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3주일

 

연중 제 13주일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제1독서: 2열왕 4,8-11. 14-16a

 제2독서: 로마 6,3-4. 8-11

 복음: 마태 10,37-42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 모든 인간은 다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회’요 ‘장소’이다 : 특히 하느님께서 당신이 맡기신 전교사명을 통해서나 또는 선물로 베풀어 주신 성성을 통해서 특별한 모양으로 현존한ㄴ 그런 사람들, 정확히 말하자면 ‘예언자’나 ‘옳은 사람’ 같은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엘리사와 수넴의 여인



 주님께서 당신 사도들에게 하신 위의 말씀의 아주 적절한 예를 우리는 예언자 엘리사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유명한 설화-그래서 학자들은 ‘엘리사의 설화’(2열왕 2-13장)라고도 한다-의 내용이 실린 오늘 제 1독서에서 볼 수 있다. 그 설화의 내용은 수넴이라는 지방에 살고 있는 한 열심하고도 재력이 있는 여인이 그 지방을 지나다니곤 했던 엘리사 예언자를 극진히 환대하고 또 남편에게도 그런 사실을 납득시키는 데 대한 것이다 :“여보, 틀림없이 우리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옥상에 작은 방을 꾸미고 침대와 상, 의자와 등을 갖추어서 그분이 우리집에 들르실 때마다 그 방에 모시도록 합시다”(2열왕 4,9-10).

 하느님께서는 수넴 여인의 이러한 열성을 그 예언자를 통해 갚아주신다 :“엘리사는 시종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 부인에게 해줄 일이 없을까?’ ‘이 부인은 아들이 없는데 다가 남편은 나이가 많아 보기에 참 딱합니다’하고 게하지가 대답하였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 여인을 다시 불러오라고 일렀다. 시종이 여인을 부러오자 여인은 문간에 섰다. 엘리사가 말하였다. ‘내년 이맘때 같은 철이 돌아오면 부인께서는 아이를 낳아서 안게 될 것이오’”(14-16절). 과연, 그의 예언은 정확히 이루어진다(17절).

 이 이야기는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 곁에서 갑자기 나타난 신비로운 세 사람을 정성껏 대접한 대가로 하느님으로부터 이사악을 얻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창세 18,10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와 매우 흡사한 교훈적 이야기이다.

 하느님은 온갖 선을 베풀어주는 분이시다. 특히 무엇보다도 그분은 생명을 주는 분이시다. 이 이야기에서는 생명이, 비록 가치로서는 생명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항상 생명에 개방되어 있는 어떤 행위 즉 ‘나그네 대접’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고 있다. ‘나그네 대접’이라는 행위는 특히 동방 여러나라와 또한 낯선 사람이나 외국사람에 대해 경계적이고 폐쇄적인 문화권에서는 생명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행위라 하겠다. 왜냐하면 글자 그대로 ‘생존여부’와 관련이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사실, 어떤 상황과 장소에 따라서는 나그네 대접을 못받게 되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사도 바울로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그네 대접에 대해 아주 강역히 권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히브 13,2).

 그런데 오늘 제 1독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나그네 대접’에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인간적 사실 외에도 ‘거룩한’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수넴의 여인은 그 점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틀림업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2열왕 4,9). 오직 예언자를‘예언자’로 대접할 때만이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 10,41). ‘신앙’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나그네 대접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가 되게 해줄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태오에 의한 오늘 복음은 사살 신앙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2주 동안이나 계속해서 해석해온 ‘전교사명에 관한 담화’의 결론 부분으로서, 루가복음이나 마르코복음에서는 서로 다른 곳에 배치된 두가지 사료에 의해 완전히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점반부는 지난 주일의 주제(마태 10,26-33)를 발전시키면서 어째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박해를 야기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복음선포의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최고 생명의 선물에 이르는 길을 근본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결단력을 요구하고 있는 지를 이해시켜주고 있다. 그리스도보다 또 그분의 복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10,37-39).

 루가 복음사가는 이와 같은 내용을 다른 문맥에서 일반적인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에 적용시키고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25-27).

 루가 복음의 내용이 보다 더 철저하고 극단적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미워하라”는 보다 더 강력한 표현을 쓰고 있는 외에도,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면 마음으로부터 끊어버려야 할 인간관계의 범위를 확대시키고 있다. 즉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들 뿐만 아니라 ‘아내와 형제 자매’(26절)까지도 끊어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잇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그분만큼 소중한 사람이나 사물이 있을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이 생명을 통하여 또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해야 할 유일한 ‘절대적 가치’이다!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은, 사람이나 사물이 아니라 오직 그분께만 절대적으로 매여 있어야 한다. 여기서 ‘미워하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의 단절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 그분보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더 사랑하지 말라’는 권고는 그분의 제자임을 입증해 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의 거부해위는 심리학적 측면이나 광신적 행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오직 영신적 그리스도 중심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O. Michel, alla voce miseo (odio) nel Grande Lessico del Nuovo Testamento, 7, col. 343).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적 삶이 지니고 있는 신성한 내용들을 무시해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가치가 절대 유일한 ‘가치’인 당신 자신에 비해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가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한,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의 죽음을 단순한 사정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38절).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우연한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느님께 그리고 진리에 충실하신 그분 존재의 본질적 차원이었다 : 그분은 베들레헴의 오두막집, 가난과 많은 사람들의 적개심 속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항상 십자가를 짊어지셨다. 그분은 항상 당신 목숨을 ‘내놓으셨지’ 마태오의 회화적인 표현처럼 결코 목숨을 ‘얻으려 하지’ 않으셨다. 이같은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성부의 뜻과 형제들의 선익을 위해 행동하고자 하셨을 뿐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내용이 루가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제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면, 마태오 복음사가가 강조하고 있듯이 복음선포자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가 지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복음에 담겨 있는 아주 당혹스러운 사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으며 결코 “당신이 좋으실 대로 하지 않으셨다”(로마 15,3)는 사실을 알려야 하며, 또한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분이 가신 길의 일부가 아니라 그길을 온전히 철저히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둘재로는, 만일 사도적 사명을 띤 사람이 자신의 일상적인 문제들, 즉 가정 문제들과 같이 깊은 관심을 요하는 문제들 그리고 자신의 전교사명으로 인하여 당연히 겪게 될 육체적 정신적 위험에 대한 모든 걱정에 짓눌려 지낸다면 항상 그는 극히 불충실한 복음선포자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계산이나 타협이나 염려 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등은 하느님의 말씀의 힘을 저하 시킬 것이다.

