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8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8주일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제1독서 : 이사 49,14-15

제2독서 : 1고린 4,1-5

복  음 : 마태 6,24-34



해설



  특히 60년대 말경에 많은 사람들 – 특별히 젊은이들 – 이 믿었던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한 이상향적인 꿈과는 반대로 오늘날, 사람들은 다시금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말하자면,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부(富) – 아직 개척되지 않은 것까지도 – 를 일구어 ‘자신의 ’ 왕국 건설을 보다 확실히 하는 데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거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이 자신의 생존 자체에 대한 비관적인 의혹 감으로 바뀌고 있다.



인간의 ‘두려움’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인간이 갖게 되는 그 두려움이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 인간은 어느 때보다 자기가 만들어낸 것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듯하다. 즉 인간의 손, 나아가서는 인간 지성과 의지의 성향이 만들어낸 작업의 결과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그리하여 인간은 갈수록 두려움 속에 살게 된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것들 – 물론 전부도 아니고 대부분도 아니지만 그 일부, 특히 인간의 재능과 창의성을 각별히 쏟은 것들 – 이 인간 자신에게 철저하게 반역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자기 파멸을 몰고 오는 수단이자 도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때의 파멸에 비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의 모든 이변과 파국은 시시해질 정도이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인간의 구원자」, 15).

  이와 같이, 당당한 듯 여겨지는 자신의 힘에만 의존했던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고 자신의 미래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일반적인 상황 때문에 우리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왜냐하면 인간은 혼자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앞서 가시고, 또 그와 함께 가주시며 그의 뒤를 따라가 주심으로써 그가 험난한 역사의 노정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해주시기 때문에-권고하고 있는 오늘 전례의 의미가 강하게 살아나고 있다 :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보다 하느님께 더 의지할 때 ‘보다 더 인간다워’ 질 것이다.

  이 메시지는 비록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현대의 정신문명에 침투되어 온 현실적 사조들을 뒤흔들어 놓고 있긴 하지만 분명 우리가 우리 자신과 또 우리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모든 피조물들의 구원을 위해 더 일층 갖추어야 할 마음자세에 관한 메시지이다 : 만일 인간이 다시금 하느님께 그리고 그분의 섭리에 의탁하지 않는다면 그는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머니’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



  신뢰와 희망에 관한 그 메시지가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복음의 내용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짧지만 부드러운 모성적 애정으로 가득 차 있는 제1독서를 통해서도 전해지고 있다.

  “‘야훼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너 시온은 말하였었지.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4-15).

  이 대목은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빌론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장면의 한 부분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러한 야훼의 약속을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14절) 절망감과 불신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것이어서 결코 깨뜨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사실, 불행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에 있어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볼 수 있다 : 빈번하게 자행되고 있는 그 무서운 낙태의 경우만을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하느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결코 배반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15절)

  하느님의 당신 백성에 대한 사랑이(이사 54,8 참조) 다른 곳에서는 자기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호세 11장) 또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에(호세 1-2장 ; 이사 1,21;6,4-5 ; 에레 2,2;3,1.6-12 ; 에제16장 23장 등 참조) 비유되고 있다. 그러나 ‘모성적’ 사랑에 대한 비교가 더 한층 감동을 준다. 그 이유는 모성적 사랑이야말로 온전한 무상성의 의미와 지극히 온유함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중요시해야 할 사실은 이 장면이 그저 일반적인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 연결되어 있는 역사적인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이나 운명적인 체념 외에 달리 어떻게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상황에 개입하시어 흔히 할 수 있는 인간적 예상을 뒤 엎으신다 : 역사란 인간들이 하느님께 더불어 건설해 나가실 자리를 마련해드리기만 하면 결코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지 않을 것이다.



