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5주일

 

연중제15주일



 씨 뿌리는 자가 씨 뿌리러 나갔다



제1독서: 이사 55,10-11

제2독서: 로마 8,18-23

복음: 마태 13,1-13



이 주일과 다음 두 주일의 전례는 우리에게 소위 ‘비유의 담화’로 온통 가득 차 있는 마태오 복음 13장에 의한 주님의 비유 말씀들을 전해주고 있다. 다른 두공관 복음사가들은 같은 사료를 다룬 모양으로 배치하고 있으며 그것도 일부만 선택해서 전해준다(마르4,1-34 ; 루가 8,4-18 참조).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그 비유들은 생각과는 달리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고 또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하늘 나라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기’ 위해서보다는 오히려 ‘감추려고’ 사용하신다(마태 13,11). 그래서 사도들도 어째서 예수께서 정확한 의미가 결여된 듯한 즉,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면서도 또한 “낯선 구절들 속에 숨겨진 의미”(단테)를 파고들려는 의지와 관심을 지니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듯한 그런 묘한 암시적 방법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한다. 이런 까닭에 사도들은 첫 번째 비유 말씀이 끝나자 곧 예수께 묻는다 :“저 사람들(군중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10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유 말씀 속에는 사랑과 자비의 행위가 담겨 있지만 또한 심판과 단죄도 들어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말씀이 단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듣는 이들 자신에게 달린 문제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비유들의 단순하고도 일상적인 외적 형태를 뛰어넘어 파고들어가서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깊은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은 듣는 이들에게 맡겨진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하늘 나라 밖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 잠재해 있던 약간의 ‘빛’마저도 그들에게는 ‘어두움’으로 바뀌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말씀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목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2절).

 항상, 우리가 얼른 감지 할 수 있는 내용보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당신의 말씀들-비유 문학의 장르를 초월해 있는-을 정신차려서 열심히 들으라고 하시는 예수의 경고 말씀은, 무심코 이 대목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도 당혹스러운 하나의 현실로 와닿는 말씀일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일찍이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고 말하지 않았더냐?”(13-15절).

 만약에 그 ‘신비’에 대해 듣기만 하고 그것을 깊이 통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충분치가 못하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믿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참으로 믿는 사람이다”(Homil. in Evang., 26,9 : PL 1202)고 하신 성 대 그레고리오의 가르침대로, 활동을 통해서 맺어지게 되는 다른 모든 결실의 근거가 될, 우리 마음속에 행해지는 말씀의 ‘씨 뿌리기’의 첫 번째 결실이다.

 사도들은 군중들과는 반대로 통찰하려는 노력의 자세를 갖추고 있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11절). 이것은 결코 차별대우가 아니다. 다만 마음과 정신의 개방, 항상 우리 자신보다도 더 위대한 진리에 대한 원의와 추구, ‘신비’의 매력에 대한 인식 등에 대한 보상의 ‘선물’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매일매일 세속적인 표현으로 복음을 반복해서 되뇌이는 까닭에 복음이 지니고 있는 ‘새로운 맛’을 잃어버렸고 또한 그 추진력마저 빼앗겨버렸는지 모른다. 우리는 복음에 다가와 경이와 놀람과 ‘신비’의 맛 즉, 게으르고 방심하는 사람들에게는 냉정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점점 더 깊이 파고들고자 정성과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부추겨주는, 그러한 모든 신비스러운 맛을 되돌려 받도록 그리스도께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이 경우에 ‘비유로 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는 문학 장르를 다시 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복음 앞에서 기대와 놀라움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를 다시 야기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하느님의 말씀이 도전장이나 자극제가 되는 사람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로써 풍성히 땅에 떨어진 ‘씨앗’이 완전히 죽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이제 우리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한데 모아놓은 일곱 개의 비유 가운데 첫 번째 비유 즉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직접 대해 보고자 한다 : 예수께서는 먼저 비유로 말씀하신 다음(13,3-9) 다른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그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한 사도들이 분명한 설명을 요구하자 모두가 이해하기 쉬운 개념으로 그 내용을 설명해 주신다(18-23절).

 복음사가가 첫머리에 그리스도 주위로 몰려드는 군중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그 필치는 다분히 시적이라 하겠다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군중은 그대로 모두 호숫가에 서 있었다”(2절).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인가 아니면 참으로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관심 때문인가? 예수의 비유 말씀은 두 번째 가정을 거부하는 것 같다 : 그리고 예수께서 군중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는 모습도,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분에 대한 호기심을 더 가짐으로써 그분에게서 멀리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뜨자 타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라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3-9절).

 이렇듯 ‘풍경화’와도 같은 비유의 내용은 순전히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팔레스티나 지방의 환경이 그렇다 : 조그만 땅덩어리, 돌투성이인 밭들, 농사를 짓기 위해 여기저기 가시덤불을 헤치고 만들어 놓은 좁은 길들이 고작이다. 사람들은 이렇듯 놀라울 만큼 거친 땅에다 전부 다 죽지는 않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씨를 뿌렸던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그러면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지난 주일 복음을 해석하면서(마태 11,25-30)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불신의 위기를 맞고 계심을 이미 언급하였다 : 오직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비’를 ‘나타내 보여주고자’ 하신 몇몇 ‘철부지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만이 그분을 믿는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분의 메시지는 실패하고 말았으며 또는 무관심 속에 버려지고 만다.

 이런 시점에서 예수께서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제자들의 믿음을 회복시키고자 당신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해주려 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뜻을 바로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써 행하신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믿음에 대한 비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 씨앗도 있다.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많은 씨앗이 실패를 하더라도 결실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당신 제자들에게 확신 시키고자 하신다. 그분의 사명은 씨 뿌리기에 비교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속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 나라의 구원적 힘은 증대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씨 뿌리기와 거둬들이기 사이에는 상호 밀접하고도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구원 사명과 하늘 나라의 도래 사이에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 비유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는 뚜렷한 메시아적 의식을 드러내 보여준다. 만일 그분이 만나게 되는 장애물들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그분의 인격이나 활동 안에 임하고있다면 그것은 그분이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결정적 실체들의 영역에 속하는 분이시며 단순한 일반 예언자의 차원을 추월해 계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분의 메시아 사상은 영광스럽고 권세있고 승리주의적인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나약함과 좌절과 실패를 어렵게 헤쳐나간다”(G. Barbaglio, in I Vangeli, Cittadella Editrice, Assisi 1975, p.307).

 사실이 이러하다면, 그 비유는 ‘윤리적’ 의미보다는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더 강하게 지니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인간들의 마음속에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사실보다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사실을 더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두 관점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오히려 다음에 계속되는 비유에 대한 설명이 입증해주듯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 : 사도들의 몰이해는 비유에 대한 설명을 야기시켰고 그 설명에서는 ‘윤리적’ 관점이 더 강조되고 있다. 말하자면 이때에 강조점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인 자세로 옮겨지고 있다. 

 아마도 이처럼 의미를 전이시킨 당사자는 그 당시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 접한 복음사가일 것이다. 그의 독자들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께 밀착해 있었던 그리스도 신자들이었지만 밀착돼 있는 그만큼 자신들이 기쁘게 ‘들은’ 복음의 내용을 생활 속에서 일치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여기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볼 때 모든 문제의 핵심은 명백하다 : 즉 복음의 말씀이 가능한 한 최대의 ‘결실’을 낼 수 있는 ‘땅’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내포한 뜻을 들어 보아라”



“이제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내포한 뜻을 들어 보아라.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간다.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곧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사람은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오면 곧 넘어지고 만다. 또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배 혹은 육십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18-23절).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으로부터 시작해서 처음부터 자연적으로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에 이르기까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모든 선이 파괴되면 될 수록 그만큼 더 실망이 큰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섬세하면서도 까다롭다. 각별한 정성으로 온전히 보호되지 않는다면 시들어 죽어버리고 만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말씀은 피상적이고 편리한 생활, 세상 이익에 대한 애착,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한 집착, 맞부딪치게 되는 어려움들에 대한 두려움 등과는 공존할 수 없다.

 또한, 복음사가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어째서 두 개의 큰범주로-이미 말한 대로 여러 계층이 있긴 하지만-즉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19절) 사람들과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23절) 사람들로 구분하고 있는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백 배 혹은 육십배 혹은 삼십 배”(23절)의 풍성한 결실을 맺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말을 지적인 의미로 즉 순수 신학적 통찰의 노력으로써 알아들을 것이 아니라 활동적 실천적 의미로 알아들어야 함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마치 씨앗을 받아들여야 하는 밭의 경우처럼 복음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또 그 말씀에 의해 자신을 변화시킨다면 그것이 곧 복음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만약에 밭을 쟁기로 갈고 고르지 않는다면 또 항상 뿌리를 내릴 차비를 하고 있는 모든 잡초들을 불태워 없애지 않는다면 결코 풍성한 수확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비유의 개념 전체가 결실이 풍성해지기 위한 첫째 조건으로서 ‘수고’를 말하고 있다. 힘들여 수고하지 않는다면 수확이 실패할 것은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여기서 수확이 실패하는 원인은 씨 뿌리는 이가 준비를 하지 않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뒤바꾸어놓을 수 있는 그 ‘말씀’을 지체없이 받아들여야 할 ‘땅’(우리 각자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데 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처럼 내 말도 그러하리라”


 우리는 지금까지 한 고찰로써 제2이사야가,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말씀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는 오늘 제1독서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 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이사55,10-11).

 여기서 야훼의 ‘말씀’은 다른 곳의 지혜나(잠언 8,22 ; 지혜 7,22) 성령(이사 11,2)처럼 인격화되고 있으며 또한 오직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후에야 돌아오는 사자(使者)에 비교되고 있다. 비와 눈에 대한 비교는 그 ‘말씀’의 풍후한 생산력과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힘을 말해준다.

 이사야의 이 대목을 복음에 비교해 보면 과장되고 낙관적인 듯한 느낌이 든다 : 사실 예수께서는 그토록 당신이 너그럽게 뿌리는 ‘씨앗’이  번번이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예수의 말씀이 야훼의 말씀보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실제로 구약성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 거기서도 야훼의 말씀은 수 없이 실패를 거듭한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이사야 예언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변화와 쇄신의 ‘능력’이다 : 하느님의 입장에서 ‘말씀’의 능력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인간들이 할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을 넘어서, 또는 그 반대의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이룰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대하고 있는 이 예언서의 대목은 하느님과 계약이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약’을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라. 다윗에게 약속한 호의를 지키리라. 나는 그를 ant 백성들앞에 증인으로 세웠고 부족들의 수령과 군주로 삼았다”(이사 55,3-4). 비록 모든 사람이 ‘계약’에 불충실하거나 참여하기를 거부한다할지라도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을 결코 부숴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느님의 말씀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또 우리의 마음에 맡겨진 생명의 ‘씨앗’으로 하여금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에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모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의 계획이 우리 안에서 아니 우리 안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이 생겨 나온(창세1장 참조) 태초의 그 ‘말씀’의 찬란한 영광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모든 ‘피조물’안에서도 실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무릅써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 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로마 8,18.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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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15주일에 1개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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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 15 주일

    제 1 독서 : 이사 55, 10-11

    제 2 독서 : 로마 8, 18-23

    복     음 : 마태 13, 1-23 또는 13, 1-9


    제 1 독서 : 위로의 책이라고 불리는 제2 이사야서(이사 40-55장)는 바빌론 유배 중(기원전 587-538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용기와 신뢰를 주기 위해 쓰였다. 예루살렘이 다시 재건되고 이방민족들이 주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게 되리라는 것이 예언자의 전망이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 말씀의 능력에 대한 경탄스런 고백이다. 그분의 말씀은 선포된 그대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제2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고백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신뢰를 갖도록 인도한다.