 만약 우리의 복음선포가 모든 사람들을 안이한 상태에 있게 재버려두고 또 그들 사이에 아무런 ‘싸움’도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설교로써 또는 우리 자신의 옳지 못한 행실로써 복음을 배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가 주석한 말씀 바로 직전에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자기 원수다”(마태 10,34-36).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이 담화의 원래 주제였던 전교사명(9,35-10,16 참조)에 대한 내용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훨씬 더 중요한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 예수께서는 그 당시 유다 전통 가운데 널리 인식되고 있었던 합법적 ‘대리권’의 원리에 따라서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당신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사람들이 똑같지 않은 것은 마치 그리스도와 성부가 똑같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전교사명의 주관자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할 지라도 전교사명 자체에는 일련의 ‘연속성’이 있다. 그것은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도들의 경우가 다 그러했듯이, 또 합당치는 못하지만 전교사명을 계속이어나가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을 고무시켜주기보다는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는 하느님의 말씀들이다.

 ‘대리권’의 원리 외에 그리스도께서 곧이어 말씀하고 계시는 또 다른 원리는 주님의 사도들을 ‘맞아들임으로써’ 복음선포 활동을 돕는 사람은 복음 그 자체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으로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중에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41-42절).

 여기서 ‘맞아들인다’는 것은 물질적 차원에서의 ‘맞아들이기’ 즉, 수넴의 여인이 엘리사 예언자에게 베푼 것처럼 복음선포 활동을 촉진시켜주는 ‘나그네 대접’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오늘날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경우처럼 최초의 복음선호자들이 겪었을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어려움들을 생각해 보라! 하지만 ‘맞아들인다’는 것은 이러한 물질적 의미 외에 더 나아가 ‘신앙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리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시는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 이러한 방법을 통해 예언자는 ‘예언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믿는 이들은 비록 사도로서 불리움을 받지 못한 처지라 할 지라도 사도들이 받는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방법을 통해 ‘사도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즉 세례받은 모든 이들이 주님의 공적 사도들은 사랑하고 맞아들여 복음선포 활동에 보다 폭넓게 참여함으로써 ‘선교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있는 ‘예언자’, ‘옳은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들’(41-42절)이라는 세 개념은 문맥상으로 볼 때 다 같이 복음 선포자들을 가리키는 동의어로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의 연계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그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요구되는 ‘성성’(‘올바름’)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또 ‘보잘 것없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이 그들을 위협하고 엄습하는 위험과 어려운 가운데서 느끼는 나약성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들을 하느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심으로 인도해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복음선포의 사명이다! 비록 그들은 쓰러지게 된다 할 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셔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름’이, 사도들에게 또 평범한 주님의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철저한 자기 포기의 의미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로도 그 당시 세례예식으로 거행되었던 물에 잠그는 의식에 대해 상당히 개연성있게 언급하면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 그리스고교적 신비에 들어가는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세례성사에 대한 보다 깊은 신학이 제시된 -에 의한 오늘의 제 2독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세례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에 실질적 으로 참여케 함으로써 그분의 ‘부활’에 참여케 해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까지나 십자가 위에 머물러 있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형제 여러분,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3-4.11).

 마지막 구절은 성사적 행위에 의해 표현되고 실현된 ‘죽음’과 ‘생명’의 상징적 의미를 윤리적 행위의 개념으로 바꾸어놓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일어났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 신자의 성세적 체험에서는 죽음과 생명 두 순간이 ‘통시적’(通時的)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두관점이 융화되어 ‘동시적’(同時的)으로 일어나고 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 하십시오”(11절). 그리스도 신자는 자신의 생활 순간순간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악과 죄와 자기폐쇄와 이기주의의 권세를 벗어나 그분과 함께 ‘새 생명’을 살아야 한다.그는 죽을 때 사는 것이다. 아니 바로 죽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죽음과 생명이 고뇌로 가득찬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면서 우리안에서 역설적으로 또 신비스럽게 활동하고 있다. 그 고뇌는 우리에게 매일매일의 십자가를 안겨준다. 그래서 복음은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 ; 마태 16,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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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13주일에 1개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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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13주일



            1. 최기산 신부(가)/ 2                 2. 김대영 신부(가)/ 4

            3. 최형락 신부(가)/ 6                 4. 김현준 신부(가)/ 8

            5. 강길웅 신부(가)/ 10                6. 자격문제(가)/12

            7.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가)/14

            

    1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마태 10,37-42 (가)

        설마가 통하는 사회 ꡒ설마 공화국ꡓ     

                                                                        최기산 신부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설마병이 너무 만연되어 있다. 방송매체들은 연일 비리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이 검찰에 잡혀가는 내용을 보도한다. 하지만 비리는 근절되지 않는다. 사회는 점점 병들어 가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직속상관이 잡혀갔는데도 버젓이 뇌물을 챙기다가 들통이 나서 쇠고랑을 찼다.


