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대축일

 

성령 강림 대축일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제 1독서 : 사도 2,1-11

제 2독서 : 1고린 12,3b-7. 12-13

복 음: 요한 20,19-23




루가는 신비스러운 성령강림의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특히 그 당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놀라움’과 신기한 감정을 반복해서 주석하고 있다 : “그 소리가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네 지방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그들은 놀라고 또 한편 신기하게 여기며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사도 2,6-7).

똑같은 감정이, 오늘 그 사건을 깊이 묵상하며 전례를 통하여 그 사건의 의미와 뜻을 신비스럽게 되새기고 있는 우리를 또한 감싸고 있다.

 비록 ‘세찬 바람’과 ‘불혀’의 형상 같은 외적 표징들은 없지만 성령의 능력이 부활하신 예수  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고 있다 : 성령은 주님의 부활의 가장 완성된 열매이다. 그리고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의 감사송은 이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노래하고 있다 : “주는 빠스카의 신비를 완결하시려고 우리를 독생성자와 결합시키시어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신 후 오늘 성령을 가득히 내려주셨으며, 성령은 새로 세워진 교회와 만민에게 천상 지식을 넣어주시고,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한 신앙을 고백하게 하셨나이다.”

 우리는 오로지 성령의 힘을 빌어서야 그분에 대해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더듬거릴’ 수 있다. 만일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우리가 받은 성령은 세상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1고린 2,12).




“이것은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다”




루가가 사도행전 전체의 의미를 아주 압축해서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 제 1독서 가운데는 이야기할 내용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특별히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의미가 깊은 것 같다 : 첫째는 시나이 산 기슭에서의 계약(출애 19,16-20 ;신명 5,4-5 참조)을 의도적으로 연상시키고 있는 점이고, 둘째 성령의 창조적 능력을 통해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이(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 등등) 언어와 종족의 장벽을 넘어서 한데 어우러져 이루고 있는, 거대한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모습’이다.

여기서는 야훼께서 ‘열 가지 말씀’(십계명)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충실한 사랑의 계약을 맺으시는 시나이산의 장면이 연상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때에도 혼란스러움과 요란한 소리, 그리고 타오르는 불길의 장면이 펼쳐졌었다 : “시나이산은 연기가 자욱하였다. 야훼께서 불속에서 내려오셨던 것이다. 가마에서 뿜어나오듯 연기가 치솟으며 산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다…모세가 하느님께 말씀을 올리자 하느님께서 천둥소리로 대답하셨다”(출애19,18-19).

 이 모든 상징적 표현들이 역사적 관점에서보다는 신학적 관점에서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즉 하느님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초월성을 지니고 계시지만 그분 자신이 인간에게 다가와 인간을 새롭게 변모시켜주신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하느님과의 모든 접촉은 마치 모든 것을 채워 없애버리는 불길처럼 또는 우뢰 같은 소리를 몰고 오는 천둥처럼 그 흔적을 남긴다 : 하느님의 말씀은 귀먹은 이들의 꽉 막힌 귀까지도 뚫어주신다!

 바로 이러한 유사성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루가는 그리스도교의 성령강림을 시나이산의 옛계약의 사상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새로운’ 계약의 공적인 ‘시작’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도 그들이 빠스카 후 50일이 되는 날(여기서 희랍식 명칭으로‘pentekostes\’ 즉 오순절이라는 명칭이 유래한다)에 지내왔으며, 근원적으로 볼 때 농경의식 가운데 하나(맏물들을 봉헌하는 의식)에 불과 했던 그 옛 ‘칠 주간의 축일’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차차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맺어주신 계약과 율법의 선물을 기념하여 거행하는 의미를 취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후기 유다전승에 의하면 그 당시 불길 가운데서 울려나온 천둥소리와도 같은하느님의 목소리는 아마도 그때 당시 지상의 모든 민족들이 야훼의 ‘법’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70개 정도의 언어로 구분되어 표현되었으리라고 한다. 루가의 서술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볼수 있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 하였다.”(사도2,3-4).

 하지만 이처럼 상황은 비슥하다고 하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사이에 맺어지는 새로운 ‘계약’의 의미와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여겨졌던 어떤 새로은 율법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설령께서 내리시는 것뿐이다. 또한 그성령께서는 풍성히 내리시어 마치 모 사람을 휩쓰는 일종의 전염병과도 같이 요란 스럽게 그모습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계시다. 고 성령께서 그리스도 신자의 새로운 ‘율법’이 도신다. 즉 성령께서 그리스도 신자 각자의 내면에서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가르쳐주시며 또한 그것을 그것을 판단하여 실행할 능력도 주시는 것이다.

 과연, 예레미야 예언자의 그 위대한 예언이 실현되고 있다 ; “그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하나. 내가 분명히 말해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3;에제36,25-27 참조). 성령의 선물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삶의 형태도 이루어준다 : 흔히 형식주의에 치우치거나, 또는 계산과 이해타산의 결과로 드러나는 외적 행위들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성을 평가하고 이해하게끔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성령강림이 우다교의 오순절과 비교하여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새로움’ 이란, 하느님께서 당신의 ‘대변자’라고도 할 수  있는 ‘율법’의 선물을 통해 당신 백성 가운데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의 성령”(갈라4,6)을 통하여, 즉 온전히 당신 자신으로 그들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우리들의 말로 알아듣고 있으니 어찌된 셈인가?”




바로 이런 까닭에 성령께서 당신 주위에 불러 모으시는 새로운 백성은 이스라엘 민족 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민족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루가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수많은 순례자를,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가득 채워주신’ 사도들의 선포를 통해 구원에로 이미 부르고 계시는 모든 민족들의 대표자로서 제시하고자 한다.

“그들은 ㅈ놀라고 또 한편 신기하게 여기며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마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셈인가? 이 가운데는 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사람이 있는가 하면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또 키레네 가까운 리바야의 여러지방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지금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저마다 자기네 말로 듣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였다.”(사도2,7-11). 사실상, 좀더 적절한 표현은 오늘의 입당송에서 볼 수 있다 :“주님의 성령이 온 누리에 충만하기며 만물을 보존하시니, 사람들의 말을 다 아시는도다” (지혜 1,7).

 물론 놀라운 여러 가지 언어의 기적을 나름대로들 해석할수도 있겠지만, 루가의 의도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단일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능력’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열께서는 다음 과 같은 두가지 측면에서 동시에 활동하고 계시다: 즉 그분의 현존에 의해 도취된 사도들이 마음과 입술로써 구원의 기쁜소식을 자신있게 전하는 동시에 그 소식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강력한 말씀에 마음과 귀를 순순히 열게끔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온세상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가 같은 계시 진리를 믿고 있고, 또한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들”(11절)을 다같이 기념하여 거행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그‘여러가지 언어의 기적’은 놀랍게도 끊임없이 실현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성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모든 언어를 말했던 얼마 안되는 과거의 교회는 오늘날 동서양에 걸쳐 널리 퍼져 모든 민족들의 언어를 말하고 있는 현재의 거대한 교회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모든 언어를 말하는 한몸의 지체들이므로 모든 언어를 말하는 선물도 또한 받고 있는 것이다”( I Sermoneper la Pentecoste, 3).

 이처럼 교부학적 전승이 성령강림의 장면을 -오늘 축일의 전야미사의 전례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바벨탑의 이야기(창세 11,1-9) 와 정반대되는 내용으로 파악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조직과 관련이 있는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성령의 능력은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에 의한 오늘의 제 2독서에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께서 고린토의 신자 공동체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풍성히 베풀어주신 ‘카리스마’ 즉 놀라운 은총의 선물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러한 은총의 선물들이 마치 봉사를 위해서보다는 자기 자신들을 들어높이기 위해 주어진 듯이 착각하여 서로간에 시기와 분노와 쓸데없는 공명심을 내세워 반목하는 일이 없이 교회공동체를 건설해 나가는데 참되게 사용되도록 잘 조절되어야 한다는 점을 염려하여 주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은총의 선물들이 단일한 성령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2,4-7).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교회에 베풀어주시는 ‘다양한’은총과 봉사의 선물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모든 것의 원형이시지만 모든 신자들을 똑같은 틀에 박아두고자 하지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각자 모드에게 자기 나름대로 독특하게 수행해야 할 일터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독특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저마다 철저히 자기 개발을 해야 한다: 우리가 함께하고 있는 신앙의 공동체적 운명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최선을 다하여 새로운 것을 추구해 나갈 것을 요구 한다.

 사도 바울로는 이러한 은총의 ‘다양성’ 외에도 또한 ‘단일성’을 추구해야 할 노력에 대해서도 강력히 주장한다 :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을 더욱 확신시켜주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모두가 한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12절).

 ‘다양성’은 그것이 ‘전체’의 건설을 지향하지 않을 때 조직체를 와해시켜보리는 원인이 되고 만다. 단일성은 다양성을 더 풍요롭게 해준다. 왜냐하면 단일성은 다양성으로 하여금 각 부분이 개별적으로 이루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어떤 것을 실현 시킬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교회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교회는 구성원 각자가 신앙과 사랑과 활동의 단일성 속에서 근본적으로 서로 일치 하기 위해 자신들의 테두리를 벗어나려고 노력 할 때만 이루어질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은 떠돌아 다니는 원자들같잉 되어,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구원의 활동을 펴는 일에 참여학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가 볼 때 교회의 이러한 다양성과 단일성의 일치를 이루어주시는 분이 곧 성령이시다. 즉 오순절에 사도들에 의해 선포된 단일한 구원의 메시지를 여러나라 말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언어와 문화와 종족과 심지어는 종교의 장벽까지도 뛰어넘어 다같이 ‘하느님의 크신 일들’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하신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는 모든 은총의 선물에 들어있는 저마다의 특성만을 고집할 것을 염려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어떻게 단일한 성령으로부터 비롯하는지를 가르쳐주고자 한다:“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3.13절).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정통성,세례에 대한 충실성 그리곡 우리가 매일매일의 싸음을 위해 은총과 힘의 샘에서 물을 마시는 것과도 같은 견진성사에 대한 충실성은 성령의 끊임없는 활동에 의해 우리안에 생겨나게 된다.




“성령을 받아라”




또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성령의 선물에 의해 주어진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성령의 선물을 빠스카 축일 저녁에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심으로써 주셨다. 이 대목에 대해서 여기서는 주석할 시간이 없다(부활 제2주일에 부분적이나마 살펴본 바가 있다):“예수께서 다시‘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느느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 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채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21-23).

 그러므로 죄를 사하는 권한도 본질적으로 교회를 건설하거나 또는 재건하기를 지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바로 죄가 신자들의 공동체를 와해시킨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사랑과 은총의 공동체이다. 반면에 죄는 하느님을 거스르로 형제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죄는 적개심과 파괴의 원흉이다. 이런 죄의 상태에서는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불어넣어주신, 그순간에 베풀어주신 ‘평화’의 선물이 필요하다.

 이처럼, 요한에 의한 오늘 복음에서는 성령이 무엇보다도 특히 ‘교회의’ 선물이며, 그분께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온전히 순종하며 자신을 내맡기는 자세가 교회생활의 필수적 요건이라고 하는 사실이 재차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이 교회는 ‘생기를 되찾고’ 또한 점점 더 악과 죄로 말미암아 패퇴해져 나약해져 가는 이세상에도 ‘생기를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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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대축일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성령 강림 대축일

    제 1 독서 : 사도 2, 1-11

    제 2 독서 : 1고린 12, 3b-7. 12-13

    복     음 : 요한 20, 19-23


    제 1 독서 : 부활 발현 중에 제자들에게 예고없이 성령을 보내 주신 이야기(요한 20, 19-23)를 전하는 요한과는 달리, 루가는 성령 강림을 의도적으로 시간적인 순차에 따라 엮어 놓았다. 즉 부활 후 40일이 지난 후 승천이 있고, 승천 후 열흘이 지난 후 성령 강림이 이어진다. 루가는 교회가 시작되는 과정을 특별히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루가가 전하는 성령 강림은 구약성서의 두 개의 사건에 대한 전 이해가 있어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다. 즉 바벨 탑 이야기(창세 11, 1-9)와 시나이 산 발현 사건(출애 19, 16-25)이다.

    바벨 탑 때문에 생긴 사람들 사이의 분열이 성령 강림 날에 뒤집어진 것이다. 루가의 관심은 유다인 공동체가 있는 디아스포라의 나라와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지역적인 그리고 언어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은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되고 선포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가는 지루하게 다양한 지역 이름들을 기명하고 있다.

    소리와 바람은 거의 모든 하느님 발현 이야기에 잘 알려진 요소이지만, 불 혀는 성령 강림 사건에만 있는 독특한 요소이다. 아마도 소리와 바람이 있고 나서 불 혀가 내려오기 전에 우리는 침묵의 순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침묵은 사도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도록 주의를 집중해 주었을 것이다. 시나이 산 발현 사건은 하느님 백성의 출발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서 장엄하게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 성령 강림은 신약의 새 하느님 백성의 출발점이다.


    제 2 독서 : “예수는 주님이시다.”(3절)는 고백은 희랍어권에 속한 초대 교회에서의 신앙 고백으로 전례 중에 사용된 기도이다. 즉 주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와 순명의 정을 나타내는 일종의 환호라고 볼 수 있다. 4-6절은 가장 오래된 삼위일체 정식이다. 성령,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순서로 그 일치성이 고백된다.

    고린토 교회 신자들은 특별히 몇몇 카리스마(은총의 선물)들을 지나치게 숭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런 카리스마들이 사랑 안에서 공동체의 이익이 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마찬가지로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것은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그 역할을 맡지 않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월하게 생각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각자는 서로 다른 역할이 있는 것이고, 역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성령께서 모든 사람들을 일치로 이끌어 주신다.


    복     음 : 네 개의 복음서들이 주님의 부활 후 사건들을 서로 다르게 말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즉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성령에 참여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구원을 전하는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오늘 복음에서는 특별히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이 제자들의 사명으로 부각된다. 사실 죄의 용서는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파견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죄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삼위일체의 대내관계에 참여함으로 뜻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사도들 위에 성령이 내려온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부활 대축일로부터 7주가 지나 50일째가 되는 날이기에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로써 기쁨과 영광, 평화를 특징으로 했던 부활시기가 끝나고 내일부터는 연중시기로 접어듭니다.

    오순절은 구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 축일은 농경 축제로서 첫 곡식을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바쳤던 날이었으며 과월절 및 초막절과 함께 유다인들의 3대 축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이 농경 축제는 계약 사상과 연결되면서 과거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상기하여 충성을 다짐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오순절이 신약에 와서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기념되면서 구원의 완성, 새로운 창조, 교회의 출발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실상 성령 강림은 교회의 새로운 탄생을 알려주고 있으며 교회의 생명력을 가져온 획기적인 사건이 된 것입니다.

    한곳에 모인 사도들을 비롯한 백 여 명이 넘는 제자들에게 내린 성령의 내림은 세찬 바람, 혀 같은 불길, 충만함 등으로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였고, 그들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떨치게 하여 그리스도를 증언하고픈 증거자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은총으로 그들은 이상한 언어로 말하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면서도 한 나라의 말로 알아듣게 하는 놀라운 기적, 즉 일치의 기적을 동반케 한 것입니다. 성령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하나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일치는 자신들의 옹졸함과 편협한 마음을 끊어버림으로써 참으로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 평화의 기쁨 속에서 성령을 받은 이들은 세상에 파견되어 죄를 서로 용서해 주는 화해의 사절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청하여 보내주시는 성령이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하나되는 것처럼 사랑 안에서 모두를 한 공동체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의 어두운 산 속 길을 나기브와 무사라는 두 친구가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하인들과 짐을 가득 실은 낙타들을 줄줄이 이끌고 여행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좁은 산길을 따라 한참 걷고 있는데 갑자기 발을 헛디딘 무사가 강물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강물은 거센 물살을 일으키며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기브가 망설임 없이 즉시 그 거센 강물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어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친구를 구해 냈습니다. 급류에 휩쓸려 죽을 고비를 넘긴 무사는 그의 하인 가운데 가장 솜씨 있는 하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있는 검은 바위에 자기가 부르는 대로 글자를 새길 것을 명령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랑자여, 발 이곳에서 나기브는 무사의 생명을 구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들은 지난번 나기브가 무사의 목숨을 구했던 그 장소를 다시 지나게 되었습니다. 글자가 새겨진 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있었습니다. 바위 옆에 나란히 앉아 땀을 식히며 이야기를 나누던 둘 사이에 갑자기 큰소리가 오가더니 사소한 문제로 인한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마침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기브가 주먹으로 무사의 얼굴을 때리고 말았습니다. 무사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곧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말없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위 옆에 펼쳐진 모래밭에 이렇게 쓰는 것이었습니다.

    “방랑자여, 바로 이곳에서 나기브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친구 무사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곁에서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무사의 하인이 물었습니다. “왜 친구의 영웅적인 행위는 든든한 바위에 새겨놓게 하면서 그 친구의 나쁜 행동은 겨우 모래 위에 써놓는 겁니까?” 그러자 무사는 대답했습니다. “내 친구 나기브의 용감한 행동은 나의 가슴 속 깊이 영원히 간직할 것이네. 그렇지만 그가 내 마음에 입힌 아픈 상처는 저 모래 위에 쓴 글자가 지워지기 전에 나의 기억에서 먼저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라네.”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요, 남의 허물, 실수, 죄악, 약점을 기억하기보다는 그의 장점, 선행, 좋은 인상, 친절, 부지런함 등을 오래오래 마음속에 담아두는 사람입니다. 즉 남이 자기에게 입힌 상처나 아픔은 쉽게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베푼 작은 것들, 즉 미소, 친절, 배려 등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아 매순간을 기쁘게, 감사하게 사는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탓하고 뉘우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정과 공동체 그리고 교회는 하느님의 성령 안에서 날마다 거듭나고 새로워져 새 하늘, 새 땅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간직하고 모든 이에게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참으로 작은 이들의 모임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향기를 지니면서 용서와 화해의 기쁨 속에서 주님의 평화를 심는 축복받는 하느님 백성이 되도록 합시다.

  2. user#0 님의 말:

     

    성령 강림 대축일


             1. 강길웅 신부(가)/2                      2. 서석희 신부(나)/4

             3. 김영진 신부(나)/5                      4. 강길웅 신부(나)/7

             5. 교구 주보(나)/8                  6. 김명순 박사(나)/9

             7. 강길웅 신부(다)/11             8. 김형수 신부(다)/12

             9. 김대군 신부/16                 10. 박지환 신부/19



    1               성령 강림 대축일 (가해)  “성령을 받아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2,1~11 (모든 신도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제2독서 Ⅰ고린 12,3b~7.12~13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복 음 요한 20,19~23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오순절은 구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은 ‘펜테코스테 (Pentecoste)’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50’이라는 숫자를 말합니다. 구약에서의 오순절은 과월절부터 시작하여 50일째 날에 거행되었는데 성령 강림도 구약의 오순절 날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때가 부활부터 시작하여 5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성령 강림이 구약의 오순절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오순절은 본래 농경 축제로서 그 해의 첫 곡식을 하느님께 감사의 뜻으로 봉헌했던 것을 기념하는데 과월절, 초막절과 더불어 유대인의 3대 축제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뀜에 따라 농경 축제는 계약 사상과 연결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에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받고 계약을 맺은 것이 꼭 50일째 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은 뒤에 율법에 따라 생활했다면, 신약의 백성들은 성령 강림 사건 뒤에 성령에 따라 살게 됩니다. 실제로 주님의 제자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얼마나 크게 변화되었는지 모릅니다. 겁쟁이요, 바보요, 무식했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데 얼마나 능력 있고 지혜로우며 담대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본격적인 전도 사업에 들어갔다 해서 이 날을 교회 창립일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선 일찍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당신이 입으셨던 육신을 감추시고 새로운 모습으로 제자들 곁에 계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육신이 보이진 않아도 주님이 계실 때와 같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기 위해선 성령이 오셔야 했습니다. 마치 육을 가지고 오신 사건이 성탄이라면 영으로 새롭게 찾아오신 사건이 성령 강림입니다.


    성령은 누구십니까?

    언젠가 모 성당의 임원들에게 성령에 대해서 물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성부가 아버지요 성자가 아들 예수님이라면 성령은 그럼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서로 눈치만 보며 대답을 못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까지는 아는데 성령이라는 개념은 머리에 잘 잡히지 않는가 봅니다. 아마 대부분이 그럴 것입니다.


    성령은 사실 이해하기가 애매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똑같은 위격을 가지신 독립된 존재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하나로 어우러지는 단일체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다름 아니고 바로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함께 뿜어 나오는 기운이요 영입니다. 또는 사랑이나 능력이라 말할 수도 있으며 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하는 힘, 아들을 아들답게 하는 능력이 성령입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을 빼면 하느님은 빈 껍데기가 됩니다. 마치 기름 없는 자동차와도 같습니다.


    믿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믿는 우리에게서 성령을 빼 버리면 우리는 마치 허수아비 신자에 불과합니다. 겉은 번지르르하니 그럴 듯하지만 속은 알맹이가 없는 빈 깡통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마치 깨진 독에 물 붓는 격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령 세미나를 통해서 은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상한 언어도 하고 치유의 은사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환자 방문과 철 야기도, 또는 교회 봉사에 앞장을 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독선이 심하고 아집에 묶여 있으며 남을 험하게 판단하는지 모릅니다. 한번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용서가 없습니다. 어느 땐 신부님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위 은혜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자기 지혜에 걸려 쓰러졌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주 은사에 집착합니다. 그것은 마치 꽃처럼 아름답고 근사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근하게 드러나는 열매가 더 중요합니다. 사랑이니 절제니 친절이니 온유니 하는 것들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하게 요청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성령께서는 여러분에게도 머무시기를 진정 원하십니다. 그것은 또 예수님의 약속이면서 동시에 그분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깊은 믿음과 진실한 회개로써 그분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도록 합시다.


    “오소서 성령이여.”







