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대축일 강론모음

 

예수 성탄 대축일(낮미사)

하느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1독서 : 이사 52, 7 – 10

제2독서 : 히브 1, 1 – 6

복   음 : 요한 1, 1 – 18

앞서 거행한 두 대의 미사(밤미사와 새벽미사) 전례가 하느님 아들의 탄생의 신비에 대한 흥분과 두려움으로 꽉 차 있다고 한다면, 이 세 번쨰 미사는 기쁨 외에도 서정적이며, 대단히 풍부한 신학적 사색으로 가득차 있다. 이 접에 대해서는 두 번째 독서인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세 번째 독서인 제4복음의 서언 한두구절을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본기도도 오늘 이루어진 사건에 대해 그 신학적 의미를 깊이있게 표현해주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 이 자체가 이미 무한한 기쁨의 동기가 된다 – 인간이 마리아의 아들을 통해 이미 천주성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신학적 사색이다 : \”인간의 품위를 기묘히 만드시고 더욱 기묘히 새롭게 하신 천주여, 성자께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니, 우리도 성자의 천주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오늘 그 힘든 여정이 시작되는 인류의 구속사업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시면서 인간에게 이미 부여해주신 품위보다 더 고귀한 품위를 인간에게 가져다주셨다.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1,3)에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성부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예수 안에서 하느님과 자신의 유사성을 더욱 명백하게 찾아 얻는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이 말은 바로 요한복음의 놀라운 서언이 담고 있는 메시지이다. 이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도 미묘한 주석문제에 빠져들기를 피하면서 성탄의 신비를 중심으로 읽어 보고자 한다.

성탄의 신비를 중심으로 하여 읽어 볼 때 가장 결정적인 구절은 14절에 나타나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여기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라는 구절은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말씀이 육신(또는 몸)이 되셨다’로 번역되는데 ‘육신(또는 몸)이 되었다’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히브리어 ‘바사르(basar)’에 해당되는 ‘사륵스’(sarx:육신, 몸)하는 희랍어의 개념은 나약성, 죽음, 한계성, 죄와 더불어 존재해야 하는 일반적 의미의 인간(요한 3,6;창세 6,3;시편 56,5;이사 40, 6 참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육신이 되셨다’라는 이 표현으로는 그리스도의 육화와 스스로 낮추심의 실제성을 강하게 표현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바울로는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형제가 될 때 몸소 행하셨던 ‘자신의 비움’ 또는 ‘자기 해방’에 대해 직접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필립 3,7 참조).

뿐만 아니라 육화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항구한 ‘거처’를 실현시켰다. ‘우리와 함께 계셨다’라는 표현 대신에 희랍어 원문대로 ‘우리 가운데 그의 장막을 치셨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히브리인들이 광야생활을 한 것처럼, 예수의 ‘유랑’ 체험도 또한 계약의 ‘장막’ 안에서 당신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야훼의 현존(출애 25,8;만수 35,34 참조)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통해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인간에게 접근하셨다.




한 처음 말씀이 계셨다.




지금 우리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음과 말씀의 창조적 능력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요한복음 서언의 첫 부분을 다시 읽어 본다면, 우리는 그 모든 내용에 대해 자못 놀라게 된다 :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1,1-3).

성요한은 거듭거듭 반복해가며 점점 확대시켜 가는 자기의 복음 안에서 사람들이 오다가다 길에서 만났던 바로 그 나자렛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 크나큰 신비를 실현시켰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즉 나자렛의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 요한은 그분을 말씀이라고 표현했다 –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분이시며, 하느님과 함께 창조자이시라는 내용을 말해주고 있따.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육화의 기적 안에서 자기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내신다. 즉 그분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제작자가 되신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그분은 당신 스스로를 시간과 공간 안에 가두신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육화의 신비를 통해 높아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사가가 이 모든 것을 ‘영광’으로 푠현하고 있음을 들었다 :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14절).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이 구절 속에서 ‘그리스도의 변모’(루가 9,32-35 참조) 때와 같은 그분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내는 순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보거나, 또는 요한이 ‘징표’라고도 일컫는(요한 2,11;4,54;6,30 등 참조) 그분의 기적들을 본다. 실제로 요한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시어 우리의 가장 비참한 처지에까지 내려오신 바로 그 사실에서 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즉 하느님 사랑의 위대함은 그리스도가 행한 바로 스스로의 낮춤을 통해 들어높여진다는 사실을 요한은 보고 있는 것 같다.