    제 2 독서 : 이 텍스트는 파스카 사건을 우주적 차원에서 잘 표현한 대목이다. 지금은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지만 하느님 자녀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우주 전체가 파스카 사건을 통해 그 방향이 재정립된다. 여기서 세상의 모든 존재에 의미와 약동을 주시는 성령의 역동성이 강조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킴으로써 당신 아들의 죽음을 죄인들을 위한 죽음으로 변화시키셨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죄의 용서와 하느님의 자녀 됨은 파스카 신비의 열매이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이 파스카 신비는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된다.


    복     음 :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무엇보다도 희망의 메시지이다. 하느님은 쓸데없이 당신 말씀을 낭비하고 계시며 우리는 그 말씀이 헛되이 뿌려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낭비는 사랑의 법칙이다. 아버지는 집을 떠나간 작은아들에게 쓸데없이 재산을 낭비했고, 집에 같이 있던 큰아들에게는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였다(루가15장 참조). 작은아들은 곧 재산을 탕진하였고 큰아들은 여러 해 동안 아버지와 같이 있었는데도(루가 15, 29)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속성이다. 우리 각자의 삶을 돌아보면 낭비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쓸데없이 하느님이 말씀이 낭비된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다는 희망이 마태오 복음 13장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담겨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풍성하게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 각자는 장애되는 요소를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길바닥이나 돌밭같이 무관심한 마음, 가시덤불에 짓눌리는 마음을 갈아엎고, 말씀이 잘 뿌리내리는 비옥한 땅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복음 말씀은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 중,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씨앗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요, 받은 곧 우리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씨앗은 새들에게 쪼아먹히고, 타버리고, 짓눌리고 혹은 풍성하게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은 길가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혹은 좋은 땅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에 있어서도 말씀은 싹이 돋아나지 못하고 죽어버릴 수도 있으며, 성장 도중에 죽는 수도 있으며, 풍성하게 성장해서 결실을 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마음 준비 여하에 따른 것입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길쌈할 수 있는 베틀을 만드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이 노인에게는 과년한 딸이 셋 있었습니다. 큰딸이 시집을 가게 되자 노인이 물었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베틀을 지어 주마.” 큰딸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지위가 높은 사람의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권력을 길쌈할 수 있는 베틀을 지어 주십시오.” “그래라.” 노인은 권력이 길쌈되는 베틀을 만들어서 큰딸에게 주었습니다. 다음에는 가운데 딸이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돈 많은 사람의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재력을 길쌈할 수 있는 베틀을 원합니다.” “그래라.” 노인은 돈이 길쌈되는 베틀을 만들어서 가운데 딸에게 주었습니다. 얼마 후, 막내딸이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다른 것은 좀 부족하더라도 화목하게 살고 싶습니다. 화평을 길쌈할 수 있는 베틀을 원합니다.” “그래라.” 노인은 화평을 길쌈하는 베틀을 지어서 막내딸에게 주었습니다.

    몇 해가 지났습니다. 노인은 이 세상을 하직할 때가 다가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딸들의 집을 순례하고자 길을 떠났습니다. 큰딸은 과연 경비도 삼엄한 고관대작의 관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만난 딸의 푸념은 길기만 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한시도 마음놓을 날이 없습니다. 남편이 권좌에서 밀려날까 봐, 경쟁자가 나타날까봐 불안하기만 한 나날입니다. 더욱이 많고 많은 청탁이며 원망에 몸둘 곳이 여의치 못합니다.” 다음은  가운데 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가운데 딸은 역시 돈으로 도배를 한 듯한 으리으리한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만난 딸의 하소연은 길기만 했습니다. “아버지, 돈 등창이 나서 못살겠습니다. 남편은 바람이 잘 날이 없고, 친지들은 물론 별의별 사람들까지 다 손을 버리고 돈타령을 하는 통에 어디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지경입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막내딸은 삼간집에서 단촐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딸의 얼굴에는 미소가 잔잔히 베어있었고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ꡒ아버지, 무엇 하나 부러울게 없는 저희 집입니다. 남편은 작은 기쁨도 크게 받아들이고 자식들은 오손도손 우애가 좋습니다. 아버지, 저희 집에서 며칠 더 묵어 가십시오.”

    같은 딸자식이지만 천차만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모습, 이것은 마치 똑같은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우리 마음속에 뿌려졌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에 따라 각기 다른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우리 자신의 마음의 밭에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은 다 똑같습니다. 그 말씀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고자 했을 때에는 처음의 생각과 기대 이상을 엄청난 결실을 맺게 되지만, 그 말씀을 소홀히 하고 마음에 깊이 담아두지 않을 때에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갖가지 세속의 유혹과 시련에 떨어져서 우리 스스로 그 말씀을 죽여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자라날 수 있도록 물도 주고 가꾸고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데 별반 노력도 하지 않고 남의 탓, 환경이나 재능을 탓하고 있다면 스스로 자멸을 초래하고 마는 법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에 따른 신뢰와 이 신뢰를 바탕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성실한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실상 하느님의 말씀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처럼 그분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그분에게로 돌아가지 않는 생명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은 온갖 교묘한 술책으로 서로 속이고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불변하며 인간에게 도움을 베풀어줍니다.

    어떤 사람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포로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는 그 끔찍했던 시절에 한 가지, 성경 말씀을 간직하고 살았는데 그것은 바로 이사야서 43장 1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건져주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이 성경 말씀을 그는 매일 반복하여 입으로 외우며 살았습니다. 다른 생각이 전혀 나지 않고 말할 것이 전혀 없을 때에 이 말씀만을 의지하여 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 말씀은 그를 굳세게 지탱해 주었고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합니다.

    말도 많고, 헛소문, 유언비어도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그대도 마지막 희망과 기대를 걸 수 있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요, 당신 온몸으로 당신의 진실을 증명해 보인 분이십니다. 그것은 곧 그분의 말씀이 이루어져 결실을 맺는 것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즉 성실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병자에게는 치유를, 죄인에게는 용서를, 죽은 이에게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말해야 하고 이 말씀이 어둠을 가로질러 동트는 여명의 새 아침을 가져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서 많은 결실, 풍성한 수확을 맺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 user#0 님의 말:

     

    1. 박동순 요셉

    1.1. 연중 제15주일(가해)


    1. 제1독서 (이사 55,10-11)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곧 해방되리라는 위로의 말로 시작하는(40,1-11) 제2이사야서는 귀향길의 기쁨을 노래하면서 끝맺는다(55,12-13). 그리고 바로 앞부분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획과(55,8-9) 당신 말씀의 능력에(55,10-11) 대하여 말씀하신다.

      8-9절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어떻게 실현시키시는지를 분명히 밝혀 준다.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을 이해할 수 없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실현시키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인간 역사의 주인이시다. 인간이 취해야 하는 자세는 그분께 대한 절대적 신뢰심이다. 본문은(10-11절) 하느님 말씀의 능력, 곧 그분께서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느님 말씀의 능력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분께서 약속하신 해방과 구원을 믿으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10절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은 반드시 땅을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준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결코 예외가 없는 진리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이러한 절대적 자연의 법칙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이다. 11절은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내용이다. 곧 그분의 뜻은 틀림없이 성취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유배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구원 약속을 가리킨다.


    2. 제2독서 (로마 8,18-23)

      바오로 서간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구절들 중의 하나에 속하는 내용이다. 벌써 세례를 받고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어떻게 고통이 끊이지 않고 실패가 우리를 엄습하고 있는지 라고 질문하는 신자들에게 답하고 있다.

      바오로는 우리 몸이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세상의 고통에도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18절). 피조물 즉 우리 육체와 밀접하게 연결된 지금의 이 세상은 자연의 이치를 그렇게 만드신(이사 40,26; 48,13; 바룩 6,59-61; 집회 16,27-28) 분의 뜻에 따라 제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20절). 그러나 바오로는 곧 바로 이어서 예언자적 관점에서 말한다. 즉 자연은 낡은 질서나 법칙에 기계적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찾아 나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19-21절). 피조물의 이러한 기대는 헛되지 않아서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비단 피조물만이 아니고 성령의 첫 열매인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다시 살아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고 한다(23절). 바오로는 이 연대성을 새로운 세계를 향한 “희망”으로 표현하면서 성경에 나타나는 ‘지상 낙원’과 연결시킨다(이사 65,17-25; 11,5-9; 55,13).

    3. 복음 (마태 13,1-23)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해설이다. 오늘 복음의 첫째 단락은 비유 자체(3-9절)이고, 둘째 단락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한 설명(10-17절)이고, 셋째 단락은 비유에 대한 설명(18-23절)이다.

      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3-9절) –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또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많이 하셨지만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라기 보다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당신 자신에 관한 비유로 보는 것이 옳다.  씨 뿌리는 농부가 여러 실패와 시련을 거듭하면서도 많은 수확을 거두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꾸준히 씨를 뿌리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모든 희망을 하느님 아버지께 걸고 당신의 길을 꾸준히 걸으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 비유의 본래 의미이다.

      ②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10-17절) – 하느님 나라나 그 나라를 전하는 당신의 행위가 신비에 둘러싸여 있기에, 이 신비를 깨달으려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인이 아니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비밀은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믿는 이들이기에 비유를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③ 비유의 해설(18-23절) – 본래 비유의 역점은 씨 뿌리는 농부의 자세, 즉 하느님 나라에 희망을 걸고 사시는 예수님의 자세에 있는 데 비해서, 그 해설의 역점은 씨앗과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땅에 있다. 즉 “씨앗”은 “말씀”이고, “땅”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청중의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음의 자세가 “길”같은 사람들은 마치 굶주린 새들 마냥 덤비는 사탄에게 복음의 씨앗을 빼앗기는 이들이다. 마음의 자세가 “돌밭”같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지만 시련과 박해가 닥치면 쉽게 변절하는 이들이다. 마음의 자세가 “가시덤불 속”같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기 시작했지만 현세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다른 것에 대한 욕심에 짓눌려 신앙생활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렇지만 마음의 자세가 “좋은 땅”과 같은 충실한 사람들은 풍성한 구원의 결실을 맺는다.



    4. 이 주일의 초점


      1)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2)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다양한 자세를 복음에 비추어본다.

         복음에서 말하는 여러 부류를 알아보며 내 자신을 반성한다.

      3) 그리스도 신자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강  론


    찬미 예수님!

    지난 한 주간동안 주님 안에서 잘 지내셨는지요?

    오늘은 연중 제15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해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번 주일과 다음 16 ․ 17 주일에 우리는 마태오 복음 13장, 소위 ‘비유 설교’ 안에 들어 있는 비유와 그 해설을 복음으로 듣게 됩니다.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들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교육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하느님 나라를 설명할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나 그 나라를 전하는 당신의 행위가 신비에 둘러싸여 있기에, 이 신비를 깨달으려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아니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비밀은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본래 비유란 쉽게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예화를 들어 설명하는 것인데 신앙 없이 설명을 들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은 이 비유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아시겠죠?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에 떨어져서 새들이 쪼아 먹었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서 뿌리가 내리다가 말라죽었으며,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져서 뿌리는 내렸지만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를 맺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의 중심은 씨앗과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땅에 있습니다. 즉 씨앗은 주님의 말씀이고, 땅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가 길 같은 사람들은 마치 굶주린 새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빼앗기는 이들입니다. 마음의 자세가 돌밭 같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지만 시련과 박해가 닥치면 쉽게 변절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자세가 가시덤불 속 같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기 시작했지만 현세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다른 것에 대한 욕심에 짓눌려 신앙생활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의 자세가 좋은 땅과 같은 충실한 사람들은 풍성한 구원의 결실을 맺습니다.