    2                 성령 강림 대축일 (나)  “때를 기다리며”

    서석희 신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아무리 귀하고 급한 일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렇게 빨리 세상에 내 보내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보통 수준을 조금 밑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똑똑하고 배운 사람들은 사사건건 사실을 보고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계략을 세우며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머리를 잘도 굴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기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늘 동문서답하기가 일쑤이며 깨닫는 것도 너무 느려빠진 것 같은 모습입니다. 오히려 더 많이 받은 모습입니다. 니고데모도 처음에는 답답한 소리를 하지만 나중에는 담대한 제자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또한 병든 친구를 예수님 앞에 내렸던 친구들도 목적을 위해 머리쓰는 방법이나 믿음이 특출했던 쓸만한 사람들이었고 백부장도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가운데서는 보지 못했노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단 한번 만남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자기 마을 사람들을 모두 예수님께로 인도하였을 뿐 만 아니라 예수님이 그 마을에 머무시도록 하였지만, 반면에 열두 제자들은 그만큼 시원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 모두는 조연이고 12제자가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예수님 부활, 승천 후 성령을 충만히 받은 제자들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답답하고 느리고 굼뜨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확신에 찬 영적 지도자의 모습이 되어집니다. 바로 그러한 역동적인 변화의 힘은 성령강림 사건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도행전 2장의 모든 사람들이 다 12제자처럼 쓰임 받았지는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차이는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그것은 바로 3년이 넘도록 예수님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다니며 모든 것을 보았고 들었던 훈련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서의 다른 사람들보다 둔하고 답답해 보여도 결국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이  성령강림 후에는 드디어 하나씩 깨달아지고 확신이 되고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 되어 그들 스스로 체질개선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이 어딘가 모르게 더디고 굼뜨게 느껴지고 기도해도 답답한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보며 힘을 얻으십시요. 예수님을 3년동안 따라다녀도 잘못 깨달았지만 결국 성령강림 후 모든 진리가 깨달아지며 담대한 사도로 변화된 모습처럼 복음을 듣고 묵상하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때가 되면 안되던 것 마저 더 크게 쓰임 받는 도구요, 통로가 될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3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나)   신바람 신앙생활

    김영진 신부


    무엇이든지 선입견을 갖고 대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나의 경우 우리 천주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운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졌었다. 조용하고 엄숙하며 차분해야 되는 전통적인 천주교회의 기도 모습이나, 전례관습과는 다르게 손벽을 치고, 손을 흔들며, 무용을 해대고 ‘아멘’을 외쳐대는가 하면, 방언을 한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 등, 모두가 어렸을 때부터 내가 젖어온 천주교회의 기도와 전례 모습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었다.

    거기에다 좀 알만한 신부나 수녀들도 상당수가 성령운동하면, 일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하여 나도 성령운동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말하며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다,

    신부가 되어서 몇 년이 지나 광산촌에서 본당 일을 할 때, 밀려오는 신자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하겠기에 이것저것을 지켜보았으나, 지식 유무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한 교우가, 성령세미나를 신자들에게 하게 하면 좋겠다고 여러번 말했으나, 나는 대꾸도 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원 말씀의 집에서 성직자, 수도자 성령세미나가 있다는 엽서를 받고 마음이 흔들렸다. 성령세미나에 대하여 교육을 한번도 안 받고서, 부정적인 생각만 계속 고집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나의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보려고, 그 교육에 거듭 두 번 참석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여전히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성령세미나를 좋아하는 교우들도 있으니, 그들을 위하여서라도 본당에서 배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 자신도 성령세미나는 다른 것이 아니고, 나 자신에게 고착된 내 마음의 창문을 열어, 하느님과 타인을 향하게 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닫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람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할 때, 자기 껍질만 두껍게 만들어 인간사회 속에서도 폐쇄적이 되고, 고집쟁이가 되기 쉬우며, 이기적이고 교만의 죄에 떨어지기 쉽다. 그러나 타인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이해심과 너그러움, 그리고 기쁨과 평화, 인내와 겸손의 자세를 갖게 된다.

      

    이 마음의 문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을 열 듯, 또 한낮에도 방안의 공기를 우주의 기운과 일치시키려 창문을 열어젖히듯 자주 열어야 된다. 너무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으면, 문이 녹슬어 망가지게 되고, 또 안에 있는 탁한 공기가 사람을 못쓰게 만든다.

      

    성서에서 보면 성령을 하느님의 입김, 혼, 숨결이라고도 하였으나, 또한 바람이라고도 표현하였다. 막힌 곳에서는 바람이 일지 않는 법, 자기 껍질이 두껍게 쌓여져 막혀버린 사람에게서 어떻게 성령의 바람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저 푸른 대지를 향하여 창문을 열 듯 이웃과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의 창문을 열어보자. 방안 가득히 신선한 바람을 집어넣듯 마음 가득히 성령바람을 모셔보자. 탁한 방안의 공기를 새롭게 바꾸듯이 ,탁한 마음의 상처를 씻어내고 새롭게 새 살이 돋도록 하자.

      

    얼마 전 서울방송(SBS) 명사특강에서 연세대학교의 황수관 교수가 ‘신바람 건강학’에 대하여 강의를 했다. 강의 핵심은 웃으면서 기쁘게 살자는 것이다. 그럴 때 몸도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항 교수의 신바람 건강학 강의를 들으면서, 신앙인들에게도 신바람 신앙생황을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성령바람이 바로 신바람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성령바람은, 신바람 신앙인이 되도록 사랑, 기쁨, 평화, 너그러움, 인내, 관용, 성실, 양순, 절제를 가져다 준다.


    사랑․기쁨․평화 주는 성령바람


    또 성령바람은, 무서움에 떨던 제자들을 용감하게 하였듯이, 용기를 주고, 무능한자를 유능하게 하며, 분열된 이들을 하나로 엮어준다. 가난과 병고와 고독, 슬픔, 괴로움 속에서도 실망과 좌절을 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며, 생활고로 찌든 얼굴에 활짝 웃는 웃음을 선사한다, 영혼이 없는 사람이 죽은 사람인 것처럼, 성령이 없는 신자와 교회는 죽은 신자, 죽은 단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성령은 바로 신자와 교회를 혁신시키는 혁명가라는 것을, 나는 그간의 성령세미나 강론을 다니며 체험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실 적에, 구경 나왔던 시몬은 군인들에 이끌려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옆에 설 수 있는 영광과 은혜를 입었듯이, 나도 마지못해 참석하게 된 성직자, 수도자 성령세미나를 통하여, 그리고 수없이 불려 다니고 쫓아다닌 성령세미나를 통하여, 형식적이고 고착된 신앙생활에서 용기와 인내, 사랑과 기쁨을 주는 성령바람을 만나는 은혜를 입었다, 누구든지 신바람나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싱령바람을 향하여 마음의 창문을 열자.






    4             성령 강림 대축일 (나해)   성령은 하느님의 기운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2,1~11 (모든 신도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제2독서 Ⅰ고린 12,3b~7.12~13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습니다)

    복 음 요한 20,19~23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구약에서는 성령을 히브리말로 ‘루아흐’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에서는 ‘프네움마’라고 하는데 입김, 숨결, 호흡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에 ‘세찬 바람이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찬 바람은 바로 힘찬 성령의 충만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숨을 내쉬시며’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숨을 내쉬셨다.’는 말씀의 뜻은 주님으로부터 성령이 직접 발산되셨다는 표현이 됩니다. 즉 다른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열흘만에 성령을 보 내 주셨는데 오늘 요한복음을 보면 부활 발현과 함께 예수께서는 바로 성령을 내주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성령강림이 동시에 있습니다.


    성령은 천주 제3위로서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에게 발산되어 나오는 기운(능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하는 것이 성령이며 아들을 아들답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신비롭게 일치시키는 것이 성령이며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드러내는 것이 성령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에게서 성령을 빼면 하느님은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마치 휘발유 없는 자동차와도 같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약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정성들여 가르쳐 주셨고 깨우쳐 주셨건만 그들은 여전히 진리를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안 계신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사공 없는 나룻배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 떠나신다는 뜻을 계속 암시하시자 그들은 불안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협조자가 바로 성령입니다.


    주님이 안 계신 캄캄한 세상은 이제 성령이 밝혀 줄 것이며 부족한 지혜와 지식은 성령이 채워 줄 것입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복음을 전파할 담대함도 성령이 줄 것이며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낫게 할 치유의 능력도 성령이 줄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성령으로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처럼 하게 될 것입니다. 언변도 기적도 그분이 다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 받았습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배우지도 못한 제자들이 동시에 여러 나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감동적인 대중 설교를 통해 한꺼번에 3천 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다른 곳에서는 장정만도 오천 명이 예수님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오죽잖은 인생이 지식인과 부자와 세도가들을 압도합니다. 성령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은혜를 생활에 실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윤기있게 번쩍번쩍 빛나는 삶, 재미있게 신이 나는 기쁨의 삶을 신앙 안에서 구현시켜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바보요 멍청입니다. 좋은 선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쓰레기통을 뒤지는 서글픈 존재들입니다.


    한 자매가 있는데 얼굴엔 늘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얼굴은 예쁜데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아들 중에 하나가 정신 지체자였습니다. 자매는 그것이 항상 고통이요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 안수를 받고 나서는 근심과 불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전에는 아들 땜에 못 살 것 같더니만 성령의 은혜를 받으니 아들 땜에 살맛이 나게 됐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사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어둠을 빛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킵니다. 무엇이든 사람으로 하여금 살맛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그릇이 깨끗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철저한 회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쥐어짜서 진정으로 뉘우쳐서 회개할 때 성령은 찾아 주십니다. 아니 그것마저도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참된 회개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소망합시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회개합시다. 이것이 능력을 얻는 길입니다.






    5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맨 처음으로 무덤에서 울고 있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날 저녁에 예수께서는 공포와 불안에 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보냅니다”(요한 20,21). 이 파견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당부이자 마지막 당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세상구원”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이 사명을 마치시고 세상을 떠나가시면서 “나도 그대들을 보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선교와 제자들(교회)의 선교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일깨워주는 매우 뜻깊은 말씀으로 오늘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서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한 가지 사명을 명시하여 “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굳이 사죄권에 국한시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권한이 개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 모든 곳곳이 썩었다 할지라도 교회만큼은 도덕과 양심의 보루로서 세상과는 질적으로 달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올바른 성령관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령을 어떤 초인간적, 초자연적인 신적 능력 또는 그런 현상으로 생각하여 성령을 비인격화하고 사물화하는 오류에 빠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 강림시 예수님을 통하여 오신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우리의 위로자 변호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성령과 성령이 주시는 은사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성령과 은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성령을 축복의 항목이나 재산의 항목 정도로 전락시키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능력이요, 베푸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이라 하겠습니다.


    셋째, 성령은 우리에게 세상에 나가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을 위한 선교 공동체로 존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복종하는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의 생일인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을 듬뿍 받아 그 재능을 교회 공동체의 이익과 복음전파를 위해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6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나)   주님의 손

    김명순 루피나/영문학 박사


    어느 주일,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차대전 후 모든 것이 파괴된 독일에서 병사들이 허물어진 성당을 복구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상이 산산조각이 난 것을 보고는 천신만고 끝에 수많은 조각을 붙여서 제 모습을 갖추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주님의 양손만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실망해서 앉아 있었는데, 한 병사가 일어나 제단 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놓았습니다.

    없어진 주님의 손/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주님의 손을 대신합시다.

    이 글귀로 말미암아 이 성당은 유명해졌고 많은 교우들이 이 성당을 찾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손은 과연 어떤 손일까요?


    첫째, 주님의 손은 기도하는 손입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가 하느님께 두 손 모아 감사와 찬양의 마음을 표현하거나 두 손을 하늘을 향해 활짝 펴고 세상의 것보다 하늘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려는 듯 기도하십니다.


    둘째, 주님의 손은 치유의 손입니다.

    십팔 년 동안이나 병마에 사로잡혀 허리가 굽어져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자에게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멀어졌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루가 13,10-13).

    어렸을 때 배가 자주 아프던 저를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손으로 제 배를 살살 문지르면서 “엄마 손은 약손이다”를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면 배가 따뜻해지면서 아픔이 사르르 사라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어머니의 사랑이 치유의 효과라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사랑의 손을 펴서 치유하신 예를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 베드로 장모의 열병 등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셋째, 주님의 손은 강복하시는 손입니다.

    영원한 사제이신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어린이를 앉히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습니다.


    넷째, 주님의 손은 기적의 손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 바람을 잠재운 기적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전능은 피흘리면 싸매 주시고, 눈물 흘릴 때 닦아주시는 사랑이 가득한 주님의 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과연 얼마만큼 주님의 손을 닮아 가족에게 지역 공동체의 어려운 동료에게 도움과 희망을 주었는지 반성해 봅니다. 주님의 손을 대신 할 수 있는 조그마한 힘이라도 주십사고 오늘도 저는 두손 모아 기도 드립니다.







    7               성령 강림 대축일 (다해)  성령의 은혜로 살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2,1~11 (모든 신도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제2독서 Ⅰ고린 12,3b~7.12~13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복 음 요한 20,19~23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오순절은 과월절, 초막절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입니다. 오순절을 희랍어로는 ‘펜테코스트(Pentecost)’라고 하는데 이 말은 ’50일째의 날’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의 오순절은 그렇습니다. 가장 큰 명절인 과월절(빠스카 축제)을 지내고 꼭 50일째 되는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며 또한 그 해의 첫 농사인 밀 수확을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축제입니다. 그런데 이 오순절이 바로 신약의 성령 강림과 연결이 됩니다.


    신약의 빠스카 축제인 부활이 지나고 꼭 50일째 되는 날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는데 이 날은 또 바로 구약의 오순절 축제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성령 강림이라는 신약의 오순절은 구약의 오 순절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채워 주고 완성시켜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신의 빠스카를 통해서 구약의 빠스카를 참되고 완전하게 성취시켜 준 것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밤새워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을 선발하셨지만(루가 6,12~16참조) 그러나 제자들은 거의가 무식한 겁쟁이였으며 예수님이 떠나신 뒤의 교회를 이끌면서 신도들을 지도하고 복음을 전파 할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지성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님의 날’이 오면 재수좋게 ‘한 자리’가 주어지지 않나 하는 야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예수님의 3년 동안의 전도생활의 업적은 이제 다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마저도 끝까지 주제 파악을 못했으며 가뜩이나 오합지졸이었던 그들은 뿔뿔이 다 흩어질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업적은 다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때의 상황은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묘한 일이었습니다.


    그 날도 제자들은 두려워서 다락방에 모여 숨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뒤의 세상은 실로 황량한 벌판에 내던져진 어린 고아와 같았습니다. 로마의 힘과 유대인들의 세력이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있는 집안을 가득 채우며 혀같은 것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 성령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전에 약속하신 ‘협조자’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협조자가 누굽니까? 그는 놀랍게도 하느님 자신의 영이요 기운이었습니다. 다시말해 하느님의 그 놀라우신 능력이 제자들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뒤집어지고 세상이 뒤집어집니다.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바보 같은 제자들이 여러 가지 외국어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했으며 로마의 권력과 유대인들의 세력이 살벌한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뿐만도 아닙니다. 말 한마디로 앉은뱅이를 고쳐 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성령의 은혜가 절실하게 요 청됩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의 기쁨을 잃고 있으며 신앙을 통해서 오는 은혜의 맛을 모르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으며 기도를 한다 해도 형식적으로 하는 이가 태반이고 성서도 읽는 이가 드물며 말씀의 생활을 못하니 사랑의 에너지가 채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기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계에 기름이 없으면 잘 돌아가지 않습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차라도 굴러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 도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아니, 하루만 굶어도 힘을 못쓰게 됩니다. 성령은 바로 그런 음식이요 기름이며 에너지입니다. 영의 에너지입니다.


    에너지라는 표현을 해서 죄송스럽지만 실제로 성령은 하느님의 에너지입니다.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하는 능력과 힘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성령을 받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이 하느님의 힘을 내게 됩니다. 인간에게서 하느님의 에너지가 나온 다면 안되는 것도 없고 못할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는 진정한 회개에서 오며 감사에서 오고 또 용서에서 옵니다. 눈물 흘리는 깊은 회개와 그리고 뜨거운 감사,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참된 용서가 아니면 성령의 은혜는 기대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어떤 은혜를 간구하십니까? 그러면 다시 회개합시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또 용서합시다. 그러면 그분이 당신 뜻대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8                 성령강림 대축일 (다) 오소서, 성령이여!

    김형수 신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이르렀을 때, 그분은 사도들에게 “다른 빠라끌리도”를 보내주시겠다고 선언하셨다(요한 14,16).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이 진리의 성령을 예수께서는 빠라끌리또라고 부르신다. 빠라끌리또란 ‘위로자’, ‘협조자’ 흑은 ‘변호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기서 ‘다른’ 흑은 두번째 빠라끌리또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그분 자신이 우선 첫번째 빠라끌리또이시기 때문이다(1요한 2,1). 그분은 과연 기쁜 소식을 가져다주신 첫번째 빠라끌리또이시다. 성령께서는 그분 다음에 또 그분을 통해 오시어, 교회를 매개로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사업을 세상에서 계속 추진하시는 것이다.


    그 불꽃을 내리소서 – 성력과 교회의 시대


    오순절 사건은, 빠스카 주일에 이미 같은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일이 결정적인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하는 말씀으로 그분을 건네주셨다. 그때 다락방 안에서 ‘문을 잠근 채’ 일어났던 일이 오순절 날 사람들 앞에서 외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때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다락방문을 박차고 나가, 예루살렘 주민들과 축일을 기해 거기 모인 순례자들을 향해 나아가, 그리스도를 중거하였다. 이렇게 해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중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중인이 될 것이다”(요한 15, 26-27)하신 예수의 말씀이 실현되었다.

      

    “성자께서 성부께로부터 지상 사명으로 위탁받으신 일을 마치신 다음, 오순절의 날 성령이 파견되어 오셨다. 그리하여 성령이 항구히 교회를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신자들이 한 성령 안에서 성부께로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성령은 생명의 영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솟아오르는 샘이시다(요한 4, 14).

    이 성령을 통하여 성부는 죄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마침내는 그들의 죽은 육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시키실 것이다(로마 8,10-11)”(교회헌장 4항).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순절을 교회의 탄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교회의 시대는 그 막이 열린 것이다. 교회의 시대는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기도하며, 하나로 모여 있던 사도들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시작되었다.


    더러운 것 씻으소서 – “성령을 받아라”


    오늘 듣는 요한 복음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빠스카 사건들의 서두에 같은 다락방에서 들려주셨던 말씀들과 대조시켜 생각해야 한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성령을 통해 이어 나가시겠다고 누차 밝히셨다.  사람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위에서 ‘숨(영)을 거두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이제는 영광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권능을 가지고 “그들 위에 숨을 불어넣으셨다”.


    주님께서 오셨을 때 거기 있던 사람들은 기쁨에 싸여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리라”(요한 16, 20)고 하시며, 수난 전에 그분 자신이 약속하신 그대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후의 만찬 때 고별사에서 선언한 중요한 내용이 실현된 것이다.

    다름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는 분으로서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모셔다’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그분을 모셔온 것은, 그분 자신의 ‘떠남’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 성령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말하자면 당신 십자가 수난의 상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그분께서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의 부활을 확증하는,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지을 수 없는 죄책으로 남아 있던 십자가의 상처를 굳이 보여주시며, 성령을 건네주신다. 이것은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해’ 성령을 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사도들의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한) 죄에 대한 용서였고, 게다가 예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신 것은, 그들로서도 교회 안에서 다음 후계자들에게 그 같은 권한을 넘겨주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이 권한은, 성령의 구원적인 활동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마음의 빛’이 되심으로써, 즉 양심을 밝혀주는 빛이 되심으로써, “죄를 드러내 밝히신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악을 깨닫게 하고, 동시에그 를 선으로 인도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따라서 죄의 용서를 위해서, 필요 불가결의 조건인 인간의 마음의 회개는 성령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내적 통회를 전제하는 참다운 회개 없이, 또 자기 삶의 태도를 바꾸겠다는 성실하고 확고한 결심이 없이는, 죄가 “사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성령은 인간의 죄, 이 세상의 죄를 밝히 드러내고, 동시에 용서하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 죄로 인한 하느님의 아픔, 하느님의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수난, 죽음, 부활 안에서 구원하는 사랑으로 바꿔주는 분이시다.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창조와 구원의 역사 전체에서,  성령이 이룩하신 가장 위대한 업적은 바로 ‘강생의 신비’이다. 강생은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던” 분, “당신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던”(요한 1,14)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아직도 우리 안에, 교회 안에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서 현존하시는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들”(로마 8,14)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인간 안에 ‘하느님의 자녀로 되는 변화’는 강생의 신비를 통해, 즉 영원한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새로남 혹은 거듭나는 삶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당신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실 때”(갈라 4,6) 이루어진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아들로 삼아주시는 영을 받게 되고,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로마 8,15). 이처럼 성화의 은총으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성령의 업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시편 작가의 입을 통해 “당신께서 얼(영)을 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누리(세상)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 하며 노래한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1고린 12,3)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신을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궁전으로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을 힘입어 자신을 정화하고 성화시키는 가운데, 세상 안에서 “세상의 모습을 새롭게 하는 일”에 기여함으로써 명실공히 하느님의 성령의 자녀로 성장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9                 성령강림 대축일 <성령은 누구이신가?>

    김대군 신부



    “성령은 누구이신가?” 이 질문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우리를 매우 당황하게 만든다.

    천주교를 믿는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을 뿐더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표시로, 모든 공식적 기도 전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성호경을 외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입교하는 예비자나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으례히 성부는 누구이시고, 성자는 누구이시며, 성령은 누구이신지를 설명해야 할 입장에 놓이곤 한다.

    성부와 성자께 대하여는 우리 인간의 부자(父子)관계가 있고, 또 “천지창조사업”과 “인류구속사업으로 그 하시는 일을 설명하여 어느 정도 이해시킬 수 있으나, 성령께 대하여는 그 명칭 자체가 비물질적일뿐더러 어떠한 형체로써 비유하거나 상상을 하게 함이 매우 어려움으로, 그 개념을 갖도록 해주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단순히 초대교회로부터 전해져 오는 전통교리의 문답을 외우면서, 예수께서 계시하신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는 정도로 얼버무리거나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10여년 전부터, 개신교에서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오던 “심령 부흥회”나 “성령운동”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고, 4-5년 전서부터는 대대적으로 시도되어, 현재 그 참가자 수가 십만을 넘는 경지에 이르렀다.


    소위 “방언”이나 “치유”, “예언”이나 “구마” 등,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마디들이나, 일부 분별없는 사람들의 지나친 언행으로 인하여, 성령운동에 대하여 나쁜 선입견이 많은 교우들에게 생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면에 성령운동을 통하여 새로운 열성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그 생활이 아름답게 변하며, 놀라운 치유를 경험한 체험담을 듣고 보면서, 성령으로 인한 새로운 삶에 대하여 막연한 기대를 갖는 교우들도 많이 있음도 사실이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영은, 특별히 하느님께 뽑혀 귀하게 쓰일 사람들에게만 내리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백성을 구원할 모세나, 다스릴 장로들,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예언자들, 주의 백성을 이끌고 다스릴 왕들에게 내리시고, 특히 전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께 내리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어느 사람에게 주의 영이 내리셨다는 말은, 그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띄고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였고, 그 사람에게는 인간의 자연적 능력 이상의 초자연적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을 뜻하였다.


