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끊어버리라
제 1독서 : 예레 20,7-9
제 2독서 : 로마 12,1-2
복음 : 마태 16,21-27
이 주일 독서들의 내용은 지난 주일의 것들과는 아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지난 주일에는 그리스도의 초월적 ‘메시아성’이 찬양되었던 반면에 이주일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 자신을 “많은 고난을 받고” 급기야는 “사람들의 손에 죽게될”(마태 16,21 참조) 그런 존재로 제시하고 계시며, 또 지난 주일에는 베드로가 하늘로부터 ‘영감을 받은자’로 인식될 만큼 완벽하고도 뚜렷한 신앙고백을 했고 또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당신 교회의 주춧돌로 세우신 반면에 이 주일에는 그가 오히려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대립하여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의 ‘걸림돌’로서 그리스도께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는 듯하다.
이와 같은 대립적 관계는 지난 주일의 복음 내용과(마태 16,13-20) 이번 주일의 복음 내용이(마태 16,21-27) 연이어 서술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마태오 복음사가 자신의 특별한 의도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어째서 이런 대립적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 자체에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대립적 실체가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태오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한다는 점이다.
과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 안에 서로 쉽게 융화될 수 없는 것 같은 여러 가지 관점들을 내포하고 있는 ‘신비’ 그 자체이시다 : 예를 들어, 베드로에 의해 고백된 초월성과 신성이 있는가 하면 수난과 죽음의 여정이 예정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내 당신 제자들에게 하시는 그 어처구니 없는 말씀에 베드로는 펄쩍 뛰며 반대한다 ; 우리 역시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달아들 때 우리 각자 안에 야기되는 이러한 긴장과 고뇌 안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무한한 ‘신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표지가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에 예수께서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을 것임을 알려주셨다”
이제 오늘 복음의 내용으로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오늘 복음은 아주 뚜렷이 구분되면서도 서로 연결되고 있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 져있다 : 전반부는 곧 다가올 주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와 그에 대한 베드로의 민감한 반응을 전해주고 있고(마태 16,21-23) ; 후반부는 십자가의길을 통해서 ‘당신을 따라야 할’ 제자들의 의무에 대한 그리스도의 엄한 권고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24-27절).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주셨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리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21-23절).
이 대목에는 특별히 언급해야 할 내용들이 많다. 우선적으로 언급해야 할 내용은 베드로가 무분별하게 성급히 서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 그는 예수로 하여금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애쓴다. 베드로가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물론 스승 예수께 대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열정 때문이다 : 이 점에 있어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비록 성급하긴 하지만 그의 훌륭한 인간성이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급함이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사실이다 ; 그래서 예수께서는 즉시 다음과 같은 가혹한 말씀으로 꾸짖으신다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23절). 베드로는 참으로 진실된 신앙고백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당시의 일반적 베시아 사상 즉 고난과 능욕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한 영광과 지상 권세로 가득 찬 ‘승리주의적’ 메시아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더구나 그가 조금 전에 예수께 고백한 내용(“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이 참되다면 이러한 그의 생각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어야 했다. 게다가 그 자신의 ‘신학’까지 가세하여 그런 사고의 혼란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앞에 우리의 감동이나 선입견, 합리적 사고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의 신학에 의해서조차 우리 자신을 내세울 수없다. 예수 자신과 하느님의 계획을 최고로 드러내 주는 분은 오직 예수 자신이시기 때문에 비록 그분이 지금 말씀하고 계신 그런 혼란스럽고 역설적인 말씀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그것을 믿고 신뢰하는 겸손한 태도로써 그분 앞에 서야 한다.
베드로는 이미 앞서 고백한 신앙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현세의 인간적 체계에 꿰맞추어 어떤 의미에서 합리화시키려고 할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태도에 신앙을 상실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 신앙은 더 이상 하느님의 생각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생각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사탄의 도구로 보시며 (“사탄아 물러가라” :23절) 그를 격하게 내치시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는 사탄이 이 세상의 찬란한 권세와 부귀와 안이한 생활 그리고 배고픈 자에게 필요한 빵으로 스승 예수를 세속주의적 메시아 사상으로 철저히 이끌어자고자 하는 예수의 유혹사화(마태 4,1-10)가 상기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은 그 일어난 사실의 ‘역사성’도 입증해는 요소들이다 : 즉 예수께서 진정 그렇듯 심한 말씀을 하지만 않으셨다면 ‘사탄’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었던 베드로의 분개 사실의 역사성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께서 곧 당신에게 험한 생의 종말이 닥치리라고 예고함으로써 제자들 사이에 파문을 일으키시는 그 말씀들의 역사성을 입증해준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반해 이 대목에는 성금요일의 비극적 사건을 미리 정당화시키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예수께서는 멀지 않아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실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단순히 운명이나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상황에다 돌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거기서 성부께서 이미 마련하신 구원계획을 깊이 인식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알려주셨다”(21절).
“이 대목에서 희랍어 dei(δει=해야만 한다)라는 말은 희랍 문학에서처럼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필연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신약성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의미로서 역사-특히 그리스도의 생애-의 창조적 역할 내지 위격적 호소로서의 하느님의 뜻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dei라는 말에 내포된 의미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부활이 종말론적 사건의 일부라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정확히 말해 종말론의 설교자가 아니다 : 그의 역사가 곧 종말론이다(W. Grundmann). 루가 24,44-47에서처럼, 수난의 예고에 나오는 dei 말은 성서(마르 9,12 참조) 특히 하느님의 종 (이사 53장)과 고통당하는 의로운 이(시편 22)와 관계있는 성서대목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뜻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L. Sabourin, Il Vangelo di Matteo, Ed. Paoline, Roma 1977, vol. ll, pp.784-785).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뜻은 메시아의 수난과 또한 미래의 영광(“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만을 내다보지 않고 그 제자들이 당할 고난도 예견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베드로에게 주어진 가르침은 더더욱 힘든 것일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예수를 십자가의 길에서 멀리 떼어놓고자 했던 베드로는 그도 그 여정을 달려가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그 자신의 신앙의 힘만으로가 아니라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의 죽음-전승이 전하는 바와 같이(요한 21,18-19 참조) 스승에게 지나치게 비교하려 했던 무모한 행위에 대한 자책으로 머리를 따으로 향하고 죽었다고 하는 -을 당하기까지 스승을 따르려는 그의 능력에 의해서 교회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다”(24-27절).