    주말이면 으레 음주측정을 한다. 요즘은 음주운전자가 늘어나서 밤낮 가릴 것 없이 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 또한 설마 공화국의 병폐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ꡒ설마 내가 걸리려고?ꡓ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좀처럼 음주운전자 수는 줄어들지 않는다. 세간에는 음주측정이 초법적이라느니 인권이 침해당한다느니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조금은 강제적이라도 음주운전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음주운전자가 날뛰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다. 더구나 귀여운 아이들을 덮쳐서 인명을 살상하기라도 하면 안될 일이다. 음주단속을 부정하는 사람은 음주운전자의 횡포를 경험하지 못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얼마 전에 체르노빌(CIH) 바이러스가 온다고 온 세계가 떠들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연일 매스컴에서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결과는 설마병이 만연되어 있음으로 끝났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제1의 피해국이었다는 것이다. ꡒ설마 내 컴퓨터야 괜찮겠지?ꡓ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병이었다. 설마가 국가와 국민의 재산을 많이 축내게 됐다는 것을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설마 내가 걸리겠느냐는 생각은 결국 무슨 일이건 적당히 하려는 적당주의를 낳는다. 적당주의는 대강대강 함으로써 대형참사를 부른다.


    설마가 통하지 않는 분


    예수님께는 설마가 통하지 않는다. ꡒ아무리 우리가 잘못한들 설마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기야 하겠는가?ꡓ 이렇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수님은 철두철미하시다. ꡒ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ꡓ(마태 5, 18―19)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보면 그분이 얼마나 명확한 분인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해야 한다. 설마가 통할 수 없다. 그래서 다음의 것들을 분명하게 지켜야 한다. 첫째, 부모나 자식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 중 최고로 주님을 앞세워야 한다. 두번째는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기자신의 가치보다도 더 주님을 가치롭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인간도 동물처럼 자신을 너무 사랑한다. 자신이 위급하면 자식도 내팽개치고 달아나는 것이 동물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나서 포탄이 여기저기서 터지면 업고 가던 아이도 내려놓고 간다지 않는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자식을 두고 집을 나가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자신의 편함,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세태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ꡒ그대들이 나를 따르고자 하는가? 자신을 버려라.ꡓ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다. 목숨 하나 끊어지면 모든 노력과 계획은 다 무슨 소용인가? 집안에 있는 금송아지는 다 무슨 소용인가? 자신은 중요하다. 그러나 주님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다. 우리의 선각자들이신 성인들은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렸다.


    주님은 우리더러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나 십자가는 다 있다. 나의 것이 제일 큰 것처럼 보이나 다 내게 맞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십자가도 주시나 칠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것을 말이다. 만일 우리에게 십자가가 없다면 오만 방자해져서 하느님을 우습게 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약인 셈이다.


    복음의 메시지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생을 얻을 자격도 얻었다. 그러나 이런 자격은 보편적인 자격이다. 이제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 주님의 사람으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결단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길 수 있는 결단, 즉 혈육의 가치나 물질의 가치보다 우선하는 가치로 주님을 내 가슴에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도 요구된다. 자기자신이란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가치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명예, 취미, 재물 등,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라면 다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낚시, 등산, 바둑, 골프에 미쳐서 주일이면 성당에 가는 것은 뒷전에 미루고 비 오는 날이나 한두 번 성당에 나가면서 주님을 위해 자신을 비웠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을 따르려면 목숨을 걸고 사생결단으로 나서야 한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ꡒ설마 종말이 올까?ꡓ라며 주님을 따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부지런히 이웃사랑도 실천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2    연중 제13주일  마태오 10,37-42 (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김대영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시는 핵심적인 말씀은 자기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린 후에 각자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십자가가 곧 구원의 상징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시대의 십자가는 고통과 허무, 절망과 실패의 상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던 많은 유다인들이 로마군에 붙잡혀 처참하게 처형당하던 것이 바로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십자가를 통해 자신들의 독립의지가 무참히 짓밟히고 자신들의 끈질긴 노력들이 수포와 좌절로 끝나버리는 것을 수 없이 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들 각자의 자기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시대가 변하였기 때문에 십자가의 처형방법이 달라진 오늘날의 교수형대나 전기의자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현대의 삶 속에서 난무하는 억압과 폭력, 그리고 모든 형태의 절망적인 미래를 감수해야한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 주변을 한 번 살펴봅시다. 우리들 중의 누구는 자신의 잘못이 하나도 없이 불구자로 태어났거나 아니면 질병과 사고들로 인해 북구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우리들 중의 대부분은 자신의 노력 하나도 없이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으며, 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그 다지 애를 쓰지 않고도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누구는 자신의 탓이 하나도 없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잘살아 보기 위해 죽어라고 애를 쓰지만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암담한 미래를 보고 살아갑니다. 그와 반면에 누구는 자신의 공로 하나도 없이 부족할 것이 없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의 의미를 알기 위해 중요한 것은 우리들은 그런 상황과 환경들에 쉽사리 낙심하여 버리거나 안일한 생활습관에 젖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여 하느님께 그 책임을 돌이며 원망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유복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자기 중심적인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침내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곳은 허무와 절망감이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라는 말씀을 통하여 경종을 울리시고 계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안일하거나 자기 중심적인 생활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가족이라는 표현의 혈연관계가 의미하는 자기 중심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예수님 중신이라는 삶의 태도에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삶의 태도는 곧 이웃에 대한 봉사의 삶입니다. 또 달리 말하면 이웃을 위하여 나의 아집과 그릇된 소유욕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벗어 버린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 뒤따릅니다. 자기 소유물을,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베푼다는 것도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위해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을 한다는 것은 더욱 힘이 듭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우리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고 가야할 자기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십자가는 각자의 무게도 다를 뿐 아니라 때로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벗어 팽개쳐 버리고 쉽게쉽게 사는 방법을 택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만나게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다 봅시다. 예수님이 삶에 늘 주목하고 또 그분의 삶을 따르기로 약속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무한한 격려와 용기를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심으로서 우리들에게도 그 가능성과 힘을 주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우리들 각자에게 맡겨진 자기 십자가..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탈피하여 이웃에 대한 봉사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때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평화와 사랑으로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나에게 있어서 자기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반성하며 이 한 주간 동아 내가 만나는 모든 이웃들에게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아멘.