    그 능력이 어떤 때는 솔로몬 왕에게서처럼 놀라온 지혜와 지식으로, 어떤 때는 삼손에게서 처럼 무지무지한 힘으로, 어떤 때는 각종 예언과 분별로서 나타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그와 함께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한편 요엘과 에제키엘,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불리운 사람, 특별한 사명을 띈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되어 온, 주의 영이 장차 올 시대에는 많은 사람,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런 다음에,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  이들은 꿈을 구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그 날 나는 남녀 종들에게도 나의 영을 부어 주리라”(요엘 3,1-2).

      

    한편 인류의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이루어진,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으로 일관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이 성모님께 잉태되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었으며,”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아가” 단식하시면서 기도하시었다.


    그리고 공생활 도중 당신의 구세주로서의 모든 놀라운 행적들, 즉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알려주며, 눈 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는”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의 성령이 당신에게 내리셨기 때문임을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말씀하셨다. 또한 당신이 마귀를 제압하고 쫓아내심도, 바로 성령의 힘으로 인한 것임을 말씀하셨다(마태 12,28).


    동시에 당신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는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요한 15,15~17).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 16,7). 그리고 그 성령께서 오시면, 그들을 깨우쳐 주시고, 굳세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바라고 기다리며 기도하기를 명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6, 12).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친히 숨을 내부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주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2-23). 구약에서는 특별한 사명을 떤 사람에게만 주어졌던 주의 영은, 이처럼 예수님에 의하여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약속되었고 주어지게 되었다.

      

    이는 성령강림 때의 현상과 사도들이 세례를 받은 사람들 위에 손을 얹음으로 성령이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현상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내리신 주의 영은 예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대로, 예수의 말씀을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마음을 깨우쳐 주시어,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신념을 갖게 해주었다. 또한 믿는 사람들에게 오신 성령께서는, 놀라운 지혜와 언변을 주시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보호해 주셨고, 놀라운 기적과 능력으로써 그들을 협조해 주셨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고, 그분의 인도하심대로 살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요한 3,5)고 하셨고,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로마 8,9)고 하셨다.

      

    성령의 선물을 바오로 사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신다. 첫째는 봉사의 은사이고, 둘째는 성령의 열매이다. 봉사의 은사(카리스마)는 성령의 놀라운 힘, 또는 능력을 말함인데, 이것은 개인의 성덕과는 관계없이 공동체의 이익과 교회의 건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주시는 것으로서, 바오로 사도는 1고린 12장과 14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계신다. 실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의 은사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으나, 바오로 사도가 특별히 꼽고 계시는 은사는 대충 9가지이다. 즉 지혜, 지식, 믿음, 치유, 기적, 예언, 영의 분별, 이상한 언어, 이상한 언어의 해석이다.

      

    그리고 성령의 선물 중에서 우리 각자의 생활에 가장 중대한 변화를 주는 선물인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신다.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육체의 욕정을 채우려 하지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스릅니다.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갈라 5,16-17.22). 이들 9까지 열매야말로 우리 인간의 모습을 하느님의 모상답게, 아름답고 거룩하게 해 주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 이외에, 성령의 선물로서 언급되는 것이 성령의 칠은으로서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고 있다. “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이사 11,2). 이를 교회는 전통적으로 일곱가지로 분류했다. 즉 슬기, 통달, 의견, 굳셈, 지식, 효경, 두려워함이다. 이는 우리의 영혼을 밝히 비추고 믿음을 굳게 하여, 그리스도를 용감히 따르고 증거할 수 있게 해주는 도움의 은총이다.


    사도 요한은 그 서간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 예수에서는 “누구든지 내 계명을 지키면 그 안에 머물겠다”고 하셨고, 당신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사랑은 우선 용서해 주는 것이다. 미워하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아니한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모든 증오심을 몰아내자. 주님이 내 안에 주인으로 오시어, 나의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변화시켜 주시고, 나를 선하고 아름다운 삶에로 나갈 수 있게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자.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주님께만 집중하여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 믿는 이 모두의 목표가 되었으면 한다.






    10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박지환 신부


    ꡔ오소서 성령이여ꡕ

    봄이 되니 겨우내 죽은 듯하던 나무 가지 끝에서 새 잎과 꽃봉오리가 싹터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위에 얼어죽어 말랐던 나무 가지에서는 봄이 되었는데도 또 봄이 다 가고 여름이 되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겨울 동안에는 죽어 마른 나무 가지와 얼어 잠든 가지를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봄이 되어 생명의 기운이 통하는 가지는 생명의 표지이니 잎과 꽃이 나옵니다. 생명력이 통하여 흐르는 나무 가지는 봄의 햇살이 오기를 기다려 성장을 시작합니다.


    이제 성령 강림 대축일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하여 흐름으로써 우리를 성령의 사람으로, 성령의 궁전으로, 성령의 도구로 만들어 남들에게까지 가시고자 하십니다.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나무 속과 껍질과 뿌리와 줄기에 물기가 통하여 흐르며 움직이는 생명력처럼 우리의 몸과 맘과 말과 행위 속에는 성령께서 계시며 성령께서 흐르듯 지나시며 적시듯 가득 차시며 깨끗이 하시며 힘차게 하시며 자라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며 굳세고 의롭게 하십니다.


    우리의 말마디 속에 그 말소리 속에 그 말 뜻 속에 그 말을 적은 글 속에 성령께서 오실 수 있으며 계실 수 있고 오시고 있어야 하며 살으시고 움직이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과 행동, 마음과 생각이 성령께서 좋아하시고 즐기시고 기뻐하시도록 꾸미고 마련하며 삼가고 다듬도록 합시다. 우리는 음식을 준비하고 방을 치우고 방석을 깔고 집안을 치우고서 손님을 오시라고 초청합니다.


    신자 여러분! 「오소서 성령이여!」라고 기도하기 전에 성령께서 오실 수 있도록 사실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준비하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예를 들어 성령께서 도저히 우리에게 오실 수 없도록 무준비 상태 또는 잘못된 준비 상태에서 성령을 오시라고 목청 높여 아무리 노래하고 기도하여도 성령께서 오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실 수가 없습니다.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생명력이 흐르지 않는 나무는 봄이 와도 소용이 없고 나무 노릇을 못하듯이 성령이 통하지 않는 신자, 성령이 흐르지 않는 말과 행동과 생각의 주인인 신자들에게는 하루 속히 성령께서 오실 수 있고 와 머무르실 수 있도록 먼저 힘써야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령께서 우리 본당에 우리 공소와 우리 가정에 우리 각자 자신 안에 충만히 내려오시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나서 기도를 바칩시다.

    성령께서 오시는 길은 일곱가지가 있으니 곧 칠 성사입니다.

    명백하고 정확한 이 일곱 대문을 잠가 놓고서 막아 놓고서 울타리와 담을 넘어서 오시라고 소리지르며 손짓을 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며 성령을 조롱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오소서 성령이여!」라고 우리는 성령께 떳떳이 간곡히 청하며 기도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이 성령강림 대축일을 계기로 우리의 영혼 상태와 신앙생활을 재점검 재정비하도록 합시다.






  3. user#0 님의 말:

     

    성령 강림 대축일


           

    11. 강현홍 신부/20                 12. 박기주 신부/22

            13. 윤임규 신부/24                 14. 허성규 신부/26

            15. 김정원 신부/28                 16. 조순창 신부/29

            17. 김정진 신부/31                 18. 정덕진 신부/33

            19. 최기산 주교/34                 20. 유영봉 신부/36

     

    11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강현홍 신부


    ꡔ성령이여 강림하사 힘과 용기를 주소서ꡕ

    그리스도 신자의 생활은 계속되는 전투상태요 그리스도교 정신은 용감무쌍한 정신입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령의 강림을 받은 이래 그리스도교 군인의 장수로서 말에 있어서는 용기가 있었고 행동에 있어서는 대담부적(大膽不適), 박해를 당해도 부동함이 산과 같았습니다. 첫째로 말에 있어서 용기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이제까지 담력은 적고 겁이 많아 주님을 버리고 도망도 치고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공포심은 여전히 가시지 않아 유대 사람들을 무서워하여 실내 깊숙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성령으로 충만되자 용기는 전신에 넘쳐 실내에서 뛰쳐나와 공공연히 주의 가르치심을 설파했던 것입니다.

    유대사람을 향하여 당당히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책망하고, 여기에 대하여 뉘우침을 권유했던 것입니다. 체포되어 매를 맞고, 이후는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설교를 해서는 안된다고 금할지라도 우리는 보고 들은 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계속해서 전도를 했던 것입니다.


    사도들뿐이 아니요 순교자, 박사들도 관리나 민중이나 반대자 앞에 서서 무서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고 태연하게 같은 대답을 반복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이 용기, 이 말의 용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자기의 신앙으르 공표하고 자기가 믿는 교를 변호하고 자기가 믿는 교의 뛰어나는 점을 세상에 널리 설파 선전하기 위해서는 이 용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외교인들 가운데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신앙을 공표해야 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공장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일상 교제에 있어서 기회는 너무 많아서 걱정일 정도입니다.

    신자 여러분!


    성령의 은혜를 빕시다. 힘을 구합시다. 주저치 말고 얼굴을 붉히지 말고 용감하게, 대담하게 신앙을 공표하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권고할 용기를 구합시다.


    둘째로, 저들의 행동은 대담 부적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재주도 없고 이름도 없고 돈도 없는 대부분이 무식한 어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선전하고 세계를 귀화시킨다는 것은 아무리 대담하고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도저히 저들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느낄 정도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은 성령의 힘으로 굳세어지게 되자 조금도 주저치 않고 정복사업에 착수하여 대대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우리도 우선 우리 자신의 정복을 시작합시다. 성령의 힘을 구하여 용감하게 우리 자신과 전투를 합시다. 사욕과 전투하고, 악습과 전투하고, 악마의 유혹과 전투하여 이긴 후 주위 사람들도 정복하도록 힘씁시다.


    셋째로, 박해를 당해도 부동함이 산과 같았습니다. 사도들은 박해를 당하여 매를 맞고 투옥되고 조롱당하고 능욕을 당했습니다마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런 곤욕을 즐거운 것이라 기뻐했습니다. 박해자들도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당황할 정도였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순교하였습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는 십자가를 보자 “아, 착한 십자가여, 오랫동안 갈망하고 주의해서 사랑하고 찾아 헤매었던 십자가여”하고 기뻐 뛰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싸우는 장소입니다.

    신앙을 완전하게 하고 꽃이나 열매있는 신자가 되려면 박해를 면키 어려운 것이니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2디모테오 3,12)하고 성 바울로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면키 어려운 박해, 그 박해를 타개하기 위해서, 아니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기 위하여는 성령의 힘이 크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기도합시다. 열심히 기도합시다. 사도들에게 저런 힘을 주신 성령이 역시 우리에게도 같은 힘을 주실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열심히 성령께 기도 드립시다.






    12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박기주 신부


    ꡔ성령과 함께 사는 생활인이 되자ꡕ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성부께로 돌아가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당신께서 가시는 중대한 이유는 성령을 보내고저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당신들에게 더 유익합니다. 내가 떠나가면 협조자를 당신들에게 보내겠습니다.”(요한 16,7)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씀도 들려주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당신들에게 보내주겠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시오”(루가 24,22)


    오늘 독서인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오순절이 되었을 때 신도들이 모두 예루살렘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바람 같은 세찬 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우더니 불길 같은 혀들이 가가 사람 위에 내리자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모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을 통하여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1고린토 12,3.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 어떠했었나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본시 무식하고 우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악인의 손에 잡혀죽고 또 부활하실 것을 적어도 3차나 미리 말씀하셨지만 죽으신 다음에는 그만 실망 낙담하였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사도 1,6)하고 여쭈어볼 만큼 예수를 현세적인 군주나 혁명가로 생각하여 이스라엘 독립과 제패만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가득히 받은 다음에만 그들은 모든 것을 확실히 깨닫고 자기들의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들었으니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먼저 전도를 시작하여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 2,38)고 대중에게 열성적인 설교를 한 결과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 날이야말로 천주교회의 창립이 완성된 날이고 본격적인 복음 전도의 활동을 개시한 날이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또한 애덕이 깃든 공동생활을 하여 남들이 칭찬한 초대 교회의 신자들처럼 그들 사이에 성령이 실재하는 결과로서 일어났던 일들이 오늘날에도 또한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성세성사와 견진성사로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의 많은 이들이 성세와 견진을 받지 않은 것처럼 즉 성령이 내 안에서 살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고린토 전서 12장과 14장에 나오는 황홀한 은혜인 방언, 예언, 통역, 치유 같은 특별한 은혜는 초기 시대보다 오늘날 현저히 적습니다만 오늘날에 있어서 성령의 은사는 보다 일상적인 – 알기 쉽고, 교훈적이고, 유익하고, 봉사적인 – 것인 만큼 부엌이나 안방, 학교, 공장, 회사 출퇴근, 버스 안에서건 간에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 말씀대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 그리스도는 내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해서 모든 이에게 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량, 신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디아 5,22)


    이것들은 아무리 높이 평가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한 고귀한 것들로서, 일생을 안방과 부엌에서만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의 숨은 사랑일 수 있으며, 불우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서 병원이나 구호 기관에서 봉사하는 간호원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탄광 깊은 곳에서 종일 탄만 캐내는 성실한 광부일 수도 있고 권력 있는 정의로운 정치 지도자, 돈 많은 친절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 중에서도 아빠 하느님은 결코 나를 잊지 않으신다는 숨은 인내일 수도 있고 고요한 기도 중에 온 세상을 구원하고저 하는 갸륵한 뜻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혁명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교회 역시 새로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혁명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교회는 쇄신되어야 하며 과거 어느 때보다 믿음에 기초를 둔 신자들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은사가 절실한 현대입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을 현대인에게 전하며 주님 안에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을 할 때만 가능합니다. 마치 태양광선이 죽은 나무도 비추고 산 나무도 비추지만 거기에 일으키는 영향은 아주 다르듯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는 사람과 성령을 떠나 죄악 속에 사는 사람과의 차이도 아주 다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이 세상의 물과 같습니다. 물은 그다지 드러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없어지고 나면 모든 것이 변하고 죽음만이 감도는 황막한 사막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우리에게서 떠나신다면 자신은 물론 온 세상에 기쁨과 즐거움, 웃음과 미소, 사랑과 생명은 사라질 것이며 어둠과 죽음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량, 신실, 온유, 절제를 따라 우리의 일상생활을 거룩히 지내고 내 이웃에 봉사할 수 있을 때만이 성령은 참으로 우리 안에서 생활하실 것이고, 또한 오순절에 사도들이 불타는 혀처럼 맹렬히 전도에 나선 것같이 우리 사회도 성령의 불로 조용히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13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윤임규 신부


    ꡔ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성령ꡕ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냥 흘려들은 이 독서는 아주 중대한 순간을 얘기합니다. 극적인 순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치는 것을 본 제자들은 실망과 공포로 제각기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으신 사건이 단순한 실패로 끝나지 않고 성부께서 그분을 부활시키셨고, 그분이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남을 본 제자들은 하나씩 예루살렘에 집결하여 예수께서 생시에 말씀하신 대로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스승의 비참한 죽음으로 인해 용기를 잃은 그들은 성령께서 오시자 용기 있게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혁명적인 선포를 하게 됩니다.

    즉 “당신들이 몰아 죽인 그 예수가 살아났다 말이요”라고 외칩니다. 정말 재판정의 판결을 허위라고 뒤엎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용기 있는 발언을 하게된 이면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때문이요 성령께서 그들 마음에 그리스도를 증언할 용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성령”에 대해 대단히 낯선 느낌을 갖습니다. 뭔가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는 거리가 먼 분으로 여깁니다. 성삼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버지이신 성부께 대하여는 우리가 자주 기도 드리고 좀 알듯하지만 그 두 분께서 말하시는 성령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실정입니다.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히브리인들은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분의 활동까지 말합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성서에서 “영”, “바람”, “숨결”, “불”, “비둘기”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자연현상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날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이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자연현상들을 자기네들이 체험한 하느님의 활동에 직접, 간접으로 연결시켜 말했습니다. 자연 활동과 하느님의 체험, 양쪽 다 그들은 체험한 것입니다. 성령, 즉 거룩한 영은 하느님 야훼의 숨결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숨결은 진흙으로 빚은 인간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며 예언자들에게는 자신을 잊고 예언직을 수행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성세성사 때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는 성령이 머무시는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성세성사를 받음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여기 모여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은 그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당신들과 함께 계시며 당신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4,17)


    또한 사도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도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요한 4,13)라고 한 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라고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우리에게 성령을 증언합니다. 즉 성령의 은혜는 사랑의 은혜이며 사랑 속에 사는 것은 은혜 자체이신 하느님의 영을 영접하는 얼이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당신 자신을 활동 속에서 계시하시며 그 활동은 외부적인 표징으로 나타나실 때도 있으나 주로 내심의 변화, 내심의 움직임들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사랑을 품고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낼 때 성령의 활동을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2천년 전 유대아 땅에 태어나신 예수라는 분을 오늘 우리 사이에 계시는 주님이시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도 우리의 힘이나 우리의 이성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도 본적 없는 그분을 평안한 마음으로 뜨거운 사랑을 느끼면서 “주님”하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리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친밀하게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아 초대교회 사도들에게 감동적인 위력으로 나타나신 성령을 우리의 마음속에 항상 느끼며 살아 갈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면서 성령이 우리 마음에 활동하심을 깊이 느끼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도 사도들처럼 용기 있게 다른 비신자들에게 “예수는 부활하신 주님, 생명이시오 사랑 자체이신 주님”임을 기꺼이 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요한 4,13)






    14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허성규 신부


    ꡔ성령을 받아라ꡕ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강림 날 성령은 마치 홍수처럼 은총을 교회에 쏟으셨습니다. 이것을 형용하기 위하여 오늘 제1독서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사도들 위에 강림하여 바로 당신 자신이 사랑의 성화를 그들의 마음에 붙이셨습니다. 그래서 승천 후 제자들의 신앙은, 이전보다 더 교리를 탐구하고 그리스도를 한층 더 멀고 높은 곳 즉 성부의 우편에서, 성부와 동등한 곳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신앙이 순화되고 영화되며 보다 활발하고 보다 더 실천적이 되었으므로 그 ‘생활한 강물’은 산처럼 그들의 영혼에 흘러 넘쳤습니다. 성령강림 날 베드로는 수천명의 유대아인을 앞에 놓고 예수님을 선전하였습니다.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즉 하느님을 죽인 죄를 힐책하며, 주의 부활을 증명하였습니다.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라고 한 껏 소리를 질렀지 않았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자는, 그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있어서, 그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선언을 다시 되풀이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라는 교회의 고백에 참가하는 자는 하느님의 영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지혜와 지식의 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즉 하느님의 백성이 예배하는 단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영의 은사입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자유로운 사색, 과학적 연구, 혹은 일반적인 철학적인 분석’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힘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언하는 메시아다. 내 안에 하느님의 영이 활동하고 계신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천주성으로 인하여 성부와 함께 성령을 발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와 영혼에 선물로 주시는 성령은 비할 데 없는 은총입니다.


    성령은 천주 성삼에 있어서는 사랑의 위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선물, 이 성령의 파견은, 다른 모든 은총과 샅이 오직 그리스도의 공덕에 의해서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스러운 수난이 맺은 결실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하느님의 깊은 경륜을 헤아려 그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성령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확인의 표를 찍어 주시고 우리 안에 거처하십니다.


    성령은 자신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시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사람들이 지니게 하십니다. 성령은 신자들의 마음을 자기한테 잡아당기시는 게 아니고, 자신의 사랑의 불로 그들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여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고 또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성령을 받아라’하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성령이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성령강림날로부터 교회는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함께 이 왕국을 다스릴 자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시작된 성화사업을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성세성사로서 성령을 받고, 견진성사로서 한층 더 풍부하게 성령을 받았지만, 다시금 언제 보다 윤택하게 성령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보다 밝은 빛, 보다 강한 능력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이 심오한 활동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성령강림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


    성령강림 축일이 다만 옛적의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신비가 지금에도 재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뜻을 합하여, 열렬한 맘으로 성부께 성령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고, 겸손하고 즐겁게 성령께 충성을 다합시다.






    15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김정원 신부


    ꡔ성령이여 임하소서ꡕ

    부활, 우리 주님의 부활을 회상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즐겁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인해서 즐거운 날을 보내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천만 뜻밖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경이의 말씀은 다름 아닌 제자들을 떠나가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처럼 즐거움을 되찾았던 제자들에게는 두려움과 슬픔이 다시 쌓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주께서 떠나신다는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대로 그들과 함께 그들 곁에만 남아 계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도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주님을 눈으로 뵈옵고 그 목소리를 들으며 가까이 모실 수 있으면 그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런 생각이 옳지 못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 도리어 여러분의 마음을 근심에 싸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자면, 내가 떠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합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옹호자이신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습니다.”(요한 16,6-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떠나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한층 더 신비스럽고 힘있게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사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복음을 통해서, 그리고 성사를 통해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가까이 모시며 살았으면서 성령이 오시어 그들에게 통달함의 은혜를 주시기까지는 예수님을 참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이 오신 다음에는 아주 딴 사람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제서야 참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고 예수님이 그들 안에 영원히 머물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그 옛날 사도들에게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임을 알게 하셨고 그들이 듣던 바를 올바르게 깨닫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참된 신앙과 희망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약속하신 바와 같이 죄악이란 하느님을 등지는 것이요 하느님의 사랑을 배척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의를 가르쳐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성취하신 영광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며, 권력과 재산과 쾌락이라는 세상의 그릇된 표준들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추구할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승리는 이미 우리 주님의 것이고 인간들의 악함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확신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겸손하게 인내하며 살도록 성령께서는 권유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 인생에 성령께서 꼭 필요한 분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세를 받았고 견진성사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일상생활이 아직도 슬픔으로 지배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일상생활의 의무와 인생의 고통과 시련을 대하는 태도가 성숙되지 못하였다면, 더구나 우리가 괴로운 인생살이를 비관한 나머지 세상을 피하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성령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것이나 덕을 닦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고 지옥과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성령은 또 다시 우리에게 필요한 분임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는 구원되었으나 그러나 구원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지금은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은총을 청해야 될 때입니다. 금년에도 성령께서는 주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완성하시고자 우리 인생에 내려오실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여러분에게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요한 16,13)라고 약속하신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틀림없이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는 성령이며, 오소서. 신자들을 한 한마음 한 뜻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이시여,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주께서 명하신 바를 사랑하고, 약속하신 바를 바라게 하시어 덧없는 속세에서도 참된 기쁨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을 두게 하소서.”