“내 영혼아 오직 하느님 안에서 고이 쉬어라”



  응송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기쁘게 노래하고 있다. 왜냐하면 ‘권능’과 ‘자비’는 오직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시편 61,12) : 그분은 ‘권능’으로 당신의 모든 중재의 성공을 보장하시며 ‘자비’로써 당신의 사랑을 영원히 보증하신다. 사실, 그분의 사랑은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사랑이 아니라 ‘권능이 있는’ 사랑이다.

  “내 영혼아 고이 쉬라 오직 하느님 안에서, 님께로부터 내 구원이 오나니. 님만이 나의 바위, 내 구원 내 성체시기에, 나는 절대 흔들리니 아니하리라…백성들아, 너희 항상 주께 바라라, 당신 앞에 너희 마음 열어 놓아라. 하느님이 권능을 쥐시었도다. 주여 자비하심이 당신 것이오니…”(시편 61,6-7.9.12-13).

  또한 여기서 우리는 개인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공동체적 집단적 수준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 시편 작가가 하느님 야훼를 신뢰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 – 집단으로서의 – 이다. 실로 인간의 운명은 다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 인류가 다 같이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 그분이 빠져버린 인간의 역사는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기도를 통해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 “주여 비오니, 주께서 섭리하신 대로 이 세상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고, 또한 성교회로 하여금 평온한 가운데 주를 섬기며 즐기게 하소서.” 성교회는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신뢰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표지가 된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의미를 깊이 있게 다루시며 신선하고도 충만한 시적 표현을 통해 그 의미를 매일 매일의 현실 속으로 이끌어 들이신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질식시키는 절망과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어떤 위대한 역사의 순간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 우리는 매일 매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우리의 신뢰심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의 생활 매 순간 순간마다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공기,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주고 우리를 따스하게 해주는 해, 땅 속에서 넘쳐 흘러나와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 벌판에서 자라고 있는 채소, 우리가 우주 공간으로 튕겨져 나가 산산조각이 나지 않도록 우리를 지구 표면에 붙잡아 두는 만유인력의 법칙 등, 이 모든 것이 하느님 사랑이 선물이 아닌가? 우리의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고 우리의 피가 온몸을 돌봄으로써 생명적 힘이 퍼져 나가고 보존된다면 이것은 곧 하느님의 섭리가 매순간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이 지극히 단순한 사실들을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이며 우리는 바로 온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그 무한한 사랑의 숨결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러한 단순한 사실들에다 우리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 예수께서는 우리가 맑은 눈으로 모든 피조물을 바라봄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의 사랑의 표지를 이해하고 그 결과 내일에 대한 신뢰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맑은 눈은 우리가 우리 손으로 만든 ‘우상들’에 의지하지 않을 때 가질 수 있다. 그 우상들은 후에 우리의 포악한 ‘주인들’이 될 것이다! 돈의 포악성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인간에게 허망된 확신감을 줌으로써 인간을 속인다 :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손에 넣을 수 있고 무엇이나 다 가능하다고 생각게 한다. 마찬가지로 권련, 사회적 명성, 교양, 지식, 아름다움, 쾌락, 성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심을 질식시키고 몰아내는 그 허망된 확신들을 씻어 없애는 일부터 시작하신다 :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24절)

  “구체적으로 볼 때 두 주인을 섬기기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물론 섬긴다는 것이 완전한 헌신을 전제할 때의 이야기다. 노예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오직 한 주인에게만 예속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노예에 관한 모든 것이 그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한 가지 일에 대한 관심과 다른 일에 대한 관심이 똑같이 융화 될 수는 없다. 전자에 가까이 간다는 것은 후자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에 밀착한다는 것은 후자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다. 하느님과 재물의 관계가 그러하다. 하느님의 요구는 재물의 요구와 대립된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 즉 이웃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계명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형제의 요구에 이기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재화를 쌓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말씀에는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라는 즉, 재물에 대한 이기주의적인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택하라는 권고가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여 가난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므로써 우상을 부숴버려야 한다“ (G. Barbaglio, in I Vangeli, Cittadella Editrice, Assisi 1975, p.192).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실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든 허망된 확신으로부터 해방될 때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상 아버지의 손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수 있다 : 그 분은 우리가 평화롭고 기쁘게 살아가는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 해 주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고 계신 내용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시기 위해 일상적 체험으로부터 두개의 예 즉, 공중의 새에 대한 것(26-27절)과 들꽃에 대한 것(28-30절)을 들고 계시다. 하느님께서 그렇듯 보잘것없는 피조물들을 돌보시는데 당신 자녀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가? 보다시피 두개의 논증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25-32절).

