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대림 제4주일

1. 정철수 신부 (가) / 2         2. 조원행 신부 (가) / 3

3. 김정진 신부 (가) / 6         4. 함세웅 신부 (가) / 7

5. 김현준 신부 (가) / 9         6. 강길웅 신부 (가) / 11





  1.               대림 제4주일(가) 마태 1,18-24 누가 대장부인가?

                                                  정철수 신부



신중하게 하느님의 일을 식별하자.



오늘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인 대림4주를 맞았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오심을 맞는데 에 손색이 없도록 그 동안 잘 준비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다린다는 일은 지루합니다. 더구나 절실하게 만나야 할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더욱 지루하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을 때의 즐거움은 기다리던 지루함이, 그리고 그 초조함이 크면 클수록 더 커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림절 동안 주님의 오심을 절실하게 기다리셨던 분들은 주께서 오시는 날에 크나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정말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뭐가 그리 아슬아슬하냐구요? 당시 유대 풍습에 의하면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죽였다는 사실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요셉성인께서 까딱 잘못 생각하셨더라면 성모 마리아는 뭇 사람의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물론 대중의 예수님 역시 같은 운명이었겠지요.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구세사에 큰 역할을 한 분들을 여럿 들 수 있습니다. 구약의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여러 예언자들을 들 수 있고, 구약에 이어 신약이 시작하는 성자의 강생에 성모 마리아와 성요셉의 큰 역할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예수님의 양부인 성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전 신약성서를 통해서 성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3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 낭독 시에 들은 대목에서 그리고 호적을 하러 유다지방에 가신 것, 마지막으로 성탄 직후에 헤로데의 손으로부터 피해 이집트에 피신하신 것, 이것이 모두입니다. 그러나 이 3번 모두가 성자의 강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우리의 성경대목에 눈을 돌려봅시다.

성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는데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약혼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자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임신을 했다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약혼녀로부터 배신당한 사실 앞에 복수를 꾀할 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당시의 성요셉에게는 단 한마디의 고발로 당장 돌에 맞아 죽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복수의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자다운 신중함과 너그러움 그리고 겸손함을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성요셉의 인간됨이 바로 성자의 강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성요셉이 꿈에서 어렴풋이 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생시에 생생하게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데는 성요셉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관심하게 지내버리고 맙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사소한 이익들 때문에 하느님을 배반하기까지 합니다. 이래 가지고서야 어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성서에서 본 성요셉과 같이 우리의 일상생활이 모두 그리스도의 사업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에게 비록 손해되는 일이 있더라도 감수 인내하며, 각자 일상생활 안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노력합니다. 이웃과의 사소한 오해나 시비거리를 진정 하느님의 왕국을 위해서 모두 참아 받고 성요셉처럼 너그러움을 가지고 겸손하게 살아갑시다. 그렇게 살면 그 안에 주님이 현존해 계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로써 자주 주님과 대화하고, 성체성사를 합당한 준비 후에 자주 배령함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가까이 살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야만 주님은 우리에게 낯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친한 벗이 될 것입니다.



종말의 날 엄위로운 심판관으로 다시 오실 우리의 주님을 기다리며 일상 생활에 충실하고, 기도와 성사에 충실함으로써 주님과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심판 때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 어깨에 다정스럽게 손을 얹고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치통곡함이 있을 것이고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즐겨 용약하게 될 것입니다.











 2.            대림 제4주일(가) 마태 1,18-24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조원행 신부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기대하며 아울러 준비하는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을 준비하기 위해 정부에서 간소화를 부르짖고 있지마는 그래도 상점 백화점으로 몰려들어가 한 아름씩 사들고 나옵니다. 백화점 정면의 대형 산타클로스 호화찬란한 크리스마스 나무 장식은 성탄절이 다가옴에 따라 길거리의 사람들을 더욱 설레게 합니다. 비록 길거리의 징글벨 노래 소리가 전보다 줄어들었어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기쁨과 웃음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예술제 등으로 성탄을 준비하고 있고 어른들은 어른들 나름대로 방을 꾸미거나 성탄나무 장식을 하거나 해서 성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오실 날은 사흘로 임박했습니다. 구원의 때, 사랑의 날이 박두했습니다. 만민을 다같이 동등하게 구원하시고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살고자 하십니다. 이렇게 큰 축복을 가져오시는 예수님을 합당하게 준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임마누엘을 합당하게 준비하고 있는지 생각할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현대인의 대다수, 더구나 많은 신자들까지도 임마누엘 내림의 본 뜻을 잊어버리고 외도하는 수가 있습니다. 성탄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화려한 축제 기분일 수가 많고 아울러 오가는 선물 보따리 아니면 적어도 성탄카드, 심지어 외부에서는 이런 기회에 뇌물을 통해 한 자리 따보자는 야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누구나가 공인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볼 때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결코 이렇게 사치스럽고 화려한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안에 내려오시는 예수님은 일부 여유있는 사람에게만 오신 것은 더욱 아닙니다. 또 예수님은 물질적 영광을 주시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동등한 사랑을 주시어 모든 이 서로서로가 사랑하게끔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제 대림절 막바지를 지내면서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 볼 때 물론 아무도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성탄을 준비한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큰 선물을 상사에게 갖다드리면서 “이것은 뇌물이 아니라 그 동안의 감사에 대한 인사일 뿐이다”하고 생각할 것이고 집안을 멋있고 아늑하게 꾸미면서 “좀더 알찬 성탄을 위해” 아니면 “아이들 교육을 위해” 또는 “오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맞이하기 위해” 등등 고상하고 바람직한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또는 대부분은 물가파동 등으로 인한 경제적 난관 때문에 우리 집에서는 아무 것도 사치스럽거나 화려하게 할 것이 없으니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진리를 잊고 있습니다.