    3          연중 제 13주일  마태오 10,37-42 (가) 십자가와 행복

                                                            최형락 신부


    고통은 바로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어쩌다 초대 교회사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순교자들의 사화를 읽을 때는 정신이 아찔해지고 가슴이 조여 옵니다. 십자가형이 그렇게도 가혹하고 비참했던가를 지금도 피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로마 제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십자가 형벌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형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야말로 최후 한 방울의 피까지 모두 흘리면서 며칠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시달리다가 마침내 신음 소리와 함께 죽어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인은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까지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며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십자가’란 곧 피와 땀과 고통을 대신하는 말마디로 알아듣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확실히 이제 십자가는 우리의 온갖 고통과 우리 인생 행로의 가시밭길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는 곧 고통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바로 고통이기에 고통을 원하지 않는 우리로서는 십자가는 달갑지 않으며,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싶고, 그 중에도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외면한 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고통의 십자가야말로 피하거나 등질 것은 못되며 오히려 자신이 짊어지고 당신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하십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역설적으로 강조하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즉 우리가 영원히 행복할 수 있도록 하시려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불란서의 유명한 문학가 뽈끄로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십자가의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면 행복도 원하지 말라’ 참으로 고통 즉 십자가만이 하느님의 참 사랑을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게 되며, 겸손되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매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며 영원한 행복에로 향한 희망 속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의 십자가는 결코 하느님의 저주가 아니라 당신에게로 부르고 계시는 신비의 손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를 고통 중에 버려 두시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시려는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 없이 많은 어려움과 고통과 시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질병과 고통, 빈곤, 불안과 절망의 상태, 그 중에도 명예와 권력과 쾌락의 유혹이 노도같이 덮쳐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쉽게 십자가를 내던지거나 외면한 체 고통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희망과 행복의 포기이며 예수님을 외면한 것이어서 결국에는 자멸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실망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고통을 주시되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고통을 주시되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갈 충분한 힘과 용기가 주어 졌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포기할까봐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의 좁은 가시밭길을 오르심으로써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감히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피와 땀으로 뒤범벅이 되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편태로 시퍼렇게 멍든 등에 십자가를 지시고 비틀거리며 골고타의 자갈길을 오르신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셨으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이렇게 까지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지극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십자가를 외면하고 원망하며 저주하면서까지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방덕한 사람이며 자기의 죄를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행복을 주시려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뿌리치는 행위이며, 자기가 지금 어떠한 죄를 저지르고 어떤 추악한 짓을 거듭하고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뉘우침도 없이 무관심 속에서 가련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종말에 행복하기보다는 틀림없이 멸망할 비운을 겪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도 십자가를 외면한 체 고통을 피하고 오히려 쾌락만을 찾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즉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꿇어 잘못을 용서 청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매일의 고통이 원망스럽고, 하나의 숙명적인 멍에로 생각되어 질질 끌려가는 상태라면, 스스로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고통에 굴복하고 자포자기 상태로 십자가를 등진 체, 멋대로 온갖 유혹에 끌려 죄악의 상태로 살고 있다면, 즉시 용기를 내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러러보고 자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매일 매일의 우리에게 닥쳐오는 어려움들을 예수님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극복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쾌한 나날의 유혹과 괴로움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용기와 희망을 갖고 끝까지 달려가는 곧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심한 것이며, 십자가는 억지로 지고 갈수록 더욱 무거워 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와 같이 만남의 고통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질 때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야 하며 때려 칠 때마다 매를 자원하여 기쁘게 맞아야 한다”고 외친 어느 성인의 말을 생각하면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합시다. 아멘.






    4       연중 제13주일  마태 10,37-42 (가) 하느님은 첫째, 나는 셋째

                                                             김현준 신부

    한 대학생이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도 충실히 하고, 성적이 뒤진 친구들도 도와주기에 친구들과 교수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그는 몇몇 친구들을 하숙집으로 초대하였다.

    가을 추수를 끝낸 그의 부모가 과일을 보내주었기에 나누어 먹기 위해서였다. 초대 받아온 친구들은 그의 책상 앞에 걸린 이상한 사진틀을 보았다. 그 사진틀에는 사진 대신 ‘나는 셋째’라는 글귀가 담겨있었다. 친구들은 그 글귀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의 어머니께서 대학 입학 기념으로 저 사진틀을 주시면서 말씀하셨다네, ‘얘야, 이 어미의 말을 깊이 새겨들어라. 언제나 첫째는 하느님이시다. 둘째는 네 이웃이다, 세 번째 차례가 바로 너다!’ 그 이후부터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이 글귀는 나를 이끌어주는 길잡이가 되었다네.”  ‘나는 셋째’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집 떠나는 그 대학생의 길잡이가 되었듯이, 복음전파를 위해 파견 받는 제자들에게 길잡이가 되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오늘 연중 제13주일,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분부하신 말씀 중에서 마지막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느님 ․이웃 다음에 나


