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대림 제3주일

1. 강우일 주교 (특강) / 2       2. 오실분이 당신(가) / 4

3. 정절수 신부 (가) / 6          4. 조순창 신부 (가) / 8

5. 김현준 신부 (가) / 10        6. 강길웅 신부 (가) / 12

7. 변희선 신부 (가) / 14        8. 당신은 가짜 (가) / 15



1.      대림절 특강 (3주일) 義와 慈悲의 기쁨을 노래하라

               각자 위치에서 정의를 실천할 때 참된 기쁨을 누림   < 강우일 주교 >





대림 3주일인 오늘 전 세계 교회는 한마디로 용솟음치는 기쁨을 노래합니다. 첫째 독서인 예언자 스바니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수도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이

말씀을 받는 응송에서도 우리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위대하시니 기뻐하며 찬미하여라\”하고 화답합니다.

  

둘째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제 여러분,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성서에서 이렇게 반복해 외치는 이 기쁨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성서 말씀은 우선 일차적으로는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로니아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온갖 서러움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제 적국이 멸망하고 해방의 때가 을 것이라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사실은 아주 더 훗날 이뤄질, 더 큰 해방과 희망의 내용을 담고 있는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 지배를 벗어나서 독립하는 정치적인 해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주님이 몸소 이스라엘을 찾아오시어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악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괴롭힐 수 있는 어떠한 고통도 영원히 씻어 없애버리시는 인간 역사의 완성의 때가 결정적으로 온다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쁨에 가득차 있는 스바니야와 바오로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쁨이 있는가? 우리들의 삶에 기쁨이 넘쳐흘러 다른 이웃에게 \’기뻐하십시오\’라고 나눠줄 우리 자신의 기쁨이 있는가?

 그동안 우리나라 사회는 모든 사람이 잠 안자고, 놀 것 안 놀고 정말 정신 없이 일해왔습니다. 세계 다른 나라들이 1백년 걸릴 것을 30년에 달성하는 속도로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올림픽도 치르고 엑스포도 치르며 다른 나라 사람의 칭찬도 듣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국민 모두가 기쁨을 느꼈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배가뒤 집어지고, 비행기가 떨어지며, 건물이 무너지고, 다리가 주저앉는 대형사고를 겪으면서, 우리는 기쁨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라 일을 책임진 이들이 개인적인 명성에만 매달리고, 공무원이 문책을 두려워해서 책임져야 할 일은 기피하고, 세금 걷는 이들은 국민에게서 거둔 세금을 자기 주머니에 바꿔 넣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느꼈던 기쁨은, 진실한 기쁨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우쭐한 기분에서 나온 공허한 기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실된 기쁨은 상황이 바뀌었다고 그렇게 쉽게 식어버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여름 아침 이슬처럼 잠시 반짝이다 사라지는 기쁨이 아니라, 사도 바오로처럼, 스바니야 예언자처럼 참된 기쁨을 차지하기 위해선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성서 안에는 또 한 분 깊은 기쁨을 간직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분은 세자 요한입니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는 자신의 명성, 인기 같은 것은 염두에 없었습니다. 요한의 기쁨의 원천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이뤄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가 실현되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기쁨을 보면서 오늘 우리가 진정한 기쁨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누군가를 비판하기 전에, 제도를 논하고 법률의 미비함을 탓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각자의 처지에서 해야 할 정의를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교 선생님은 봉투를 거절하고 봉급에 만족하며, 공무원은 과외의 보수를 요구하지 말고 국민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고위층은 특권을 행사하지 말고 서민들의 고충에 동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용주는 고용인을 가족처럼 대우할 줄 알고, 기업인은 기업의 이득을 사회의 혜택 받지 못한 이들에게 환원해야 합니다.

  

남의 집을 짓는 노동자는 자기 집을 짓는 마음으로 안 보이는 구석구석까지 정성껏 손질하고, 식품을 가공하는 사람은 자기 자녀에게 먹이려는 마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북한 동포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이들을 기억하여 낭비하지 말며, 값비싼 새 옷을 사기전에는 헐벗은 가난한 나라, 이웃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이를 낭비하기 전에 하느님이 오랜 세월 걸려 씨뿌리고 가꾸신 나무를 생각하고, 구정물을 하수구에 흘려 보내기 전에 하느님이 솟게 하신 맑은 시냇물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자그마한 행동들이, 당장엔 우리 생활에 불편을 주고 불이익을 준다 하여도 그 불이익을 감수하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의와 자비를 우리 각자가 사는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실현해 나갈 때, 우리 개인과 사회 전체가 참된 기쁨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하느님이 원하시는 의와 자비를 실현하며 기쁨에 가득 찰 때, 하느님께서도 그런 우리를 보시고 기쁨에 넘치실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기쁨은 하느님의 기쁨과 통하게 됩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예루살렘 시민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시온아 두려워 말라, 기운을 내어라. 너를 구해내신 용사, 네 주 하느님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여름 이슬같이 공허한 기쁨이 아니라 참된 기쁨을 찾아 나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우리를 오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며 더덩실 춤을 추시게 해드리지 않겠습니까?













 2.          대림 제3주일 (가)해 마태 11.2-11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