  지금 예수께서는 게으름이나 준비 없는 생활 태도를 옹호하시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노동의 의무를 회피하도록 유도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생활 속에서 물질적인 것들을 가장 중요한 듯이 여기고 자신들의 힘만으로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여겨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 온통 신경을 쓰는 모습을 나무라실 뿐이다. 만약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 운명의 절대적 지배자로 여기게 되면 하느님은 인간의 의식 밖으로 완전히 밀려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자신에게만 의존함으로써 ‘신앙’의 차원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믿음이 약한 사람들’(30절) 이라고 부르신다.

  또 한 편으로 볼 때, 하느님께 때한 믿음을 갖지 않게 되면 실질적으로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싸이게 된다. 이 대목에는 ‘걱정하지 말라’는 권고의 말이 네 번(25.28.31.34절)이나 반복되어 나오고 있다 : 희랍어 merimnáo는 정확히 말해 ‘불안하다’, ‘걱정하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믿음의 결핍은 걱정을 야기 시킨다 : 그리고 걱정은 삶을 비참하게 하고 또한 병들게 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나약한 어깨로 그 비참한 삶을 받쳐 들지만 ‘한 시간’도 더 연장시킬 수 없고(27절) 또 아무리 치료를 한다 해도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불치의 병으로부터 보호할 수도 없게 된다.

  이 모든 일은 오직 하느님의 소관일진대 내일에 대한 우리의 모든 걱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34절). 오늘의 괴로움에다 내일의 괴로움을 가중시키지 않고 오늘의 괴로움만을 진지하게 사는 것이 보다 더 현명하지 않을까?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예수께서는 매순간 우리를 감싸주고 또 우리에게 계시되는 하느님의 섭리의 의미를 다시 깨달으라고 하시는 그 애절한 권고 말씀의 결론으로 당신 제자들에게 오늘 복음 전체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삶의 모든 차원과 가치의 균형을 다시 잡아줄 수 있는 하나의 행동 규범을 제시 하신다 :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33절)

  일에는 순서가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한다 : 그 나라는 우리의 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의 절대 주권을 가리키며, 이 절대 주권은 항상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행함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내용이 마태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정의(dikaiosyne)\’라는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다음에 ’다른 모든 것들‘ 즉 매일 매일 평화롭게 살아가기에 필요한 물질적 재물이 놓여져야 한다 : 예수께서는 우리가 먼저 천상 재물을 ’구한다‘면 그 모든 것들을 부족하지 않게 주실 것을 보장하신다.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의 관점에 기아, 저개발, 또는 재화의 불의한 분배 등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소지가 잇는 것이다 : 그리스도 신자들이 오늘 복음의 말씀들을 자신들의 의무로서 뿐만 아니라 진실되이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개인이나 국가나 할 것 없이 다른 사람들 모두를 가난과 불행 속으로 몰아넣으면서 내일을 위한 부(富)를 쌓도록 이끌고 가는 그 추악한 금전욕은 사라지지 않겠는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보다 큰 신뢰는 우리에게 보다 더 의롭게 형제들을 대하기를 가르쳐주며 또한 우리를 미래에 대한 모든 불안에서 해방시켜준다 : 우리의 미래는 앞에서 말한 것 외에도 ‘가난한 이들의 분노’(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또 불의한 재화 축적이 이 세상에 야기 시키고 있는 긴장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인간은 매일 매일 동정의 손길을 펼치시며 축복으로써 인간은 물론 모든 피조물을 배부르게 하시는 아버지를 하늘에 모시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은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천상 아버지를 찾는다…그러므로 인간은 기도를 통해 일용한 양식을 구하며 그에 대해 감사를 드리지만, 그에게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식이 아니라 기도하고 감사를 드리는 일이다 : 기도와 감사는 마치 :그리스도의 음식이 성부의 뜻을 행하는 데서 생겨나듯이‘ 인간에게 음식을 마련해준다”(S. Kierkegaard).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오늘을 잘 살라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오늘을 잘 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하느님께서 우리를 생각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이렇게 믿을 때 우리 모두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미래와 보다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 오로지 믿음만이 어떤 인간적 노력도 달성할 수 없는 그런 ‘이상향’을 실현시킬 수 있다.



