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사순 제 1주일 주일 강론 모음

 

 사순 제1주일

29. 조순창 신부(나)/ 81            30. 저자미상(나)/ 82

31. 전종복 신부(나)/ 85            32. 민병섭 신부(나)/ 87

33. 교구주보(나)/ 91                34. 유안진 교수(나)/ 92

35. 최영철 신부(나)/ 94            36. 이원철 신부(나)/ 95

37. 함세웅 신부(나)/ 97            38. 강길웅 신부(나)/ 99

39. 김영진 신부(나)/ 101           40. 김영남 신부(나)/ 103

41. 신은근 신부(나)/ 105           

















29.        사순 제1주일 마르 1,12-15 (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자,

                                                          조순창 신부





우리는 새달 3월과 함께, 지난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받으며,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인생임을 묵상하는 가운데서, 뜻깊은 새로운 전례 주기인 사순절의 그 첫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출애굽기 3,7 이하에, 하느님 야훼께서는 미디안에서 양을 치던 모세를 불러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으니, 에집트인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하시고, “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고 하심으로써, 모세로 하여금 나라 잃은 이스라엘, 자유 없는 이스라엘, 억압받는 이스라엘, 인권을 잃은 이스라엘을 노예 상태에서 구출해 냈으나, 약속된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에는 황량한 사막에서, 의식주를 해결할 길이 막연한 생활고와, 야생의 위협과, 당장의 시련에 희망을 잃고, 우상을 섬기기까지 하는 사막의 고달픈 여정 40년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유혹의 땅인 사막의 40년간은 이스라엘에게 무의미한 고행의 길만이 아니라, 거기서 십계명을 받았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했으며, 야훼 하느님만을 섬기기를 작심하였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이었기에, 은혜로운 곳이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장소요, 구원의 신비를 터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사순절 첫 주일인 오늘 우리는 첩첩 산중, 갈수록 태산이요, 끝간 데 없이 긴 사막의 고달픈 나그네와 같은 인생 여정에서, 잠시의 휴식과, 위로와, 생명수를 마시며, 하느님께 기대를 걸고, 길잡이가 되어 주실 것을 믿으며, 용기를 얻고, 함께 모험스런 앞길을 나설 채비를 하려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복음 말씀으로 광야에서의 40일간의 고행에서, 시련과 유혹을 물리치신 후에, 복음을 전파하시며, ‘회개하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합시다! 구세주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이 먼저 마태오 복음 3장 1절에서 “회개하라”고 선포하며, 요르단강 언저리를 두루 다니시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도 그 전도 여행의 시초에 “회개하라”고 외치셨으며, 루가 복음 13장 3절에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당신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사실, 회개․회심이란 말은 생활의 변화와 혁신이며, 실천이 어려운 것이로되, 복음 중의 복음인 루가 복음 15장 11절 이하의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방탕 생활에서 쾌락도 맛보았으나, 끝내 허무를 느껴 참회하고, 아버지께 돌아옴으로써 구원받았듯이, 오늘 회개함이 구원의 시초이니, 신앙 쇄신과 생활 개혁을 합시다.


복음은 진리의 소식이요, 희망의 소식이며, 평화의 소식이요, 하느님 약속의 기쁜 소식이며, 영생의 소식, 구원의 소식입니다. 이론으로는 쉽게 믿어지고, 믿어야 할 말씀이로되, 그 믿음의 길은 좁은 길이요, 험난한 사막의 길이기에 주저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은 문이요, 고행의 길이며, 희생과 단호한 선택 결단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루가 복음 13장 24절에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라.”

고 최선을 다할 것을 가르치시고 있으며, 마태오 복음 6장 24절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는 말씀으로, 고행의 길이로되, 구원이 있다면 그 한길을 단호한 결심으로 선택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은 신도답게 삽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알기 위하여, 성경과 교회 말씀을 들어, 배워 익히며, 회개하고 믿는 이의 생활이 사랑의 실천으로 옮겨, 그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을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

 “오! 구세주여! 은총의 때 사순절에, 우리 무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케 하시며, 위선자요 뻔뻔스런 우리가 진정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고, 복음을 믿고, 고행의 길, 좁은 문, 구원의 외길을 성실히 걸어감으로써, 복된 한 주일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옵니다. 아멘!