    16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조순창 신부


    ꡔ구원과 행복을 찾자ꡕ


    오늘은 오순절에 신도들이 성령을 가득히 받음으로써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을 경축하는 날이요, 교회 창립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멈ㄹ러 있어라’는 분부에 따라, 늘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습니다만, 한편으로 기다리는 희망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앞날에 대한 불안도 가졌습니다.

    우리는 사실 새로운 발전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가졌으나, 지난 한 주간은 광주 일원의 사태로, 많은 희생의 보도를 듣고 마음이 아프며, 또한 걱정도 많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내일에 희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민주 정치의 발전과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을 바라며,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의 현실 그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으며, 국민 그 누구에게 기대를 할 수 있으며, 그 어느 사태가 바람직한 것입니까?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모습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공경하며, 서로 사랑함으로써 참 행복을 누리게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을 못 믿고 교만하여, 이웃과 담을 쌓고 탐욕에 차서, 서로 미워함으로써 온갖 고통과 비참과 불행을 겪게 됐습니다.

    태초(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인류원조에게 갖가지 은혜를 주시며, 자유의 소중한 값을 체험하기 위하여, 금령으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시면서 “먹으면 죽으리라”하셨으나, 그 말씀을 못 믿고 오히려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마귀의 말을 믿고 죄를 지었습니다.

    오늘을 불신시대라고 합니다. 서로 마음의 벽을 쌓고, 이웃과 담을높이 쌓고 살아갑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서로 못믿어하고, 근로자와 기업주가 서로 못믿어하고, 위정자와 국민이 서로 못 믿는 현실이 되어 불행은 더욱 커가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명을 거역한 것은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 때문이었지만,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서로 핑계를 댄 것 같이, 잘못의 죄의식은 없고, 책임감도 없으며, 참회보다는 남의 탓으로 돌리고, 참회할 줄 모르고,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더 큰 불행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분수에 맞지 않는 거을 탐하며, 얻은 것에 집착하여, 독선과 이기심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눌 줄 모르고, 끝내는 너도 나도, 가진 자도 없는 자도 불행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이제 새날은 와야 합니다.

    곧, 불신에서 믿어 주는 오늘, 분열에서 일치된 오늘, 미움에서 사랑으로 화합하여야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새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불신하던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가득히 내려오심으로써 진리를 위해서 몸바치는 자들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는 사도들이 됨으로써 인류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교만으로 하느님을 떠나고, 바벨탑에서 말이 서로 통하지 않음으로써 민족과 파벌과 지역 분파가 생겨, 분열과 투쟁을 거듭하던 인류의 역사 안에 일치의 성령이 오심으로써 말의 장벽이 무너지고 놀랍고도 감탄할 은사로 인류가 하느님의 새 백성으로 하나가 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자기만을 아는 이기심으로 질투와 미움이 생기고, 형이 아우를 죽이는 성경의 첫 살인 사건 이후, 처절한 전쟁의 역사 안에 사랑의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써 교회에서 고백성사로써 죄를 사해 주고, 서로 이해와 용서로 화해하며, 가진 것을 서로 나눔으로써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는 새로운 이상적 새 시대의 막을 열어 주셨습니다.

    복음이 선포되고 새 시대는 시작되었으나, 하느님의 뜻과는 너무나도 먼 현실입니다. 제자들에게 내려오신 성령께서 오늘 우리 마음과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나라에 강림하시어, 불신과 이기심과 미움을 버리고, 믿음과 일치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참 구원과 참 평화와 참행복이 가득하게 되기를 간구합시다.

    우리는 진정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복음ㅂ의 전파자가 되고,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는 독선을 버리고, 단합하는 역군이 되어, 무엇이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사랑으로 희생하여 내놓을 수 있는 신자가 됩시다.

    “오소서 성령이여, 믿는 이들 마음을 충만케 하시며,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더러운 것 씻으시고, 메마른 것에 물 주시고, 병든 것 낫게 하시고, 굳은 것 부드럽게 하시고, 찬 것 뜨겁게 하시고, 비뚠 것 바로잡으시고, 하느님 믿는 모든 이들에게 성령의 은사 선물 가득히 내려 주소서!”

    (1980. 5. 25.)






    17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김정진 신부


    ꡔ성령의 은혜와 활동ꡕ

    신자 여러분!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첫째는 인류가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 새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날입니다. 둘째로 오늘은 가톨릭 교회가 탄생되고 또한 완전히 성숙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세와 견진을 받음으로써 성령의 은혜와 초자연적 생명의 활동에 힘입어 용이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고 또한 성령을 받아 교회의 성실한 일원이 되어 평화와 기쁨 속에 백성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또 하느님을 백성에게 전해 줌으로 온 인류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늘나라에서 하나로 일치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도행전은 성령강림에 관하여 그 놀라움과 흥분과 기쁨의 모습을 극적인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사도 2,1-13). 즉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을 깨닫고 확신시키기 위해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같은 소리 중에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사도들은 온통 딴 사람으로 변하였고, 성령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여 사도들은 즐겨 용약하며, 군중을 가르치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입으로 숨을 내부시며 말씀하시기를 <당신들은 성령을 받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천주 성령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제일 먼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에 내려오셔서 예수님과 같이 살고 계십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고 영세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습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시는 등 예수님의 전생에는 성령의 인도로 점철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있어 시종 일관하였던 사랑의 정신은 오로지 성령의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천주 성부께서는 당신 독생성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헌데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예수님과 결합시키고 하느님을 가까이 뵈옵게 하시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성자와 성령은 사람의 두 팔과 같은 것으로서 성부께서는 이로써 우리를 포옹하고 계십니다. 성자께서는 단 한 번 인류의 역사 속에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에 나날 새로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주시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어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또한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드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고 살게 하십니다.


    성령이라 함은, 그 글자를 설명하자면 <성스러운 숨쉼> 또는 <성스러운 바람>이란 뜻입니다. 즉 <하느님의 바람> 또는 <하느님의 숨쉼>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적에 숨을 불어 넣으셨고 성령께서 위에 강한 바람과 함께 내려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령은 하느님의 무한한 힘을 소유하신 숨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은 흙으로 아담을 빚어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영세 예절 때 사제는 영세자의 얼굴에 세 번 입김을 불어 주며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의 바람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적인 힘, 이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게 하는 힘, 무엇보다 강력한 하느님의 힘을 생각하였습니다.


    신자 여러분! 성령은 하느님의 강력한 힘이란 것이 사도들로 인하여 웅변이 증명되었습니다. 세차게 불어 온 바람같은 성령을 받자마자 사도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바깥 세계를 두려워한 나머지 문을 닫아거는 등 그처럼 겁이 많은 자들이었으나 이제는 당당히 군중을 향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모든 신자들에게 약속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의젓이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자신의 매력이나 뛰어난 웅변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첫 번 설교 때 무려 3천명을 회개시켰고 두 번째 설교는 5천 명을 회개시켰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교리 서적이나 시청각 자료나 환등기나 영사기도 없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일곱 가지은혜로 힘과 용기를 얻은 사도들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사방에 두루 다니며 전파하였습니다.


    교회는 여러 세기를 통하여 위험을 당하고 도전을 받았지만 언제나 균형을 잃지 않고 꿋꿋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성교회를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교회의 혼으로서 활동하시며 지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임하소서 성령이여, 우리 마음에 용기와 힘을 주소서. 마귀와 세속의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어 마침내 영생의 해안에 무난히 다다르게 하소서. 아멘.






    18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정덕진 신부

     ꡔ성령의 활동ꡕ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여러분과 더불어 이 거룩한 축일을 경하해 마지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에집트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홍해를 건넌 것을 기념하는 축제가 바로 빠스카였습니다. 다음 성령강림은 그들의 또 하나의 축제인 펜테꼬스테 축일에 이루어졌습니다.


    펜테꼬스테는 오순절이라고도 하며 빠스카 후 50일 후의축제를 말하는 것으로 이 축제는 옛적에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온 유대인을 대표한 모세에게 십계석판을 내려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유대백성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모두 준수하겠습니다”하는 서약을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기념하는 축제로 펜테꼬스테(오순절)라는 축제를 지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다음 베드로를 위시해서 모든 사람들과 그 외 많은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시자 한편 쓸쓸하기도 하고 서운한 생각도 있고 또 유대인들의 박해도 무서워하여 문을 굳게 잠그고 고개를 움츠리고 기도하며 맥없이 있었지만, 그러나 희망은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때 광경을 살펴보면 “마침내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 같은 소리가 별안간에 하늘에서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불길 같은 혀들이 그 자리에 나타나 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켜 주시는 대로 그들은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사도 2,1-4)


    이것은 처음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강림하시던 때의 모습입니다. 강림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사도들은 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국가의 개국 기념일이 있다면 성령강림이야말로 우리 교회의 새 기원을 이루고 새 교회정신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날입니다. 여기 성령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강림하시는 순간 큰 바람과 같은 소리가 났다는 것, 불의 혀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것, 즉 바람 불혀입니다.


    1) 자연현상에서 바람은 얼마나 큰 힘을 가졌습니까? 부는 바람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도 없거니와 그 힘은 무한한 것입니다. 저항할 수도 없을 정도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째 모두 뽑힌다든가 모든 가벼운 물건은 다 날아가고 마는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2) 불의 힘은 모든 것을 태웁니다. 정화시킵니다. 소독을 합니다. 처리가 곤란한 더러운 것들을 태워버릴 때 그 고마움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3) 혀는 언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사상과 이념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명과 심적 세계를 혀로서만 타인에게 발표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전달, 사상의 전달의 표상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자연 현상에서의 역할에서 미루어 성령의 작용은 너무나 뚜렷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사도들에게 넘치는 힘을 주셨고 죽음 칼 창 기타 모든 박해에서 이기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신앙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용기를 주셨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시자 세상은 선과 악이 뚜렷해졌습니다.

    모든 부정과 불의는 물러가야만 했습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도록 사랑의 불을 사도들에게 놓아주셨습니다. 또 자기들의 진리를 혼자만 간직한 채 머무르지 못하게 되었고 전교 활동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견진을 이미 받았습니다. 세례 때에도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에게 주셨던 같은 은혜로 무장되어 자기의 신앙을 지키고 사회에 봉사하며 역경에서도 진리를 증거하며 전교 활동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19            성령강림대축일 <요한 20, 19―23>  ‘성령의 상징들’

    최기산 주교


    : 내 방에 약 15cm되는 쥐 한 마리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아침에 응접실에 나가 보니 온통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큰일이었다. 끈끈이를 사다가 이 구석 저 구석에 놓았으나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가지 단서를 남겨놓았다. 난초를 뒤집어 놓고는 뿌리를 파먹은 것이었다. 목이 마르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 놈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왜냐하면 물로 유인하면 걸려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날 밤 작은 물그릇을 방 한 구석에 놓고는 그 주변을 끈끈이로 온통 막아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나가보니 그 놈이 끈끈이에 걸려서 찍찍거리고 있었다. 쥐는 약은 동물이다. 끈끈이가 해로운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목이 말라죽을 것 같으니까 하는 수 없이 달려들었다 걸린 것이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에게 있어 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성령을 물로 표현하는 이유는 영혼에게 성령은 물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ꡒ물은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탄생과 풍요를 의미한다ꡓ라고 가르친다.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시들어간다.


    바람(숨) : 성령은 숨(바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숨을 쉬지 않으면 인간은 죽은 것이다. 뚱뚱한 사람 하나가 장가를 가서 첫날밤을 지내는데 어찌나 코를 골아대는지 그만 신부는 겁에 질렸단다. 그도 그럴 것이 코만 고는 것이 아닌 가끔씩ꡐ무호흡증ꡑ증세까지 보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코를 세게 골다가 잠시 아무 소리도 없으니 남편이 죽었나 걱정했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숨쉬는 사람이다. 인간의 영혼도 숨 같은 성령께서 함께 계셔야 살아있는 것이다. 성령강림 때 성령께서는 바람소리와 함께 임하셨다. 바람소리와 함께 임하신 성령을 받고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새 사람이 되었다.


    이 세상에 바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과학자는 ꡒ신부님, 바람이 없으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ꡓ라고 말한다. 바람은 무더위를 몰아낸다. 찜통 더위를 몰고 온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계속 머물고 있으면 많은 사람이 ꡒ헉! 헉!ꡓ 대다가 죽을 것이다. 그뿐인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몰고 온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몇달 계속 머물면 결과는 처참할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공기를 계속 맡을 때에는 답답하지만, 비 바람이 몰아쳐서 나무가 몇 개쯤 부러지는 상황이 지나고 나면 공기는 맑아진다. 바람이 더러운 공기를 몰아낸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우리에게 생기를 주신다.


    불 :ꡒ도둑이야!ꡓ하고 소리를 지르면 나오지 않는 사람도 ꡒ불이야!ꡓ하면 나온단다. 불이 무섭기는 무서운가 보다. 그러나 불이 없으면 인간이 어찌 살겠는가! 불이 없으면 어떻게 문명이 발전했겠는가? 불은 열을 낸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불이 있기 때문이다. 불꺼진 방,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방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불은 힘을 낸다. 불이 있기에 공장도 돌아가고 배도, 비행기도, 자동차도 움직인다. 전기가 없으면 어떻게 높은 빌딩을 올라가겠는가! 30층, 40층되는 빌딩을 걸어서 올라가면 등골이 빠질 것이다.


    불은 빛을 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아니 등잔도 촛불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 불이 없으면 암흑의 세상이고 두려움이 몰려든다. 이외에도 불은 정화시킨다. 더러운 것을 태워서 깨끗하게 한다.

    이렇게 인간의 생존과 관계 있는 불을 성령의 상징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이런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다.


    복음의 메시지 :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하셨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려고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성령을 받으셨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 3년간의 일을 마치시고 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자 당신께서 받으셨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오늘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날이다.


    사도 바오로는 ꡒ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ꡐ예수는 주님이시다ꡑ하고 고백할 수 없다ꡓ(I고린 12, 3)라고 말했다. 심지어 ꡒ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ꡓ(로마 8, 9)라고 말했다. 세례와 견진성사는 성령을 받는 성사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는가? 그것을 체험으로 느끼고 있는가?


    우리는 신비의 교리를 많이 믿고 있다. 강생구속의 교리, 즉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교리를 인간의 이성으로 다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더구나 삼위일체의 교리와 성체의 교리 즉 하얀 빵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깨닫기 힘들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굳센 믿음으로 나갈 수 있다. 신비의 교리는 신비한 방법으로 깨달을 수 있다. 즉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은사는 7가지 : (이사 11, 2―3)와 9가지(Ⅰ고린 12, 8―10)가 있다. 성령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은사와 열매를 주신다. 이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다. 성령의 열매는 9가지(갈라 5, 22)가 있다. 이는 개인을 위한 열매들이다. 요즘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성령은 공동체를 깨면서 활동하시지는 않는다. 사목자의 지도를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영광을 도모하는 사람, 돈을 요구하는 사람, 공동체를 깨는 사람, 종말을 얘기하면서 겁을 주고 희망을 꺾어 버리는 사람들은 요주의 인물이다.






    20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 19-23)(공통)   성령으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자

    유영봉 신부


    묵상 : 사도들은 성령을 받아 예수가 그리스도(구세주)임을 깨닫고는 다락방을 박차고 나가 자신들이 깨달은 바를 힘차게 전하였다, 사도들의 말을 듣고 3000명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신(神)과 통할 수 있는 능력


    합천본당에서 첫 사목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교리반에 잘 나오던 40대 부인이 2주째 결석을 하였다. 사정을 알아본즉, 죽은 시어머니 귀신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보통 때는 가만히 있다가 귀신 기운이 돌면 완전히 죽은 시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그 집을 방문했을 패에도 신기(神氣)가 돌아서인지, 목소리도 시어머니 목소리로 변할 뿐만 아니라, 촌수도 바꿔서 시아버지를 보고 “여보!”하며 삿대질을 하고, 남편을 보고는 “야, 이놈아”하면서 어머니 행세를 하였다.

      

    우리는 주변에서 갑자기 ‘신이 내렸다’며 무당이 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신 내림 굿’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이 내려 무당이 되는 사람을 ‘강신(降神) 무당’이라고 하다. 어쨌든 인간은 신접(神接)할 수 있는 그런 존재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신과 통할 수 있는 신통력이 있는 존재인 것이다, 잡신(雜神)이 내리면 무당이 되고, 그리스도의 영(靈)인 성령이 내리면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힌 참 신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들이 성령을 받는 광경을 전해주고,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며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하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교회의 개교(開敎)기념일


    다락방에서 무서워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오순절 축일에 성령을 가득히 받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고, 다락방을 박차고 나와 용감하게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증언하였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성령을 받아 가르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000명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들 위에 성령이 쏟아부어져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으며, 깨달음을 얻어 새로워진 사도들은, 예수가 주님이시라고 세상을 향해 외쳤고, 그 사도들의 설교를 들음으로써 이 지상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도들의 무리가 생겨나,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며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도, 또한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를 통해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1고린 12, 3)고 하셨다.

    성령강림축일은 교회의 생일이다, 이렇게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백성,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복음전파의 사도 되어야


    우리가 참으로 성령을 받아,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된다.”(로마 10, 9)

    이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죄의 용서를 받고,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하시며,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평화를 체험하게 되면, 그 기쁨과 평화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그 본질상 선교의 공동체인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本性上) 선교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2항)고 선언한 바 있다. 하느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셨고, 또한 예수님은 온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성령을 주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셨다.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이 세상에 파견된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아듣고도 전하지 않는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무덤에 가두어 놓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아직 한사람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하였다면, 그 사람은 새순(筍)이 돋아나지 않는 죽은 가지와 같다.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요즘, 사도들로 하여금 생명을 바쳐 세상 곳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 성령의 활동이 더욱 아쉬운 때다. 나는 살아있는 가지인가?





  4. user#0 님의 말:

     

    성령강림 대축일

            21. 서웅범 신부/38                 22. 강영구 신부/40

            23. 김영남 신부/44                 24. 이규철 신부/46

            25. 김신호 신부/48                 26. 허영업 신부/49

            27. 신은근 신부/56                 28. 함세웅 신부/57

            29. 생명의 숨/59                   30. 신앙의 원리/61


    21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내가 왜 이럴까?”

    서웅범 신부


    요즘엔 별로 그럴 일이 없지만, 본당사목을 할 때에는 가끔 단체모임의 여흥시간에 노래를 불러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간 유행가 가운데, 가사가 제대로 다 기억나는 것을 하나 골라 불렀었는데, 그것이 그 이후 한동안 저의 단골 메뉴곡이 되었었습니다.

    그 노래 제목은「장미 빛 스카프」, 그 가사가 「내가 왜 이럴까?」라는 것으로 시작되는 노래였습니다. 성령강림에 대한 묵상을 시작하며「내가 왜 이럴까?」라는 이 말이 화두(話頭)처럼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을 보면, 그 안에, 「내가 왜 이럴까?」라는 자문을 했을만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또 그 말을 듣는 사람들 역시, 사도들의 말이 자기네 말로 또렷하게 들림에 대해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들을 했었을 것입니다 (제1독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바오로 사도 역시,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박해하던 자신이, 이제 그분의 열렬한 추종자로 변화가 된 그 현실을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설명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


    그리고 복음말씀에 나오는 제자들의 머릿 속에도 분명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숨어있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또 특히 그분께서 보내주신 협조자 성령을 체험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로 변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라는 말처럼, 어느 순간 문득「변화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기쁨과 희망을 느끼게 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제게는 너무나 신기하기만 한, 그래서「정말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하는 한 작은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담배에 관한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시작하여 근 13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사람체질에 따라 흡연의 해악 정도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겠지만, 사실 제게 담배는 맞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피우면 골치가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피울 때의 그 기분과 습관 때문에, 그것을 끊지 못하고, 하루에 한 갑 이상을 족히 피우는 작은 골초였습니다.


    그 사이 수없이 금연을 시도했지만, 또한 그 숫자만큼 결심은 여러 가지 이유로 쉽게 깨져버리곤 했었습니다. 그러기가 13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9년 전 어느 날 문득, 「이제는 정말 끊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그날 시도된 금연은 신기하게도 오늘날까지 잘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른 분이 피우는 담배연기 냄새가 싫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직접 피우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가 않습니다. 「정말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전에 수없이 끊고 다시 피고 할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적어도 이 담배문제에 있어서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내 의지, 내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의 신비」(?)가 신앙적이고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자주, 그리고 더 깊이 체험되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의지, 내 힘은 부족하지만 겸손한 마음과 성실한 실천 중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영육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소박한 일상(日常) 가운데서 커다란 의미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우리를 채우시고 변화시키시고 완성시켜주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드려야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사랑이요 감사일 따름입니다」라고 말씀드릴 날이 쉬이 올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 온 누리가 새로워지리이다!






