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7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7주일



         1. 이용호 신부(가)/ 2                    2. 함세웅 신부(가)/ 4

         3. 김몽은 신부(가)/ 5                    4. 변기영 신부(가)/ 7

         5. 김현준 신부(가)/ 8                    6. 강길웅 신부(가)/ 10

         7. 김승주 신부(나)/ 13                   8. 김몽은 신부(나)/ 14

         9. 김정진 신부(나)/ 15                   10. 김성배 신부(나)/ 17

         11. 중풍걸린 한 남자(나)/ 19             12.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나)/ 20

         13. 민병숙 작가(나)/ 22                  14. 교구 주보(나)/ 23

         15. 이계중 신부(다)/ 24                  16. 전주원 신부(다)/ 25

         17. 공곤라도 신부(다)/ 26                18. 나궁열 신부(다)/ 28

         19. 서경윤 신부(다)/ 31                  20. 김한석 신부(다)/ 33

         21. 강길웅 신부(다)/ 36                  22. 강영구 신부(다)/ 38

         23. 홍금표 신부(다)/ 42                  24. 신은근 신부(다)/ 44

         25.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다)/ 45

1           연중 제7주일   마태 5,38-48 (가) 심술부리게 하는 전화

                                    이용호 신부



사랑의 실천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저는 얼마 전에 친구로부터 잘못 걸려온 전화가 온 집안을 불쾌하게 만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회사 일 때문에 늦게 퇴근한 아버지께서는 밤새 주무시지 않으시고 서류를 정리하셨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시지 않는 듯 일찍 출근하기 위해 아침밥을 재촉했습니다. 바로 그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외상값을 독촉하는 잘못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전화를 거는 쪽에서는 상대방을 확인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외상값 독촉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곤두서 있는 아버지는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이 전화가 있은 후 아침 식사가 별로 늦어진 것도 아닌데도 큰 소리가 오고 갔습니다. 따라서 어머니도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큰아들이 용돈을 달라는 것이 그날 따라 더 성가시게 느껴지셨는지 또 큰 소리가 났습니다. 큰아들은 둘째 녀석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산수 문제를 보아 달라는 것이 못마땅해서 야단쳤습니다.



둘째는 막내가 자기 노트를 흩어 놓았다고 또 야단입니다. 이제 막내는 투덜거리며 마당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때 막내는 강아지가 지나가는 것을 걷어찼습니다. 결국 잘못 걸려온 전화 때문에 강아지가 깨갱하고 짖는 것으로 일이 끝났지만 모두의 기분은 퍽이나 상해 있었습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어머니께로, 어머니에게서 큰아들, 다시 큰아들은 둘째에게, 둘째는 막내에게, 막내는 강아지에게 화풀이를 했습니다. 결국 분풀이를 할 수 없는 강아지에게 와서야 이 일이 종식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결론을 얻게 됩니다. 먼저 잘못 걸려온 전화로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께서 꾹 참으셨으면 될 뻔했습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어머니께서라도 참으셨드라면 아이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가지는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회사나 학교 그리고 가정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잘목 걸려온 전화의 영향을 줄지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잘못 걸려온 전화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의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으로, 보복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며 기도해 주는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은 5장 38-42절과 5장 43-48절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첫째 부분의 말씀을 살펴 봅시다.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복을 했다고 합시다. 이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보복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손길이 돌아올 때 왼 뺨을 치기 위해 오른 뺨을 치는 것은 보복의 뜻이 있다하더라도 왼뺨까지 내주어야 하고, 속옷을 위해 송사하는 자에게는 이불로 사용하는 겉옷까지 내어주며,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고 하는 자의 정을 들어주어 보복을 종식시키라 하십니다. 나 한 사람이 참고 견딤으로써 또 다른 보복의 상처를 내지 않는 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43절부터 48절까지 둘째 내용은 보복하지 않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은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 이야기에서 전화를 잘못 건 사람까지 이해하고 그를 나무라지 않는 작은 일 역시 사랑의 분열을 막는 큰 일이라 생각됩니다. 큰 저수지에 생긴 조그마한 틈이 튼튼한 제방을 무너뜨리는 법입니다. 아무리 사고하고 적은 일이라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 때문에 가정이나 회사나 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겼다면 이것이 사랑의 분열을 조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의식하고 있을 때 우리를 박해하는 원수를 위해서 무슨 큰 일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보복하지 않고 작은 일에도 사랑의 분열을 종식시키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작은 일에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 신자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할 줄 압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형제들까지도 같은 형제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작은 사랑의 실천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랑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소하고 작은 일에서 사랑이 깨어지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영향은 순식간에 우리 모두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소한 감정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던 바를 다 용서하고 이해함으로써 보복의 씨앗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이로써 사랑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진정한 사랑으로 모든 이들과 화합해야 합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 이야기처럼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사소하고 작은 사랑의 분열을 종식시키자는 자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항상 이웃에게 기쁨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말씀인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시오”하신 말씀으로 우리가 마땅히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위 형제와 이웃에게 사랑의 분열을 종식시키는 모범을 보여 주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2          연중 제7주일   마태 5,38-48 (가) 이 어려운 사랑을 어떻게