      마음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려줘도 듣는 사람이 중요치 않게 생각하면 그 좋은 말씀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말씀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의 말씀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듣겠습니까? 복음 중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여기 귀 없는 사람 있습니까? 다 있으시죠! 이 귀는 마음의 귀입니다. 마음으로 당신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듣고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은 반드시 땅을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여 먹을 양식을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좋은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땅이 기름지도록 은총의 거름도 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좋은 말씀의 씨앗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다보면, 땅은 척박해지기 마련입니다. 농부가 땅을 놀리면, 돌 투성이가 되고 잡초도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땅에서 많은 소출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농부의 피와 땀의 노력으로 후에 풍요로운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것같이, 우리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열매맺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루하루 주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내 마음의 밭을 기름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상한 바를 실천하는 것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말씀의 씨앗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일꾼으로서, 그 씨앗을 잘 싹틔우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땀의 수고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한 주간동안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은총의 시간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3. user#0 님의 말:

     

    연중 제15주일



            1. 강길웅 신부(가)/ 2                 2. 김창석 신부(가)/ 4

            3. 김몽은 신부(가)/ 5                 4. 안충석 신부(가)/ 6

            5. 김현준 신부(가)/10                 6. 최기산 신부(가)/12

            7. 함세웅 신부(가)/14                 8. 허영업 신부(가)/16

            9. 최인호 작가(가)/17                 10. 교구 주보(가)/19


    1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우리는 하느님의 포도밭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5,10~11 (비는 땅에서 싹이 돋아 자라게 한다)

    제2독서 로마 8,18~23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 음 마태 13,1~23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우리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연하게 한 말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제 친구 중에 누가 상처를 하면 ‘그 사람 장가 두 번 가서 좋겠다.’ 라고 뚱딴지같은 농담을 잘 하더니 정말 자기 부인도 마흔 살에 죽어서 그 친구도 장가를 두 번 가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한마디의 말이 사람을 쓰러뜨리기도 하고 또는 죽어가는 사람을 벌떡 일으키기도 합니다. 하찮은 사람의 말에도 이처럼 큰 위력이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분이 한번 하신 말씀은 헛되게 무너지지 않으며 기필코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이 하느님의 힘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바로 그 내용이 나옵니다.


    바빌론에서 50년 이상 포로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유대인들은 폐허된 도시와 무너진 성전 앞에서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도저히 다시 회복할 수 없고 다시 일으킬 수 없는 암담하고도 참담한 현실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언자 이사야가 나타나서 하느님 위로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때 하느님의 약속은 새 예루살렘을 일으켜 주시는 것이고 번영과 행복과 자유가 있는 새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비가 오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빗방울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꼭 땅을 적시고 만물에 생기를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꼭 그렇습니다. 말씀은 특히 메마른 인생, 실패한 인생, 시련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은혜의 비를 적셔 주십니다.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귀절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로 빵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하나의 씨와 같아서 밭이 나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바로 이에 대한 씨뿌리는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가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다 해도 그 씨를 받아서 싹을 틔우는 땅이 나쁘면 헛수고가 됩니다. 마치 농부가 땅을 쟁기로 갈고 거름을 주듯이 우리도 그렇게 우리 마음을 깊이 파서 깨뜨리고 양분을 주어야만이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언젠가 모 본당에서 피정 지도를 한 일이 있는데 그때 회장님이 딴 일만 하고 강론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왜 안 듣느냐고 했더니 자기는 안 들어도 다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 여쭈어 봤더니 ‘저 분은 본래 입만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돌밭인 사람은 앞에서 설교를 해도 말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한번은 주일 미사 강론을 할 때 책을 덮으라고 해 놓고 오늘 제 1독서에서 무슨 말씀이 있었느냐고 질문을 했더니 아는 사람이 꼭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씨를 뿌려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며 성장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가시덤불만 무성해 있으니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듣고 또 들어 도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이 있어서 들을 때마다 은혜가 다르고 축복 이 다릅니다. 들을수록 그 의미가 깊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 안다고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음식을 먹을수록 맛을 알고 고기를 씹을수록 맛을 깊이 느끼는 것과도 같습니다.


    둘째는 마음을 쟁기로 깊이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리고 덩어리를 깨뜨려야 합니다. 마음이 딱딱하면 말씀을 받아내지 못하고 튕겨 냅니다. 마음에 온통 쓰레기로 꽉 차 있으니 보물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깊은 성찰을 통한 진실한 회개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기도가 될 수가 없으며 하느님의 말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셋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진실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도 필요 없고 속된 말의 홍수 속에서 자신을 가둬 놓고 있습니다. 쓸데없고 허무한 것엔 너무도 집착해 있으며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엔 등한히 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책이 많고 좋은 말이 많아도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힘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보람찬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포도밭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합시다.









    2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고통의 고마움

                                                  김창석 신부


    미국의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폴 브랜트가 몇 년 전 은퇴했을 때, 나환자들에게 주고 싶은 마지막 선물이 무엇인가 물었다. 그때 그는 “그것은 아픔입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그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환자들은 초기 증세나 중기에서도 아픔을 모른다. 상처를 받아도 감각이 없어서 아프지 않기 때문에 치료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처는 더욱 덧나고, 결국은 신체의 일부를 절단해야 할 지경에 이르기 일쑤인 것이다.


    ‘아픔’은 고통 자체이지만 치료를 부르는 신호다. 나환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는 폴 브랜트의 말은 나환자들에 대한 지고한 사랑의 표시일 것이다. 며칠 전에 넘어져 척추가 마비된 환자를 위문하러 병원에 갔었다. 그런데 가족과 환자는 마비된 척추에 아픔을 느낄 수 있어 매우 다행이라고 좋아하고 있었다.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곧 환자가 마비에서 풀려난다는 징조이기 때문이란다. 여기에서의 ‘아픔’은 치료효과 자체다. 치통이라는 아픔이 없으면 이빨이 커다란 이상이 있어도 모를 것이고, 내과의 여러 증세도 아픔의 호소가 없으면 누가 그 위급함을 알아내 주겠는가.


    부활절을 생각해 보자. 단식과 회개의 시기인 사순절이 없는 부활절은 무의미한 것이다. 예수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아픔’은 피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 감수함으로써 부활이라는, 혹은 영원한 삶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고통을 싫어한다. 그처럼 종교도 십자가의 괴로움을 피하고 복을 비는 쪽으로 변질되어 가는 듯하다. 참다운 기독교인은 고통을 당할 때 오히려 그 고통을 내리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의 높은 뜻이 나타나고, 또한 고통이야말로 하느님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톤 쉰은 “고통은 하느님의 확성기”라고 말했다.

    그것은 아픔의 고마움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각고의 노력 없이 얻어진 영광의 무의미함이라든가 ‘한탕’으로 추구한 부의 쓸모 없음을 생각해 보면, 고통의 가치에 새삼스러운 인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에는 ‘교회와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천국과의 거리는 가깝다’는 격언이 있다.


    부활절의 축제 분위기에 앞서 미리 많은 기독교인들이 먹고 싶은 것을 참고, 굶주림을 자처하고, 마음을 밝게 간직하려는 것도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고통이 없이 행복이 있을 수 없고, 십자가의 죽음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다.

    ‘아픔’이야말로 눈물의 씨앗이 아니라 ‘웃음의 씨앗’이며, 절망이 아니라 희망 자체이며, 밝은 내일을 향한 오늘의 시험임을 알아두어야 한다. 아픔을 모르는 육신, 괴로움을 겪어보지 못한 정신은 또한 인생의 어떤 면역성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3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내게 가까운 자가 누구냐?

                                                               김몽은 신부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에서 비유를 들어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비유는 진리를 구체화시키고,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므로써,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한다. 비유는 하늘의 뜻을 가진 땅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알아들으시오」라는 예수님의 말씀같이 비유는 당자에게 책임을 지우며 진리를 원하는 이에게 진리를 나타내 보이고, 원치 않는 이에게는 가리워지고 만다.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여러 가지 밭은 여러 청중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고, 그 방법에 따라 결과(열매)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말씀의 결과는 듣는 자에게 달렸다. 같은 씨(말씀)가 같은 시간에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뿌려지지만, 듣는 자의 반응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첫째 부류의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가 뿌리를 내리기에는,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편견과 아집, 옛것을 고수하려는 고루한 마음, 새것을 덮어놓고 경멸하고 위험시하는 근시안적인 자기폐쇄, 그리고 부도덕한 생활, 교만과 자아도취, 특히 진리에 대한 무관심 등이 그를 소경으로 만든다.


    둘째 부류의 사람은 얄팍한 인생관을 가진 자로서, 깊이 생각하는 일도 없이 경망스럽게 새것이면 무엇이든 일단 덮어놓고 좋아는 하지만, 즉시 싫증을 내고 끝을 맺지 못한 채 도중에서 그만둔다. 그들은 시작하는 것은 많아도 오래가지 못하고, 쉬 더웠다 쉬 식어버리는 자들이다.


    셋째 부류는, 마치 두 주인, 아니 셋 넷의 주인을 섬기는 자들로서, 그들의 생활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에 분주하여, 참다운 가치관을 터득치 못한 자들이다. 현대인들의 생활은 여기에 속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은 세속 일에 바빠, 기도하는 시간도, 성경을 읽을 틈도, 교회에 나갈 여유도 없을 뿐 아니라, 주님을 영접은커녕, 오히려 그들의 생활영역에서 밀어낸다.


    넷째 부류는 옥토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음을 열어 놓고 언제나 배우려 든다. 또 귀를 기울이고 언제나 듣는다. 하느님의 말씀, 친구의 충고를 듣는 사람은 도덕적 실패가 있을 수 없다. 그는 심사숙고하여 세상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 그가 듣고 아는 바를 실천에 옮긴다. 그런 사람은 좁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열매를 맺는다.

    이러한 청중들 가운데 우리는 어떠한 부류에 속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말씀의 씨앗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들을 귀 있는 자로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는 지극히 겸손한 자이고, 인간의 한계를 아는 자이다. 인간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곧 창조주이신 주님을 알고 위대하신 하느님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 오직 하느님께만 의존할 것을 알아, 그분의 진리에 맛들임을 뜻한다. 이렇게 하느님을 알고 그의 뜻을 구하는 자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자라고 구약성서에서는 말하고 있다.

    또 한가지 나타나는 것은 청중의 무분별성에도 불구하고 추수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비유의 결론이다. 어떤 씨는 길가에, 어떤 씨는 박토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나 옥토에 떨어진 씨도 있어 풍성한 수확을 거둔다. 아무도 씨의 추수가 어떠할지는 추수 때까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떨어져 있는 양태를 보고 수확을 추정할 수 있으며, 어떠한 결과이든 간에 확실한 것은 추수할 때가 오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르고 전하지만, 우리의 책임은 씨를 심고 가꾸는 것 뿐이요, 결실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 “나(바오로)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고린 3,6) 그러므로 인내와 소망으로 씨를 심고, 추수를 기다려야 한다. 곧 하느님의 자녀들, 하느님의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있으리라는 가르침이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25)라고 말한 것처럼.