                              



  







 30.                   사순 제1주일 마르 1,12-15 (나)  저자 미상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내용은 예수께서 받으신 광야에서의 유혹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자세히 나타나지 않지만, 마태오, 루가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이 상세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빵, 영광, 권세에 대한 유혹인데 이에 대하여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후 악마로부터 다음과 같은 유혹을 받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빵들로 되라고 해 보시오.” 이 유혹은 예수께서 40일 동안 몹시 굶주린 후입니다. 이때 사람은 눈이 뒤집혀진 상태, 모든 것이 헛것으로 보이고, 돌도 빵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의 유혹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예수가 아직 굶주리고 허기진 것을 이용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능히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지 않소? 그러면 그렇게 해서 당신은 그 빵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지 않소? 그런데 왜 그렇게 굶고 있소?” 즉 이 유혹은 예수로 하여금 “돌을 빵으로 만들어 나부터 먹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남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게 함으로써 예수를 이기적으로 몰아 넣으려는 유혹입니다. 예수께서 만일 유혹에 빠져 (극한 상황이라도) 이기적이 되었다면, 그럴 경우 예수라는 존재는 그것으로써 우리에게 (우리가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그렇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분이 만일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존재였다면, 그가 우리 구원을 의탁할 수 있는 메시아일 수 있는가? 우리가 저지르는 죄, 죄가 낳는 불행이 근원적으로 어디서 옵니까? 그 근원은 개인주의에서 옵니다. 우리 모두가 남보다는 먼저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남을 해치고, 남을 죽이는, 구원보다는 멸망을 자초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어떤 면에서 이렇게 생각할 지 모릅니다.

 “나는 좀 달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개인주의자, 이기주의자가 아니야!”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순간 “나는 남과 달라. 나는 다른 사람처럼 이기적이 아니야!” 이렇게 생각한다면, 바로 이것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주의입니다.


어떤 책에 보면 “우린 모두 각자가 자기 죄를 계산하는 저울과 타인의 죄를 계산하는 저울 두 개를 가지고 있다.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나의 죄는 될 수 있는대로 가볍게 달고, 남의 죄는 다른 저울로 아주 무겁게 단다.”고 씌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꽃병이 깨졌다고 합시다. 아이가 깨뜨렸을 때 나는 야단을 칠 것이고 혼을 낼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깼다면, ‘아이고 실수로 깨뜨렸다’라며 자기에게는 이유와 핑계를 대고 남에게는 야단을 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어떤 의미로 이것은 우리의 본죄입니다.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적인 것이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여기서 벗어날 때, 이 이기심에서 벗어날 때, 적어도 남의 잘못을 나의 잘못과 똑같이 여길 때, 더 나아가 자신에겐 엄격하나 남에게 더 관대할 때, 비로소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더 사랑할 때’ 거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상처입은 치유자’란 책 마지막 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유대인 랍비가 선지자 엘리야란 사람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고대하는 메시아는 언제 찾아옵니까?’ 엘리야는 “네가 직접 가 물어 보아라.” 랍비는 또 물었습니다. ‘어떻게 찾아가 물어볼 수 있습니까?’ 엘리야의 대답이 나옵니다. “성문 앞에 있는 불구자들, 거지들에게 물어 보아라. 모두가 온 몸에 상처입은 사람들이다. 모두가 상처를 입어 붕대를 감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붕대를 한꺼번에 풀었다 감았다 한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다른 불구자, 거지들처럼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만이 온 몸의 상처를 한 부분만 풀었다 감았다 한다.



그러면서 늘 생각하기를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즉시 가서 도와 주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가지기 위해 한 부분만을 풀었다 감았다 하는 사람이 우리가 고대하는 메시아다.” 참으로 뜻깊은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남으로부터 더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면, 우리는 정말 언제 메시아가 올지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가 먼저 시작해서, 자기도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남에게 사랑받고 싶지만, 동시에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래서 우리 모두가 ‘평화의 기도’에 나오는 이해받기보다 이해하는 사람, 사랑받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메시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그런 마음의 주인공이셨습니다. 예수는 죄를 빼놓고는 우리와 똑같은 분이셨습니다. 성서에서도 나타나듯이, 유혹까지 받으신 분, 가난하게 사신 분, 당신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 주위에는 가난한 사람들, 당신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 주위에는 가난한 사람들, 약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그 분은 식사할 시간조차 주무실 시간조차 없었다고 성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남을 위해 헌신한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남을 위해 온전히 바쳐진 존재였습니다. 악마는 바로 이런 점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분이 가장 굶주렸을 때 이기심을 불러 일으켜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악마의 이런 속셈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유혹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에 무려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이 말씀을 참으로 깨닫는다면 자기 실현, 자기 완성은 자기 욕망(욕심)을 채우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잃는 데에 즉, 남을 위해 자신을 내놓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의 인간,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제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유혹에 빠지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께서는 그 해답을 주십니다.

