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2주일
너희는 육신을 죽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제1독서: 예레 20,10-13
제2독서: 로마 5,12-15
복음: 마태 10,26-33
입당송(시편 27,8-9)을 비롯해서 오늘 독서 전체의 주제는 그리스도 신자가 신앙 때문에 또 주님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활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어려움 내지는 ‘박해’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응송을 보자 : “내 몸소 능욕을 당하여, 부끄러움에 낯을 들 수 없음은 오로지 님 때문이 아니오니까? 나는 형제들에게도 딴 나라 사람, 내 어미의 소생에게도 남이 되었나이다. 당신 전당에의 열성에 나는 불타고, 님을 욕하는 자들의 그 욕이 내게 떨어지지 않았나이까?”(시편 68,8-10).
그래서 이어지는 기도는 그러한 어려움에서 해방되기를 기원하며 특히 나약한 이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기원한다 :“님의 자비하심 너그러우시니, 주여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없는 이 보고들 즐거워하라. 주를 찾는 너희 마음에 샐기를 돋구어라. 가난한 이의 소청을 들어주시고 사로잡힌 이를 어여삐 여기시는 야훼님 아니시냐!”(시편 68,17,33-34).
복음전 노래에서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당신을 증거하라는 권고의 말씀이 울려 퍼지고 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요한 15,26-27).
끝으로, 영성체송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이 상기된다 :“나는 착한 목자이니,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바치노라”(요한 10,11.15 참조).
이상의 성서 구절들에서 ‘박해’는 유감스럽게도 우연적인 사실로서보다는 신앙고백 그자체에서 떼어버릴 수 없는 요소로서 제시되고 있고 또한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 즉 박해는 마치 그리스도와 더 앞서서는 구약의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경우에서처럼 믿는 이들의 생활적 증거를 부추겨주고 그들을 ‘반대받는 표적’이 되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루가 2,34 참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요소라 하겠다.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예레미야 예언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고백’ 가운데 일부를 전해주고 있는 제1독서에서는, 왕으로부터 보잘것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설교를 통해 비난했다는 이유로 적개심은 물론 육체적인 위협까지도 받고 있는 예레미야가 자신의 절망감을 야훼께 털어놓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립니다. ‘저자야말로 사면초가다. 고발하자, 고발하자.’ 저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모두 제가 망하기를 바라 모의합니다. ‘걸어 넘어뜨리고 잡아 족치자. 앙갚음을 하자’”(예레 20,10).
의기소침한 그의 영혼 상태는 마침내 욥의 경우와 같이(욥기 3,1-26 참조)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기까지 이른다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복과는 거리가 먼 날. 어찌하여 모태에서 나와 고생길에 들어서 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 이렇게 수모를 받으며 생애를 끝마쳐야 하는가!”(예레 20,14.18).
이러한 극단적 절망의 중요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마음과 존재의 가장 밑바닥까지 상철ㄹ 입음으로써 모든 것에 대해 느낄 수 밖에 없는 적대감이다. 그의 마음은 섬세하고 다정다감했다. 그러나 그는 엉뚱하게도 ‘뽑고 무너뜨리고 멸하고 헐어버리는 일을 위해’(1,10 참조) 파견되었다. 평화와 안정을 희구하는 그가 유다 왕국의 종말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을 겁내고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그가 동족과 왕들, 사제들, 거짓 예언자들, 모든 백성들을 거슬러 싸움으로써 “온 나라 사람이 다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거는”(15,10)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는 그렇듯 무거운 자신의 사명에 대해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 : 하느님이 그를 ‘파견하셨다’. 그래서 하느님게서는 그에게 적대감을 품고 죽이려고까지 하는 모든 원수들을 물리쳐 이길 힘도 주실 것이다 :“아무리 덤벼도 너를 당하지 못하리라. 내가 네 옆에 있어 도와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1,19).
그러므로 오늘 전례에서 소개되고 있는 대목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강한 두려움과 거센 반감에 뒤이어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신뢰심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제 곁에는 힘센 장사처럼 야훼께서 계시기에 저를 박해하다가는 당하지 못하고 나가 떨어질 것입니다. 뜻을 이루지 못하여 부끄러움으로 머리도 들지 못하고 길이길이 잊지 못할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만군의 야훼여, 사람의 뱃속을 아시고 심장을 꿰뚫어 보시는 공정한 감시자여, 저들을 고소하는 이유를 밝히 말씀드렸사오니, 이제 이백성에게 제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이 눈으로 그것을 보아야겠습니다”(20,11-12).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의 적대자들에게서 ‘눈으로 보기를’ 바라는 그 ‘보복’은 인간 각자의 “뱃속을 아시고 심장을 꿰뚫어 보시는”(12절)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복수의 행위가 아니라 정의의 행위이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고통을 당하고 두려움에 싸이면서도 여전히 하늘로부터의 도움을 신뢰하는 그 예언자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리라는 확신감이 표현되고 있다 :“야훼께 노래를 불러드려라. 야훼를 찬양하여라. 야훼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악당들의 손에서 빼내주시는 분이시다”(13절).
