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 주일
16. 김정진 신부(나)/ 27
17. 최경환 신부(나)/ 28 18. 표창준 신부(나)/ 30
19. 최익철 신부(나)/ 33 20. 이계중 신부(나)/ 35
21. 김몽은 신부(나)/ 36 22. 조순창 신부(나)/ 37
23. 김영진 신부(나)/ 38 24. 강길웅 신부(나)/ 41
25. 정식수 신부(나)/ 43 26. 교구주보(나)/ 44
27. 김남조 시인(나)/ 45 28. 자기를 잊고(나)/ 46
29. 와서 보시오(나)/ 47 30. 하느님의 어린양(나)/ 48
16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와서 보시오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에는 처음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었던 안드레아와 그의 형 베드로가 스승의 권고에 따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따르게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시오> 하시며 부르심으로써 저들을 당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느님의 부르심 즉 우리의 성소(聖召)에 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소란 진정 신분에 관한 문제이지 결코 어느 사람의 직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소라 함은, 하느님에 의한 일정한 목적에의 고귀한 부르심인 동시에 초대이며 선물입니다. 성소는 우리 각 개인에 대한 하느님의 의지표시(意志表示)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인간은 어느 신분, 즉 사제, 수도자, 부부생활, 그리고 독신생활을 선택할 적에 하느님의 뜻에 적합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인간은 지상에서의 순조로운 생활을 통하여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신분이건 간에 – 성직자이건 가정생활을 하는 이건 – 모두 성인 성녀가 되기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공통된 성소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성실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성인 성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시오>(마태 5,48)하고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인 성녀란 어떤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성인 성녀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두 주인, 즉 자신의 이익과 예수님을 함께 섬기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께 봉사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데 중단함이 없이 전인격적인 충실한 크리스챤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사무엘 예언자와 같이 언제나 <주여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고 있나이다> 하며 전폭적인 신뢰심으로 이에 순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정말로 성인 성녀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성인 성녀들은 어떤 기적을 행하는 딴 세계의 인물로 여기고 우리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초인간적인 면만을 보는 착각에 사로잡히기가 일쑤입니다. 성인 성녀들도 천사가 아니었던 만큼 때로는 인간의 약점으로 번민도 하였고 때로는 한많은 세상에서 유혹도 당하였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와 같이 위대한 분도 자기 약점에 관해서 솔직히 실토하였습니다. 하물며 모든 점에 나약한 우리로서는 얼마나 실수나 결점이 많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실망하거나 낙담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행위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심을 믿지 않고 도외시하는 불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짓는 어떤 죄나 어떤 모독이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스려 모독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마태 12,31)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전능과 인자하심에 신뢰하고 용기를 잃지 말고 우리의 잘못을 슬퍼하며 참회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성인 성녀가 될 수 있습니다. <성인이란 끊임없이 노력하는 죄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자 여러분! 누구나 하느님의 부르심에 쾌히 승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 성소에 충실함으로써 성인 성녀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 우리는 성소라는 말을 들으면 곧 사제직이나 수도생활에 대한 부르심을 생각할 것입니다. 성소의 의미는 그보다도 넓은 것입니다. 결혼생활에 대한 부르심, 헌신적인 독신생활에 대한 부르심, 정치 무대에 있어서 공익을 위한 봉사에 대한 부르심, 교육계나 의학계 그리고 법률계에 대한 부르심 등도 있습니다. 가령 성 토마스 모어는 당대에 가장 훌륭한 법률가였고 가정에서는 헌신적인 남편이요 아버지였습니다.
성 고스마와 다미아노는 의사였습니다. 마드리드의 성 이시도로는 농업에로의 부르심을 받아 훌륭한 농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대의 성인 성녀들도 있습니다. 성 아녜스는 십대의 가냘픈 소녀였고 복자 유 베드로는 13세 소년이었지만 자기의 신앙을 포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의 길을 택하였고 성 방그라시오는 성체를 보호하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끝으로 우리 주변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나날의 일을 해 나가는 근로자,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며 정당한 노임을 잘 지불하는 주인들, 손님이나 환자를 그들 자신처럼 대하는 비서나 간호원들, 가정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내와 어머니들, 가족들을 위해서 힘드는 일을 성실히 해 나가는 남편과 아버지들, 이들 모두는 성인 성녀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성인 성녀가 되도록 성소의 은혜를 받았음을 깊이 명심하고 이에 합당한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17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와서 보시오
최경환 신부
조용하고 엄숙하기만 한 성당의 분위기 속에 성당 정면 한복판에 뫼셔진 십자가를 향한 많은 군상들의 합장과 다소곳한 몸매, 그리고 그 십자가에로만 향한 눈매를 상상해 봅시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직자 수도자 학자 농부 노동자 할머니 할아버지 학생 어린이 각양각색 각계 각층의 군상들의 하늘로 향하는 마음 또한 천태만상 각양각색임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몸매를 가다듬고 머리를 조아리며 손을 합장하고 무엇인가 열심히 외우며 구하는 그 마음, 보기에도 안타깝게 구하는 마음인데 과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국가의 녹을 받고 관직에 있는 사람은 합장한 손을 통해 이렇게 구합니다.
“주여! 좀 더 제게 관운을 티워주시와 빨리 승진케 하여 주소서.”
성직자, 수도자의 무릎꿇은 기도의 모습, 그 조용한 모습을 통해 이렇게 구하기도 합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세속 것을 버리고 신자들만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열의와 용기를 주소서.” 학자와 문학도의 거만한 기도의 태도, 버티고 서 있는 그 마음 속으로부터 “주여! 나에게 좀 더 많은 지혜의 은총을 주시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새로운 발명을 하게 하여 주소서.”
덥수룩한 머리에 뚫어진 양말, 초라하게 보이나 수줍고 겸손된 태도 “주여! 농사를 잘 짓게 하여 주시와 그저 잘 살게 하여 주소서.” 치마폭 한자락을 허리춤에 치켜올려 두 손 모아 합장하고 깊숙이 머리 숙여 제대 앞에 절하기를 그치지 않는 할머니, 그 애절한 애원 속에는 “주여! 저희 자식들 손자들 그저 잘 살게 하여 주시고 이 늙은 것 빨리 죽게나 해주소서.”
10대 20대 젊은 사람들과 학생들, 비록 몸은 성당 안에 있지만 그 정신은 공상과 망상 속에 유흥장 극장 한적한 오솔길의 산책 화려하고 번화한 상점들 이렇게 무료하게 헤매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세속적인 것, 이기적인 것, 현세적인 것, 그리고 쾌락적인 것이요, 또한 보답을 모르는 청원 뿐 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직 세속의 권력 세상의 쾌락과 안락, 그리고 물질적 욕기 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메시아! 구세주! 이분이 바로 우리의 소원이요 우리의 갈망의 대상이며, 땅덩어리도 권력도 재물도 쾌락도 아닌 바로 메시아! 이분을 만나고 뫼시며 무한한 존경과 찬미를 바치며 마음껏 즐기는 것만이 우리의 소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고 있던 메시아, 그분을 우리는 뵈었고 만났으며 얼마 전에 우리 마음에 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만나고 모신 메시아,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요 즐겁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내시고 나를 기르시고 보호하시며 오늘의 내 소원을 풀어주신 메시아께 무한한 찬미와 영광이 있으소서”하며 감사와 찬미의 정신을 지니고 매일 매일의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은 오직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 뿐 입니다”라고 우리의 소망을 외쳐야 하겠습니다.
18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와서 보시오
표창준 신부
사람은 태어나서 나이를 먹어가는 중에 커가면서 점차 철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는 일도 제 스스로의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커가고 철 들어가는 것도 역시 제 스스로의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훌륭하신 부모의 사랑과 가정 교육을 받고 커가는 경우, 철이 제대로 바로 들 것이고 좋은 스승을 만나서 같이 생활한다면 참된 것을 배우게 되어 철이 더 성숙하게 들 것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계속 성장, 성숙되어가고 있고 철들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라오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이요?”하고 물으셨습니다. “선생님,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와서 보시오.” 이렇게 해서 예수는 말로써 다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생활로써 그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생활 속에서 무엇을 보고 체험했겠습니까?
지난 주일부터 우리 명동 성당에서는 또다시 예비자 교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도 500명이나 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미처 살피지 못해 광고도 못했는 데에도 늘 그렇듯이 놀랍게 많이 찾아왔습니다. 이분들은 왜 왔겠습니까? 이들은 시중에 수없이 많은 각종의 학원들 중의 하나를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입시나 취직 시험 준비를 위해서도,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서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할 일 없고 한가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교리를 배우러 일주일에 3번, 주일 미사까지 하면 4번씩이나 바쁜 중에 시간 내어 시간 맞추어 오기 위해 치르는 대가와 수고는 적은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교리를 배우고 영세하신 분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귀한 시간을 서너달 동안 바쳐야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택시값으로 적지 않은 돈이 쓰여졌다는 사람, 직장 일이 바빠 교리에 못 참석하는 날엔 일이 손에 안 잡힌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강의료를 내는 것도 아니고, 안 나오면 누가 욱박지르는 것도 아니고, 무슨 시험에 낙방해서 큰일나는 것도 아니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술이나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아닌데 …… 그렇다고 재미있고 흥겨운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닌데 …… 저녁 시간만 되면, 이 사람들은 성당에 와서 무엇을 얻길래, 그렇게 수백명의 오늘의 젊은이들이 명동성당으로 발걸음을 향하는가?