                                                   함세웅 신부



오늘의 복음은, 크리스천의 사랑이 무엇이고, 크리스천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 인간사회에서는 신분 증명서, 배지, 제복이라는 것이 있어 그의 신분, 학교, 직장, 계급 등을 구별해 줍니다. 더구나 자동차의 모양, 색깔, 번호만을 보고서도 그 주인공이 어느 분이라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들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예수께서는 다른 이들과 식별할 수 있는 하나의 표지를 주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자이고, 그리스도의 신자일 수 있는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사랑 중에서, 그리스도 신자의 사랑은 유일하고 독특하니, 왜냐하면 그것은 : ① 아무도 제외하지 않는, 그 대상이 보편적이라는 점과

② 그 사랑의 동기가 순 인간적이 아니고, 바로 신앙에 근거를 둔 초자연적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나에게 좋은 일을 해 준 사람, 나의 뜻에 맞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이것도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응당 해야 할 자연적인 것이며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죄인들도 그만큼은 합니다.\”(루가 6,32-33)  이러한 식의 자연적인 사랑은 벌써 그 대상이 한정되어 있고, 그 밖의 많은 이들에 관해서는 무관심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마땅히 이것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셨는데 그 누가 감히 이들을 사랑에서 제외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신자의 표시는 바로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당신들이 서로 사랑하면,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4-35)

  

사랑의 이 계명은 물론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실천으로 우리 모두에게 그것은 할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영웅적 사랑의 죽음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최후의 심판 장면(마태 25,31-46)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영원한 벌, 영원한 단죄를 받게 되는 이유는 기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일 미사에 빠졌거나, 교회를 모독했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단 한 가지, “내가 굶주리고 배고프고 먹을 것이 없었을 때에, 너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라는 사랑의 결핍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그리스도 신자,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인, 그는 결국 살인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다 살인자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살인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요한 1서 3,15)

  

어떻든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착한 신앙인들 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이 사실은,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그 사실에서만 증명되는 것이고, 아니!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느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곧 거짓말쟁이 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 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요한 1서 4,20)

  

우리 교회에는 찬란한 순교자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신앙 때문에 끌려가서 갖은 고통과 박해를 당하고 결국 죽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 직전에서도 너무나도 평화스러운 모습을 하고, 그리고는 그들이 얼마나 ‘서로 서로 아끼고 사랑했던지\’, 간수들이 감탄과 경의를 표했습니다. “아! 저들은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 하고.

  

사랑하지 않는 자, 이웃을 비방하는 사람, 더구나 남을 판단하고, 남의 잘못을 도저히 용서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하는 그리스도의 신자가 만일 하나라도 우리 가운데 있다면, 정녕 그는 배교자입니다. 그는 신앙을 저버린 무의미한 영세자입니다.

   

수없이 바쳐 왔고 바칠 「주의 기도문」 후편을 한 번만이라도 진정으로 외워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기에, 우리는 용서받고 사랑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연중 제7주일   마태 5, 38-48 (가)

                                   김몽은 신부



오늘의 복음은 구약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교훈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드러낸다. 물론 구약의 율법에서도 복수를 악으로 간주했지만, 남으로부터 피해를 입었으면 입은 그만큼 보복을 하는 것을 허용했다.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출애 21, 23-25)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모든 것들은 옳지 않은 것이라 가르치신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여라.”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인간관계이다.