    예수님의 길잡이 말씀은 ‘하느님 첫째’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 어디에나 있고, 또 언제나 찾아오는 십자가, 즉 고통과 슬픔, 패배와 절망, 사고와 질병 등의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 십자가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보통 세가지 자세를 취한다,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 “왜 이런 일이 하필이면 내게 일어나야 하나?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인가?”하고 분노한다. 분노는 할수록 고통과 슬픔을 무겁게 만든다. 분노는 이웃에 조소적인 태도를 갖게 하며, 더 심해지면 타인을 증오하는 비참한 상태에 떨어지게 된다. 위로의 말도 더 비참한 사람이 있다는 일깨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꾸어달라는 사람이 있다. 어느 날 밤 한 사람이 꿈을 꾸면서 간청했다. “주님 제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너무 무겁습니다. 제게 맞는 십자가로 바꾸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를, 묻힌 사람 수만큼의 십자가가 있는 공동묘지로 안내하고, “그래, 네게 맞는 십자가를 찾아보렴”했다. 십자가를 열심히 고르기 시작했지만 어떤 것은 너무 가볍고, 어떤 것은 더 무겁고‥‥ 동이 터올 즈음, 그는 맞는 십자가를 찾았다. “주님, 이것입니다. 제게 꼭 맞습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살겠습니다.” “그래라”하고 예수님께서 허락해주신 그 십자가가 간밤에 자기가 벗어놓은 바로 그 십자가임을 깨달았을 때는 해가 떠오른 새벽이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사고로 순국한 서상철 동자부장관의 장례식날 19세의 딸은 이런 기도를 했다. “저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9년 동안 그토록 좋은 아버지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 질병, 어려움의 십자가 상황에서 ‘그렇습니다’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딸을 교통사고로 잃어버리고 불쌍한 어린이를 돌보는 데 전 생애를 바치는 아버지, 민주화를 외치다 죽어간 아들을 대신하는 어머니, 그 모습들은 십자가를 지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십자가는 짊어지는 것


    불란서의 작가 「뽈 끌로텔」은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행복도 원하지 마라”고 말했다, 독일의 히틀러 시대에 자유와 정의를 위해 일하다 감옥에서 죽어간 신학자 「본회퍼」는 감옥 안에서 말했다. “하느님이 나에게 사로잡아 주신 나의 삶이라는 바로 이 자리를 떠나,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가 십자가의 실재를 떠나 어디로 도피해 가든지, 하느님은 우리가 도피처로 알고 찾아간 그곳에 추격해오셔서 ,다시금 우리의 삶을 사로잡는다.”

      

    그렇다. 하느님은 십자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그 십자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찾는 것도 아니고, 바라만 보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는 짊어지는 것이다.  나의 삶 안에 받아들여 주님처럼 등에 짊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삶 안에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 첫째, 나 셋째’의 구조가 잡혀있는 사람이 아닐까. 교회의 큰 행사에서 습관처럼 하늘을 쳐다보며 십자가를 찾는 사람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5          연중 제13주일  마태오 10,37-42 (가) 이웃과 하느님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Ⅱ열왕 4,8~11.14~16a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니 그 방에 모시도록 합시다)

    제2독서 로마 6,3~4.8~11 (우리는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복 음 마태 10,37~42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이웃으로 오셨고 우리 또한 그분의 이웃이 되어 드려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는 이웃을 따뜻하게 대접한 것이 하느님을 대접한 것이 되어 큰 축복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어느 날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대접한 것이 축복이 되어 백 살이라는 다 늙은 나이에 아들을 약속 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창세 18,1~15참조).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이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호의를 베푼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피곤하고 허기진 나그네로 보인 그들을 귀빈처럼 정중하게 모신 것이 그만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1독서도 비슷한 얘깁니다. ‘수넴’이라는 곳에 사는 한 부인이 떠돌이 예언자를 때마다 극진하게 모시자 평생 소망이던 아들을 약속 받게 됩니다. 여인이 아들을 낳고 싶어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소대로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 큰상을 약속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나그네에게 중요한 것은 이웃입니다. 이웃이 좋으면 가는 길이 재미있고 신이 납니다. 그러나 이웃이 나쁘면 굉장히 피곤하며 고통스럽습니다.


    어떤 동네에 아주 시끄러운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본래 말이 많은 사람이라 누구하고나 잘 싸웠습니다. 그러자니 동네에서 아주 큰 골치였습니다. 그 여자하고 안 싸운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를 다 싫어합니다. 그 자매가 모두를 싫어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 여자를 다 싫어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에 한 가정이 이사왔는데 그들이 온 다음부터는 아주 굉장히 달라졌습니다.


    새로 이사온 부인은 아주 착한 부인이었습니다. 모두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 여자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했으며 또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레지오 단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썽꾸러기 여자가 변하게 되었습니다. 싸움이 줄어들고 욕도 안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사 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레지오 단장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저 마귀가 새 사람이 되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때 단장이 말했습니다. 저 자매도 알고 보면 참 좋은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인생 안에 예수님이 들어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예수님으로 만듭니다. 반면에 그 안에 마귀가 들어 있는 사람은 모두를 마귀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은 자기가 베푼 대로 받습니다. 내가 이웃을 무시하면 이웃도 나를 무시하며, 내가 이웃을 존경하면 이웃도 나를 존경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이웃을 무시하면 하느님을 무시하게 되며, 내가 이웃을 존경하게 되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존경하신다는 것입니다. 어폐있는 말 같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누가 이웃이냐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피정지도 하면서 ‘누가 여러분의 가까운 이웃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대답들을 못했습니다. 어떤 형제가 ‘내 마누라가 제일 가까운 이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맞습니다. 내가 모시고 있는 시어머니가 가까운 이웃이요, 병든 내 자녀가 가까운 이웃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들이 가까운 이웃이요 특히 내 도움이 필요한 자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부모나 자식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당신에게 해 드린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입니까. 누가 과연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바로 내가 지금 무시하고 외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세상 어떤 사람보다 그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하느님을 대접해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또 교황주일입니다.