 “온갖 이기심에서 떠나라!”        아멘.













 31.           사순 제1주일 마르 1,12-15 (나) 유혹                    전종복 신부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행복을 추구하기에 의욕하는 존재랄 수 있습니다. 의욕을 상실한 삶은 이미 생기를 잃은 고목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구하는 행복이 찰나적이라고 하더라도 행복의 기미가 엿보이기만 하면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답게만 보이는 유혹(창세 3,6 참조)에 기만되어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악의 유혹은 이 세상에 충만되어 있습니다(마태 13,7 참조).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도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충천해 있는 유혹에 끌려갈 때 우리의 인생은 파멸의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유혹이 무엇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워도 우리는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유혹은 영에 대한 육의 요구입니다. 의에 대한 미의 요구요, 도리에 대한 쾌락의 추구이며, 미래보다는 현재의 요구입니다. 우리들이 높은 데에 머물려 할 때에 강한 힘으로 낮은 차원으로 끌어내리려 하는 유혹이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그 쾌감에 끌려 높은 것을 떠나 낮은 데로 가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의 허약성을 알지만, 스스로 자위를 하면서, 어떤 이유라도 붙여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 유혹이며 타락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전 생애에 걸쳐서 이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찾아듭니다. 무서운 생각을 가지고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유혹에 직면하는 것은 무신론자인 세속적인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영적인 사람들에게도 가장 흑암한 유혹에 부딪치게 됩니다. 생명이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유혹을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유혹을 만납니다. 굳센 사람에게는 큰 유혹이 오고 약한 사람에게는 약한 유혹이 옵니다. 불은 쇠를 시험하고 유혹은 의인을 시험한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의 유혹이 있습니다. 편하고 안일을 추구하거나 욕정을 만족시키려는 거친 육체의 욕망입니다. 내가 없으면 국가가, 사회 단체가, 교회가 지탱하지 못하리라는 교만입니다. 너야 어떻든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려는 졸렬하고 불순한 이기심입니다. 이로 인해 모든 불행이 과거 현재 미래에까지 인류에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혹은 큰 힘으로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이기는 자가 참 용사입니다.



솔로몬은 잠언서에서 “제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탈취하는 자보다 낫다(16, 32)”라고 말했습니다. 즉 유혹에 이기는 것은 견고한 성을 점령하는 것보다 더 많은 용기와 의지심을 필요로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한 솔로몬 자신도 유혹에 넘어가 잡신을 섬김으로써 야훼의 노여움을 초래했습니다(1열왕 11,1-13). 나폴레옹의 대함대를 전멸시켰던 영국의 무적함장 넬슨 제독도 유혹에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유혹을 받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유혹에 떨어지는 것이 죄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유혹을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혹을 자처해서는 안됩니다. 유혹과 싸워 피흘리기까지 이에 대항하고 온전히 승리하여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용감한 일이지만, 유혹을 경시하고 나만은 유혹에 지지 않으리라는 자만에 빠져 유혹을 자초하는 것은 어리석고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낭비요 정력의 소비입니다.


형제 여러분!

잠언은 말합니다. “불의한 자들의 길에는 들어서지도 말고 악한 자들의 길은 걷지도 말아라(4, 14)” 어떤 유혹에서든지 피해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달아나는 것입니다. 철학자 베이컨은 자기 자신에게 가해야 하는 수양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더 좋고 값진 무기가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나 자신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가장 지혜롭다는 솔로몬도 졌습니다. 무적함장 넬슨 제독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복음 전파 중에도 수없는 유혹을 물리치셨고,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유혹도 그분은 물리치셨습니다. 이 세상의 교사, 문학가, 사상가 그들 모두 우리들이 유혹과 싸울 때는 전연 무능합니다. 그들 자신이 이 싸움에 있어서는 패배자이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전후에 있어서 우리를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연합함으로써만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유혹에 이길 수 있는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의지하고 그분이 주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깃들 때 우리는 시온산처럼 견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이 있을 때 겁내지 말고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더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졌다 해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자비를 믿고 더 가까이 그분께 다가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사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히브 5, 14-16)” 아멘!