세자 요한은 일찍이 예수를 메시아로 증거하시고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주셨습니다. 그 요한께서 오늘은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시어 ꡒ마땅히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흑은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리이까ꡓ라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께서 그것을 모르시다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물어 보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요한이 다른 모든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적국 로마를 쳐부수고 참된 이스라엘민의 왕권을 회복하여, 이스라엘이야말로 만백성 중에 간택된 민족이란 것을 입증할 만큼 영광스러운 정복자를, 위풍당당한 군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바로 요한이 헤로데 왕이 그 계수를 아내로 취한 것을 공격한 죄로 감옥에 갇혀 괴로워하고 있던 때가 아닙니까? 헤로데는 진짜 유태인도 아니면서 유태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이 쿠데타를 기다렸다는 것은, 오랜 세월 기다려 왔으며 지금 눈앞에 서 계신 구세주의 쿠데타를 기다렸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이까ꡓ–요한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질문 뒤에는 이런 듯이 포함되어 있습니다–ꡒ당신이 구세주시라면, 당신은 구세주이신데 왜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왜 나를 감옥에서 꺼내주시지 않습니까?ꡓ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흔들릴 때 이 일을 생각합시다. 세자 요한께서도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을. 예수의 대답은 당신이 그러한 종류의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요한에게 일러줍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 제52장 13절부터 15절까지와 53장의 이른바 ꡐ고통받는 종ꡑ의 신비스런 노래를 빌어 당신의 정체를 묘사하십니다. 예수는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실 이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여 모든 종류의 속박으로부터 풀어 주실 이신 것입니다. 죄는 인간이 천주께 자신을 바치지 않고 인간 자신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인간을 괴롭히는 온갖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천주의 사랑으로 인간의 죄에 대항하심으로써 정복하실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에게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자는 복되도다ꡓ고 말씀하셨음직합니다. 이 말씀은 요한에게는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였을 것입니다. 요한은 헤로디아의 딸의 요구로 목이 멀어질 때까지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를, 감옥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자기 자신과 헤로데와 관련시켜서 곰곰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보다 먼저 오시어 그리스도의 생애와 참혹한 죽음까지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때에 요한에게 물으셨던 말씀을 오늘 우리들에게도 묻고 계십니다–ꡒ너는 어떤 종류의 교회를 원하느냐? 영화와 권세와, 큰 빌딩과 높은 탑과 방대한 신자로써 그 승리가 증명되는 그런 교회를 원하느냐ꡓ고. 교회도 메시아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나게 하는 고통받는 천주의 종이라는 것이 인정될 것입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 설파하는 천주의 말씀만으로는 넉넉지 못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천주의 말씀을 설파하기만 하고 듣기만 하였지 행동화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메시아께서는 그 당시 가난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마귀를 쫓아내 주신 사람 또는 문둥병자같은 사람들 사이에 주로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서 하신 기적들을 보고 예수를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가톨릭 신자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성공도 못하고, 아름답지도 못하고, 매력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족 중에도,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다든지, 인정미가 없다든지, 사려가 깊지 못하다든지, 눈치가 없다든지 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물어봅니다–“나는 이 세계를 위해, 이 나라를 위해, 이 마을을 위해, 이 단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ꡓ라든지, 아니면 “나는 내 인생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ꡓ라고 물어 봅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종의 신비 속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해답인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가, 악과 혼란과 포악함과 냉정함에 대해 용서와 사랑으로 대항함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는 산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세속적으로는 결코 성공을 하지 못했습니다. 천주께서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 나타내 보이도록 마련하신 계획은 되어 있지만, 사도와 사도간에, 제자와 제자간에, 이 파와 저 파간에,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간에, 지도자와 피지도자간에 있었던 의견의 대립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현대적인 표현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많은 의견의 대립이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옛날 요한에게 말씀하셨듯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나에게 대한 신뢰를 잃지 아니하는 자는 복되다ꡓ고. 지금은 요한의 그것만큼 커다란 신앙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 안에서 우리가 맡은 직분은 무엇이며, 그리스도를 세상에 대해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대림 시기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열렬한 그리움을 느끼며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오소서, 주 예수여, 오소서.ꡓ











 3.         대림 제3주일 (가)해 마태 11,2~11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

                                                    정철수 신부



‘오신다던 사람’ 성실하게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자.

우리는 지금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사천 년 동안이나 기다렸던 메시아를 4주간에 걸쳐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를 대림절이라고 하고 오늘로 3주째를 맞았습니다.

우리는 드물지 않게 무엇을 기다렸었고 불과 몇 시간 후에 무엇인가 또는 누군가를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다방에서 또는 집에서 애인이나 친한 벗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절실하게 만나야할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을 가져다줍니다.



자모이신 교회는 이러한 초조함 속에서 낭군, 즉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역시 초조함 속에서 그러나 기대에 부풀어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2천년 전에 이미 세상에 오신 주님을 또 다시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모든 의미의 예수님의 오심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단 완전히 세상에 오신 주님의 강생을, 그리고 우리 인간의 반려로서 이 자리에 오시는 주님의 현존을, 나아가 세상마칠 때 영광중에 엄위로운 심판관으로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 이 모두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메시아를 고대하고 그의 길을 앞서 닦았던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다림에 지쳐서 혹은 기대에 부풀어서 “오실 분이 바로 당신이십니까?” 하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대단히 칭찬했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메시아의 선구자로 기도와 고행의 생활로써 자신을 닦았고 뿐만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기도와 고행을, 그리고 회개를 권고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왕국이 임하기 위해 의․식․주의 어려움을 스스로 택했고, 열성을 가지고 오심을 준비하다 체포당하고 투옥당하는 고초를 겪었으며, 마침내는 그러한 일상 때문에 죽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열렬히 메시아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준비시킨 요한에게 예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요한처럼 열렬히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이웃에게 주의 오심을 준비시킨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 몇 가지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오늘 복음을 중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사치와 쾌락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십니다. 사치한 옷을 입은 속된 사람은 왕궁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요한처럼 광야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기에는 너무나 감각적 쾌락과 자질구레한 일들에 눈이 어두워져 주님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쾌락의 생활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주님을 찾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둘째로, 바람이 부는 데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기도와 선생을 항구하게 계속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한과 같이 용기있게 초지일관해야 됩니다. 우리의 이기적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할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셋째로,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표시로 사랑을 가르쳐 주십니다. 당신 스스로 사랑을 실천하시고 그 표시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으며 앉은뱅이를 걷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지금 목매이게 기다리는 우리의 주님은 질병에 허덕이는 자들과 가난하고 설움받는 사람들 편이 되셨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세 가지 점을 요약해 본다면 우리가 이 대림절에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가 있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화려한 곳을 입고 왕궁에 있는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겠으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되지 말고 확고한 신앙에 뿌리박은 사랑의 기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활 속에 그리스도를 모셔들이고, 다음으로 우리가 모여 들인 그분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활 안에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도록 이끌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즉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안전하고 안락한 먼 곳에 서서 동정의 뜻만 표시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소질과 특기는 우리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사용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에도 사용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요한과 같이 고통을 당할 각오도 해야 됩니다. 요한 세자처럼 주님을 열렬히 기다리며 주님의 오심을 스스로 준비할 뿐 아니라, 이웃 형제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안일을 미련 없이 버리는 사람이라면, 요한 세자처럼 주님의 대단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4.              대림 제3주일 (가)해 마태 11.2~11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

                                                     조순창 신부



서로 탓하지 말고, 기도해 주며, 선하게 살며, 하느님께 복종하자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도 반이나 지나가는 지금, 숙연히 지난 1년을 돌이켜 볼 때, 보람보다는 후회가 많은 오늘, 예수님의 성탄과 재림을 기다리는 이 대림 3주일에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에게 더 큰 희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자 이사야는 오늘 제1독서에서 들은 바대로, ‘메마른 땅 황무지에 꽃이 피고, 그들의 하느님께서 오시어 원수에게 보복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고, 사막에 샘이 터지고, 메마른 곳이 샘터가 되며, ‘거룩한 길’이라 불릴 크고 정결한 길이 훤하게 트여, 부정한 자와 맹수들이 얼씬도 못 할 길, 야훼께서 되찾으신 사람만이 이 길을 걸어, 아픔과 한숨을 간 데 없고, 끝없는 행복과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 것이라는 예언은, 이스라엘에게 고난중에도 큰 희망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요한 3,16). 때가 찾서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의 약속의 실현을 오늘 복음에서 선언하십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당신이 자란 나자렛의 회당으로 들어가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를 펴신 다음에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을 전하라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에게 시력을 주고, 억눌린 사람들을 놓아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대목을 읽으신 후,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성서의 대목이 오늘 여러분이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깊은 감명을 받고 탄복하였으나, 가파르나움에서의 기적을 행하기를 요구하므로 그들의 가운데를 지나 떠나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구세주로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고, 죄를 사해 주시고, ‘영원히 마르지 않을 생명수의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길’ 이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죄악과 불행에서 건져 주시어,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하여 주시는데, 여기에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능력,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는 ‘거룩한 길’,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께서 하신 이런 일을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리시오. 이사야의 예언대로 맹인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내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을 행복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앞 못 보고, 못 듣고 말 못하고, 팔다리가 불구이고, 병들고 묶인 사람, 때 거리 없이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눈밝고, 귀밝고, 말할 수 있고, 팔다리가 성하며, 매이지 않는 이, 가진이들인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듬뿍 받은 것이니,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보고 듣고 건강하고 자유스러워도,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차라리 눈감도 못듣고 매여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신앙의 눈으로 뵈옵고, 하느님의 구원의 진리를 듣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증거하고 전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열심히 살아가면, 병들어도, 묶여도, 가난해도, 하느님의 능력과 은혜로 잘 참아 견디며, 자유롭고 푸짐한 마음으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구세주를 나 나름으로 그리는 구세주이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얽매이고 죄많고 불구로 고생하는 이들과 함께 계시는 구세주를 믿고, 하느님의 뜻이 나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생활과, 하느님을 모시면서 사도 바울로의 교훈과 같이 ‘서로 탓하지 말고, 기도하여 주며, 세상 사치와 쾌락보다는 마땅히 해야 할 선한 일을 하여, 시기심과 이기적 야심보다는 자비를 베풀며, 위선을 버리고 진실하며, 오만과 탐욕을 버리고 겸손히 하느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길을 가는 성인들의 삶이요, 구세주의 대림을 희망을 갖고 기다리는 우리들의 생활입니다.’