이 이야기들은 원래는 독립적인 별개의 이야기들인데, 그리스도의‘제자’라면 마땅히 스승의 ‘고난’을 이어 받아야 된다는 주제를 중심으로 편집상 한데 모아진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는 신앙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이 베드로에게 신비스러운 감동과 기쁨을 주며 또한 그러한 기분에 젖어들 수있게 한 반면, 그분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시는”(마르10,45) ‘수난당하는 종’으로서 고백하는 것은 또한 베드로에게 있어서 자기 스승의 고통스러운 운명에 함께 함께 연루되어 있음을 자각케 하였다. 여기에 그의 어려움-또한 우리의 어려움이기도 한-즉 그리스도를 죽음의 운명이 지워진 메시아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주님께서 하신 이 여러 가지 역설적이고도 강한 어조를 띤 말씀들 가우데서 특히 다른 모든 구절들의 종합처럼 여겨지는 두 번째 구절이 가장 역설적인 것 같다. 바로 이런 까닭에 아주 강한 인상을 주고 있는 그 구절은 공관 복음사가들에 의해서는 물론(마르 8,35 ; 루가 9,24; 17,33참조) 요한 복음사가에 의해서도(12,25) 전해지고 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25절).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권고는 관심의 중심을 자기에게 두지 말고 자기밖에 특히 그리스도(“나를 위하여”)와 이웃 형제들에게 두라는 거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되찾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열고 펼쳐나감으로써 형제들의 마음속에서 새로이 태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행하신바다 : 그분은 자기밖에 관심을 두셨고, 자기를 잃으셨으며, 또한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셨고(필립 2,7-8) 자기르 내던져 이웃들에게 주셨다. 십자가는 이 모든 ‘영신적’ 실체의 실질적 사징물이다 :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잃으셨지만 부활의 영광과 불사불멸의 온전한 생명 안에서 당신 자신을 되찾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 앞에는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을 닮기 위해 실질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할 필요는 없다. ‘십자가 위의 죽음’은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우리 자신의 의무에 충실학 그리스도와 이웃 형제들을 위해 우리자신을 바치고 “잃어버림으로써” 우리의 선익이 아니라 오직 “이웃 형제들의 선익을 구함”(필립 2,21참조)에서 이루어진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기 때문에 여기서 끝을 맺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십자가 위의 죽음’이라는 체험은 모든 믿는 이가 신앙인이라는 척도에서 해야만 할 체험이라는 사실이다. 그 체험은 아브라함이 했고 모세가 했으며 또 많은 예언자들이 한 체험이다. 오늘 전례는 그 많은 예언자들 가운데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상기 시켜주고 있다. 그는 마치 모든 인간적 고통의 상징적 인물로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예형처럼 나타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비탄에 잠긴 고백을 통하여 하느님께 온통 비애와 탄식의 표현들을 토해내고 있다. 그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예언적 소명을 저버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보다 더 강하신분이시다. 그래서 그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타오르는 도저히 꺼버릴 수 없는 뜨거운 ‘불’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느 그만두자’고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예레 20,7-9).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사도 바울로는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십자가 위의 죽음’의 체험 자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 신자가 자기 자신의 타락한 본능의 욕구를 억제하면서 매일매일 바쳐야 하는 정신적 예배야말로 진정한 희생제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자기를 끊어버리고 포기하는 고통을 요구한다.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대한 충실한 사랑속에서 매일매일 소박하고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잃어야 한다는 것’이 일층 더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행위만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진실되이 고백하는 것이다. 그 다시 베드로가 깜짝 놀라 그처럼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 아니었을까!

연중 제22주일
제 1 독서 : 예레 20, 7-9
제 2 독서 : 로마 12, 1-2
복 음 : 마태 16, 21-27
제 1 독서 : 아마도 구약의 어떤 예언자도 예레미야 예언자보다 더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 그것 때문에 날마다 웃음거리와 놀림감이 되고,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다(예레 20, 7-8). 그래서 예레미야는 욥처럼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했다(예레 15, 10; 20, 14). 그의 비극적인 삶은 특별히 여섯 개의 고백록에 잘 나타나 있다.
제1독서는 제5 고백록의 일부분이다. 예레미야가 곧 다가올 하느님의 엄한 심판을 선포하자 백성은 그를 모함하고 고발하였다. 예레미야는 이처럼 철저히 버림받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입을 다물고 주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언자를 꽉 붙잡고 도무지 놓아주지 않았다. 예레미야의 깊은 내면에는 강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20, 9). 이미 예레미야는 고통받는 종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임무는 후에 예수의 임무가 될 것이다.
제 2 독서 : 로마서 12장부터는 실천적인 결론을 담고 있는 내용이 계속된다. 그리스도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권고이다. 요점은 삶 전체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라는 것이다. 제2독서는 주님께 자기 자신을 영적인 제물로 드리면서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끊으라는 내용이다. 그래야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려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사람들, 이런 사건들과 접촉하도록 마련해 놓으신 목적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슨 이유로 지금 이 시간에 이 사람들 속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며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 만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면 이 모든 일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복 음 : 베드로의 첫 고백이 있고 나서 곧바로 첫 번째 수난 예고가 이어진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의 메시아 사상에 대한 정화 작업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고통받는 종으로서 고통을 통해 시작하신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베드로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의 말씀을 조금 전에 들었던 베드로가 이제는 갑자기 그분의 말씀에 장애물을 놓았다. 그는 십자가로 향하는 스승의 길을 되돌리려고 했다. 아직도 그는 성공에 대한 세속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주님의 수난과 부활만이 그를 헛된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여 마침내 참된 신앙에 이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살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세속에 깜짝 놀랄 때가 있는 법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세속의 유혹이 스며들 때마다, 주님의 꾐에 넘어갔다는 어리숙한 투정의 유혹이 들 때마다 지체없이 이처럼 외쳐야 한다. 훌훌 세속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감연히 일어서서 삶의 행로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스도 신자로서 행로를 바로잡으려면 주님 뒤로 물러가야 한다. 주님을 앞설 때, 주님의 도구가 아닌 걸림돌이 될 때, 우리는 사탄이 된다. 사탄은 어떤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우리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토록 신망받던 베드로도 한순간 사탄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순간, 본의 아니게도 우리는 사탄이 된다. 그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토록 혼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속적인 생각 때문에 주님을 앞서는 숱한 사탄들 때문인 것이다. ‘사람의 일’만 생각할 때,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할 때 , 바로 우리는 사탄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하 ㄹ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님을 앞서려는 유혹, 타인을 앞서 깔아뭉개려는 유혹이 들 때마다 이처럼 단호하게 외쳐야 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말씀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끊어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권고 사항이라기보다 주님의 계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어떤 의미에서 ‘세속적인 나’와 ‘하느님 안에서의 나’의 끊임없는 싸움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세속적인 즐거움과 천국의 복락 사이에서 오가는 끊임없는 번뇌의 여정이 바로 인생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의 즐거움, 부귀 영화, 명예, 재산, 건강 등과 하느님 안에서의 즐거움, 평화, 기쁨, 깨끗함을 함께 누리고자 하는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히 자기를 끊어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에 순응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기에 늘 마음에 꺼리는 것에 대해 고해성사로써 인간과 하느님이 화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도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게 된다고 하자 펄쩍 뛰며 ‘안될 일’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령하시면서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치 않고 인간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인간의 일만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사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편안함, 행복, 안락감, 부귀 영화, 이 모든 것은 사탄이 좋아하는 일이고 인간을 결국 망쳐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이 뒤따른다 하더라도 기꺼이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 이것이 스승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요 영원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중학생이 쓴 글을 통해 참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로는 여러 가지 책과 쥐를 잡는 고양이, 권투 장갑이 있고 또 만화 잡지도 소중히 차곡차곡 쌓아둔다. 그리고 파카, 샤프, 아버지가 주신 15,000원이 들어있는 저금 통장, 어항의 금붕어,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 목걸이 스카폴라 등이 있지만 정말 소중한 것은 우리 가족이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그리고 사생활에 곤란하거나 풀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도와주는 우리 형, 돈이나 물건보다는 역시 가족과 건강이다. 이중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만화잡지를 포기하겠다. 좀 아깝지만 꼭 필요한 필수품은 아니니까! 그리고 15,000원이 든 저금 통장과 새끼 고양이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눈물을 머금고 고양이를 선택하겠다. 물론 고양이는 5,000원, 저금 통장에는 15,000원이 들어있지만 기른 정이 있어 고양이와 나를 떨어지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눈물을 머금고 10,000월을 손해보는 것이다.