복음에 (의인) 요셉은 꿈을 꾸기 전에 이미 마리아의 일을 그냥 덮어두기로 작정하였었습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볼 때 약혼녀의 배신은 혈기왕성한 남자에게 있어 보통 참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론 꿈에 천사가 나타나 해명해 주었기 때문에 오해는 풀렸지마는 이미 몽중해명 전에 남의 잘못을 용서해주고 더구나 눈감아 주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은 참된 진리를 잊고 있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성탄의 성대한 준비나 자기 나름대로의 성실한 의도 모든 것이 물론 다 필요한 것입니다. 왕중 왕이시며 우리의 하느님이신 당신이 몸소 우리에게 오시는데 아무리 성대하고 성실한 준비라도 그 오심에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칫 잊기 쉬운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께서 마치 다 개인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나와 친한 주위 사람들에게만 오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 사치스럽게 물질적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나 즐거운 성탄이 와도 경제불황으로 혹시 꼬마들이 용돈이나 달라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는 우리에게나 이 추운 날씨에 육교 위에서 빨갛다기 보다는 까만 살을 내놓고 떨고 있는 거지 아이 위에나 공평하게 오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아울러 우리에게 우리 몇몇 친구나 잘 아는 친지들만이 아니라 지하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털구두만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손을 내밀고 엎드린 모녀에게까지도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동정이 머물기를 강력히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실로 지금은 우리 모두의 사랑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것도 받기만 하는 사랑이나 또는 주기만 하는 사랑 이것보다 서로서로의 상호적 사랑을 요구하는 때입니다. 물론 상호적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는 각자가 자기보다 다른 이에게 눈을 돌려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유한 사람의 의무만은 아닙니다. 부유하건 가난하건 예수님의 공평한 사랑을 아는 우리 모든 신자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물론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혜로 모아진 재산을 가난한 이에게 주어야만 하느님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 받기만 하는 것은 더욱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는 것을 주라 하시지 않고 자기의 것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친한 친구를 사랑하는 것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신 것 같이 남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요긴한 것이라도 자기보다 더욱 필요한 사람에게 줄 때 하느님의 영광은 더욱 빛나고 그 공이 알차게 천주 대전에 기록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부자이건 가난한 이건, 또는 길거리의 소년이건 간에 모든 이의 가슴에 스며나갈 때 진정한 성탄이 있고 그야말로 임마누엘이 우리 안에 완전하게 머무르실 것입니다.

 3.           대림 제4주일(가) 마태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예고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 마리아에게서 탄생되리라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예고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의 독생성자인 예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신다는 것은 인류 역사의 일대 충격적인 경사로서 인간세계에 대전환을 몰아오는 획기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비천한 인간이 되신다는 사실보다 더 심한 비하와 겸허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놀라 기절한 만한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우리들 인간을 사랑하시고 은총과 자비와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예수님 자신도 인간으로 화신하여 구원사업을 당신 사명으로 여기시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기꺼이 부르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신 점에 우리는 더욱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들 인간에 있어 일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원조 아담하와가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른 탓으로 천국의 문이 굳게 닫혀 버려 어떠한 힘으로도 그것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벨의 의로운 피도, 모세의 열성도, 아브라함의 굳은 신앙도, 예언자들의 충성도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만이 사람이 되셔서 당신의 보배로운 피와 죽음의 대가로서만 능히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성자들이 4천년 동안이나 메시아 구세주를 기다리는데 얼마나 애태우며 열망하였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자 여러분! 전 인류가 이처럼 고대하던 구세주께서는 급기야 이 세상에 탄생하시리라는 예고가 있고 그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기쁨과 희망과 평화와 행복을 담뿍 갖다 주시는 예수님이 내려오십니다. 그분을 맞이하는 우리의 심정은 어떠해야 하겠으며 어떤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들레헴 말구유에 가난하게 탄생하셨습니다.



왕중의 왕이시면서도 호사롭게 왕궁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서민층보다도 못하게 쓸쓸한 외양간에서 외로이 태어났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자라서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좋아하시며 기쁜 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하셨습니다(마태 11,5). 또 그의 설교의 중심사상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마태 5,3). 언제나 불우하고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신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성탄날 밤에 고요히 오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그의 길을 같이 걸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가난하고 불우하고 불쌍한 동포들이 많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바로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크리스천들은 보육원이나 양로원, 혹은 병자들, 감옥에 갇혀있는 자들은 찾아서 위안과 희망을 불어주며 따뜻한 손길을 펴 줍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께 해드리는 정신으로 기꺼이 봉사하며 일에 보람을 느낍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와서 영원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맞아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 25,35 이하).



이같은 예수님의 고마운 말씀에 선한 자와 의인들은 <예수님!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대접해 드렸습니까>하고 물으니 <너희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아기를 영접하는 우리의 마음은 깨끗하고 불우한 자를 도와줄 줄 아는 가난한 정신이 요구되며 아쉽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안겨주는 크리스마스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번 성탄 축일을 계기로 사방에서 본당의 온정과 원조를 청하여 왔습니다.



우선 우리 마음이 깨끗하여지고 아기예수를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앞서야 하겠습니다. 그리된다면 다른 지차의 것은 절로 따라올 것이고 이번 크리스마스가 정말 평화와 축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아멘.











 4.            대림 제4주일 <마태 1,18-24>         예수 탄생의 경위

                                                       함세웅 신부



대림절 4주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메시아가 탄생한 그 연혁을 오늘 다시 아로새겨 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한 하느님의 위대하심,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아담과 에와, 호기심 때문에, 교만 때문에, 불성실 때문에, 아차 한 번의 실수, 그 실수가 인간에게 고뇌의 길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비극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고뇌와 비극 속에서 하느님은 하나의 불빛을 제시하셨습니다. 아주 멀리 있는 불빛, 메시아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벨을 죽인 카인의 살해 사건, 노아의 홍수, 바벨탑의 이야기, 어찌 보면 인간은 죽이고 질투하고 또 하느님께 심판을 받으면서도 어차피 하늘을 대적하는 인간 우상화의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높은 건물을 세울 줄 알지만, 허물어진 바벨탑의 이야기를 잊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떠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가? 금단의 열매를 계속 따먹지는 않는지? 무죄한 아벨을 또 죽이지는 않고 있는지? 또는 순 인간 중심으로 외적인 탑만을 올려 쌓고 있지는 않는지?