    4      연중 제15주일   출판주일  마태 13,1-23 (가) 씨뿌리는 자의 비유

                                                          안충석 신부


    오늘 복음성경에서는 주의 말씀을 씨앗에다 비유하시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 마음을 여러 종류의 밭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을 받아 열매를 맺고 그 씨앗을 다시 다른 인간들에게도 열매 맺도록 퍼뜨리고 계신 것입니까? 아니면 열매 못 맺는 무화과나무처럼 저주받을 존재인가를 살펴보십시다.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40여년 전에 미국의 출판업계를 휩쓸었던 가장 인기 높게 팔린 책 가운데 ‘에드워드 빽’이란 사람의 자서전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 에드워드 빽은 미국 필라델피아의 커리스만 출판사 사장입니다. 그의 출판사는 서너 개의 가장 부수 높은 잡지와 신문들을 통해서 가계 각층의 미국 국민들에게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각 방면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 출판사 사장 에드워드 빽이란 사람의 일생이 바로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일찍이 12살 때 고국 화란으로부터 이민을 떠날 때, 앙상하게 뼈만 남은 조부께서 손을 꼭 잡고 울면서 남겨주신 좌우명이 있었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어디 가든지 네가 그곳에 있음으로써 그 곳이 무슨 모양으로든지 더 나아지도록 너의 모든 힘을 다하여라.”하시며 이 말씀을 언제 어디서나 명심하여 실행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나이 어린 빽은 손에 단돈 1달러를 들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지금 이 보스톤 도시 길 한 모퉁이에서 신문팔이를 하고 있다. 그러면 이 거리는 내가 이곳에 없었을 때보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더 나아져야지.” 그는 근방에 떨어진 휴지와 꽁초를 줍고 길가를 쓸고 신문도 구색 맞추어 놓는 등 아주 밝고 명랑하게 친절한 봉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들고 어떤 인연으로 커리스만 신문사에 잡역부로 취직되어서 조부께서 일러주신 교훈대로 살았습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가 무슨 일이든지 하기만 하면 그가 없었던 때보다 훨씬 눈에 띄게 모든 일이 잘 되어 그는 드디어 그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미국의 전국민에게 미칠 수 있는 온갖 대중 전달수단을 다 이용하여 자기의 일생 동안 그 교훈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타인을 위하여서 헌신과 봉사와 사랑을 할 때 자기 자신이 가장 빛나고 힘있는 인간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명령으로 남을 지배하던 나폴레옹 시대는 이미 지나간지 오래고 현대는 남에게 가장 봉사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현대 영웅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모두가 하나같이 태양에서 오는 7가지 색의 빛을 받으며 검은 물체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 태양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자기 존재와 미를 드러내고 또한 이 세상은 좀더 밝게 됩니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만물의 영장인지라 무생물이나, 식물, 동물에게는 없는 사랑을 갖고 천주님의 사랑을 반사하면서 사는 존재로 마련된 것입니다.

    검은색 물체는 햇빛을 반사 안하듯이 우리의 속이 검고 극단적이기 때문에 주위는 천주님의 사랑을 반사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주의 엄청난 저 십자가 사랑을 무조건 먼저 받고 이 세상 사는 보람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남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큰 실천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엄청난 사랑의 실천 방법이란 도시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항상 우리 일상생활 주변의 일을 비유로써 당신 사랑과 진리를 전달하셨듯이 우리도 같은 방법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제 아무리 엄청난 십자가의 사랑과 진리를 전달하려고 해도 이미 상대방이 갖고 있는 어떤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입장이 될 뿐입니다.

    예컨대 오늘 아침 신문에 난 어떤 사건을 읽어 본 사람끼리는 벌써 그 사건에 대해서 서로 통할 수 있는 어떤 면을 가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와 상대방이 서로 통할 수 있는 어떤 공통적인 것이 있어야지만 비로소 십자가의 사랑과 진리를 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공통된 것을 우리는 대중 전달수단이라 하며 신문, 라디오, 통신, 텔레비전, 잡지들인 것입니다. 어떤 대중 전달수단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남에게 전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 이기주의며 아니면 동면하거나 죽은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같이 행복하며 잘 살기 위해 정신없이 일하며 마치 물질적 유산만이 전부인 양 온통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쏟고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는데는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정신적인 유산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주께서도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우리들의 신앙도 굶으면 죽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은 영양실조에 걸려 있습니다.

    전에 예루살렘 성전 문전에 쪼그리고 앉아 “한푼 적선 합쇼”하면서 그 더러운 손을 내밀던 앉은 뱅이 팔을 성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잡아 일으켰습니다.


    “내게 가진 금은 보화는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을 주리라.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말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기적으로 그는 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와 같이 이웃 사랑에 불타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광경 안에서 우리는 참다운 교우상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다시 하게끔 기회를 주는 것이야말로 교우다운 인간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영적 재보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주의 말씀인 복음 성경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이정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음 성경이 여러분의 각 가정에 비치되지 않았다면 고통의 바다 위에 지도없이, 나침반 없이 떠가는 한 조각의 배처럼 우리의 목적지인 구원 항구에 도달할 길이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성경 속에서 우리 삶의 넓이와 폭과 깊이를 얼마든지 넓힐 수 있는 우리 생활의 원리를 찾아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눈멀고 귀먹고 벙어리되어 자기만의 옹졸한 세계에서 자아 만족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은 보고 듣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전에 어떤 영국 교황 대사는 영국 국민들에게 소리 높여 외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랑과 신앙의 진지를 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눈과 손과 발, 입 이외의 다른 입과 손과 발과 눈을 갖게 계시지 않습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방안에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외치고 등불을 모말 밑에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두어 온 집안을 비추라고 주께서 지적하셨습니다.


    입과 눈을 연장시키고 시간과 공간을 단축시킬 온갖 대중전달 수단을 이용할 줄 모른다는 것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입니까? 그것은 편지를 젆기 위해 한양천리를 걸아가는 시대적 착오가 아닙니까?

    “주여! 나는 눈을 가졌어도 보지 못하고 입을 가졌어도 말을 못하며 귀를 가졌어도 듣지를 못하나이다.”하고 주께 부르짖은 다윗 성왕의 한탄의 기구가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전에 성 베드로와 성 요한이 법정에 잡혀가서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써 말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당했으나 그들의 대답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외침은 “우리가 보고들은 바는 능히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전교하고 대중 전달수단을 사용할 이유는 우리가 주께 받은 엄청난 저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이나 좋은 것이나 사랑은 자기 자신을 발산합니다.


    천주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 생활 활동의 원천이며 우리 생활 개혁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무심히 접어들은 책 한 권으로 자기의 전 생활을 180도로 바꿔 올바른 길로 들어서게 된 사실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처음에는 군인으로서 싸움터에서 부상당해 어느 병상에 누웠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답답한 흰벽 뿐인 병실에서 우연히 얻어 보게된 교회 출판물 한 권을 읽어보고 그의 생활은 갑자기 혁신되었습니다. 제대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예수회란 새로운 수도회를 세워서 오늘날 수많은 학자를 내고 구라파나 미국에 수많은 일류 대학을 세워 교육사업을 하는 등 실로 교회의 진리를 가르치는 데 그 누구보다도 크게 이바지한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전세계 어느 나라 교회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사실을 우리나라 교회에서 찬연한 혜성처럼 빛나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보겠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선교사가 먼저 들어가서 전교되는 법인데 유독 우리나라만은 중국 사신들을 통해서 얻은 단 몇 권의 책만을 통해 깊은 잠의 어두움 속에 깃든 이 강산에 신앙의 빛이 들어왔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급기야는 그 진리로 인해 이 강산은 붉은 피로 물들였고, 그 피는 신앙의 씨앗처럼 꽃피고 열매 맺어 80만 영혼 속에 향그럽게 피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자랑스런 후예들이 교회 출판물에 무관심한대서야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우구스띠노처럼 “천주여! 당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당신을 알게 해 주십시오.”하고 열렬히 두 손 모아 기도하며 당신을 사랑하고 알기 위해 교회 출판물에 관심을 가질 것을 가슴 속 깊이 명심하십시다.


    우리는 단지 입술로만 하루에도 수없이 주의 기도를 바칠 때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하고 말하여도 만일 이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대중 전달 수단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없다면 대체 우리의 간절한 소망의 기도는 과연 얼마나 이루어지겠습니까?

    “주여! 나는 눈을 가졌으되 보지 못하고 귀를 가졌으되 듣지를 못하며 입을 가졌어도 말을 못하나이다. 주여, 내 눈과 귀와 입을 열어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애타게 간구하면서 열심히 일하십시다. 아멘

    5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나는 어떤 땅인가 ?

                                                           김현준 신부 


    술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우리 본당의 ㅎ자매님은 예수님과 남편의 닮은 점을 이렇게 비유했다. ① 주(主酒)님을 모시고 산다. ② 공치사를 매우 싫어한다. ③ 나더러 늘 깨어 기다리라 한다. ④ 주일만 되면 나를 서로 잡아끈다. ⑤ 나를 따르려면 종이 되라 한다. 때론 벗이라고 하지만. 참 재미있고도 의미있는 생활 속의 비유 이야기이지 않는가,

      

    신약성서 공관 복음(마태오 마르코, 루가)에는 약 40개의 ‘비유’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 중 마태오 복음 13장은 전체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 이야기이며, 씨 뿌리는 사람, 겨자씨, 밀밭의 가라지, 누룩, 보물, 진주, 그물의 비유 등 7개의 비유 이야기가 들어 있다.

    ‘비유(Parable)’란 말은 비교(比較), 병립(竝立), 수수께끼의 뜻을 지닌 희랍말 ’빠라볼레’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비유 이야기 속에는 항상 두가지 사실이 병립되고 있다, 즉 사람의 일상생활이나 자연의 어떤 사실과 종교적 신비나 교훈이 병립되고 있다,


    보통의 경우 종교적 사실은 상징적으로만 표현되고, 자연적 사실만 비유 속에서 뚜렷이 이야기된다. 비유 이야기 속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된 교훈이나 신비를 알아듣는 것은 청취자의 몫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라고 말씀하신다. 이렇듯 비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구체화시키고,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보지 못한 것을 보게한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오늘 연중 제15주일, 오늘의 복음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또 어떤 것은 돌밭과 가시덤불에,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 비유를 병립시켜보면 씨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고,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밭(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사람의 마음이다. 이 비유 이야기는 나의 신앙 생활에 어떤 반성과 교훈을 주고 있을까? 그렇다. 길바닥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나의 편견이나 고집으로 마음이 폐쇄되어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 올 틈이 없게 되는 경우이다, 피정이나 신자 교육은 ‘그것쯤’이 되어, 말씀을 들을 기회  마저도 빼앗긴 메마른 상태인데, 그것도 모르는 경우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무미건조해서 사막을 걷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돌밭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한번 열성을 내다가 곧 식어버리는 경우이다. 나를 알아주고 대우해주고 챙겨주는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계시면 열심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들해지는 경우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취미나 장식품으로 치부되는 경우이다.

    가시덤불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너무 잡다한 것에 분주하여 하느님을 늘 뒷전에 두는 경우이다. 재미있다는 것, 유익하다는 것의 유혹에 빠져들기도 하며, 또 재미로 미신이나 점보는 곳에 흥미를 갖거나 따라가는 경우이다, 반면 어쩌다 한 선행에는 공치사가 따른다.

      

    오늘 비유 말씀의 핵심인 ‘씨’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생황 속에서 ’씨’를 깊이 묵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다.  씨앗은 아주 조그맣다. 하늘나라의 말씀이 당초에는 작은 것에서 시작되는 것을 뜻한다. 씨는 작고 주름지고 못생겼다. 잘 모르는 사람은 쓸모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모를 때에는 그 말씀은 쓸모 없게 여겨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실한 씨안 이었기에,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추수 때 보면, 모든 씨앗이 다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좋은 씨앗, 알차고 실한 씨앗만이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처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려면 우리도 그리스도 같은 씨앗이 되어야 한다. 죽은 씨앗, 쭉정이라면 부활을 못할 것이다,


    씨앗이 열매 맺으려면


    씨앗이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땅에 묻혀 죽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씨앗이다. 요즘은 우리의 속  마음과 생각은 산과 바다로 달려가고, 휴가와 놀이 계획으로 분주해있는데, 예수님은 씨 뿌리고, 애써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 비유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고 있다.


    좋은 밭은 놀리거나 묵히는 밭이 아니라 갈아엎어 결실을 준비하는 밭이다, 우리 본당의 ㅎ자매님은 예수님 닮은 남편을 위해 늦게까지 깨어 기다리기도 하고, 시중드는 종 뿐만 아니라 간호사가 되기도 하며, 그 방면의 도사(?)가 되어 좋은 기정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산과 바다의 이 여름에도, 아침 저녁기도 주일미사, 성서를 읽는 신앙생활의 리듬을 잃지 않는 좋은 땅의 넉넉함을 간직하면 어떨까?