이처럼 예레미야 예언자는 무한한 고통의 격동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예언적 사명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성서적 전승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상징적 형상’이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사 53장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서술적인 소재가 이 예언자의 형상에서부터 적지않이 비롯되었으리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집주인을 가리켜 베엘제불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그 집 식구들에게야 무슨 욕인들 못하겠느냐?”
복음도 또한 ‘박해’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들의 ‘전교사명’과 연결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언적’ 전교사명과 ‘사도적’ 전교사명 사이에 일종의 사상적 ‘연속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소위 ‘파견사’에서 발췌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권능’과 또한 육체적인 병도 고쳐주면서 ‘하느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건설할 ‘권능’을 부여하신 후 그들이 당하게 될 많은 박해들을 아주 현실적으로 예고하신다(마태 10,16-25).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은 이상할 것이 없다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놓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집주인을 가리켜 베엘제불이라고 부른 사람이 그집 식구들에게야 무슨 욕인들 못하겠느냐?”(24-25절).
그러나 적개심과 죽이려는 음모 그리고 공적인 조롱에 동조하는 듯한 바로 이러한 설명은 열두 사도들과-수난사에서 일어나듯이-그들의 뒤를 이어 그들의 복음선포와 구원의 사명을 짊어지게 될 모든 사람들을 동요케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격려하신다 :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26.28.31절).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비록 루가가 다른 문맥에서 제시하고 있는(루가 12,2-9) 사료들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문학적으로 아주 잘 짜여져 있으며 내용 전체가 ‘두려움’에 대한 싸움에 집중되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할 때 받게 되는 두려운 위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그는 혼신을 다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자신의 신앙을 비밀로 감추고 싶어한다(26절 참조).
그래서 예수께서는 ‘두려움’을 물리쳐 이겨야 한다고 세 번씩이나 권고하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이유를 덧붙여 말씀하신다.
첫 번째 이유는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26절)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 팔레스티나 지방을 지나가면서 사도들에게, 그리고 아마도 방심하고 있던 몇몇 청중들에게 비밀리 하신 그 말씀의 내용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있게 될 마지막 ‘심판’의 근거가 될 중대하고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32-33절 참조).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세상에 대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27절). 이 상징적 표현은 그 가르침을 귀머거리까지도 들을 수 있게(마르 7,37과 병행구 참조) 모든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서둘러 급히’ 알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지막 결정에 대한 최후 통첩이 될지도 모른다!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참된 생명은 인간들의 능력을 벗어나 있고 또한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28절).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의 폭력이 미칠 수 없는 우리의 ‘영혼’을 당신의 영광 안에 받아들이신다. 바로 여기서 죽을 위험까지도 불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 신자의 힘이 솟아난다 : 실제로 죽는 자는 그가 아니라 그를 박해하거나 죽이는 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불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권능은 진정 하느님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이미 죽게끔 되어 있는 육신 생명의 죽음이 필요하다 :‘승리’는 외형적으로 목숨을 잃은 자의 편에 돌아갈 것이다! 뒤이어 나오는 대화에서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듯이 “자기 목숨을 잃음으로써”(10,39 참조) 그 목숨을 “되찾는 것”이다. 이밖에 어떠한 일도, 비록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16,26) 아무 소용이 없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다”
복음을 진실되이 선포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천상 아버지의 ‘섭리’가 항상 깨어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단돈 한 닢”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루가 복음사가는 다섯 마리라고 한다: 12,6)의 운명까지도 그분의 보살핌 하에 있다 :“그러나 그런 참새 한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29-31절). 보다시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용기를 북돋워주는 아주 강한 논증이다.
그러나 이 논증의 힘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준다’는 사실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즉 참새들에게 일어나듯이 사냥꾼들의 올무에 걸려 떨어지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당신 자녀들과 항상 함께하시리라는 ‘약속’에 있다.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더 나아가 죽음을 당하는 것은 결코 의미없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가장 위대하게 진리를 증거하셨던(요한 18,37 참조) 예수의 경우에서처럼 구원과 증거의 힘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이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
오늘 복음은 이미 부분적으로 26절에서 언급되고 있는(“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심판의 마지막 장면이 대귀법 형태로 상기되고 있는 문장으로 끝나고 있다. 복음 선포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법정은 그들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인간의 법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변호사가 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고발자 역할을 하게 될 가장 엄한 하느님의 마지막 법정이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32-33절).
복음선포는 어떤 이론적 학설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를 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리스도가 복음 전체의 주인공이요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하는 분이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분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거슬러 불충실하거나 비열한 행동을 하거나 배반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가 천상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안다거나’ 또 ‘모른다고’ 증언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의 결정적 ‘가치기준’이 된다. 그분은, 그분을 알려야 하는 사도들이 됐든지, 그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됐든지간에 모든 인간 운명의 한가운데에 자리하신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절대적 중심성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면, 어째서 복음이 불편스러운 책이 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점점 자신 안에 폐쇄되어가며 인간 생명의 초월적 종말론적 차원을 거부하려 하는 이 세상에서 ‘훼방꾼’으로 취급될 수 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들도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다 놓으려는 함정에 때때로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은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자신의 중심으로 삼지 않는다면 자멸하고 말 것이다. 그 결과는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게 되고 끝내는 인간 생명의 신성한 가치조차도 무너지고 말게 될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무수한 자녀들의 생명을 거스르는 폭력을 합법화시키기까지에 이르른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자행되는 모든 폭력의 형태를 생각해 보라!