5.      대림 제3주일    <마태 11,2-11> (가)     예수님의 술래잡기

                                                                      김현준 신부



  토요일 오후면, 넓은 성당마당이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 찬다. 공차기, 제기차기, 구슬치기, 고무줄 넘기, 술래잡기‥‥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의 놀이 문화도 변하는 것 같다. 같은 제기차기도 예전보다 차는 방법도 다양해졌고, 여자아이들도 즐겨한다. 딱지와 구슬은 더 화려해졌다,



  술래잡기는 노래가 다양해졌다. 나도 예전엔 구슬치기와 제기차기를 즐겨했다. 가끔 술래잡기도 했다. 그때는 노래로 술래에게 묻고 술래는 답하면서, 술래잡기를 했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잠자는 중이다. 잠꾸러기 아니냐? 세수하는 중이다. 멋쟁이 아니냐? 밥 먹는 중이다. 반찬은 뭐니? 개구리 반찬. 죽었니? 살았니? 죽었다! 하면 움직이면 안되고, 살았다! 하면 잡히지 않도록 도망가는, 그래서 움직이거나 잡힌 사람인 술래가 되는 술래잡기를 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군중들 앞에서 혼자 술래잡기를 하신다,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하면서 요한의 모습이 잡히길, 군중들이 요한이 뭐하는 사람인지를 알아듣게 증언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그런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예언자냐? 그렇다!\”(마태 11,7-9)



           정의를 말하는 사람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일 위대한 예언자로는 모세를, 제일 위대한 왕으로는 다윗을 그리며 그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처럼 ‘이미’ 이 세상에 왔지만.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하느님의 아들과 그 나라를 알리고, 미리 길을 닦는 예언자로 요한을 증언하신다.\”

  그렇다! 요한은 예언자다. 예언자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뼛속에 스며들고,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목구멍까지 가득 차서, 가두려고 애썻으나 할 수 없어 받은 ‘말씀\’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다. 마치곱사등이처럼 평생 ‘말씀\’을 등에서 내러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



  예언자는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다. 제 것을 제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말하고, 제 때에 제 말을 하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미래의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보고 들은 것(현실)을 술래잡듯이 잡아서 말하는 사람이다.



  사제는 무엇으로 성장하는가? 하는 질문이 있다면, 사제는 매일 미사 봉헌을 통해서 그리고 고해소를 통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고해소에 앉아서 혼자 이 질문과 답을 해 보며 “보러 갔다 왔습니다!”라는 고백을, 서양 신부님들은 어떻게 알아들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친척집 잔치를 보러갔다 왔다는, 그래서 주일 미사를 빠졌다는 고백인지? 영화를 보러갔다 왔다는, 그래서 나쁜 것을 보았다는 고백인지? 점을 보러갔다 왔다는, 그래서 미신을 섬겼다는 고백인지? 우리네 생활 속에서 ‘본다’는 말을 잘 쓰며, 다른 성사는 ‘받는다’고 하면서, 왜 고해성사는 ‘본다’고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사제는 “듣고 본 대로”(마태 11,4)를 단순히 듣고 본대로만이 아니라, 성찰과 반성을 통한 듣고 본 대로를 전달받는, 그래서 한층 깊은 들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누구보다도 듣고 본대로를 말하는 예언자의 소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 예언자적 소명을 예수님은 요한에 대한 증언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모두가 예언자다 되어야



   그렇다!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마태 11, 3)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에 우리 모두가 예언자 요한보다 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돈의 질서를 깨뜨린, 제 자리에 있어야 할 돈이, 제 자리에 있지 못하고 뇌물이 되어버린 노태우 비자금! 제 자리에 있어야 할 서열과 권력이 제 자리에 있지 못하고 하극상과 반란이 되어버린 1212! 거짓과 폭력이 난무하고, 듣고 본 대로 알려지 못하고 왜곡되어버린 5.18!



  정말 이런 일들이 다시는 왜곡되거나 힘의 논리에 짓눌리거나,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감시하고, 제 말을 제 때에 하는 예언자가 되어야겠다.
















6.            대림 제3주일 (가해)    주여, 우리를 구하러 오소서      

                                                    강길웅 신부



떠돌이 나그네에게 정든 고향집보다 더 아늑하게 그리운 곳도 없습니다. 고생이 많고 시련이 크면 클수록 고향은 더 간절하게 그리워집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처음 조상 때부터 계속해서 나그네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을 버리고 사막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뒤에 그의 후손이 에집트에서 사백여 년의 노예생활을 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사십 년의 방랑생활을 했으며 바빌로니아에 끌려가서는 오십 년이 넘는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서기 70년에 로마에 멸망한 뒤에는 장장 이천 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떠돌이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고국에 정착하려는 유대인들의 염원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간절하고 더 애틋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는 바빌론 유배시의 이야기입니다. 기원 전 590년 경 에 유대인들은 오천 리나 멀리 떨어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서운 징벌이었으며, 이젠 다시 고국에 돌아갈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나라는 망할 대로 망했으며 백성들의 민족 정신도 쇠퇴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는 포로생활에 짓눌려 있는 유대인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해 폐허가 된 유다의 사막과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될 것이며 꽃과 열매가 풍성할 것이고 겁에 질리고 고통에 찌든 백성들에게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광스럽게 고국에 돌아가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이 직접 찾아오실 때에 이루어집니다. 소경은 눈을 뜨고 벙어리는 입을 열며,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뛰어다니게 됩니다. 소경에게 오직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눈을 뜨는 것입니다. 벙어리에게 오직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절름발이는 정상적으로 걸어가는 것이 제일 큰 꿈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오시면 그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냐고 물어봅니다. 요한은 그때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죽을 것이 뻔한데 모두가 애타게 기다렸던 메시아가 정말 예수가 맞는지 어쩐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어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내가 메시아다.\”, 또는 \”아니다.\”라 는 명쾌한 대답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의 제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자기 스승에게 전하도록 일러줍니다. 그것은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뛰어다니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죽은 사람까지 살아나는 아주 굉장한 사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와 같은 사건들을 보여 주고 들려 주셨느냐. 그것은 이사야가 이미 수백 년 전에 예고한 하느님이 직접 찾아오시는 현상의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로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옛날 예언자들이 말한, 메시아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 주심으로써 확신케 했던 것입니다. 요한과 그 제자들은 이사야서 35장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덧붙이시기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도 의심했으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의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을 의심하며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그들 신앙의 모순입니다.