“여러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며…”



  사도 바울로에 의한 제2독서도 모든 단순한 인간적 계산을 뛰어 넘어 오직 하느님께만 의탁하라고 한다. 그는 바울로파다, 아폴로파다, 베드로파다 해서 갈라져 있던 (1고린 1,12 참조) 고린토의 신자들에게 그 모든 것이 잘못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로나 아폴로나 베드로나 모두가 다 같은 한 메시지의 전달자들이며 자기 자신들의 직무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관리하도록 부여되는 직무의 전달자들인 때문이다 : “여러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며 심오한 진리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1고린 4,1).

  그러므로 그 ‘일꾼들’이 관심을 두어야 할 대상은 고린토인들이 아주 섣불리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관한 일이다 :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또 내가 나 자신을 심판하지도 않습니다…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무슨 일이나 미리 앞질러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4,3-5).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이며 교회 내에서의 ‘섬기는 일’도 하느님의 섭리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느님께서 교회에 부여하시는 그 모든 ‘선물’에 대해 그분께 감사를 드림으로써 불행스러운 분열과 적대행위와 대립을 피하지 않는가?

  역시 교회 안에서도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나머지도 분명히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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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가해 연중 제 8주일 주일 강론 모음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8주일


             1. 조순창 신부(가)/ 2                    2. 이용호 신부(가)/ 3

             3. 하느님과 재물(가)/ 5                  4. 강길웅 신부(가)/ 7


    1     연중 제8주일   마태 6,24-34 (가) 뜻있게 살아서 사랑 받는 인간 되자

                                                                   조순창 신부


    지난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우리는 산업의 발달과 도시화 현상으로 인간성을 잃어가기에 자연을 그리워합니다. 또 제 목적을 위하여 마구 폭력을 휘둘러 댐으로써 갖가지 위협 속에, 날씨마저 종잡을 수 없게 한겨울을 겪어야 하는 오늘이기에, 자연스럽고, 순리를 따르고, 질서와 서열이 있는 사회와 인간사를 더욱 절실히 바라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구원의 희망이 없어지자, 그들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낙심했습니다만, 예언자 이사야를 보내시어 희망을 주십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소원을 기뻐 들어 줄 때가 온다. 너를 도와 구원해 줄 날이 온다. 하늘과 땅아 기뻐 뛰어라.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극진히 사랑하신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혹시 어머니는 잊을지 몰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시리라고 보장하여 주십니다.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 여기에서 우리도, 경쟁과 불안과 걱정과 위협 속에 살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도 바오로와 같은 하느님께 대한 충성입니다.