우리 집에는 큰 십자가가 하나 걸려있다. 십자가와 고양이 중 하나를 꼭 버려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고양이에게 미안하지만, 고양이가 섭섭한 눈치로 보겠지만 철면피가 되어 고양이를 버릴 것이다. 만약 십자가가 평범한 물건이라면 십자가를 버리겠지만 십자가(신앙)는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 우리 가정에 무슨 큰 일이 생기면 안정과 평안을 가져다준 것이다. 만약 신앙이 없다면 우리 가족은 무슨 큰 일이나 조그만 일이 일어날 때 불안, 초조해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버릴 수 없다.
만약 건강과 십자가(신앙) 중에서 또 하나를 버리고 나머지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신앙을 선택하고 건강을 버리겠다. 왜냐하면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나이 들면 죽는 건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일 죽더라도 신앙이 있으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족과 신앙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신앙이 역시 먼저이다. 가족은 함께 죽거나 따로 죽거나 착하게 신앙만 잘 가지면 천국에서 함께 평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소년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또 가장 귀중한 것을 위해서 덜 소중한 것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뼈속에 갇혀있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온갖 괴로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갈등과 고통을 이겨낸 예언자의 모습에서 주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진정한 신앙이란 온갖 내적 갈등과 고통을 통해 성숙하는 것이고 이 과정 안에서 제2독서 로마서의 말씀처럼 세상을 본받기보다는 자신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께 바쳐질 거룩한 산 제물로 성숙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묵묵히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착한 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1. 안광훈 세자요한
1.1. 연중 22 주일(가해)
제 1 독서 : 예레 20, 7-9 <주 석>
7절 :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 여기서 ‘꾀하다’에 해당하는 ‘파타’는 ‘유혹하다’, ‘속이다’, ‘설득하다’ 등의 뜻을 지니며, 탈출 22:16에는 이 단어가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속이다’, ‘꾀다’라고 번역한다고 해서 예레미야가 신성모독적 감정을 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소명 당시부터 그 소명을 감당하기 두려워했으되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으로 그 일에 전념하였다.(1:4-10) 그러나 점점 심각해오는 핍박의 양상을 맞아 다만 깊은 갈등에 사로잡혀 역설적 항변을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Feinberg).
8절 :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 거리 – 예레미야가 줄곧 외쳐왔던 메시지는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이러한 심판 선언이 이제는 사람들로부터 모욕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Brigh). 한편 전반절의 ‘외치다'(자아크)란 동사와 ‘부르짖다'(카라)란 동사는 공격적이고 큰소리로 선언한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그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언약을 위반했다고 하는 비난과 예루살렘의 멸망 선포는 조소거리가 되었으며, 거센 반발과 핍박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9절 : 예레미야는 더 거세어져가는 핍박의 와중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결심도 해보았다.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선지자가 가장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포기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불과 같아서 속에다 담아둘 수가 없었다. ‘답답하여’의 히브리어 ‘라아’는 ‘기진하다’의 뜻으로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사도 바울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라고 고백하였다.
제2 독서 : 로마 12, 1-2 <주 석>
1절 : 그러므로 – 이는 본장에서부터 전장들의 내용에 대한 결론이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형제 여러분 – 이는 수신자(受信者)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 어린 표현이다. 이 단어를 수신자에게 적용시킬 때마다 사도는 깊이 감동되어 있음을 주목하라(1:13;7:1;8:12;10 :1).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 이는 바오로의 권고의 근거가 되는 문구이다. 인간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얼마나 덧입고 사는 가를 깨닫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할 수 없다.
권고합니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로’는 쓰임이 다양하나 여기에서는 명령과 간청의 양면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분의 몸을 – 여기서의 몸은 몸과 마음, 즉 온 인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봄이 바람직하다(Calvin, Beza, Shedd). 그러므로 ‘너희 몸’은 ‘너희 자신'(yourselves)을 뜻하며, 우리의 인격 전체를 형성하는 모든 요소를 포함한다. 세상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표현되는 삶의 양태까지 포함한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란 하느님께 전 인격적으로 우리의 몸을, 생애 전체를 드리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애를 통해 계속적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이란 말은 흠이 없이 순전(純全)하다는 의미이다(에페 1:4; 필립 2:15; 콜로 1:22). ‘산 제사’의 ‘산’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산’은 현재 분사로 ‘지금 살아있는’이란 뜻을 포함한다. 이 말은 바로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드리라는 것이며 또한 지역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제사로서 살아 움직이며 생활하는 자체로 하느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 이 부분은 앞에 나온 권면을 설명하고 확증(確證)하는 의미에서 쓰여졌다. 하느님이 요청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 즉 하느님께 가장 합당한 예배를 강하게 표현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삶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주께 두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2절 : 현세에 – 본문에서는 ‘이 세대’가 시대 구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 혹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악한 세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적대 세력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이 세대’의 삶의 방식과 가치 기준 등 시대정신도 포괄한다. 동화되지 말고 – 본 구절은 표면적이고 흘러가는 이 세상 풍습을 받아들이거나 순응하지 말라(Sanday, Headlam)는 것이다.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 이 말은 자신이 아닌 타자(他者)에 의해서 변화하며 일시적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꼭 그렇게 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즉 우리의 인격 내부에 변화를 일으키는 세력인 성령에 의해 마음이 새롭게 계속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 선하고 –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선’을 의미한다. 다만 본 절에서 바오로는 ‘선’의 기준을 하느님께 두고 있다. 마음에 들며 – 하느님께서는 그의 뜻이 이뤄지거나, 그의 뜻과 일치될 때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뜻에 합당하게 생을 영위하거나, 피조 세계가 원래 목적대로 진행되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 완전한 – 인간의 뜻은 그 어떤 것도 온전할 수 없지만 계시된 하느님의 뜻을 뛰어난 특성은 그 자체가 온전한 것이다. 이는 그 뜻을 가지신 하느님 자신이 온전한 분이기 때문이다.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 하느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말은 판단하거나 시험한다는 의미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인정한다는 것이다(Murray). 신자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알아야 하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계속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한다.