우리는 지금, 메시아시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을 기다리는 것은 하느님이 직접 인간으로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은 마지막 날에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께 대한 기다림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이 오시는 날은, 죄로 병든 우리 모두에게 참된 구원의 날이 됩니다. 해방의 날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오직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분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꿈이 있다면 그게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바로 그 소망과 꿈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참된 평화와 행복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찾아야 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 불구자들입니다. 돈만 알고 세속에만 깊이 빠졌던 병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절름발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떠돌이였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제멋대로 헤맸던 방랑자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립시다. 고향 같은 하느님을 애타게 찾아 기다립시다.









7.              대림 제3주일 <마태 11,2-11> (가)       도토리 키재기

                                                          변희선 신부



  며칠전에 어머님의 생신이라서 우리가족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조카들의 키가 부쩍 커 보였다. 중학교 3학년인 형님의 큰아들 경준이와 우리 형제들 가운데 키가 제일 큰 남동생이 키를 재보았더니 거의 같았다. 그런 와중에 다른 조카들도 각자 키를 재느라고 부산을 떨었다.



  요즈음 사람들은 여러모로 비교 게임을 즐긴다. 누가 싸움을 제일 잘하는가 비교하느라고  링 위에서 상대를 쓰러뜨리는 권투시합이 인기가 있는가 하면, 제일 어여쁜 여성을 가려내기 위해 많은 돈을 쓰면서 각종의 미인 대회를 개최하고, 어느 나라가 돈을 가장 많이 버는가를 비교하고 경쟁하다가 급기야는 경제 전쟁이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수년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라는 잡지에 웰스라는 이름난 역사학자가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인가를 질문한 적이 있다. 여러모로 답변을 연구한 끝에 결국, 세 번째 위대한 인물로는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 둘째로는 인도 출신의 부처님, 첫째로는 예수님을 꼽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웰스가 예수님을 순수한 인간으로 보고, 다른 인물들과 비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 자신은 누구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셨을까? 예수님의 답변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요한)보다는 크다.」(11절)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도 하늘나라에서 가장 미소한 사람 보다 작다. 왜 그런가? .

  사람은 아무리 위대하고, 잘나고, 능력이 있고, 돈이 많고, 재능이 있어도 하느님의 위대하심, 능력, 권능에 비하면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임을 통하여 그분과 일치할 수 있고, 예수님을 따름을 통하여 그분과 하나 될 수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예수님과의 친교를 통하여 위대함 자체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세상은 인간 중심적인 노력과 재능, 그리고 무한 경쟁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서로 비교하고 시샘과 열등감으로 빠져들어만 간다. 우리는 남들과 비교하는 사이에 하늘로부터 공짜로 선물로 받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소홀해진다.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나름대로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이웃과 조화를 이루며 지낸다. 사람도 자기 자신의 그릇이 있고, 그 그릇에 걸맞게 채우면 된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은 감옥에서 자기 나름대로 기다리던 메시아(구세주)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3절).」 요한이 기대한 메시아는 악인들을 엄하게 벌하고 권능을 보여서 백성들을 따르게 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병자를 고치고, 죄를 용서하신다.



  예수님께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찬한 세례자 요한마저도 일종의 비교 게임에 빠져 있었다. 그는 아직도 하느님 나라의 위대함을 인간적으로 보려는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기대하는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최고의 수능 점수, 높은 자리, 커다란 상, 대단한 업적, 권력, 돈, 인기 등등인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내려주신 은층의 선물만이 참된 자아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당신은 대림절에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가장 위대하고 귀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예수 아기)입니다」











8.           대림 제3주일     <마태 11, 2-11>  (가) “당신은 가짜 아냐?”

                                                      (자선주일)





  가짜 세상이다. 약사도 의사도 가짜가 있다니 웬말이냐? 오늘 우리는 가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홍콩은 가짜의 천국이라는 말을 들었다. 가짜 를렉스시계가 진짜 뺨친다는 것이다.



          가짜 세상



  어디 그뿐이랴? 우리나라 이태원에서도 가짜 외제물건이 날개 돋친듯 팔린다고 한다.

가짜 양주 마시고 두통, 복통 앓았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가짜 휘발유를 넣고 자동차가 왜 이리 말생이냐고 투덜거린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가짜 수표? 가짜 돈, 가짜 계약서 때문에 울고불고 한탄하며, 이 모양 이 꼴로 된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가짜 기자들의 등쌀에 돈 빼앗긴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가짜 청와대 직원한테 속아서 재산을 탕진한사람도 보았다. 어디 이뿐이랴? 이제는 외제를 가짜 국산으로 속여서 파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제 종교계로 넘어가 보자. 다른 종교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가톨릭에까지 신부행세를 하면서 사기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생겼다고 한다. 참으로 막 가는 세상이다.

  이러한 불신의 골은 어디서부터 생겼을까? 해질녁이면 모락모락 굴뚝마다에서 연기가 솟아나오는 시골엔 아직은 가짜들이 별로 없는 듯하다. 가짜 도토리 가루로 쑨 묵도 없고, 가짜인데 국산으로 둔갑하여 식탁에 오른 고춧가루, 참깨도 없다. 그러고 보면 가짜의 등장은 문명의 부산물이라고나 할까?



         세례자 요한에게 닥친 시련



세례자 요한이 살았던 그 당시에도 가짜들이 많았던가 보다. 가짜 예언자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으나 신통치 않아 보였던지 “당신 가짜 아냐?\”라고 물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도 구세주로 오셨다는 분이 구해주질 못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던가 보다.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이 많이 있었다. 어떤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가? 그들은 로마인들에게 점령당하여 있는 형편이었기에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임꺽정처럼 나타나서 로마놈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고, 나라의 주권을 찾아줄 메시아를 바라고 있었다. 감히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위대한 권능의 소유자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소문을 들어보니, 예수님은 별 볼일 없는 위인같아 보였다. 그래서 직접 말할 수는 없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예의를 갖추어 듣기 좋게 한 질문이지만, 질문의 요지는 “당신 진짜야, 가짜야?\”였다. 예수님께서는 우회적으로 대답하셨지만 결론은 “나는 진짜다\”였다.