교회는 적대감이나 박해를 두려워하지 ㅁ라고 “지붕 위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용기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두려움을 갖는다면 그때는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이 득세하여 사람들의 양심을 잠재우고 그들을,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는 거대한 무리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은총의 경우와 죄의 경우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복음의 힘에 대한 믿음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외에도, 만일 조가 커다란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힘’은 그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사도 바울로는 제2독서를 통해 첫 번째 아담에 의한 파괴활동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재건 활동을 비교함으로써 잘 말해주고 있다 :“한 사람이 죌ㄹ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경우와 아담이 지은 죄의 경우와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사람의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저 받았습니다”(로마 5,12.15).
‘하느님의 은총’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든 역사를 초월하는 구원이든 할 것 없이 모든 구원의 선물을 세상 모든 사람들-주님의 제자들을 박새하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해서-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구에게나 풍성히 부어지고 있다는 이러한 사실 역시 교회와 그리스도 신자들이 어떤 반대를 무릎쓰고라도 온 세상에 용기 있게 선포해야 할 복음의 내용이다.

연중 제12주일
1. 최기산 주교(가)/ 2 2. 김현준 신부(가)/ 4
3. 강길웅 신부(가)/ 6 4. 은총의 필요성(가)/ 8
5. 김동욱 신부(가)/ 10 6. 최봉원 신부(가)/11
1 연중 제12주일 마태 10, 26-33 (가) 두려워하지 말라
최기산 주교
한국 사람들은 누구를 두려워할까? 나이든 어른들은 경찰만 보면 괜히 두려운 생각이 든다고 들 한다. 왜 그럴까? 과거 일제 하에서 순사들에게 쓰라린 경험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경찰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신 아무개처럼 죄를 짓고 나다니는 사람은 경찰만 보면 등골이 오싹하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이유로 경찰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겠는가! 만일 많은 사람들이 경찰만 보면 괜히 두려운 생각이 든다고 하면 그 정부는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이 개에게 발뒤꿈치를 물려서 피가 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는 개만 보면 두려운 마음이 생길 것이다. 쥐방울만한 개가 앙칼지게 짖어대도 겁을 잔뜩 먹고 콧잔등에 식은땀이 배어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인가? 복음을 전할 때에 당할 고난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러 다닐 때 먹는 것과 자는 것은 스스로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무수한 고난을 겪었다. 호텔에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눕히면서 먹고 자고 다닌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매맞으며 다녔다. ꡒ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의 이름으로는 아무 말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서 놓아보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면서 의회를 물러 나왔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과 이집 저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포하였다.ꡓ(사도 5, 40―42)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너무도 중대하여 자신의 안녕과 편함은 뒷전이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예수님께 미쳐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ꡐ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과 위험 그리고 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로마 8, 35 참조)ꡑ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미쳤다고 말했다.
어째서 사도들은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까? 굳센 믿음 때문이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그들을 두려움에서 해방시켰다. 두려움에는 믿음이 약이다.
우리나라는 성인이 103분 계시고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약 만명쯤이라고들 한다. 그들은 참으로 대단한 믿음으로 장렬하게 목숨마저 바치신 분들이다. 몽둥이로 패고, 불로 지지고, 뼈를 으스러뜨리는 고문을 했으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었다. 참새보다 더 귀한 인간인 자신들을, 참새도 돌보시는 주님께서 언제나 돌보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오늘도 주님께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죽음의 공포, 아픔까지도 이겨낼 수 있다. 믿음은 힘이다.
복음의 메시지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던 우리 선조들의 선교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선 각오해야 하는 것은 박해다.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거나 전할 때 환대를 받을 생각으로 나서면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가?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과연 음식점에서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고 먹는가? 아니면 생략하고 먹는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창피하게 생각되어 그냥 모르는 척하고 먹는 것은 아닌가? 물론 식사하면서 기도를 안하고 먹는다고 하여 큰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ꡐ내가 기도하면서 식사를 하는 것에 대하여 왜 부끄러워하는가?ꡑ이다. 아마도 그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그럴 것이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자랑하기보다는 부끄러워하면 주님께서도 이 세상의 마지막날 심판 때에 우리를 모르신다고 하실 것이다. 이는 참으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무엇이 두려워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숨기려드는가?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박해를 당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주님을 믿던 제자들이 대부분 순교하였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현세적인 이익이나 영예가 아니었다. 고난과 희생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부활의 영광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에겐 박해는 없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몽둥이를 들이대며 믿음을 포기하라고 협박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누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둠의 세력은 미소작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배구로 치면 강타가 아니라 연타를 날리고 있다. 강타보다는 오히려 연타가 더 끈질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타는 무엇인가? 천주교 신자라고 하여, 신부라고 하여, 수도자라고 하여 잘해주는 것이다.