  

여기,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부모와 친척을 떠나 내가 제시하여 줄 저 땅으로 얾겨 가거라!\”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은 계속 나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내가 떠나야 할 땅, 그것은 내 이기심, 욕심, 허영심, 죄악의 생활, 불의의 생활일지 모릅니

다. 내가 꼭 옮겨가야 할 땅, 그 땅은 나에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헌신적 삶, 양심적 생활, 사랑의 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은 선뜻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였건만 나는 주저하고 망설이고 내 묵은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의와 죄악을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 그에게는 노예 근성이 남아있습니다. 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신 하느님의 업적을 보면서도, 한 끼니의 밥 때문에, 또는 고기국 한 그릇 때문에 묵은 생활에 미련을 갖고 있는 나, 나는 하느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옹고집장이일지도 모릅니다. 사막에서 잠간의 괴로움이 너무나 힘들기에, 멀리 있는 불빛의 땅, 회망의 땅, 행복한 약속의 땅까지 가야 할 여정이 너무나 멀기 때문에 원망과 탄식과 불평을 한 이스라엘 백성, 그 백성의 불신앙을 꾸짖고 안타까와하면서도, 내가 그러한 노예 근성의 장본인이라는 것은 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심한 신앙인입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이러한 인간을 저버리지 않고 기다리며 부르십니다. 그리고 기적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예언자, 왕, 현자들을 통하여 계속 무쇠 같은 백성의 마음을 녹이시려 노력하십니다. 때로는 사막에서, 때로는 귀양살이와 유배 생활에서, 때로는 전쟁의 비참과 굶주림을 통해서, 때로는 폭압과 폭정을 통해서, 때로는 폐허를 통해서, 이 백성을 단련시키시고 교육시키셨습니다. 모두가 실망하고, 모두가 좌절감을 갖고, 모두가 하느님을 떠나, 방탕한 생활, 불의한 생활, 사치와 허영, 비양심적 생활을 해도 여기, 오로지 하느님만을 두려워하고 경외한 ‘작은 무리\’가 있습니다.



‘작은 무리\’는 이스라엘 구원의 보증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뵐 수 있는 특권을 가졌고, 그 ‘작은 무리\’는 새로운 백성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멀리 반짝이던 불빛, 그 불빛에 나는 가장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나는 \’작은 무리\’중의 하나, 나에게는 권력도, 배경도, 재물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만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마음 때문에 나는 행복하고 기쁘고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만민의 왕, 우리의 구세주, 그분이 왕궁에서도, 집안에서도 아니고,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상태인 말구유에서 탄생되셨습니다.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진정 노래할 수 있는 신앙인일진대, 나는 내 주위에 있는 가장 비천한 형제에게 미소를 지어야 합니다.

  

다윗왕의 기도가 되울려 옵니다. “나는 호화스러운 왕궁(체드루스 집)에 살고 있는데, 하느님은(하느님의 궤) 천막 속에 계시다니 될 일입니까?\” 















 5.           대림 제4주일 <마태 1,18-24>(가) 성탄을 기다리며

                                                       김현준 신부



우리 사제관 전화 벨소리는 좀 자주 울리는 편이다. 토요일 오후나 주일 오전은 더 자주 울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여기다 쓸 수 있는지 모르지만, 설악산을 찾아왔다가 ‘대자연 구경도 하느님 공경 다음\’이라는 열심한 신자들이 미사 시간을 물어오는 전화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 연거푸 울리는 전화벨소리는 좀 다르게 느껴진다. 미사 시간을 묻는 전화가 아니다라는 것을 나는 안다. 기다리던 첫눈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도 겨울이 시작되는 12월 대림 첫주일 강론 때에 첫눈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주일학교 어린이 열명, 중․고등학생 열명에게 피자를 사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렇게 해마다 우리 성당아이들은 첫눈을 기다리고 그 첫눈 소식을 나에게 제일 먼저 알려준다. 작년에는 첫눈소식을 은진이와 상윤이가 제일 먼저 알려주었는데, 올해는 지영이와 경미가 알려준다. 나는 첫눈도 첫눈이지만 첫눈이 온다는 소식을 그래서 더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고 그 소식을 빨리 알리고 피자도 먹기를 기다리는 우리 아이들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세주 오심을 기다렸다.  오늘 대림초 4개가 다 켜진 것은, 그 기다리던 사간이 꽉차고 임박하였음을 알려준다, 그 기다리던 구세주 오심의 성탄의 첫 소식은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제일 먼저 알려진다. “다윗의 자손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불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마태 1,20-21)



        첫눈 기다리는 아이처럼



전능하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동반자로 불리어, 구원의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요셉은 비록 다윗 가문 출신이지만 나자렛 시골 사람이었다. 하느님은 그 요셉을 신뢰하였고, 그래서 인류 구원 사업의 중요한 배역을 맡기셨다. 박수를 많이 받고 주목받는 배역은 아니지만, 성탄의 막을 여는 몫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육화\’와 ’임마누엘\’의 신비의 막을 열고, 막 뒤를 돌보는 몫이다. 요셉은 인간의 머리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일평생 자신에게 맡겨진 그 힘든 배역에 충실하며 드러나지 않게, 남이 모르게(마태 1,19)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오늘 복음 속의 요셉을 상기시켜주며, 또한 성탄이라는 무대에 출연하는 ‘나\’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동시, 한편(동극 발표회․김종상)을 나누고 싶다.

\’학급 동극 발표회에서, 무대에서 제일 오래 서는 배역을 제가 맡았다고 했을 때, 그렇게도 기뻐하시던 어머니께서 막상 오늘 발표회를 보시고는, 왜 그렇게도 화를 내셨어요? 무대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무슨 배역이냐고 하셨지만, 요란하게 꾸미고 나오는 왕자와 공주는 하지 못하고 하필이면 느티나무냐고 하셨지만, 이 동극에서는 느티나무가 제일 중요하다고요.