복 음 : 마태 16, 21-27 <주 석>
21절 : ‘그때부터’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제 나타날 모든 시대를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더 이상 공식적인 선포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선포가 ‘그 때부터 그는 … 시작했다’로 시작된 것과 같이, 그의 수난에 관련된 선포도 역시 이와 같이 시작된다. ‘밝히기 시작했다.’ 이 말은 신적인 비밀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22절 : 마태오는 마르코를 넘어서서 베드로의 반대를 문자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그를 특별히 부각시킨다.
23절 : ‘걸림’이라는 예수의 비난도 역시 마르코에서는 빠져 있다. 시온을 위한 주춧돌로 놓여진(이사 28, 16), 그러나 또한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이사 8,14.15) ‘선택된 돌’에 관한 말들도 초기 공동체 내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다. 이 공동체는 하느님에 의해 새로운 지식을 은혜로 부여받으며 하늘나라에 접근해 간다. 그러나 또한 이 공동체는 아직도 시련 속에서 살아가며 더욱이 심판의 위협조차 받고 있다. ‘사탄의 깊은 비밀’(묵시 2,24) 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불복종 가운데서 경험하며, 특별히 그들이 십자가의 신학, 아니면 더 정확히 말해서 십자가의 실천에 저항하는 데서 경험하게 된다. 거기에서 그들은 사탄의 깊은 비밀을 극복해야 한다.
24절 : 제자들만이 예수를 따르려고 결단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큰 무리와 구별되는 반면, 마르코는 모두에 대한 부름을 강조하며, 누가 순종하며 또한 누가 순종하지 않는가는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보이게 된다. 따라서 이 말은 마태오에서는 23절의 ‘물러가라’라는 말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시련과 새로운 따름은 제자들의 삶 속에서도 계속해서 일어난다.
25절 : 마태오는 도래하는 나라에서의 환전한 생명이 현실화되는 것에 대한 놀라움을 생각하고 있다.
26절 : 심판을 위한 사람의 아들의 도래는 부름에 근거를 준다.
27절 : 인간의 행동에 대한 보상이 언급되어 있다. 이 명제가 충실한 자들에 대한 보답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마태오는 아마도 제자들에게 향해 있는 이 단락에서도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며, 이 때문에 ‘일들’ 대신에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로써 많은 개체 행위로 분리되지 않은 통일체로서의 신앙의 삶이 고찰되었다.
강론
오소서 성령님!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와의 대화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베드로 사도가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답을 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수위권을 부여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 사도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 받아야 하는데,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방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해 볼 점은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에 관해서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무슨 일을 할 때 자기 일을 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처럼 착각하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내 뜻대로 행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가장 인간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을 위로해 주려는 마음으로, 그리고 자기가 가장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로서 당연히 예수님을 말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적극적으로 말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는 꾸지람을 들었던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는 자신만큼 하느님 뜻에 가깝게 그리고 예수님을 도와 하느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일을 자기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리어 구원을 이룩하려고 하는 하느님의 일에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시는 예수님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따르는 스승님께서 수난받으시러 가신다는데 말리지 않을 제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경험 한 다음에 비로서야 하느님의 일(뜻)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동참하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성서를 보면 12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처럼 그리고 마귀 두목인 베엘제불이 가장 하느님께 가까이 있다가 하느님을 배반한 것처럼 진정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가장 잘 알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의 우리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교회의 뜻에 따라 일을 한다 하더라도 쉽사리 그 일의 주인공은 내가 되어 버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활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사람들의 눈길과 세상의 논리에 신앙인임을 숨기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방해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들은 하느님의 일을 깨달을 수 있기란 제자들보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비해 지금은 우리의 믿음(신앙)을 흔드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점차 개인주의화 되고, 돈·권력·명예를 얻으면 아쉬움 없이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세상은 이미 하느님의 논리, 기준이 아닌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기준을 더욱 중시합니다. 또 그것이 마치 진리인 양, 그것이 최고인 양 생각하는 세속화의 시대에 살고 있기에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란 매우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산다고 해서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셨듯이, 정작 중요한 생명을 얻으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모두 얻고 편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영원을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시대에서 살지만 우리들의 일과 하느님의 일(뜻)을 헤아려 신앙인으로서 그분의 일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려움이 따르는 이 모든 것들을 예수님께서는 ‘제 십자가’라 표현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후에 예수님의 이런 깨우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원하신 일, 하느님이 뜻하신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길 원했고, 자신의 지난 행위를 반성하면서 예수님과 같이 똑바로 못 박힐 수 없다하여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나의 신앙생활에 만족하며 생활하지만, 믿음이 강하고 신앙심이 있다고 하는 우리들일수록 잘못하면 내 일을 하느님의 일처럼 여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약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그러했다면 그런 우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오늘 부터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에 맞갖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1. 안광훈 세자요한
1.1. 연중 22 주일(가해)
제 1 독서 : 예레 20, 7-9 <주 석>
7절 :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 여기서 ‘꾀하다’에 해당하는 ‘파타’는 ‘유혹하다’, ‘속이다’, ‘설득하다’ 등의 뜻을 지니며, 탈출 22:16에는 이 단어가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속이다’, ‘꾀다’라고 번역한다고 해서 예레미야가 신성모독적 감정을 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소명 당시부터 그 소명을 감당하기 두려워했으되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으로 그 일에 전념하였다.(1:4-10) 그러나 점점 심각해오는 핍박의 양상을 맞아 다만 깊은 갈등에 사로잡혀 역설적 항변을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Feinberg).
8절 :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 거리 – 예레미야가 줄곧 외쳐왔던 메시지는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이러한 심판 선언이 이제는 사람들로부터 모욕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Brigh). 한편 전반절의 ‘외치다'(자아크)란 동사와 ‘부르짖다'(카라)란 동사는 공격적이고 큰소리로 선언한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그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언약을 위반했다고 하는 비난과 예루살렘의 멸망 선포는 조소거리가 되었으며, 거센 반발과 핍박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9절 : 예레미야는 더 거세어져가는 핍박의 와중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결심도 해보았다.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선지자가 가장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포기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불과 같아서 속에다 담아둘 수가 없었다. ‘답답하여’의 히브리어 ‘라아’는 ‘기진하다’의 뜻으로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사도 바울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라고 고백하였다.
제2 독서 : 로마 12, 1-2 <주 석>
1절 : 그러므로 – 이는 본장에서부터 전장들의 내용에 대한 결론이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형제 여러분 – 이는 수신자(受信者)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 어린 표현이다. 이 단어를 수신자에게 적용시킬 때마다 사도는 깊이 감동되어 있음을 주목하라(1:13;7:1;8:12;10 :1).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 이는 바오로의 권고의 근거가 되는 문구이다. 인간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얼마나 덧입고 사는 가를 깨닫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할 수 없다.
