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일

 

연중 제14주일



당신은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보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제1독서: 즈가 9,9-10

 제2독서: 로마 8,9.11-13

 복음: 마태 11,25-30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신”(마태 11,25) 성부께 감사드리는 ‘환희의 찬가’- 학자들이 청하고 있듯이 분위기를 부각시켜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와 그리고 인간들의 행위, 활동, 가치서열 등의 평가기준이 전도되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우리에게 그려 보여주고 계시다 : 하느님 앞에서는, 항상 자만심에 빠지게 하는 인간적 지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단순함’이 중요하다. 하느님의 메시지는 ‘멍에’가 되긴 히지만 억누르지 아니하고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기쁨과 ‘안식’(29절)을 준다 ; “모든 것”(27절)을 성부께로부터 받으신 예수께서는 실상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29절) 스승으로서 당신을 내보이신다. 이러한 예수의 ‘겸손’을 예언자 즈가리야는 장차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메시아 왕의 모습에서 이미 내다보았다. 그분은 휘황찬란한 마차를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초라한 “새끼나귀”(즈가 9,9)를 타고 오실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려 보여주시는 그 ‘새로운’ 세계는,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복음적 메시지- 현세계의 모든 범주를 전도시키는 데 더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는 -를 따르고 실현시켜 나감으로써 건설해야 할 세계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힘겹게 위로의 실체가 되고자 하신 사실을 헛된 꿈이나 ‘유토피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를 우리의 신앙과 역사 앞에서 지고 있다.



 “수도 시온아, 기뻐하여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나귀를 타고 오신다”



 즈가리야 예언자에 의한 이 환호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의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목격한(마태 21,5) 그 유명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즈가 9,9).

 성도 예루살렘을 향한 이 ‘기쁨’에의 초대는 그 동기가 다만 예루살렘이 비참하고 황폐한 유배생활 이후 새로이 한 임금을 모시게 되리라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임금이 사람들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게 되리라는 사실에도 있다 : 그분은 권세있는 승리자시지만 사람들 가운데 ‘겸손한’ 모습으로 임해 그들의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함께 나누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임금들의 화려한 병거를(예레 17,25 ; 22,4 등 참조) 마다하시고 옛 파관들이 탔던 초라한 나귀를 (창세 49,11 ; 판관 5,10 ; 10,4 ; 12,14 참조) 택하실 것이다.

 예언자 스바니야는 마지막 날이 오면 그동안 오직 주님만을 믿고 살아온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했다(스바 3,12-13). 그런데 오늘 즈가리야 예언서에서는 장차 그 백성의 임금이 되실 분도 ‘가난한’ 야훼의 사람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또한 그분은 오직 야훼만을 신뢰하는 ‘가난한’ 왕권의 새로운 표징들도 보여주실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전쟁 무기를 없애버리시고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을 위한 평화의 메시지를 제시해주실 것이다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바다에서 저 바다까지,큰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시리라”(즈가 9,10).

 에브라임(북왕조에 속해 있었던)과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은 메시아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간에 평화를 이루어주어 다시 결합시키시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서고 있는 데 대한 표현은(“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즉 지중해에서 사해까지 그리고 에프라타에서 남쪽끝까지) 메시아 활동의 보편성을 말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즉 예루살렘이 소박함과 가난의 표지를 통해 환호하며 영접하게 될 그 ‘겸손하고’ ‘의로운’ 임금에 의해 실현되는 평화의 메시지는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될 것이다.

 이사야도 메시아의 때가 오면 온 세상이 평화로이 안정되리라고 예언한다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뒹굴며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뗀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없이 손을 넣으리라”(이사 11,6.8). 하지만 오직 즈가리야 예언자만이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의 태도-야훼를 믿는 가난한 사람의 전형적인 태도-에서 실제로 ‘평화’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무기나 외교적 수완에 의한 힘이나 권력이 아니라 정신의 ‘무장해제’요 또한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오직 한 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다.

 이런 것들은 솔직히 말해 수많은 어린아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들이지만 그 안에는 역사를 진정으로 다시 평정시킬 수 있는 보다 깊은 직관력이 내포되어 있다 : ‘평화’는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상화간의 신뢰와 무한한 사랑의 능력에 의해서 보호되어야 한다 ;참으로 사랑만이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듯이 비유로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수 있게”(이사 2,4)할 것이다.