  

사건이 모두느티나무 밑에서 벌어지는 데, 제가 거기 서 있지 않으면 왕자나 공주도 소용이 없다고요. 팔을 높이 펴들고 서 있기가 힘들기는 했지만, 계속 무대에 선 것은 저 혼자뿐이잖아요. 여러 사람에게 박수는 받지 못했어도 제가 맡은 배역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느티나무 같은 사람 요셉        


느티나무의 모습이 요셉 같지 않습니까? 사람을 돌보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사람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도, 느티나무 같은 사람을 제일 필요로 하지 않겠습니까? 성탄 전야제 행사나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이 느티나무의 배역을 맡은 어린이-요셉처럼 그런 마음가짐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얀 성탄! 눈이 와서 이 세상이 눈으로 덮인 하얀 성탄보다, 구세주 오심으로 이 세상과 인류가 죄와 어둠에서 구원되는(마태 1,21) 하얀 성탄이 어서 빨리 왔으면‥‥










6.          대림 제4주일 (가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강길웅 신부


사람들은 자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느님보다는 세상을 더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정 말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할 줄 아는 지혜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 것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이 아니라면 인간의 큰 업적도 가치가 없게 됩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유다의 아하즈 왕이 인간의 계산만 했습니다. 그는 하느님보다는 우상을 더 섬겼고 하느님께 의탁하기보다는 자기의 외교적 수완이나 또는 세상의 지혜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라가 어려울 때 자기 아들을 죽여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했으며 성전의 집기들을 갈취하여 이방인 나라에 선물로 주기도 했습니다.



이에 예언자 이사야가 찾아와서 그런 식으로 나라를 구하려 하 지 말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 매달려 보라고 충고하면서 하느님께 어떤 징조를 구해 보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아하즈는, 자기는 차마 하느님을 시험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외면했습니다. 이사야는 여기서 다윗 가문의 왕들에게서는 어떤 희망이 보이지 않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윗은 그야말로 훌륭한 왕이었지만 그러나 그 후대의 왕들은 하나같이 썩은 왕들이었습니다. 이에 이사야는 말하기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 장래에 한 사람의 탄생을 마련 할 것인데 그는 임마누엘로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의 뜻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느님의 속성을 가진 인간의 존재가 누구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 온 임마누엘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 걷는 인생이 아닙니다. 아무리 실패했어도 버려진 인생이 아니며 아무리 큰 죄를 지어 교도소에 들어갔다 해도 포기된 인생이 아닙니다. 어떤 절망의 처지에서도 그분만 붙들고 뉘우치면 언제고 용서받을 수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처럼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으시며 또 앞으로도 늘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옛날에 한 열심한 신자가 살고 있었는데 착하게 살다가 천당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날 지상에서의 과거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자기가 걸어온 발자국 옆에는 또 하나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더랍니다. 그는 비로소 자기 생애의 여정에서는 언제나 하느님이 함께 계셨음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떤 때는 간혹 하느님의 발자국이 나타나 있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그 시기와 장소를 알아보니, 그때는 어김없이 그가 큰 곤란과 어려움 중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착한 영혼이 하느님께 여쭈어 봅니다. “주님은 제 생애에 언제나 함께 계셨는데 왜 제가 곤란 중에는 하느님이 함께 걸어주지 않으셨는지요?\”



그러자 하느님은 대답하시길, “그때는 내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네가 나를 짊어지고 갔기 때문에 내 발자국은 없고 네 발자국만 있었던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가 어려웠을 때 그때가 바로 하느님을 모시고 걸었던 은혜로운 때였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내가 기쁠 때는 나보다 더 기뻐하시고, 내가 슬플 때는 나보다 더 염려를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역경을 만나서 어려울 때는 감격스럽게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고 의지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의지할 때보다 더 흐뭇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할 때는 하느님께 큰 기쁨이 되어 드리는 것이며, 하느님이 또 우리에게 의지하실 때는 우리에게도 큰 기쁨과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영광이 때로는 지독한 아픔과 슬픔으로 드러날 때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 존재를 맡기고 의지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때문에 더 큰 고난과 역경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임마누엘의 탄생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 줍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신 인생하고 안 계신 인생하고는 삶의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이 다르고 은혜가 다릅니다. 따라서 오실 주님을 경건하게 기다리면서 새해를 축복으로 활짝 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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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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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 제 4 주일

    제 1 독서 : 이사 7, 10-16

    제 2 독서 : 로마 1, 1-7

    복     음 : 마태 1, 18-24


    제 1 독서 : 기원전 735년경 아하즈 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리아와 이스라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두 나라의 연합군은 앗시리아의 왕 티글릿 발레셀의 속국이 된 유다(2열왕 16,7 참조)를 치러 내려왔다. 아하즈의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되었다. 앗시리아에 도움을 청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술책을 포기하고 주님께만 믿음을 둘 것인가?

    바로 이때 예언자 이사야가 개입한다. 이사야의 소신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문제는 정치적 영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오직 주님께만 믿음을 두고 신뢰하라는 충고이다. 그러나 이런 이사야의 권고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닙니다. 나는 징조를 요구하여 주님을 시험해 보지는 않겠습니다.”(이사 7,12)라고 말한 후 아하즈는 앗시리아 왕에게로 갔다(2열왕 16,10). 아하즈는 다른 행동을 취하기로 이미 결정해 놓았던 터였으므로,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신앙심을 가장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사야는 아하즈 왕이 신앙을 버린 것에 실망하여 주님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라고 선언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14). 처녀로 번역된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는 처녀를 뜻하기도 하고 젊은 부인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사야가 내건 징조는 출산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아기 자신이다. 아기의 탄생에서 이사야는 결정적 메시아 시대를 위한 하느님의 개입을 보았던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제 2 독서 : 3-4절은 바오로 사도 이전에 형성된 짧은 신앙 고백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 본성으로 보면 다윗의 후손이고 신적인 본성으로 보면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하느님의 아들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메시아라는 표지 중의 하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기나긴 기다림은 결국 그분께로 인도되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이 사실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써 확실히 드러났다. 하느님 아들이 다윗 가문에서 태어나심으로써 새로운 존재 형태로 들어갔듯이, 부활하심으로써 새로운 존재 형태로 들어갔다. 다시 말해서, 이미 그분의 탄생 이전에도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감추어지고 가려진 신비가 드러난 셈이다.