어린 꼬마에게는 젖, 밥, 장난감, 옷 등 여러 가지가 필요하고 그런 것들이 꼬마를 기쁘게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 꼬마가 언제나 찾는 것은 자기를 사랑해주는 아빠, 엄마입니다. 그 무엇도 자기를 귀여워하고 사랑하는 부모만큼 그를 안심시키고 기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돈, 집, 옷, 식량, 기술 등 여러 가지가 살기 위해 필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꼬마에게 그렇듯이 우리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분이 계실 때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안심하고 기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분이 계십니다. 이것을 체험하고 알 때, 사람은 한없이 기뻐지고 감격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가 홀로의 처지, 내 손에만 내 모든 삶과 인생이 달려 있는 외톨이 처지가 아님을 아는 것이 철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예비자 교리를 시작할 때 오신 분들에게 무슨 기술이나 지식을 전해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철이 들어가기 위해서 저는 그분들과 함께 교리를 해가고 기도하고 생활해가는 거라고 말씀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생활을 통해서 알려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외면하지 않고 진실하게 대하고 존중하셨습니다. 그로써 우리 인간은 예외 없이 사랑해주시는 분이 계시는 처지요, 그분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는 무한히 소중한 존재임을 밝혀 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헐벗은 이, 죄 지은 이도 존중하시면서 이 놀라운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명백히 하셨습니다.
사랑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자기는 홀로인 것처럼, 자기 소유와 재능, 자기 손, 자기 자신만이 자기의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은 안심할 날이 없을 것이고 자기 소유와 자기 자신이 다하는 날, 그 날에 자기도 마지막인 줄로만 알고 완전히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경우 그는 다른 사람도, 자기도 아끼고 사랑해주는 이가 있는 든든하고 복된 처지인 것을 모른 채, 철이 들지 않은 채 살아가는 셈이겠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를 포함해서 우리들도 얼마나 자주 일상생활 속에서, 사랑해 주는 이가 없는 처지인 것처럼 철없는 심정에서 살아가는지 우리 자신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여러 가지 진리를 배워가고 철이 들어가지만, 진리 중의 진리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를 변함 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을 때 철이 드는 것이고 그때에 우리의 모든 생활은 안심과 기쁨에 찰 것입니다.
예전엔 있지도 않았던 나를, 바로 이렇게 생기고, 이런 성격을 가진 나를 하느님이 생각해 내셔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있기 시작했고, 이미 이렇게 분명히 있게 된 나를 그 하느님은 변함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 그래서 나는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위태로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매순간 하느님이 내게 계심을 신뢰하고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안심하고 다른 형제들을 사랑할 때 우리는 기쁨에 넘치는 철이 든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인도의 데레사 수녀는 인도의 캘커타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면서 길가에 버려져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치료해주는 일을 하며,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고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캘커타 거리에서 2만3천명 이상 되는 병자를 데려왔으나 그중 반 정도는 죽었습니다.
어느날 길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쥐와 개들이 반쯤 뜯어 먹었더군요. 병원으로 데려갔어요. 하지만 병원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주지 않았습니다. …… 거의 20년간 가난한 사람들과 접촉해오면서 점점 더 마음 깊이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인간이 겪는 가장 큰 재앙이요 가장 큰 병은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생각’입니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해서 이제는 결핵도 나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이 무서운 병은 현대 의학이 고칠 수 없고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봉사하는 사랑의 손길이 아니고서는 결코 고쳐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이가 없고, 버려진 처지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이 병은 그들만의 병입니까? 우리는 그런 병과 상관이 없습니까?
병자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해주지 않는 일, 사람이 길가에 버려진 채 있는 일, 갓난 아기가 부모에 의해 쓰레기통에 버려진 줄 모르는 이 사태는 우리와 상관없습니까?
거기 사는 사람들이 가난 속에 찌들려 철없는 행동을 했다고 본다면, 우리는 우리 생활에서 그렇게 철없는 행동, 인간이 소중히 여겨지지 않고 버려지게 하는 길가나 쓰레기통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 정직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대통령이라도 약자를 존중할 줄 모르고 미운 상대를 탄압한다면 철이 안들었다고 보겠고, 내 마음에 안드는 사람이라고 해서 참아주고 용서할 줄 모른다면 그 역시 철없는 자세일 것입니다.
철없는 행동 속에서는 우리 모두를 비참하게 만들고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를 찾아갔고, 그래서 철이 들어 병에서 회복된 생활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능력있는 분이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셔서 우리는 결코 각자 홀로가 아님을 알고, 기쁨과 감사 중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러시듯이, 우리도 서로 아끼고 사랑해서 제대로 철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는 철들어 갈 수 없습니다. 철든 행동을 해감으로써 점차 눈이 떠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하시고 자기의 모든 것, 생명까지 나누어 주시며 우리 모두가 사랑해주시는 아버지가 계시는 처지에 있는 존재들임을 실제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미사 중에 성찬전례를 거행하는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치는 내 몸이니라.”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생명까지 나누어 주시며 이 자리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인도 캘커타와 치타공이라는 곳에서는 빈민들과 함께 사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성공과 안일만을 생각하는 생활을 그만두고 빈민 지대 형제들과 생활을 함께 하며 정말 모든 것을 그들은 함께 나누며 생활합니다. 그들은 지식도, 재물도, 마음도, 몸도 나누며 시간도 미래도 빈민들과 나누며 함께 합니다. 이런 젊은이들이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가진 모든 것, 지식도, 옷도, 집도, 돈도 같이 나누는 생활을 해야만 각자 홀로 사는 처지가 아님을 아는 철든 생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불안해하지 말고 우리 모두를 사랑해주시는 분이 계시는 든든한 처지임을 잊지 않고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고 서로 사랑하며 가진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19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와서 보시오
최익철 신부
세자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6)이라 증언했을 때 안드레아는 서슴치 않고 그분을 따라 갔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라”(요한 1,39) 이르심에 그는 가서 보고 또 확인했습니다.
보기 위해서는 우선 가야합니다. 가는 수고를 아낀다면 눈으로 볼 수는 더욱 없을 것입니다. 가 보지도 않고 좋은지, 나쁜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듯 또한 신앙에 있어서도 <간다>는 첫 단계를 거치는데 용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동방 박사들도 베틀레헴까지 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간다>는 수고와 희생없이 본다는 기쁨과 값이 주어질 리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함께 끊어 버린다는 용단도 또한 필요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첩경은 자기 자시이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안드레아는 가서 보고 와서,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말하며 그를 예수께 데리고 갔었습니다. 그들이 만났던 분을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만나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이시라면 더는 다른 것들처럼 보고 싶지도, 믿을 마음도,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그분을 이 다음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가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한번은 미리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찾던 메시아」라고 했으니 만나기 위해 스스로 찾아나서야 겠습니다. 찾으려면 우선 찾을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또 찾을 마음이 클수록 있음직한 곳이 짚이고 만날 곳도 발견되게 마련입니다.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요한 1,38)라고 주께 여쭤보십시오. 「와서 보라」 하시었는데 주를 어떻게 발견하고 따라 갈 것입니까?