 32.             사순 제1주일 <마르 1,12-15>(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민병섭 신부



  옛날에 시골의 한 아낙이 시장에 갔다. 가져 간 것을 다 팔고 집에서 기다리는 자식들을 위해 여러 가지 물건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낙이 가는 길목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호랑이는 늙은 데다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잡아먹자고 덤볐다가는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 아낙이 오자 앞으로 나가 \”어-흥\” 하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팔 하나만 떼어 주면 안 잡아먹지.\” 하고 말하였다.



  아낙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것보다 팔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팔을 하나 호랑이에게 주었다. 그리고 집을 향하여 열심히 걸어갔다. 그 다음 언덕을 넘으려는데 호랑이가 또 나타나서는 또 팔 하나를 주면 잡아먹지 않는다고 말하였고 아낙은 또 팔 하나를 잘라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언덕에 도착했을 때 호랑이가 또 나타나서 이번에는 발  하나를 요구하였고 아낙은 발을 하나 주었다. 외발로 간신히 그 다음 언덕에 도달했는데 호랑이는 또 나타나 남은 발 하나마저 요구하였다.



  아낙은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나머지 발까지 주었다. 이제 손과 발을 다 잃은 아낙이 데굴데굴 굴러 언덕을 내려오는데 호랑이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네가 처음에 팔을 안 주고 나에게 대들었으면 나는 힘이 없어서 도망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너는 팔도 발도 없으니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이제 너를 통째로 다 먹어 버리겠다.\”라고 말하고 그 아낙을 통째로 삼켜 버렸다.



  사순 시기는 악과 전투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많은 유혹이 우리 주위에서 위협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나약함 때문에 쉽게 이러한 유혹에 빠지고 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마르 14,38)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무엇이든지 처음부터 마음을 굳게 가져야 한다. 한 번 정도야 하고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빠질 때에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 전체를 사탄의 손에 넘겨주게 된다.



    복음/마르 1,12-15



    오늘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서론(1,1-13) 끝 부분과 제1부(1,14─8,30) 첫 부분에 해당한다. 짧은 구절이긴 하지만, 오늘의 복음은 극적이면서도 기쁨에 찬 사순 시기의 의미를 잘 전해 주고 있다. 곧 사순 시기는 사탄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시기이며 동시에 구원의 복음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가 내적인 승리를 거듭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오늘의 복음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시는 기사이며(12-13절), 두 번째 부분은 복음의 첫 번째 선포에 관한 기사이다(14-15절). 마르코는 “그 뒤에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12절)라고 말하며, 이 광야의 유혹 사건을 앞의 세례 사건과 연결시켜 주고 있다.



  예수님 위에 막 내려온 그 \’영\’이 그분을 광야로 내보낸 것이다. 그 영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인간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채 하느님과 함께 있도록 고독 속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신 이유가 마르코 복음에서는 유혹의 목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마태오 복음과는 다르며(4,1 참조), 또한 다른 공관 복음사가들이 기록한 것처럼(마태 4,1-11; 루가 4,1-13) 그 유명한 세 가지 유혹의 이야기로 연장되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예수님께서 광야에 머무르실 때에 일어난 일일뿐이다. 다만 우리는 이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다.\”라는, 마르코 복음에만 특수하게 나타나고 있는 말을 고려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광야에 머무르시는 것이 다른 공관계 복음사가들보다 마르코 복음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광야는 결단의 장소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혹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으로 도유된 이도 그 곳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신다. 이스라엘은 유혹에 빠졌지만, 하느님의 종이시자 하느님의 옛 백성의 대표이시기도 한, 하느님께 사랑 받으시는 아드님은 승리자이셨다.



  그리고 40이라는 숫자는 성서 상에서 중요한 수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시험받았고(신명 8,2-3.15-16 참조), 모세는 하느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서 산에서 40주야 머물러 있으면서 기도하고 단식을 하였다(출애 34,28 참조).



  그리고 엘리야는 주 하느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 40일 낮과 밤을 걸어 호렙 산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뵙게 되었다(1열왕 19,8 참조). 이와 같이 오랜 동안을 거쳐오면서 역사적으로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이 40일이라는 기간의 의미는 우리가 우리 존재의 전체성을 더욱 더 깊이 깨달을 때야 비로소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계획은 오직 우리 각자가 자신의 마음을 좀더 깊이 인식하고 무엇보다도 천상 성부께서 베풀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만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머무르시는 40일 동안 하느님과 더욱더 깊고 긴 만남을 체험하신다. 사탄의 유혹은 실패로 끝났으며, 들짐승과 함께 지내시며 천사에게 시중을 받으셨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과 친교하시며 지내시는 메시아께서는 인간에게 위험스런 동물 사이에서도 역시 평화를 찾으신다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메시아는(이사 11,2 이하 참조) 사탄과의 싸움에서 그 약속의 성취를 체험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쳐이기시어 우주를 새롭게 하시고 천지만물을 평화롭게 하시며 인간들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이끌어 주신다.