    오늘의 시대에 우리는 아주 위대한 교황을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마태 16,18참조). 이것이 천주교와 개신교의 근본적인 차입니다. 그리고 그 베드로의 후계자가 바로 교황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오늘의 교황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존경과 애정으로 그분께 순명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하루의 이웃은 바로 우리 교황입니다. 기도와 특별헌금으로 그분의 전도사업에 동참하도록 합시다.





    6             연중 제13주일   마태오 10,37-42 (가) 자격문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격문제’를 들고 나오십니다. 복음의 전반부를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자격은 첫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할 것. 둘째,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을 것. 셋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올 것.

      

    하지만 우리는 이 세가지 예수님의 요구를 너무 가혹한 말씀으로 받아드려 거절하기가 일수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가?”

      “더더구나 하나 뿐인 이 목숨을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바칠 수 있는가?”

      “그리고 십자가를 지어야한다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불론댕이라는 줄타기 명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줄 위에서 누구도 보여줄 수 없는 대담한 묘기로서 사람들을 감동 시켰습니다. 불론댕의 제일 뛰어난 묘기는 나이아가라 폭포위에 매놓은 줄 위를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묘기는 조금이라도 실수를 할 때, 틀림없이 죽고 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곡예였습니다. 블론댕은 그 곡예를 끝낸 뒤에, 열렬한 탄성을 올리고 있는 한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아이야, 너는 내가 어깨 위에 사람 하나를 얹어 놓고 갈 수 있으리라 믿느냐?” 그 소년은 폭포의 폭음보다도 더 크게 울리는 음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아저씨는 물론 해낼 수 있구말구요!” 그러자 블론댕이 그 소년에게 자기 어깨 위에 올라 설 것을 권했으나, 그 소년은 겁이 나서 뒤로 물러섰습니다. 소년에게 그 아저씨는 줄 타는데 있어서만은 능력과 권능의 하느님처럼 비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블론댕이라는 줄타기 명수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뒤로 물러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년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능력과 권능의 그리스도이심을 믿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분이 우리와 함께 나누어지기를 원하시는 ‘십자가’앞에서 두리번 거리며 서성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분의 십자가를 감상하거나, 입술이나 혀끝으로 사랑을 외치지 말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재산, 재능, 시간)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비로소 우리는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이 곧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나누어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나누어지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어제 미사때의 복음말씀, 마태오 복음 16장 15절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의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물음에 대한 합당한 응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나눔의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받아 모시는 성체가 ‘쪼개져야 하는 빵’, ‘나눔의 빵’이듯이 우리도 가진 것을 모두 나눌 수 있는 ‘나눔의 봉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제 저녁 미사 후 자축 파티 때 였습니다. 저는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어울리던 중, 어느 할머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님의 손에는 손주에게 나누어 줄 생각으로 떡을 싸시고 계셨습니다. 많은 교우분들이 나오셔서 온종일 음식준비, 성가준비, 책상준비, 청소 등 여러 가지 일을 함께 나누어서 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어제 온 종일 신바람이 났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족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촉구하는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가족, 내 식구만을 더 아끼고 사랑하기를 고집한다면,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하신 예수님, 그 분은 스스로 당신의 벗들인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 목숨을 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삶은 바로 ‘나눔의 극치’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산산조각을 내어 나누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몸을, 그 분의 거룩한 몸을 받아먹고만 있을 것인가?

     ‘나눔’이란 십자가 앞에서 머뭇거리고 서성대고만 있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될 자격을 얻기 위해 내 가족, 내 가정을 초월하여 더 나아가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내자신)을 온전히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십자가의 길’을 택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지난 한 주 동안 신문지상을 통해 거물급 종교지도자와 정치 지도자의 일련의 사건을 대하면서, 제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어놓아야 합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은 재산을! 재능이 있는 사람은 재능을! 시간이 있는 사람은 시간을!


    이 때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을 갖춘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자! 받지만 말고 주자! 아멘.







    7                    연중 제13주일   마태10,37-42 (가)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인간?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파스칼(1623-1662)은, 39세의 짧은 생애 를 살았지만 그가 인류에 남겨놓은 영적 유산은 매우 크다.


    프랑스 태생인 파스칼은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이지만 그리스도교의 사상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세상의 삶과 신앙의 모순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사색을 하던 중 1654년 11월 23일 밤 이상한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체험은 파스칼로 하여금 회심으로 이끌 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는 신비적 체험 후 매우 어렵게 지내면서도 가난한 이웃을 돌보아 주고 신앙에 대한 글을 계속 써 나갔다.


    그가 죽은 후 출판된「팡세」에는 신앙적인 사색을 표현한 소중한 단편이 수록되어있다. 여기에는 주옥같은 소중한 글들이 담겨있다.

      「인간의 마음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은 악과 비참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자신을 마다해야 한다」

    그의 누이동생이「파스칼의 생애」라는 잭에서 서술했듯이, 신비체험 후 파스칼은 엣날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하느님만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오늘 복음의 줄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자격과 신분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하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 때로는 자기 목숨까지도 바치겠다 는 전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얽매이고 있을 때는 도저히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여태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삶이기 때문이 다. 즉 여태까지 내가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올바른 제자 의 길을 갈 수 없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마지막 걸림돌은 다름 아닌 바로「나」자신이다. 예수님의 길과 마지막으 로 부딪히게 되는 것도 바로 나 자신이다. 재물이나, 영예도 버리기가 목숨처럼 아깝지만, 나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봉사활동을 열심히 한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만, 자기 만족이나 위선된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나 자신의 욕심이나 집착 등은 가장 극복하기 힘든 삶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극단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그 어떤 것이라도 희생하고 버릴 각오가 돼 있고, 또 실제로 실행하는 사람 만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주님을 위해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뜻을 우선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낭비적이거나 무의미하지 않고 희망적이 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이라는 것을 약속하신다. 자신을 내세우고 자기 이기심에 집착한다 면 절코 주님을 올바르게 따를 수 없다.