그러나 그분은 그 길을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 놓으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8,20)하신 주의 말씀이 기억납니까? 또한 「이는 내 몸」이라 하신 그 몸이 성당 안에 모셔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거룩한 성체를 매일 내 안에 모실 수도 있으니 바로 여러분은 그분과 함께 하고 있고 여러분의 생활 역시 그분과 함께 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분은 더 구체적으로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일러 주시었습니다. 주님은 내 이웃에게서 당신을 만나 주기를 원하시었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 안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이 만드신 것은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까닭에 소외된 모든 것을 향해 새삼 눈 돌려지는 가운데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내 제자로 삼아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는 말씀을 주셨으니 우리는 실상 어느 한 순간도 그분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세상의 빛”(요한 8,12)이라 하셨으니 우리가 어두움의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빛으로 살 때 그분 안에서 함께 하는 삶인 것이며 이 모든 느낌이 바로 찾아서 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고 싶을 때 이미 사랑하고 있듯, 찾고 또 보고 싶을 때 이미 찾았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찾았기에 또 찾고, 보았기에 또 보고 싶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높은 사람을 대하는 사람일수록 높아 보이듯, 메시아를, 하느님만을 대하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높아 보이고 행복할 것입니까? 그런 인생은 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이런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의 직접적인 음성에 접하며 그 이끄심에 따르기 위한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일입니다. 이로써 그분에게 더 익숙하게 되어 나중에 그를 뵈올 때 즉시 알아보는 영광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20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와서 보시오
이계중 신부
평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박해 시대에 살고 있던 교우들과 같이 하느님을 위해 목에 칼을 받는 순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평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순교자들이 가졌던 순교 정신은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만 합니다. 순교 정신이라 함은 유혹과 불의․부정의 간교한 꾀임에서 사욕, 물욕, 건강, 교만, 나태 그리고 지나친 자애심을 희생시킴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보존하는 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 가장 끊기 힘든 사욕, 즉 육욕을 순교 정신으로 이겨나가야 하겠다는 점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정당한 육욕은 좋은 것으로 하느님께서 이 육욕을 주심으로 당신 창조 사업의 일부인 인간의 번성을 사람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육욕이 하느님의 의도를 벗어났을 때는 그 좋았던 것과는 정반대로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성바울로는 사람이 범하는 다른 모든 죄의 대상은 육신밖에 있으나 음행을 하는 자는 제 육신을 거슬러 범죄하는 것이며, 육신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천주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니 음행은 천주 성령의 성전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고린 6,18-1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음행을 대단히 싫어하시며 음란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과 불로 멸망시켰으며, 음행하는 자들을 하루 동안에 2만 3천명을 죽였습니다(1고린 10,8). 그러나 사람은 음행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죄를 가장 많이 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성인은 지옥에 가는 사람은 모두 음란한 죄를 범한 사람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지옥에 가는 사람은 음란한 죄 때문에 가는 사람이 제일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이 음란한 죄를 모든 힘을 기울여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음란한 환경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즉 음란한 장소에 가지 말고, 음란한 이야기를 피하며, 그리고 본다거나 생각한다거나 하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의식적인 범죄는 조심함으로써 피할 수 있는 것이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힘에 넘치는 시험을 당하게는 하지 않습니다(1고린 10,13).
둘째로 술을 절제 있게 마셔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술은 마음을 유쾌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으나 이 경우는 절제 있게 술을 마실 때를 말하는 것이고 지나치게 마실 때는 ‘술에는 음란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술과 음란에는 또한 돈의 남용이 따르는 법이며, 따라서 자신과 가정과 사회를 모두 망치게 합니다. 셋째로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나약하며 더욱이 음란한 죄에 대해서는 한층 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누가 나는 이 죄에 대하여 자신이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다윗 성왕도 2층에서 낮잠을 자고 바람을 쐬며 아래를 내려다보다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서는 그만 살인과 음란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스스로 서있다고 생각하면 넘어지지 않기 위하여 조심해야 하겠습니다(1고린 10,12).
결혼한 자는 혼배 성사로써 축복된 자요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는 하느님의 거룩한 성사로 축복을 받을 희망에 차 있는 자입니다. 가벼운 행동으로 위대하고 심오한 성사의 본래 목적과는 상반되게 하는 일을 극히 삼가야 하겠습니다.
21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와서 보시오
김몽은 신부
오늘은 연중 제 2주일인 동시에 ‘일치주간’을 기념하는 주일이기도 하다. 오늘부터 25일(사도 바울로의 개종 축일)까지를 그리스도교의 재일치를 위한 초교파적 기도의 주간으로 정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미사는 그리스도교 재일치를 위해서 봉헌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제까지 우리 가톨릭이 갈라진 형제들(프로테스탄트)에 대해 가졌던 편견이나 그릇된 판단을 버리고, 형제적 사랑으로써 공정한 입장에서 바라보며, 서로 진리 안에서 대화를 가지도록 권고함으로써 교회 재일치의 첫발을 내디디라고 권장했다.
‘일치 운동’이라고 하면, 교회의 여러 가지 요구와 시대의 요청에 따라 크리스천들의 일치를 위한 노력으로서 계획되는 활동과 사업을 지칭한다. 즉 첫째로는, 갈라진 형제들의 상태를 공평하고 옳게 표현하지 못함으로써 그들과의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말과 판단과 행동을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을 말한다. 다음에는, 여러 교회와 단체의 크리스천들이 종교적 정신으로 모인 회합에서 잘 교육받은 전문가들이 각기 자기 공동체의 교리를 깊이 설명하고 그 특징을 명백히 말해주는 ‘대화’를 말한다(재일치 교령 4).
사실 우리는 가톨릭이라는 이유만을 가지고 반드시 갈라진 형제들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가르침을 받고, 일곱 가지 성사를 가지고 있는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 전승적 교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나 하는 데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배운 바에 따라서 얼마나 훌륭하게 생활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크리스천이란 얼마나 훌륭한 배움을 받았느냐에 있지 않고, 얼마나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했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하느님이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 사무엘은 완전히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위대한 예언자로 성장할 수가 있었던 것처럼 <주여 말씀하소서. 주님의 종은 듣겠나이다!> 이 태도가 신앙의 태도라 하겠다.
오늘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는 주님께 세례를 베풀 때와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 그 말을 들은 요한의 제자 중에서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와 복음을 쓴 사도 요한 두 사람이 즉시 예수님을 따랐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자기의 형 시몬을 데리고 예수를 따랐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예수를 알아 보고 즉시 따른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주님은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요한 14,6)이시므로 예수 이외에는 길이 없으며, 그 길로 가야만이 진리에 도달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시몬에게 <게파>, 즉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시어 교회의 기초로 삼으셨다.
22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와서 보시오
조순창 신부
새해에 들어서서 주 예수님의 공현 축일과 세례 축일을 지냄으로써 성탄절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지난 세례 주일 후의 연중 1주간에 이어, 연중 제 2주일을 맞이한 오늘, 말씀의 주제는 ‘하느님의 부르심’ 즉 ‘소명과 응답’입니다.
소명이란 더 적극적인 의미이며, 불러도 못 들은 체하는 외면 방관하는 입장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고 왜 부르시는지, 그 의미를 모르면서도, 부르시기에 그 부르시는 분만을 믿고 일어나, 순종하여 따르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은 안식일, 야훼께서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셨기에 안식일에 불러 주시는 부르심에 따라, 우리가 여기 모인 것입니다. 갖가지 고뇌와 걱정 문제와 일 가운데서 주님께서 묵으시는 집에 온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는 증언을 믿고 뒤따르면서,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다.”고 말하였을 때, 예수께서 “와서 보라.”하여, 하루를 지새고 끝내 제자가 된 일과 같이, 예수님은 우리 생명의 말씀으로 들리고, 예수님이 성체로 계시고, 예수님이 은혜로 계시는 이곳, 주님 성전에 와서, 예수님을 신앙으로 보고, 말씀 들으며 은혜로 충만한 중에, 오늘의 소명을 받는 자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는데, 왜 부르셨는지 들으려고, 층계송(시편 39)의 말씀과 같이,
“주여! 보소서. 당신 뜻을 따라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하며, 무엇을 하라시는지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먼저, 오늘 제 1독서에서는 ‘사무엘 상’에서 우리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사제 엘리(Eli)를 섬기던 소년 사무엘(Samul)을 야훼 하느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를 예언자로 삼아서, 야훼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을 모두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믿으며, 진리 안에 진실되게 살 뿐만 아니라, 이해 관계란 위험 때문에 “주저함이 없이, 진실만을 말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예언자답게 살라”고 부르십니다.
둘째로, 오늘 제 2독서에서는 사도 바울로께서 고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에 따라, “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신자가 되라.”고 부르십니다. 고린토란 도시는 문화․경제의 중심지로서, 사치하고 윤리적으로 타락된 곳이었습니다. 이런 풍조가 설립된 지 얼마 안되는 어린 교회에 물을 들여, 교우간의 파벌을 이루고, 윤리적 타락으로 음행의 죄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배 안의 부부 도리를 가르치며, 축복받은 부부 관계 외의 음행의 죄를 단죄하시면서, “우리 몸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므로, 거룩하고 중히 여겨, 바른 윤리 생활과 깨끗하게 살아서, 가정을 성화하여 깨끗한 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러내라.”는 소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셋째로, 본당으로서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일치 단합된 위대한 힘으로 성전을 지어라”는 부르심이 올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믿고, 8천 신도가, 남녀노소 하여 연간 한 사람 앞에 평균 5만원을 봉헌하시면, 더 큰 축복의 해가 될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하느님 뜻을 따라 성전을 지어 헌당할 때같이, “이제 나는 이곳에서 눈을 떼지 않고, 여기에서 들려오는 기도를 들으리라.”는 말씀을 듣도록, 최선을 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1월 18일부터 1월 25일까지의 “교회 일치 기도 주간”을 맞이하여, 요한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께서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1)하고 기도한 바대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한 우리 안의 양으로 한 교회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합시다.
23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김영진 신부
6년 전 미국에서 교포 사목을 할 때, 김수환 추기경께서 내가 봉사하는 그레이트넥 한인 공동체를 방문하여, 미사 집전과 격려를 해주신 적이 있다. 미사 후 강당에서 간단한 환영 파티가 있었는데, 그때 추기경께서 우리들이 깜짝 놀랄 일을 하셨다.