즉 사랑의 관계,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다. 그것은 완전히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영혼 내부로부터 울어나오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모든 이를 포용해 줄 수 있어야 하며, 아무리 악독한 원수라 할지라도 배척해서는 안된다. 참 사람은 원래 한계가 없는 법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이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고 말씀하신대로 무한한 사랑을 가질 것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 첫째로 요구하시는 것은 기도도 아니고 종교 활동도 아니다. 오직 사랑,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그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사랑으로 정비된 후에는 반드시 행동으로 옳길 것을 요구하신다. 사랑이 없는 행동은 남의 이목에는 좋게 보여질진 몰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Ⅰ고린 13, 3)



참 사랑은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Ⅰ요한 4,8). 이 사랑으로서만이 미움을 이길 수 있다. 미움은 미움을 이기지 목하며, 미움으로써는 미움을 무디게도 할 수 없다. 미움은 미움을 더하게 할 뿐이다. 사랑은 미움보다 강하고, 선은 악보다 강하여 항상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Ⅰ요한 5, 5)



원수에게 사랑으로 대할 때, 원수의 마음까지도 녹일 수 있게 된다. 그때 이 세상에서는 그만큼 미움이 가시고 평화가 깃든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하느님을 믿는 마음에서만 가능하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행동할 때 이루어진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는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라 일컬어진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서의 새 인간이 된 사람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곧 사랑이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새로 나음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능력을 받아 얼마든지 풍요로울 수 있다. 그는 이미 하늘나라의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동료 인간에게, 즉 이웃들에게 얼마든지 베풀 수 있게 된다. 사실 참다운 풍요로움이란, 내가 많이 가지고 있는 데 있지 않고, 내가 얼마나 남에게 나누어주면 줄수록 더 많아지고, 자신을 헌신하면 할수록 자아가 완성돼 나간다. 그는 무한히 풍요로우신 하느님으로부터 얼마든지 받아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 안에서 나누기 때문이다.











4             연중 제7주일   마태 5, 38-48 (가) 원수를 사랑하라

                                         변기영 신부



네 원수가 배고파할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할 때에 마실 것을 주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주일 독서에 나오는 이 말씀은 세속에서 들어보기 매우 힘든 그리스도다운 사랑의 말씀입니다. 친구나 친척이 배고파하고 목말라할 때에도 마실 것을 나누어 줄 줄을 몰라서 세상은 인심이 야박하다고 하는데 원수가 배고파하고 목말라할 때에 먹고 마실 것을 주라는 말씀은 세상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바라기도 힘든 이야기입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흔히들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하늘보다 더 높고 바다보다 더 깊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이기 때문에 또 자신이 어머니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모성애가 이렇듯이 위대하다면 자녀도 아니요 부모도 아니요 친구도 친척도 아닌 자신이 가장 미워할 수밖에 없는 자를 사랑하고 원수를 돌보아주는 이 “원수애”라는 것은 그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친구간의 우정이 아름답고 유익한 것이고, 친척간의 형제애가 훌륭하고 당연한 것이고, 어머니의 모성애가 말할 수 없이 위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원수지간에 사랑한다는 이 ‘원수애’라는 것은 그리스도다운 거룩하고도 거룩한 지극히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생활을 잠시 살펴봅시다. 이 세상에 살고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천사가 아니고 죄 지을 수 있는 인간이며 실제로 죄를 짓고 있고 잘못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모든 이의 마음에 다 잘 맞게 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누구에게나 자기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해주고 우리 마음을 상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큰 손해를 끼치는 원수도 있을 수 있고 우리를 몹시 미워하는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도와준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원수에 대한 사랑을 말하기 훨씬 이전에 원수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검토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친구나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을 우리는 정말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들이 배고파할 때 먹을 것을 줄 만큼 우리는 이들을 도와주려고 하고 있습니까?



만일에 친구나 친척이나 가족이나 이웃을 사랑치 목하고 도와주지 못하는 신자라면 원수에 대한 사랑이란 멀고 먼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만약 친구나 가족이나 친척이나 이웃을 사랑치 않고 도와주지 않고 있다면 즉 원수에 대한 사랑은 고사하고 친구나 가족에 대한 사랑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원인은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나 도움은 고사고 이웃이나 친구에 대한 사랑이나 도움을 베풀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그 장애물은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지나친 사랑 곧 자애심 다른 말로 말해서 자기애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애심에 깊이 물들어 있는 사람은 남에게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제가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부터라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서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려는 마음가짐을 지닙시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해주는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해 줍시다. 또 그들이 아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도와주고 보살펴 주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비로소 그리스도다운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는 깨닫기 시작할 것이고 맛들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5               연중 제7주일   마태 5,38-48 (가) 똑같이 똑같이

                                                    김현준 신부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감기든 내 목소리를 듣더니 “신부님! 아직도예요? 이제 그만 감기 버리세요,\” “버리라고? 어디에다?\” “이북으로요\” “거기에는 왜?\” “나쁘잖아요,\” “나쁘면 감기도 보내야 하나?\”

  

이런 전화 뒤에 학생들과 한자리에 앉게 되었고, 오늘의 복음 말씀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며 의견을 들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키기 어려운 계명의 실천을 명하신다. ‘보복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구체적으로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쪽마저 돌려 대라\’ ’좋아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박해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라\’고 요구하신다,

  

사실 남에게 뺨을 맞는 것처럼 모욕적이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을까? 때리면, 똑같이 때리고, 미워하면 똑같이 미워하고, 무심하면 헐뜯고, 손해보면 그 만큼 되돌려 주고픈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또 사람의 힘으로 원수 사랑하기가 가능한 일일까?

