원로들의 빈축을 사신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렇다면 미사 때 교우들의 얼굴이 제일 아름답고 행복하게 피어나는 평화의 인사 나누기와 어린이 강복시간이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저의 어머니도 그때는 천진난만한 웃음꽃을 피우니까 순간이 영원한 스톱 모션이 되도록 도와주세요. 우리 아이들의 D.D.R을 펴놓고 막 춤을 추려는데 “그거 전기장판이니?”라며 물으시는 어머니도 결국은 우리를 웃겨줬지요. ‘가든 오브 에덴’에서 알려주시려는 것도 결국은 인생은 아름답다는 거 아니십니까? 물론 서로 사랑할 때요.


민병숙 엘리사벳/번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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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 8주일 강론 자료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2월 26일(주일)-

    1. 말씀읽기: 마르 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할 때 그것을 표시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니까 남도해야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있지만 남을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모범을 따라 엄격한 참회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낙타털옷을 입고 들꿀과 메뚜기를 먹고 살았던 세례자 요한을 생각해보면 그 제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일반적인 규정을 넘어서서 스스로에게 특별한 계율을 부여한 점에 있어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해했을 것입니다. 군중들에게는 높은 완덕을 가르치시면서도 그분과 그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씀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분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다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 곧 10월 1일에 의무적으로 단식을 했습니다. 또 기근, 전쟁, 가뭄 같은 특별한 재난을 겪을 때, 슬픔과 고난의 표현으로써 특히 단식일을 정하고 지켰습니다. 또 모범적인 신앙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한 주일에 두 번 단식을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단순한 고행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신심행위의 하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그것과 비슷한 관습을 지키고 있었는데, 아마 스승의 엄격한 생활을 본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40주야를 단식하셨습니다. 하지만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대중 앞에 드러내 놓고 하지는 말라고 하셨습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단식의 내적인 의미는 슬픔이지만 지금은 기쁨의 때입니다. 신랑의 친구들이 결혼 잔치에 초대받아 올 때 그들은 장례식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신랑은 이미 와 있으며 자기와 함께 기쁨을 나누도록 주위에 손님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러기에 단식이란 여기서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지금은 기쁨과 환희의 때이기에 단식은 이 독특한 시간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보통 이렛 동안 계속되는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그 잔치의 즐거움에 참여하여 한껏 신랑과 즐겨야 합니다. 그 때문에 초청을 받았고, 또 그것이 신랑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빼앗긴다는 말은 폭력에 의한 이별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최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다 문학에서도 <메시아의 날>을 혼인잔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때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 기쁨의 때가 앞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1세기 초대 교회에서는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2;14,23;27,9; 1고린7,5;2고린6,5에 그 증언들이 있습니다. 아마 그 단식일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이었을 것입니다. 또 1세기 말에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2세기 말엽에는 부활축일 전에 단식을 했습니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맞습니다. 복음의 정신 한 부분을 가져다 그것을 유다교 정신에 맞추려 하는 노력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의 정신도 그 핵심을 잃고, 유다이즘도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물에 담근 일이 없는 새 천이 한 번 물에 들어가면 줄어들어서 낡은 천을 잡아 등겨 찢어지거나 구멍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임이 증명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바리사이적 유다이즘입니다. 그들이 율법에 덧붙여 놓은 번잡스럽고 다루기 어려운 규정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때는 새로운 탄생을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의 회개와 완전한 마음의 변화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단지 옛것에 새로운 규정이나 의식을 덧붙이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마스커를 향하다가 예수님을 만난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0여년의 시간을 준비하게 됩니다. 회심 이후에 즉시 복음을 전했다면, 그래서 비록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대는 행위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가죽부대는 나귀나 낙타 등을 이용하여 실어 날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찰로 인하여 표피가 엷어지고 약해졌습니다. 더구나 새 포도주는 발효하여 그 부대를 터뜨리고 포도주가 쓸모없게 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았던 것입니다.