요한복음사가는 이와 비슷하게 부활 전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곧 하느님 아들이 ‘영광을 받음’의 표현이라고 가르친다 :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3-24). 그리스도의 ‘영광’은 죽는 밀알 하나가 되는 데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열매를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이롸 같이 역설적으로 드러나다가 결국에 가서는 애매모호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분 앞에서 당황하게 되거나, 또는 하느님의 ‘선물’인 그분을 거절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점이 요한복음 서론에서 비탄스럽게 입증되고 있으며, 요한은 이 점을 서론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복음 전체를 통해서 명백히 하고 있다. 즉 그의 복음은 빛과 어두움, 생명과 죽음, 사랑과 미움 사이의 뚜렷한 극적 충돌에 대한 대화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알아주지 않았다”(4-5. 10-11절). 세상이 아무 관계도 없는 이는 거절하지 않으면서 그 세상을 만드신 분을 거절한다는 것은 역설이 아닌가! 보다 더 심한 역설아 그분의 가족들과 고행 사람들마저 그분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위의 구절 중 마지막에 나오는 ‘백성들’(희랍어로는 oi idioi)이라는 말은 분명히 예수께서 유다의 베들레헴에 빛으로 태어나셨을 때나, 또한 그분의 공생활 기간 동안에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스분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그분이 사시던 당시의 유다인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여기서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2천 년 후 오늘의 사ㅏ람들이 마침내 예수를 자신들의 생활과 사회조직 속에 받아 들였는지 또는 받아들이고 있는지! 더 솔직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인지를 정말로 발견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의 생활 속에서 예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신앙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즉 우리가 신앙을 통해 우리 앞에 있는 순진한 어린이나 죄없는 한 인간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실제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충만한 은총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존재로 스스로를 낮추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은 서론의 끝부분에서 아주 탁월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12-13절).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과정은 혈육이나 육정을 통한 자연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탄생의 근원이었던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 ㄹ이루어진다(루가 1,35 참조).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의 계획에 대한 근본적인 자유으ㅟ 개방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능케 하며,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성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당신의 충만한 은총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충만한 은총을 우리에게도 부어주심으로써 우리 모두는 참으로 그분의 형제가 되는 것이다 :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시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16-17절).

조금 전의 복음사가는 “은총과 진리로 충만하신”(14절) 말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은총과 진리’라는 이 말로 하느님께서 우리 구원에 대한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심을 입증해주기 위해 보내주시는 예수를 설명한다.

여하튼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실현시킬 수 없었던 것을 그리스도께서 실현시키신다. 즉 하느님의 자비와 진실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마침내 인간은 구원을 얻게 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 자신의 신분을 우리 인간에게 신비스럽게 참여시킴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축제일에 우리는 예수의 탄생뿐만 아니라 성바울로께서 꾸준히 가르치시는 것처럼(로마 8,15.23;갈라 4,5;에페 1,5 등 참조)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남도 축하해야 한다.

18절에서는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이루어주신 위대한 계시 내용을 볼 수 있다 :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도 다시 알아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생명을 살도록 우리를 온전히 당신 자신에게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예언자들을 시켜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서언도 그리스도 안에서 마지막 결정적인 계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1-2절).