  

복음 말씀을 나눔한 사랑들의 의견은 이러했다, 하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 요구를 다 채울 수 없다는 것을 통해, 하느님을 믿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견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 경우는 사형선고 등으로 자신의 종말을 알고 죽을 때, 실천 가능한 것이며, 현재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유보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 따른다면         



또 다른 의견은, 예수님도 이 요구를 사람이 다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신다. 따라서 이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자극하여 일부분이라도 실천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무엇보다 이 가르침의 요구를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우선 오늘 복음 말씀이 ‘산상수훈\’과 ’진복팔단\’의 계속이며, 그 한 부분이기에, 그 안의 말씀들과 연결시켜 보아야한다. 즉 ‘보복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듣는 나의 위치는 예수님의 ‘행복론\’이 앞에 있고, 뒤에는 그것을 몸소 사신 예수님이 서있고, 그 가운데에 내가 있는 셈이다. 마치 어떤 수학공식에 있어서 괄호 밖의 숫자가 괄호 안의 각 숫자에 적용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구약의 율법에는 복수하는 데 있어서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하게끔 하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허용되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출애 21,24-25)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 된 신분이기에, 예수의 ‘행복론\’을 받아들여 사는 사람이기에, 따라오는 모욕도 받고 원수 사랑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 되는 결단을 기적처럼 현실화시켰을진대, 실제의 삶 또한. 기적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행 불가능하거나 죽을 때나 한번 실천해볼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고, 생활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나도 사람인데․․\”라는 말을 잘 쓴다. 실수도 할 수 있고 잘못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또 “사람이 그럴 수~있나?\”라는 말도 자주 쓴다. 실수도 잘못도 분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결론내린다, 그 어려운 원수 사랑까지의 근거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하심, 즉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이심을 밝혀준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람은 하느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했다. 마치 “계명의 좁은 문을 통해 하느님 영의 더 넓은 세계로 들어가듯이\”(칼 라너), 사람은 유한하지만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새로운 계명을 따라, 무한한 하느님을 완전히 또 거룩하게 닳을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의 모습을 똑같이 취하시어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똑같이 닮아 하늘에 올라간다. “이북이 나쁘잖아요.\” 그렇다고 감기는 보내고, 쌀은 안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오늘복음에 비추어보면 좀 그렇지요?











6            연중 제7주일   마태 5,38-48 (가) 사랑은 원수까지도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레위 19,1~2.17~18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제2독서 Ⅰ고린 3,16~23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이며,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

복 음 마태 5,38~48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무엇보다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누가 뭐래도 삶이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고 또한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삶이 거룩하지 못하면 그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 사랑이야말로 바로 거룩한 삶의 지름길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 쉽고 즐거우면서도, 다른 한편 또 너무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눈물나는 일입니다.



이를테면 나한테 잘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내 시간과 내 정력이 아깝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는 삶의 에너지가 크게 생깁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는 것 이 더 쉽고 더 유쾌한(?) 일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위대한 일이 됩니다. 굉장히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더 공로가 되고 더 은혜가 됩니다. 자신이 죽어야만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요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 리가 억지로라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때 그는 큰 축복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집에 며느리가 하나 들어왔는데 이것이 아주 요물이라 시아버지 알기를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밥도 제대로 드리지 않으며 걸핏하면 말대답이요, 한술 더 떠서 시아버지를 쫓아내겠다고 하니 참으로 가관이요 기가 찰 일이었습니다. 어쩌다 아들이 뭐라고 한마디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들고 대드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 하면서 가슴앓이만 했습니다.



하루는 장에 갔다온 아들이 자기 마누라에게, “세상에 별 희한한 일이 다 있습디다. 아, 글쎄 통통하게 살찐 영감을 사겠다고 소리치 고 다니는 작자가 있던데 그걸 보니까 생각나는 것이 꼭 한 가지 있습디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누라가 무릎을 치며 “맞아요. 아버지를 살찌워서 팝시다.\”하면서 제안을 했습니다.