 오로지 이러한 방법을 토해서만이 폭력과 공포의 문화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써 바오로 6세가 자주 말했던 ‘사랑의 문화’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폭력과 공포에 의해 문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같다. 단지 한 가지 사실 즉, 1976년 세계 전체의 군사 예산이 보건 예산의 두 배가 더 넘는 3천 억 달라를 넘어섰다는 점만을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은 지금까지 분석한 예언서의 내용과 사고의 공통적 근거에서도 그렇고 또 특히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마음이 온유하고(희랍어로 prays) 겸손한 이”(29절)로서 제시하시는 대목에서 그 내용을 분명히 회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깊은 관련이 있다. 사실, 이 대목과 21장 5절-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즈가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에서만 ‘온유한 이’(prays)라는 총칭명사가 예수께 적용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메시아적 사명 의식을 충만히 가지고 그 예언서의 내용을 몸소 당신 자신에게 적용시키셨다는 명백한 표지이다.

 이제 아주 압축된 내용을 담고 있는 오늘 복음을 짤막하게 분석 해 보자. 오늘 복음은 원래 서로 다른 문맥에 흩어져 있던 세 개의 단편적 이야기들을 마태오 복음사가가 특별히 교훈적 가르침을 목적으로 한데 모아놓은 것이다 : 맨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비를 단순한 사람들에게 열어 보여주심에 대해 감사드리는 유명한 ‘환희의 외침’이 나오고(11,25-26) ; 그 다음에는 예수와 성부와의 유일한 관계에 대한 강한 신학적 단언이 등장하고(27절) ; 마지막 부분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지나친 ‘멍에’를 씌우지 않는 그분의 가르침에 따르라는 권고와 더불어 최대의 지혜를 가르치고 있다(28-30절).

 이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한 사람들의 몰이해와 그분을 거슬러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적개심 심지어 세례자 요한까지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마태오 11장과 12장에 걸쳐 있는 주제 전체의 배경에 비추어 본다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1,2-6).

 예수께서 오랫동안 당신 사도직을 행하셨던 갈릴래아의 도시들은 그분을 배척하였다 :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21). 예수께서는 당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을 서로 맞지 않는 즉흥 연주를 하는 개구쟁이 ‘어린아이들’에 비기신다 :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감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이처럼 온통 마음과 정신이 아둔한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 자신의 신비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신 그리스도께서 기쁨을 터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그 기쁨은 더 이상 자신의 생각과 사랑의 능력으로써만이 아니라 마침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는 인식을 통해서 느끼게 되는 ‘기쁨’이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25-26절).

 이 감동적인 감사의 기도에서 더욱 깊은 인상을 주는 사실은 그리스도와 성부와의 친밀한 관계이다 ; 불과 두 구절 밖에 안도지만 ‘아버지’라는 말이 두 번씩이나 나오고 있다. ‘아버지’라는 말의 개념은 예수께서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부르시는 ‘압바’(Abba)라는 아라메아어(마르 14,36 참조)의 개념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 ‘압바’라는 말은 ‘내 아버지, 내사랑하는 아버지’라는 뜻을 지닌 말로서 어린아이들이 자기들의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애정 깊은 신뢰심을 내포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결코 이러한 표현을 자기들의 기도에서 사용하지 않았다(J. Jeremias, Teologia det Nuovo Testamento, Paideia, Brescoa 1974, vol. I, p79 참조).

 그런데 정작 감사의 동기는 예수께서 마침내 당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았다는 사실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선물’로서 주어졌다는 사실에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마음의 문을 닫고 있을 때 그분의 신비를 이해하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이 성부이시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26절).

 그러므로 성부께서는 그리스도께 친구들과 형제들을 주고 계시다 ; 하지만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순한 사람들’- 정확히 말해 마태오가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라고 부르고 있는-을 선물로 주신다. 이러한 명칭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에 있어서는 그의 독자들과 또한 모든 시대의 믿는 이들 즉,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온전히 항상 인간의 지력과 지혜를 ‘능가하는’ 그분의 메시지(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ㄴ인간의 지력과 지혜를 ‘거슬러’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들의 체계와 오만한 자신감을 뒤엎어놓고자 할 뿐이다)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들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척도를 신학적 재건의 차원에서든 생활적 체험의 차원에서든 소위 ‘합리성’의 규범안에 집어 넣게 된다면 그 가르침을 저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습니다”