    오늘의 마태오 복음에서도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가 없습니다. 재물을 섬겨 노예가 될 때에 하느님을 저버리고, 물질과 욕심으로 불행을 얻을 것이나, 하느님을 진정으로 섬기며 열심으로 일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는, 재벌과 비교하여 가난하더라도 일용할 양식을 안배하여 주시기에 하느님의 은혜 안에 길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 속한 것이며, 사람은 물질보다도 소중합니다. 재물이란 최상의 선이 될 수 없고, 다만 쓰기에 따라서 종속적으로 선도되고 악도 되는 것임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은, 우리 생활에 필요한 재물을 얻고 유용하게 활용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재물을 하느님의 뜻대로 공익을 위하여 잘 나누어 쓰며, 가진 바를 나누고, 하느님의 풍성한 사랑을 우리 손으로 나누어, 모두 충만케 하십니다.


    예수께서 ‘걱정하지 말라’시는 것은 “조바심하며 걱정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하지 않고 게으르거나 규모 없는 생활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재물을 통한 편리와 낙을 전혀 무시하기보다는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의 중심은, 남편 때문에 살고, 아내 때문에 살고, 자녀 때문에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일하는 보람으로 돈을 버는 일, 명예를 찾는 일로, 부양의무로, 책임감으로 여러 가지 이유와 삶의 중심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내 삶의 의미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대로, 내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여 가는 가운데서, 내 완성과, 가정의 행복과, 사회에 공헌하며, 보람되게 사는 것일 것입니다.

    재물이 삶에 필요하나, 재물만 가득 모아 헛되게 쓰거나, 쓰지도 못하고 두고 간다면, 빈 값어치, 일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은, 일할 때에 배우며 가르치는 인생이 행복하고, 가족을 부양하여 서로 감사하는 인생이 행복하고, 자비로, 사랑으로 나누는 인생이 행복하고, 하느님이 주신 재물을 윤익하게 쓰는 인생은 더더욱 행복한 것입니다.


    반면에, 불행한 인생은 잊혀진 인간입니다. 하느님께 외면 당하고 가족에게 외면 당하고, 사회에서 외톨이가 된 인간은 불행합니다. 스스로 뜻있게 살아서, 사랑 받는 인간 되어 행복을 찾읍시다.  






    2            연중 제8주일   마태 6,24-34 (가)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용호 신부


    재물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요즈음처럼 공공요금이나 물가가 자주 인상되면 우리 호주머니 사정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 돈이 얼마 정도 있다면, 무엇을 사고 무엇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돈이란 모으기도 어렵고 잘 쓰기도 힘드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구두쇠가 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쓰다가는 낭비자가 되기 쉽상 입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만 잘 사용해야 할 재물에 대하여 잠깐 묵상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의 사간을 돈을 벌기 위해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노동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노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해도 돈을 버는 액수, 즉 재물을 소유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업무량이나 종류, 성별이나 기능면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같은 액수의 보수를 받기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재물로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느님이 주신 큰 은혜의 결과이며, 이 재물은 또한 온 인류의 재산이기 때문에 골고루 배분되어야 합니다. 수수의 사람이 세상의 재물을 다 소유하는 것은 정의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원래 재물이란 만몬(manmon)이라는 말로 물질적인 소유를 나타내는 것으로 처음에는 나쁜 뜻을 가진 말이 아니었습니다. 만몬은 “이웃의 만몬을 네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다”에서 그 뜻이 후대로 오면서부터 재물이라는 것을 가리키며, 마침내는 사람이 그 신뢰를 두는 것이라는 뜻으로 고정되고 말았습니다. 즉 사람이 이용하는 것이 결국 사람이 의지하는 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말씀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는 말씀으로 재물에게 온갖 희망과 영생까지 기대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적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때 “섬기다”라는 말의 의미는 “누구누구에게 종이 되다”라는 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종이란 원래가 법적으로 인간이 아니라 물건 취급을 했었던 것입니다. 곧 종이란 살아있는 도구에 불과하며, 그 종을 하고 파는 것은 주인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또한 종이란 자기 시간이 없습니다. 시시각각 모든 것이 주인의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신 말씀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할 적에 이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갖지 않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재물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 속하며, 인간이 재물보다 더 중요하며, 재물이 최상의 선(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말씀은 만일 인간이 하느님께 의지하면 세상의 것은 부족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예로써 인간이 한 자의 키라도 생각해서 눌릴 수 없듯이 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즉 목숨이 음식보다는 더 중요하며 또한 하느님은 새들을 보호하듯이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다하면 틀림없이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 영생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재물을 얻기보다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노력할 것인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재물이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을 것이냐?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분명히 말해 둡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먹고, 마시며 목숨을 이을까 또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시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습니까?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서 재물보다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라는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경고에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현대인들은 일하지 마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스스로 목수 일을 하심으로써 우리의 본성상 노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물질의 좋은 용도를 부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양로원과 고아원을 짓고, 병든 자를 위한 병원과 사회복지 시설을 만드는 것을 싫어하시지 않으시며 오히려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물질의 향락이나 낭비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모든 일을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들의 마음과 손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망설임도, 무서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왔으며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재물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지만 그것이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우리의 근심 걱정은 이제 모두 하느님께 의지하므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며 우리의 값진 노력으로써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몸소 우리에게 노동의 모범을 주심으로써 힘써 노력하여 재물을 얻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재물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을 덤으로 주실 것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시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멘.