특히 ꡐ님ꡑ자를 자주 듣는 사람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환대와 존경이 계속되다보면 눈은 점점 어두워지고 자신도 모르게 교만이 싹트게 되어 주님으로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멀어져간다. 이는 박해를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공격이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ꡐ두려워하지 말라ꡑ하셨다. 우린 강타뿐 아니라 연타도 막아낼 수 있다. 주님께 믿음을 두고있는 한 우린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다.
2 연중 제12주일 마태 10,26-33 (가) 마음의 숫돌 한 토막
김현준 신부
‘행운의「한스」’라는 짤막한 이야기가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이라는 책의 서언에 들어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 신앙의 내용과 의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열어주고 답을 생각하게 해준다,
「한스」는 금덩어리를 품에 안고 가다가, 그것이 너무 짐스럽고 또 무겁기도 하고, 조금 은 두렵기도 하였다, 마침 고삐 하나로 큰 황소를 몰고 오는 노인을 만나, 그것 참 편하다고 여겨져서, 황소 한 마리와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도 쉽고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맞은 편에서 막대기 하나로 거위를 몰고 오는 농부를 보고, 그것도 참 괜찮다 싶어 거위와 바꾸었다, 끝으로는 손바닥 위에 달랑 들고 오는 숫돌 한 토막과 바꾸었고 그것마저도 흐르는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러고도 별로 잃은 것이 없다고 여겼다. 도리어 이번에 바꿔 얻은 것은 완전한 자유라는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이다.
자유를 얻은 한스의 선택
오늘 연중 제12주일의 복음말씀은 지난주일 복음의 계속이다, 지난주일, 길 잃은 양들에게, 그리고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곳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이, 오늘은 파견받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용기와 각오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 골자는 ‘두려워하지 마라’이다. 무엇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인가?
오늘 복음에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 세번이나 반복된다. 그 하나는 “그런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이다, 이 두려움은 살아가면서 늘 겪는 그런 두려움이 아니라,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받는 사람들이 겪는 두려움, 그리고 우리 크리스천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믿음을 고백해야 하는 순간에 겪는 그런 두려움이다. 사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면 어디에나 늘 박해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복음을 거절당하고 박해받는다고 해서 ‘복음의 운명’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귓속말로 들은 것까지도 전하라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이 후렴처럼 반복된다. 두 번째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곁에는 언제나 박해가 뒤따른다. 그렇다고 자신의 ’현세 생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박해자들의 힘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현세 생명 이상은 미치지 못한다.
영원한 생명은 어쩌지 못한다. 그러니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영육의 영원한 생명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이시다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세어 두셨으니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이다, ‘복음의 운명’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현세 생명’도 모두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참새도 들판의 풀잎도 보살피는 하느님께서, 소중한 사람이야 더 소중하게 여기지 않겠느냐, 그러니 하느님이 나의 머리카락까지도 소중히 여기심을 빌어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생명까지 버릴 각오로,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오늘의 믿는 현실이 박해의 현장에 있지는 않지만, 복음을 전해야 할 현장임은 틀림이 없다. 복음을 전해야 할 현장에 서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어쩌면 오늘의 우리 크리스천이 ‘행운의 「한스」’와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너무 무겁게 여겨지는 신앙의 실천과, 두렵게 생각되는 신앙의 요구를 단계적으로 풀어헤친 결과, 아무것도 소중한 것을 잃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한 단계를 더 내려가도 못 느낄 만큼씩 무언가 잃어온 것이 아닐까.
우리 모습은 어떠한가?
처음에 가졌던 황금대신 이제는 숫돌 한토막만 손에 들고 있게 되었고, 그것마저도 던져버리고 싶은 유혹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공심재 시간도 줄어들고, 무릎 끓는 장궤틀도 없어져가고, 아침 저력 기도도 하지 않는, 수계(守誡)생할은 겨우 주일미사만 수행(修行)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한스」의 모습이 아닐까. 먹고 싶은 것 다먹고, 갖고 싶은 것 다갖고,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어느 것 하나 버릴 각오도 없이 신앙생활 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는, 순교를 두려워하지 마라는 오늘복음의 요구는 너무 엄청난 것일까.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란 남이 못하는 것을 한번 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 결심한 바를 죽을 때까지 지속시켜 나가는 것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동굴을 뚫고 나가듯 어려움을 뚫고 믿음을 지켜 나
가는 것이다,
순교라는 순금같은 영광은 우리 가슴에 품지 못하더라도 숫돌 한토막만이라도 버리지 않고, 그 숫돌에 나를 갈고, 신앙을 갈고 닦으며, 새로 또 시작해봐야 하지 않을까.