“추기경님의 격려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자, 추기경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여러분! 미사에 오시느라 저녁도 못 드셨지요. 배가 고프실 테니 여기 차린 음식을 어서 드세요. 아까 강론 때도 말씀드렸으니까, 지금은 노래를 하나 여러분에게 선사하겠습니다\”하시는 게 아닌가! 나도 교우들도 추기경께서 갑자기 노래를 하신다 하니, 어리둥절해 있는데,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하시면서 한 곡 뽑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그 노래를 처음 들었기에, 음정과 박자가 맞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야! 추기경님 진짜 굉장히 멋지시구나\”하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그 후 \’만남\’이라는 노래는 한동안 나의 애창곡이 되었고, 지금도 좋아하는 노래로 남아 있다.
\’만남\’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만남\’을 체험하며 사는 우리들이 아닌가. 인간 여정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만나든지간에 만남의 여정 속에 있다. 나와 너의 만남 혹은 나와 그것과의 만남, 그리고 신앙인들에겐 나와 그분과의 만남 등등,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계속되는 만남, 그 만남을 통하여 인간은 기뻐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감격하며 사랑하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한다. 또한 누구를 만났는가에 따라 직업과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만남은 변화를 일으키는 스승
미국에 있는 교포들이 이런 말을 한 기억이 있다. “신부님, 한국에서 이민 오는 교포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누가 공항으로 나갔는가에 따라, 새로 오는 교포들의 직업이 결정될 때가 많습니다. “세탁업을 하는 교포가 맞으러 나가면 세탁업에 관심을 갖게 되고, 야채 가게나 기타 가게를 하는 교포가 맞으러 나가면 또 그런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쪽으로 직업을 정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두려움과 희망이 교차되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직업을 찾을 때, 처음에 마중 나온 이는 그만큼 가까운 사람이니, 자주 만나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직업이 같아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경우도 \’만남\’이라는 것을 통하,여 나의 신앙관과 인생관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수업이 많은 이들과의 만남을 가져왔지만, 꼽는다면 부모님과 지학순 주교님, 그리고 20년째 광산촌에서 봉사하고 계시는 장경숙 수녀님과 포콜라레 운동이다.
부모님께는 신앙을 배웠고, 지학순 주교님에게서는 사제의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배웠으며, 장경숙 수녀님에게서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아픔을 배웠고, 포콜라레 운동을 통하여서는 교회의 사명을 배웠다. 만남은 변화를 일으키는 스승이다.
\’길은 여기에\’라는 책을 써서 수백만부의 판매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미우라 아야코에게 복음의 씨를 던져 주었던 만남의 대상은, 이름 없이 죽어가는 한 폐병환자였다고 하며, 유명한 설교가「무어」선생을 변화시킨 이는, 시골의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중세의 성인 프란치스코는 글라라를 만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나를 만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쪼글쪼글한 딴데기가 봄을 만나 나비가 되듯, 비실비실하는 처녀가 애인을 만나 기쁨과 사랑이 솟구치듯, 우리는 만남을 가꾸고 승화시켜야 한다.
잘못된 만남을 말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만남을 가꾸고 승화시키지 못한 것일 뿐, 만남의 본질은 기쁨과 평화, 희망과 사랑, 구원과 우정인 것이다,
나는 어떤 만남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 내가 만나고 싶어하는 가장 값있고 소중한 만남은, 어떤 것인가? 돈과의 만남인가, 명예와 권력과의 만남인가, 교양 있고 아리따운 여성과의 만남인가, 능력있고 유머 만점인 남성과의 만남인가? 모든 만남이 소중한 것이지만 가장 소중한 만남은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의 만남일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수많은 만남을 가졌을 안드레아, 당대의 유명한 예언자인 요한의 제자가 되기까지 권위있는 지식과 믿음의 세계를 만나며, 이곳에 메시아가 있을까, 저곳에 메시아가 있을까 하며 동분서주하던 안드레아, 그가 이제 인생을 참 행복과 희망으로 인도할 구세주를 만났다는 대목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체험한 안드레아는, 삶의 기쁨과 희망, 자신감과 용기를 가졌고, 그것이 너무 벅차 자기 형 베드로까지 예수님과의 만남에 초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 「에드워드 모트」는 37세된 목수인데, 그는 늘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어쩌다 목수가 되어 망치질이
2. 나 하는 팔자가 되었나. 우리 부모는 나를 왜 이 모양으로 살게 만드셨나\”하면서, 반항하고 원망하며 열등의식 속에 묻혀 있었다.
3. 그러던 중 어느 날 영국 런던의 한 시골 성당에 들어갔다가 예수님을 만난다. 그는 지금까지 방황하고 부정적인 삶을 살았던 것을 반성하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가 \’예수를 만난 후 일기장에 적기를, “나외 망치는 노래하기 시작했고, 나의 망치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 눈동자엔 생기가 돌고, 내 마음 속엔 생수가 솟는 듯 하다\”라고 적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에게는 기쁨이요, 희망이며 삶의 의미였던 것이다.
예수를 만난 안드레아
지금까지 나는 누구를 또 무엇을 만나왔으며, 앞으로의 나는 누구를 또 무엇을 만나며 살아갈 것인가. 수 없는 만남을 체험하며 산다 하여도, 정작 예수님과의 만남이 아니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로 그분에게 희망이 있고, 구원이 있으며, 기쁨이 있고,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비실거리던 처녀가 사랑하는 신랑을 만나면 병이 낫는 것처럼, 인생에 대한 가치관을 잃고 비실거리는 신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냥 바라만 보는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한 발짝 나아가, 마음 깊숙한 곳에 사랑하는 예수님을 모심으로, 내가 그분의 것이 되고 그분이 나의 것이 되는 만남, 그 소중한 신비를 찾아가 보자.
24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와서 보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Ⅰ사무 3,3b.~10.19 (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제2독서 Ⅰ고린 6,13c~15a.17~20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복 음 요한 1,35~42 (그들은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 기도를 하시면서 앞으로 전개될 당신의 전도활동에 대한 실제적인 구상을 하십니다. \’인류구원\’이라는 대업은 아무렇게나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셨지만 그러나 깊은 사색을 통해서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실 것인지를 계획하셨습니다. 그리 고 그 첫 작업으로써 제자들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당시만 해도 세례자 요한의 권위와 명성은 아주 대단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메시아인 줄 알았습니다. 요한이 보여 주는 초인적인 극기 생활, 그리고 썩은 지도자들에 대한 사자와 같은 용감한 외침은 왕까지도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요한을 성서에서 오시기로 \’약속된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자기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사람들 앞에 자기를 부정하고 오히려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쪽으로 따라가도록 권유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하고.
여기서 어린양은 이스라엘이 에집트를 탈출할 때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그 어린양을 말하며 또한 이사야서에서 네 번이나 계속해서 나오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을 말하고 또한 그것은 오시 기로 약속되어 있는 메시아의 정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요한이 외친 어린양은 바로 메시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의 제자들이 그 깊은 내용을 깨닫고는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제 자들에게 물으십니다.“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다시 말해 돈이냐 권력이냐 아니면 명예냐 구원이냐 라고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이때 안드레아와 또 다른 사람은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의미가 깊습니다. 그 분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선 그가 묵고 계시는 곳을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세상에 아무리 설명해도 직접 와서 보지 않고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또 실제로 보면 \’별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밥먹여 주냐.\’라는 말이 있듯이 실제로 와서 보면 예수님의 정체는 겨자씨보다 작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주 보잘것이 없습니다. 썩은 누룩처럼 가치없게 보입니다.
그러나 일단 보고 믿으면 세상에 그보다 더 큰 나무가 없으며 세상에 그보다 더 풍요로운 것도 없습니다. 보이는 것은 하찮지만 그분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세상은 대단히 위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아는 자기 형을 찾아가 한마디로 단정을 했습니다.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쳤던 안드레아의 믿음은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대단히 모순된 말 같지만 세례받고 수십 년 동안 믿음의 생활을 해 왔으면서도 메시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 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믿어도 변화가 없으며 회개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바보들도 없습니다. 자기는 잘 믿고 있다고 하는데 메시아는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인가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 보면 어린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자꾸 착각합니다. 이쪽에서 부르시는데 저쪽으로 가서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대화가 안됩니다. 나중에 스승의 충고를 듣고나서야 비로소 “야훼 여,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우리도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을 분명하게 알아들어야 합니다. 옳게 알아들어야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떠오르는 새해와 함께 믿음의 장정도 새롭게 출발을 하게 됩니다. 올해는 더 건강하고 더 잘 벌어서 더 잘살아야 하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믿음의 정체를 분명히 알고 하느님의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리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쪽에서 부르시는데 자꾸만 저 쪽에서 가서 대답하며 땀을 흘린다면 그는 1년을 또 바보처럽 헛되게 보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오셨으며 속죄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그렇게 소개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새 스승으로 알고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이라는 말과 그분의 정체를 보고는 메시아라고 단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롑니다. 주님은 우리도 똑같이 부르십니다. 따라서 “와서 보라\”시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으며 성서 안으로, 교회 안으로 그리고 사랑 안으로 뚫고 나가도록 합시다.