그 날부터 며느리는 시아버지 공경을 아주 극진하게 했습니다. 비 싼 값에 팔려는 욕심 때문에 돈도 아끼지 않고 늘 고기와 쌀밥으로 봉양합니다. 뿐만 아니라 먹는 것만 가지고는 살이 안 찔 것이다 해 서 시아버지의 맘을 편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 바칩니다. 마실갔다 오시면 안마도 해 드리고 방은 늘 따뜻하게 지펴 놓곤 했습니다.



이러니 시아버지가 참으로 살판이 났습니다. 하루는 며느리에게 그랬습니다. “얘야, 내가 요즘 마실다니면서 아주 기를 펴고 산다. 사람들이 온통 네 자랑이요 칭찬이 자자하여 동네에서 원님 앞으로 효부상을 올리겠다고 하는구나. 세상에 시아버지 안마까지 해 주는 며느리가 너 말고 누가 또 있겠느냐.\” 하면서 감격해 하셨습니다.



그러자 며느리가 답을 했습니다. “아이고, 아버님도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부모님 잘 모시는 것은 사람의 도리인데도 글쎄 요즘 우물가에 가면 동네 여자들이 저보고 속도 곱고 마음도 비단 같다고 칭찬들이 많아요. 사람들이 저희 집에 효도 구경 오겠대요.\” 하면서 진심으로 시아버지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날밤이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여 보, 이제 저 정도면 값을 비싸게 받을 것 같으니까 오는 장날에는 아버지를 그만 내다 팔도록 합시다.\” 하고 마음을 떠봤습니다. 이때 부인이 남편 따귀를 냅다 갈기면서, “세상에, 자기 아버지를 장에 팔자는 아들이 어디 있어요.\”하면서 자기는 시아버지 모시는 재미로 산다고 하더랍니다.



자기 편한 대로만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선 자기가 죽어야 하며, 죽어야만이 사랑할 수 있는 그 사랑이야말로 예수님처럼 가장 큰 사랑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정말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서가 말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죽지 못하면 우리는 바보 신자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배반하여 그분의 계명을 소홀히 한 잘못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우리를 늘 용서해 주셨으며 청하지 못 하는 은혜까지도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 특히 원수를 사랑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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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7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7주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신다.


    제1독서 : 레위 19,1-2. 17-18

    제2독서 : 1고린 3,16-23

    복  음 : 마태 5,38-48


    해설


      옛 ‘율법’과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선포하시고 증거 하러 오신 드높은 ‘정의’의 비교가 이 주일에도 계속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보면 모두 다 사랑의 법에로 모아지고 있다. 즉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마태 5,45) 하느님의 사랑의 모범을 따라 편협한 마음이나 감정에 사로잡힘이 없이 나라나 민족 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사랑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신약의 ‘새로움’이 보다 드높이 빛나고 있는 신약성서의 핵심 부분을 대하고 있다. 하지만 또한 오로지 ‘은총’으로서 받아들일 때만이 우리 모두가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어려운’복음의 한 페이지를 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기도에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와주시기를 간구한다 : “전능하신 천주여,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항상 당신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어 말과 행동으로 당신 뜻을 따르게 하소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사랑의 계명은 비록 그 깊이나 넓이로 볼 때 새로운 복음적 내용이긴 하지만 실은 이미 구약성서에서 가르쳐온 내용이다. 오늘 전례를 통해 제시되고 있는 레위기의 내용은 그 구체적인 하나의 예이다 : 더욱이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두 개의 반론 – 잠시 후에 고찰하게 될 – 가운데 두 번째 반론(마태 5,43)은 바로 이 레위기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일상생활에 관한 규정들을 다만 야훼와 그분의 성성에 관련시켜 나가면서 어떤 뚜렷한 순서 없이 모아놓고 있는 대목의 한 부분으로서, 십계명 전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레위 19,3.4.11.12등) 특별히 사랑의 정을 강조함으로써 신약의 정신의 예표가 되고 있다. 그것은 담과 같이 아주 세심한 배려에까지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 “귀머거리가 듣지 못한다고 하여 그에게 악담하거나 소경이 보지 못한다고 하여 그 앞에 걸릴 것을 두지 말라.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라. 나는 야훼이다”(14절).