    22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

    강영구 신부


    오늘은 우리 교회 최대 축일의 하나인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이 지난 오순절 날이었습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월절을 지낸 후 50일이 되는 날 추수 때에 거둔 햇곡식을 하느님께 바치는 큰 축제일입니다

    추수 감사절과 비슷한 축제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온 세계에 흩어져서 살고 있던 수많은 유다인들이 이 축제일을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보내 주시겠노라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 한 집에 모여서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세찬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하늘에서 불혀와 같은 형상의 성령이 모여 있던 제자들 위에 내려왔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모여 있던 그 집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성령 곧 하느님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은 옛날의 제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고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순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여 왔던 사람들이 바람 소리 나는 곳 곧 제자들이 모여 있던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그 때 베드로 사도가 그들 앞에 나서서 예수 사건에 대하여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 지방말로 예수 사건을 증언했지만, 모여 온 사람들은 모두 자기네 나라말로 베드로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에는 인류가 하나로 뭉쳐서 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데, 교만한 인간들은 바벨탑을 쌓음으로써 자신들의 능력을 하늘 아래에서 뽐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말을 흩어 놓으셨습니다. 그러자 인간들은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들 끼리끼리 모여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말이 통하지 않고 의사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말이 통하고 의사가 통하는 사람들 끼리끼리 뭉쳐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도둑놈은 도둑놈끼리, 협잡꾼은 협잡꾼끼리, 제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자기들끼리, 부자는 가난뱅이들을 끼워 주지 않고 부자끼리, 가난뱅이들은 가난뱅이들끼리, 권력자들은 권력자들끼리, 뭐 이런 식으로 유유상종하면서 서로 벽을 쌓고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말이 다르니 의사 소통이 되지 않고 생각이 다르니 정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끼리끼리 모여 살다 보니 집단 이기주의와 패싸움이 일어나고 세상은 갈가리 찢겨진 채 불행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이 내려오심으로 인하여 인간을 흩어지게 했던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장벽도 함께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빈부 귀천의 장벽도 무너지면서 거기 새로운 백성 곧 하느님의 백성이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민족인 하느님의 백성 안에는 언어와 민족의 장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주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새로운 백성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그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이 강림하신 이 날을 대축일로 지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데, 새로운 이스라엘이자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 날이기 때문입니다. 구세주 메시아의 오심을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구세주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분을 배척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12지파를 뿌리로 한, 옛 이스라엘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의 12지파 대신에 12사도를 뿌리로 한,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새 이스라엘 곧 교회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새 이스라엘 곧 교회를 태어나게 한 힘, 그 교회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은 오늘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불혀의 형상으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영 곧 성령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이미 성령으로 성별(聖別)되고 축별(祝別)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표시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고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합니까? 우선은 늘 새롭게 태어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하느님의 능력인 성령으로 새롭게 되었듯이, 우리도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얽어매고 있는 구태(舊態)와 구습(舊習)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게으름과 안일, 안락과 나태 가운데 안주하면서 자기 자신의 틀을 깨뜨리려 하지 않는 사람들, 새로운 생활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미 받은 하느님의 영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이며 새로움에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행전을 읽어 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사도 행전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과 백성들이 새로움에 도전하는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언제나 변화하며 새롭게 됩니다. 그러나 죽어버린 생명은 변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썩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살아 있는 생명 안에는 혼이 머물러 있고, 죽은 생명에는 이미 혼이 떠나고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생명은 악취를 풍기면서 썩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비추심에 따라서 사는 신자들은 늘 열심히 기도하면서 나날이 거듭나는 생활을 할 뿐 아니라, 그 삶에 의욕과 활기가 흘러 넘칩니다. 그리고 그 생활 가운데서 기쁨과 평화를 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면서 냉담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구태와 구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태와 안락 속에 머물면서 변화되기를 싫어합니다. 혼이 떠난 시체가 냄새를 풍기면서 썩어 가듯이, 이런 사람들의 삶은 썩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불안과 초조, 염려와 근심 걱정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지금 안주하고 있는 그 안일과 안락이 사라지거나 깨어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오는 불안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도전도 없고 발전도 없습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그런 사람들의 삶도 썩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 6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영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늘 거듭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들 위에 내리신 성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들을 허물고, 모두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일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영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일치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치의 사도가 되어서 하나 되려면, 너와 나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허물과 약점을 너그럽게 참아 주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나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도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서로를 용서해 주고 용서받음은 가장 확실한 일치의 방법입니다. 용서해 주고 용서받으면 너와 나 사이에 쌓여 있는 장벽을 허물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하나로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이웃과 이웃이 서로를 용서하면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치의 능력이요 힘이신 성령을 슬프게 해드리지 말고, 서로 용서하고 받아 주는 생활을 함으로써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립시다.

      

    그러나 서로를 갈라놓고 또 갈라지도록 이간질하고, 또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나 악령의 짓이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나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활을 하면 서로 갈라지게 마련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면 갈라지게 됩니다. 나의 안일과 편함만을 찾으면 갈라지게 마련입니다. 여기 지옥이 있고 지옥은 악령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악령이 활개 치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성령의 강림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우리는 이 새 시대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이 활기 차게 활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놓읍시다. 그리고 성령의 비추심과 인도하심에 겸허하게 순종하는 생활을 합시다. 여러분의 나날의 삶이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빕니다.






    23                성령강림 대축일요한 20,19-23 (공통)

    김영남 신부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주신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주시며 하시는 동작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셨다”는 말에서 “숨을 내쉬다”라는 표현은 창세기 2,7에 나오는 다음 말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새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기 전에 아담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스승 예수님의 죽음 후에 제자들의 공동체는 생명력이 없는 ‘죽은 공동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오늘 복음말씀의 시작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문을 닫아 걸고 있었을 만큼, 두려움에 ‘얼어붙어’ 있었다. 자기들 속에 폐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스승 예수께서 그들 한 가운데로 다가오시어 ‘당신의 평화’를 주시고 당신의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시자, 그들은 용기를 내어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요한 복음에 의한 “제자들의 성령 받음” 대목의 이런 역할은 성령강림 대축일인 오늘의 전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대목에서 더 강조되어 나타난다. 루가 복음서-사도행전을 보아도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고부동하게 믿게되고, 두려움 없이 적대적인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해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은 성령을 받게되면서부터이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죽어있던 것이나 다름없던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은 후에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로 살아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전체의 구조에서 볼 때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출발점에 해당되는 사건인데, 사도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앞으로 있을 증인으로서의 긴 여정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힘을 받게된 셈이다. 성령은 초대 교회의 탄생에서 뿐만 아니라, 그 성장 및 생활 안에서도 원동력의 역할을 하였다. 


    성령이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관련하여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의미깊은 말을 하였다: “성령이 없으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며,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고,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에 불과하며, 귄위는 권력이고, 선교는 선전이며, 예식은 의고(고풍)주의이고, 윤리적 행위는 노예적 행동이다.”

    참으로 날카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기에, 한 문장 한 문장 그 뜻을 나 나름대로 새겨본다.


    “성령이 없으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삶이 아닐 때, 하느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는 관련이 없는 분이 되어 버린다. 말만 신앙인이지,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며”: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체적 신앙과는 상관이 없고, 과거 역사 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한 인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 이런 정도의 의미밖에 차지하지 못할 때, 자연스럽게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게 된다”. “성령이 없으면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에 불과하며”: 성령의 차원이 없다면 교회는 복음증거의 삶을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학교, 병원, 사회사업단체 등 수많은 단체들을 운영하는 거대한 조직체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한 곳에서 ‘권위’라는 것은, 능률을 올린다는 명목하에, 남을 누르기 위한 ‘권력’으로 변질된다. “성령이 없으면 선교는 선전이며”: 성령의 차원을 잃어버리면, 교회의 선교는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기쁨이 되는지를 전하는 ‘복음전파’가 아니라, 어떤 회사의 광고 선전처럼 되거나, 자기 단체의 세를 불리기 위한 방편으로 변한다.


    성령을 떠나 사는 삶은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진리와 사랑”을 떠나 사는 삶이다(참조: “진리의 성령”에 관한 요한 16,13).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을 떠나게 될 때,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매력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교회의 창립일이요 생일’이라고도 볼 수 있는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의 임하심을 정성스럽게 기도로 청해야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그런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 


    특히 오늘 복음의 시작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처럼, 무섭게 변모하는 세상의 흐름 앞에 겁을 먹고 자기 속에 움츠려 들고 있는 공동체의 경우, 또는 공동체의 창립 초기의 유연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거대해진 조직 속에 현실유지에 급급하며 경직되어 가는 공동체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생기’를 빼앗아 가는 주범은 바로 ‘죄’이다. 생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이 ‘죄’를 극복해야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그 길을 알려준다. 고해성사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활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생명의 숨결[영]”을 다시 받는 은총의 길이다. ‘성령’은 우리를 죄의 지배하에 있는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시키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준다.

    “주님, 보내시는 당신 얼에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오늘 화답송 시편 중에서)

    …………………………………………………..

    참고:

    “인자하신 천주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으니…”라고 시작하는 고해성사의 사죄경의 말씀은 오늘 복음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요한 복음에서 ‘성령’은 예수님의 죽음-부활의 선물(은총)이다 (참조: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으시지 않아서 영이 [아직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9]).






    24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15,26-27:16,12-15>(공통) 감사와 봉사의 불을 지펴주소서

    이규철 신부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요한 15,26-27:16,13-14)

     요셉 신부님 !이 가방 주인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연락을 할만한 주소도 없고 본명은 적혀 있으나 성함을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수원교구 공원 묘원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제의를 정리하고있는데, 한 할머님이 가방 하나를 가지고 오셔서 하는 말씀이었습니

    다. 가방을 열어보니 미사 수건 하나, 프라스틱 성수병 한 개, 묵주가 들어있는 묵주 주머니 두 개, 기도서 한 권, 성교예규 두 권, 두툼한 비닐 봉투 하나, 그리고 손수건 하나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습니다.

      기도서를 뒤져보니 1960년 12월24일 영세, 1975년 6월 20일 견진성사, 1984년 10월 27일 혼인성사, 그 밑으로는 성모님의 충실한 딸이 되고 싶은 M..D‥‥ 본명은 마리아 도미칠리아? 마리아 도미니까? 마리아 데레사? 마리아 도로테아 ? 마리아 디모테아? 일 테지만 이름도, 주소도, 전화 번호도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면서 두툼한 비닐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십일조 교무금 카드와 새 성당신축 봉헌금 카드를 비롯하여 성소후원회, 제대회, 연령회, 군종후원회, 교도소후원회, 외방선교회, 우술라회(수원교구 신학생 후원회), 안나회(원주교구 자선단체 후원회), 주일학교 자모회, 양로원 후원협력자회, 보육원 (고아원)후원회, 꽃동네 후원회, 라자로 마을 후원회 등등 후원회 카드만 무려 열여섯개였습니다만 카드마다 주소와 이름은 없고 M.D.)로만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쓰면서도,「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 4)고 하신 뜻을 조용히 따르고자 카드마다 M.D)로만 기록하지 않았겠는가?

      소속 교구와 본당 이름은 명시되어 있었으나, 연락할 방법이 없어 혹시나 하고 기도서를 다시 펴 보았습니다. 기도서 본문이 시작되는 앞 백지에 「여러분 안에 계시면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의 성령입니다」(필립 2,13)라고 하신 말씀을 적어 놓은 것을 보면, 분명히 성령 은총 안에서 온전히 성령께 의탁하며 사시는 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곳 저곳으로 연락하여 가방 주인을 알게 되었고, 다음날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만나기 전에는 연세가 지긋이 든 분인줄로 생각했습니다만 막상 만나고 보니 신부로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남 1녀를 둔 30대 후반, 큰 자녀가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요 막내가 아직 유치원에도 들어가지 못한4남매의 어머니였습니다.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기에 애기 키우는데 도움은 되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요즘 세상에 가족이 8명이나 되니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겠는가? 그런 가운데서도 온전히 믿음으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며 신앙적으로 고맙기도 하고, 성령기도회를 지도하는 신부 입장에서 대견(?)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요셉 신부님! 「어떻게 애기 4명이나 키우십니까? 요즘 세상에‥‥ ? 묻고 싶으시지요? 저도 결혼하기 전에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9남매의 막내로서 많다는 그 자체가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자라났기에, 애기는 하나만 낳고, 그 대신 열심히 하느님께 봉사하는 일이 더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공무원 집안에서?‥‥

      두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 성령세미나를 받았습니다. 성령 안수를 받을 때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어머니로서 할 일이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내 마음대로 사는 세상인가? 내가 낳고 싶다고 낳고, 낳아 기른다고 안 낳을 수 있는 일인가? 내가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해 지고, 불행해 지기 싫다고 불행해 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가 창조주이신 하느님 노릇(?)을 대신 하겠다는 말인가?」 요즘 시세(時世) 말로 하느님과 야! 자! 놀이를 하겠다는 말입니까?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2,4~7참조). 「여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르오! 여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여보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루가 22,57~67)세 번이나 배반하던 베드로가,「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 2,36)라고 소리쳐 외치자, 그 자리에서 3천여명이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저 사람들 술에 취했군!? (사도 2,13)하고 빈정거림을 받은 제자들을 본받아 우리도 성령에 취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고통 중에도 희망을, 슬픔 중에서도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신앙증거로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살아 움직이는 크리스천 활동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고 하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인의 길일 것입니다.






    25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 19-23> (공통)   신자들을 묶는 끈

    김신호 신부


    인간이 모여 구성된 사회 안에는 많은 행사들이 있게 마련이고, 사람들은 또 이러한 행사에 참석한다. 이렇게 볼 때 행사란, 인간의 모임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행사장에 모이는 사람들은 서로 아는 관계에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은, 서로 공통으로 갖고 있는 관심사나 이해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신자 한 분은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장소에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참석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요즈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사람들을 모이게 아는 촉매제 역할의 상품이나 기념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이러한 기념품이나 상품을 받기 위해 그런 모임에 많이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참석은, 주최측에서 보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사람을 모으는 목적만을 주최측이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도 주최측이 목적을 이루는데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주최측이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모이게 하므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도는 주최측의 의도를 만족시키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罪없는 상태가 平和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아 교회의 창립에 대한 의미출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요한이 전하는 복음을 읽었다.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에서 모인 것이 아니고, 다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함께 있으면 좀 덜 무서울까 하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능적인 이유에서 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한 자리에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이들에게, 분명한 목적의식을 심어주고 계신다. 즉 그들에게 평화를 기원함으로써 평화를 실현하라는 삶의 방향과 성령을 주심으로써 죄를 사하는 권한을 주고 계신다.

      

    평화와 죄를 사하는 권한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죄가 없는 상태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이러한 상태는 바로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기본 취지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이러한 죄 사함을 통하여 평화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이행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사도들이 위임받은, 교회를 창립한 목적에 해당될 것이다.

      

    교회는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모였지만, 모인 목적은 동일하게 나타나는,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의 신비체에 속한다.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면 서로가 모르는 상태에서, 이러한 강한 연대감을 가지는 단체는 구성시킬 수도 없고, 또 구성이 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한결같은 상태로 지속되고 발전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어떤 제국이나 또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성격상 세속에서 형성된 실제의 현상들은 교회와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교회는 분명히 성령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성령이 늘 함께 하는 단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敎會는 성령의 작품 

    교회에 속하는 모두는, 그러므로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 나갈 수가 있게 되고, 이러한 성령의 작용은 신자 모두를 연대감으로 묶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바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내려온다는 사실이 확증되고, 또한 우리들에게 교회의 특징을 이해하도록 인도한다. 교회는 이처럼 성령의 도우심으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도록 설립된 단체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러한 화해와 일치에 역행하는 삶을 계속하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성령과 함께하는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음미하는 계기를 가져야 하겠다.






    26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동) 죄를 사하는 권한

    허영업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걸고 떨고 있는 제자들 사이로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하신다. 예수님께서 건네신 평화의 인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자주 또는 전례시에 통용되던 관례적 인사였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평화의 인사는 의미 심장하다. 왜냐하면 ‘평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첫 선물이다.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자신의 고별사에서 그 선물을 약속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를 믿는 이는 모든 사물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해방된다.

        

      사실 평화는 전 인격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 평화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서 곳곳에서 평화는 구원의 개념과 일치해서 사용되고 있다(마르 5,34; 루가 8,48).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평화에 관한 일’로 요약하고 있다(루가 19,42; 사도 10,36).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는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평화의 하느님께서는 전 인격, 곧 몸과 영혼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분이시며(1데살 5,23 참조),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좋은 것을 준비하시는 분이시다(히브 13,20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시다(에페 2,14-17 참조). 하느님과 함께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결과이다(로마 5,1.10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를 믿는 이들에게 준 풍성한 구원 은혜이다. 따라서 평화는 구원을 이루는 믿음에 결부되어 있다. 믿는 이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한가운데 서신 것처럼(요한 20,19) 제자들 삶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유혹을 견디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체험도 믿음의 전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면서 파견하고 계신다. 곧 이제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도들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사도들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구체적이거나 실제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오늘날 성령의 도움으로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 신앙인들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을 충실히 따를 때 삶의 발자국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시공을 초월하시어 영원 속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감으로써 그분을 의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현존의 체험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오로지 의심하지 않고 믿는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활동하신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교회도, 신앙의 삶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에게 성령께서 내리시어 그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셨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에게도 내리시어 그렇게 하시기를 열심히 바라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요한 1,33) 분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새 생명으로 탄생한 우리는 마음과 정신의 새로운 변화를 체험하고 온전히 회개해야 한다. 악의 사슬과 유혹을 끊어 버리겠다고 약속하고, 또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날 것을 다짐한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의해 새로운 삶에 인도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없애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을 촉구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새로워진 사람으로서, 그 새로워진 상태를 계속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세상을 초월하는 깊은 가치를 확인시켜 주고 진리를 깨닫게 만들어 준다. 그 믿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안에 변화를 일으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높은 이상을 향하여 개인적인 만족을 미루고 늘 새로워지기를 요청하시며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기”(로마 12,2 참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삶 속에서 잘못된 기존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 나를 포기함이 바로 참된 삶이고, 죽음은 생명이며, 버림으로써 얻게 된다(마태 17,25; 19,21.29; 마르 8,35; 요한 12,24-25 참조)는 것을 확신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새로 태어남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론이나 개념으로가 아니라 구체적 삶의 실천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존재로서 새롭게 살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고 오직 그 신자들인 우리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으로 선택하신 사람들로서 ‘빛’으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마태 5,14-16 참조)

        부족한 우리 자신을 일깨워 주시고 채워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        게 하소서.”


        제1독서/사도 2,1-11


      초대 교회 탄생을 알리는 성령 강림 기사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불 혀 모양을 하고 사도단을 중심으로 신자 공동체에 모인 집 안에 나타나신 사건과,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한 설교와, 초기 예루살렘의 신도의 삶을 전해 준다.

        

      ‘오순절’이라는 그리스어 단어, ‘펜테코스테스’는 ’50’이라는 숫자를 뜻한다. 원래 오순절은 첫 보릿단을 수확할 때 지냈던 가나안 농경민들의 맥추절에서 비롯되었다. 히브리인들은 과월절 첫날부터 시작하여 7주간을 보내고, 시반 달(음력 5월) 6일에 이 명절을 지냈다. 루가는 이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리신 사건을 초대 교회의 창립과 선교 활동에 연결시킨다. 이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얼마 안되는 소수 유다인들이다. 이들은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하였고, 이를 본 어떤 사람들은 이 신비로운 사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어떤 이들은 “새 포도주에 흠뻑 빠졌군.” 하고 부정적 판단을 내렸다.

        

      그러자 사도단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나서서 군중에게 설교했다.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사람들은 삼천 명 가량이나 되었다. 이들은 이미 예루살렘에 돌아와 정착해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나누며 빵을 떼고 기도하는 일들에 전념하였다.” 선교 일선에 나서기 앞서 예루살렘 초기 공동체는 조용하고 거룩한 생활로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성령 강림의 역동적이고 압도적인 묘사와 대조를 이룬다.

        

      원래는 감사제였던 오순절이 후에 구원사적 의미가 더해져서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선사받은 사건(출애 19–24장 참조)을 경축하고 그 시나이 산 계약을 갱신하는 축제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옛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거쳐 율법을 지키는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로 들어가게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성령 강림이라는 새로운 시나이 계약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구약의 성취요 완성인 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결정적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을 루가는 강조하고 있다. “바람”, “불”(2-3절)과 같은 표현도 구약성서의 하느님께서 계약을 발현하시는 장면(출애 19,14-19)과 결부시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새로운 계약과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2사무 22,16; 욥기 37,10; 에제 37,9-14; 요한 3,8 참조), ‘불 같은 혀들'(출애 3,2; 19,18; 에제 1,13 참조)이라는 표현도 하느님의 능력으로서 성령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온 집 안을 가득 채우고’, ‘불 같은 혀들이’ 사람들에게 ‘내려 앉았다’는 것은 성령께서 그들을 가득 채우셨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루가는 이 기사에서 신학적 사상을 전달하고자 했다. 초대 교회의 탄생과 시작은 예수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성령의 놀라운 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인종과 나라의 온갖 장벽과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이다.

       

      루가의 성령 강림 이야기는 두 가지 전승, 심령 기도 현상과 당대의 지리 학자들과 역사 학자들이 흔히 사용하던 인종 목록을 수용했다. 심령 기도 현상을 간략히 소개하면, 1세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종종 무아지경에 빠져 기이한 말들로 지껄이곤 했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밑도 끝도없이 횡설수설하는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를 성령의 특별한 은사로 여긴 나머지 이를 체험한 이들은 자부심이 대단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열등감을 갖기도 했는데 바오로는 이를 여러 은사들 가운데 가장 낮은 은사로 평가 절하하였다.

       

      모든 민족이 사도들의 설교를 자기네 모국어로 알아들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이 사도들을 통하여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전파된다는 구원의 보편주의를 반영한다. “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또 키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 사람들”(9-10절)에서 유의해서 보면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지경의 인종들을 나열해 놓았다.


      루가는 당대에 통용되던 인종 목록을 기록하면서, “유다”(9절), “유다인들과 유다교에 개종한 이방인”(11절) 등을 삽입함으로써 마치 이스라엘이 세계의 중심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체화된 평화의 복음이 교회의 성교 활동을 통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세상에 퍼져 나간다는 루가의 보편적 구원을 시사하고 있다.

       

       “유다인들과 유다교에 개종한 이방인”은 9-10절에서 나열한 각 지역 출신 유다인들의 총칭이겠다. 곧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다인들”(5절)을 가리키겠는데 이들 가운데는 인종상의 유다인들이 있고, 인종상으로는 비록 이방인들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유다교를 택한 개종자들도 있다. 이 모든 표현은 복음이 유다인, 이방인, 개종자들, 이방인들로 확산되는 것을 예시하기 위해 루가가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제2독서/1고린 12,3ㄴ-7.12-13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말은 참된 영을 받았는지 여부를 가리게 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4절)은 ‘은사들이 배분되어’라는 의미이다. ‘배분’의 의미로 번역된 희랍어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차이, 다양성’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다.”(7절)는 표현은 각자에게 ‘영을 드러내는 은사가 베풀어진다.’는 뜻이다. 여기서 “영의 드러남”이라는 말은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성령의 선물은 내적인 것이 아니라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것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주어진 선물이다. 그런데 그 다른 은총의 선물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이다(7절).

        

      여러 번역본들에서 바오로가 은사들의 교회적 유익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원문은 다만 ‘유익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사실 모든 은사가 ‘공적인 유익’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은 분명히 영의 선물인 은사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것은 “말하는 사람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이에 비해 예언의 은사는 교회를 앞세워 자기 자랑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바오로가 은사의 공익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은사에서 ‘개인적인 유익’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몸과 그 지체들”(12절)의 비교는 바오로의 창작이 아니다. Titus Livius의 유명한 우화에는 이 비교가 기원전 490년 경에 Menenius Agrippa라는 사람이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바오로 시대에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우주를 거대한 몸으로 생각하여 우주의 수많은 존재들의 상호 관련성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바오로의 독창성은 이 “몸과 지체들”의 비교를 놀랍게도 “그리스도”에 적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도 그렇습니다.”라고 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12장 27절의 말을 보면 여기 12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몸은 단지 여러 지체의 집합으로가 아니라 그 지체들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생명체일 수 있게 하는 중심 원리로 간주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당신 인격 안에서 당신을 믿는 수많은 신앙인들의 무리를 하나의 생명체처럼 묶어 하나의 살아 있는 공동체로 남아 있게 하는 중심 원리로서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의 독특한 교회관을 본다.