  세례자 요한이 왜 예수님을 의심하였을까?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조금은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면 예수님께 실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열심히 성당에 다니는 사람에게 시련이 닥쳐올 수 있는데,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를 실망시킬 수 있느냐\”면서 노발대발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현실문제를 다 풀어주실 수 있는 만능박사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실망할 수 있다. 당신은 가짜라고 소리를 지를 수 있다. 루가복음 23장을 보면 헤로데는 예수님을 만나 기적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다. 헤로데 역시 “진짜 인물인 줄 알았는데 가짜 아냐?\”라며 실망하였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진짜이시다. 그분은 진짜 메시아이시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날로 가짜 구세주가 많이 나타나서 가정을 파괴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을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진짜 메시아이시다. 문제는 가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진짜 메시아로 고백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가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진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셨고, 종말의 날에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오실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셔야 한다. 때론 믿음으로 오는 시련이 있을 것이다.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돌진하며 순교자들의 믿음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시편을 통해서 더욱 믿음을 고양시켰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은 시련을 통해서 더욱 강건해졌다.

  “믿는 사람에게는 안되는 일이 없다. \”(마르 9,23)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진짜 메시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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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대림 제 3 주일


    제 1 독서 : 이사 35, 1-6a. 10

    제 2 독서 : 야고  5, 7-10

    복     음 : 마태 11, 2-11


    제 1 독서 : 에돔에 대한 심판(이사 34장)과는 정반대로 이제는 예루살렘에 대한 축복이 선포된다. 에돔이 황폐하게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시리아 사막이 옥토로 변하여 유배에서 풀려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길로 지나가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제2 이사야(이사 40-50장)에서 다시 다루어지는 근본적인 주제이다.

    유배에서 돌아오는 길은 이사야 35, 10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축제 행렬처럼 묘사되어 있다. 앗시리아 제국이 이스라엘 전역을 초토화시키고 백성을 끌어가 실의에 빠져있는 시기에 예언자 이사야는 이런 귀환으로써 출애굽이 새롭게 제한되리라고 내다본다.

    소경, 귀머거리, 절름발이, 벙어리의 치유(이사 35,5-6)는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표징이다. 즉 메시아 시대의 표징이다.


    제 2 독서 : 야고보서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인내와 기도에 대한 당부로 끝을 맺는다. 사실 기도란 기다리는 것이고 그 기다림은 깨어 기다림이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다림은 하느님을 하느님이게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도래를 기다림이 그리스도교적 인내의 최종적인 동기이다. 인내는 주님의 도래에 선행하는 시련의 시기에 꼭 필요한 태도이다. 주님의 도래가 늦어지든 빨라지든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씨를 뿌리고 소출을 낼 때까지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리는 농부와 같이 끈기있는 인내이다. 특별히 가을비는 팔레스타인 땅의 농부들에게 풍성한 수확을 주는 비이다.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10월 이전은 씨를 뿌리기에는 너무 건조하기 때문에 농사의 결실은 그 가을비에 달렸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면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르는 것처럼(마르 4, 26-29), 신자들은 주님의 날이 언제 올지 모른다. 다만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복   음 : 감옥에서 자기의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느낀 세례자 요한은 고민하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자문한다. ‘나자렛 예수는 참 메시아인가? 혹시 내가 속은 것이 아닐까?’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기대했던 메시아의 표징과는 너무나 다른 예수님의 행적(마태 8-9장의 기적 이야기들 참조)에 놀란다. 사실 그는 엄히 심판하며 오시는 메시아, 쭉정이를 불에 태워버리시는 메시아를 상상했던 것 같다(마태 3,10-12).

    이런 질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직설법으로 대답하지 않으신다. 다만 메시아 시대의 표징을 들어 간접적으로 말씀하신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것(이사 35,5-6 참조)을 보고 깨달으라는 것이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표징이다.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이사 61,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업적이 메시아 시대를 오게 한다는 것을 요한에게 분명히 제시한다. 그러나 심판과 폭력으로써가 아니라 치유와 구원으로써 당신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하신다.



    주님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탄생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탄생의 기쁨을 예고하는 오늘의 전례는 우리를 찬란한 빛의 축제로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라.”(필립 4,4-5)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말씀도 ‘기쁨’을 주제로 하여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이 가까이 와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구원하러 오신다”(이사 35,4).

    이 기쁨은 우리를 충동질하거나 들뜨게 하는 기쁨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의미 가득한 ‘기쁨’입니다. 우리를 만나러 오시며 악과 죽음의 세례로부터 우리를 잡아 일으키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되었음을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기쁨인 것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는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라고 하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이 이스라엘의 모든 땅과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원수를 갚으러 오시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귀가 열리고,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황무지야, 내 기쁨을 꽃피워라. 아네모네처럼 활짝 피워라.”라고 기쁨으로 충만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찬란한 옛 빛을 완전히 되찾아 재건됨을 알리는 기쁜 소식을 담고 있는 소위 이사야의 ‘소묵시록’에서 우리는 예수 성탄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신약성서에서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 자신도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더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를 보내어 요한이 제기한 질문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메시아이다.”라고 직접 답하지 않고 병자들을 치유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말로만 대답하는 것보다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주신 증거를 더 신빙성있게, 더 확실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요한이 어떤 의도로 제자들을 보냈는지를 아시고 곧 소경과 절름발이와 다른 병자들을 낫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믿고 있던 요한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의심하던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구세주 메시아를 만난 기쁨에 넘쳤고 요한도 제자들이 메시아를 알아보게 되었다는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마치 농부가 소출을 낼 때까지 끈기있게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제자들과 요한도 메시아를 만난 기쁨을 되새겼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다운 인내심을 우리는 여기서 봅니다. 이는 우리 안에 또 이 세상 안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도록 그분과 활발히 그리고 끈기 있게 협력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큰 기쁨이 잇고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함께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어떤 노인이 들꽃다발을 들고 시골길을 달리던 버스에 올라탔다가 마주 앉은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답니다. “꽃이 참 예쁘죠?” 아가씨의 볼이 발그레졌습니다.“예, 할아버지. 향기도 참 좋네요.” 이윽고 노인이 먼저 내릴 때가 되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노인은 그 꽃다발을 아가씨의 무릎 위에 내려놓으면서 “아가씨가 이 꽃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주는 것이니 받구려 아내에게 선물하려 했는데 …… 아가씨에게 꽃을 주었다고 내 아내에게 말한다면 틀림없이 좋아할 거요.”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할아버지는 길가 옆에 ‘공원 묘지’라는 팻말이 붙은 곳에 멈춰 섰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기쁨을 나누어 준 시골 노인의 따뜻한 그 마음씨, 분명 세상을 떠나 누워 있는 자기 아내도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기쁨의 축제인 성탄을 앞두고 우리는 이렇게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오심에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교회가 제정한 자선주일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가난하고 외로운 불후 이웃과 주님의 오심의 기쁨을 나누도록 마음을 모으고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겠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지 못했던 이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성탄 카드를 보내고 가까운 양로원이나 장애인들의 집을 찾아 작은 선물이라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주님의 성탄의 기쁨이 모든 이의 기쁨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2. user#0 님의 말:

     

    대림 제 3 주일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제 1 독서: 이사 35,1-6a.10

    제 2 독서: 야고 5,7-10

    복     음: 마태 11,2-11


    해설

      이미 성탄이 문 앞에 다가와 그 찬란한 빛으로 우리를 감싸기 시작하고 있다: 이 때문에 대림 제 3 주일의 전례는 전체적으로 기쁨에 들떠 있다. 입당송은 바울로 사도가 감격적인 어조로 필립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보낸 권고의 말을 반향시키고 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라”(필립 4,4-5). 또한 본기도도 신자들의 마음속에 기다림과 환히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천주여, 당신 백성이 지금 주님의 성탄 축일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사오니, 우리로 하여금 이 구원의 큰 기쁨을 맞이하여,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성대한 축제를 정성되이 지내게 하소서.”