 이어서 나오고 있는 신학적 단언의 내용은 매우 강하며 성부와 성자 사이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관계의 신비를 어렴풋이 열어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감춰지고 보잘것없는 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여진 ‘것들이’, 많은 학자들이 시사하고 있듯이 “하늘 나라의 신비”(마태 13,11 참조)라기보다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상호 관계의 진리 즉, 그리스도의 참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27절).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공관 복음이라는 땅에 요한 복음이라는 운석이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과 같다”(K. Hase)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구절은 공관 복음사가들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요한 복음사가의 신학에서 비롯된것이라 하겠다. 실제로 이 구절은 루가 복음사가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듯이(루가 10,22) 현재의 문맥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안다는 것’ 은 ‘사랑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는 전형적인 성서적 의미에서의 ‘앎’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상화 완전한 이해와 또한 인식적 사랑에 의한 상호 완전한 봉헌이 존재한다. 그러나 결코 그들의 관계가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 ‘성자가 성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은 누구에나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있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폐쇄되어 있지 않고, 시공의 제약을 의식하지 않는 탐구적 생활에 투신할 은총과 의지를 받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이미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결합될 수 있으며 또한 그분의 생명 자체를 살 수 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지극한 인간애로 가득 찬 마지막 세 구절은 ‘지혜서’의 특징을 띠고 있으며 스승이신 예수를 따르라는 권고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자기 제자들에게 했던 것처럼(마태 23,4 참조)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아니하며 가장 나약한 사람들도 받아들여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28-30절).

 ‘율법의 멍에’라는 말은 랍비들이 자주 쓰는 비유적 표현이며 부분적으로는 구약성서에서도 이미 그 랍비들의 제자들에게 ‘지혜’를 갖추어야 할 의무를 지우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다음 집회서의 대목을 읽어보라 :“배우지 못한 사람들아, 나에게로 와서 내 학교에 들어오라. 네 목에 지혜의 멍에를 씌워라. 그리고 네 마음에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라. 지혜는 바로 네 곁에 있다”(51,23.26).

 예수께서는 이러한 상징적 개념으로써 당신의 가르침이 매우 힘든것임을 말씀하고자 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어려운 것을 쉽게 보이게 함으로써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적으로 그분이 제시하시는 가르침을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생활화해야 한다. 그분은 만약 제자들 중 어느 누가 그 가르침을 배울 때 게을리하거나 실패하거나 또는 뒤로 되돌아가려 한다면, 제자들 위에 군림하고 않고 제자들을 자신의 위치까지 이끌어 올려주려고 애쓰는 위대한 스승답게 인내와 온유함으로써 그의 생기를 되찾아 주신다(“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적 메시지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 우리와 더불어 살기를 약속하시는 구원의 선물이 되기 위해서 모든 허례허식과 모든 율법주의적 유혹을 물리치고, 우리가 우리의 영적 성숙의 길을 따라가기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항상 새로운 힘을 우리에게 준다.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스승’이 되시며 도시에 ‘율법’이 되신다. 그분은 시나이산의 타오르는 불길 가운데서 자신의 법을 명하는 새로운 모세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람을 보호해주기 위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지혜’이시다. 그리하여 그분은 그분의 신비에 대한 계시를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살아 있는 ‘규범’이 되신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바울로 사도의 놀라운 편지 내용이 실린 오늘 제2독서는 이러한 내용을 보다 깊이 있게 다루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신자는 육체의 유혹에 따르지 말고 ‘그리스도의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여러분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9). 오직 “성령의 법”(8,2)에만 생명과 자유가 있다. ‘육체의 행실’은 반대로 죽음과 종살이만을 가져다줄 뿐이다(8,12-13).

 다시 한번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오직 그리스도의 ‘멍에’만이 자신을 위해서나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항상 꿈만 꾸면서 결코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는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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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일에 1개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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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14주일


            1. 최형락 신부(가)/ 2                 2. 성민호 신부(가)/ 4

            3. 방상복 신부(가)/ 6                 4. 강길웅 신부(가)/ 9


     

    1            연중 제14주일   마태 11,25-30 (가) 주님의 초대

                                                      최형락 신부


    초대는 해서 즐겁고 받아서 기쁜 것입니다. 하려한 잔치에 초대되던지 어떤 모임에 초대되던 간에 초대는 대단히 즐겁습니다. 특히 파티 같은 경우는 젊은이들에게 더욱 매력있는 초대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당신 짐에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이 초대 역시 한없이 기쁘고 즐거운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초대는 사람들의 초대와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른 독특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파티나 무도회에서는 전혀 맛볼 수 없는 진정한 즐거움과 신령한 기쁨이 있는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초대는 쾌락적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술타령의 파티나 노래나 춤 일색의 무도회와는 달리 끝없이 행복할 수 있는 하늘나라에로의 초대입니다. 괴로운 자와 같이 괴로워하고 슬픈 자와 같이 울어 주며 기쁨과 희망으로 포근히 감싸주시려는 초대입니다. 고통에 신음하며 인생고에 시달리는 모든 이의 긴 한숨소리를 기쁨과 환희의 소리로 바꾸어 주시려는 초대입니다.