      생활 속에 주님을 따르는 길


    우리 신앙인은 모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 길을 성실하게 가야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 길은 수월하지 않고 어렵다.

  2. user#0 님의 말:

     

    1.1. 연중 제13주일(가해)


    <제1독서: 2열왕 4,8-11.14-16>

      제1독서는 복음의 말씀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에 따라 선택되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초기 예언자 엘리아의 제자로 특별한 기적과 행적으로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과 섭리를 알려 준 예언자였다. 백성들은 그의 기적을 보고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 그는 수넴이라는 지방을 가끔 지나다녔는데, 그곳의 한 여인은 그가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임을 알아채고 언제나 친절히 맞아들이며 접대하였다. 그녀의 엘리사에 대한 존경과 친절은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친절이었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보상하심을 밝힌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은 사람에게서 인간적인 뛰어남과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사람을 존경하고 잘 대하는 것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하느님 때문이어야 한다. 또한 하느님의 사람은 스스로 사람들에게서 인간적인 존경과 대접을 받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살피고 도움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할 때에 하느님께로부터 파견 받은 사람도, 하느님의 사람을 받아들이는 이들도 모두 올바르게 하느님을 섬기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제2독서: 로마 6,3-4.8-11>

      제2독서는 분명 세례의 의미와 이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세를 가르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 오늘 독서의 기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을 생명으로, 그리고 그분의 나라를 생명의 나라라고 한다. 유다인들은 육체적 죽음을 죄의 탓으로 돌리면서 불행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죄에 사로잡혀서 구원의 희망을 실현하는 데 자신의 능력만을 믿을 때 운명적으로 죽음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여기서 해방되고 구원되는 길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도하시게 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짓지 않고,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죽음을 맞이한 첫 사람이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때까지의 죄와 죽음 사이를 이었던 끈을 풀었고 완전하고 확실하게 죄에서의 해방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한다. 바오로에 의하면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일치시킨다. 즉 더 이상 자신에게서가 아니고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를 묶어 둔다. 다시 말해서 세례는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공동체를 이루면서 구원의 미래를 실현시켜 나가는 사이에 벌써 목적지에 이르게 되리라는 우리의 소원을 표현하는 의식이 되고 있다. 따라서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비슷하다.

    그리스도 신자 역시 분명히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죽는다. 그러나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비슷한 세례의 힘으로 그리스도처럼 죽음에 임할 수 있다. 즉 신자는 세례를 통해서 죄의 영적인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맞이한 죽음은 우리가 자신을 떠나고 포기함으로써 하느님을 가장 잘 만나 뵐 수 있다. 또한 세례는 신자를 죄에 죽게 함으로써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 세례 받은 신자는 이미 죽음의 원인을 극복하고 영적 죽음을 건넜으며, 하느님께서 역사하심에 힘입어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말한다.


    <복음: 마태 10,37-42>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파견 설화의 끝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가 되려면 부모와 자식을 비롯하여 자기 자신까지도 포기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된다고 하시면서 그러한 제자들에 대한 태도를 예수님 당신에 대한 태도로 간주하신다. 오늘 복음의 요점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포기와 그에 따른 보상에 대한 말씀으로 나눌 수 있다.

      본래 제자들의 자격이란 타고난 소질도 아니고 지식에서 생긴 것도 아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을 내릴 줄 아는 태도다. 제자들이 내려야 하는 결단은 바로 예수님 앞에서 내려야 하는 결단이며 예수님을 택하겠다는 결단이다. 즉 ‘추종의 결단’이다. 그분의 제자가 되겠다는 결단은 전적인 자기 포기를 요구하고 있다. 즉 모든 세속적인 관계들, 심지어는 아버지나 어머니, 자식의 관계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따라야 한다. 어느 한 가지라도 자기 몫으로 챙겨 놓고서 그분의 제자가 될 수는  없다. 어떤 것도 남겨 두지 않는 철저하고 끊임없는 자기 거부만이 제자들의 유일한 자격 요건이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양식으로 자유스럽게 자기의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새롭고 초자연적인 사랑인 것이다. 제자들은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위하여 완전히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아 포기와 결단을 극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길은 죽음이다. 하느님을 위한 선택 안에서 자기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철저히 결단한 것이다.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의 죽음을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가신 길의 일부가 아니라 그 길을 온전히 따라야 한다. 각자는 먼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야 하며, 이기적인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께, 이웃에게 바치는 하나하나의 행동에서 자기의 삶이 성숙해 가는 것을 은총 속에서 체험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은 어떠한 것보다 풍요로운 삶이며 하느님 안에 안식처를 둔 기쁨이고 내적인 평화며 곧 사랑이다.