3 연중 제12주일 마태 10,26-33 (가) 고통받는 예언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예레 20,10~13 (가난한 자의 생명을 악한 자 손에서 구하셨다)
제2독서 로마 5,12~15 (은총의 경우와 죄의 경우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복 음 마태 10,26~33 (너희 육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참으로 모순적인 사명을 가지고 불우한 생애를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원하지도 않은 예언자의 길을 걸으면서 고국이 망하고 동족이 포로생활을 통해 겪게 되는 쓰라린 미래를 예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했지만 욕만 실컷 얻어먹고 감옥에도 갇혔으며 끝내 사형선고를 받아 죽을 고생만 안타깝게 했습니다. 아마 순교의 월계관을 썼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짐작입니다.
사람들은 자주 그런 소리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세상에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특히 신앙인 자신이 겪고 있는 시련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체념도 합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해가 갑니다. 실은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으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불평도 했습니다(예레 20,14~18참조).
신앙의 갈등은 여러 곳에 있지만 특히 이유 없는 고통을 통해 드러나는 어떤 모순된 현실 앞에 큰 고민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의 은혜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벗어나자고 믿음을 찾는데 그 고통이 믿음 안에서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신앙의 벽에 부딪혀 냉담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래서 신앙의 본질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주체이시고 핵심이시며 그 목적이십니다. 또한 은총과 축복 자체이시며 그 모든 것의 샘이십니다. 주님에게서 나오지 못하는 축복과 은혜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삶 자체는 세속적으로 엄청난 비극이요 불행이었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는 표현도 쓰셨으며 “하실 수만 있다면 쓴잔을 거두어 달라.”는 간청도 하셨습니다(마태 26,36~46참조).
맞습니다. 고난은 인간을 약하게 만듭니다. 존재의 근본부터 뒤흔들어서 세상을 거꾸로 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하느님의 참 사랑이 숨겨져 있으며 우리 믿음의 존재 발판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바로 여기 서 중심을 잃어 하느님을 내던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순을 타파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특별히 고난이 많습니다. 일 잘하는 자녀에게 일이 많듯이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점지하신 사람은 십자가도 많으며 눈물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사셨고 성모님의 일생도 그러하셨으며 모든 성인 성녀들의 생애가 비슷했습니다. 좌우간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막말로 주무르실 때까지 주무르십니다. 그래서 열심한 자는 고난 속에서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지만 못난이들은 엎어져서 다 도망갑니다.
신앙을 떠나서도 선택받은 자의 길은 험난합니다. 외롭고 쓸쓸하며 황량한 벌판을 혼자서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독한 투쟁을 했는지 모릅니다. 목숨을 잃거나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도 많으며 억울하게 교도소에 갇혀서 생의 소중한 시기를 애처롭게 바쳤습니다. 그들이 단 한마디만이라도 권력과 타협에 응했더라면 더 편하고 부유한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받고 핍박받는 쓰라린 길을 사명감을 가지고 용기있게 걸어갔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쩌니 해도 우리는 사실 이 시대의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음을 경험했습니다.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의 밀알이 얼마나 오랫동안 썩고 몸부림치며 괴로워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신앙도 그렇고 민주주의도 그러하며 행복이나 평화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길에서고 고통을 감수하고 뚫고 지나가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만일에 시련을 외면하고 배척한다면 그는 이미 죽은 인생입니다. 육신이 팔팔하게 살아 있어도 그는 결코 살아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박해가 와서 끌려가고 법정에 넘겨져서 혹 죽게 된다 해도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안심하여라.’라는 말씀들은 성서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강력하게 호소하시는 당부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오늘을 통해서 내일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좀 수고하고 땀 흘려서 천국에서 열매를 맺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굴속을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영생에 대한 희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면 믿음으로 인해 오는 고난은 그 무엇이든지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소망이 담겨진 분들입니다. 박해와 시련을 절대로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거기에서 여러분을 영접할 것입니다.
4 연중 제12주일 마태 10,26-33 (가) 은총의 필연성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겁에 질린 자들을 격려하여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 하느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오래하리라.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이사야 35,4-6)
이사야 예언자의 위와 같은 구절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내려보내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자비를 인식할 수 있다. 이는 초자연적 생명의 기적이며 영원한 생명에로 흐르는 활기찬 물줄기 인 것이다.
은총이란 단어는 그 일상에 있어 무척 생소하고 진부하고 불필요하고 또한 기대 이외의 것으로 되어 있다. 은총은 현대인에게는 무용한 어떤 것이어서 그것을 필요조차도 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창조코자 한다. 은총을 간절히 빈다는 것은 현대인에게 너무나 겸손한 일이며 품격을 낮추는 것이다. 이 거룩한 선물인 은총을 받으려하지 않고 기술의 진부와 함께 과학 만능을 외치며 인생의 전부를 깨달을 수 있는 양 믿고 있다.
이 무슨 무례막대한 불손이란 말인가!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진부를 경악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놀라움과 함께 현대인이 내적으로 점점 가난해지고 거칠어지고 초라해지며 인간다운 가치와 함께 살지 않고 정신적, 도덕적, 종교적인 가치조차 상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신론적 자기 만족이 마지막엔 모든 고유한 인간성의 파탄과 영원한 멸망 속에서 끝장을 보게 된 것이다. 이 무슨 오산이란 말인가!