    복   음 : 이 텍스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 가문에 태어나게 되는 경위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다윗의 후손인 요셉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삶”(마태 1,19)이었다고 우리말 공동번역 성서에 되어 있지만, 희랍어 원문을 따라 ‘의로운 사람’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요셉의 의로움은 어디에 있는가? 자기가 잘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엄격한 모세의 율법에 따라(신명 22,20-21 참조) 단죄하기를 거부했다는 데서 그의 의로움이 잘 드러난다.

    요셉을 통해서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수 있게 협조한다. 그러나 요셉은 서서히 잊혀져 간다. 마태오 복음 3장 이후에는 요셉의 생애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 심지어 마르코는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른다(마르 6,3). ‘어떤 남자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유대교의 관례를 본다면, “마리아의 아들”은 곧 사생아라는 뜻이다. 더구나 아버지에게 유보된 특권인 아이의 이름 선택(루가 1,62-63)에서도 요셉은 배제되었다. 그는 천사가 일러준 대로 아이를 명명했을 뿐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마태 1, 21).

    이처럼 일단 일을 마친 후 요셉은 서서히 뒤로 물러나 사라져 간다. 어찌 보면 구유의 어둠 속에서 은은히 미소짓는 그의 모습이(마태오 2,11에 따르면 아기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었다!) 그의 인품을 잘 드러내 준다고 생각한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대림절이 절정에 달하였고 주님께서 곧 탄생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탄생을 기다려 온 우리는 이분이 다윗 가문에서 나올 것이며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것을 천사의 예고를 통해서 알게됩니다. 그분의 탄생은 보통 사람과는 달리 이미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예언되었고, 부부의 결합을 통해서가 아닌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마리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경이롭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다는 그 자체가 이미 큰 사건이고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은 바로 세상의 질서 안에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징조이며 놀라움인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은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 안에 깊숙이 개입되어 함께 하시고 모든 것을 나누신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신이면서도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천주성과 인성을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시며,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이십니다”(로마 1,3-4).

    오늘 제1독서에서 언급된 이야기는 시리아와 에브라임 간의 전쟁사의 일부입니다. 다마스커스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앗시리아를 거슬러 동맹을 맺기로 결정하고서 유대의 왕 아하즈도 거기에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아하즈가 반대하자 그들은 유다 왕국을 쳐서 다마스커스 궁의 한 아라메어인인 익명의 ‘타브엘의 아들’을 그의 자리에 앉히려고 계획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에 놀라서 아하즈는 주님을 믿으라는 이사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직접 앗시리아인들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들은 다마스커스와 사마리아 왕국을 격퇴시켜 주기는 했지만 동시에 유다를 한동안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아하즈가 이익으로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재난으로 나타났으며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우상 숭배 의식이 보다 쉽게 침투되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그 왕에게 하느님만을 믿으라고 권고하여 피하고자 했던 점은 바로 이점이었습니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이사 7,9). 이사야 예언자는 아하즈를 야훼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그에게 신적 보호의 보증으로서 어떤 징조를 청하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아하즈는 정치적 계산(앗시리아와의 동맹)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는 종교적 이유를 위선적 구실로 내세워 거절합니다. 그러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그 징조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동정녀는 바로 신약의 마리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마스커스의 찬탈자에 의해 다윗 가문이 끊어질까 봐 심히 염려했던 아하즈 왕의 뜻을 뒤집고 예언자 이사야는 다윗 가문이 계속될 것이고 하느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메시아를 꽃피울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메시아는 인간의 뜻과 생각을 넘어서서 오시는 ‘하느님의 선물’임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성탄의 가장 큰 신비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메시아는 결코 값싼 선물 교환으로써 평가 절하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선물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선물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가장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이것은 어둠과 죽음에 싸인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시고 삶의 광명을 주시러 오시는 천상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물은 사람들에게 부담감을 주거나 갚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가 인간에게 쏟아 부어진 것이며, 인간에게 군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러 온, 오직 주는 것만을 일삼는 사랑으로 충만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물은 인간의 협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협력으로 인간에게 주어졌고 가장 보잘것없이 내려왔지만 가장 값진 선물이 될 것입니다. 요셉의 의심을 사면서도 마련된, 마리아를 통한 이 선물은 진 정 세상의 빛을 가져다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 오심이 이처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그 신비에 초점이 모아졌음을 생각하고 이 신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2. user#0 님의 말:

     

    대림 제 1 주일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제 1 독서: 이사 2,1-5

    제 2 독서: 로마 13,11-14

    복     음: 마태 24,37-44


    해  설


      전례주기상으로 바로 오늘 다시 시작되고 있는 대림절의 ‘신비’를 이해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대림절은 주님의 ‘도래’ 또는 주님의 ‘다가오심’을 기념하여 거행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도래’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또 계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림절은 과연 주님의 어떠한 ‘도래’를 기념하여 거행하며 또는 되새기거나 갈망하고자 하는 것일까?

      2천여년 전의 그리스도의 ‘역사적’ 도래는 이미 과거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건을 기념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 사건은 시간상 항상 먼 과거의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교회는 대림절의 여정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그 역사적 도래를 기념하는 성탄의 찬란한 빛과 만나게 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대림 첫 주의 전례는 성탄과의 만남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뒤에가 아니라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미래를 또한 열어 보여주고 있다. 즉 대림 첫 주의 전례는 언제 오실지 그 어느 누구도 모르며 “하늘의 천사들도 또한 성자께서도 모르며 오로지 성부께서만이 아시는”(마태 24,36 참조) 그리스도의 ‘마지막’ 도래에로 우리를 향하게 한다. 동시에 그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교 신자생활 가운에 무한히 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하여 성바울로는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읍니다”(로마 13,11)라고 말하고 있다. ‘구원’은 오직 단 한번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 생활을 끊임없이 쇄신시키고 변모시켜 하느님 앞에 명백히 드러나게 하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개개의 구원적 ‘사건’ 모두가 또한 주님의 ‘도래’인 것이다.