      그에게 교회는 단지 개개의 그리스도 신앙인의 집합체 정도가 아니라, 각 부분들이 긴밀히 통일 조직되어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유기체처럼, 개개의 신앙인들의 그리스도와 인격적 결합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하나의 생명 공동체이다.

       

      13절의 “한 성령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비록 그 예식이 물로 거행되지만 궁극적으로 ‘성령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에서 ‘으로’라는 전치사는 세례의 결과 영세자가 누군가와 인격적으로 결합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해 준다. 그런데 이 결합은 동등한 자격의 두 인격체의 결합이 아니라 사람이 물 속으로 들어가 잠기듯이 수세자가 자신의 전 삶을 예컨대 ‘그리스도 안으로’잠기게 하는 결합이다.


        복음/요한 20,19-23


      “유다인들이 무서워서”(19절)는 제자들의 공포와 불안을 시사하는 데 역점이 있다. 곧 복음 사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써 그런 상태에서 해방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돌무덤에서 나오시고 제자들을 향해 닫힌 문을 열며 다가가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닫힌 세상을 열린 세상으로 바꾸시려고 닫힌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다가가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시어 한가운데 서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적극적인 주도권이 시사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발현은 완전히 예수님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20절)이라는 인사말은 유다인들이 나누는 평상시 인사말이다. 그러나 약속한 “평화”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기원하시면서 제자들이 공포와 불안을 이겨 내도록 격려하시는 의미가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실제로 만났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루가 복음서에는 “옆구리” 대신 “발”로 표현되고 있다.

        

      제자들의 파견이 아들의 파견에 참여한다는 의미보다는 파견된 실존의 권위에 더욱 중점을 두는 의미다(20절). 곧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그리스도론적 파견 사상이 시사된 것이다.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22절)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생명’을 주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뜻한다.


      “성령을 받아라.”(23절)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 성령은 ‘죄의 용서’에 관한 권한과 함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실상 초대 교회에서는 믿는 이 모두가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고 또한 죄의 용서와 함께 새로 태어난다고 여겼던 것이다. 죄의 용서에 관한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셨지만(23절) 그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권한이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한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선물인 동시에 위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의 결실을 제자들의 권한으로 부여하신 것이다. 그 결실은 바로 구원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는 구원인 예수님의 보편적인 속죄로써 이루어지게 되고,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구원의 원천이 폐쇄된 채 그대로 머물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27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성령체험은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체험이다

    신은근 신부



    성령께서 오시던 날 제자들은 무서워서 숨어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기적의 자리에 있었고, 기적의 음식을 먹었던 그들인데 숨어있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중풍병자가 일어났던 현장을 목격한 그들이다. 그런데 무서워서 숨어있다니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은 당당하게 죽음의 길을 걸어갔는데 사도들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지만 순교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던 것이다. 순교자들에겐 하느님의 이끄심이 있었고,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힘과 용기가 있었다. 주님께서 주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이 개입을 우리는 성령의 활동이라 말한다. 그러나 제자들에겐 아직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없었다. 성령께서 공적활동을 드러내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제자들이 어느 날 모습을 바꾸었다. 영적 힘과 에너지를 지닌 사람으로 돌변하였다. 죽음을 초월한 얼굴로 군중 앞에 나타났고, 당당하게 소신을 말했던 것이다. 며칠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넋을 빼앗기지 않고서 가능한 일일까. 실제 그들은 정신을 잃을 만큼의 체험을 했다. 전 존재를 흔들어버린 체험이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만났고 깨달았고 느꼈던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감각 속에 당신 존재를 심어주셨던 것이다. 성령체험이었다.

    성령체험은 이렇듯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체험이다.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체험이다. 인간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망각하고 주님의 전능하심만을 보는 체험이다. 제자들은 이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용감하지 앓을 수 있으랴. 성령께서 오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제자들만이 그런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누구든 변화한다. 용감한 사람으로 바뀐다. 그분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확신을 갖고 인생을 살게 한다. 얼마나 귀한 변화인가.


    제자들은 두려움을 극복한 뒤 평화를 체험한다. 일찍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평화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분은 발현하실 때마다 이 말씀을 하셨다. 평화만이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음을 아셨던 것이다. 성령체험을 한 제자들은 그 뒤 한번도 평화를 잃지 않았다. 그들은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다. 아무리 말은 물이라도 흐르지 않으면 썩기 마련이다. 고인 물은 상하기 쉽고 새 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끝내 말라버림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제자들의 위대한 점은, 성령체험을 끊임없는 은층으로 만들었다는데 있다. 그들은 생활 속의 변화와 실천으로써 이 체험을 살아있게 했던 것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에게도 평화가 되어야 한다. 믿음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원인을 찾아야 한다. 두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우리에겐 두려움을 극복하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체험을 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은총은 기쁨의 생활이었을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이 확실한 기쁨으로 바꿔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이 변화와 체험을 우리도 청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오신 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28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깨달음과 진리의 성령

    함세웅 신부


    구원사의 단계를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천주 성부의 창조 사업, 성자 예수의 강생 구속 사업, 천주 성령의 강림과 내적 쇄신 및 성화 사업, 오늘은 바로 이 세번째의 내용을 강조하는 축일, 즉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에 대한 개념이 사실 우리 신자들에게는 모호하고 애매합니다. 그것은 삼위 일체의 신비 자체가 오묘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변의 예로써 천주 성삼의 내용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 아기가 어머님 품에서 태어나서, 보호받고 양육되며 자라납니다. 그리고는 일정한 연령이 되면 철이 들고, 모든 것을 깨닫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아기를 낳아 준 엄마, 기르고 양육한 엄마, 자라나면서 깨닫게 해 주는 엄마, 틀림없는 한 어머니의 모성애에 기반을 둔 기능에 의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분명 다른 과정과 단계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아기가 철이 드는 과정, 깨닫는 과정을 거치는 완성의 의미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창조된 인간은 구약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역사를 통하여 성장해 왔으며,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건장한 모습을 지녔지만, 아직 진리를 터득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신 다음에도 활동을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결단력과 행동할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힘이 세차게 바람처럼 불어와서 온 땅을 채우고, 사도들의 마음에 불꽃을 일게 하셨습니다.

      

    모든 묵은 것을 치우는 세찬 바람, 그 세찬 바람은 하느님의 기운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불꽃은 또한 모든 묵은 것, 모든 어두운 과거를 말끔히 태우시고 정화시켜, 그야말로 새 시대를 전개시키며, 인간을 은총의 사람으로 만들어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창조, 그것은 분명 양심의 인간을 재촉하는 것이며, 그 무리들의 모임에 활력을 줍니다. 그 활력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어두움의 나와 빛의 나를, 겁과 두려움과 망설임의 나와 용기와 신앙과 확신의 나를, 완전히 구별해 주며, 미래의 나에게 박차를 가하는 희망의 불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강림 축일을 교회의 창립일이라고 전례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서’라는 표현도 바로 이것을 의미해 주며, 또 다른 의미로 성령은 바로 ‘교회의 영혼’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정신 없는 인간, 영혼 없는 육체,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잃고 맙니다.


    성령 없는 교회, 그것은 그 표현 자체가 모순이고, 그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런 모임은 관광이 나 오락을 목적으로만, 하루 또는 일정한 기간 동안 모이는 그러한 것의 가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정신력, 또는 영혼은 그 자체로서 인격 (Persona)을 이루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기능 하나 하나가 각기 다른 위격 (Persona)입니다. 이 서로 다른 위격이지만 똑같은 하느님이시기에 이 신비를 우리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동일성, 삼위 일체, 천주 성삼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모습대로 비슷하게 창조된 인간, 그 인간 안에서 성 아우구띠노는 바로 성삼의 모습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인간 정신력의 위대함, 이성과 감정과 의지와의 미묘한 관계, 그것은 분명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부의 기능과 작용은 확실히 구분되지만 동일체에서 연유되듯이 성부, 성자, 성령의 구원사에서 인간과 맺는 관계가 다르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에 의한다는 것, 이것을 우리는 합리적인 관계에서 이해하고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은 온 땅을 채우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을 증거하는 힘을 주시며,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은 바로 교회의 절대권을 보장해 주시기도 합니다. 바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칩으로 죄를 사하고, 맺고 푸는 천상적 권리를 교회가 받았고,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 의하여 계승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해 주신 성령은 사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신앙인들인 우리를 위한 것이며,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기쁨을 느끼며, 새 시대에 새로운 신앙인으로서의 각오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내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 그들 자신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6-19)






    29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기 전에 아담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주신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주시며 하시는 동작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셨다」는 말에서 「숨을 내쉬다」라는 표현은, 창세기 2,7에 나오는 다음 말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새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기 전에 아담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스승 예수님의 죽음 후에, 제자들의 공동체는 생명력이 없는「죽은 공동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오늘 복음말씀의 시작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문을 닫아걸고 있었을 만큼, 두려움에「얼어붙어」있었다. 자기들 속에 폐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스승 예수께서 그들 한 가운데로 다가오시어 「당신의 평화」를 주시고 당신의「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자, 그들은 용기를 내어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요한복음에 의한「제자들의 성령 받음」대목의 이런 역할은 성령강림 대축일인 오늘의 전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도행전 2장의「오순절 성령강림」의 대목에서 더 강조되어 나타난다.

    루가복음서-사도행전을 보아도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고부동하게 믿게되고, 두려움 없이 적대적인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해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은 성령을 받게되면서부터이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죽어있던 것이나 다름없던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은 후에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로 살아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전체의 구조에서 볼 때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출발점에 해당되는 사건인데, 사도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앞으로 있을 증인으로서의 긴 여정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힘을 받게된 셈이다.


    성령은 초대 교회의 탄생에서뿐만 아니라, 그 성장 및 생활 안에서도 원동력의 역할을 하였다. 성령이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관련하여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의미 깊은 말을 하였다: 「성령이 없으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며,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고,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에 불과하며, 귄위는 권력이고, 선교는 선전이며, 예식은 의고(고풍)주의이고, 윤리적 행위는 노예적 행동이다」


    참으로 날카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기에, 한 문장 한 문장 그 뜻을 나 나름대로 새겨본다. 「성령이 없으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삶이 아닐 때 ,하느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는 관련이 없는 분이 되어 버린다. 말만 신앙인이지,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며」 :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체적 신앙과는 상관이 없고, 과거 역사 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한 인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스도가우리의 삶에 이런 정도의 의미밖에 차지하지 못할 때, 자연스럽게「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게 된다」. 「성령이 없으면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에 불과하며」 : 성령의 차원이 없다면 교회는 복음증거의 삶을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학교, 병원, 사회사업단체 등 수많은 단체들을 운영하는 거대한 조직체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한 곳에서 「권위」라는 것은, 능률을 올린다는 명목하에, 남을 누르기 위한 「권력」으로 변질된다.


    「성령이 없으면 선교는 선전이며」 ; 성령의 차원을 잃어버리면, 교회의 선교는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기쁨이 되는지를 전하는 「복음전파」가 아니라, 어떤 회사의 광고 선전처럼 되거나, 자기 단체의 세를 불리기 위한 방편으로 변한다.


    성령을 떠나 사는 삶은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진리와 사랑」을 떠나 사는 삶이다. (참조: 「진리의 성령」관한 요한 16,13).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을 떠나게 될 때,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매력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교회의 창립일이요, 생일」이라고도 볼 수 있는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성령」의 임하심을 정성스럽게 기도로 청해야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성령으로」새롭게 태어나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그런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


    특히 오늘 복음의 시작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처럼, 무섭게 변모하는 세상의 흐름 앞에 겁을 먹고 자기 속에 움츠려 들고있는 공동체의 경우, 또는 공동체의 창립 초기의 유연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거대해진 조직 속에 현실유지에 급급하며 경직되어 가는 공동체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생기」를 빼앗아 가는 주범은 바로「죄」이다. 생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이 「죄」를 극복해야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그 길을 알려준다. 고해성사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활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생명의 숨결(靈)을 다시 받는 은총의 길이다.

    「성령」은 우리를 죄의 지배하에 있는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시키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준다.

     「주님, 보내시는 당신 얼에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 (오늘 화답송 시편 중에서)






    30              성령 강림 대축일 신앙생활의 살아 계신 원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같은 사실은 예수께서 교회의 모든 내용을 만드신 분이며, 성령은 교회가 교회로서 존립하고 활동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성호경을 통해 성령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모든 일을 시작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언어와 개념상으로 어느 정도 묘사할 수 있는 성부와 성자에 비해 성령께 대한 이해는 그리 높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성령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삼위의 신비를 알게 되었으므로, 성령께 대한 이해도 성부와 성자를 분리해서는 불가능하다.

    성령이 결정적으로 계시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주는 장면이 예수 세례 장면이다.

      

    예수의 세례는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예수 위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강림하여 하늘로부터의 말씀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한다.


    예수 세례 장면에서 나타난 비둘기는, 메시아 위에 강림하여 새 창조의 순간을 여는 영을!

    그리고 이 영을 받아 새롭게 탄생되는 메시아의 백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하느님의 부성적 사랑을 나타내는 표지이기도하다.

        

    또한 교회를 세상에 탄생시키고 초대교회가 열렬한 사명으로 복음선포에 나설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예수 부활체험이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묻히신 예수께서「주님으로 부활하셨다」는 이 부활체험은 「주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신앙 고백이다.

    따라서 부활체험은 다름 아닌 성령체험이다.

       

    성령강림 보도에서 불로 표상되는 영(靈)은 사람들을 내적으로 정화하고, 그 안에 열정을 불어 넣어주며, 변화시키는 심리적 힘이며, 불혀는 하느님이 하시는 큰 일들을 전하는 선포와 신적 훈계의 선포를 가르킨다. 영(靈)은 사람들을 내적으로 변화시키고, 자유롭게 하며, 그들을 새 공동체로 모으는 하느님일 효력 있는 행위이다.

    성령강림 때 성령은 사도들을 변화시키고 정화시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를 인도하는데 필요한 은사들을 사도들에게 주셨다.

      

    언어의 은사는 말씀의 선포능력과 일치를 드러내는 표지로, 이 은사를 통하여 바벨탑을 전복시키는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사도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을 하였지만, 한데 모인 사람은 각기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었다. 영은 구별되는 사람들을 일치시키시는 힘인 것이다.


    이러한 성령강림은 교회 시작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성장을 위해 계속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성령은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의 근원일뿐 아니라, 교회가 복음 선포를 하는데 있어서 누리는 자유의 원천이기도 하다.

    또한 성령은 갖가지 은사를 통하여 교회를 건설하고 성장시키며, 신도들로 하여금 자기 현존을 체험하게 한다. 은사들은 성령께서 자기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로서 상당히 다양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은 성령 칠은(七恩)이지만, 이 칠은은 7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존중하여 만든 것이고, 성령의 은사를 일곱가지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은사는 하느님이 주시는 무상의 선물, 은혜의 선사로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신기하고 특수한 은사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이 영을 통해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을 총칭한다.


    이 은사의 목적은, 첫째는 신자들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여 하느님의 몸이 되는 교회를 세우는데 있고, 둘째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해서다. 모든 믿는 이는 한 세례로 한 성령을 받아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그리스도 몸의 성장을 통해 지체들 모두를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인간 성숙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

      

    결국 성령의 은사는 다르지만 그것의 목적은 교회의 건설과 한 분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2천년 전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지금 여기 우리 안에서 구체화시키고 실현시키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고 믿음을 불러일으키시며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계승하고 성숙시키면서 활동하시는 분이다.

      

    결국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살아있는 원리이다.

    이러한 믿음 아래서 교회는 성령을 교회의 영혼이라고 한다. 인간의 육체가 영혼에 의하여 살아 있듯이, 교회도 성령에 의하여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는 말은 결국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믿는다는 것이다.






  5. user#0 님의 말:

     


    성령강림 대축일

            31. 성령은 누구신가/63           32 성령의 상징들/65

            33. 최인호 작가/67                 34. 성령의 열매/68


    31               성령강림 대축일 :   성령은 누구이신가


    성령은, 그리스도의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인간성을 성부의 오른편에 앉게 하시어 영광스럽게 하신 원동력이시므로, 또한 그리스도와 결합된 모든 믿는 이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실 원동력이시다. 그래서 교회 전통은 성령을 교회의 영혼이라고 한다. 인간의 육체가 영혼에 의하여 살아있듯, 교회도 성령에 의하여 살아있다는 말이다.

      

    성령께서 교회의 魂이시라면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 역시 성령이시다.

    성령은 성화의 은층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하시어 새사람이 될 힘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사람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초자연적 덕성을 주시어, 사람이 구원진리를 올바로 믿게 하시고,그 믿음에 의지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허락하신 영생을 바라며, 모든 피조물 위에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열정을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은 신자 개인을 성화시키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교회를 성화시키신다.


    예수께서 교회의 모든 내용들을 만드신 분이시라면, 성령은 교회가 교회로서 존립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분으로 교회 일치와 보편성의 근원일 뿐 아니라, 교회가 복음선포를 하는 원천이 되시는 분이시다.


             성령강림


    교회의 전례력은 부활시기가 성령강림 대축일로 마감된다. 이는 성령강림이 예수부활과 별도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강림과 함께 초대교회가 기쁘고 담대히 복음선포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부활 체험이었다.

    그러나 예수부활 이후에도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조심스러운 상태에 있던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야 기쁘고 담대하게 이방인들과 유다인들에게 이 예수부활을 증거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성령강림과 예수부활은 서로를 비추는 빛으로 성령강림은 부활신비의 절정인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첫번째 증언(사도 2,14~36)을 통해 3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아 세례를 받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게되는데, 이들의 모임이야말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강림일을 교회의 창립일로 기념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


    성령강림은 교회의 시작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성장을 위해 계속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성화은총으로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은사를 베풀어주신다.

    성령의 그 여러가지 도움을 흔히 성령칠은이라 하여 슬기, 지각, 의견, 지식, 용기, 효경, 경외심을 일컫는다.


    슬기는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세속 사랑보다 귀하게 아는 지혜를 말하며, 지각은 구원진리를 인간 지력의 한계 내에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의견은 선악에 대한 바른 판단력을 도우며, 지식은 믿을 것과 믿지말아야 할 것을 식별하는 은사이다.

    용기의 은사는 신앙생할에 수반하는 모든 장애를 극복하며, 효경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더하게 하고, 경외심은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상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은사이다.

      

    그러나 이 칠은은 완전을 상징하는 7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존중하여 만든 것이고, 성령의 은사를 일곱가지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은사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특수한 은사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거저 주시는 선물을 총칭한다.

      

    이 은사는 신자들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여, 하느님의 몸이 되는 교회를 세우는데 그 첫번째 목적이 있고, 둘째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해서다. 아울러 셋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결국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건설과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 하나가 된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성령이 거처하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성령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며 그 은사를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






    32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공통)   성령의 상징들


      내 방에 약 15cm되는 쥐 한 마리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아침에 응접실에 나가 보니 온통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큰일이었다.

    끈끈이를 사다가 이 구석 저 구석에 놓았으나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가지 단서를 남겨놓았다. 난초를 뒤집어 놓고는 뿌리를 파먹은 것이었다. 목이 마르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 놈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왜냐하면 물로 유인하면 걸려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날 밤 작은 물그릇을 땅 한 구석에 놓고는 그 주변을 끈끈이로 온통 막아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나가보니 그 놈이 끈끈이에 걸려서 찍찍거리고 있었다. 쥐는 약은 동물이다. 끈끈이가 해로운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목이 말라죽을 것 같으니까 하는 수 없이 달려들었다 걸린 것이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에게 있어 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성령을 물로 표현하는 이유는 영혼에게 성령은 물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물은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탄생과 풍요를 의미한다”라고 가르친다.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시들어간다.


    바람(숨)

     성령은 숨(바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숨을 쉬지 않으면 인간은 죽은 것이다. 뚱뚱한 사람 하나가 장가를 가서 첫날밤을 지내는데 어찌나 코를 골아대는지, 그만 신부는 겁에 질렸단다. 그도 그럴 것이 코만 고는 것이 아닌 가끔씩 ‘무호흡증’ 증세까지 보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코를 세게 골다가 잠시 아무 소리도 없으니, 남편이 죽였나 걱정했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숨쉬는 사람이다. 인간의 영혼도 숨같은 성령께서 함께 계셔야 살아있는 것이다.


    성령강림 때 성령께서는 바람소리와 함께 임하셨다. 바람소리와 함께 임하신 성령을 받고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새 사람이 되었다.

    이 세상에 바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과학자는 “신부님, 바람이 없으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라고 말한다. 바람은 무더위를 몰아낸다. 찜통 더위를 몰고 온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계속 머물고 있으면 많은 사람이 “헉! 헉!” 대다가 죽을 것이다. 그뿐인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몰고 온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몇달 계속 머물면, 결과는 처참할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공기를 계속 맡을 때에는 답답하지만, 비바람이 몰아쳐서 나무가 몇 개쯤 부러지는 상황이 지나고 나면 공기는 맑아진다. 바람이 더러운 공기를 몰아낸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우리에게 생기를 주신다.


      “도둑이야!”하고 소리를 지르면 나오지 않는 사람도, “불이야!”하면 나온단다. 불이 무섭기는 무서운가 보다. 그러나 불이 없으면 인간이 어찌 살겠는가! 불이 없으면 어떻게 문명이 발전했겠는가? 불은 열을 낸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불이 있기 때문이다. 불꺼진 방,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방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불은 힘을 낸다, 불이 있기에 공장도 돌아가고 배도, 비행기도, 자동차도 움직인다. 전기가 없으면 어떻게 높은 빌딩을 올라가겠는가! 30층, 40층 되는 빌딩을 걸어서 올라가면 등골이빠질 것이다.

      

    불은 빛을 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아니 등잔도 촛불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 불이 없으면 암흑의 세상이고 두려움이 몰려든다. 이외에도 불은 정화시킨다. 더러운 것을 태워서 깨끗하게 한다. 이렇게 인간의 생존과 관계있는 불을 성령의 상징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이런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하셨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려고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성령을 받으셨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 3년간의 일을 마치시고 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자 당신께서 받으셨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오늘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날이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다”(I고린 12, 3)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 9)라고 말한다.

    세례와 견진성사는 성령을 받는 성사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는가? 그것을 체험으로 느끼고 있는가?

      

    성령의 은사는 7가지(이사 11, 2-3)와 9가지( I고린 12, 8-17)가 있다. 성령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은사와 열매를 주신다. 이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다.

    성령의 열매는 9가지(갈라 5, 22)가 있다. 이는 개인을 위한 열매들이다. 요즘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성령은 공동체를 깨면서 활동하시지는 않는다. 사목자의 지도를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영광을 도모하는 사람, 돈을 요구하는 사람, 공동체를 깨는 사람, 종말을 얘기하면서 겁을 주고 희망을 꺾어 버리는 사람들은 요주의 인물이다.