      이제 우리는 오늘 우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대목을 살펴보자 :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 온 회중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나는 야훼이다” (레위 19,1-2. 17-18)


    ‘사랑’과 ‘성성’의 모범이신 하느님


      여기서 오늘 전례가 보다 일반적인 권고(2절 :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를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17-18절)에 앞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레위기의 그 권고가 오늘 복음의 결론 부분에서 단순히 의식적(意識的) 차원에서가 아니라 내적 차원에서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 거의 분명하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비교의 척도를 직접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두고 있다 : 이와 같은 사실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성취해야 할 ‘성성’은 결코 끝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레위기에서 드러나고 있는 의식주의와 율법주의는 언제나 인간들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기울일 수 있는 모든 노력 저편에 있는 목적지를 향한 긴장된 노력 속에 흡수 동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성’은 인간을 내면으로부터 변화시켜 나가고자 하는 내적 윤리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복수심에 찬 ‘앙심’을 버리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형제적 ‘충고’를 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진실한 사랑에 대한 그 권고는(레위 19,17-18) 오직 내적 성성을 바탕으로 할 때만이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그 권고는 가장 어려운 요구이기도 하다 :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18절). 비록 이 구절에서 ‘이웃’이라는 개념이 무엇보다도 신앙상, 또 종족상의 형제(즉 같은 히브리 사람)를 뜻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장차 그리스도께서 무한히 확대 시키실(마태 22, 37-40 참조) 최고의 영성의 한 표현인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배경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성성’의 모델이 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랑’의 모델이 되신다 :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이 사랑의 계약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사랑과 용서의 모범에 대해 오늘의 응송은 시편 102를 통해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 “내 영혼아 야훼님 찬양하라…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니…주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매우 인자하시도다…동녘이 서녘에서 사이가 먼 것처럼, 우리가 지은 죄를 멀리하여 주시 도. 아비가 자식을 어여삐 여기듯이, 주는 그 섬기는 자들을 어여삐 여기시나니…” (시편 102,1.3.8.12-13).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모두 사랑하시고 또 용서해주실 수 있으시니, 그 자녀들도 서로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바로 이러한 사상을 오늘 복음은 옛 ‘정의’와 새 ‘정의’를 대립시키고 있는 두개의 명제를 통해 보다 실제적으로 또한 명백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지를 같이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마태 5,38-42).

      여기에서는 소위 ‘탈리오법’(출애 21,24-25;레위 24,17-20;신명19,21 등 참조)이 폐지되고 있다. 그 법은 사회가 원시 발전단계에 있을 때의 법으로서, 입은 손해나 상해에 대한 보상은 실제로 해를 입은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정의로운’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손해(눈, 이 등)에 대해서만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만 일반적 원칙으로서 다른 모든 유사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예수께서는 이 엄격한 정의의 관습을 역설적으로 뒤엎으시며 비폭력적인 법을 끌어들이신다(“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39절).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난폭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게는 그가 요구하는 그 이상의 것을 양보함으로써 그 폭력을 제압하라고 하신다(“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40절).

      사실 너무 지나친 말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만이 폭력을 근절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다른 사람이 갈망하는 바를 자기의 목숨을 다해서라도 기꺼이 들어주려고 하기 때문에 폭력의 의미가 상실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적 생명까지도 내놓는다면 우리의 생명을 빼앗으려 하는 살인자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이기주의라는 괴물은 생명과 사랑의 힘을 빌지 않는다면 그리고 목숨을 바쳐 무죄한 사람들,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 견디기 어려운 불의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키고자 하는 각오로 맞서지 않는다면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

      이 말은 1980년 2월 12일, 로마대학 안에서 붉은 여단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최고사법평의회 부의장이었던 빅토리오 바쉘레 교수가 1973년 이탈리아 가톨릭 액션 사무국을 떠나면서 행한 참으로 훌륭한 연설 가운데 한 대목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 즉 ‘생명을 바치지 않으면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 해 보이라는 그의 사명을 예언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탈리오법은 비록 엄격한 정의의 법이긴 하지만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서는 이미 죽은 법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으로 ‘정의’의 차원을 뛰어넘어라


      “악을 되갚지 말라는 가르침은 재판관들로 하여금 새로운 모양으로 법을 적용하도록 하기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가 그리스도 신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에 따른 그리스도 신자의 태도는 법 절차 자체가, 인간관계를 조절하기에는 얼마나 불충분한가를 사람들에게 입증해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으로부터 마치 예수께서 개인윤리에만 관심을 가지셨고 집단윤리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셨던 것처럼 두 윤리 사이를 갈라놓는 결론을 이끌어 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인간의 ‘법적’ 윤리와 하느님 나라의 윤리가 대립되고 있음을 보아야 할 것이다. 탈리오법은 넒은 의미에서 볼 때 조직된 사회 안에서 요구되는 법적 근거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제도는 되지 못한다. 예수께서 율법이 규정하였던 바를 완전히 폐지하지 않으시고 보다 차원 높은 어떤 것을 제시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L. Sabourin, Il discorso della montagna nel vangelo 야 Matteo, Ed. Fade ed Arte, Marino 1976, p.85).