    6        연중 제15주일  마태 13, 1-23 (가) 씨 타령할 수 없다

     최기산 신부


     들녘에 서면 올해의 벼농사가 풍작임을 느끼게 된다. 어디를 보나 푸르름이 가득하다. 저마다 멋진 열매를 맺으려고 위로 옆으로 뻗어나고 있다. 우리나라가 기계로 농사를 짓게 된 것은 불과 20여년 전부터다. 그전에는 손으로 모를 심었다. 참으로 힘이 많이 들었다. 모내기철에 비가 오고 나면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논에 나가서 모를 심어야 했다. 그래서 못방학이라는 것까지 있었다. 하루종일 업드려서 모를 심고 나면 그야말로 허리가 끊어질 정도였다. 어휴! 소리가 절로 나왔다. 과학문명의 발달은 인간을 살 맛나게도 만든다는 이야기가 예삿얘기가 아니라는 것은 농기계의 발달이 증명한다. 기계 한대로 수십명이 엎드려서 하루종일 일할 분량의 일을 거뜬히 해치우기 때문이다.


    2000년전에 씨뿌리는 기계가 발명되었다면 오늘의 복음도 바뀌었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씨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밀 농사법을 알아야 할 것이다. 빵이 주식이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씨뿌리는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우리처럼 우선 땅을 고르고 씨를 고랑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고 땅을 갈아 덮는 식이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낭비가 심한 방법인 듯 싶다.


    왜냐하면 씨가 땅속깊이 파묻히기도 하고 바람에 날라 가버리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게으른 사람은 뿌릴 씨를 메고 다니거나 안고 다니면서 뿌린 것이 아니고, 희한한 방법으로 뿌렸단다. 나귀등에 씨앗자루를 얹고 나서, 자루에 작은 구멍을 하나 낸 다음, 나귀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것이었다. 나귀 궁둥이만 때리고 있으면 자연히 씨앗은 이리저리 떨어졌다. 분명히 어떤 씨는 길바닥에, 어떤 씨는 돌 위에, 어떤 씨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새가 와서 날름 집어먹을 수 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생존경쟁을 하는 새들에게 반반하게 닳아빠진 길 위에 있는 씨는 순식간에 포착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 밭에 하느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졌으나 뿌리가 내리기 전에 사탄이 낚아채 가서 냉담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세례까지 받았지만 얼마 뒤 ꡒ성당에 다니면 밥이 나오냐, 술이 나오냐?ꡓ면서 완전히 악한생활로 빠져버려 하느님과는 이별하는 사람을 말한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은 나왔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경우인데 환난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하느님을 배반하는 사람을 말한다. ꡒ하느님을 믿어봤자 무슨 소용인가? 다른 신을 찾아보세ꡓ라고 노래하면서 세상천지를 다 누비고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세례를 받은 다음 토끼가 경주하듯 그렇게 내달리는 사람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성당을 드나들고 묵주는 손에서 떼어놓지 않는다. 그렇게 열열히 믿던 사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솜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나일론은 얼마나 질긴가? 비바람이 몰아쳐서 젖고 또 젖어도 풀어지지 않는다. 땅에 묻어도 그냥 그대로 질긴 것이 특징이다. 사람들은 흔히 ꡒ나는 나일론 신자입니다ꡓ라고 말한다. 나일론이 얼마나 질긴 줄이나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주변의 가시덤불에 덮여 도저히 열매맺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세례를 받긴 받았으나, 산도 가야지, 바다도 가야지, 운동도 해야지, 파티도 가야지, 술도 마셔야지, 도대체 죽을래야 죽을 시간이 없다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런 사람에게 성당에 갈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기도할 시간은 물론이요 성서보는 시간도 있을 수 없다. 그에게는 ꡒ혹시나 죽기 전에는 시간이 날 것 같으니까 그때나 성당에 열심히 다녀보자ꡓ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마음 속에, 가슴속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거나 풍성한 열매가 맺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마른나무에 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오늘 복음의 핵심은 첫째, 뿌려지는 씨앗은 좋은 씨고 어디든 풍성하게 뿌려진다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은 어디든 풍성하게 뿌려지지만 그 결과는 각자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말씀의 씨앗을 얼마나 잘 키우고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게 했는지에 따라 심판 때에 희비가 가려진다.


    둘째, 하느님께서 풍성히 뿌려주시는 말씀의 씨앗은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의 밭이 길바닥 같거나 돌밭 같거나 가시덤불 같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것에 연연하기보다는 좋은 밭에서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거둔다는 확신이 들어있는 비유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더러 ꡒ그대들의 마음 밭이 길바닥 같거나, 돌이 가득하거나 가시덤불이 있다면 어서 갈아엎고 뽑아내고 매만져서 옥토로 만들라ꡓ고 독촉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씨앗이 아무리 좋아도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그냥 되지 않는 것을! 악천후와 벌레들과 싸워야 한다.


    매해 우리는ꡐ올해는 대풍입니다ꡑ라고 호들갑을 떨다가 끝판에 몰아치는 태풍에 ꡐ중풍ꡑ이 되어버리는 경우를 경험한다. 결국은 풍성한 결실은 인간만의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의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온갖 사탄의 유혹을 견디고 승리해야 한다. 기도와 희생, 봉사의 거름으로 보양되어야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이다. ꡒ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ꡓ(요한 15, 5)








    7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말씀에 귀 기울이면

                                                                 함세웅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하는 점과 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정녕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왔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바로 복음성서 말씀의 독특한 점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다른 일반서적과 달라 지식이나 소식을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좀더 깊고 높은 것을 깨우쳐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책 목록이나 백과사전을 통하여 지식을 터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나 땅에 심어진 씨앗과 같습니다. 그 말씀은 무엇인가를 변화시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 있는, 즉 생명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바로 다른 모든 생물체와 같아, 자기의 생명을 지탱하고 키워 나갈 조건과 보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양 섭취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바로 씨앗이 심어진 밭입니다. 이 밭에는 거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이 밭을 소홀히 가꾸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바쁜 사람들입니다. 바쁘고 분주하다는 것, 이것은 현대인 모두가 지닌 어려운 문제이며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을 성가시게 함으로 또 분주합니다.

    과외 수업으로 학생과 교사들도 또한 바쁩니다. 특별 근무 또는 출장 등으로 모든 공무원과 회사원들도 분주합니다. 국가 고시, 진급 시험 등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또 모두가 바쁩니다. 바로 이러한 주위 환경 때문에 모두 피곤하여 명상이나 기도를 멀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조용히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로서, 명상에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신비의 심연을 깨달아야 합니다. 삶의 의미와 세상과 우주의 기원 그리고 하느님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서 이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올 여름엔 더욱 근심 걱정이 많습니다. 물가도 오르고 세금의 부담은 더욱 커지고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포자기의 실망만이 맴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 그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에 충실하고 성실한 것입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계시의 하느님이 바로 나를 창조하셨고 그분이 바로 ‘아버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외아들 예수를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의 생애에서도 기쁨을 가르쳐 주셨고 죽으셨지만 부활로써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일러주셨습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나는 매우 귀중한 존재입니다. 나를 하느님 이 필요로 하십니다.

      

    극도로 문명이 발달했다는 현대에 살면서 우리 모두 바쁘게 뛰며, 분주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핑계삼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을 잊으려고 합니다. 때로는 술을 마시면서, 때로는 잡담으로, 때로는 형식적 의례적인 방문으로, 때로는 식도락의 취미로, 때로는 운동경기의 관람으로 자신이 처한 심각성을 잊으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부류의 사람을 지칭하여 예수께서는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씨앗은 세상에 대한 근심 걱정, 재물의 유혹으로 질식됩니다.

    신앙인은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헤쳐 나가려는 노력, 그 노력의 비례에 따라 결실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기 위해 조용한 시간, 자신만의 시간을 갖도록 해야겠습니다.

    재물, 명예, 지위로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기 위해 영

    원과 무한이라는 것을 껴안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의 기도를 올리며, 유익한 교회 서적 또는 종교적 대화, 친분 있는 성직자와 수도자 또는 교우들과의 대화를 통해 하느님을 가까이 하도록 노력해

    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들을 수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밭을 쟁기로 갈아서 영신의 수확을 얻는 것입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바로 우리 모두를 보살피시며 염려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의 삶은 원기와 생기를 되찾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되찾아 힘차게 앞으로 계속 행진합니다. 삶은 의미가 있기 때문에……










    8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말씀의 씨를 뿌리는 사람

                                                                   허영업 신부


    위대한 사상가이며 신학자, 그리고 음악가이며 의사인 슈바이처 (7875-1765)가 아프리카로 떠났을 때는 이미 마흔이 다 되었을 때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편안하고 여유 있게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굳이 사서 고생을 한다며 만류했다. 당시 아프리카는 거의 유럽의 식민지로 미개인들이 사는 곳이라 생각하던 때였다. 슈바이처 박사는「내가 의사가 된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 아프리카에는 의사가 없어서 사람들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작은 힘이지만 그들의 목숨을 건지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연설했다


      슈바이처가 처음 도착한 곳은, 몹시 더운 지방으로 온갖 독벌레와 세균이 들끓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의사도 약도 없이 버려져 있었다. 슈바이처는 자신의 재산을 다 털어서 병원을 지어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항상 웃는 얼굴로 흑인들을 위한 진료에 평생을 바쳤다.


      1952년 슈바이처 박사는 노벨상을 탔을 때도 상금 전액을 모두 나병환자를 위해 썼다. 그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생명체이기에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생명을 아끼고 지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해야한다고 가르쳤다. 어떻게 보면 작은 그의 활동과 생각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 속에 큰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비유


      예수님은 군중을 가르치실 때 유대 랍비들처럼 비유를 들어 곧 잘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사실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주제였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보면 하느님의 나라를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신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대한 전도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실패와 좌절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선포와 전도는 끝내 풍성한 결과를 낼 것이라는 확신과 희망을 갖고 있다. 이 비유는 예수님 당시 뿐 아니라, 초대 교회의 상황에 자신의 처지에 더 잘 맞는 비유였을 것이다.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희망과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열심히 말씀을 선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미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처럼 시작은 작고 미비하지만, 하느님의 다스림은 큰 결과를 맺게 될 것이니 절망하지 말라는 훈계와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네 부류의 사람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밭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청중을 의미한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따라 결과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말씀은 같은 것이지만 듣는 자의 마음자세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개개인의 탓에 달려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당연히 네 번째 부류의 사람들처럼 좋은 땅이 되라고 훈계하고 있다. 즉 열린 마음으로   겸손되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생활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 인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이다. 또한 동시에 말씀의 열매를 맺어야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바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삶은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고,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봉사와 희생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도 훌륭하게 씨앗을 뿌리는 행위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그리고 거두어야 한다.


      하루를 지내면서 내 생활 속에서, 내 가정과 사회 속에서 어떤 씨앗을 뿌리며 지냈는지 반성해 보아야할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그리스도 말씀의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거두리라는 피망과 믿음을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지난 한 주간 나는 어떤 씨앗을 뿌리며 생활했는가?