말씀의 ‘낮추심’을 알려주시고 요한의 관점과는 달리,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 말씀의 위대성을 알려주고자 한다. 그래서 그 말씀의 초월적인 모든 측성들을 강조한다. 말씀은 모든 예언자들 뒤에 오신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유일한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우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2절 참조) 이 세상 만물의 지배권과 상속권을 가지신 분이다.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오…




히브리거의 저자는 ‘지혜(=말씀)’를 표현하기 위해 구약성서의 내용(지혜 7,25-26 참조)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이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천사의 칭호보다 더 높은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으심으로써 천사들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셨습니다”(3-4절).

여기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라는 표현과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라는 이 두 가지 표현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이 본질상 동일하시면서도 위(位)로서는 서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기 위해”(3절) 스스로 낮추시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지만 천사들보다 지극히 높은 곳엣거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른편이 앉으실 권리를 갖고 계신 분이시다(4절 참조).

이와 같이 ‘하느님의 아들’이 ‘천사들’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셨음을 주장하는 동기는 아마도 이 히브리서를 받아 읽게 되는 대상자들 가운데 일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들어 그분을 천사들과 비교하여 더 낮은 위치에 놓으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지니신 천상적 초월성을 전혀 상실함이 없이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해 희생제사로서의 당신의 사제직을 실현시킬 수 있으셨던 유일한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결국 히브리서의 저자와 요한복음사가는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다 같이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가 비록 하느님 아들의 지극한 겸손(낮추심)을 나타내지만 그와 동시에 그부의 사랑을 가장 위대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행위이며, 그 결과 하느님께서 가장 참되고 진실된 영광을 입으실 수 있었던 행위라고 말함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있다.




반가와라, 기쁜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이제 우리는 제1독서에서 폭포수처럼 넘쳐 흐르는 기쁨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다. 그 기쁨의 의미를 보다 직접적인 면에서 볼 때 바빌론 종살이로부터의 유다인들의 해방 및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중대한 알림과 관련이 있다. 독서의 내용은 메시지의 한 전달자가 기쁜소식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 달려오는 광경을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반가와라, 기쁜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있다고 외치며, 휘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의 이르렀다고 외치며 ‘너희 하느님께서 왕권을 잡으셨다’고 시온을 행해 이르는구나. 예루살렘의 무너진 집터들아, 기쁜 소리로 함께 외쳐라.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도로 찾으신다”(이사 52,7.9).

예언자들과(이사 43,15;예레 3,17;8,19;에제 20,33;34,11-16;스바 3,15 등 참조) 시편작가들이(시편 47;93;96;97;98;99;145;146 참조) 오랫동안 이야기했던 그 왕국이 드디어 나자렛 예수와 더불어 도래했다. 그렇지만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왕실의 법도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태어나신다. 그러나 비로 갖추어진 이 왕권을 통하여 이미 지상의 예루살렘을 벗어나 이 세상 극변까지 당신의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능력이 드러난다 : “야훼께서 만국 앞에서 그 무서운 팔을 걷어붙이시니, 세상 구석구석이 우리 하느님의 승리를 보리라”(이사 52,10).

성탄은 참으로 역설과 모순의 축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지극히 낮추심을 통하여 당신 영광을, 또한 그분의 나약함을 통해 당신의 절대적인 능력을 드러내 보이신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즉 하느님께서는 힘을 통해 자신을 알리기보다는 단순함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글은 카테고리: logos, 나해 성탄시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성탄대축일 강론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구유경배 

    구유경배 신심은 5-6세기경 에페소 공의회(431)를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성모 마리아 대성당(로마소재)에 사람들이 베들레헴의 구유 유물을 모시게 되자 대성당 곁에 구유경당을 건설하면서 유래되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성탄에 이 경당에서 베들레헴에서 행해지는 것과 비슷한 밤 전례를 지내기도 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구유는 1223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유래한다. 성인은 베들레헴을 방문해 예수님이 누워 계셨던 구유를 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보잘것없음과 가난함 속에서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성인은 하느님의 아들이 가난과 궁핍 속에서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눈앞에 생생하게 재현하고 싶어서 교황 호노리오 3세의 허락을 얻어 구유를 만들어 대중 앞에서 공개하였다. 이는 성인이 신자들에게 성탄의 참된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구유를 만들어 꾸미는 풍습은 프란치스코 회원들에 의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처럼 구유의 본래 모습은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이었는데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날처럼 화려하게 채색된 구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구유 제작에 관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특히 18세기를 전후에서 독일에서는 일반 가정에 성탄 구유가 토착화되어서, 구유는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의 관습이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와 내 가정에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구유를 만들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구유는 성탄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복음을 진정으로 믿게 되고 자녀들에게 신앙을 체득시키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즉 목자들이 서 있는 곳에  나도 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은 바로 참여요 관심이며 친교이기 때문이다.