    또한 주님의 초대는 그 방법에 있어서도 사람들의 초대와 다릅니다. 대부분 세상 사람은 자기보다 부자나 권력이 있는 사람을 초대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득을 얻어보자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조금 대접하고 몇 갑절 얻어 보자는 이기심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와 같이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대접하려는 경우와는 달리, 하나의 얄팍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은 부자보다 오히려 가난에 허덕이며 고생하는 사람들, 권력자보다는 약자와 무거운 짐에 억눌려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는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에게 이익을 주시려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은 보통으로 친척이나 친지, 가까운 자, 잘 아는 자를 초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초대하시며, 그 중에도 먼 사람을 특별히 따뜻하게 대접하고 편히 쉴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십니다. 당신의 도우심을 애타게 기다리며, 당신을 지극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초대되길 더욱 바라고 계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초대가 그 성격과 방법에 있어서 사람들의 초대와 다른 것은 예수님은 사랑이시며, 겸손과 온유함을 가진 마음은 조건 없이 주기를 원하며, 진정으로 대접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초대에 임할 때처럼 예수님의 초대에 응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세상 사람의 초대에는 물질적 선물과 화려한 예복이 중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대에는 마음의 준비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하고 온유한 주님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될 때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평화와 휴식을 상급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온유하다는 것은 온화하고 부드러움을 의미합니다. 또 온화하다는 말은 온순하고 인자함을 뜻합니다. 청소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돈 보스꼬 성인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을 지도하는 표어는 바로 유화였습니다. 아무리 난폭하고, 사나운 맹수같이 날뛰던 젊은이라도 성인의 온순하고 부드러운 미소 앞에서는 얼음이 녹듯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온유한 주님의 마음을 닮을 때 주님께 초대되어 포근히 그의 품에 안길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겸손은 모든 미덕의 어머니이며 반대로 교만은 모든 악덕의 뿌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확실히 교만하면 낮아지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영원 불변의 진리입니다.

    인류의 첫 조상의 교만은 악마로 변화되어 영원히 불 속에서 벌을 받게 됐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만할 때 틀림없이 악마를 닮아 주님의 짐에 초대되기는 고사하고 끝내는 지옥불의 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닮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만 주님의 초대에 응할 수 있으며 영원한 휴식과 진정한 평화를 상급으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선물로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3-5)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이렇게 엄청나지만, 세상에서의 상급인 평화와 휴식도 덤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살 때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신적으로 당하는 불안과 초조, 허무함과 절망 속에서도 기쁨이 있고 희망이 있으며 휴식과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 우리의 목숨이 다할 때 우리 위해 마련해 두신 진정한 평화와 휴식을 우리는 상급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아멘.

    2           연중 제14주일   마태 11,25-30 (가) 영혼의 안식

                                                           성민호 신부



    우리가 한 세상을 살다보면 즐겁고 흐뭇한 때도 있지만 슬프고 고달픈 일도 많습니다.