    3               연중 제8주일   마태 6,24-34 (가) 하느님과 재물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 여러분도 하느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오늘 주일 복음의 말씀입니다. 동일한 사상은 오늘 독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신은 영신을 거슬러 탐하고, 영신은 육신을 거슬러 탐합니다.

    이것들은 서로 상극이어서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성 바오로께서 말씀하십니다. 영신세계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육신세계의 주인인 재물은 서로 상극이므로 둘을 함께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려면 재물을 지나치게 귀중히 여겨서는 안되겠고 재물을 주인처럼 섬기는 사람이면 하느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현세 생활만을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살 걱정밖에 아무런 걱정도 없겠지만 현세 생활이 끝난 뒤에 영원한 후세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면 먹고 입고 사는 걱정보다 후세에 관한 걱정이 훨씬 더 클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잠시 지나가는 현세 생활은 후세의 영복을 준비하는 가치밖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섬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사는 것이고 또 살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재물이 필요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재물을 지배해야 할 것이지 재물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재물이 인간 생활에 봉사할 것이지 인간이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될 말입니다.


    그러나 가끔 재물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나 의식주에 대한 지나친 걱정 때문에 하느님 공경을 소홀히 하고 때로는 의식주 해결이 선결문제라 하며 하느님을 떠나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공경과 더불어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교우들은 하느님께서 친히 돌봐 주실 것입니다. 물질적 가난이 우리 개인의 탓이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열심한 교우들의 현세생활을 하느님께서 얼마나 걱정해 주시는지를 설명하시며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 “하늘에 나는 새들을 보십시오 …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그들을 먹여 살리십니다. 여러분은 그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또 들에 피는 백합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십시오 … 솔로몬이 제 온갖 영화를 누리면서도 그 한 송이만큼 차려입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사나 하며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십니다. 이 얼마나 고마우신 말씀입니까?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돌보심에 매달린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지나치게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살 걱정에만 잠겨 있을 것이 아니라 열심히 기도하며 부지런히 일한다면, 언제나 인자하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라며 의탁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현세 생활 걱정 때문에 너무 쉽게 주일을 범하거나 아침저녁 기도마저 궐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한국의 경제 사정을 감안해서 교황께서 한국에 한해서 주일에도 육신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은 하셨지만 주일날 일을 해서 벌면 얼마를 더 벌 것이며 아침저녁 기도시간까지 희생하고 그 대신에 일을 한다고 백만장자가 될 리 있습니까? 기도생활까지 포기하고 현세 생활만을 돌보는 교우라면 하느님의 강복도 받기 어려울 것이고 보면, 날이 갈수록 피어나기는 고사하고 더 곤란해지지 않으면 다행한 일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정의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보태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집안이 가난하고 의식주가 걱정이 많다 해도 언제나 하느님의 돌보실 때를 기다리며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하겠습니다.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살림살이가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더욱 하느님께 가까이 달아들고 열심한 신자생활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현세생활에 요긴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안배해 주시겠기 때문입니다. 아멘.