비록 은총이 신의 겸허한 자선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신과 인간과의 깊은 차이를 더욱 더 깨닫게 하고자 하느님이 천상으로부터 내려준 고귀한 선물이다. 은총은 우리를 억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신의 생활공동체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절망으로부터 그의 천상영역에로 구원코자 한 대오 그것이 무가치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실로 은총 없는 구원은 존재치 않는다. ! 그것은 어떠한 인간일지라도 변경할 수 없고 취소할 수 없는 영원으로부터 존립된 하느님의 영구한 의지인 것이다. 하느님과 천상에로 가는 데에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이 방법 이외의 다른 길은 없다.
많은 사람들은 진실한 인간이 되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속여서는 안된다. 바리사이인들도 자신들의 존경과 독선만을 자부했다. 그들은 은총 없이 기뻐지려고 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은 개종하여 신의 은총을 목말라했으므로 하느님 나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왕국을 성대한 잔치에 비유하여 하느님은 은총의 필연성을 가르치셨다. 임금은 하인을 거리로 내어 보내 만나는 사람들을 잔치로 불러들이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데려온 모든 이들에게 선과 악을 골고루 날라다 주었다. 잔치가 베풀어진 실내는 어느덧 손님으로 꽉 차게 되었다. 그때 임금께서 손님들을 만나시고자 방으로 들어오셨다. 거기서 임금은 잔치예복을 차려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하셨다.
그 사람은 지나친 경솔로 인하여 그에게도 분배해 준 잔치예복을 불필요하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 때 임금은 그에게 다가가 말씀하셨다. “잔치예복도 입자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 왔소?” 그러나 그는 침묵했다. 그러나 임금이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마태 22,1-14참조)
죄악의 더러운 작업복 차림으로는 아무도 천국의 잔치 식탁에 남아 있을 수 없다. 은총의 잔치 예복은 불가결한 것이다. 그것을 영원히 착용할 수 없는 자는 가차없이 거부된다. 은총 없는 구원은 존재치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두뇌로서는 변경할 수 없는 하느님의 구제방법이다.
인간은 누구나 천국으로부터 은총을 가져 내려올 수는 없다. 아무도 그것을 그의 영혼의 심부(深部)로부터 끄집어낼 수도 없고 훌륭한 기술로써 얻을 수도 없다. 은총은 우리 인간만으로는 실로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납득키 어려운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날라다 주었다. 그는 스스로 인간이 되어 우리 종족들의 무한한 죄악을 스스로 짋어지고 그 아버지를 무마하여 은총을 내려주게 한 것이다.
구유로부터 산더미 같은 우리의 죄악을 짊어진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헌난한 길을 가야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측량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심연으로 내려가 그의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흘리신 것이다. 그는 우리 인류를 마지막 남김없이 고갈되는 순간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호할 은총, 즉 그의 고귀한 피의 방울이, 사랑의 태양을 인간에게 비춰준 것이다.
로마서 6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은총과 죽음의 신비한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모든 영세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피의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과 같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불리 될 수 없이 결합되는 크나 큰 은총인 것이다. 신앙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결합된 자만이 이 은총을 용솟음치게 한다. 그리고 은총을 갖게 된 자는 영원한 삶을 위한 열매를 풍성히 열리게 한다.
그러나 은총을 받지 못한 자는 절망 속을 헤멘다. 비록 그의 행위가 인간의 눈에는 위대하고 가치 있고 중요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실상 그것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유다를 거절하거나 상실한다는 것은 아주 위태로운 삶인 것이다. 왜냐하면 “또 다른 천국은 존재치 않기 때문에”즉, 그리스도 없이는 은총이 내려질 수 없고 은총 없이는 구원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5 연중 제12주일 마태 10,26-33 (가) 조용히 마음의 혁명을
김동욱 신부
우리는 지금 다소곳이 주님의 제단 앞에 앉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않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속에서 수없이 속사이셨습니다. 때로는 채찍질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반항자인 양 아무런 응답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보십시오. 이 거룩한 제단 앞에 나왔을 때에는 그래도 우리의 마음을 열었었지만 우리 생활 가운데에서는 주님을 외면해 왔음을 느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에페소 1,3-5)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으며,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통해 우리를 거룩한 자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거저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생활의 변화를 가져왔어야 했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그런 무리들과는 다른 처지에 있는 성도였어야 했습니다. 성도 거룩한 백성 하느님의 자녀 하늘나라의 상속자 이것이 우리에게 어울리는 말이라고 자부합니까?
물과 성령으로 세계를 받고 우리의 육신적 생활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묻어버린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불리어 그분의 은총을 받고 축복을 받을 자들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제단 앞에서 자신들의 마음에 소금을 뿌리겠지만 그러나 사회에 돌아간 그 생활은 또 다시 육신 생활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버릴 것입니다.