    가정을 꾸려가기 위한 고생, 직장이나 사회에서 당하는 어려움,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생존경쟁, 정치적 혼란으로 야기되는 불안, 경제적 불균형으로 말미암은 빈곤, 사회적 모순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 각종 불의와 부정, 그리고 폭력 때문에 억울하게 받아야하는 고통 등, 우리를 슬프게 하고 짓누르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길인가 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에서 해방되어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신앙을 찾지만 막상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또 다른 어려움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처럼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중압감, 사회적인 불안으로 허덕이는 우리에게 주님은 오늘의 복음을 통하여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율법의 멍에를 지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지만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길이 쉽고 평탄한 줄로만 생각한 그들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무척 불안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강조하시면서 다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당신에게 배워야만 영혼의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영혼의 안식을 얻어 편히 쉬기 위해서는 주님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비록 험난하더라도 주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면 모든 것이 편하고 가볍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정신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당하게 위세를 떨치며 오실 수도 있었고 개선장군처럼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구약에 예언된 대로 겸허하게 오신 것은 겸손한 사람들에게 신앙의 심오한 진리와 참된 안식의 비결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원했듯이, 무력투쟁으로 로마 제국과 대항하지도 않으셨고 폭력을 사용하여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폭력과 전쟁이 아닌 온유와 겸손으로 주님의 나라를 세우셨고, 미움과 살상이 아닌 사랑과 봉사로서 주님의 나라를 지키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정신을 간파한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습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에페 4,2)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람들이고 성도들이며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골로 3,12-13) 따라서 우리도 주님의 제자가 되어 마음의 안식을 얻으려면 어떤 일에도 불안해하거나 화를 내지 말고 오히려 모든 일에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의 기도내용처럼 안다고 거만하거나 똑똑하다고 뽐내지 말고 언제나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내사에 온유하시고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그렇다고 결코 부정과 불의를 못 본 척하신 겁쟁이도 아니셨고, 무조건 남의 비위나 맞추면서 권력에 아부하신 줏대 없는 분도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당시의 권력자들을 호되게 비난하셨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엄중히 경고하셨으며, 입으로만 하느님을 찾던 지도층들을 강경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성전을 더럽힌 장사꾼들의 의자를 여지없이 둘러엎으셨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워주던 사람들을 독사의 족속들이라고 야단치셨으며, 언제나 잘난 척하고 윗자리만 탐내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참으로 강한 사람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며 모든 이를 존경할 줄 압니다.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기 때문에 남을 쉽게 용서해 줄 뿐 아니라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권력과 부와 학식 면에서 남보다 앞선다 하더라도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내세워 가난하고 못 배우고 소외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친절히 봉사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온유한 태도나 겸손한 정신을 본받는 사람들은 지나친 욕망이나 과격한 복수심이나 심한 분노에 지배되어 행동하는 일이 없으며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참아줍니다. 이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게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언제나 마음의 안식을 얻어 누릴 뿐 아니라 결국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두르고 분풀이를 한다면 그때부터 마음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납니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자아내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유발하며, 분노는 겹칠수록 더욱 격심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고아원을 경영하던 어떤 신부가 고아들의 생활비를 모금하려고 여러 가정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기부금을 청하는 신부에게 귀찮다고 침을 뱉었습니다. 그때 그 신부는 침착하고 온유하게 손수건으로 침을 닦고 나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침은 나에게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고아들을 위해서도 무언가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는 이 신부의 겸허한 자세에 감동되어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많은 기부금을 바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불안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언제 핵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동서 양대 진영의 긴박한 대결상황도 불안하고, 언제 우리가 당할지 모르는 강도나 교통사고도 불안하며, 심지어 부정식품이나 가짜상품도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정치가 부패하고 사회가 혼란하며 인심이 각박할수록 불안은 더욱 커집니다. 우리 주변에 산재되어 있는 불안한 요소들의 원인을 분석해 본다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도외시하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이처럼 불안한 때일수록 우리는 “나에게 와서 편히 쉬어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 안에서 불안의 요소를 제거하고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물론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때로는 손해를 보고 바보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산상수훈처럼 온유와 겸손이야말로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얻어줄 뿐 아니라 지상에서부터 천국의 기쁨인 영혼의 안식을 얻게 해줍니다.


    따라서 세상살이에 허덕이는 철부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면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움으로써 영혼의 안식을 얻도록 노력합시다.






    3        연중 제14주일  마태 11,25-30 (가) 고난을 극복하는 길

                                                         방상복 신부


    예수께서는 배고픈 사람에게 “내가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셨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죄의식을 벗지 못해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으며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까지 “내가 부활이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오늘 복음에서는 어려운 일을 하고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피곤한 사람들에게 “다 내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편히 쉬게 하겠소.”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 중에 감히 누가 “내게로 오시오. 내가 쉬게 하겠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있다면 그는 미친 사람일 것이고 미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어서는 안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에 찌든 우리 인간들을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인생은 고해라고 했습니다. “응애”하며 어머니 태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 어린 아기는 인생의 괴롭고 험한 고난의 바다에서 일생을 헤엄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숙명인가 합니다.


    고난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은 가난한 자에게도 돈 많은 부자에게도,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에게도 권력이 없는 자에게도 있으며, 아무리 배움이 많고 훌륭하다 해도 고난은 어쩔 수 없으며 가장 거룩한 사람에게도 고난은 반드시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가장 적은 행복한 사람이 있다해도 최대의 고난인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고난은 만인에게 공통된 것이며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제외될 수도 없습니다.


    현재 이 시간에도 병원은 여러 가지의 병고로 앓고 있는 환자로 만원이며, 자식을 위해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밤도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이 사리돈이니 신경안정제니 하는 수면제 알을 삼켜야 괴로움을 잊고 잠을 잘 수 있으며, 낮에는 진정제로 자신을 안정시키고, 아침에는 원기소의 알을 먹어야만 활력을 되찾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보다 문화시설을 많이 갖춰 보다 편해졌고 살기가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고민, 괴로움은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현재를 “불안한 시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문명이 눈부시게 진보된 오늘날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은 여전히 옛날과 다름없는 눈물의 골짜기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질식케 하고 목을 조르는 듯한 이러한 고난과 불안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싫어하며, “제발 나한테만은 고난이 닥치지 않았으며…”하고 애타게 희망합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하느님이 착하시다면 왜 내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실까”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애초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이런 고난과 슬픔이 많은 세상은 아니었지만 인류의 시조가 하느님께 범죄함으로 그 벌로써 고난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문제는 왜 어떻게 해서 고난이 이 세상에 들어왔느냐 하는 데에 있지 않고 어차피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이는 그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이 용기에 찬 마음을 갖도록 해야지 고난을 거부하며 고난을 피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고난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기도만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없애주실 것으로 생각하여 그 고난이 없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은 없는 것이라든가, 있다해도 도와주지 않는 무능한 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때로는 하느님께서 죽은 자도 부활시켜 주시고 나병환자도 낫게 하시는 등 고난을 없애주실 때가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경우입니다.