    4              연중 제 8 주일  마태 6,24-34 (가) 하느님과 재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49,14~15 (내 너를 아니 잊으리라)

    제2독서 Ⅰ고린 4,1~5 (주께서 마음의 생각들을 드러내시리라) 

    복 음 마태 6,24~34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이 보시기에 사람들은 지나치게 자기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어린 자녀들이 부모를 믿지 못하고 쓸데없는 세상 걱정을 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로 귀양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여지없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는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언자가 나타나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신들을 포기하고 있으며 너무도 빨리 실망해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 리 죄중에 빠졌다 해도 하느님은 우리를 내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며, 아무리 우리가 실패했다 해도 절대로 단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든지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기를 원하시며, 어떤 최악의 경우에라도 당신께 전적으로 의탁하기를 원 하십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지 않고 쓸데없는 일에 자주 걱정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이며 하느님께 모욕을 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은 재물과 돈에 대해서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왜냐 하면 돈과 재물이 너무 좋은 것이기 때문에 자칫 하느님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은 대단히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하느님보다 더 좋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우상숭배자 가 됩니다. 돈 밑에 사람이 있고 그 밑에 하느님이 계신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깁니다.


    언젠가 TV를 보는데 무슨 연속극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장면 은 그랬습니다. 시동생이 대문을 열고 들어오자 “왜 대문을 잠그지 않고 들어오느냐.”고 형수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시동생은 “대문을 열었다고 해서 진정한 우리의 재물을 가져 갈 사람은 없다.”는 대답 을 합니다. 멋진 대답입니다. 그 시동생의 대답이 오래오래 제 귀에 남았습니다.


    진정한 재물은 무엇입니까.


    옛날에 의가 좋은 어떤 형제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물 속 에 뭔가 번쩍 비치는 것이 있어서 건져 보니 커다란 황금이었습니 다. 그 형제는 가난했기 때문에 대단히 기뻤습니다. 그러나 배가 강 한가운데에 이르자 형은 황금을 물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동생이 깜짝 놀랐습니다.


    “형님,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동생은 너무도 안타까워서 형에게 따졌습니다. 형이 말했습니다. “내가 황금을 얻기 전에는 네가 나에게는 둘도 없는 아우요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러나 저 황금을 얻고 보니 갑자기 저 황금이 너보다 더 소중한 보물로 여겨져 마음이 내내 괴롭고 산란스러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동생도 “형님, 참 잘하셨습니다. 실은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 하찮은 황금 때문에 저도 형님을 오해하면서 미워하고 있었습니다.”하면서 동기간의 소중한 우의를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그 자체로는 선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그분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물이 하느님보다 높은 자리에 앉을 때 재물은 악이 되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 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Ⅰ디모 6,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이며 상당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아름답고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보다 돈이나 재물에 더 의존하고 또 하느님보다 돈이나 재물에 더 높은 가치를 둘 때 그 재물은 악이 되고 악의 근 본이 됩니다. 신앙인은 절대로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말에도 “잘 버는 것이 중요하지만 잘 쓰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재물이란 내가 소유하고 있다 해도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재산뿐만 아니라 내 가족, 내 육신, 내 생명까지 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는 그저 잠시 맡고 있는 관리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맡겨져 있을 때 정말 유익하게 써야 합니다. 여기서 잘 관리했던 사람은 재물 때문에 복받습니다.

    오늘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살리고 구원하고 그리고 행복을 주는 것은 결코 돈이나 재물이 아닙니다. 검소하게 살고 부지런히 일하면 서도 나눌 줄 알고 베풀 줄 아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스스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재물에 너무 빠지지 말고 하느님을 참되게 믿고 섬기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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