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교회에서 예수성탄 대축일은 세 번 미사를 지내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외에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밤미사 때 거행하는 구유경배 예절이다. 구유경배 신심은 5-6세기경 에페소 공의회(431)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성모 마리아 대성당(로마소재)에 사람들이 베들레헴의 구유 유물을 모시게 되자 대성당 곁에 구유경당을 건설하면서 유래되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성탄에 이 경당에서 베들레헴에서 행해지는 것과 비슷한 밤전례를 지내기도 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구유는 1223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에게서 유래한다. 성인은 베들레헴을 방문해 예수님이 누워 계셨던 구유를 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보잘것없음과 가난함 속에서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성인은 하느님의 아들이 가난과 궁핍 속에서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하고 싶어서 교황 호노리오 3세의 허락을 얻어 구유를 만들어 대중 앞에서 공개하였다. 이는 성인이 신자들에게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구유를 만들어 꾸미는 풍습은 프란치스코 회원들에 의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처럼 구유의 본래 모습은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이었는데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날처럼 화려하게 채색된 구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구유 제작에 관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특히 18세기를 전후에서 독일에서는 일반 가정에 성탄 구유가 토착화되어서, 구유는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의 관습이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와 내 가정에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구유를 만들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구유는 성탄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복음을 진정으로 믿게 되고 자녀들에게 신앙을 체득시키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즉 목자들이 서 있는 곳에 나도 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바로 참여요 관심이며 친교이기 때문이다. 구유라는 것은 예수 탄생의 구체적인 한 자리를 상징할 뿐이지만, 그 보이는 자리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동참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는 바로 내 안에 탄생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구유제작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위기에 직면하였다. 특히 프랑스 지역에서는 종교적으로 충분히 계몽되고 성숙한 신앙인에게는 구유를 필요로 하지 않고 단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만 필요하다고 하여 교회에서 구유를 설치하지 못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구유는 신앙심을 감상주의나 외면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신앙으로 오도하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유는 말씀의 식탁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형상이 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성서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고 성서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도움을 주도록 만들어 질 때만이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황 바오로 6세의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유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 탄생의 위대한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한다. … 구유는 베들레헴의 순박하고 소박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그것은 복음이 되고 그리스도교 정신을 가르치는 수업의 현장이 된다. 가난하고, 작고, 이른바 세상이 가치를 두고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오셨다. 가난한 이와 미천한 이들 그리고 소외된 이들이 그분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시어 모든 간격과 장애와 두려움을 없애셨다.” 이처럼 구유는 하나의 단순한 교육적 도구나 예술작품이 아니라 전례를 보다 풍성히 해주는 것과 동시에 육화 사건의 의미를 현재화시켜주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말씀과 형상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신앙이 들음으로써만이 아니라 봄으로써도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구유를 만들고 그것을 봄으로써 성탄의 신비인 육화의 의미를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신비 앞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서방교회에서 예수성탄 대축일은 세 번 미사를 지내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외에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밤미사 때 거행하는 구유경배 예절이다. 구유경배 신심은 5-6세기경 에페소 공의회(431)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성모 마리아 대성당(로마소재)에 사람들이 베들레헴의 구유 유물을 모시게 되자 대성당 곁에 구유경당을 건설하면서 유래되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성탄에 이 경당에서 베들레헴에서 행해지는 것과 비슷한 밤전례를 지내기도 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구유는 1223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에게서 유래한다. 성인은 베들레헴을 방문해 예수님이 누워 계셨던 구유를 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보잘것없음과 가난함 속에서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성인은 하느님의 아들이 가난과 궁핍 속에서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하고 싶어서 교황 호노리오 3세의 허락을 얻어 구유를 만들어 대중 앞에서 공개하였다. 이는 성인이 신자들에게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구유를 만들어 꾸미는 풍습은 프란치스코 회원들에 의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처럼 구유의 본래 모습은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이었는데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날처럼 화려하게 채색된 구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구유 제작에 관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특히 18세기를 전후에서 독일에서는 일반 가정에 성탄 구유가 토착화되어서, 구유는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의 관습이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와 내 가정에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구유를 만들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구유는 성탄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복음을 진정으로 믿게 되고 자녀들에게 신앙을 체득시키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즉 목자들이 서 있는 곳에 나도 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바로 참여요 관심이며 친교이기 때문이다. 구유라는 것은 예수 탄생의 구체적인 한 자리를 상징할 뿐이지만, 그 보이는 자리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동참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는 바로 내 안에 탄생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구유제작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위기에 직면하였다. 특히 프랑스 지역에서는 종교적으로 충분히 계몽되고 성숙한 신앙인에게는 구유를 필요로 하지 않고 단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만 필요하다고 하여 교회에서 구유를 설치하지 못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구유는 신앙심을 감상주의나 외면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신앙으로 오도하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유는 말씀의 식탁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형상이 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성서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고 성서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도움을 주도록 만들어 질 때만이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황 바오로 6세의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유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 탄생의 위대한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한다. … 구유는 베들레헴의 순박하고 소박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그것은 복음이 되고 그리스도교 정신을 가르치는 수업의 현장이 된다. 가난하고, 작고, 이른바 세상이 가치를 두고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오셨다. 가난한 이와 미천한 이들 그리고 소외된 이들이 그분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시어 모든 간격과 장애와 두려움을 없애셨다.” 이처럼 구유는 하나의 단순한 교육적 도구나 예술작품이 아니라 전례를 보다 풍성히 해주는 것과 동시에 육화 사건의 의미를 현재화시켜주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말씀과 형상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신앙이 들음으로써만이 아니라 봄으로써도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구유를 만들고 그것을 봄으로써 성탄의 신비인 육화의 의미를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신비 앞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