    확실히 하느님은 존재하시며 고난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고난을 없애주시기 보다는 우리가 당신의 은총에 힘입어 이를 잘 견디어 이김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시며 또한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과 승리의 월계관을 주실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보십시오. 그분만큼 가장 혹독하게 비참하게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겟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죽도록 괴롭소.”하신 그분은 또한 땅에 엎디어서 될 수 있으면 그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셨으니,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오죽하셨으면 그 수난의 길을 멀리해달라고 애가 타는 기도를 바치셨겠습니까. 가장 의로우신 하느님의 아들이건만, 잘못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분이시건만 그분은 고난은 당하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중의 어느 분이 지금 기막힌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계시다면 우리보다 먼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위안과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이제는 “내 멍에를 메라”고 하시는 이 말씀인 즉 “네 멍에는 네가, 내 멍에는 내가 메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두 사람이 하나의 멍에를 메자”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어려운 일을 하고 무거운 짐에 허덕이고 있느냐. 그렇다면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와 함께 멍에를 메고 네 무거운 짐을 끌어주겠다”.


    이 얼마나 기막힌 주님의 어지신 사랑입니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같은 멍에를 메고 내가 끌어야 할 짐, 즉 나 혼자 만이 겪지 않으면 안될 고난을 함께 나눠 짊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미 우리가 못 견딜만한 무겁고 힘든 저주스러운 고난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인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을 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고난을 가지고 주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없어지기만 바란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멍에를 함께 하는 축복은 못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멀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겟세마니 수난과 함께 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지만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마음과 같이 되어 우리의 교만함과 고집스러움이 여지없이 개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 당하는 우리의 고난은 그저 고통스럽고 저주스러울 뿐 아무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나눠 받을 때 오히려 우리의 고난은 참을만하고 가치 있는 것이며 영생에로 이르는 복된 것이 됩니다.

    일찍이 고난을 복된 것이라고 말한 이는 없지만 우리보다 먼저 고난을 당하신 그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고난으로서 그분과 함께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영원히 생명이 왔기 때문입니다. 아멘.






    4       연중 제14주일  마태 11,25-30 (가해) 낮은 자로 오시는 하느님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즈가 9,9~10 (보아라, 네 임금이 겸비한 모습으로 너를 찾아오신다)

    제2독서 로마 8,9.11~13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여러분은 삽니다)

    복 음 마태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이 높으시고 지존하신 분이었지만 인간에 대한 그분의 깊은 사랑으로 세상의 저 밑바닥에까지 내려가시는 굴욕과 천시를 받는 하느님이시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였으며 바로 이와 같은 겸비의 자세야말로 하느님을 진실로 만날 수 있는 인간의 길이 기도합니다.


    성서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데 그들 모두는 스스로 잘나고 똑똑하고 뽐내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백이면 백 사람 모두가 자신을 낮춰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순명할 수 있는 겸손하고도 겸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죄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많으냐 하는 것은 하느님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죄로 인해서 그가 더 낮춰질 수만 있다면 하느님은 그 죄인을 어떤 인생보다도 더 기뻐하십니다.


    오늘 1독서는 장차 오실 위대한 임금이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아가 천상 군마를 타고 세상의 큰 권세와 힘을 가지고 오리라고 믿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잘나고 똑똑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알고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못 배우고 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었으며 그 자체로 죄인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통적인 고정 관념을 완전히 뒤엎어 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은 낮은 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이자 호소입니다. 낮은 자리는 진정 하느님의 처소요 그분이 스스로 머무셨던 자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낮은 자의 마음이야말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위대한 자리입니다. 바오로도 일찍이 주님의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남을 체험했으며(Ⅱ고린 12,7~10참조), 베드로도 여러 번 실패하고 나서야 주님께 더 매달리고 굽힐 수 있는 위대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사람이 낮아질 수 있을 때 그는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제가 한창 교만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무슨 죄를 져서 한 사건에 깊이 말려들게 되었습니다. 꼼짝없이 저는 제가 판 구덩이 속을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그때 그런 기도를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주님, 저를 치십시오. 제가 가루가 되어 부서질 때까지 치십시오.’ 저는 날마다 그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곤란한 처지에서 그렇게 은혜로울 수가 없었으며 매일 읽는 성서의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서 저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알 수 없는 어떤 큰 힘이 저를 온통 꽉 채워 주는 은혜의 충만함을 그때 비로소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사건은 잘 풀렸으며 좋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낮은 자가 되어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하고 마음으로 보는 것하고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낮아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 해도 하느님 앞에서는 자기 자신을 부수고 깨뜨려야 합니다. 그때 진리의 눈이 떠지며 은혜의 길이 새롭게 열립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신앙을 위해서 하느님께 몸바쳐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만을 실천하기 위해서 진리의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직접 세상에 오셨을 때는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찾고 갈구했던 하느님께서 직접 찾아 주셨건만 그들은 이 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만이 똑똑하고 잘 났다는 교만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거짓 신앙을 용기있게 깨뜨려야 합니다.