      어쨋든,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펼쳐지는 주님의 이 모든 도래가 그분께서 육신을 취하시어 오신 첫 번째 도래에서 그 진실되고 깊이있는 의미를 취한다고 하는 사실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에서 대림의 신학적이면서도 전례적인 복합적 가치가 드러난다. 즉 우리는 대림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속에서 싹트는 선(善), 아니 더 나아가 최상선에 대한 모든 희망과 원의를 성취시켜줄 어떤 사물 또는 어떤 인물에 대한 ‘기다림’을 중심으로 하여 펼쳐지는 거룩하면서도 세속적이고, 개별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역사 전체를 알아듣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칼을 보습으로 만들 것이다”


      이사야 예언서에 의한 제 1 독서(이사 2,1-5)가 입증해주고 있듯이 ‘기다림’은 이미 아주 먼 구약시대로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정치적 종교적 위기를 맞고서 하느님의 도우심보다는 인간적 결속에 의지하려 했을 때(이사 7장 참조) 선포된 그 예언의 내용은 성도가 우뚝 솟았던 시온산으로 묘사되고 있는 선민의 역사 안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의 목적을 밝히 보여주고 있다. 즉 그 목적은 지상의 모든 민족들을 주님의 ‘말씀’의 인도와 비추심에 따라 모으고 그 중 한 가문으로 하여금 전쟁을 영원히 종식시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왕국이 아하즈 왕에 의해 전쟁(시로에프라임 전쟁: 기원전 734-732)에 휘말려들때 다음과 같이 모든 전쟁의 종식을 예고한다.

      “장차 어느 날엔가 야훼의 집이 서 있는 산이 모두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만국이 그리로 물밀 듯이 밀려들리라. 그때 수많은 민족이 모여와 말하리라.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성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느니.’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아니 하리라. 오,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자”(이사 2,2-5).

      이 대목이 미가 예언서 4,1-3에서도 거의 같은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그 때문에 학자들간에 어느 것이 더 오래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의 원전성을 믿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관심을 쏟을 문제는 원전 비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예언적 대목이 담고 있는 ‘신학적’ 의미이다.

      이 대목에 들어 있는 기본적 사상은 다음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첫째,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당신의 법과 말씀을 선포하실”(3절) 주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모든 민족들이 듣게 됨으로써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일치와 보편적 화해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과연 이러한 모든 내용이 환상적 계시일까, 아니면 실로 신빙성 있는 예언적 소식일까? 현실적 입장에서 보게 되면 그것은 한낱 환상적인 꿈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만, 반면에,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간절한 소망에 눈을 돌려 본다면, 그 예언이 이미 실현되기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의 일치와 보편적 화해를 향해 역사의 신비스러운 힘을 모아 추진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예언자의 말들을 그대로 방치해둘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줌으로써 역사를 개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첫 번째 구체적 공간은 ‘형제애’와 ‘평화’가 진실로 실현되어야 할 공동체 즉 ‘멧부리 위에 우뚝 서서’(2절) 찬란히 빛나고 있는 예루살렘 공동체-모든 민족들을 불러모음의 상징적 표지가 되고 있는-이다. 이 모든 내용이 교회의 상징적 의미와 또한 교회가 세상 가운데서 짊어져야 할 기능이 진정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와 전인류의 일치의 표지이며 도구’(「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1참조)가 되어야 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이사야의 기록은 결코 끝나지 않는 ‘주님의 도래’의 길들 즉 그리스도의 최초의 도래로부터 교회(새로운 예루살렘)와 세상과의 약속,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다른 무엇보다도) 활동을 통한 새 인류의 힘겨운 성장,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끊임없이 ‘오시는 분’(사도 1,4 참조)을 만나러 가는 여정임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노아 때처럼…


      그분과의 이러한 ‘만남’들을 조금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는 늘 ‘깨어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오랜 기다림 속에서 엄습되는 잠이나 피곤함의 유혹을 극복해야만 한다. 마태오에 의한 오늘 복음은 이 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보다 폭넓게 발전시킨 ‘깨어 있음’의 주제(마태 24,42;25,30)를 여러 가지 비유(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등등)를 더붙여 이끌어 들임으로써 ‘종말론적 담화’의 부록 내지는 해설 역할을 하고 있다.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 갔다. 그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홍수를 만났는데,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이렇게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24,37-42).

      매일매일의 생활레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 외에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사람들이 태평하게 살던 노아 시대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회상과 비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불시에’ 찾아오시리라는 사실을 망각한채 매일매일의 일상적 삶의 문제에만 몰입하거나 압도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홍수 사건 때처럼 주님의 ‘오심’에 따르는 위협적이며 위험스런 상황에 관한 점이 그것이다.

      그런데 홍수 사건은 파괴와 저주의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위한 구원의 기회이기도 했다(창세 7,11-23 참조). 임하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항상 다음과 같은 형태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내롭게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처럼 당신께 개방되어 있고 당신 말씀을 온순히 다르는 사람은 구원하시고, 반면에 당신을 배척하고 당신의 원의를 귀담아듣지 않고 마음을 당신께로 향해 들어 높이지 않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멧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41절).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사실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불확실하지만, 하느님의 공의하신 판단에 의하면 확실하다. 그러나 그 상징적 표현은 우리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느님 편에서 주어질 그 확실성을 어째서 지금 이 순간에 갖지 못하는 지를 말해주고 있다. 즉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오시고자 하시는 그날이 언제이든간에 두려움과 ‘깨어 있음’으로 그분을 기다려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42절). 이 구절은 전대목을 통해 반복되고 있는 말로서(25,13도 참조)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드러나게 될 감추어진 간계로 충만해 있는 아주 평온한 듯한 상태의 속임수에 말려들지 않는 밤의 파수꾼처럼 잠으로부터 기습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도록 노력할 것을 강조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짤막한 비유는 적이 면밀히 계획하고 있는 ‘갑작스런 습격’의 상황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43-44절).