25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하느님의 어린양”을 따라서
정식수 신부
찬미 예수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우 리는 어린양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의 죄값을 대신 치르는 어린양을 보고 숙연해 합니다. \”하 느님의 어린양\”이신 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분은 사람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니까요. 그래서 그분을 사랑하자고 하고,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분을 통해서 기도하고, 그분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으면서 당신 모습을 세상에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세상의 죄를 없애 시는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그렇고 그런 사람들처럼 하시지를 않았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멋대로 휘두르는 왕이나, 세상의 권력에 빌붙어 아무나 하는 그런 거 짓 예언자나, 애꿎은 양들만 잡아 바치면서 자기 배를 채우는 그런 사제들처럼 하시지 않았 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힘겨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섬길 줄 아는 참된 왕이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 신 참된 예언자이시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 놓고 제사를 드리신 참된 사제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가신 그 길을 알고 감동합니다.
그렇지만 그 열과 감동은 피상적으로만 남습니다. 자신의 삶이 변화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분의 발자국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가야 할 앞선 발자국으로 여기면서도 그 앞선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나서지 않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그분께서 세례 때 받으신 성령을 우리도 받았습니다. 그분이 항상 그렇게 죄가 없으신 채로 당신을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세례를 받아 희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가신 그 길, 세상의 죄를 쳐 없애면서 살아가야 할 삶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가신 그 길(사제의 길, 예언자의 길, 왕의 길)을 부지런히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몸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1독서로 봉독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 이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주님께서 나를 지극히 귀하게 보시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신다.\”
26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와서 보시오!
교구주보
1. 제자의 소명 사화
오늘 요한 복음은 제자의 소명 사화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심리적 갈등이나 불안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포기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또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부모나 부인과 상의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소명 사화에서는 그러한 부수적인 일들은 전혀 다루지 않고 오직 소명과 추종의 핵심만을 서술함으로써 이상적인 제자 상을 그립니다. 모름지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저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명과 추종, 부르심과 따름은 소명사화의 골자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과월절의 어린양 또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과 같은 예수님의 신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어린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고, 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떠나는 날 하느님의 재앙이 내릴 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재앙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절기를 과월절(빠스카)이라 하며, 이때 잡은 어린양을 ‘과월절 어린양’이라 부릅니다. 이사야 53장 7-12절에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가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야훼의 종은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고난을 겪습니다. 야훼의 종은 자신의 잘못으로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죄를 뒤집어쓰고 이를 대신 속죄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고난은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대속행위가 됩니다.
3. 우리의 이해
예수님은 야훼의 종처럼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고난 받으시고, 과월절 양처럼 온 인류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이 예수께서 과거에 제자들을 부르셨듯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 아빠의 사랑에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가정과 직업을 등지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 아빠’가 얼마나 좋으신지 맛들이고, 또 예수님을 믿어 그분께 매료된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하느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끊어버립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제자됨이라 할 수 있습니다.
27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겨울 나그네
김남조 막달레나/ 시인
‘겨울 나그네’란 말이 슈베르트의 연가곡을 생각나게 할지 모르겠으나 그 외에도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다양합니다. 우선 삶 자체가 시간의 궤적을 따라가는 여행길이기에 사람은 누구나 나그네이며 현실의 계절과 상관없이 심정의 추위 여하에 따라 이 말의 실감이 체험된다 하겠습니다.
겨울의 여행자에겐 따뜻한 음식과 그날의 숙소부터 필요할 것이나 이것만을 구하고 얻는다면 내일도 그는 나그네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도착지와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 형편은 달라지겠으나 이 역시도 겨우 한 사람의 여행자가 안도와 안정을 얻는 일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모든 나그네를 염려하며 이들을 덮어주고 쉬게 하려 원하시는 분이 계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먼저 역경 중에 용맹할 수 있는 힘을 터득해야 하겠습니다. “내 기도는 사령관에게 드리는 병사의 보고서이다… 이것들이 제가 발견한 장애물이며 이것이 내일의 전투계획입니다”(니코스 카잔차키스)와 같이 강력한 타개책을 찾아 실행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겐 정신의 겨울이 자주 닥치며 이때 고통을 느낍니다. 이를 벗어나려고 애쓰며 복음에 나오는 지명을 정신의 순례지로 삼아 인내와 간망(懇望) 중에 묵상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겨울은 길고 “강철의 추위”(이육사)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한가지는 겨울의 끝이 필연 있고 그것은 봄이라는 사실입니다. 겨울은 봄을 잉태하였으며 조만간 봄을 해산할 모성의 몸입니다. 얼어붙은 땅 속엔 이미 겨울 보리들이 초록의 줄기로 디밀어 올라옵니다. 삶은 확실히 다소간에 희망적입니다.
“자기의 비참을 모르고 신을 안다는 것은 오만을 낳게 한다. 신을 모르면서 자기의 비참함을 안다는 것은 절망을 낳게 한다”고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이에 있어 우리는 그 중용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즉 신의 실존과 자신의 비참을 함께 인식해야 하며 또한 자신의 비참을 알더라도 결코 절망치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고, 그리하여 앉은뱅이는 일어서고 장님은 눈을 떴습니다만 이때의 ‘네 믿음’이란 말씀이 의미심장함을 자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원하는 뜻이 선명하고 가치와 타당성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즉 주시기에 합당한 것을 바르게 청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기도하는 이는 바라지 아니하고 다만 자신의 처지와 괴로움을 얘기할 뿐이다. 어린아이가 노래하듯이 고뇌와 감사를 읊조리는 것이다”(헤르만 헷세)라는 말처럼 고통 속에서 고통을 객관화함으로써 일종의 초월성을 획득하는 방책이 있을 수 있으며 예술가들의 창작물은 대부분 이렇게 얻은 소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겨울은 심각한 계절입니다. 겨울에 먼길을 가는 이는 봄에 강건할 것이며 겨울 동안 열정을 품어 그 가슴이 식지 않은 이는 봄에 더욱 성숙할 것입니다. 겨울은 이제 시작이며 우리는 굴하지 않는 나그네들이고자 합니다.
28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자기를 잊고 자기를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들의 사랑
샤람의 인생은 추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살아온 세월의 추억들이 그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
사람은 시간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시간은 끊임없이 흩러서 과거로 사라진다. 사람이 살아온 시간은 과거로 사라지지만 그 시간을 살아온 삶은 사라지지 않고 기억 속에 남는다. 기억은 사람이 자기의 삶을 갈무리하는 창고이다. 사람이 이 기억이라는 창고를 어떤 추억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게 된다.
사람이 기억을 선한 추억으로 채우면 선한 인생을 살게 되고, 악한 추억으로 채우면 악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리고 사람은 스스로 원하는 추억을 선택해서 기억속에 간직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악한 추억을 잊고 선한 추억을 간직한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선한 추억을 잊고 악한 추억을 간직한다. 선한 기억을 간직하면 선한 인생을 살게 되고 악한 기억을 간직하면 악한 인생을 살게 된다.
사람이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느냐에 따라 의인이 되기도 하고 죄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사람이 선하고, 필요하고, 이로운 추억은 잊어 버리고, 악하고 필요 없고 해로운 추억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일예로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받은 은혜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고, 상처는 기억하지 말고 잊어야 한다. 그러나 상처는 잊질 못하고, 은혜는 쉽게 잊어 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이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의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은혜를 잊고 감사할 즐 모른다면 은혜를 모르는 불의한 사람이 된다.
한편 남에게 받은 상처는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러야 한다. 상처를 기억하고 있으면 증오심을 품게 되고, 증오심은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 그러나 상처를 기억하지 않고 잊을 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있다. 그리고 용서하는 마음에서 가장 거룩한 사랑이 솟아난다. 사람이 일체의 모욕과 상처를 잊고 감사할 것만 기억한다면, 마음 속에 언제나 선과 사랑과 아름다움만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잊어야 할 것을 기억하고 기억해야 할 것을 잊는 까닭은, 이기적인 자아를 중심으로 기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억의 중심에 언제나 이기적인 자아가 있어서 이기적인 사랑에 합치되는 것은 기억하고 이기적인 사랑에 상치되는 것은 잊는다.
이렇게 자기자신과 자기의 요구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기적인 인생을 살게된다. 이런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온퉁 자기 자신에게만 집념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에 언제나 자기자신이 있게 된다. 이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든 결코 자기를 잊는 적이 없고, 언제나 자기를 생각하면서 행동하기 때문에 일체의 행동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오직 자기가 더 알려지고 인정받고 명예롭게 되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행동한다.
사람이 이렇게 자기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되면 그 사람의 영혼은 사랑이 고갈되어 메마르고 항폐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이 없이 사는 인생은 사막보다도 더 적막하고 항량한 것이 된다. 영원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아서 사랑하는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두 개의 사랑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사랑하게 된다. 하나는 자기률 잊게 하는 하느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을 잊게 하는 자기 사랑이다.