    많은 본당에서 문제되고 있는 일 중의 하나는 소위 열심하고 똑똑한 자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행위들입니다. 교리나 성서를 남보다 더 알고 그리고 봉사도 더 많이 하는 자들이 오히려 사람을 더 무시하고 배척하며 용서를 안 합니다. 그리고 자기 그룹의 어떤 세력을 형성해서는 자기들끼리만의 이질적인 분위기를 고수합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상대의 말이 들어가질 않으며 하느님의 진리도 자신들이 설정한 테두리 안에서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다 합리화시킵니다.


    하느님은 진실로 낮은 자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권력이 하늘 높이 올랐다 해도 저 밑바닥으로까지 내려가는 겸손과 순수함이 없다면 그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평생을 믿고 걸어도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내려갑시다. 예수님께서 내려가셨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낮은 곳으로 내려갑시다. 그것이 진정 올라가는 길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만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 14 주일

    제 1 독서 : 즈가 9, 9-10

    제 2 독서 : 로마 8, 9.10-13

    복     음 : 마태 11, 25-30


    제 1 독서 :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오고 나서, 기원전 520년경에 유다인들은 지치고 실망에 빠져있었다. 이스라엘 왕국의 영광스런 재건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예루살렘은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변방에 있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즈가리야는 유다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묵시 문학적인 표징으로 하느님의 행동을 묘사한다. 즈가리야는 새세상에 나타날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 메시아는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겸손한 왕의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가 세우려는 왕국은 세상의 왕국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분의 왕국은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것이다.


    제 2 독서 :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구별이 안되지만 그리스의 원문을 보면 몸(soma)과 육체(sarx)가 명확하게 구별된다.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 몸은 중요한 개념이다. 문맥에 따라 좀 다르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로마서에서 몸은 세상 안에서 그 존재와 행동을 통해 현존하는 한 인간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로마서 6장 6절에서 “죄의 몸”(공동번역에 따르면 “죄에 물든 육체”)과 “묵은 인간”(공동번역에 따르면 “예전의 우리”)은 동의어이다. 우리 몸은 죄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육체는(sarx) 그 욕구 때문에 죄에 쉽게 떨어져서 선을 할 능력이 없다(로마 7, 14.18). 육체는 죄의 법을 따르는 사람들을 자기 종으로 삼고(로마 7, 25) 악행을 만들어낸다(갈라 5, 19).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육체와 성령의 근본적 대조를 부각시킨다. 오늘 제2독서에 육체로 번역된 단어의 원문을 보면 모두 sarx로 되어있다(13장 후반부는 예외, 그러나 이 구절의 soma는 sarx와 동의어로서 자기 자신의 욕구에로만 정향된 삶을 의미한다).

    이런 대조는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을 대비시키는 히브리적 사유에서 영감을 얻었다. 히브리적인 이 대조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이중적 경험에 의해 육체와 성령의 대조로 발전되었다. 이중적 경험이란 신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에 대한 체험과 육체가 우리를 이끌어들인 죄에 대한 체험이다. 예전의 인간은 죄 때문에 죽음으로 갔었지만, 성령 안에 새로워진 인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덕분에 영원한 생명으로 간다.


    복      음 : 나자렛 예수의 전기를 소상하게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역사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지만 복음사가들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복음서의 예수는 그들이 신앙으로 만난 예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복음서들은 우리에게 예수가 누구인가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다만 그분의 말씀과 행적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나자렛에서 살았고 예루살렘에서 죽은 예수라는 인물과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베푸시는 사건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 쉽게 말하면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는 메꾸어지지 않는 거리가 존재한다.