권고합니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로’는 쓰임이 다양하나 여기에서는 명령과 간청의 양면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분의 몸을 – 여기서의 몸은 몸과 마음, 즉 온 인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봄이 바람직하다(Calvin, Beza, Shedd). 그러므로 ‘너희 몸’은 ‘너희 자신'(yourselves)을 뜻하며, 우리의 인격 전체를 형성하는 모든 요소를 포함한다. 세상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표현되는 삶의 양태까지 포함한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란 하느님께 전 인격적으로 우리의 몸을, 생애 전체를 드리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애를 통해 계속적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이란 말은 흠이 없이 순전(純全)하다는 의미이다(에페 1:4; 필립 2:15; 콜로 1:22). ‘산 제사’의 ‘산’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산’은 현재 분사로 ‘지금 살아있는’이란 뜻을 포함한다. 이 말은 바로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드리라는 것이며 또한 지역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제사로서 살아 움직이며 생활하는 자체로 하느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 이 부분은 앞에 나온 권면을 설명하고 확증(確證)하는 의미에서 쓰여졌다. 하느님이 요청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 즉 하느님께 가장 합당한 예배를 강하게 표현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삶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주께 두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2절 : 현세에 – 본문에서는 ‘이 세대’가 시대 구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 혹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악한 세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적대 세력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이 세대’의 삶의 방식과 가치 기준 등 시대정신도 포괄한다. 동화되지 말고 – 본 구절은 표면적이고 흘러가는 이 세상 풍습을 받아들이거나 순응하지 말라(Sanday, Headlam)는 것이다.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 이 말은 자신이 아닌 타자(他者)에 의해서 변화하며 일시적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꼭 그렇게 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즉 우리의 인격 내부에 변화를 일으키는 세력인 성령에 의해 마음이 새롭게 계속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 선하고 –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선’을 의미한다. 다만 본 절에서 바오로는 ‘선’의 기준을 하느님께 두고 있다. 마음에 들며 – 하느님께서는 그의 뜻이 이뤄지거나, 그의 뜻과 일치될 때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뜻에 합당하게 생을 영위하거나, 피조 세계가 원래 목적대로 진행되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 완전한 – 인간의 뜻은 그 어떤 것도 온전할 수 없지만 계시된 하느님의 뜻을 뛰어난 특성은 그 자체가 온전한 것이다. 이는 그 뜻을 가지신 하느님 자신이 온전한 분이기 때문이다.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 하느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말은 판단하거나 시험한다는 의미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인정한다는 것이다(Murray). 신자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알아야 하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계속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한다.
복 음 : 마태 16, 21-27 <주 석>
21절 : ‘그때부터’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제 나타날 모든 시대를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더 이상 공식적인 선포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선포가 ‘그 때부터 그는 … 시작했다’로 시작된 것과 같이, 그의 수난에 관련된 선포도 역시 이와 같이 시작된다. ‘밝히기 시작했다.’ 이 말은 신적인 비밀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22절 : 마태오는 마르코를 넘어서서 베드로의 반대를 문자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그를 특별히 부각시킨다.
23절 : ‘걸림’이라는 예수의 비난도 역시 마르코에서는 빠져 있다. 시온을 위한 주춧돌로 놓여진(이사 28, 16), 그러나 또한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이사 8,14.15) ‘선택된 돌’에 관한 말들도 초기 공동체 내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다. 이 공동체는 하느님에 의해 새로운 지식을 은혜로 부여받으며 하늘나라에 접근해 간다. 그러나 또한 이 공동체는 아직도 시련 속에서 살아가며 더욱이 심판의 위협조차 받고 있다. ‘사탄의 깊은 비밀’(묵시 2,24) 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불복종 가운데서 경험하며, 특별히 그들이 십자가의 신학, 아니면 더 정확히 말해서 십자가의 실천에 저항하는 데서 경험하게 된다. 거기에서 그들은 사탄의 깊은 비밀을 극복해야 한다.
24절 : 제자들만이 예수를 따르려고 결단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큰 무리와 구별되는 반면, 마르코는 모두에 대한 부름을 강조하며, 누가 순종하며 또한 누가 순종하지 않는가는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보이게 된다. 따라서 이 말은 마태오에서는 23절의 ‘물러가라’라는 말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시련과 새로운 따름은 제자들의 삶 속에서도 계속해서 일어난다.
25절 : 마태오는 도래하는 나라에서의 환전한 생명이 현실화되는 것에 대한 놀라움을 생각하고 있다.
26절 : 심판을 위한 사람의 아들의 도래는 부름에 근거를 준다.
27절 : 인간의 행동에 대한 보상이 언급되어 있다. 이 명제가 충실한 자들에 대한 보답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마태오는 아마도 제자들에게 향해 있는 이 단락에서도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며, 이 때문에 ‘일들’ 대신에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로써 많은 개체 행위로 분리되지 않은 통일체로서의 신앙의 삶이 고찰되었다.
연중 22주일 강론 (가해)
오소서 성령님!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와의 대화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베드로 사도가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답을 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수위권을 부여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 사도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 받아야 하는데,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방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해 볼 점은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에 관해서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무슨 일을 할 때 자기 일을 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처럼 착각하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내 뜻대로 행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가장 인간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을 위로해 주려는 마음으로, 그리고 자기가 가장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로서 당연히 예수님을 말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적극적으로 말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는 꾸지람을 들었던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는 자신만큼 하느님 뜻에 가깝게 그리고 예수님을 도와 하느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일을 자기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리어 구원을 이룩하려고 하는 하느님의 일에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시는 예수님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따르는 스승님께서 수난받으시러 가신다는데 말리지 않을 제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경험 한 다음에 비로서야 하느님의 일(뜻)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동참하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성서를 보면 12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처럼 그리고 마귀 두목인 베엘제불이 가장 하느님께 가까이 있다가 하느님을 배반한 것처럼 진정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가장 잘 알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의 우리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교회의 뜻에 따라 일을 한다 하더라도 쉽사리 그 일의 주인공은 내가 되어 버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활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사람들의 눈길과 세상의 논리에 신앙인임을 숨기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방해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들은 하느님의 일을 깨달을 수 있기란 제자들보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비해 지금은 우리의 믿음(신앙)을 흔드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점차 개인주의화 되고, 돈·권력·명예를 얻으면 아쉬움 없이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세상은 이미 하느님의 논리, 기준이 아닌 세상의 논리와 세상의 기준을 더욱 중시합니다. 또 그것이 마치 진리인 양, 그것이 최고인 양 생각하는 세속화의 시대에 살고 있기에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란 매우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산다고 해서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셨듯이, 정작 중요한 생명을 얻으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모두 얻고 편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영원을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시대에서 살지만 우리들의 일과 하느님의 일(뜻)을 헤아려 신앙인으로서 그분의 일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려움이 따르는 이 모든 것들을 예수님께서는 ‘제 십자가’라 표현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후에 예수님의 이런 깨우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원하신 일, 하느님이 뜻하신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길 원했고, 자신의 지난 행위를 반성하면서 예수님과 같이 똑바로 못 박힐 수 없다하여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나의 신앙생활에 만족하며 생활하지만, 믿음이 강하고 신앙심이 있다고 하는 우리들일수록 잘못하면 내 일을 하느님의 일처럼 여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약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그러했다면 그런 우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오늘 부터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에 맞갖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연중 제 22 주일
1. 김정진 신부(가)/ 2 2. 김몽은 신부(가)/ 3
3. 양병묵 신부(가)/ 5 4. 최기산 신부(가)/ 7
5. 강길웅 신부(가)/ 9 6. 교구 주보(가)/ 11
7. 최인호 작가(가)/ 12 8. 주님의 길은(가)/ 13
1.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십자가와 사랑의 길
김정진 신부
우리가 얼핏 느끼는 점은 십자가의 길이라 하면 어딘가 무겁고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반면에 사랑의 길이라 하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을 갖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함께 붙어 다니는 것이고 불가분의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비근한 예로서 자녀를 극진히 사랑하는 어버이들은 항시 자식들이 혹시나 병들지 않을까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마음의 고통을 느끼며 집에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놓지 않는 그런 경우입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마음의 고통은 심한 것이며 사랑과 고통은 정비례가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에 관하여 말씀하시며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당신의 제자가 되는 유일무이한 길이란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자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하시려고 오신 것도 사랑에서이며 인류 구원이란 대사업도 십자가상의 사랑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절정이며 성부의 사랑이 최고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천주 성부의 준엄하신 정의와 공의하심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게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천주 성부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는 조금도 대립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성부이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발로의 모습입니다..