    9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씨 뿌리는 사람

    최인호 작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만종’의 작가 밀레(Millet, 1814-1875)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파리로 진출한 밀레는 도회적인 그림으로 출세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 34세이던 1848년 어느 날, 한 청년이 가게에 걸려있는 그의 그림을 보고 “밀레는 벌거벗은 여자만 그리는군” 하는 말을 듣고 밀레는 깊은 수치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그릴 것은 도시 여인의 나체가 아니라 농민들의 가난한 생활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파리 교외 바르비종으로 이사하고, 빈곤과 싸우며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있는 농민들의 모습과 자연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밀레가 바르비종으로 이사해서 그린 첫 작품이 바로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해질 무렵, 모자를 쓴 건장한 농부가 들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웅큼 씨앗을 대지를 향해 파종하는 힘찬 모습을 통해 밀레는 비로소 자신이 그려야 할 소재가 무엇인가를 깨달아 ‘이삭줍기’ ‘양치는 소년’ ‘만종’ 등 많은 걸작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밀레는 농민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감명을 준 위대한 화가입니다. 특히 하루의 일을 끝내고, 노을진 지평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를 드리는 농민 부부의 모습을 그린 ‘만종’은 가난한 농촌 속에 종교적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는 화가에서 인생의 창조자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밀레가 이렇게 변했던 것은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에서의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밀레는 ‘씨 뿌리는 사람’을 통해 농부들이 밭에 씨를 뿌리듯 화가 역시 예술의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자신이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말씀의 씨앗을 뿌렸는데도 어떤 것은 새들이 쪼아먹고, 어떤 것은 말라버리고,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버린다는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가시덤불과 같은 이 세상의 온갖 걱정과 유혹, 새와 같은 악마, 뿌리내리지 못한 얕은 신앙을 극복하고, 그 말씀의 씨앗을 잘 듣고 깨달아 큰 열매를 맺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디 주님뿐이겠습니까. 밀레도 자신이 미(美)의 씨앗을 뿌리는 구도자임을 깨달아 마침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었듯이 우리도 모두 각자 나름대로 씨 뿌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씨앗을 뿌린다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라지의 씨앗을 뿌린다면 가라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우리가 인생의 텃밭에 뿌리는 씨앗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밀레가 그린 ‘씨 뿌리는 사람’처럼 우리도 모두 봄에 뿌린 그대로 가을에 거두는 인생의 농부들인 것입니다. 











    10         연중 제15주일  마태 13,1-23 (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교구주보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뜻을 밝히는 데 심혈을 기울이셨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란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말이기 때문에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써 설명하셨다. 농업, 목축업, 어업, 상업 등 일상생활에서 따온 이야기로 비유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매우 자연스럽다.

      예수께서는 파종이 실패한 경우를 세 가지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에 씨앗이 떨어진 것으로 이야기하신 다음 파종이 성공한 경우를 말씀하신다. 어떤 씨앗 한 알이 뜻밖에 “좋은 땅”에 떨어져 잘 자라서 이듬해 성공한 경우를 짤막하게 말씀하신다. 어떤 것은 30개 어떤 것은 60개 어떤 것은 100개의 열매를 맺는다고.

      

    예수께서 서기 27년경 갈릴래아에서 활약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분 주위에 모여들었다. ‘오병이어’의 사건이 그 절정이라 하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예수께서는 반대자들로부터 모함을 받으셨고 제자들마저도 하나둘씩 떠나갔다(요한 6,60). 서기 30년 4월 초순 예수께서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 때에는 단지 열두 제자와 갈릴래아 여자 몇 사람만이 동행했다.


    예수님의 선교가 이렇게 실패하자 제자들은 실망과 좌절을 느끼면서 스승인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청했을 것이다. 이때가 예수님의 공생활 중반 무렵인데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것이다. “저 밭에서 씨 뿌리는 농부를 보시오. 밭에 길이 나 있고 온통 돌밭인데다 잡초마저 무성합니다. 이런 밭에 뿌려진 씨앗들은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없어져 버리지만, 이를 알면서도 저 농부는 큰 기대에 부풀어 씨앗을 뿌립니다. 그랬더니 뜻밖에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큰 결실을 맺어 30배, 60배, 100배의 소출을 내게 되었습니다. 나 역시 지금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큰 결실을 맺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속해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는 하느님 나라 운동이 지금은 실패를 거듭하지만 언젠가는 큰 성공을 거두리라는 확신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하느님께 희망을 걸어라.” 이것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담긴 의미이다.

      

    인간은 누구나 모든 일에 성공하고 싶어하지만 실패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복음을 전하다 보면 성공보다는 실패를 맛보기 십상이다. 하느님 나라 건설에 전력을 다하셨던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반대에 부딪치셨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이들의 배신마저도 겪으셔야 했다. 그러나 그분은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와 희망으로 좌절하지 않으셨기에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실 수 있었다. 쉽게 좌절하는 우리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큰 위로가 된다.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계속해서 씨앗을 뿌려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결실을 맺게 해주실 것이다.”                          


  4. user#0 님의 말: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김기진 신부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비유의 해설이 함께 있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의 선포로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과 교회를 통해서 땅에 씨를 뿌리듯이 선포되지만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자세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냅니다.

    오늘 복음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4가지 자세를 제시합니다. 우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과 자세가 길과 돌밭 그리고 가시덤불이 있는 땅과 같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고 세상 걱정과 유혹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은 그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어렵게 됩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좋은 땅과 같이 잘 준비된 이들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은 그 뿌리를 내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우리들의 자세에 따라 엄청난 다른 결과를 초래함을 듣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과 축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땅을 일구는데 소홀하곤 합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잠시 언급하고 있듯이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지 못하는 마음이 무딘 백성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지금 나의 마음과 자세는 어떤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틀림없이 하느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우리들에게 말씀과 축복을 베풀면서 우리들에게 씨뿌리는 농부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들의 마음과 자세를 하느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땅이 되도록 우리 스스로를 잘 준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는 그 작은 시작을 하며, 더 나아가 백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이 거룩한 미사성제를 통해 우리들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눈과 귀를 열어 우리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싹이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텃밭 

     박제준 신부 

    우리 성당은 연초에 성전 부지를 구입했습니다. 다른 대도시 본당들에서 보기에는 그렇게 크지 않은 땅입니다. 교우들과 함께 기뻐하며 이 땅을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지 함께 머리를 모았습니다. 일부분은 족구장을 만들고, 한쪽은 텃밭을 가꾸기로 했습니다.


    흙보다 자갈이 많은 땅에 자갈을 고르고, 거름도 듬뿍 뿌리고, 곡괭이로 땅을 뒤집었습니다. 골을 내고, 이랑마다 구역의 이름을 붙여서 팻말을 달았습니다. 구역마다 옥수수며, 고구마, 고추, 상추, 쑥갓 등 욕심도 참 많았습니다. “삼겹살 파티를 하려면 상추, 쑥갓, 고추는 꼭 있어야 해요.” 아직 심지도 않았는데, 벌써 파티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비가 오고, 땅에 거름기가 스며들며, 땅이 제법 기름져 보였습니다.


    이제 모종을 사다가 심어야 할 차례, 구역마다 준비한 모종을 정성껏 심었습니다. 풍성한 소출을 기다리며, 꿈에 부풀었습니다. 농부의 마음이겠지요.


    몇몇 교우들은 텃밭에 모종이 잘 자라는지 매일 출근 도장을 찍으십니다. 왠지 잡초가 나면 뽑아야 할 것 같고, 누가 모종에 해를 끼치지는 않았을까 걱정을 하면서 말이지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정성껏 심어놓은 모종들이 하나 둘씩 말라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비가 안와서 그런가 싶어 매일 같이 물을 퍼다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이럴수가… 안타까운 마음에 모종을 살려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죽은 자리에 모종을 또 사다 심었습니다. 이번에는 죽지 않고 잘 살아가기를 기도하면서 말이죠. 죽고, 다시 심기를 여러 차례, 죽어가는 모종들의 모습을 보고 있기가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나름 전문가의 견해로는 거름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는 진단이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이제는 장마가 오면서 제법 잘 자란 텃밭을 볼 수 있습니다.


    텃밭을 가꾸는 교우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의 씨앗을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뿌리셨습니다. 아마도 큰 기대를 가지셨겠죠? 잘 자라서 삼겹살 파티하게 될 날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죽어버리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안타까우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뿌리신 복음의 씨앗이 잘 자라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자라지 못해 죽어버리면 다시 심으시겠죠. 잘 될 때까지….


    오늘도 30배, 60배, 100배의 소출을 기대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계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 

     권상목 신부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7월의 무더위가 한창이지만 바쁜 농사 일거리로 많이 분주 하시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한 주일을 무사히 보내고 다시 제단 앞에 모인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여러모로 위로의 말씀을 들려 주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벗삼아 새로운 한 주일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말씀인 씨앗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일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씨앗으로 표현하셨는데, 그 씨앗의 좋고 나쁨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단지 땅의 상태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씨앗은 그 자체로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씨앗을 품는 땅의 상태였는데, 그 땅의 상태가 길바닥이냐? 돌밭이냐? 가시덤불이냐? 아니면 좋은 땅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땅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이스라엘의 농촌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농사를 지을 때 돌을 걷어내고 땅을 갈아 엎은 뒤에 씨앗을 뿌리지만 반면 이스라엘에서는 먼저 씨를 뿌리고 나서 돌을 걷어 내거나 땅을 손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씨를 뿌린 뒤의 땅이 충분히 길바닥이 될 수도 있고, 돌밭이 될 수도 있고, 가시덤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땅을 먼저 손질하고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먼저 뿌리고 나서 땅을 손질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길바닥이란 사람들이 밭을 가로질러 다니는 바람에 생겨난 길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그 길은 딱딱하기 마련이었고,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바람에 씨앗이 발에 짓밟히거나 뭉개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도 날아 와 그 씨앗을 먹어 버릴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씨앗을 빼앗아 가는데, 여기서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경우란 그 말씀이 마음에 담겨지지 않은 경우를 말합니다.


    둘째로 돌밭에 떨어진 경우는 말씀이 마음에 담겨져 있긴 하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 자들은 환난이나 박해 같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곧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뿌리 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말씀을 깊이 새기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더 필요합니다.


    셋째로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말씀을 듣긴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 경우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유혹들이 많습니다. 사실 우리들 중에 그 누구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갖가지 걱정과 유혹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겠습니까? 그것은 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을 말하는데, 그런 사람은 백 배 혹은 예순 배 혹은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좋은 땅이란 어떤 땅을 말하겠습니까? 좋은 땅이란 손질을 잘해 놓은 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땅을 보면 저절로 좋은 땅이란 없습니다. 설사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하더라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황폐한 땅이 될 것이고, 아무리 황폐한 땅이라 하더라도 거름을 주고 손질을 하면 좋은 땅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이란 결국 관리를 잘해 놓은 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거름도 많이 주고, 잡풀도 뽑아내고, 돌맹이도 거두어 낸다면 좋은 땅이 될 것이고 여기서 많은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마음의 밭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밭이 어떤 상태인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내 마음의 밭이 좋은 상태이길 바란다면 잘 관리를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관리를 한다는 것은 딱딱한 상태를 잘 갈아 엎어 부드럽게 만드는 일을 말합니다. 좋은 땅이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운 땅을 말합니다. 그래야 씨앗을 잘 품을 수 있습니다. 반면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우거진 땅의 공통점은 딱딱하고 거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씨앗을 잘 품을 수가 없습니다. 씨앗을 품으려면 늘 부드러움을 간직해야 합니다. 좋은 땅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엘리야 예언자가 호렙산에 올라가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데, 하느님께서는 그 산 위에서 부는 거센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고, 지진 가운데서도 계시지 않았고, 거센 불길 가운데서도 계시지 않았고, 그 불이 지나간 뒤에 들려온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 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열왕 19,9).


    부드러운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러운 마음의 상태에서만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조용하고 그 마음의 밭이 부드러우면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의 씨앗을 잘 품을 수 있습니다. 거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길 상태가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 들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면 내 마음도 부드럽고 고요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마음의 밭을 한번 둘러봅시다. 그리고 돌과 가시덤불이 있다면 그것을 걷어 내고 손질을 하도록 합시다. 내 마음의 밭을 잘 손질해 놓을 때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 우리들에게 들려 주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많은 열매를 맺어 나가도록 합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23). 



    대답 좀 합시다! 

    박석천 신부 

       

    TV를 틀었다. 예능프로가 방영 중이었다. 그 예능프로의 MC는 유재석이었다. 다른 채널을 돌렸다. 역시 유재석이었다. 케이블 TV로 돌렸다. 지난 프로이긴 했지만 MC가 유재석이었다. 좀 어이가 없긴 하였지만, 국민 MC답게 특유의 말솜씨와 재치로 진행을 흥미롭게 잘한다. 어쩜 저렇게 사람들을 휘어잡으며 진행을 잘하는지 부럽기까지 하였다.