옹졸과 이기심 시기와 모함 물욕과 쾌락 속에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맡겨버리고 심지어는 이러한 생활들이 원만히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주님의 도우심마저 구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진심으로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고 영원히 행복해지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십시오. 여러분들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어두움 속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오시어 데리러 다시 오실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일어나기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빛을 비춰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용기를 갖고 조용히 마음속에 혁명을 일으키십시오. 이제는 여러분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진리에 의해 진리에 맞춰 진리를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전부입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좋은 것이 나옵니다. 주님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고 주님을 얻는다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 사람 안에서도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돕고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고 구원으로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하느님의 축복이 여러분들을 성화시켜 조용히 혁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하기를 빕니다. 우리 모두 다 같이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일상생활에 거룩한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6 연중 제12주일 마태 10,26-33 (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최봉원 신부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동안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또 주님의 거룩한 제단에서 봉헌되는 주일 미사성제에 참례할 수 있게 해 주신 데 대하여 감사드리면서 오늘 복음을 같이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여러 가지 권능도 주셨지만, 또 그들이 당해야 할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가도록 격려해 주시고 용기까지 북돋아 주셨습니다. 사실 주님의 파견을 받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나서는 제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전대나 식량자루, 여벌옷이나 신, 그리고 지팡이 같은 것들을 갖고 다니지 않아서가 아니라 박해와 핍박 속에서 진리를 증언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위선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박하면서도 모든 것을 숨기지 말고 두려움 없이 밖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의 신앙을 굳게 고백하고 말씀을 지붕 위에서 크게 선포해야 했습니다. 또한 세력을 잡고 있는 관리들은 두려워해서도 안되었으며, 구석에서 믿음을 겨우 드러내는 정도에 그쳐서도 안되었습니다.
사실 반대자들과 우롱자들 앞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는데는 그만큼 위대한 용기를 필요로 했는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이들에겐 언제나 용기를 주시고 끝까지 돌보아 주셨습니다. 별 가치도 없는 참새까지도 잊으시는 법이 없고, 개개인의 머리카락까지 낱낱이 세어 두신 그분께서 당신을 따르고 섬기는 제자들을 더 할 수 없이 돌보아 주심은 물론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신뢰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 로마의 300년 박해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죽음으로서까지 신앙을 지켰기에 교회는 오늘까지 굳건히 존속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선조들이 100여년 간의 박해를 받아 왔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진리를 증언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흘린 피 위에 세워진 교회는 오늘날 더욱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순교”라는 말은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증인”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부활의 증인으로 그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점차 수난을 무릅쓰고 모범적으로 믿음을 증거한 사람들을 뜻하다가 마침내는 순교로 믿음을 입증한 사람들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피 흘린 순교자를 가장 탁월하게 여기는 것은 살해되었다는 사실에서만이 아니라 일생을 자신의 고귀한 이상, 신념 즉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용의로 살아왔고, 결국 극도의 시련인 죽음으로써 그것을 밝혀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신 하에서 주님의 열 두 제자들은 나중에 거의 모두 순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에 열중했으며 초대 교회 신자들, 그리고 우리의 선조들도 환난이나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굳건히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진실을 증언할 기회, 악을 거스려 자기 입장을 밝혀 증언할 기회, 억울한 입장을 증언해 줄 기회를 당할 때마다 용감히 증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럴 때일수록 발언하는 것 보다 침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하느님의 증인으로서 역할은 다 못하는 것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루는 어떤 부부가 사소한 문제로 심하게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남편은 침묵으로써 아내를 골려 댔습니다. 아내는 하도 답답하여 남편의 입을 떼어 보려고 애를 썼으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남편이 보는 앞에서 방 안에 있는 서랍들을 모조리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우왕좌왕했습니다.
그것을 본 남편은 자기도 모르게 무엇을 찾느냐고 묻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당신의 말을 찾노라”고 대답하여 그 때부터 남편의 입을 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남편이 아내에게 침묵을 지킨다고 해서 생활에 큰 지장이 있었겠습니까만 아내로서는 답답하기 이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주일에 교회에 나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생활해 갑니다. 그 외에 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의 증인으로서 복음 전파를 하지 않고 주위 사건에 무관심한다하여 생활에 직접적인 장애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의 말을 찾는 것처럼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우리들과의 말을 찾고 있다고 할 때 우리들의 무관심과 소홀함은 크리스천으로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까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크리스천으로 불리운 동시에 복음 선포자로서 파견되었습니다. 크리스천 모두는 주님의 생애와 부활의 증인입니다. 현재는 2000년 전의 초대 교회 때의 박해, 그리고 100여년 전까지 우리나라에 있었던 박해와 같은 어려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양상으로 많은 것들이 크리스챤 생활을 무기력하게 하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과감히 물리치고 주님의 생애와 부활의 증인으로서 이 세상에 빛이 되고 땅의 소금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연중 제 12 주일
제 1 독서 : 예레 20, 10-13
제 2 독서 : 로마 5, 12-15
복 음 : 마태 10, 26-33
제 1 독서 : 기원전 7세기 말, 유다 왕국이 멸망으로 치달을 때 예레미야 예언자는 비극적인 삶을 겪었다. 눈앞에 닥친 하느님의 심판을 감지하지 못하는 백성에게 예레미야는 재앙을 선포했다. 침묵하고 싶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내면에서 불처럼 타올라 도저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었다. 그래서 그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었고 사면초가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제1독서는 예레미야의 제 5 고백록에 해당한다. 주님의 꼬임에 넘어가 날마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다는 하소연과 복수를 청하는 간청이다.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상황에서 아마도 예레미야는 깊은 고독감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께만 의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런 저주에 찬 기도가 주 하느님께 대한 찬양으로 끝난다(13절)는 사실이다. 예레미야는 다시 자기의 예언직무에 대한 확신을 회복하였던 것 같다.