      도둑은 언제 침범할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도둑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항상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오시는 그리스도를 도둑에 비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시고자 하시는 그때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깨어 기다림’의 의미를 말해주고자 한다. 이렇게 볼때, ‘깨어 기다림’은 주님께서 우리 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루시는 그 모든 ‘도래’를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마지막 ‘도래’에 대해 더 잘 준비하는 우리의 정신적 자세를 의미한다. 이에 관해 성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말하고 있다: “두번째 오심에 놀라지 않기 위해서는 첫 번째 오심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Enarrat. in Psalmos, Ps 95,14).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성바울로는 제 2 독서에서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제시하고 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읍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로마 13,11-13).

      이것은 잠자지 말라는 권고에서 더 나아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권고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과거 생활 모두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빛’ 속에서의 삶이기는커녕 죄악이라고 하는 ‘밤’에 붇혀 있는 ‘잠’에 불과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활에 들어와 계신 지금은(신앙을 통해) 그 ‘밤’을 애석하게 여기지 말고 ‘대낮처럼’ 살아가야 한다.

      이 모든 상징적 개념들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만남에 대한 근본적인 ‘결단’을 혹구하고 있다. 그분과 거불어 ‘때가 차게 되었다’(갈라 4,4 참조). 그 결과 어느 누구도 방탕하게 지내거나 불의하게 행동할 수 없는 ‘구원’의 마지막 국면이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가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왔읍니다”(11절)라고 하는 것은 이제 좀더 가까워졌을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마지막 결정적 만남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이미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더 강렬히 실현되어가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떤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마지막 ‘도래’는 우리의 생활과 역사 가운에 이루어지는 다른 모든 ‘도래’의 종합이요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user#0 님의 말:

     

    대림 제 4 주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제 1 독서: 이사 7,10-14

    제 2 독서: 로마 1,1-7

    복     음: 마태 1,18-24


    해설


      오늘 전례는 온통 경이와 ‘놀라움’의 징조로 뒤덮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게서는 우리늬 역사 속에 또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 ‘오실’ 때 항상 당신 도래의 ‘흔적’을 남기신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참으로 그분이신지 알 수 있으며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 바로 그분이신지를 알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놀라운 일’ 또는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질서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제 1 독서는 문체상으로 보더라도 야훼께서 ‘징조’를 보여주신다는 사실에 집중되고 있다. 그런데 아하즈왕은 그 징조를 거절한다. 그 이유는 순전히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자기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될까 두려워서이다:“아닙니다. 나는 징조를 요구하여 야훼를 시험해 보지는 않겠읍니다”(이사 7,12).

      복음은 그 ‘징조’가 사람들이 원하지 않았을 때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됨을 보여주고 있다:“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마태 1,23). 요셉 자신이 이 놀라운 일에 당황하고 있는 듯하다!

      제 2 독서도 복음의 의미 전체를 그리스도께 집중시키면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놀라움’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에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로마 1,3-4).


    “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게 징조를 보여달라고 청하여라”


      이제, 이러한 놀라운 일, 경이스러운 일의 배경을 보다 가까운 독서 내용으로부터 분석해 나가기로 해 보자.

      제 1 독서가 언급하고 있는 이야기는 시리아와 에브라임가느이 전쟁사의 일부이다. 다마스커스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완 베가가 아시리아를 거슬러 동맹을 맺기로 결정하고서 유다의 왕 아하즈도 거기에 끌어들이여 했다. 아하즈가 반대하자 그들은 유다의 왕 아하즈도 거기에 끌어들이려 했다. 아하즈가 반대하자 그들은 유다 왕국을 쳐서 다마스커스궁의 한 아리메아인인 익명의 ‘타브엘의 아들’(이사 7,6)을 그의 자리에 앉히려고 계획한다.

      이 모든 일에 놀라서 아하즈는 주님을 믿으라고 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직접 아시리아인들의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다마스커스와 사마리아 왕국을 격퇴해주기는 했지만 동시에 유다를 한동안 속국으로 삼았다(733-732). 아하즈가 이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재난으로 나타났으며, 무엇보다도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 우상숭배 의식이 보다 쉽게 침투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점에서(2 열왕 16,1-20 참조) 더 그렇다.

      예언자 이사야가 그 왕에게 하느님만을 믿으라고 권고하면서 피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서지 못하리라”(이사 7,9), 정치조차도!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추상적 믿음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을 적들의 모든 침략에서 보호하시고 구해주실 수 있으시다는 사실에 대한 굳은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의 왕자를 빼앗을 수 있는 것처럼 여겨젺던 그 ‘타브엘의 아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하즈를 야훼께 대한 믿음으로 서둘러 이끌어 들이기 위해 그에게 신적 보호의 보증으로서 어떤 ‘징조’ -지하 깊은 데서 오는 것이라도-를 청하라고 제안한다:“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께 징조를 보여달라고 청하여라. 지하 깊은 데서나 저 위 높은 데서 오는 징조를 보여달라고 하여라”(11절). 그러나 아하즈왕은 자기의 정치적 계산(아시리아와의 동맹)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는 종교적 이유를 위선적 구실로 내세워 ‘징조’를 요구하기를 거절한다. 신앙은 인간적 계획과 일치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야훼께서는 여전히 ‘징조’를 보여주신다. 그 지조는 바로 그 왕이 신앙이 없음으로 인해 야기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일어나야 할 징조다:“다윗왕실은 들어라.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도 성가시게 하려는가?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늘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3-14절).

      아하즈왕은 자기 나라를 외국의 침공에서 구하고자 했다:그런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가! 즉 그가 구원을 요청했던 아시리아의 억압을 받게 된다 그는 다윗가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한 무명의 인물에게 왕위를 빼앗길가봐 두려웠다.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 야훼께서는 다윗가문을 이어주신다. 그러나 아하즈왕이 생각해썬 정상적인 계승방법이 아니라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하신다. 보다시피, 하느님은 인간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충실성의 의무를 저버리심이 없이 인간적 계산에 의한 계획을 뒤집어 놓으신다. 즉 오직 인산들이 당신의 ‘길’을 따라 것고 당신의 약속과 지혜를 보다 더 신뢰하도록 하고자 하신다.