    가끔, 기독교 방송(CBS)을 보기도 한다. 어느 유명한 목사가 설교 중이었다. 신도들은 그 목사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감흥이 되어,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멘, 할렐루야’하며 소리높여 외치고 있었다.


    다른 여러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방청객과 잘 호흡하는 MC들을 보면 배울 점이 많은 것 같다. 비록 방송이긴 하지만 MC들의 작은 질문 하나에도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방청객들이 성당의 신자들의 모습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긴다.


    이렇게 부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은 좀처럼 대답을 잘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답 좀 해 주세요.”라고 이야기해야 그나마 마지못해“네”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강론 때나 교육 중에 신자들 목소리 듣기가 참으로 힘들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과연 어떠한 심정으로 군중들에게 복음말씀을 선포하셨을까?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예수께서는 군중들 앞에 서시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 말씀을 쉽게 설명하고 계신다.


    오늘 복음말씀을 묵상하노라면, 예수님의 답답한 심정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백성의 마음이 무디고 귀와 눈이 닫혀진 상태이기에 열매를 쉽게 맺을 수 없다는 그 아쉬움과 답답한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토로하고 계신다.

    혹시 그 당시에도 군중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던 건지…. ?!

    그래도 주님께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와도 그분이 뜻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씨를 뿌리신다. 지금도 당신의 대리자인 사제들을 통해 씨를 뿌리고 계신다. 설령 그 씨가 사라지거나 말라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씨를 뿌리신다. 이젠 열매를 맺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각자의 몫에 달렸다.


    주님의 씨앗인 말씀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선 가장 먼저, 우리 자신이 적극적인 태도로 그 말씀을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오늘부터라도 주님의 씨앗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 말씀에 기쁘게 응답해 보도록 하자. 한번 맞장구를 치며, “예, 그렇습니다!”라고 외쳐 보자. 겉으로 하기 힘들면, 속으로라도 대답 좀 하고 살자!


    희 망 별 곡 

      이재희 신부 

       

    삶에 대한 가치관이 우뚝 서 있어도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가슴에 품어온 이루고 싶은 소망들을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으로 하루를 살다가도 때로는 모든 것들이 부정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희망을 품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비상을 꿈꾸는 시간입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학살 할 때에 시장에서 한 노인이 빈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것을 사 가세요!”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니, 노인장! 아무것도 팔 것이 없지 않소?” 그러자 노인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나는 희망을 팔고 있소. 우리 민족의 꿈과 비전을 팔고 있소. 희망을 사가시면 반드시 희망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희망이 무엇이요 나에게 파시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의지하고 그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소중한 것입니다. 희망!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요, 능력이며,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희망의 시작이요 과정이요 영광의 열매입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의 끝자락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희망을 지니고 살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야기는 예수님 공생활 말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떠나고 당신이 행하시는 하느님 나라 운동이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을 맞습니다. 남겨진 사람은 열두 제자들과 몇몇 여인들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중단해야 하지 않느냐는 절망의 이야기가 들려왔고, 그것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꿈을 말씀하십니다.


    씨앗은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일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많은 반대와 거절을 당함으로써 분명한 실패처럼 비춰지지만 성공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씨앗의 생명력을 질식시키려는 반대 세력들도 있지만(길바닥, 새들, 돌밭, 가시덤불) 경험이 풍부한 농부는 그래도 씨앗을 뿌리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백배의 열매를 맺는 한톨의 씨앗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은 희망입니다. 절망의 나락에서도 그분께 대한 희망이 있다면 그 절망도 비상을 꿈꾸는 희망을 품는 시간일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로마 8,24)


    “나는 매일 몇 톨씩의 씨앗이라도 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때가 되면 누군가는 거두게 될 테니까.” 요한 23세 교황 <말씀이 나의 두 손에> 중에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3,9) 

      허홍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먹어 버렸고, 어떤 것은 돌밭에 떨어져 뿌리가 없어 말라 버렸고,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숨이 막혀버렸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비유에서 뿌려지는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뿌려지는 곳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즉,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내안에 뿌려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내가 좋은 땅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만일 땅이 좋지 않다면 씨앗이 뿌려져 자라기에 좋은 땅으로 일구어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좋은 땅은 있지 않습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해도 아무런 관리 없이 항상 좋은 땅이 되지는 않습니다. 지속적인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땅이 너무 마르지 않도록 물을 공급해 줘야 하고,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아주고,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화해야 합니다. 뿌리내림을 방해하는 교만함과 미움의 돌이 있다면 골라내야 하겠고, 재물과 명예에 집착하는 가시덤불이 숨을 막는다면 걷어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땅을 일구어 많은 열매를 맺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열매를 맺고 싶으십니까? 내 안에 뿌려진 씨앗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 삶에 생명력을 더해 주시는 하느님의 씨앗이므로 사랑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내 입으로 하는 말이 칭찬과 격려가 되고, 내 손발이 하는 행동이 따뜻한 도움의 손길과 발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언행(言行)으로 사랑을 나누고, 서로에게 희망을 주는 생명의 열매를 맺을 때, 우리의 삶은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과 같이 나의 메마른 땅을 촉촉이 적셔주시고자 내려옵니다. 내안에 생명의 싹이 움트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서 자란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써 열매를 맺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루카 8,15)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 

      정태현 신부 

    살다보면 앞뒤가 꽉 막히고 사방이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답답할 때가 있다. 바빌론 침공이라는 이스라엘의 참담한 역사를 예견했던 예레미야는 그런 답답함을 평생 안고 살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공포와 폭력이 사방에서 몰려온다고 외쳐댔지만, 동족 전체가 오히려 그에게 “사방에 공포”(마고르 미싸빕)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놀려대면서 그를 박해하였다.


    죽음보다 더 큰 공포와 폭력이 있을까? 바오로 사도는 아담의 뒤를 이어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닥쳤다고 죄와 죽음을 연결시킨 유다교의 전통 사상을 재확인한다.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아담은 그리스도의 예형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류에게 죽음이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모든 인간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보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훨씬 더 위대하다. 아담의 경우에는 한 개인뿐이지만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로마 5,15).


    아담이 가져온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이므로 치명적인 것이 아니다. 정말 무서운 죽음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결별인 지옥이다. 묵시록 저자는 이를 두 번째 죽음이라고 불렀고(묵시 2,11; 206), 바오로 사도는 죽음의 독침이라고 불렀다(1코린 15,5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육적이든 영적이든 인간 생명에 대한 주권을 쥐고 계신 분이 하느님 아버지이심을 사도들에게 일깨워주신다. 정말 두려워할 것은 지상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다. 그런데 그분은 죽음의 독침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인자하신 아버지시므로 그분을 믿고 의지하면 죽음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예레미야가 폭력으로 완전히 사로잡힌 막막한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여유를 보인 까닭도 만군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다.



    마태 13, 1-9. 이사 55, 10-11. 

      서공석 신부 


    예수님은 일상생활에 비유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즐겨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농부가 밭에 씨 뿌리는 일에 비유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돌밭에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의 선포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이 비유 말씀을 회상하면서 그들 자신은 과연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인지를 반성하였습니다.


    초기 교회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복음을 가르치셨지만 실패자가 되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그야말로 씨 뿌리는 사람과 같이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선포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뿌리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분의 노력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무위(無爲)로 끝난 것같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두고 가르치셨지만, 그 가르침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교회라는 별도의 종교 단체로 발전하기에는 불충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라지신 후 제자들은, 그분이 살아 계실 때 하시던 대로, 유대교 회당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직한 예수님에 대한 기억은 차차 그들의 언행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교 회당에서 추방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교 당국이었고, 그 제자들을 내어 쫓는 유대교 회당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신앙 공동체는 안식일 다음날, 곧 오늘의 주일에 따로 모여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에 대해 회상하고, 그분의 최후만찬을 기념하여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그들의 모임은 대단히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건물도 조직도 없었습니다. 집회는 그들 중 주거 공간을 여유 있게 가진 사람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서로 형제자매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서로 신뢰하고 봉사하며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집회에서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고 그 회상한 바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나눔이 발전하여 오늘 우리 미사의 말씀의 전례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나눈 식사가 형식을 갖추어 오늘 미사의 성찬전례가 되었습니다. 오늘 교회의 미사전례는 이렇게 시작하고 발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삶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사람이 그 함께 계심을 살기 위해 필요로 하는 행동지침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제물봉헌은 하느님의 시선에서 자기 노동의 대가와 자기 이웃을 바라보고 그 노동의 대가를 이웃과 나누라는 메시지가 담긴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불행히도 율법과 제물봉헌을 사람들을 단죄하는 수단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였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을 구실로 사람들을 단죄하고, 제관들은 제물봉헌을 빌미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메시지는 불행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사람을 버리고 단죄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자각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루가 4,19) 일이었습니다. 신앙은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 봉헌에 충실하여 자기 한 사람 죄인이 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의 축복을 받아내는 길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 사로잡힌 이, 눈먼 이, 억눌린 이들”(4,18)을 위해 은혜로운 사람이 되는 데에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신앙인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은혜로우신 분이기에 그분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은혜로운 실천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신앙인은 그 실천으로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루가 6,21-21)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잔치에 자주 비유하셨습니다. 잔치는 참여한 모든 이가 베풀어진 것을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장소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받아들인 사람은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자기 주변과 함께 나눕니다. 그래서 신앙은 잔치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키고 바칠 것을 강요당하는 백성은 목자를 잃은 양들과 같은 측은한 군중이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보며 측은히 여기셨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지쳐서 풀이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9,36). 인간의 슬기로움과 똑똑함은 사람을 차별하고 억누르고 풀을 죽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슬기로움과 똑똑함의 산물이 아닙니다.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한테는 감추셨다.”(마태 11,25)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하시는 은혜로운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은혜로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돌아가셨듯이, 초기 신앙 공동체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움 앞에서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들이 뿌리는 말씀의 씨는 좋은 땅을 만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하는”(로마 4,18) 믿음이었습니다. 신앙은 권위도 아니고 허세도 아닙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 은혜로우심을 스스로 실천하여 그 신뢰를 자기 삶의 현실로 만듭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뿌려야 하는 씨는 사람들이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대면하게 하는 말씀과 실천입니다. 우리의 말과 실천은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일으키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일하실 것을 비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눈에 결실을 맺지 못하는 실패와 같이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은 비옥한 땅을 만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이사야서(55,10-11)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야 만다.’ 예수님 안에 보이는 하느님의 말씀과 실천을 우리가 뿌리면. 그것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무위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


    말씀 깨닫기! 

      박우성 신부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어떤 것들은 길바닥에, 어떤 것들은 돌밭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그리고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참으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마태13,23).


    말씀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번 반복해서 읽고 또 읽습니다. 소가 되새김질 하듯이, 말씀을 씹고 또 씹어 단물이 날 정도로, 한 말씀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도록 성령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되돌아보며, 오늘 유난히 마음에 와 닿는 한 말씀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 말씀을 깨닫기 위해, ‘좋은 땅’이라는 말씀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는 악한 자를 물리치고, 환난이나 박해를 잘 극복하며, 세상 걱정이나 재물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한 달 전에 우리 묵호본당은 설립 6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습니다. 제가 묵호본당에 부임하면서 60주년을 준비하기 위해 내건 사목지침은 ‘말씀 깨닫기!’입니다. “주일 복음을 열 번 읽고, 한 번 쓰고, 실천하기!” 맨 처음 신자들의 반응은 별로였습니다. 형제들은 냉담하기만 하였습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났습니다. 적어도 주일 복음을 한 번 이상은 읽거나 필사하는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말씀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떤 형제는 신약, 구약 성경을 다 필사하여 60주년 기념식에 전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말씀에는 분명 엄청난 위력이 있습니다. 어떠한 핵무기나 광우병보다도 더 강합니다. 어떠한 촛불보다 오래갑니다.