     구유라는 것은 예수 탄생의 구체적인 한 자리를 상징할 뿐이지만, 그 보이는 자리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동참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는 바로 내 안에 탄생하는 것이다.

    구유는 말씀의 식탁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형상이 될 수 있다.  “구유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 탄생의 위대한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한다. 구유는 베들레헴의 순박하고 소박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그것은 복음이 되고 그리스도교 정신을 가르치는 수업의 현장이 된다. 가난하고, 작고, 이른바 세상이 가치를 두고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오셨다. 가난한 이와 미천한 이들 그리고 소외된 이들이 그분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시어 모든 간격과 장애와 두려움을 없애셨다.”

    교회는 말씀과 형상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신앙이 들음으로써만이 아니라 봄으로써도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구유를 만들고 그것을 봄으로써 성탄의 신비인 육화의 의미를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신비 앞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성탄절의 단어들:

    ①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

    ②노엘: 노엘(noel)이란 프랑스어로 크리스마스를 뜻하는 말.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1. 말씀읽기:요한1,1-18

    2. 말씀연구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이와 같이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 그리고 하느님의 독생 성자가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강생의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 되는 교리입니다. 요한복음은 로고스 찬미가로 복음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세상 창조의 그 먼 순간,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벌써 말씀이 계셨습니다.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콜로새1,17)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하느님과 말씀의 위격적 일치와 결속관계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공생활을 하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늘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늘 기도하셨고, 성령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은 말씀의 신적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기에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육화(인간의 몸을 취하신)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지상 활동은 바로 이 본성에 근거합니다.


    2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은 만물에 앞서 존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하느님의 속성도 표현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독립적이며 대등한 차원에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로고스(말씀)는 1세기의 헬레니스트의 문화계에 일찍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그리스 말입니다. 이 말을 전 우주의 활동적 신적 원인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낼 수 있었던 그 말이, 같은 본성의 일치에 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다 알맞고, 또 당시의 환경 속에서 보다 더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에 로고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유 명사로서 로고스,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말씀의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 밀접한 일치의 생명입니다. 함께 계셨다는 것은 단순히 함께 있다는 표현보다는 공동생활, 밀접한 관계를 표현하는 데에 알맞은 것입니다. 말씀은 하느님이십니다. 말씀이 하느님으로서의 본성을 가지셨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하느님이신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도 하느님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영원성, 그분의 위격성, 그리고 신성을 요한 복음사가는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말씀은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말씀을 통하여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은 그분을 통하여 확대되어 완성에 이릅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을 주시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생명 그 자체 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의 빛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은 창조와 더불어 생명의 원천이요 빛을 주며, 생명은 인간을 위한 빛이고, 빛은 인간에게 생명의 힘입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빛은 어둠을 비추어 몰아내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현재도 미래도 어둠이 빛을 이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둠과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존재들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어둠은 결코 생명의 빛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제압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둠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등진 인간세계, 곧 하느님의 빛에 의해 아직 비추어지지 않는 인간세계를 뜻합니다. 또한 이런 어둠으로 인해 소경이 되거나 악의 세계로 타락한 인간 자신도 가리킵니다. 따라서 어둠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빛을 거부함으로써 생긴 결과입니다. 결국 어둠은 하느님을 등진 죄의 결과입니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증언하였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께서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러 왔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온 것입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서 늘 말 해 왔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 더욱 높은 사람으로 평가해서 요한을 빛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예수님은 빛 그 자체셨고 요한은 하나의 등불이었습니다. 이 등불은 아침 햇빛이 찬연히 하늘을 비출 때까지 필요합니다. 하지만 태양이 떠오르면 등불은 필요가 없습니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세상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피조물 안에 계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세계의 생명이요 빛으로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도록 가까이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둠을 더 사랑했기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어둠으로 그 빛을 덮어 버리려 했습니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이 세상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은 하느님을 충분히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사람은 피조물에게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였고 말씀의 빛을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씀은 세상에 당신이 오실 것을 오랫동안 예언자들을 통하여 알리셨고, 마지막으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를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말씀을 거부하였습니다.