    “동정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 유명한 ‘동정녀’(ha-‘almah)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우리 여기서 학자들이 다루는 연구분야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다. 다만 우리가 말할수 있는 것은 교회가 바로 오늘 전례의 복음으로 제시하고 있는 마태오복음(1,22-23)에 따라 그녀가 남자를 모른 채 동정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시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라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마태오 복음사가는 히브리인들이 제시했던 명백한 징조를 메시아적 표상으로 이미 앞서 해석했던 70인역(기원전 3-2세기)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원문을 조금도 다치지 않고 있다.

      신약성서 저자들에 의한 구약성서의 재해석이 신자들에게 있어서 규범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는 사실은 별문제로 하고 실질적으로 본다해도 마리아는 이사야의 그 구절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된다. 사실, 그녀의 모성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볼 때 참으로 위대한 ‘징표’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처녀’이며, 그 아들은 그녀가 이름을 지어줄 만큼 그녀에게 속해 있으며,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는 그의 이름은 장차 메시아로서의 그의 사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역사살 어떤 인물-아하즈의 아들이며 열심한 왕 히즈키야로부터 시작해서-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되실 수 있도록 그 도구 역할을 실현시킨 사람은 없다!

      이 모든 내용은 문맥상으로 내리느 결론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하즈 왕이 다마스커스의 무명의 한 찬탈자에 의해 다윗 가문이 끊어질까봐 심히 염려하는 것을 보았다. 예언자 이사야는 ‘다윗 가문’(13절 참조)이 계속될 것이며 하느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메시아를 꽃피울 것이라고 그에게 예언한다. 그 메시아가 ‘살과 피’로써 실현시킬 하느님의 계획을 앞서 실현시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메시아는 순수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역설적이고도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의 동정 잉태와 탄생의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이렇게 볼 때, 사실상 이사야 예언의 실현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대한 해석이라고도 볼 수 있는 오늘 복음의 내용을 이해하기는 더 쉬워질 것이다. 여기서 그 ‘징조’의 모든 신비스러운 점과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 ‘동정녀’가 있었는데 그녀가 어머니가 되었다. 즉 성령으로 인해 한 아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 아들은 하느님과 또한 우리 인간들과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모양으로 인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거기에 다윗가문 출신의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메시아에게 혈통으로서 다윗 가문을 이어준 것이 아니라 법적 동의와 무엇보다도 특히 사심없는 사랑과 봉사로써 그 가문을 이어주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놀랍고도’ 경이스러운 사건을 진귀한 상황이 연출해내는 새롭고 극적인 내용에 매료된 호기심 가득한 해설자로서보다는 그 사건들 자체의 ‘신비스러운’ 의미를 파악하기를 지향하는 신학자로서의 제어된 문체로 기술하였다. 그 극적 요소는 비록 신적이지만 또한 아주 인간적이기도 한 그 이야기의 인물들 가운데 적어도 어떤 인물의 마음상태를 이해하는 데는 절대로 필요한 요소이다.

      오늘의 복음 대목은 역사적 사료 외에도 믿음(신앙)의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 첫째 요소는 이미 말한 대로 예수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인간적 차원에서 말하는 아버지가 없고 동정녀이신 어머니 자신도 오직 성령에 의해서 그를 잉태한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의 인간적 체험의 규범에 따른다면 마리아도 온전히 그의 어머니가 되지는 못한다!

      우리는 이 대목이 마태오복음의 시작이 되고 있는 예수의 족보에 관한 긴 서술에 뒤이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1).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족보에 관한 서술로써 예수를 앞서 이루어진 모든 구원사 가운데 한 ‘평범한’ 고리 정도로 생각할까 염려되어, 예수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완전히 ‘예외적’ 요소임을 말하기에 이른다. 즉 예수는 예견되고 기대하던 존재이지만 완전히 ‘규범을 벗어나 그것을 초월해 있는 존재이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다윗 가문이 하느님께 한 양자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메시아를 태중으로부터 당신 아들로 태어나시게 하시며 그를 다윗 가문에 양자로 주신다”(M. Kramer, Die Menschwerdung Christi nach Matthaus(Mt.1), in Biblica, 45 (1964), pp.1-50:이 대목은 p.48).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시지만, 우리 인간들을 섬기러 오신다. 이것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신앙의 둘째 요소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메시아에게 부여되고 있는 똑같이 상징적 의미를 지닌 이중적 명칭에 의해 드러난다:“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21절). 사실, 우리는 예수라는 명칭이 히브리 말로 여호수아(Jehoshu’a) 즉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라는 말의 번역임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 구원하실 그 ‘백성’은 물론 하느님의 용서를 끊임없이 체험하고 있는(9,8;18,15-18 참조)교회를 말한다.

      또 다른 하나의 명칭은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에 따른 임마누엘이라는 명칭인데, 복음사가는 그것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23절)로 번역하고 있다. 이 두 번째 명칭은 앞의 명칭보다 더더욱 밝히 메시아의 신비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게서 우리 가운에 오시어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 되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대신하여 나타나거나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분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다인 자신이 하느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므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지만 인간의 주도권을 말살기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들어 높이신다. 이것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앙의 셋째 요소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협조를 구하셨다. 그것은 결코 쉽거나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그녀의 잉태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체면을 살려주려고자 하는 요셉(19-20절 참조)의 눈에까지도 부정한 여인, 거짓된 여인으로 비치게 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다윗 가문도 잇고 인간적 체면도 살릴 수 잇는 상당히 값지면서도 극적인 협조를 요청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가운데 오심은 이처럼 크나큰 신앙과 또한 어쩌면 그보다 더 큰 고토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도래’와 그리고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는 그분의 성탄은 그분의 사랑을 맏는 모두의 용기있고 폭넓은 협조 없이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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