      오늘의 독서들도 역시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보다 뚜렷하고 풍부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원래 그 내용들이 우리의 상황과는 다른 구체적인 상황을 다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것들의 주된 주제는 여전히 ‘기쁨’이다. 그 기쁨은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이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구원하러 오신다”(이사 35,4)

      그러므로 그 ‘기쁨’은 우리를 충동질하거나 들뜨게 하는 어떤 사실 앞에서 느낄 수 있는 피상적이거나 단순히 감정적인 그런 기쁨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의미 가득한 ‘기쁨’이다. 왜냐하면 그 기쁨의 동기가 우리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만나러 오시며 악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잡아일으키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되었음’을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획득한 기쁨이 아니라 베풀어진 기쁨이요, 이미 그 자체로서 구원의 ‘열매’요 ‘징표’가 되는 ‘기쁨’이다. 이러한 까닭에, 거룩한 삶을 사는 위대한 이들은 -성 바울로, 성 프란치스코, 교황 요한 23세,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등- 생활의 어려움과 고통 중에서도 기쁨의 바다에 사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게서 오신다. 그리고 오시는 그분과 함께 기쁨이 온다. 당신이 그분을 원하면 그분은 당신 가까이에 계신다. 당신이 그분에게 말하지 않더라도 그분은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당신이 그분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분은 더더욱 당신을 사랑하신다. 당신이 길을 잃어버리면 그분이 당신을 찾으러 오신다. 당신이 걸어갈 수 없다면 그분이 당신을 데려다주신다. 당신이 슬퍼 운다면 그분이 당신을 위로해주시기 때문에 당신을 행복하다”(don Primo Mazzolari).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제 1 독서는 야훼께서 뭇 민족들과 특히 에돔을 거스려 계속하셔야 될 그 무서운 결정적 싸움에 대한 이야기(이사 34장)와 뒤이어 나오는 예루살렘이 찬란한 옛 빛을 완전히 되찾아 재건됨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사 35장)을 담고 있는 소위 이사야의 ‘소묵시록’(이사 34-35장)의 일부를 전해주고 있다.

      확실히, 제 2이사야(40,29-31;41,19 등)와의 뚜렷한 중복을 피하고 있는 이사야 예언자는 앞서 적에 의해 폐허가 되어버리고 비탄 속에 고립되어 승냥이만 살고 있는(35,7) 성도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장면이 바뀌고 도시는 유배지에서 사람들이 돌아옴으로써 활기를 되찾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도시에서 갊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믿기조차 어려워한다. 지금까지 당한 국가적 붕괴에 너무나 낙담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의 위로의 말은 특별히 이처럼 ‘겁에 질려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황무지야, 내 기쁨을 꽃피워라… 기뻐 뛰며 환성을 올려라…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어라.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곳이 세워라. 겁에 질린 자들을 격려 하여라.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너희의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 하느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소경은 눈을 뜨소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그곳에 크고 정결한 길이 훤하게 트여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라. 야훼께서 되찾으신 사람이 이 길을 걸어 시온산으로 돌아오며 흥겨운 노래를 부르리라. 그들의 머리 위에선 끝없는 행복이 활짝 피어나고 온몸은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어 아픔과 한숨은 간데없이 스러지리라”(이사 35,1-6a,8a,10).

      보다시피, 사람들과 사물들 모두가 ‘환히’로 휩싸여 있다. 하느님의 ‘구원’은 직접적으로는 오직 그분이 종살이의 장소와 유배지로부터 다시 모아들이시어 먼데서 되돌아오고 있는 ‘해방된 이들’에게만 해당된다(10절). 그렇지만 실제로는 성서 본분에 나오는 여러 가지 시적 개념들이 표현하고 있듯이 -꽃이 피고 있고 ‘가르멜의 영광’ 즉 푸르르고 그늘이 많은 나무들도 뒤덮여 있는 사막; ‘늪이 될’ ‘뜨겁게 타오르던 땅’ 그리고 ‘샘터로 바뀔’ 메마른 땅(7절)-변모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을 감싸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기쁨’을 창출해내는 ‘구원’의 개념을 좀더 형상화시키기 위해 보는 장님, 듣는 귀머거리, 말하는 벙어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6절). 이 표현들은 구원이 인간 전체를 -육체까지고-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사실, 어떤 종류의 병이든간에 병이라는 것은 신체 전체와 지체 사이의 구조적, 관계적 불균형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그 표현들은 또한 기쁨과 구원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구원이 기쁨을 솟아나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쁨이 구원을 확장시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되는 상황에까지도 그것을 퍼뜨려 나가는 것인가? ‘기적’ -예수에 의해 치유된 ‘장님’ ‘귀머거리’들을 생각해 보라!-은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일종의 구원의 표지이다. 그러므로 기적이 일어날 때 그것은 놀라움과 동시에 기쁨을 야기시킨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이와 같은 내용이 마태오에 의한 오늘 복음(11,2-11)에서 재차 조명되고 있다. 오늘 복음은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이 예수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인지 어떤지를 알기 위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 대목은 이해하기가 그리 쉬운 대목은 아니지만, 여기서 전제하고 있고 동시에 촉구하고 있는 기다림의 분위기라든가, 세례자 요한을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마태 3,3 참조) 자로 다시 제시하는 이유라든가 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여기서 좀 놀라운 사실은 요한이 예수를 의심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요한은 감옥에 있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마태 11,2-3). 비록 이 구절에느 정확히 메시아를 지칭하는 표현은 없지만(창세 49,10;시편 118,26;말라 3,1-3에서는 ‘오셔야 할 분’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메시아’라는 개념과 연결되고 있다) 문맥상으로 볼 때 메시아를 가르키고 있다. 3,11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내 뒤에 오시며 나보다 훌륭한 분”이라고 말했다. 요한이 의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예수의 대답이 자신에 대해 “의심을 품지 말라”(6절)는 권고로 끝맺어지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세례자 요한은 예수의 어떤 점을 의심했단 말인가? 아마도 예수가 아직은 종말에 오실 심판자-“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마태 3,12)-로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강력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요한도 역시 하느님께 그분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 보다 훌륭한 면을 갖추고 있기를 은근히 기대했던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세례자 요한은 그때에 마케론데(Macheronte)의 요새 안에 있는 감옥에 있었다.(Giuseppe Flavio, Antichita giudaiche, ⅩⅧ, 116). 메시아라면 그를 위해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 말인가?