    33                성령 강림 대축일   거짓 평화를 주지 말라

    최인호 베드로/작가


     ‘서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베네딕토(480-547)의 생애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기도하고 일하는’ 베네딕토 수도자들의 규칙서를 남김으로써 모든 수도자들의 기초를 완성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의 전기를 저술한 성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베네딕토가 저술한 단 하나의 규칙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토는 뛰어난 분별력과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서술하였다. 그분의 성품과 생활을 더 자세히 알려 하는 사람은 그분이 행동으로 가르친 모든 내용을 이 규칙서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이 몸소 생활하셨던 것과 다른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숨겼지만 규칙서는 ‘분별력이야말로 모든 덕행의 어머니’라고 부른 그의 말처럼 ‘뛰어난 분별력’과 ‘명쾌한 표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베네딕토규칙서」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 아들아, 스승의 계명을 경청하고 네 마음의 귀를 기울이며 아버지의 훈시를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있게 채움으로써 불순종의 나태로 물러갔던 그분께 순종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거라.”

    이 규칙서의 제4장에는 74가지의 계율이 있습니다.

    “첫째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로 시작되는 계율은 5번째에 “거짓 평화를 주지 마라”고 가르칩니다.

    그 당시 수도자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서로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곤 했습니다. 베네딕토는 ‘손님을 받아들임에 대해서’란 항목에서 손님들을 진정 사랑의 친절로 받아들여야 하며 기도를 바치기 전에 하는 평화의 입맞춤은 ‘악마의 속임수’이니 위선적인 평화의 입맞춤은 하지 말라고 경계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두 번이나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고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리스도 평화의 상징인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두려움은 ‘어쩔 줄 모르는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주님은 붙잡히시기 직전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4,27).

    주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이 주는 평화는 베네딕토 성인의 표현처럼 ‘거짓 평화’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평화에는 손에 박힌 못자국과 옆구리에 찔린 창자국이 없습니다. 그것은 억압된 평온과 강요된 침묵의 거짓 평화인 것입니다. 인간 존재로서의 해방과 평등의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이 세상 권력자들이 외치는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평화를 빕니다” 하고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 평화의 인사 속에 그리스도의 참평화가 깃들어있는지, 아니면 성인이 경계하였던 악마의 속임수인 거짓 평화가 깃들어있는지 진심으로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34                         < 성령의 열매 >


     1.   축복된 삶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변화됨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새로운 인품을 묵상하였다.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는 아홉 가지의 열매이다.


    하나의 뿌리는 그리스도 안엣 사는 삶을 말하는 것으로 첫째, 기도하는 생활을 가리킨다.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기도했다고 할 수 없다.

    두 번째는 열심히 노력하는 삶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서 자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말은 모순되게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 이루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역사 하시도록 자신을 열어 놓고 받는 것을 배우라는 뜻이다.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선물이다. 그래서 자신의 습기찬 부분을 하느님의 따스한 빛에 열어 보이는 것이다.

    하느님은 전능하시지만 은총의 햇빛에 나의 습기찬 곳을 뒤집는 것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느님이 해 주신다면 그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거슬러 강제로 하시는 것이고, 이 부분만큼은 인간이 하기를 하느님은 원하신다.

    아무리 강한 햇볕이라도 덮어씌운 항아리의 속을 비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이 하느님의 역사 하심을 막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로 이것이 아담과 에와가 과일을 따먹으면서 한 독립 선언인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하느님께 장독 뚜껑을 열어드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햇빛과 은총 그리고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역사 하심을 아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깨달음이고 체험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이 참된 행복을 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믿음과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해야할 일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다.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분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는 참된 기쁨과 평화 그리고 사랑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평생을 따라 다니는 신념이 될 때에,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자기가 있는 장소와 맡겨진 일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만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가 아닌 다른 때와 장소에 있기를 바란다면, 오늘의 이 자리에서 나를 만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다. 하느님의 역사 하심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있는 이 곳에 있기를 바라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충실히 하기를 원할 때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배우는 유일한 장소는 우리의 일상 생활이다.


    우리가 날마다 일하고 있는 소임지의 일상 생활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배우는 유일한 장소이다. 지금 자신이 처한 장소에서 그 일을 통해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뵈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사람이고 만남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신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다만 그분께 마음만 열어 드리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변화시키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드려야 한다. 자신의 힘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 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리 성실하고 겸손하더라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고정시키고서 그분의 생애를 본받는다면 점점 그리스도를 닮을 것이므로 실망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실수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부활 성야 때 우리는 “오! 복된 탓이여!”라고 노래를 한다. 아담과 에와가 지은 죄 때문에, 하느님께서 삶이 되신 은총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나 실수 때문에 실망과 좌절에 빠지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구원과 겸손을 줄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노력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신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게될 것이고, 그 사람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먼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열매를 다 맺어 주시고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역사 하심을 보도록 허락 받게 될 것이다.

    즉 성령께서 우리를 얼마나 부드럽게 인도하시고 인내롭게 우리의 실수를 참고 받아들이셨는지를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을 얼마나 인내롭게 참아주셨는지는 하늘 나라에서 알게 될 것이며, 그 때 우리는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 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는, 하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확실히 주셨을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걸어온 우리의 길을 주님께 감사드리고, 이제는 그 길을 주님께서 우리를 업고 가신다는 믿음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아홉 가지의 열매를 맺으면서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되어 축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  새로운 삶 



    1) 완덕에의 부르심


    인생은 나그네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을 매일 길을 걸어가는 것에 비유하여 生卽道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내가 가고 싶어했던 그 길을 가고 있는지, 또한 그 길이 올바른 길인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이 완전하심 같이 우리도 완전해지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완전함”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느님으로부터 초 한 자루를 받았다. 그리고 이 초에 불을 붙이면, 그 초는 완전한 초가 된다. 비록 그 초가 태양처럼 온 천지를 밝힐 수는 없지만 초가 자기가 발산할 수 있는 빛을 발하면, 초 나름대로의 완전성을 이룬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는 한 송이의 꽃송이가 들국화나 장미 또는 백합일 수 있다. 그런데 할미꽃이 장미꽃은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된다. 들국화가 자기의 위치에서 활짝 피어나면, 들국화의 완전성을 이룬 것이다. 그래서 들국화에게 너는 왜 장미가 되지못하느 냐고 나무라서는 안된다. 그 들국화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활짝 피어나 하느님 께 “제 몫을 다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박아들이 성가 부르는 것을 보면, 노래가 아니라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들으신다.

    부모는 자식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믿음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결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꽃봉우리를 활짝 피우려는 노력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소질과 생명을 최선을 다해 살 때, 완덕에의 불안감이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는 물에 살면서도 물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 상류로 가듯이, 그리스도인의 삶도 완덕에의 어려움이나 시련을 강한 의지로 물리치는 용기가 필요하다.


    2) 그리스도의 향기와 성령의 열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닮고 그분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보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신약성서에서는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렸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골로사이 3,10)라고 하면서, “새 인간”이라는 말을 서너 번 썼다.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 생활과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 남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새로움과 변화를 나타내며 이것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역사 하시는 능동적인 능력이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 중에서 방언에 굉장히 집착을 한다. 아주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역사 하심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은사는 “인품의 변화”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고린토 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는 모두 공동체를 위한 것이며,

    더 큰 은총의 선물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변화”임을 강조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비범한 은사보다 눈에 금방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품성과 인격이 변하는 것이 가장 주된 성령의 역사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변화된 인품의 참모습을 갈라디아 5장 22-23절에서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가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그리스도인 전체의 덕목을 이야기 해 놓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 이 하나의 뿌리는 요한 복음 15장 5절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

    첫째,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조용히 기다리 면서 듣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다.

    둘째, 성령께서는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성취시켜 주시므로 그 은혜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 무엇을 해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는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사도들이 이제 두려움을 무릅쓰고 전교하기 시작했다.

    사랑(Ⅰ)       <성령의 열매>그분들은 말주변도, 지식도 변변치 않았다. 그러나 그 확신과 기쁨에 넘친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그분들을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 하시어 내가 나날이 변화되고 있음을 다른 사람이 보고, “저 사람은 예수를 따라 다니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는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로 드러나야 한다.

           3.  사  랑



    사도 바오로가 언급한 성령의 첫째 열매는 사랑이다.

    성경에는 야곱의 라헬에 대한 사랑, 룻의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 등이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인간을 서로 가깝게 만드는 가장 강한 힘은 “사랑”이다. 부부, 부모와 자녀 그리고 친구간의 사랑은 우리 삶의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적인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처럼 모든 것을 주는 아가페이다.


    사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사랑은 감정이기 때문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없어지는 수가 있다. 반면 두 번째 사랑은 사랑을 주는 것으로써, 상대방에게서 매력의 감정이 생겨서 봉사하겠 다고 결심하기 전에, 즉 그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한 후에 이 매력의 감정이 생기는 것 이다.


    중매결혼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감정이 없다. 그러나 결혼하기로 결심한 후에는 “나는 남편 되는 사람을 사랑하고 말 거야.”라는 의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의 사랑은 의지의 문제로써 이것이 오래가고 진실한 것이다.


    첫 번째/ 사랑을 가지고 있는 부부는 사랑이 오고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겠다는 사람만 있고, 정작 사랑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현대 가정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은 갈수록 커지지만,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랑을 하는 부부는 상대방의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주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라는 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나도록 온갖 정성을 다 쏟는다.

     그의 행복은 아내를 활짝 피어나게 하는 것이고, 남편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아내 역시 똑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을 주고 받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사랑(Agape)이라는 말은 항상 자기 자신을 주는 것(Self-giving)에 관계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사랑을 주고 또 받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사람도 사실은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먼저 받고서야 주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모든 가정 공동체와 대인관계가 얽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해야할 일은 먼저 주는 것이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썩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먼저 주면 저절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체험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다.


    신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이론이 아닌 체험 그 자체이다.

    사람은 한 번 실천해서 자기 마음에 강렬하게 와 닿는 체험이 있을 때 삶이 바뀌기 시작한 다. 참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것을 체험할 때 비로소 삶이 바뀌게 된다.

    이런 큰 깨달음이 오지 않으면 단지 이론에만 머물러 삶의 일부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아가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닌 “타인에게로 향하는 꾸준한 의지의 방향”이 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과 의지는 모든 사람의 선과 행복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착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신다. 즉 하느님은 우리를 행복에로 이끄시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가 우선하며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때때로 하느님은 우리를 고통과 슬픔의 어두운 길로 인도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시련의 때가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에게 굉장한 도움과 이익 그리고 선의 원천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참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 배려하 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루가 복음 10장 29-37절에서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드신다. 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가 해야할 일을 다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이웃”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니까 이웃 사랑은 하느님께서 도와주라고 맡긴 그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순종”의 뜻이 들어있다.


    사랑은 성령의 첫 열매로서, 이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요한 1서 4장 19절의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말은 참 쉬운 것 같지만 아주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사랑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갓난아기는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사랑을 배운다. 아기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알기 훨씬 전에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사랑을 알게 된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전혀 배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체험이 깊이 와서 닿았을 때야 비로소 자신 있게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즉 하느님의 사랑이 자신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게 만들고, 자신감을 가지고 하느님께 사랑을 되돌려 드리고, 이웃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여유와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하느님 사랑과 자기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 잘 어울린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사랑을 확실하게 체험하고 도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을 쳐다보고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그분을 만나야 한다. 아울러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

    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하늘 공중에 떠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생각 하는 데 있어서 시간과 장소 그리고 공간의 개념을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이 계시는 곳을 하늘 어디엔가 있을 하늘 나라나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천국에서 기대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하느님과 영원히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깊은 사랑을 해 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 나라에 가서 할 것이 없다. 하늘 나라에서는 사랑밖에는 할 것이 없기 때문 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사랑을 하면서 참된 사랑의 아름다움과 애절함 그리고 가슴 뿌듯함을 못 느껴 보는데, 그 완전한 사랑을 하느님과 영원히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비록 불완전한 사랑을 하고 있지만, 그 불완전한 사랑을 완전에 가깝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갈 자격이 없다. 사랑을 빼어 버리면 인간의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절실히 깨닫지 못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며 무궁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은 아주 개별적인 사랑이다. 하느님은 우리 개개인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마치 목자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불러서 양우리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따로 불러서 구원해 주신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고,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으려고 방을 쓸고 불을 켜고 애타하는 여인과 같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개별적이며 강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 은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사랑의 능력이 없다.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마치 햇볕이 높은 산꼭대기와 깊은 골짜기의 어떤 풀잎의 이슬방울에도 비쳐지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각 개인의 영혼을 안아주시고, 개인적인 사랑으로 이끄신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깨닫느냐가 문제다. 이 체험은 조금 일찍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는데, 하느님의 사랑을 빨리 느낄수록 우리는 천국 같은 곳에서 살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에 하느님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선 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사랑의 이중 계명이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에서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하느님과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하느님을 본받는 것이다.

    구약에는 십계명이 언급되기 직전에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에집트 땅 종살 이하던 곳에서 너희를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내가 이런 것을 너희에게 해 주었으니, 너희도 이런 것을 베풀라.”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이 모든 계명과 윤리의 근거는 하느님께 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이웃 사랑의 계명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과 연관시킨다.

    즉 하느님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주님께서 주신다.


    그런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분리시켜서도 안되지만, 두 사랑이 하나로 동일시되어 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거부하 고 기도만 하겠다는 신심주의 또는 종교의식주의가 있을 수 있고,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핑계삼아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행동지상주의는 하느님 없는 휴머니즘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인 사랑의 두 가지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 조화시키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어머니께 처음 배운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랑도 인간으로부터 먼저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랑을 인간으로부터 배우지 못했다면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 두 사랑을 구별은 하되, 전혀 다른 두 개의 사랑으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인간적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적 인 사랑이 많아질수록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커지고, 진해지고 넓어지고 깊어진다. 사랑이 주는 기쁨을 많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사랑의 말 한 마디를 듣고 싶어하는가! 인간은 누구나 모자라고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고 그리워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을 조금만 감안하여 먼저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 모두의 삶이 굉장히 복음적일 수 있을 것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3).

    믿음과 희망도 사랑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나는 믿나이다.”(Credo)라는 말은 “내 마음을 준다.”에서 나온 말로 바로 사랑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런 희망과 사랑과 믿음은 참된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면 하느님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치 않고, 영원히 하느님과 일치해서 사는 희망도 이루어졌으므로 오직 사랑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나에게 하느님의 이 사랑이 임했을 때, 즉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꼈을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천국은 사랑으로 가득 찬 곳이기 때문이다.



         4.  기   쁨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몇백 명의 사람들은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복음을 전하여 세계를 정복하였다.


    우리는 기쁨과 쾌락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육체적인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때에 생기는 만족감은 쾌감이다. 그러나 기쁨은 심리적인 만족감과 함께 삶의 의미를 체험했을 때 느끼는 행복이다.


    사람의 몸을 해치는 것은 세균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느끼는 온갖 걱정과 불안 등이다. 기분이 좋으면 혈액순환도 잘되고 소화도 순조롭게 된다. 그러나 걱정이 쌓이면 치료가 잘 안되고, 어떨 때는 숨이 콱 막혀서 쓰러질 정도가 된다. 60% 이상의 질병이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즐거운 마음은 건강에도 좋고 일의 능률도 오르게 하며 사회를 명랑하게 한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게 기쁜 마음을 준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이 기쁨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유다스를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목숨을 바쳐서 온 세계를 뛰어다닐 수 있었는 가?


    그것은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쁨이 없이는 그런 엄두조차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뵈온 그 이후부터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요한 20장 20절에는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라고 쓰여있다.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시는 장면은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나타나자 그들은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고,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하느님이 보여주신 것에 대해 아주 기뻐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고 부활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것을 사도들은 깨달은 것이다.

    남을 위해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썩는 것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삶의 모습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고통과 십자가의 의미가 다르게 와 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은 이 부활의 기쁨을 확고부동하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이 기쁨은 혼자서 붙잡아 매둘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 기쁨은 도무지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마에 표시를 하고 다닐 수밖에 없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굉장한 호기심과 부러움을 가지게 되었다.

    사도행전 2장 46-47절에는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은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고 쓰여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쁨으로 하지 않으면 남들이 우러러 볼 리가 없다.

    내가 상을 찡그리고 선행을 한다면 무엇을 잘했다고 우러러보겠는가?

    기쁜 마음으로 서로가 빵을 먹고 같은 잔을 나누어 마시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니까 우러러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뻤기 때문에 시련이 닥쳐와도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서도 기뻐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사람은 억지로 라면 좋은 일을 한두 번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두 번으로 그치고 지속되는 힘이 없다. 그러나 기쁨이 우러나와서 할 때는 그 모든 어려움도 무마될 수 있다.


    고린토 후서 6장 10절을 보면 “하느님의 봉사자는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뒷바라지를 기쁜 마음으로 한다. 사랑이 많아지면 그만큼 기쁨이 커진다.

    사도 바오로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기쁨에 넘쳐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기쁨이 있을 수 없다.”고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절망과 공포 그리고 불안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들은 죽은 후의 허무에 대해서 굉장한 절망과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야말로 참된 내적 기쁨을 주는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 사도시대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확신에 차서 기쁨 속에서 이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야 한다.


    이 기쁨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지탱해 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인 중에 과연 명 퍼센트나 자기 인생과 이웃의 인생을 기쁨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는 데살로니카 전서 5장 16-18절의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 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라는 말씀대로의 삶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쁜 일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참된 기쁨은 힘들고 어려운 인생살이에서도 복음의 희망과 구원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 기쁨은 굉장히 깊숙한 곳에 있으며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으로, 우리의 전 생애 에 흘러가야 할 기쁨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해서 왜 고통과 불목과 마찰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 어려움, 불목, 마찰, 고통 등의 밑바닥에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쁘게 살고 남에게 기쁨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쁨은 사람들을 연결시켜 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조그만 다리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지치고 무표정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와 밝은 빛을 전해주는 사람이 될 때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가질 수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자발적으로 기쁨에 넘쳐서 행동하는 것이며, 그렇게 살아야 우리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5.   平和 (평   화)



    인간은 누구나 다 평화를 갈망한다. 그러나 인간은 평화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평화의 본질과 실체를 잘 모르고 있고, 또 이 평화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하느님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미국의 종교 철학자 폴 틸리히는 현대인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로 따라 다니는 것이 새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불안감, 둘째는 공허감, 셋째는 고독감이라고 했다.

    인간은 왜 불안하고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가?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욱 불안해진다. 안정이 되어 있지 못하고 공중에 붕 떠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마음이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평화의 참 뜻은 완전하다. 충만하다는 것이다.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라고 하는데 성서에서 말하는 샬롬(평화)은 하느님과 화목하여 사는 상태로써 구원과 생명으로서의 참 행복을 뚯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참 평화는 현세적으로 전쟁이 없는 상태만이 아님을 얘기하면서, 평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의했다.


    첫째,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 두 번째, 각자의 마음속의 평화. 세 번째, 형제들과의 화목. 네 번째, 모든 사람들과의 평화이다.


    성서의 주제는 이 “평화”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따먹지 말라는 과일을 따먹음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깨트렸다.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행복해지겠다고 독립선언을 한 것이다.

    이것은 아담과 에와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악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인데, 하느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 행복해지겠다는 것이다. 이 죄로 인해서 하느님과 인간이 불목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 죄악으로 말미암은 하느님과 인간의 분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하게 된다. 그래서 에페소서 2장 14절에는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쓰여 있다. 온갖 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왕으로서, 평화는 예수님이 바치신 십자가 희생의 결실이다. 하느님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화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평화는 화해이고 일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치는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에페소서 4장 3절에는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라고 적혀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내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호소와 변명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보다 더 애쓰시는 분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 다.


    처음에는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중간에 가면 마음이 흔들리고 확신이 없다. 그래서 자기 삶의 핸들을 하느님께 넘겨드리기를 두려워한다.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가 없는 것은 많은 기도가 조바심과 안달, 조급함과 이기심 그리고 자기추구를 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자기 자신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많은 부인들이 남편의 회개를 위한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 정작 자신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는다.


    믿음과 평화는 공존한다. 확신에서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믿음이 자기 생애를 끌고 갈 만큼 든든하지 않고, 삶의 악세사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평화와 일치를 방해하는 마귀(Devil)는 비방․험담․중상모략 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의 질서정연한 관계를 어질러 놓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통회하는 정신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은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많은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어, 형제가 산으로 가자고 하면 바다로 가고 싶어도 산으로 갈 수 있다.


    우리가 먼저 추구해야 할 절대 가치는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도 서로 양보하며 살 수 있다.

    사랑이나 평화가 일의 성취 자체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절대적인 것이 무엇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치와 평화로써, 우리가 자기 주장과 고집에서 벗어나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어 드리면 성령께서 나의 인품을 바꿔 주실 것이다. 우리의 영혼 안에 평화의 열매를 맺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서에는 “화려한 궁전에서 사는 것보다 나물을 먹는 화목한 가정이 훨씬 낫다.”는 표현이 있다. 사랑과 일치와 화목 그리고 평화를 위해 우리가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절대적인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치와 평화이다. 우리가 자기 주장과 고집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어드리면,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 속에 평화의 열매를 맺어 주시고 우리의 인품을 바꾸어 놓게 될 것이다.


    우리 사이에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흐르도록 애써야겠다. 우리는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 이 되어야 한다. 남의 잘못을 덮어줌으로써 그 잘못이 더 이상 전파되지 않도록 자기가 들은 것으로 끝내야 한다. 서로를 떼어놓기보다는 가까이 하고 일치시켜야 한다. 우리의 이웃을 아프게 하고 모욕하는 것들을 대화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마음 착한 이들에게 약속하신 평화와 기쁨이 이 땅에 좀 더 많이 내리도록…….



        6. 忍耐 (인  내)



    네 번째로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인내이다. 인내는 고난, 고통, 어려움에 직면해서 낙심하지 않고 굳건하게 잘 참는 덕을 말한다.


    성서에서는 인내를 그저 참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품성을 배운다는 적극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므로 언제라도 죄인인 우리를 벌하실 수 있고, 파멸시키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은 결코 서두르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정한 때가 올 때까지 참을 뿐만 아니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우리 인간도 어른이 되려면 유아기, 유년기, 청소년기라는 단계를 밟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린이에게 좀 더 빨리 자라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어린이들을 해치는 결과가 될 것이다.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성취하고자 서두르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준비시키셨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세자 요한까지 이천 년을 필요로 하였고 하느님은 이천 년을 기다리셨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셨다”는 말씀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곡식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신다. 추수 때에 가서야 비로소 곡식의 진정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13장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에서 그 종들은 서둘러서 가라지를 뽑아 버리려 했으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지혜롭게 명령하였다. 추수 때가 오면 좋은 곡식과 가라지를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회개하고 돌아올 시간을 주시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임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은 오래 참고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몸이 자라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시간이 걸린다.