      그러므로 정의를 행사하는 법정을 폐지시키는 데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보다 큰 힘을 모든 사람 앞에 증거 해 보이는 데 관한 문제이다 : 우리 모두가 보다 더 서로 사랑한다면 인간적인 ‘정의’의 법정도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사랑의 법은 ‘옛’ 정의와 ‘새’ 정의의 또 다른 결정적 대립을 통해 보다 더 엄격히 요구되고 있다 :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3-48절).

      계명의 앞부분(‘네 이웃을 사랑하고…’)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레위 19,18 참조) 실제로 성서에 있지만 뒷부분(‘…원수를 미워하여라’)은 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사랑의 계명을 크리스찬적 관점에서 쇄신시키기 위해 성서본문을 ‘억지해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종교적 정치적 적대자들에게 거의 폐쇄적이거나 관대하지 못했던 유다인들이 습관적으로 행했던 ‘억지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약시대 이전에 이미 쿰란 공동체와 같이 성서상의 메시지를 엄격히 살려고 노력했던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빛의 자녀들은 사랑하고 어둠의 자녀들은 반드시 그 죄 값으로 미워하라고 가르쳤다.

      여기서 ‘원수’라는 개념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 또는 더 정확히 말해 신앙상의 이유로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44절)에 이르기까지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 모두를 향해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비와 이해심을 가져야 하며 또한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원수’라고 하는 그들을 기도를 통해 하느니 앞에서 만나게 되면 그들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보이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 처벌을 받기 보다는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미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 우리는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고 미움이 박아놓았던 가시들을 그들의 마음에서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그러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천상 아버지의 모범을 제시하신다 : 그분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심으로써”(45절)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닮는다면’ 그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느님과의 이 부자관계에 대해 루가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그러면 너희가 받을 사랑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루가 6,35). 우리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한다면 그분을 닮게 되어 그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사랑은 ‘원수’에 대한 사랑에서 최고로 표현된다! 또한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의 신자다운 행동의 특징이 드러난다 :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46절).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신자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이의 마음속에는 공통 윤리의 원칙들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수’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그리스도 신자 고유의 특징을 살릴 수 있고 그러한 특징으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본성적인 윤리법에 따라 ‘원수’를 사랑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요한 바쉘레가 그의 아버지의 장례 미사때 신자들의 기도를 통해 그 살인자들에게 베푼 너그럽고도 순수한 용서의 행위는 이탈리아 안에서나 밖에서나 할 것 없이 크나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 “저의 부친을 해친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복수가 아니라 용서하게 하시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게 하심으로써 흠없는 정의를 이루게 하소서.”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계시되고 있는 하느님의 ‘지혜’에 관한 주제를(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전개하고 있는 오늘의 제2독서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와 쉽게 연결 지을 수 있다.

      어째서 고린토의 신자 공동체는 온통 충돌과 대립으로 휩싸여 있는가? 어째서 바울로는 좇는 사람이 있고 베드로를 좇는 사람이 있으며 또 아폴로를 좇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고 서로가 서소를 적대시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느님의 성전’인 교회는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1고린 3,16-17).

      여기서 ‘성전’이라는 개념은 ‘신성성’이라는 개념에 앞서 그 성전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서로 결합되어 훌륭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이루게 되는 건축상의 ‘조화일치’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토의 신자 공동체는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보다는 바울로나 베드로 같은 인간들에게 더 의존하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함으로써 파괴의 국면을 맞게 된다 : “어느 누구도 자기기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자기가 세속적인 면에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18-19절). 인간들에게 의지할 때 하느님의 성전을 지탱되지 못한다!