사람은 자기를 잊는 만큼 자기를 하느님께 바치게 되고, 자기를 하느님께 바치는 만큼 더 완전히 하느님과 결합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이 하느님과 더 완전히 결합할수록 더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게된다. 그러나 하느님을 잊게 하는 자기 사랑은 자기를 파멸시키는 거짓된 사랑이다.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어 나왔기에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사람이 자기를 잊으면 잊는 만큼, 영흔 안에 하느님께 대한 기억은 더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된다. 사람이 자기를 완전히 잊고 하느님만을 기억하며 살 때, 사람의 모든 생각은 하느님께 집념하고 온 마음은 하느님 사랑에만 집착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이익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을 만족시켜 드리겠다는 일념으로만 살게 된다.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것은 사랑의 시대이다. 이 사랑의 새 시대는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처럼 자기를 잊고 자기를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들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여기에 인간의 구원이 있고, 자유와 해방이 있고 지복이 있다.
29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와서 보시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첫 제자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말해 준다. 먼저 요한의 제자였던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스승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들었던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 했을 때 안드레아는 주저 없이 그를 따라 나섰다. 그리고 “와서 보시오”라는 말에 따라 그는 가서 보고 확인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형인 베드로도 그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가야 한다. 가는 수고를 아끼면 보기는 다 틀렸다. 호랑이도 굴에 들어가야 잡게 되는 이치와 같다. 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좋다 나쁘다 시비를 가리겠는가?
매사에 그렇듯 신앙에 있어서도 간다는 첫 단계를 거치는데 용감해야 한다.
동방 박사들도 베들레헴까지 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을 보았다. 십일조도 하면 예수님 말씀대로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 하늘이 열러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 말이다.
구약 때도(창세 14,21; 28,22; 신명 14,22-29; 레위 27,30; 아모 4,4) 신약 때도(마태 23,23; 루가 11,42; 히브리 7,5-10) 프로테스탄드들도 다 하는 일인데 우리라고 못할까?
그렇게 하면 기막힌 일을 꼭 볼텐데,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간다는 수고와 희생없이 보는 기쁨이란 있을 수 없다.
신앙에는 끊어버린다는 용단이 항상 필요하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지름길이다.
30 연중 제 2주일 요한 1,35-42 (나)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어린양 2000년이 되었건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의 태양이고 어제의 하늘이 오늘의 하늘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변한 것이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새해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다시 출발하라는 은총인 셈이다. 두려움 없이 새해를 시작하는 것이 은총에 대한 응답이다.
일상의 평범함으로 돌아가 이번 주일로서 성탄시기는 끝나고 연중시기가 시작된다. 교회전례 속에 이러한 매듭이 있다는 것도 지나간 것에 연연하지 말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가르침이다. 본당에서도 성탄시기의 화려함에서 벗어나 연중시기의 평범함으로 돌아간다. 특별히 금년엔 희년의 정신인 ꡐ기쁨과 자유ꡑ가 뿌리내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이 전해주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느 날 그는 동생 안드레아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다. 놀랍게도 주님은 처음 만난 그에게 이름을 바꾸라고 하신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다. 그런데 시몬 대신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시며 바꾸라고 하셨던 것이다. 베드로 ―바위라는 뜻이라고 성서는 풀이하고 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자신을 숨기고 싶을 때, 지난날의 자신을 없애고 싶을 때 이름을 바꾼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런 암시를 주셨던 것이다. 시몬은 죽었다. 그러니 너는 이제 베드로로 다시 태어나라. 아마 이런 암시였을 것이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첫 만남은 이렇듯 이름을 바꾸는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결국 베드로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되었다.
우리는 바위라는 말을 떠올릴 때 흔들리지 않는 무엇을 연상하게 된다. 글자 그대로 바위는 언제나 한자리에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도, 바람이 불고 비가 오더라도, 자연의 얄궂은 변화가 있더라도 바위는 자리를 지킨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자세를 원하셨는지 모른다.
사람들의 잘못을 대신 속죄 그렇다면 무엇을 향해 바위처럼 살아가란 말인가. 복음의 첫 부분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한다. 우리가 매미사 때마다 ꡐ천주의 어린양. 하느님의 어린양ꡑ이라고 외치는 바로 그 어린양이다. 어린양은 희생양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의 속죄를 위해 이 어린양을 제물로 바쳤던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그 어린양에 비유한다. 사람들의 잘못을 대신 속죄하실 분으로 외쳤던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어린양이 될 것을 명하신다. 바위처럼 흔들리지 말고 어린양으로 살아갈 것을 명하신다. 이름을 바꾸어 주시면서 베드로의 미래를 열어주셨던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확실한 길을 베드로에게 암시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암시는 그대로 초대교회의 숙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도 어린양의 길 걸어야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어린양의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쉽게 어린양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바위처럼 어린양의 길을 걷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어린양이 없으면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죄의 어두움이 떠나지 않는다. 우리 가정에서는 누가 어린양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우리 가족 가운데서는 누가 바위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오늘을 우리는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 한 분에게만 바위가 되고 어린양이 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당신을 만나 흔들리지 말고 살아갈 것을 명하신다. 내 마음 속에 어린양의 호흡이 들리고 내 의지 속에 바위의 모습이 있는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와서 보아라
1. 말씀읽기:요한 1,35-42 첫 제자들
2. 말씀연구
“와서 보아라!” 참으로 멋진 말씀이십니다. 나 또한 신앙에 대해서 말할 때 “와서 보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당이 어떤 곳이여? “와서 보세요!” 와서 보니 실망하지 않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스승이신 세례자 요한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었기에 스승으로부터 “하느님의 어린양”을 볼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습니다. 요한과 함께 있던 제자는 참으로 행복하신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훌륭하신 스승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기 하기 보다는 나를 향하게 만들고, 방해합니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요한과 함께 있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요한은 훌륭한 스승입니다.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 스승입니다. 그 두 제자중의 하나는 안드레아 사도였습니다. 볼 눈이 있는 스승을 둔 제자들은 행복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히 이야기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증언자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두 제자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여정에 첫 발을 디딥니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관심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무엇을 찾느냐?”고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왜 따라오는지 아셨습니다. “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을 요한으로부터 들었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십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들의 마음을.
제자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고백하면서 예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라삐”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궁금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스승 요한이 말한 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지, 메시아이신지 궁금했고, 예수님께서 메시아,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면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스승 요한의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접 예수님께 배우고 싶고,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초대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이 말씀은 이렇습니다. “자네들이 궁금해 하는데 와서 보게나. 그래서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되거든 나를 따르게나.”
때는 오후 네 시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제10시”로 되어 있습니다. 해 뜰 때(오전 여섯 시)부터 해질 때(오후 여섯 시)까지를 열두 시간으로 나누는 관습이 있었으니 “제10시는 오후 네 시쯤입니다. 그리고 10이라는 숫자가 완전이나 성취를 뜻하므로 성취의 때를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머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스승 요한의 말대로 “그분의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욱 작아져야 합니다.”라는 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안드레아는 시몬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형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형에게 먼저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나도 이 기쁜 소식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안드레아는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안드레아는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감으로써 자신이 고백한 바를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케파라고 부르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케파는 바위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보신 것입니다.
나 또한 내가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내 가족을, 가까운 이웃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나를 눈 여겨 보고 계십니다. 지금 내가 그것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며, 주님께서 메시아이심을 고백하고, 주님께로 형제자매들을 인도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과 요한의 제자들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요한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렸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호기심을 갖고 예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서 믿게 되고, 안드레아는 형에게까지 알려 형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① 천주교에 대해서는 많은 것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 천주교를 내가 다니고 있음을 다른 이들에게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천주교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어야 하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하며, 매력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요한의 역할이었고, 열심한 신앙인들의 역할이고, 내 역할이 되어야 합니다.
② 천주교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왔을 때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 줄 수 있어야 하고, 천주교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관심 있는 이들이 와서 보니 “아! 그랬구나. 오길 잘했어. 나도 열심히 해야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③ 그렇게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변화가 됩니다.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변화가 됩니다. 그래서 형을 예수님께로 데려옵니다. 변화된 신앙인은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며 변화된 삶을 살고, 그 변화된 삶으로 다른 이들을 감동시키고, 그 감동을 통하여 다른 이들을 신앙 안에로 초대합니다.
이것이 반복될 때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모든 이들에게로 전파될 수 있습니다. “와서 보니 별것 아니더라.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도 나랑 다를 것이 없더라.”이렇게 보여 진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통해서 커다란 벽에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변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보여줍시다. 멋진 신앙을…, 보여줍시다. 행복한 모습을…,
3. 나눔 및 묵상
① 내가 만일 요한이었다면 나는 제자들을 어떻게 했을까요? 예수님께로 보냈을까요? 아니면 붙들고 있었을까요?