    <가해 연중 제13주일 강  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다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회’요 ‘장소’인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전교사명을 통해 특별히 존재하는 사람들 즉 ‘예언자’나 ‘옳은 사람’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수넴의 여인은 그 지방을 지나다녔던 예언자 엘리사를 극진히 환대하고 남편에게도 그것을 설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여인의 열성을 엘리사를 통해 갚아주십니다. 즉 그 여인은 아들이 없었고 남편도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을 수가 없는 나이였는데도 아들을 갖게 되리라고 예언했고 이는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것은 생명의 가치를 지닌 행위입니다. 그것은 ‘생존여부’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그네 대접을 받지 못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의 행위이며,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나그네 대접’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나그네 대접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가 되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박해를 야기할 뿐 아니라, 복음 선포 사명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결단력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면 끊어버려야 할 인간관계의 범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그리스도만이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신앙 안에서 심리학적 측면이나 광신적 행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영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단순한 가정이 아닌 분명한 현실로서의 십자가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느님과 진리에 충실하신 그분 존재의 본질적 차원이었습니다. 즉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형제들을 위해 행동하셨던, 그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역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길을 철저히 따라야하기 때문이며, 생존을 위한 타협이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의 힘을 저하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전통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합법적인 ‘대리권’의 원리에 따라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당신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물론 파견 받은 자와 파견하신 분은 다릅니다. 선교사명에 있어서도 주관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명 자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이 ‘대리권’외에 다른 원리는 사도들을 ‘맞아들임으로써’ 복음 선포를 돕는 사람은 복음 선포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맞아들이다’는 말은 물질적 차원에서의 ‘맞아들이기’ 즉 수넴의 여인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했던 것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한 ‘나그네 대접’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물질적 의미 외에 ‘신앙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하느님의 도구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에 ‘예언자’는 예언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옳은 사람’은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도로 사명을 받지 못했지만 사도들이 받는 상을 받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사도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옳은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모두 복음 선포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구약성경의 ‘예언자들’과 연계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요구되는 ‘성성’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복음 선포 사명 입니다. 자신은 죽음을 당한다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셔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철저한 자기 포기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 점에 대해서 세례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에 참여케 함으로써 ‘부활’에 참여케 해 줍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로만 남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죽음’과 ‘생명’의 상징적 의미를 윤리적 행위의 개념으로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의 죽음과 생명 두 순간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는 죽음과 생명이 끝없는 투쟁을 벌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매일의 십자가를 안겨줍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카 9,23).


      우리는 모두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복음 선포자들에게 협조함으로써, 그들이 더욱 복음을 선포하는데 잘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같은 상을 받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선택함에 있어 수 없이 많은 장애가 우리를 가로 막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장애를 과감히 버려야 하는 용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선포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하나하나 없애면서 절대가치이신 그리스도를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될 때, 우리의 삶도, 이 사회도 아름답게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3. user#0 님의 말:

     

    연중 제13주일

    제 1 독서 : 2열왕 4, 8-11.14-16a

    제 2 독서 : 로마 6, 3-4.8-11

    복     음 : 마태 10, 37-42


    제 1 독서 : 열왕기 하권 2-13장의 엘리사 이야기는 엘리야 전승과는 독립적인 전승이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저자가 엘리야 이야기와 엘리사 이야기를 썼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제1독서는 엘리사 예언자를 극진히 대접한 수넴 여인에게 아이의 임신을 약속하는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수넴 여인이 먼저 엘리사 예언자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알아보는 혜안이 있었다는 것이다.


    제 2 독서 : 여기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된 새로운 삶의 형태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신자는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세례받은 사람은 이제 자기 중심적인 삶, 자기 안에만 갇혀있던 삶 – 바오로는 이것을 죄라고 규정한다. -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삶에 참여한다. 이 삶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복      음 : 유다교 출신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사람들은 회개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조상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유다교의 신앙을 배반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저자는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을 이미 예고하셨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즉 모든 것 위에 주님을 사랑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련을, 훗날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자 교황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누구든지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평생을 살아도 다하기 어려운 일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비록 성직자, 수도자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으로 부름받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일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 백성의 종들의 종인 교황으로서는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지도자일 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정신적 지도자인 까닭에 더욱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일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의 가장 으뜸가는 교황의 명칭이 성하(High Holiness)라고 불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 직책에 맞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려지겠지만 교황님 자신도 짓누르는 중압감과 책임감 때문에 늘 고뇌와 시련 중에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교황 성하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지혜와 영육간의 건강을 주시도록 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좋은 평판을 받는 교황 중의 한 분인 요한 23세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따스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땅딸막한 키에 뚱뚱한 비만증의 외모를 지닌 그는 평생 동안 그 이상으로 보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1958년 72세의 늦은 나이에 교황으로 선출된 후 그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로마의 감옥 레지나 코울리였습니다. 그는 죄수들에게 일일이 강복을 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찾아왔습니다. 교황이 되기 전에 이곳에 찾아온 일이 있었는데 그땐 제 사촌을 면회 왔었지요.”

    이 같은 교황 요한 23세는 어느 날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루한 차림의 여자가 교황의 차를 가로막았습니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가 여인을 붙잡으려 하자 교황이 차에서 내려 그들을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교황은 여인의 더러운 손을 꼭 붙잡으며 “내가 요르단 왕과 친한 것처럼 당신과 내가 그런 사이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주님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던 교황 요한 23세는 1963년 여름, 숨을 거둘 때 평생의 바람대로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었습니다. 가족들에게 남긴,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면 이만 원이 안되는 유산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0, 39)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 자선과 선행을 베푸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 42)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수넴 여인의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 엘리사 예언자를 친절하게 대접하고 맞이한 이 여인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내려 아기를 갖게 됩니다. 선행의 결과로 하느님의 축복이 내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과 착한 행동 하나하나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느님께서 다 기억하시고 알아주시기에 그것을 위한 삼아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기쁨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 죄악의 삶에서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누리는 부활의 삶이요, 그분 안에서 함께 하는 생명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칠 수 있는 것이요, 십자가를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생각하고 한 형제로 맞아들여 서로서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때, 거기에 참 사람의 길이 있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삶, 그리하여 서로가 깊은 사귐과 교류 안에서 한 형제임을 깨닫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받드는 섬김의 삶을 살 때 이 길이야말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요, 모두가 주님 안에서 참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되고 멋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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