성경을 보면 천주 성부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 붙이심으로써 정말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합니다 (요한 3:16). 성부께서 예수님을 지상에 파견하실 적에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바라시고 또 명하신 것은 여하한 것과도 타협하지 말고 오직 사랑의 길을 최후까지 거닐어라, 또한 사랑의 힘으로 죄악의 권세에 승리하여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신자 여러분! 죄악이 팽창한 사회에서 타협할 줄 모르는 예수님의 사랑이 죄로 마비된 당신의 인간들과 충돌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죄악으로 눈이 어두워진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활동은 자기들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요 위험한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필사코 예수님을 살해하여 세상에서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 일체의 이기주의를 떠나 자신을 방어할 권력을 포기한 사람은 온전히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여 천사들의 정예부대에 원조를 청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몸을 숨시기려고도, 당신의 교훈을 철회하시려고도, 당신의 태도를 고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의 사형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재판관 아 에 대령하게 되셨고 십자가상에 매달리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보다 훨씬 더 쉽고 가벼운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하는 말씀 한 마디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최고로 드러낼 수 있는 곳은 십자가상이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성부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고 하신 말씀을 실제 행동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상에 달리심으로써 인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 자신만이 십자가를 통하여, 즉 수고 수난과 죽음이란 형극의 길을 걸었을 뿐더러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직제자들 즉 사도들도 이런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였습니다 가령 성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교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박해와 시련을 겪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에게 각별히 어려움과 고통과 단련을 받게 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명시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신 말씀이 오늘처럼 실감 있게 들려오는 때가 없었습니다. 십자가가 그렇게도 우리에게 좋은 존재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입에는 쓴 약이 병에는 좋다는 격이겠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십자가를 대신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처럼 우리를 천국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의 길이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즉 고통의 길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하느님께 봉사하고 인간을 구원하는데 절대로 필요한 것임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아멘.
2.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신을 끊어버리라
김몽은 신부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주셨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하고 말리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꾸짖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바라고 원하지만,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기를 꺼려하는 수가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에 빠질 수 있는 우리를 깨우쳐 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바로 이 세상을 구하러 온 메시아로서 반드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속죄 제물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수제자인 베드로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만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있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구원의 올바른 길이 아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사탄에게 자신을 허락한 것이므로 천국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뵈옵는데 장애물이 된다. 예수님께서 인간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갈 길을 가리키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 처지를 살펴보건데, 인간은 유한한 육체를 갖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악과 죄의 세력에 지배되고 있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천국으로 초대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무한한 사랑과 영광에 감사하면서,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하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부터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거룩하고 진리의 생활을 함으로써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로부터 자유 의지를 받은 인간은 인격적으로 인간성을 완성해 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구원의 길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계속적인 십자가를 지는 생활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해 가는 것은 원칙으로 삼는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희생의 짐을 진다는 말이다. 그 이웃을 섬김으로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시간, 노력, 안일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께 온전히 복종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매일의 생활에 새겨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여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25)라는 말씀은, 사람의 갈 길은 어떤 길을 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게 되어있다.
즉 그 하나는 이기적인 길로서 하느님의 길보다 자기 길을 택하는 것이며, 또 다른 길은 자기보다는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라는 뜻이다. 두 길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은 우리 자유 의지에 속한다. 선택이 없다면 자유도 없다. 선택에는 우리에게 위험이 내포되어 있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자연적 진리에 속한다. 한 알의 씨가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경건한 충고나 권고가 아니라, 생명의 원칙이요 태초부터의 하느님의 뜻이 그러한 것이다.
삶을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 나가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참 삶은 영혼의 평화와 마음의 기쁨을 누리며 가치있는 세상을 사는 것으로서, 이는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봉사의 즐거움을 모르면 그 삶 자체가 무가치하고 마침내는 영원한 삶을 잃게 된다. 그의 삶은 온전히 땅에서 썩지 않는 무의미한 삶이 되고 말 것이다.
3.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사탄아 물러가라!
양병묵 신부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장 큰 권한을 맡기시고 사랑하시던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이기에 더욱 이해가 안 가는 말씀입니다. “시몬 바르요나 당신은 베드로(반석)입니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데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또 나는 당신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습니다. 당신이 땅에서 매어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인 채로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어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풀린 채로 있을 것입니다”(마태오 16,17-19).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 당신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합니까?”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하지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시오”하고 이르셨다. 이와 같이 “내 양들을 잘 돌보시오”(요한 21,15-17)하시기를 세 번씩이나 당부하시어 교회의 모든 성직자들까지도 돌보라고 하실 만큼 사랑하시던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위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볼 때 교회를 통치할 권한과 교회의 무류성을 보증해 주셨지만 인간 베드로로서는 약점과 잘못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고 잘못을 했을 때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예로써 예수께서 대제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잡혀 십자가 형을 받고 돌아가실 것을 알려 주셨을 때 베드로는 비록 예수님과 같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을 때 예수께서는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배반하리라는 것을 예고하셨고 베드로는 참으로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잘못을 깨닫고 절치 통곡했음을 성서에서 보았습니다.
오늘 성서에서도 예수께서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그들의 손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하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만 믿고 그 분을 항상 같이 따라다니면서 그 분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아서 이제는 이 분만 꼭 붙들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겁날 것이 없을뿐더러 한 자리 톡톡히 하리라고 생각하였던 베드로로서는 당연히 안된다고 뛸 만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강생하신 목적, 모든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수고 수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무고하신 계획에 반대하는 베드로의 행동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의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가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항상 같이 대하고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서 때때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장애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신자로서 의무를 지키기 위해 주일 미사에 참여하려는 우리를 더 달콤한 하루의 휴일을 즐기기 위해 등신, 낚시, 야유회, 운동 혹은 다방, 술집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유인하는 경우, 또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신자들에게 재물의 탐욕을 일으켜서 같이 불의의 손을 대도록 유인하는 경우 우리는 과연 오늘 예수님과 같이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가장 사랑하고 믿던 제자였지만 당신의 뜻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방해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까지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신앙생활을 올바로 지켜 나가기 위해서 장애되는 것을 용감히 끊어버리고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오늘 성서에서 말씀하신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마태오 16,24-26)하신 말씀을 잘 묵상합시다.