② 안드레아는 이 기쁜 소식을 먼저 형에게 전합니다. 나는 신앙의 기쁨을 누구에게 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누구에게 전해야 합니까?
와서 보아라
조영선 신부
본당의 한 형제님이 “신부님, 운동 좀 하세요” 라며 만보기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추운 날씨에 방 안에만 있다가 형제님의 성의(?)를 보아서 2시간 정도 동네를 돌았습니다. 사제관으로 돌아오는 길, 오랜만이라 그런지 두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아무튼 땀을 많이 흘렸기 때문에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기분이 얼마나 좋던지요. 운동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땀을 흘리고 난 뒤의 상쾌함으로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었고 그래서 계속 시간을 내어 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다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정은 늘 힘듭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모두 마친 뒤의 성취감 덕분에 우리는 그 과정의 힘듦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가 예수님께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곧 당신을 따르겠다는 암시적인 표시이지요. 보통 우리 같으면 이럴 때 자세한 설명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실 무렵이라 잘 알려지지 않으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와서 보아라.”
당신이 직접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과정을 직접 행하고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을 뵐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앞서 운동을 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샤워할 때의 상쾌함으로 다시 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어려운 과정마저 주님께 맡기는 것은 아닌가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실제로는 말뿐인 신앙인의 생활을 살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물론 주님께서도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몸소 사람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셨지요. 이미 우리를 위해 손을 내밀고 계시면서 우리가 당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안드레아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특정 사람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저 주님의 뜻이 나의 생활 안에서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고민하며 살아갑시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와서 보시오
은성제 신부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따라가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함께 간 그 제자들은 오후 내내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나서 확신에 차서 다른 사람들에게 “난 메시아를 보았소”라고 말합니다.
제가 예전에 전해 들었던 이야기 중 어떤 신부님께서 신학생 때 겪었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신학생 시절 교도소에 가서 복역자들과 매주 면회를 하는 봉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가 맡았던 복역자는 정치 사상범이었답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다 재밌게 지냈는데 자기가 맡은 그 복역자만 음식을 사가도 안 먹고 말을 해도 대답도 없고 눈도 마주치지 않아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복역자가 동료 복역자 귀를 물어뜯어서 독방에 15일을 갇혀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이분은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1년이 다 될 무렵, 평상시 아무 말도 없던 복역자가 갑자기 “귀 좀 대봐요”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귀를 댔는데 “이 간나 새끼야! 니래 한번만 더 여기 오면 죽여버릴거야!”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뒤로 이 신부님은 심각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 보았지만 맡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다음해에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신부님은 굳은 결심을 하고 그분을 위해 매일 아침을 단식하고 묵주기도 5단을 바치면서 재도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드디어 다시 만나는 날이 찾아왔고, 다행히 또 봤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여전히 그 복역자는 마음을 열지 않고, 계속 쳇바퀴 돌 듯 썰렁한 만남이 계속 되었는데 그렇게 2년이 다 되어 갈 무렵, 어느 날 이었습니다.
만나러 나오면서도 밝은 얼굴로 나오고 생전 눈도 안 마주치던 사람이 먼저 웃으면서 말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정말 여러 사람 만났지만 당신같이 독한 사람은 처음 봤수다. 도대체 당신이 이야기한 예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그렇소? 나도 한번 예수 믿어봅시다.” 그렇게 그 사람은 세례를 받았고, 머지않아 모범수가 되어 풀려나서 지금도 신부님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와서 보시오”라는 한 문장.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진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야 보는 이들이 ‘난 오늘 예수님을 만났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마음의 문을 쉽게 열고 ‘와서 보는 순간’ 예수님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에 눈을 뜨지만 어떤 이들은 그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와서 보시오”라고 말하고 살기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역시 부족한 자신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며 변화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
최성환 신부
일치 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부르심`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을 보게 되고, 복음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셨음을 보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제2독서는 우리의 몸이 곧 성령의 성전임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일치와 부르심, 성전…… 이 일련의 내용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하느님의 성전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모두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을 통해 그 부르심을 충만히 완성시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조용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주님의 삶에 일치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언급하였듯이, 세속적인 사치와 쾌락으로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을 멀리하고,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 몸 안에 머무시도록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제1독서의 사무엘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성전의 모범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부르심을 들었을 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올바로 응답함으로써 자신을 맡긴 채 성령을 자신의 몸 안에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생을 살아갑니다.
다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라는 지향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 아들을 통하여 이 세상 모든 이를 당신께로 이끄시려 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각각 나의 하느님, 너의 하느님을 내세우며 분열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손을 모아 기도 그릴 때에, 모든 종파가 초월하여 바치는 우리의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가 하느님께 진정으로 전해질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 모두는 거룩한 삶과 일치의 삶을 염두에 두고 지내려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는 서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에게 엘리가, 베드로에게 안드레아가 거룩한 부르심에 올바른 응답을 하도록 도움을 주었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배척이나 배격이 아닌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는 길을 함께 걸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하려면!
안병철 신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다’라는 사실이 온 천하에 선포되어 분명하게 밝혀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요한의 출중한 증언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사실상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던 요한은 맡은바 자신의 역할을 온전하게 수행한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대한 증언을 통해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명확하게 제시해 준 믿음의 길잡이였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에 관해서 증언한 첫 번째 내용은‘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증언한 하느님의 어린양은‘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1,29). 그 같은 증언은 죄로 얼룩진 세상을 정화시킬 메시아에 관한 에세네파 사람들의 전승과 승리자 어린양에 관한 묵시 문학적인 전승을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요한이 예수님을‘하느님의 어린양’이라 칭한 것은 그분이 파스카 어린양이시며 하느님의 종이시라는 사실을 표명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그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가야 할 최종 지점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자기 제자들에게 그분께 다가가 그분을 메시아로 맞아들이도록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의 안내를 받아 예수님께 다가가게 될 요한의 제자들은 죄로부터 인간과 세상을 해방시키실 메시아를 만나게 됨으로써 새로운 삶을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외친 안드레아의 감격에 찬 고백이야말로 예수님과 함께 이제부터 의욕적으로 펼쳐가게 될 새로운 삶에 대한 벅찬 기쁨을 토로하는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새로운 삶을 가슴 벅찬 기쁨으로 살아가게 될 제자들이야말로 진정 예수님을 만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이 될 이들은 우선적으로 요한을 추종하던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행복의 길을 열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들의 스승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적인 욕심과 관심을 송두리째 던져버릴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의 위대함을 봅니다. 요한은 자기의 자리를 지킬 줄 알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는 절제된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고 듣고 그래서 증언해 주는 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메시아로 만날 수 있게 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소인지를 일깨워 준 요한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3-14)
그렇다면 우리 믿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요한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하고 있는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이 보여준 모습이야말로 이 순간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만 사회의 복음화도 가능해질 텐데 과연 우리는 사명감을 갖고 그렇게 하고 있는지요?
무엇을 찾느냐?
이완재 신부
우리가 매일같이 먹는 밥은 누구나 할 줄 알지만, 밥 짓는 개성도 각각이고, 지어 먹는 밥 또한 쌀밥, 잡곡밥, 진밥, 된밥 등 여러 가지다. 그러나 모든 밥의 공통점은 힘을 내어 건강하게 살자고 먹는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영혼도 육신과 마찬가지다. 즉 우리의 영혼은 매일 ‘미사 밥’을 지어 성체를 영하고, ‘성경’을 통해 예수님 말씀을 먹는다.
저도 매일 같이 예수님의 몸과 말씀을 지어 먹기도 하고 지어 주기도 하는데, 요즘은 평소에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밥을 지어 먹어 보고 있다. 언젠가 주교님이 예수님 말씀을 암기하여 먹어 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참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서 엄두를 못냈는데, 지난 대림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밥 짓기가 없을까?’ 하고 찾던 중 성경 암기가 생각나 시작해 보았다.
처음 시작 했을 때는 서툴고 아둔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름대로 숙달이 되고, 더더욱 신비로운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채워지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기야 누구나 예수님 말씀을 먹을 때 느끼는 감정이기에 새로운 것은 아니겠지만, 또 한 번의 감동을 체험하였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마태1,38-39). 오늘 예수님 말씀을 맛본 것 중 내 가슴에서 오래 머무는 주님 말씀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주님의 말씀을 한번쯤 암기를 통해 색다른 맛을 보면 어떨까?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요한 6,68)
보라, 내가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박찬용 신부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그처럼 높여 소개하면 그들이 자기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갈 것을 알면서도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고 외친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예수님께 대한 경쟁심이나 질투심을 찾아볼 수 없다. 자기편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께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도록 애쓰는 듯하다. 첫째 자리에 있다가 다음 자리로 물러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자기 자리를 즉시 그분께 양보하고 뒷전으로 물러난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눈치를 보듯 예수님 뒤를 슬금슬금 따라간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먼저 말씀을 걸어오신다. 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신다.