    베드로 후서 3장 18절에 “여러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고 또 그분을 앎으로써 계속 자라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계속 자라나야 할 사람들이다.


    영성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법을 조용 히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실 수 있는 시간의 여유를 하느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서둘러서 성취시키려고 하니까 매일 실패하고 “나는 성장이 안 된다.”고 실망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도록 하느님께 시간을 드려야 한다.


    시련은 글자 그대로 시험과 단련이다. 시련은 우리 믿음을 순결하게 한다.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것이다. 마치 금강석을 용광로의 도가니에 넣어 찌꺼기를 걸러내는 것과 같다. 이것이 시련의 목적으로 시련은 순수하고 깨끗한 믿음을 우리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시련은 확실히 가혹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순결, 정화, 성화를 초래한다.

    시련은 시험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자기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했다.

    어느 세상에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는 하느님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답게 자기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절대 나쁜 것을 주지 않으신다는 더 큰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강철과 같이 뜨거운 시련의 불에 달구면 달굴수록 더욱 강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시련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신앙고백이지 않을 수 없다. 시련이 없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어야 할텐데 시련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 한 대 더 때리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절대 매를 들지 않는다. 사랑의 매를 때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과 고통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될 때에 그것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된다.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것이 벌로 느껴지지 어떻게 사랑으로 느껴지겠는가?


    인간은 고통이 주어져야 인내라는 덕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인내는 편안한 곳에서는 얻지 못하는 덕이다. 고통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인내의 덕을 쌓을 수 있겠는가? 인내는 역경과 시련 중에서만 얻을 수 있는 덕이다.

    우리에게 고통이 오고 실패와 역경이 와야 참된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는다. 숙련된 어부가 되기 위해서는 성난 파도와 싸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사람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도 숙련되려면 거센 파도를 많이 이겨야 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고통이나 시련 없이 열매를 따먹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쁨, 보람, 영광, 평화는 이 시련을 이겨낸 결과로 온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역경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그것을 이겨낸 기쁨은 더욱 크다.

    고통이 없으면 거기에 따른 보람과 기쁨이 없는데 우리는 고통과 시련이 없는 보람과 기쁨만을 얻고 싶어한다.


    사랑은 여러 가지 시련을 이겨내고 십자가를 지고 난 후에 주어지는 기쁨이다.

    사랑에는 꼭 십자가와 희생이 뒤따른다. 그러나 희생과 시련, 고통을 당하고 싶어하지 않으면서 사랑의 기쁨만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에게 마음 편한 곳에서만 살면, 그 사람은 절대 기쁨을 못 느낀다.

    어려운 사람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서 잘 살 수 있는 체험이 없이는 기쁨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을 겁내거나 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그 길을 가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시련과 고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굉장히 적극적이며 긍정적이다.


    옛날에 스위스에서 신부님 한 분이 산 비탈길을 자전거를 타고 내려왔는데 스위스 교통 법에 비탈길에서 손을 놓고 자전거를 타면 벌금을 내야 했다. 그런데 마침 순경이 보고서 벌금 10프랑을 내라고 하자 신부님은 “사실 내가 두 손을 다 놓고 왔지만 하느님께서 운전하셨다.”고 대답하자, 순경은 “그러면 20프랑을 내라.”고 했다. 자전거에 한 사람이 더 타면 벌금 10프랑을 내야하니까 20프랑을 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핸들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인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조절하고 싶기 때문에 양심에 가책을 받고 아집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편안한 때는 하느님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해서 걸어갔기 때문에 발자국이 4개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찬 폭풍우가 몰아치자 발자국이 두 개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보십시오. 저 때가 가장 어려웠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때 하느님께서는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발자국을 자세히 보아라. 그것이 너의 발자국인지?”라고 말씀하셔서 자세히 보았더니 그것은 자기의 발자국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묻자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를 업고 가지 않았느냐?”고 대답하셨다. 이와 같이 어려울 때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업고 가신다.

    이것이 신앙인 인 우리가 하느님께 삶의 핸들을 맡길 수 있는 이유이다.


    독일의 뮨헨 바이에른 지방에 가면 2차 대전의 폭격으로 다 허물어진 시골 성당이 있는데 조각난 예수님의 동상을 주어서 붙여보니까 양팔은 없고 다른 것은 다 있었으므로 그 조각들을 맞춰서 동상을 세운 다음에 “예수님께서 팔이 없으시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팔이 되어 드리자.”라는 팻말을 세웠다고 한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이 회개하고 변화되어서 당신의 복음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참고 기다리신다. 더디게 이루어지더라도 하느님은 결코 조바심 내지 않으시고 우리가 변화되는 시간을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또한 인내는 확신에 찬 삶에서 찾아온다.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화를 간직한 사람은 인내할 수 있다.

    인생을 아주 어둡게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인생을 항상 밝게 보는 사람이 있다.

    굉장한 인생관의 차이지만 사실은 보는 마음의 시각 차이인 것이다.

    근본적인 마음의 자세 즉 믿음에 따른 것이다.


    객관적으로 술이 반 병 정도 남아 있는데, 어떤 사람은 반이나 남았다고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반밖에 남지 않았다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앞에 있는 장애물을 보고 “야, 한 번 싸워서 이겨보자!”고 하지 않고 “아이구, 장애물이 또 생겼구나!”라고 피하면 안 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숨어 계신 분이다. 그래서 숨어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역사와 발걸음 하나하나를 다 알고 계신다.

    그분이 허락지 않으면 머리카락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분의 은은한 사랑에서 비켜나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참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의 숨어있는 사랑을 볼 눈을 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

    느님은 숨어 계신다. 그러므로 우연한 사건과 만남의 가장자리에서 숨어서 역사 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여러 번 많은 만남이나 우연히 읽은 책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겪은 어려운 시련들 속에서 숨어 계셨던 하느님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익명성이다.

    그런데 우리는 문장이 다 끝나지도 않은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하고 질책하려고 한다.

    어느 철학자는 “삶이란 하나의 문장이다. 그 문장의 마지막까지 발음되어야 비로소 그 문장 전체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참으로 우리는 상대방의 삶을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 우연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숨은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한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보면서, 그 생애의 뒷면에 하느님의 사랑 어린 손길이 있었음을 깨닫는 수가 많다. 한 삶이 마감되었을 때 비로소 “아! 하느님께서 바로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 앞에 우리 영혼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언제나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어서 오십시오!”라고 반갑게 맞이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정하신 시간에 오시려고 떠나가 계심을 믿는다.


    성서 전체가 하느님께서 당신이 정하신 때를 고집하고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시간을 결정짓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표시하시려고 결정한 그 날과 그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전능과 충실하심에 대한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랬을 때 우리는 하느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리듬을 깨고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의 길과 같지 않다. ”(이사야 55, 8)는 것을 우리가 믿고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참아낼 수 있다. 그것은 그분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련을 이겨낸 다음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당신 방식대로 들어주셨음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답게 당신의 방식과 시간대로 사랑해 주시기를 바란다. 이것이 인내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느님의 시간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을 살아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인내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7.  親切 (친 절)


    친절을 희랍어로는 “크레스토스”라고 해서 “인자”“용서”“자비”“호의”라는 뜻으로 쓰는데, 성서에 나오는 친절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언짢음에도 불구하고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정답고 고분고분하고 상냥한 인간의 자연적인 힘을 훨씬 뛰어넘는, 인간의 마음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덕행이다.


    루가 복음 6장 27절에서 36절을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35절의 “인자”라고 번역한 말이 희랍어의 “크레스토스”라는 단어이다. 우리가 친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러나 친절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 오히려 정반대의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 나를 못살게 굴고 뒤에서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5장 45절 이하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선한 분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윤리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인간에게 벌을 주어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실 수 있지만 우리의 자유를 강요해서 회개시킬 수는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유의 신비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말을 물가로 끌어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게 강요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솝우화에서 세찬 바람과 탱양이 내기를 했는데 나그네의 옷과 모자를 벗긴 것은 세찬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태양이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따스하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나를 미워하며 해치고자 한 사람에게 네 가지 방법으로 보답할 수 있다.

    첫째는 자기가 받은 손해보다 더 무겁게 혼내주는 것이다. 창세기에는 카인을 해친 사람은 일곱 갑절로 보복 받고,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 일곱 갑절로 보복 받으리라는 내용이 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보복이 성행했기 때문에 지금도 이스라엘과 아랍의 주변 국가들이 계속 싸우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태복수법이다. 즉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보복하는 것이다. 출애굽 21장 24절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범한 죄에 대해서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이다. 현대에는 그것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세 번째는 보복하지 않고 그냥 참아내는 것이다. 일단 손해난 것은 자신이 감수하겠다는 것으로 대단한 용기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네 번째는 악을 선으로 갚는 그리스도인다운 방법이다.

       미국 독립전쟁 때의 이야기다. 피터 밀러라는 사람에게는 원수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다툴 때 그 사람은 밀러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밀러는 이 모욕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자 그 사람은 영국군에 가담하여 간첩 노릇을 했는데, 영국군이 지고 미국의 독립군이 이겼기 때문에 그 사람은 간첩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피터 밀러는 워싱톤 장군에게 그 사람을 살려달라는 탄원서를 썼다. 그러나 워싱톤 장군은 승전한 지 얼마 안 되는 이 때에 간첩죄를 지은 사람은 사형에 처함으로써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하면서 밀러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밀러는 “그 사람은 나의 친구가 아니라 나의 원수입니다.”라고 밝혔다. 이것을 본 워싱톤 장군은 원수를 살려달라고 하는 그 뜻에 감동하여 그의 원수를 석방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목숨을 구한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좋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또한 친절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망각”이다.

    잊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큰 하느님의 은총이다.

    우리 머리 속에서 스트레스와 잡념을 제거하면, 힘이 더욱 솟고 활기 찬 삶을 살 수 있다.


    복음은 분명하게 자기가 당한 모욕을 용서하고 가르치신다.

    우리가 매 번 바치는 주의 기도에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버지, 우리가 잊어버리듯이 우리 잘못을 잊어주세요.”라고 얘기하고 것이다. 우리는 대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크게 만족하지는 않지만, 스스로는 제법 완전한 것처럼 여기고 산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사이즘을 착한 사람에게 옮기는 페스트라고 경고한다.


    우리보다 앞서 사신 모든 성인 성녀들이 자신이 당한 모욕을 남보다 잘 용서해 줄 수 있었던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과 자신의 응답에는 상당한 불균형이 있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만”의 유혹이 생기지 않았다.

    용서하려는 사람은 잊으려고 노력한다. 잊음으로써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용서는 인간을 옛날보다 더 아름다운 사발로 만들어 주지만, 인간의 용서는 깨진 사발을 조각조각 붙이는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용서는 불완전하지만 최선을 다해 잊어버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앞을 보고 나아갈 수가 있다.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먼저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불란서의 어떤 최고 사령관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장군 두 명이 누가 먼저 경례를 붙여야 하느냐는 문제로 항상 다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최고 사령관은 “두 사람 중에 더 예의 바른 사람이 먼저 경례를 하시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자신이 모욕을 당한 상황으로 되돌아가서, 누가 먼저 화해를 청해야 하는가를 물어보아야 하고 두 사람 중에 더 그리스도교적인 사람이 먼저 화해의 첫 발을 내디뎌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친절이다.



          8. 善行 (선 행)



    선행(Agatos)은 양선함, 즉 “착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을 착하다고 보는데, 성서에서 말하는 “착함”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고 남이 곤경에 처했을 때 호의적으로 관여하고 기꺼이 도와주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미사 때에 “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또한 자주 의무를 소홀히 했나이다.”라고 고백의 기도를 하는데,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고, “선”을 소홀히 했다고 해야 옳은 번역이다. 즉 남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행하지 못한 것을 주님께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신약성서를 보면 “착한 사람”이라고 표현된 인물이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루가 복음 23장 50절에 나오는 요셉 아리마태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나오는 바르나바 사도이다.


    요셉 아리마태아는 의회 의원으로서 그는 예수를 죽이려던 의회의 결정과 행동에 따라가지 않았다. 그래서 성서는 이 사람을 가리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살던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마태오 복음 27장 57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묻힐 무덤이 필요했을 때 자기의 새 무덤(마태 27, 59)을 기꺼이 제공했다.


    사도 바르나바는 키프로스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레위 지파의 요셉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바르나바는 사도들이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해 있을 때, 자기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활약을 도왔다. 그래서 사도 바르나바는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사도”로 불리웠으며 “바르나바”(위로의 아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이 어려울 때 위로해 주는 것이 선한 사람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격려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과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착함”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의미는 인정이 많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줄 수 있는 것이고, 세 번째 의미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롭고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관대함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칭찬할 점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자캐오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선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 예수님 외에 또 누가 있었는가? 예수님은 우리보다 더 깊이 그 사람들의 잘못과 악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분은 어떤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만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한 인간 안에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키워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물결과 스타일을 관대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자질과 능력이 필요하다. 선각자의 대부분은 굉장한 박해와 함께 많은 고난을 겪었다.

    물론 새로운 것이 다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것에는 복음의 요소가 들어가 있으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착한 사람은 남을 조급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선함은 넓고 너그럽게 보는 관대함이기 때문이다.



            9. 眞實 (진 실)



    진실은 신의를 지킨다. 충실하다. 약속을 꼭 지킨다는 충성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믿음과 같이 “피스티스”(Fistis)라는 단어를 쓴다. 믿음을 남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덕행을 “진실”이라고 표현한다.

    충실은 하느님의 가장 주된 속성 중의 하나이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 “나는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리고 “하느님은 바위”라는 상징적인 표현은 그분의 변함없는 충실성, 진실하신 약속, 흔들림이 없는 약속을 말해준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에게 충실을 다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에페소서 1장 1절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들은 믿음직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한다.

    고린토 전서 4장 2절에 “관리인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게 대한 충성입니다.” 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곳에서 어떤 직책을 맡더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각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사명을 최선을 다해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 가지 방면에서 충실해야 한다. 첫째는 작은 일에 충실할 줄 알아야 한다. 사소한 일이라고 해서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위해한 일을 하도록 불리움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작은 일에 충실한 것을 하느님은 매우 위대하게 보신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한다면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진실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젊었을 때에는 하느님께서 작은 일을 맡기신다.

    그것은 경험을 쌓게 하고 그 사람의 성실도를 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시험해 보기 전에, 사람을 높은 자리에 올려 보내지 않으신 다.”는 이스라엘 격언이 있다. 우리가 날마다하는 사소한 일이 하느님께는 결코 의미 없고 하찮은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천천히 오랜 시간을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일생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 생활이 곧 생애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두 번째로 충실성을 보아야 하는 것은 환경이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성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보상에 관계없이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하는 기쁨을 맛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어떤 소명을 받든 지간에 거기서 깃든 하느님의 뜻을 알고 열심히 응답하는 진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10. 溫柔 (온  유)  



    온유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나타낸다.

    온유함은 힘과 권세와 교만 그리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것과 반대되는 덕이다.

    성서에 나오는 온유함은 아나윔(Anawim) 즉, 가난한 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것은 하느님께 순종하고 이웃에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온유함은 가난과 겸손이 포함되어 있는 덕행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온유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뜻을 완전히 인정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자기 주장대로 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온유한 사람들이 지니는 특성이다.

    하느님 앞에 무력한 존재임을 느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집회서 1장 27절에는 “주님을 두려워함이 곧 지혜이며 교양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신실과 온순이다.”라고 쓰여 있다.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께 겸손한 자이다. 하느님께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조용히 참고 기다리며 견디어 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온유함의 찬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온유함에는 외유내강의 단호하고 굳은 의지가 들어가 있으며 자신감이 있다.

    즉 해낼 수 있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물이 자기 안에서 큰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온유의 반대는 다른 사람에게 이기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논쟁에서는 이기지만, 사람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논쟁에서는 지지만 사람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성찰하여, 자기의 주장을 선교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한 온유함은 지혜의 표징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13절에는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라고 가르치신다.


    신약성서는 지혜가 하느님의 관대하심을 아는 것이고, 이 하느님의 관대하심에 기초한 온유함을 “지혜”로 보았다. 그러니까 지혜는 하느님을 전제로 한 온유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가 당한 모욕을 스스로 갚지 않고 심판하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권리 주장을 포기하는 사람이다. 다만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2절에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겸손>


    루가 복음 14장 7절에서 11절을 보면 손님들이 저마다 혼인 잔치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면서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셨다.


    필립비서 2장 5-8절을 보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겸손은 진실한 인간 존재의 중심이다.

    곧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겸손이다.

    자기 분수를 안다는 것은 스스로 애써서 얻고 가꾼 덕망을 과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겸손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대단한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위대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겸손은 절대성에 대한 체험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겸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겸손은 절대적인 한계의 체험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절대적으로 위대하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다. 다시 말해서 절대자가 존재할 때에만 타당성이 있고 생명력이 있게 된다. 그러니까 겸손은 낮고 비열한 마음이 아니라, 고상하고 넓은 마음이다.

    겸손은 자기 안에 내재해 있지만 자기 자신이 그 자체가 아닌 무한에 대한 존경심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현존은 부서진 존재에게 나타난다.

    겸손이란 자신의 노출되고 부서진 모습의 긴장감을 견디어 내는 것이다.

    무한한 진․선․미 자체이신 분 앞에 선, 때묻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견디어 내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하느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낮은 곳으로 물이 흘러 고이게 되는 것처럼, 겸손한 마음에 하느님의 은혜가 고이는 법이다. 병이 비어 있어야 참기름을 넣을 수 있듯이, 겸손하게 비어 있는 마음에 하느님의 성령이 불어넣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교만한 자의 기도와 자기 자랑을 일삼는 바리사이파인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죄를 뉘우치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유명한 금구 요한은 “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요, 어머니요, 기초다.”라고 말씀하셨다. 아우구스띠누스 성인도 “신앙 생활의 첫째도 마지막도 겸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겸손한 자는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고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자기 공적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봉사하고자 하고, 항상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종이 자기 일을 다 마친 후에 고맙다는 인사를 듣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겸손의 첫 걸음은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이웃에게 기쁘게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제 교만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11. 節制 (절 제)



    – 문에 거는 문고리를 옛날에는 라틴말로 “카르도”(Cardo)라고 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의 문을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지․의․용․절덕(知․義․勇․節德)을 추기경(Cardinal)의 의미를 따서 사추덕(四樞德)이라고 한다.


    – 모든 죄는 잘못된 집착과 애착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절제란 잘못된 집착이나 집념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식욕․정욕․물욕․권세욕․허영심․분노․욕설 등을 다스리고 제어하는 것이다.


    – 절제의 의미 안에는 “알맞게 조절한다.”(Modestia)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여러 가지 감정이나 욕망을 조절한다고 해서 절제를 자제(Self-Control)라고 한다.

    베드로 후서 1장 5-6절을 보면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라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의 육신은 그저 편안하고 안일하게 살기를 원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육신이 너무 편하게 되면 오히려 불편해지고, 육신에는 적당한 운동과 사용이 필요하다. 이것이 있어야 참된 편안함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맞게 조절할 줄 아는 절제의 능력이 필요하다.


    – 모든 죄는 잘못된 집착과 애착에서 나온다. 우리가 재물에 너무 집착하면 재물의 노예가 된다. 인간이 재물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인간의 주인이 되었을 때, 인간은 결코 자유롭게 살지 못한다. 잘못된 애착을 가진 사람은 절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뚫고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현대는 물질 위주의 사고방식 속에서 살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취미가 지나쳐서 내 생의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 때는 더 이상 취미가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는 주인이 된다.


    – 희랍의 철학자들은 항상 젊은이들에게 “네 자신을 알아라!”고 가르쳤고 아울러 자신을 다스리라고 했다. 즉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생활이란 검은 말과 흰말이 끄는 수레와 같다.”고 했다.

    흰말은 인간의 이성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고, 검은 말은 욕망과 본능이라고 했다.

    즉 이것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


    –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식욕과 정욕이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이 두 가지를 절제하지 못해서 실패한다. 절제하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다.


    – 아담과 에와가 범죄한 것도 따먹지 말라는 과일을 먹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제일 손쉽게 떨어질 수 있는 죄가 식욕에 떨어질 경우이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재를 지키시면서 준비하실 때, 마귀는 제일 먼저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고 했다. 식욕을 통한 유혹이다.


    – 또 에사오가 야고보의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의 장자권은 삶의 전체에 관계된 것으로 장자와 차남의 관계는 엄청난 재산의 차이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장자권을 에사오는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것이다.


    – 오늘도 팥죽 한 그릇이나 돈 몇 십만 원에 자기 인격과 양심을 팔아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의 입신 출세나 명예를 위해 민족과 나라를 팔아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이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식․절주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평소에 절제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은 단정해질 수 있는 것이다.


    – 잠언 25장 16절에 “꿀을 봐도 적당히 먹어라. 너무 많이 먹으면 토하리라.”는 얘기가 있다.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젊음, 건강, 아름다움 등이다. 이것은 텔레비전 등의 매스컴의 영향이 크다. 그래서 노년의 원숙함과 노련함의 가치는 사라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육체적인 젊음과 아름다움만을 가꾸려고 하는 것이다.


    – 시편 34편에는 “혀를 다스리라.”는 내용이 나온다. 화를 참으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성체를 손으로 모시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다. 손으로는 많은 죄를 짓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혀로는 더 많은 죄를 짓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실상 혀는 손보다 더 더럽다. 그래서 악한 말과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옷차림과 행동을 정당한 범위 안에서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 단정함(Modestia)을 유지해야 한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존의 욕구가 있다. 그러나 이 자기 보존 욕구를 너무 중요시해서 상대방과 타인을 보지 못할 때에는 이웃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므로 건전한 자기애와 보호 본능을 지녀야 한다.


    – 그리고 이 자기애의 동기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고 체험하는 것은, 정당한 자기 존중과 자기애의 동기요 전제 조건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사랑해 주심을 알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자기 사랑이 일치하고 융합할 때 건전한 삶을 누리게 된다.


    – 절제는 자기 자신을 건전하게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생명과 건강을 아끼고 보존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절대 자학하거나 자포자기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특히 불우하고 불구된 자가 이런 위험에 빠지게 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자기 긍정과 존중을 건전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 우리는 먼저 작고 사소한 일에서 자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내가 변화되면 많은 사람들이 변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애착에서 벗어나 절제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자유롭고 해방된 삶을 이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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