4.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십자가, 싫어요”
최기산 신부
ꡒ너희 집에서 뿔 달린 시커먼 마귀 같은 것이 왔다갔다 하는 걸 봤어ꡓ라고 누가 내게 말하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ꡒ네 얼굴에 사탄의 그림자가 보여ꡓ라고 말하면 가만히 있을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미친놈이라고 쏘아붙이든지 입술이 터지라고 주먹을 날릴 것이다. 어떤 신자가 내게 말했다. ꡒ신부님, 저희 집에 오셔서 기도 좀 해주세요. 아파트에 새로 입주했는데 불안해서 죽겠어요.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저희 집 옆으로 시커먼 것이 스쳐 지나가는 걸 봤대요.ꡓ 사람은 약하다. 특히 사탄의 그림자가 지나갔다고 하면 심장이 떨리는 것이다. 하물며 사탄이라니!
사탄아 물러가라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즉 성유로 축성된 임금으로 고백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임금님이 힘없이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받다가 죽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베드로가 이해한 임금은 백전백승의 승전보를 계속 들려주는 그런 임금이었다. 다분히 정치적인 메시아로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꾸짖는다. ꡒ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고난받고 죽다니요.ꡓ 메시아는 승자이지 패자일 수 없다고 꾸짖고 있다. 예수님은 ꡒ사탄아 물러가라ꡓ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받으실 때 사탄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ꡒ고약한 놈 같으니라고!ꡓ라는 말보다 ꡒ사탄아 물러가라ꡓ는 말이 더 심한 표현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ꡒ이 못난 인간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뜻을 먼저 생각하다니!ꡓ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ꡒ사탄 같은 놈!ꡓ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사탄이라고 쏘아 붙이셨다.
십자가를 지고 죽게 된다는 예수님 말씀 앞에 사색이 됐던 베드로처럼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멈칫하게 된다. 십자가는 생각도 하기 싫어한다. 십자가 소리만 들어도 알러지가 생기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과는 다른 때가 많다. ꡒ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같지 않다.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같지 않다ꡓ(이사 55, 8 참조).
예수님은 ꡒ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영생을 얻는다ꡓ고 말씀하셨다.
십자가 없이는 살 수 없어
인간은 누구나 십자가를 지고 산다. 종로 네거리를 막고 서서 물어 보라. 십자가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경제․가족․건강․사랑․친구․회사 문제 등등. 바오로 사도도 항시 가시로 찔리는 것 같은 고난을 당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그 고난이 힘겨워 기도도 했었지만 나중에 깨달은 것은 그런 십자가가 없으면 자신이 너무 교만해질까봐 주님께서 주신 은총이었다는 것이다.(Ⅱ 고린 12, 7―10) 그는 ꡒ주님의 십자가 이외에 자기에겐 자랑할 것이 없다ꡓ(갈라 6, 14)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ꡒ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ꡓ(필립 3, 10)라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메시지를 채택했다. 명문으로 된 이 메시지는 고통받는 많은 이에게 우리는 육체적 건강을 도모해 주거나 아픔을 감소시켜줄 수 없음을 마음 아파하지만 보다 깊고 보다 고귀한 그 무엇을 줄 수 있으니, 진리를 말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그분과의 일치만이 참 위로를 줄 것이며, 그분은 고통을 없애지도 않으셨고 그 신비를 밝히지도 않으셨으며 다만 몸소 그 고통을 당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이 고통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해답이라는 것이다. 고통받는 이들은 소외되거나 버림받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부름받은 자이고, 그대들의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산 증인이 될 수 있다고 전한다. 나의 십자가, 그것은 내게 맞는 십자가다. 주님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소경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냄이라고 설명하지 않으셨는가!
복음의 메시지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 세상에서 승자가 되라고 주장한다. 고통받고 십자가 지고 죽는 패자가 웬말이냐는 것이다. 원수들을 다 물리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근본적인 승리 즉 죽음과 악마를 쳐부수시어 진정한 승리를 하고자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설명하신다. 세상의 승리보다 그것은 더 영광스러운 승리다.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승리에 대한 사고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이 세상에서의 승리, 즉 병고도 고난도 없고 그저 육적인 만족만 있는 그런 승리, 나만을 살찌우고, 나만이 승리하는 이 세상에서의 승리를 갈망하며 예수님께 당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세야 있건 말건 지금 이 세상에서 나만 부귀영화를 누리는 그런 승리, 사탄의 지배 아래 살건 말건 여기에서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사고는 없는가? 우리는 영적인 승리를 더욱 값지게 여겨야 할 것이다. 영적인 승리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승리고 사탄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승리다.
미래를 위해서 어떤 왕들은 피라미드를 세우고 병마총을 만들고 지하 궁궐을 짓기도 했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죽어서 입을 옷을 예쁜 모시로 만들기도 한다. 그런 것이 영생을 위하여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린 자기의 십자가를 매일 기쁘게 지고 진정한 인생의 승리의 길을 향해서 그리스도 가신 길을 가야 한다.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특히 이웃을 위해 지는 십자가는 주님을 대신하여 지는 십자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5.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사탄아 물러가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예레 20,7~9 (주의 말씀을 전하고 그 덕에 욕을 먹었습니다)
제2독서 로마 12,1~2 (여러분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복 음 마태 16,21~27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려야 한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그 길이 고생스럽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 자체가 모순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사랑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도 사랑 때문에 울어보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도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그 길이 편안하고 즐거우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사랑하셨던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했던 대단히 불우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도 자기는 하느님의 꾐에 빠져 신세만 망쳤다고 했습니다.
신앙 안에 위대한 인생은 이처럼 세상에서는 모순처럼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결코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특히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그 걸어가는 길이 대단히 험난합니다. 예수님도 그랬고 성모님도 그랬으며 모든 성인 성녀들이 한결같이 그 피눈물나는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불가에서는 전생에 죄가 많은 탓이라고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축복 받은 사람들이 걷는 위대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잡혀 고난을 받고 죽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하늘같이 믿었던 예수님이 바보같이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자 그들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는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극찬을 받은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도 받은 가장 신임받은 제자였습니다. 아마 그래서 약간은 우쭐거렸던 그였기에 주님께서 고난을 받는다고 하시자 마치 자기가 예수님을 구해 드리거나 할 것처럼 나서서 큰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반응은 아주 의외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두번째 충격을 받습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반대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하느님의 뜻에서 빗나가게 하려는 세력, 하느님을 등에 업는 인간의 빗나간 야망 등이 바로 사탄입니다.