언제나 하느님이 먼저 손을 벌리고 맞이하심을 볼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을 찾을 때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을 아시고 맞아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는 하느님은 아주 먼 곳, 깊은 곳에 숨어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시고, 아주 큰 길에 서서 우리가 당신께 나아가기만 하면 즉시 뵐 수 있는 곳에서 불러 주신다.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신다. 그들이 율법학자들이었다면 “율법을 찾습니다.”
그들이 사두가이파들이었다면 “부와 명예를 찾습니다.”
그들이 애국 당원들이었다면 “로마제국을 쳐 이길 세력을 찾습니다.” 그들이 우리들이었다면 무엇을 찾는다고 말씀드릴까?
우리가 찾는 것은 딱 한 번의 소원이어야 한다. 그것이 생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절대 권력, 부귀, 명예란 있을 수 없다.
“당신들은 무엇을 찾습니까?” 엉뚱하게도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는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전존재를 접해 보고 싶다는 대답이다. 예수님이 묵고 계신 곳에 가서 예수님의 전존재를 직접 보고 듣기를 원한다는 요청이다. 예수님께서도 곧바로 “와서 보시오” 그때는 오후 4시쯤이었다. 그때 그 순간이 그들 인생의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중 하나가 안드레아였다. 안드레아는 둘째 자리에 만족할 줄 알았던 사도였다. 항상 베드로의 그늘에 묻혀 살았지만 지위, 명성이 아닌 겸손, 충성심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안드레아는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를 좋아한 사도였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베드로를 하느님께 소개해드리고, 빵의 기적 때에는 빵과 물고기를 가진 소년을 예수님께 인도하였다.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알기를 원했고 실제로 예수님을 알고 친해졌으며, 그래서 그 좋은 분을 자기 혼자서만 독차지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인도하여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해준 그야말로 큰 사람이다.
세례자 요한과 안드레아의 공통점은 주님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우리도 주님을 알았으니,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주님을 알리는 제2의 세례자 요한, 제2의 안드레아가 되면 좋겠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
최인혁 신부
최근에 임재범이라는 가수의 “만남”이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게 사랑은 아름다운 상처/ 내게 사랑은 달콤한 아픔/ 내 가슴속에 뛰어든 날부터/ 나의 모든걸 차지한 사람”.
우리는 매일 수없이 많은 만남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와의 만남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너와의 만남, 나와 주님과의 만남 등 계속되는 만남을 통해서 기쁨, 슬픔, 괴로움, 감격, 사랑, 분노들을 체험합니다. 만남은 하나의 신비인 듯합니다.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은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만남은 나의 모든 것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도 저를 변화시키고 형성하게 해준 만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의 특별한 만남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제가 고등학생 때 성당에서 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신앙과 성소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신 담임선생님과의 만남입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신상카드를 작성하는데 장래희망란에 “신부”라고 적었는데 그걸 보시고 제게 관심을 가져주셨고, 그 덕분에 학교에 가톨릭 동아리도 만들게 되었고, 그리고 그 후로도 지금까지 그 선생님께서는 저를 위해 기도해주고 계십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께서 저에게 성소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헬렌켈러는 설리반 선생님을 만나서, 프란치스코는 글라라를 만나서 변화되었고, 오늘 복음에 나온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삶을 온통 예수님으로 채우고 변화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 만남을 통해 여러분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을 어떻게 만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만남은 바로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차지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를 부르시고, “와서 보아라.”(요한 1,39) 하시며 우리를 당신과의 만남으로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초대에 어떻게 응답하고 계십니까?
이제 우리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의 성령으로 채워 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사랑으로 채워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그래서 한 마음으로 주님께 이렇게 응답해야겠습니다. “주님,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저는 주님의 뜻을 즐겨 이루나이다.”(화답송 시편)
무엇을 찾느냐, 와서 보아라
양명모 신부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요한 1,38-39)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첫 번째 제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두 제자, 즉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와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으로 추정되는 이 두 사람은 세례자 요한의 인도로 예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갔고, 거거에서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서 복음은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저 복음은 그 날 이후 메시아,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고백하는 안드레아를 언급할 뿐입니다.
왜 예수님을 따라 길을 가고 있는가? 이 물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중요한 물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 역시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와서 보아라.”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 아니라 라삐, 곧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와서 보아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합으로써,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이 메시아, 즉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직접 예수님과 함께 있지 못하면 그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 그분과 함께 대화하고 지내면서 그분이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았듯이, 우리들 역시 신앙생활을 거듭하며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고 이를 통해 믿는 바를 실천함으로써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되고 나아가 진정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자문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주님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세상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만일 주님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십시오. 나는 그분과 함께 머무르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분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지?
이번 주간에는 그분과 함께 조용히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는 안드레아의 고백이 바로 우리 자신의 고백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와서 보아라!!
채지웅 신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특히 아이들은 낯선 사람을 만나면 두려워하면서 멀리합니다. 아무리 부모님이 괜찮다고 말을 해줘도, 아이들은 쉽게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낯선 사람을 믿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어른들보다도 더 빨리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갑니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다가와 말도 걸고 장난도 치면서 함께 하고 싶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요한의 증언을 들은 그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처음에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지, 그분을 온전히 믿기에 따라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예수님과 하룻밤을 지내고 난 후 그들의 모습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안드레아가 베드로에게 한 이 말에서, 그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고, 또 예수님과 늘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면서 그가 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하느님 아들로서의 신적인 권능을 보았을까요? 아니면 유창하게 말을 잘하는 언어의 마술사와 같은 모습을 보았을까요?
안드레아가 본 것은 다른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상시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며 자신을 맡기는 예수님의 믿음,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을 제 몸처럼 아끼는 그분의 사랑,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손님이 아닌 가족처럼 여기는 따뜻함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에서 안드레아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것을….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했기 에, 안드레아는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할 구세주임으 알아볼 수 있었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각기 시작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찾아온 존재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 초대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 발은 다른 쪽으로 내딛은 채 뜻뜨미지근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늘 그랬듯이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화를 내시거나 내치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한없이 넓은 마음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그분의 초대에 적극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 1, 35-42.
서공석 신부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에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세 개의 복음서들이 이미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그 세 개의 복음서들에서 주제들을 택하여 명상하고, 그 내용을 그 시대 대중이 쉽게 알아듣고 이웃에게 옮길 수 있는 이야기 양식에 담아 표현하였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을 보고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라고 고백하였고, 그 고백을 들은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이 말하는 대로 요한복음서 저자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인물에 불과하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습니다.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증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성전에서 피 흘려 바쳐지는 희생양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 피 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서(9,22)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지고, 피를 쏟지 않고서는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유대교 출신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신 것은 그분이 바로 그 어린양의 역할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으로부터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증언을 들은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 그분과 함께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이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는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체험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곳에서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안에 머무는 사람, 그리고 내가 그 안에 머무는 사람, 그런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15,5).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같은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처럼, 그대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입니다.”(15,9-10).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은 그분이 보여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그분이 실천하신 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여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머문 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해 본 사람이 그분을 메시아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라는 호칭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당신 스스로에 대해 사용하지 않았던 호칭입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고 세상 만방을 다스리는 강국이 되게 해 주는 왕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먹이시자,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시다.”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피해서 당신 “혼자 산으로 물러가셨다.”고 요한복음서(6,15)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염원을 이루어 주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 독립하고, 강대국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노력하여 이룰 수 있는 일입니다.
흥부전의 제비는 흥부에게 박 씨 하나를 갖다 주었습니다. 지극히 가난했던 흥부는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흥부의 꿈을 제비가 이루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해 주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염원을 이루어주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상상하고 희망합니다. 예수님 시대 혁명당원이라는 이스라엘의 분파가 기대하던 하느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오늘도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는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정성을 바치면 부자도 되고 출세도 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앞에 열어놓으신 신앙의 길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이용하여 사람이 잘 되는 길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당신 스스로는 죄가 없으면서 사람들을 위해 당신을 내어주어 피를 흘리신 분입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그분의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듣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랑 안에 머무시는지를 보고 배워서 제자도 같은 사랑 안에 머물렀더니,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몸소 해 본 사람이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듣는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바로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어 피까지 흘리셨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같은 실천을 하기로 나선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많은 것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다른 생명을 위해 기여하며 사는 것이 순리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지 못하는 생명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서 살다, 볼품없는 자기 모습 하나 남기고 허무로 사라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생명이 살아야 하는 질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 생명의 순리를 살라고 권합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사는 신앙인입니다. ‘내어주는 몸’이라는 빵, 곧 성찬에 참여하면서, 내어주는 생명을 사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자기만 아는 소인(小人)의 근성을 넘어서 넓으신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 하느님의 자녀 되는 운동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과 함께 묵었던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눈여겨보시며’ 그의 이름을 바꿔놓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시선이 닿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세례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새 사람으로 태어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은 그분을 ‘하느님의 어린 양’, 곧 그분의 죽음을 알아들으면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분과 함께 머물러서 그분이 보여주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어서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서, 그분의 시선으로 주변을 보고, 그분이 하실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사랑이 세상에 흐르게 하는 그분의 자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