제 2 독서 : 교회는 로마서 5장 12절을 바탕으로 죽음과 죄의 연대성을 가르쳐왔다. 죽음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 죄의 결과이다. 사도 바오로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범죄가 모세의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보다 더 심각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에 죄의 세력이 꺾이게 되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던 것과는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덕분에 많은 사람이 은총을 거저 받았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을 넘어서는 삶, 은총의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
복 음 : 초대 교회는 복음 선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별히 유다교에 둘러싸여 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기네들이 그 동안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축출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한다. 하느님 나라의 진리는 이제 곧 드러나게 될 것이다. 박해자들은 참된 복음의 진리를 쳐부술 수 없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들을 늘 돌보고 계신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우고자 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연중 제12주일이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오는 25일이면 우리 민족의 비극적 전쟁인 6․25가 일어난 지 만 46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민족의 아픔을 딛고 남북한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며 이런 바탕 위에 하나의 조국으로 통일할 날을 기약하면서 하느님께 뜨거운 기도를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이 서로의 불신과 적개심을 버리고 참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에페 2, 14 참조)가 될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주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인 ‘예언자의 삶’ 즉 신뢰와 신념의 삶을 묵상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제자 예레미야는 기원전 7세기를 전후하여 바빌론의 유배생활 초기 곧 유대가 멸망할 시기에 활약하던 인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기에 예수에 앞선 구액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축복이 아닌 저주를, 승리가 아닌 패배를, 번영이 아닌 쇠퇴를 하느님의 뜻이라고 외친 그였기에 모든 이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였고 “저 자야말로 사면초가다. 고발하자. 고발하자. 걸어 넘어뜨리고 잡아 족치자. 앙갚음을 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홀로 남은 고독한 예언자, 뭇 사람들의 질책과 비난을 받던 자. 그러나 그는 야훼 하느님께 위로와 희망을 구하며 고통을 삼킬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두려움에 대한 공포와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세 가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 “감추인 것은 드러나기 마련”(마태 10, 26)이기 때문이므로 그분의 가르침을 세상에 대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마태 10, 27)라고 하십니다.
둘째, 참된 생명은 인간들의 능력을 벗어나 있고 또한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 28).
셋째, 천상 아버지의 섭리가 항상 깨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단돈 한 닢”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의 운명까지도 그분의 보살핌 아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지켜주시니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의와 진실에 따라 살고 오직 아버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대로 떳떳하게 산다면 하느님 외에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길을 충실히 걸어간 사람 중의 한 분을 예로 든다면 성 토마스 모어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이면서 가장 가난하셨던 분이 성 토마스 모어입니다. 그는 종교사에서 잘 나타나듯이 1480년 런던 태생으로 1529년 10월 영국에서 재상까지 지냈고 학문에서도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정도의 대학자이면서 법률가이기도 했습니다. 재산도 거대하여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아주 예쁜 딸 마르가리타와 현숙한 아내 앨리스가 있었습니다. 영국의 모든 이가 부러워할 정도로 다복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영국왕 헨리 8세가 본처와 이혼하고 다른 아내 안나 볼레인을 얻으려 할 때 끝까지 반증을 걸고 나섰기 때문에 1535년 7월 1일 사형 선고를 받고 7월 6일에 죽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번 번복할 기회를 주며 마음을 돌리려 하였으나 듣지 않자 아내와 딸을 감옥에 보내 변절시키려 했습니다. 그때 그는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다 무엇이란 말이오? 이것들은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것이고 또 그분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런데 그분을 반대하라고 할 때 이렇게 이런 것들을 보존하기 위해 내가 살아야 한단 말이오?”라고 했습니다. 이에 아내도 남편을 이해하기에 이르렀고 그는 단두대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때가 1535년 7월 6일, 그의 머리는 가장 번화한 거리인 런던 다리에 매달려 오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였지 인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예언자의 면모를 보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이러한 영웅적 순교는 당시의 존 피셔 대주교와 함께 성인품에 오름으로써 입증되게 됩니다.
그의 이러한 영웅적 순교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이은 예언자로서 참된 면모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제2독서인 로마서는 한 사람의 죄가 세상에 죽음을 불러들이고 파멸을 가져온 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총이 내리고 모든 이를 살리셨다는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한 복음선포의 힘은 곧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세상을 살리고 생명을 가져온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고난의 십자가를 통한 쓰라린 아픔을 거쳐서 부활과 영생의 기쁨이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불러주시는 예언자의 길에 들어서서 참으로 우리 자신의 참된 쇄신을 바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에 모든 힘으로 쏟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