따라서 사탄은 의외로 주님의 가까운 측근에서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옛날 루치펠도 하느님의 가장 가까운 천사였지만 결국 하느님께 반기를 드는 사탄의 두목이 되었고 베드로도 주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였지만 결국 사탄으로 전락되는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열심하게 사는 자들은 그래서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예수님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본당에 사목회장까지 지낸 열심한 형제가 있었는데 후임 사목회장이 일을 적극적으로 열심히 추진하자 본당 일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게 됩니다.
마침 성당에 교육관이 필요해서 교육관 건립을 추진 중이었는데 사방으로 신자들에게 전화를 해서 건립을 반대하는 여론을 조장 시켰습니다. 그러나 교육관은 결국 훌륭하게 건립되었고 또한 모든 신자들이 보람을 느끼고 기뻐하자 이에 처신이 어렵게 된 그 사람은 다른 구역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반대자는 가까운 곳에서 쉽게 나옵니다. 매우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그것도 사랑을 많이 받았던 자들이 결국 배신을 합니다. 6.25때도 구호물자로 재미를 본 자들은 많이 냉담했으며 그때 혜택도 못받은 자들이 결국 본당을 지키고 성장시켰던 일은 우리가 함께 경험했던 일입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고통’이라는 진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피해야 하고 고난은 물리쳐야 합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주 악에서 선을 일으키시기를 원하시며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께 다가오기를 기대하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산다면 그는 사탄입니다. 고통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산다면 그는 사탄입니다. 고통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은 모르고 편안함 안에 담겨진 인간의 뜻만 고집하는 어리석은 사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눈물이 많고 시련이 많으며 억울한 사연이 많은 것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청신호가 됩니다. 받을 사랑이 크기 때문에 골고타로 올라가길 원하시며 얻을 은총이 크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십자가는 무엇이며 팔자가 사납다고 한탄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아픈 현실이 하느님의 사랑의 크신 증거입니다.
6.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너는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교구 주보
1. 주님을 따르려면
오늘 복음(마태 16,21-27)에서 예수님은 머지않아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층으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예고하신다. 조금전까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수난 예고를 듣고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된다고 말린다. 베드로의 만류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하며 꾸짖으신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24-25절)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고난의 길을 걷겠다는 예수님의 의지와 인간적인 정 때문에 고난의 길을 만류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잘 대비되어 드러난 장면이다.
2. 요구되는 두 조건
우리는 주님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없는 부활과 죽음 없는 영생을 꿈꾸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요구되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바로 자아 부정과 십자가 수락이 그것이다. 자아 부정은 무조건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 역행하는 자아를 버리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참된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일상 가운데서 당하는 여러 어려움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십자가란 억울함을 말없이 당하며 남을 위해 수난당한 형틀이기 때문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때로는 나의 진의(眞意)가 오해당하고 남들로부터 버림받을 각오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3. 신앙생활이란
모두에게서 인정받고 이해받기를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인지도 모른다. 신앙생활이란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어도”(예레 20,8)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역설적인 생활이다. 진정 값지고 소중한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갖은 희생을 통하여 주어진다. 이러한 마음과 열정 없이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자칫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생활로 흐를 수 있다. 다시금 우리의 모습이 과연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로마 12,1 참조)를 정직하게 물어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7.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주님을 위로할 수 있는 단 한마디 말
최인호 베드로/작가
< 복음서의 대화>
예수- 제자들아, 나는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베드로-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 오늘날의 대화 >
예수- 제자들아, 나는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주님, 슬프지만 그것은 주님의 운명입니다. 어서 그렇게 하십시오. 주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고, 구원하는 방법은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반드시 살아나십시오. 주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 다시 부활하셔야만 우리의 그리스도가 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예수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마태 23,33) 너희는 또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있구나.
그리스도인 주님, 저희가 무엇을 잘못하였단 말입니까. 주님께서 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만 우리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아닙니까.
예수- 너희들을 위해서 내가 언제까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만 한단 말이냐. 나는 2천 년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계속 너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 손과 발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리고 있단다. 이젠 정말 십자가라면 신물이 난다. 난 이제 십자가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리스도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우리더러 어떻게 하란 말씀이십니까. 주님께서 길 잃은 어린 양들을 버리시고, 스스로 그리스도이기를 포기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예수- 너희들의 말은 정답이다. 그러나 그 정답을 가르쳐주신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살고있는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임을 너희들은 어찌 모르느냐. 이제 난 지쳤다. 이제야말로 나 대신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할 때인 것이다. 이젠 더이상 나더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란 말은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들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리스도인- 주님께서 듣고 싶은 단 한마디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수- 너희들이 알면 그 말을 해주겠느냐?
그리스도인- 물론입니다.
예수- 제발 말해다오. 그러면 내가 위로받을 것이다. 베드로처럼 ‘주님, 십자가에 못박혀서는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라고 말이다.
8.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21-27 (가) 주님의 길은 자기 봉헌과 십자가의 길
세례를 받은 지 일년 남짓 지난 한 신자분이 피정모임의 생활나눔 시간 중에 다음의 이야기를 했다. “저는 처음에는 세례성사를 받고 신자가 되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없어지지 않더라도 가벼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세상의 고통과 수난을 덜어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때로는 그전보다 내 삶을 더 고통스럽고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과거에는 의식도 못하고 지나가는 것들이, 심한 죄책감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행동도 더 부담스러워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즉 제가 느끼는 만큼 죄를 조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느낄 수 있게 해주십니다. 왜, 신앙의 길이 십자가의 길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원과 생명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신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며, 주님이 그런 일을 당해선 안 된다며 만류한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에 대해 예수님은 심한 꾸지람을 하신다.「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베드로는 왜 항의했을까? 베드로도 당시 유대인이나 제자들처럼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아로 예수님을 생각했던 것 같다. 따라서 베드로의 인간적 생각으로,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죽는 것을 도대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늘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참다운 삶은 순간적이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평화와 기쁨을 지향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의 욕심대로만 산다면, 우리 삶의 결과는 너무나 분명해 진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되려면,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또한 지혜와 분별력도 요구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하고 은총을 구할 때 말이다.
과연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이고, 그것을 기꺼이 지고 주님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
이어서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혐오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자기 결단이며, 적극적인 삶의 실현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었다. 물론 인간적인 판단이나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길이었다. (이사 55,8) 매일의 삶 속에서 구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침도 덧붙이신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해서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16,2).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되면 세상 속에서는 고통과 수난의 길을 가야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인간의 욕심만을 쫓아가면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가르침이다. 인간의 눈에는 당장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행위가 결국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
신앙인이 가야하는 정도(正道),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즉 주님을 따르는 것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각오한 셈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통 세상에서 죄와 악의 유혹을 받고 있다. 아직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된 상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으로 가는 과정 중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냐, 혹은 세속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늘 서있게 된다.
때로는 세속 안에 나 자신이 포함된다. 사실 마지막의 선택은 항상 하느님과 나 자신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버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세속 안에서 쉽지 않고 힘들고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 안에 결과는 분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가치 있고 참다운 행복의 삶이 되려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 길의 결과는 주님께서 이미 증거 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