      만약 이러한 해석이 옳다고 한다면, 세례자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체계를 세워놓지 말고 그리스도를 만나보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를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또 나타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쓸슬히 외양간에서 태어나셨다고 하는 사실이, 행복, 경제적 안정, 사회적 특권, 출세 등을 추구하는 우리의 자세를 비난할 때 우리가 그분께 대해 갖게 되는 ‘반감’〔의구심〕을 생각해 보라. 분명히 우리의 입장에서는 비천함과 나약함의 표징보다는 능력의 표정을 지니신 메시아상이 더 편리할 것이다!

      그러나 나약함의 표징이라고 여겨지는 그런 것들이 더더욱 강하게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이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하시는 대답의 내용이다:“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5-6절).

      예수의 이 말씀들은 분명히 이사야서 가운데 몇몇 대목들(26,19;29,18;61,1)과 관련이 있다. 그 중 한 대목을 바로 제 1 독서에서 보았다(이사 35,5-6). 예수는 ‘심판자’로서의 메시아이시기 전에 ‘구원자’ ‘해방자’ 로서의 메시아이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불의 외에도 재앙이나 불행을 온통 뒤집어쓰고 있는 듯한 보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 즉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가난한 이 그리고 죽은 이들까지도 가까이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행하시는 ‘기적들’은 ‘권능’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특히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일치, 구원과 동참의 행위이다. 그분은 또한 종말에 심판자로 오실 분이시지만 그보다도 앞서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마태8,17;이사 53,4 참조)분이시다. 이런 까닭에,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서 드러내 보여주시는 메시아의 ‘표징’들-예언자들의 메시지와 완전히 일치하는-을 보다 잘 이해하도록 요청받고 있으며 그 결과 더 이상 그분을 ‘의심할’ 여지를 갖지 않게 된다.

      이제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그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으신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런데 씰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성서에, ‘너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네 갈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 하신 말슴은 바로 이 사람을 가르킨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7-11절).

      분명히 세례자 요한의 ‘위대성’은 그의 강인한 정신력과 엄격한 참회의 정신에 있다. 그래서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나약하고 비굴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나아가 그의 위대성은 무엇보다도 특히 그가 구약성서의 두 대목 즉 출애굽기(23,20)와 말라기 예언서(3,1)에서 미롯되고 있는 메시아의 ‘선구자’라는 사실을 보고 계신다. 전자에서는 야훼게서 당신 사자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게 하시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 후자에서는 야훼께서 사람들이 당신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킬 사자를 당신이 오시기 전에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바로 이러한 고귀한 사명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비록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실현될 ‘하늘나라’의 일원은 아닐지라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11절) 모든 사람들 가운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하늘나라의 시간은 그 나라를 예비한 모든 시간을 온전히 초월한다. 사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더 크다!

      그러나 그렇다고 애서 요한의 기쁨이 감고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명은 신랑이 오심을 알리는 것이었고 이것이 그가 행한 일이다:“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형제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심시오”


      요한의 기쁨은 우리를 엄습할 수 있는 불확실성과 의구심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끝내 기다림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때때로 기다림은 아무 결실도 가져다 주지 않거나 그대로 무산되어버리고 말며 또 그 기다림을 알려야 할 ‘표징’들의 의미가 약화되어버리거나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듯 생각되기도 한다. 대체로 우리의 생활에 연관되어 있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 신자는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즉 그의 기다림은 인내로와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천천히 완성되어가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마음 자세를 가추어야 한다.

      이에 관해 야고보는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는 부자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이 내리기를 성급히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던 그의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형제 여러분, 주님게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농부는 땅이 귀중한 소출을 낼 때가지 끈기있게 가을비롸 봄비를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읍니다”(야고 5,7-8).

      농부라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역동적 힘을 인식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크리스찬적 인내심은 운명적인 체념이 아니라 우리 안에 또 이 세상 안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도록 그분과 활발히 그리고 끈기있게 협력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커다란 기쁨이 있다. 즉 어떤 일이 잇더라도 하느님게서는 역사를 진행시키며 당신의 사랑과 심판의 때를 ‘가까이 접근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음에서 큰 기쁨이 이루어진다.


  3. user#0 님의 말: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1. 말씀읽기: 마태11,2-11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다 (루카 7,18-23)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루카 7,24-35)

    2. 말씀연구

    나바태아인의 침략 위협을 받은 헤로데 안티파스는 동쪽 국경을 굳게 지키려고 그들의 왕 아레타 4세의 딸과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복 동생 헤로데 필립보를 찾아 갔을 때 계수요, 조카벌인 헤로디아를 만나 자기와 결혼하자고 유혹을 했습니다. 허영심에 가득 찬 헤로디아는 인륜을 저버리고 곧 승낙을 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아레타의 딸은 쫓겨날 비참한 운명을 비하려고 스스로 친정으로 돌아갔고, 헤로디아는 필립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살로메를 안티파스의 양녀로 삼아 데리고 갔습니다.

    패륜의 이 한 쌍은 추문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간통이요, 가정파괴요, 용서할 수 없는 악행이었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솔직하게 꼬집어 주었습니다. 세례자의 이 비난은 안티파스에게 아물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혔고, 또 허영심 때문에 패륜의 길을 걷는 헤로디아에게는 복수심을 뿌리박게 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위협이나 협박도 세례자 요한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감옥에서 그는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2 그런데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도록 하였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보낸 것입니다.


    ① 요한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그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승이신 요한 보다 더 유명해 지는 것을 원치도 않았고, 문제를 삼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한다.”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알고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제자들. 자신의 삶이 다 해 갈 때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냅니다. 그리고 묻게 합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그 질문을 통해 요한은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보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도 하늘을 향하여 고민의 외침을 하셨는데 하물며 세례자 요한은 오죽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선생님이 이스라엘이 기대하고 있는 메시아입니까?”를 물었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메시아로서 지니신 그 사명이 나타내시는 방법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초조함에서 나온 질문이라면 “선생님, 언제 메시아로서 나타나실 작정이시옵니까?” 하고 물어 보게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당신은 그리스도이시니 그것을 명백히 보여 주십시오”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므로 요한이 믿지 못해서 제자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보낸 것입니다.


    ② 제자들을 위해서

    이것은 힐라리오가 처음으로 제창한 주장이다. 요한 금구, 아우구스띠노, 예로니모,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등이 이것을 지지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스승을 몹시 존경하고 있었던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입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말을 듣고 놀랐으며, 예수님께 대해서 요한은 증명을 하였지만, 예수님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자기들끼리 말다툼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그들을 예수님께 보냈다. 내가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깨닫도록 가 묻고 오너라. 내가 언제나 말하고 있던 사실을, 예수님 자신에게 직접 들어 보기 위해. 너희들은 선구자의 말을 들었지만 그것을 심판자의 말씀으로 확인하고 오라.”라고. 그러니까 제자들은 요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의심을 풀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즉 세례자 요한이 의심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서 보낸 것이라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이, 예수님보다도 자신을 더 숭상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로부터 떠나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으면 좋으리라 생각하여 제자들을 보냈다.”