    보름 전 저녁 무렵에 저는 참으로 의외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몇몇 교구 신부들과 휴가를 마치면서 서울 청계천을 산책하였습니다. 한 참 걷는데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한참 촛불집회 중이었습니다. 촛불을 들고 삼삼오오 자신들의 주장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제가 촛불을 들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대의 정신과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살아가야 할 사제로서의 나 자신을 성찰하며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깨달은 이들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즉시 단순하게 복음을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는 이들에게, 역사는 훗날 좋은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말씀 깨닫기!’를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시대의 징표를 올바르게 식별하여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계십니다. 한 말씀이라도 깊이 깨닫기 위해 노력하며, 말씀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교우 여러분, 사랑합니다! 아멘.


    말씀 잘 알아듣기 

      박문식 신부 

    발을 다쳐 주일미사에 못간 손주가 성당에 다녀온 할머니께 “할머니, 오늘 신부님이 무슨 강론을 하셨어요? ” 하고 여쭈었다. “참 좋은 이야기하셨지. 감동받았어.” “무슨 얘기요?” “오다가 다 잊어버렸네.” “그래도 생각나는 것 없어요?” “아! 맞아. 사람은 소꼭지로 살지 말고 젖꼭지로 살아야 한데….”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께 알아보니 “신앙생활을 소극적으로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라고 했지.” 이 얘기를 피정 때 했더니 듣고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맞는 말이지요”라고 대답하길래 “어떻게 알아들었는데요?” 물어봤더니 “아! 아기들한테 소젖(우유) 먹이지 말고 엄마 젖 먹이라는 소리 아닌가요?” ‘아, 그렇게도 알아들을 수 있겠구나.’ 이렇게 우리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찌 하느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들을 알게 해 주셨지만 이스라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 제자들은 더 알아듣게 되고 이스라엘은 점점 못 알아듣게 된다. 이미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부정적 예정으로 말미암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니 예수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비유들로 말할 수밖에 없다(마태 13,13 참조). 청중이 못 알아듣도록 하려고 일부러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비유는 이해하기 쉬운 예화가 아니라 설명을 듣지 않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은 따로 비유들을 설명해 주셨다고 한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두 귀를 주신 것은 들어야 할 것은 바르고 옳게 들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듣는 것이 비록 싫은 소리라도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라면 잘 들으라고 두 귀를 주신 것이다. 양쪽 말을 다 들으라는 신체구조이다. 한쪽 소리보다 양쪽 음향이 더 좋다. 한쪽이라도 진리의 말을 들었다면 다 들은 셈이다. 한쪽 귀로 들은 것으로 모자라면 두 귀로 듣자.


    시몬 베드로는 고백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예수님의 말씀을 막연히 들어서는 안 된다. 귀담아듣고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특별히 성경에서 많이 듣는다. 성경 말씀을 듣고 응답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교회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 신앙인이란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 말씀을 듣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거룩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는다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분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듣는다는 것은 믿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 바라는 것이고, 회개하는 것, 나누는 것, 구원되는 것, 거룩한 것,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곧 복음화가 된다. 문학 작품이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삶의 의미를 더 풍요롭게 한다면 성경은 사람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달하고 마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로 향하는 인간 본래의 길로 이끌어 준다. 복음화란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다. ‘닮다’는 ‘담다’에서 나온 말로 예수님을 내 마음에 담는 것이다.


    “당신들이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당신들은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당신들에게 자유를 줄 것입니다”(요한 8,31-32 참조). 


    씨 뿌리는 사람이 씨 뿌리러 나갔다 

      이승제 신부 

       

    씨 뿌리는 사람은 교회와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입니다. 또 예수님이기도하고 더 나아가 성부이시기도 합니다.

    성부께서는 당신의 아들인 ‘하느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 뿌리셨고 그 말씀이신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원을 성취하고 다시 올라가셨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것을 아들도 하기’때문에 예수님 당신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때문에 교회와 그 구성원들인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아버지가 일하기 때문에’ 세상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뿌립니다. 그래서 교회는 씨앗이 뿌려진 땅이자 동시에 씨 뿌리는 사람이 됩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인 하느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 뿌리기 전에 이 세상이라는 척박한 땅에 ‘성모송’의 비를 뿌리셨습니다(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또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간의 단식을 하셨습니다. 교회도 그 초창기에는 제자들의 순교의 피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의 씨를 뿌리기 전에 기도와 단식과 희생이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집안에서는 씨앗을 뿌릴 수가 없습니다. 집안에 머물며 만족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도 당신 안에서 스스로 완전히 만족하셨지만 그 안에서 나와 세상을 향해 당신을 던지셨습니다. 씨앗을 뿌리러 ‘나가야’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열심히 나가야 합니다.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내 게으름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나의 이익이나 이기심에서 나가야합니다.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어쨌든 안주해있는 곳에서 ‘나가야’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하느님의 말씀은 열매를 맺는 씨앗입니다. 좋은 씨앗이기에 좋은 열매를 맺지, 가라지를 맺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은 사람들이 좋은 땅인지 아닌지 그 열매를 보고 가려낼 수 있습니다. 좋은 땅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란 다름이 아니고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입니다. 때론 잎은 무성하고 나무는 크고 화려할지 몰라도 열매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나 자신이 씨 뿌리는 사람으로서 집안에만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씨를 뿌리러 나가야 하겠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아멘.


  5. user#0 님의 말: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1. 말씀읽기:마태13,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르 4,1-9 ; 루카 8,4-8)

    2. 말씀연구

    하느님 나라! 그곳을 있는 그대로 설명한다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율법학자들이 무시하거나 변형시킨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비유를 통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들을 귀가 없어서인지 참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시면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씨를 뿌리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밭은 바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이며, 씨는 바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마음에 말씀의 씨앗을 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고, 또 어떤 사람은 적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 씨앗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오늘 말씀 안에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뿌리신 씨앗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군중이 많이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배에 오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셔서 백성들을 가르치십니다. 구원을 갈망하면서 그들은 가르침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갈수록 신앙에 대한 관심이 적어집니다. 신앙보다는 다른 것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시간이 남아야만이 하는 것”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곳에 내 눈이 가고, 내가 관심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가고, 내가 관심이 있는 곳에 내 몸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관심이 있다면 나의 눈과 내 마음은 예수님께로 향할 것입니다. 당연히 미사에 기쁜 마음으로 참례하고, 성경에 맛들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성당으로 향하고, 성당에 있는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의무감이나 형식적으로 와 있는 사람일까요?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비유라는 말은(parabole) 격언, 금언, 비교, 우화 같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 낱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그리스도교적인 진리와 일상사 사이의 유사성을 설명하는 이야기들을 가리킬 때 쓰입니다. 비유는 일상생활에서 따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야기 자체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큰 뜻을 군중들에게 인상 깊이 박아 주시려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또한 비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군중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허용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제자들이 이해하는 것과 군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책임이 하느님께 있었습니다.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하느님의 계획이나 명령은 그것이 드러날 때에야 비로소 알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은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할 때 하늘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일어나는 농사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농부는 씨앗 자루를 들고 지난번 추수 이후로 한 번도 손대지 않는 들판으로 나갑니다. 가을철 우기가 끝나고 11월 중순에서 12월 사이에 씨를 뿌립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허리춤에 주머니를 달고 씨를 넣고 다니거나 의복 주머니에 씨를 넣고 다녔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일구지 않은 밭으로 나가 씨를 뿌리고 난 다음, 쟁기질을 하여 씨가 땅에 묻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를 다 뿌리고 나면 길바닥이라 할지라도 다시 일구게 될 것이므로 씨가 어디에 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농부가 뿌린 씨의 운명은 그 씨가 떨어진 땅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 추수를 하고 밭을 묵혀 두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므로 밭 사이에 길이 나곤했습니다. 흙이 별로 없이 석회석만 깔려 있기도 했고, 가시덤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곳도 많았습니다.

    자! 이제 농부는 씨를 뿌립니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씨를 뿌리는 이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습니다. 쟁기질은 씨앗을 뿌린 다음에야 합니다. 씨앗의 운명은 쟁기질이 끝난 다음에야 결정됩니다. 길에 떨어진 씨앗에서는 아무런 수확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새들이 낟알을 쪼아 먹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듣기는 했지만 마음의 준비 없이 받아들인 사람은 마치 참새가 씨를 쪼아 먹듯 사탄이 그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고 믿음과 구원을 방해합니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이의 마음은 진리가 들어가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만듭니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어떤 씨앗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싹은 곧 돋아났습니다. 하지만 뿌리를 깊이 내려야 뜨거운 열기를 견딜 수 있는데,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게 돌들이 막고 있었기에 결국 뿌리가 말라 버리고 맙니다.

    이런 마음의 밭을 가진 사람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작은 시련에도 굴복되고 마는 영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신념이 나약하여 작은 시련을 만나게 되면 곧 항복해 버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 안에서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농부가 뿌린 씨앗 중에는 가시덤불 속으로 떨어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나무 아래에서는 작은 나무들이 잘 자라지 못합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큰 나무 아래에서는 제대로 커나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큰 나무가 아니라 가시덤불이라면 더더욱 어렵습니다. 가시덤불이 씨앗이 티운 작은 잎을 덮고 있고, 뿌리를 움켜잡고 있기에 제대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이 가시덤불 속과 같은 마음은 이 세상에 대한 근심, 재물에 대한집착, 쾌락의 추구 때문에 말씀의 씨의 성장과 결실의 모든 희망이 수포(無)로 돌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마음의 밭을 가진 사람은 세상과 하느님과의 사이에 떠돌아다니는 인간의 상징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로 향할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농부가 뿌린 씨앗 중에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의 씨앗을 나에게 뿌리셨습니다. 이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의 밭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거름이 풍성한 밭에서 곡식들이 잘 자라듯, 선한 마음과 깨끗한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또한 선하고 깨끗한 마음은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듯 그렇게 하느님을 향하게 만들고, 어떠한 유혹과 시련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만듭니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이가 씨를 뿌렸지만 길가에 떨어진 것이나, 돌밭에 떨어진 것,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것들에서는 실패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으로부터는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즉 씨를 뿌리는 이의 노력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맺고 있는 엄청난 열매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나의 열매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찬양받으실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땅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새들이 와서 쪼아 먹기에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시덤불(무성한 잡초일 수도 있습니다) 속에 떨어진 씨앗은 잡초가 훨씬 더 빨리 자리고 연약한 싹을 질식시켜 버리기 때문에 자랄 수가 없습니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은 오래지 않아 메말라 죽어 버립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를 맺으며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등의 놀라운 수확을 얻게 됩니다. 곡식 낟알은 겉으로는 별로 힘이 없어 보이는 미소한 것이지만 거기에서 이삭과 열매를 맺는 튼튼한 줄기가 나옵니다. 땅이 기름질 때 수확은 풍부하지만, 돌이 많고 척박한 땅에서의 수확은 보잘 것 없습니다.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는 농부들은 모두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청중들은 씨 뿌리는 사람과 씨앗과 밭과 마지막 수확, 즉 추수에 대해 들었을 때, 그들은 역사의 마지막 목표점인 하느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씨앗과 열매와 추수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행동과 마지막 때에 그들을 가려 낼 하느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성경적 표상들이었습니다. 

    바람직한 열매를 맺는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는 앞에서 생활하고, 영원한 창고 속에 놓이게 되리라는 희망(구원)을 갖고 현세 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풍성한 열매를 맺길 바라십니다. 그래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3. 나눔 및 묵상

    1.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내 말씀의 밭은 어떤 상태입니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옥한 상태입니까?


    2.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라고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오늘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또한 말씀의 의미를 알아듣고 가슴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오른 기억을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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