    율법의 노예가 되고 그릇된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헌 가죽부대입니다. 그 헌 부대에는 새 술인 복음을 넣을 수가 없습니다. 새 술은 편견을 버린 마음, 그것을 이해하고 맛볼 수 있는 순진한 새 마음이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복음은 유다이즘에 없는 이 새로운 정신을 인생에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됩니다. 그저 한치 앞만을 내다보면서 남을 판단하는 나. 나를 좀더 성숙시키고, 나를 좀더 말 못하게 하고, 나를 좀더 못 보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것을 고집하고, 내 틀에 상대방을 맞추려 하는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장애물이요 걸림돌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는 또 어떤 바리사이가 되어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습니까?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느낀 점을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2. user#0 님의 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2월 26일(주일)-

    1. 말씀읽기: 마르 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할 때 그것을 표시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니까 남도해야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있지만 남을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모범을 따라 엄격한 참회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낙타털옷을 입고 들꿀과 메뚜기를 먹고 살았던 세례자 요한을 생각해보면 그 제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일반적인 규정을 넘어서서 스스로에게 특별한 계율을 부여한 점에 있어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해했을 것입니다. 군중들에게는 높은 완덕을 가르치시면서도 그분과 그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씀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분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다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 곧 10월 1일에 의무적으로 단식을 했습니다. 또 기근, 전쟁, 가뭄 같은 특별한 재난을 겪을 때, 슬픔과 고난의 표현으로써 특히 단식일을 정하고 지켰습니다. 또 모범적인 신앙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한 주일에 두 번 단식을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단순한 고행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신심행위의 하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그것과 비슷한 관습을 지키고 있었는데, 아마 스승의 엄격한 생활을 본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40주야를 단식하셨습니다. 하지만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대중 앞에 드러내 놓고 하지는 말라고 하셨습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단식의 내적인 의미는 슬픔이지만 지금은 기쁨의 때입니다. 신랑의 친구들이 결혼 잔치에 초대받아 올 때 그들은 장례식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신랑은 이미 와 있으며 자기와 함께 기쁨을 나누도록 주위에 손님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러기에 단식이란 여기서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지금은 기쁨과 환희의 때이기에 단식은 이 독특한 시간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보통 이렛 동안 계속되는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그 잔치의 즐거움에 참여하여 한껏 신랑과 즐겨야 합니다. 그 때문에 초청을 받았고, 또 그것이 신랑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빼앗긴다는 말은 폭력에 의한 이별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최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다 문학에서도 <메시아의 날>을 혼인잔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때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 기쁨의 때가 앞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1세기 초대 교회에서는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3,2;14,23;27,9; 1고린7,5;2고린6,5에 그 증언들이 있습니다. 아마 그 단식일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이었을 것입니다. 또 1세기 말에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2세기 말엽에는 부활축일 전에 단식을 했습니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맞습니다. 복음의 정신 한 부분을 가져다 그것을 유다교 정신에 맞추려 하는 노력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의 정신도 그 핵심을 잃고, 유다이즘도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물에 담근 일이 없는 새 천이 한 번 물에 들어가면 줄어들어서 낡은 천을 잡아 등겨 찢어지거나 구멍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임이 증명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바리사이적 유다이즘입니다. 그들이 율법에 덧붙여 놓은 번잡스럽고 다루기 어려운 규정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때는 새로운 탄생을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의 회개와 완전한 마음의 변화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단지 옛것에 새로운 규정이나 의식을 덧붙이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마스커를 향하다가 예수님을 만난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0여년의 시간을 준비하게 됩니다. 회심 이후에 즉시 복음을 전했다면, 그래서 비록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대는 행위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가죽부대는 나귀나 낙타 등을 이용하여 실어 날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찰로 인하여 표피가 엷어지고 약해졌습니다. 더구나 새 포도주는 발효하여 그 부대를 터뜨리고 포도주가 쓸모없게 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았던 것입니다.

    율법의 노예가 되고 그릇된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헌 가죽부대입니다. 그 헌 부대에는 새 술인 복음을 넣을 수가 없습니다. 새 술은 편견을 버린 마음, 그것을 이해하고 맛볼 수 있는 순진한 새 마음이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복음은 유다이즘에 없는 이 새로운 정신을 인생에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됩니다. 그저 한치 앞만을 내다보면서 남을 판단하는 나. 나를 좀더 성숙시키고, 나를 좀더 말 못하게 하고, 나를 좀더 못 보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것을 고집하고, 내 틀에 상대방을 맞추려 하는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장애물이요 걸림돌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는 또 어떤 바리사이가 되어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습니까?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된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느낀 점을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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