     말씀은 모든 사람들의 빛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 빛을 맞이하도록 결단을 촉구했지만, 오히려 말씀과 가장 밀접한 사람들, 즉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은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유다인들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다인들을 통하여 세상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유다인들이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초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모두가 빛에 대하여 눈을 감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 들였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온 그분의 계시를 굳게 지키고,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신비스러운 권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된다는 것은 육체적 출산이 아니고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탄생입니다. 이 영적 탄생의 원인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어, 당신 본성에 참여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 14)는 사도 요한의 증언을 따라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일을 “강생” 또는 육화라고 표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피2,6-7)

     이와 같이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 그리고 하느님의 독생 성자가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강생의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 되는 교리입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이 사람이 되셨는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나이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의 말씀이 한낱 사람이 되셨을까요?  전능하신 하느님이 유한한 인간으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나”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①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1요한 4, 10). ②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 16). ③ 우리에게 거룩한 표양이 되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 29). ④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 4)하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과 같이 거룩한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탄생한 이유를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인데 구태여 인간이 되지 않고서도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들처럼 결코 이해타산 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역사 안에 직접 개입하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이렇게 무조건적이며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분의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수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사람이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무슨 낯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어떻게 아버지 앞에 서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돌아오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강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허’입니다. 비하는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심은 비하라고 하지 않고 “비허”라고 합니다. 그런데 비허라는 말을 한방에서는 소화불량으로 몸이 쇄약해지고 식욕이 떨어지는 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기 비허는 그런 뜻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시어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진정으로 하느님이시고, 아버지와 똑같은 본질을 지니신 분, 곧 아버지 하느님의 신적 본성과 영광도 영원히 함께 지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처럼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강생하시는 순간부터 인간으로서도 존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죄 많은 인간의 모습”(로마 8, 3)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나약함과 미천한 신분을 함께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들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것은 우리들 가운데 자신의 천막을 치셨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법은 한 천막 아래 친밀하고 따뜻하게 모이는 유목민의 습관을 생각하게 하는 동시에, 구약의 회상, 팔레스티나를 향한 40년간에 걸친 히브리인들이 천막 아래서 보냈던 사막의 생활, 거룩한 장막, 예루살렘 성전을 회상하게 하는 것입니다(탈출 25,8; 1열왕8,10;에제키엘37,27). 거룩한 장막과 예루살렘의 성전은 선택받은 백성에게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집이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본 것을 증언합니다. 예수님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그분의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심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본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고, 뒤에 오실 그분이 메시아라고.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라고. 바로 영원히 존재하고 계시던 로고스, 즉 말씀이십니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는 것은 은총 뒤에 은총이 덧붙여지는 것입니다. 만일 먼 거리를 걸어 갈 때 중간까지 누군가가 차를 태워줬고, 내리자마자 다른 사람이 또 태워주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은총은 모두 로고스의 충만에서 용솟음쳐 쇠사슬의 고리처럼 이어지고, 언제나 끊임없이 인간의 협력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육화한 말씀의 영광을 본 증언자들은 그분의 충만함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바로 그 은총까지 실제로 받았기에 그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모세를 통하여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예수님에 관해 기록한 증언자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준 모세와 은총과 진리를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을 뿐입니다. 사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진리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이었던 모세는 심히 불완전한 율법밖에는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율법은 피해야 할 악을 보여 주고 있었으나, 그것을 피하게 하는 데에 필요한 힘을 충분히 줄 수 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율법은 그림자와 상징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을 낳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키지 못하니 당연히 죄의식만 쌓였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규율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해 버리셨습니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이 말씀은 아들을 아버지와 구별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별과 일치가 동시에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로고스로 말미암아 진리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그 자체로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만큼 알려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그분께서 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요한 복음사가는 그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큰 빛을 보고, 그 빛을 향하여 나아갈 때, 나는 말씀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뵐 수 있으며, 빛과 은총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예수님의 성탄을 나는 어떻게 감사하며 축하였습니까?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당신 백성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을 포함한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예수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2. user#0 님의 말:

     

    아름다운 구유 

    옛날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왕은 나라 곳곳에다 이렇게 방을 붙였습니다.

    ‘섣달은 별이 내리는 달이다. 각자가 별을 받을 구유를 하나씩 지어 와서 심사를 받도록 하여라. 살아 있는 구유로 판정이 내려진 사람에게는 상을 주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구유를 만드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서로가 더 나은 구유를 만들기 위해 재료 경쟁이 치열했고, 솜씨 싸움 또한 볼만했습니다. 종을 만들 때처럼 주물로 구유를 만드는 부자도 있었고, 대리석으로 구유를 조각하는 예술가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권력가는 몇 백 살이나 먹은 향나무를 베어 와서 구유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치장 붐까지 일어나서 구유에 금도금까지 하는가 하면, 아름다운 문양은 새겨 넣기도 하고, 안쪽에 비단을 대어서 우아하게들 꾸몄습니다.


    심사일이 다가오자 모든 이들은 들떠서 술렁거리며 전시장에다 각자가 만들어 온 구유를 내다 놓고 가슴을 조였습니다. 심사일이 되자 왕이 전시장에 와서 구유를 심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심사 방법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가슴속에서 빛나는 별을 꺼내어 구유에 살며시 놓아 보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주물로 빚고 금도금을 한 구유 속에다가 별을 놓았습니다.

    그러자, 별은 구유 속에서 이내 굳어져 쇠 인형으로 변했습니다. 왕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다음에는 대리석 앞으로 갔습니다. 별을 꺼내 대리석 구유에 넣었더니 별은 돌 인형으로 변하였습니다. 왕은 또, 고개를 저었습니다. 향나무로 구유를 만든 권력가의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이제 자기의 구유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왕이 가까이 오자 그의 호흡은 거칠어졌습니다. 왕이 자기의 향나무 구유에다 별을 놓았을 때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별은 향나무 구유에서조차 볼품없는 인형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나무 인형이라는 것일 뿐. 실망에 가득한 왕은 궁으로 돌아가려다 군중 틈에서 멈칫거리는 한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왕은 조용히 그에게 말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리 나오너라.”

    소녀는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하면서 사는 “넝마주이”였는데 소녀는 날마다 버리기 아까운 헌 나무를 주워 잇대어서 만든 구유, 그리고 조각 천을 이어서 바닥에 깐 작은 구유를 안고 있었습니다. 왕은 넝마주이 소녀의 그 가난한 구유 속에 별을 놓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별이 숨을 쉬면서 거룩한 아기로 변하였습니다. 이를 본 왕은 기쁨에 넘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리들 오라. 이 가난한 소녀의 구유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구유의 외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유를 꾸미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 눈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구유가 보이지만 신앙인의 눈에는 아기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또한 그 구유를 경배하는 내 마음이 아기 예수님의 마음처럼 그렇게 순수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한 아기가 그렇게 와 계십니다. 비록 작고 약해 보이는 이 아기가 바로 수 천 년 간 그토록 고대하며 기다리던 그분이십니다.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 어느 부부가 아이를 그곳에 뉘이고 싶어 하겠습니까? 하지만 아기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누워 계십니다. 보잘 것 없는 곳에…,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user#0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