      반대로, 모든 것은 사랑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그리스도께 맡겨질 때 구원될 수 있다. 그때는 형제들을 적대케 했던 것이 그들을 압박하는 동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선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울로도 아폴로도 베드로도 이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21-23절).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의 수많은 그리스도 신자들 역시 교회 안에 그리고 다른 크리스찬들 가운데 자신들의 ‘원수들 또는 적대자들’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적대자들 – 흔히는 그들 역시 그리스도와 복음에 충실하고 있다 – 을 새롭고도 근본적인 자세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사랑을 교회 내부의 ‘공동생활’의 본질적 차원으로서 재발견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한다면 바울로 시대의 고린토 신자 공동체에 일어났던 것처럼 결코 없어지지 않을 무수한 긴장과 어려움이 극복될 것이다 :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23절).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 7 주일

    제 1 독서 : 레위 19, 1-2. 17-18

    제 2 독서 : 1고린 3, 16-23

    복     음 : 마태 5, 38-48


    제 1 독서 : 레위기는 우리에게 아주 딱딱한 책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 책은 사회적이고 전례적인 규정들을 상세히 제시하고, 더구나 그런 규정들이 우리 시대에는 생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규정들을 넘어서 우리는 이 책의 면면히 흐르는 역동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거룩함이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레위기의 복잡한 규정들의 근거이다. 인간은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다른 모든 규정들이 이 거룩함의 그림자일 뿐이다.

    구약성서에서 거룩함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일차적인 의미는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세속적인 것에서 구별하여 하느님 공경을 위하여 따로 떼어놓는다는 뜻이다. 또 다른 의미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거룩함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성성(聖性)으로의 부르심은 하느님의 거룩함에서 연유한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백성의 모든 생활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


    제 2 독서 :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는 신약의 참다운 성전이다. 공동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구약에서 성전이 뜻하는 바를 완전히 실현한다. 즉 성전은 하느님의 영광이 거하는 장소인데, 이제 신자 공동체와 신자 각자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참다운 궁전이 되었다. 이처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그리스도의 몸과의 일치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서 강조점은 성전이 아니라 신자 공동체의 일치에 놓여 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공동체가 분열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인간적인 지혜를 던져 버리고 일치를 위해 애쓰라는 것이다.


    복     음 :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 해석이 제시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가 세운 법의 한계를 지적하며 전적인 사랑으로 악을 눌러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동태복수법(출애 21, 24-25)이 폐지되며 원수 사랑의 계명을 선포하신다. 원수 사랑의 근거는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하심이다. 그분의 완전성은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어떤 최고도의 윤리적 선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원수 사랑의 근거이다.





    거룩함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심같이 우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듣고 있습니다. 이 부르심은 우리의 선조인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느님의 부르심으로서 많은 예언자와 사제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당신 백성으로 부르셨던 지존하신 그분의 다정한 속삭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화로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이 완덕으로의 부름은 사제나 수도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이러한 성화와 완덕으로 부름받은 우리가 이게 도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형제적 사랑입니다. 즉 형제애인 것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동태복수법 즉 탈리오의 법칙은 인간을 복수심에 불타게 하고 증오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이 새로운 계명은 오랜 신앙생활을 해 온 우리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 친절하게, 상냥하게 대해 주는 사람에게는 잘할 수 있지만 자기를 외면하고 불친절하고 퉁명스럽게 대하는 사람에게까지 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구별되는 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와 이해관계가 있고 서로 잘 아는 사이면 모든 정성과 친절을 다해 보살펴 주고 대해 주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외면해 버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대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잘해 주건 못해 주건 똑같이 형제적 사랑으로 대해 주고 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입니다. 이는 마치 옳은 사람이나 옳지 못한 사람,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에게 독같이 햇빛을 내려 주시고 비를 주시는 하느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인이 거룩함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형제나 이웃이 잘못할 때 그 잘못을 서슴없이 타일러 주고 일깨워 주는 것은 단순히 탓하고 미워하는 것보다 한 걸음 나아간 것입니다. 특히 자기에게 몹쓸 짓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심지어 원수같이 생각하여 복수를 하고자 한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가 쌓아 온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거룩함은 이 복수심과 증오심으로 한꺼번에 무너지고 맙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속을 가지려거든 겉옷을 내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가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보통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르나 이 말씀을 예수님은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예수님의 거룩함과 완덕의 실천은 조그만 일에도 흥분하고 분노하며 분을 참지 못하는 우리의 속 좁고 속된 인간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을 정의롭게만 심판하신다면, 이 세상은 이미 파멸되었을 것이고, 천국에 들어가기는커녕 우리 모두가 지옥 불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은 무한한 인내심으로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모든 잘못을 눈감아주셨습니다. 그처럼 주님은 우리들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의 몸이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성령의 궁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결코 어리석은 복수심, 증오심으로 하느님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까지 자기를 죽이고자 했던 유다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과 ‘성성’(聖性)의 모범이신 그분을 따라 오직 사랑을 베풀고 서로 서로를 용서하는 데에만 모든 마음을 쏟아야겠습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 이는 곧 상대방에 대한 무한한 자비와 용서를 낳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모든 인간사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열쇠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마음으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 그들을 용서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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