    요한복음 3,25-26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투심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25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26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이때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0절).”이것을 제자들이 깨닫기 못했기에 죽음을 앞둔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로 메시아다.”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본 대로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귀머거리가 듣고, 절름발이가 뛰놀며, 소경이 보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메시아 시대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믿지 못하겠지만 서서히 예수님께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보낸 이유는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③ 예수님을 위해서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행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납니다. 요한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사명을 다 한 것입니다.


    인간 행동의 동기와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낸 것은 그들이 직접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도록 하려 한 것 만이었다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즉 요한은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는 동시에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명확히 선언하는 것이 그의 목적입니다. 요한이 무엇보다도 갈망하고, 무엇보다도 명예로 여기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일, 메시아의 사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것 뿐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기 위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이 드러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드러나게 합니다. 만일 요한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든가, 또 그가 불안에 빠져 있었다고 하는 해석은 복음서에서는 추리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요한이 불신에 의해서 제자들을 보냈다면 제자들을 보낸 다음 하신 요한에 대한 칭찬은 결국 조롱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것은 조롱이 아니라 칭찬이었습니다. 그 무엇으로 보답하기 어려운 칭찬이었습니다.


    요한이 당신을 믿지 못해서 제자들을 당신께 보냈다고 생각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칭찬하실 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을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도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자였기에 사자의 사명을 다 한 것입니다. 엘리야의 정신을 가지고 온 것이기에 엘리야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것입니다.


    나 또한 세례자 요한처럼

    ① 참된 겸손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가 잘하고 있으면 그를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고, 다른 이들에게 그를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봤을 때, 그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부족하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겸손한 모습은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형제자매들에게 웃으면서 인사하게 하고”, “형제자매들의 장점을 칭찬하게 하고”, “누군가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합니다.” 비록 상대방은 나를 기꺼이 도와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예수님 때문에 상대방을 도와주게 됩니다. 그리고 손해 봤다고 생각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아! 예수님 때문에 저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구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② 예수님 알리기

    참된 겸손은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교의 사명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있으면서 까지도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주일 미사에 반드시 참례하고, 열심히 기도생활 하고 있는 나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환자들을 방문하고, 친한 사람들과 차 한 잔 하면서 신앙의 맛에 대해 이야기 하고, 반갑게 어울릴 때, 사람들은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세상적인 욕심을 바래서는 안 됩니다. 그를 통해서 어떤 것을 하려하고, 그를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채우려 한다면 결국 예수님께로는 가지 못하고, 예수님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의 삶을 묵상하면서, 세례자 요한처럼 나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드러나실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을 향하여 한 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3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로 가서 스승이 시킨 질문을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들은 아직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스승 요한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뭔가 특이하신 분이시지만 자신들의 스승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스승 요한보다는 못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안에는 큰 벽이 있습니다.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것이 깨져야 만이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못 보게 만드는 것들을 벗겨내야 만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저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알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듣고 본 대로 바로 예수님은 메시아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나는 듣고 본 것을 알리는가? 보지도 않고, 듣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부풀려서 말하기만을 좋아하는가? 상대방을 좋은 말로 칭찬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안 좋게 말하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나는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5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들을 말씀하십니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이것은 메시아의 시대가 기적의 시대라고 예언한 예언자의 말을 성취시키고 있는 것이며(이사야 26,19 “죽은 자”, 29,18-19 “귀머거리, 가난한 자”, 35,5 “소경과 귀머거리”, 61,1 “억눌린 자”), 메시아 시대에 일어날 일들을 눈으로 보면서 예수님께서 바로 메시아이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게 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행적은 메시아가 확실한데 자신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으니 제자들을 위해서 말씀해 달라는, 제자들에게 확신을 달라는 그런 요청입니다.


    기적은 메시아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소경을 보게 하고 절름발이를 제대로 걷게 하며 나병환자를 고치지 못하지만 예수님께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것을 예수님께서는 하고자만 하시면 아주 쉽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의심을 품는다는 것은 발에 돌에 걸려 쓰러지거나 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걸림돌은 남이 쓰러질 기회가 되는 것이나 혹은 사람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 결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원수까지도 사랑해라”–“어렵지만 해보겠습니다”)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을 향한 이 말씀은 제자들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보다는 세례자 요한을 더 따랐던 그 사람들. 그들의 마음에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요한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걸림돌입니다. 이제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좁은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니 믿게 될 것입니다. 천천히 바뀌어 갈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걸림돌들이 생겨납니다. 예수님께로 가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수많은 걸림돌들을 물리치고 예수님께로 당당히 걸어가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7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칭찬하십니다. 없는 데서 칭찬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없는데서 상대방을 칭찬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던지시어 사람들에게 무엇을 찾으러 떼를 지어 요르단 강으로 갔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람 따라 이리저리 나부끼는 갈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가를 기다려 보고 있다가 오늘은 저쪽에, 내일은 이쪽에 달라붙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조작함 없이 똑바로 전했으며, 사람들의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심지어는 왕에게까지 그의 잘못에 대해서 직언을 하였습니다.


    8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세례자 요한은 부드러운 천으로 된 화려한 옷을 입고 이목을 끌지도 않았습니다. 낙타털옷과 들꿀을 먹으면서 광야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 나갔습니다.


    9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들은 예언자를 찾고 있었으며 예언자를 발견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사랑하여 메시아를 보낸다는 것을 …” 그래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함을.”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지금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 어느 예언자 보다 훌륭한 예언자임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한번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누구인지,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오직 요한만이 자기보다 더 뛰어나시고 자기 뒤에 오시게 되어 있는 예수님을 위해(3,11) 백성들을 준비시키고 그분께로 인도할 소명을 받았기에 더욱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예언자 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자(예언자)이며 하느님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중개자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구원의 전달자이며 구원의 인물이기 때문에 더더욱 훌륭한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인품이나 수덕적인 생활에 의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의 활동은 다른 예언자들의 활동보다 더 위대한 것이기에 남다른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이사야 예언자는 이미 그 길의 준비에 대해 말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포로 생활에서 이끌어 내시어 기쁨으로 인도하시며, 이 백성은 곧고 평탄한 길을 따라 행진해 갈 것이라는 것을. 그 행군은 노예살이로부터 자유를 향한 행군임을(이사야40,3-4; 마태3,3). 말라기 예언자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종말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예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몸소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한 선구자가 그분보다 앞서 옵니다.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기3,1). 이러한 예언적인 말들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세례자 요한을 바라보게 하고, 더 나아가 바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과거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으로 세례자 요한을 높여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럼 예수님 다음이어야지 왜 첫째입니까?”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적인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세례자 요한이 위대하기는 하지만 하늘 나라에 있는 자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로서는 구약시대에 속하고 선구자로서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교량입니다. 그런데 복음위에 서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본다면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명과 신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시는 은총의 시대는 요한이 머물고 있는 율법의 시대보다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고, 세례자 요한은 단지 그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기에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알리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님한테 본 것은 무엇이고, 예수님께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또 말을 함에 있어서 어디에 기준을 두고 말을 하고 있습니까? 있는 그대로입니까? 아니면 시기와 질투에 기준을 두고 비방을 하고 있습니까?


    2.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사자였습니다. 대림시기를 보내면서 나는 예수님의 길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례자 요한의 삶에 비추어 내가 해야 될 것을 결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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