    제자들의 신앙은 예수의 자의식 위에 놓여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아셨고 그것을 당신 제자들에게 계시하셨고 부활을 통해 증명하셨다. 신앙을 통해 확신을 가진 제자들은 이 사건을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자의식에서 제자들의 설명으로의 전이는 필연적이고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이런 당연한 전이에도 불구하고 소위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은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는 다시 예수의 자의식으로 돌아온다. 즉 예수께서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불렀던 대목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복음 마태오 11장 25-27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밀함을 명백히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유다교에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엄두를 감히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직접 발설하신 말씀으로 인정되는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대담하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이런 친밀함은 특히 게쎄마니에서 기도할 때 드러났다. 마르코복음 14장 36절에서 예수께서는 감히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른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공동번역). 여기서 첫 번째 아버지 호칭의 원어는 아빠(Abba)이다. 아라메아어인 Abba라는 단어는 말하는 사람의 실제 아버지를 뜻한다. 유다인들의 기도에서 이 단어가 결코 하느님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예수의 대담성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친밀함을 드러내 주는 단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 주의 기도 첫머리에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마태 6, 9).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마태오 복음 11장 25절의 이 말씀은 오늘의 성서 말씀을 압축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가난하고 겸손한 자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기묘하신 섭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길은 너희의 길과는 다르다.”고 이사야서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세속적으로 보았을 때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들, 슬기와 재치가 넘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재주와 능력도 뛰어나서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는 좋을지 몰라도 마음은 가난하고 겸손하지 못한 나머지 교만과 오만 불손으로 가득 차 있기에 모든 것이 시시해 보이고 우습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바리사이파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성서와 율법에 정통했고 기도와 단식을 철저히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해 보였고 안식일과 율법을 어겨 가면서 선행과 기적을 베풀던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너무나 어른스럽고 율법에 얽매여 있어서 율법을 초월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완고한 나머지 율법을 넘어선 경지에 이를 수 없었고 모든 것을 원리 원칙대로만 생각하는 골수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너그러운 마음, 자비로운 마음은 하나의 사치였고 낭비였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어부출신의 제자들, 세리출신의 제자들이 못마땅했고,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는 예수라는 청년, 그것도 세리와 창녀와 병자들과 어울려 다니는 비뚤어진 젊은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존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겉만 보고 사람들을 판단했던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심오하고 깊은 진리가 드러나지 않고, 비록 배운 것도 없고 율법을 잘 알지 못하고 죄 중에 살았던 자들이지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 한 분만을 바라보며 그를 따라다녔던 제자들과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 병자들, 소외받은 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밝혀진 것입니다.

    러시아에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부잣집에 마포로 된 자루가 있었습니다. 누구의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하인들의 방에서 일용품을 담아두는 자루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때로는 수건이 없는 사람들이 쓱쓱 발을 닦는 발닦이로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읍내에 돈 받을 일이 있어 가려는데 이 마포 자루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도적이 끓고 있어서 중요한 것을 옮기는 데는 위장이 필요했습니다. 주인은 ‘옳거니’하고 때에 절은 이 자루를 챙겨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 마포 자루에 금화를 가득 받아 넣어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날부터입니다. 마포 자루의 신분이 변한 것은, 하루아침에 금화 자루가 된 것입니다. 그것도 철제 금고 속에서 누구보다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주인이 금고를 열 때면 이 금화 자루부터 어루만졌습니다. 행여 다른 사람들이 만지기라도 하면 질겁하며 혼을 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금화 자루를 바라보며 황홀해 했습니다. 자루는 서서히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뭇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고 으시댔으며 큰기침을 했습니다. 주변의 사물들에게 간섭을 하기 시작했고, 시비를 걸어 자기 식으로 고치려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네가 무얼 안다고 그래.” “두고 봐, 주인은 내 말대로 할거야.” 다들 멍청한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구 하나 반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감탄만 할뿐이었습니다. 한번, 은장도가 나서려고 하였으나 은수저가 이렇게 귓속말을 하는 통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저걸 마포 자루라고 생각해면 안돼. 금화 자루란 말이야.”

    그런데 어느 밤이었습니다. 이 집에 도둑이 들어와 금고 문을 열었습닏. 그리고는 금화 자루를 훔쳐 가다가 금화를 다른 가죽 자루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마포 자루를 길가 뻘구덩이에 처박아 버렸습니다. 이후 한때 금화 자루였던 마포 자루의 소식이나 이름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오만하고 방자한 마포 자루의 모습,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교만하고 불손하게 구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까닭에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벗이 되신 예수께서는 오늘 제1독서 즈가리야서의 말씀처럼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고 오히려 나약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겸손하신 분, 나약하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나귀를 타고 오시면서도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기쁨과 환성을 외치시는 분입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겸손한 분이기에 모든 이를 껴안고 편히 쉬게 하시는 분이 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하시면서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우리를 안심시키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쉴 수 있는 사람은 그분의 성령을 모시면서 육체의 모든 악한 행실을 죽여버리고 그분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기쁨은 모든 것 위에 주님을 우선적으로 바라고 구하는 가난한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멍에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실 그분의 품에 안길 때 우리는 모든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분 앞에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게 해주시길 청하면서 주님의 이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 넘치도록 간구하고 그분의 뜻에 맞갖는 삶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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