  예수님을 시중드는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성부께서 그리스도의 악에 대한 승리를 기뻐하시는 것을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과 메시지가 인간들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변화에 대해서도 암시하고자 한다. 곧 광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마르코 복음 사가는 앞으로 자신의 복음으로써 이야기될 구원 사명의 계획을 미리 제시하여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큰 체험을 하신 후 가장 먼저 선포하시는 말씀은 당신께서 벌이신 사탄과의 격렬한 투쟁을 통해 당신 안에 실현시키셨던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15절). 사순 시기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참된 회개는 바로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사탄을 몰아내고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로 모셔들이는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라 길고도 험한 광야의 체험을 하여야 한다.



    제1독서/창세 9,8-15



    창세기에 의한 오늘의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맺어 주신 계약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태어난 인간은 교만한 마음으로 그 사랑을 잊어 버렸으며, 점점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삶을 계속하게 된다. 결국 너무나 많은 악이 이 세상에 가득 차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의 사랑으로 빚으신 인간을 후회하고 멸하시기로 하시며 40일 밤과 낮을 비가 내리심으로써 그들을 멸하신다.



  오직 하느님께 충실하였던 노아와 그 아들들만 살아 남게 되며, 홍수 후에 계속될 온 인류를 상징하는 이들과 함께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계약을 맺으신다. 홍수의 물로 씻겨진 새로운 인류와 함께 하느님께서는 “무지개\”(13절)라는 평화의 징표로써 이 새로운 인류에게 생명과 사랑을 영원히 베풀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모든 계약에는 쉽게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을 계약의 표지로 삼는 경향이 있다.



  창세기 31장에서 라반과 야곱이 계약을 체결할 때는 돌무더기가 계약의 표징으로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는 계약의 표로 무지개가 선택된 것이다. 무지개는 물론 근동 신화에서는 태풍신이 그의 원수들을 쳐부순 후에 하늘에 걸어 놓은 활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활은 단순히 비 온 후나 번개 친 뒤 특별하게 나타나는 자연 현상으로서의 무지개를 가리킨다. 모든 자연 현상은 하느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행위라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무지개의 의미도 무기로서의 활이 아니라 평화의 상징으로서, 하느님께서 세상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영원히 지속시켜 나가시겠다는 표징일 뿐이다. 더 나아가서 무지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약속을 재확인하는 표징 외에 인간이 이를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감사 드리게 하는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 그리고 지상의 모든 생물과 맺으시는 계약은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이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는 인간들이 지켜야 할 내용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와 폭력에도 자비를 베푸시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실 것이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지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 계약을 깨트릴 위험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는 인간의 그러한 잘못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오늘의 독서는 우리가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사순 첫 주일에 이러한 독서를 통하여 교회에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회개의 정신으로 주님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제2독서/1베드 3,18-22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첫째 편지 3장 13-22절에서 어떠한 박해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킬 것을 훈계하고 있다. 사도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악한 마음으로 해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을 소환하고 박해하는 일들은 악의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참된 본질을 모르는 데서 나온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본받고 세례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용감하고 대담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방어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오늘의 제2독서는 홍수에 대한 예표론적 해석으로 제1독서와 연결되고 있다. 제2독서에서는 홍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노아와 함께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세례에 대한 암시는 특히 “물을 통해서\”(\”물에 빠지지 않고\”)라는 말로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33.             사순 제1주일 <마르 1,12-15> (나)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오늘 복음(마르 1,12-15)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신 유혹사화(12․13절)와 예수께서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14․15절)으로 짜여 있습니다.



1. 유혹사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광야는 사탄이 사는 곳으로 여겨지던 장소였고, 40이라는 숫자는 긴 기간을 뜻하는 상징적 숫자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오랫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다고 하는데, 이는 메시아 시대가 오면 사나운 짐승들이 사람들과 함께 평화로이 지내리라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이사 11,6-8). “천사가 시중을 들었다”는 것은 천사들이 예수께 하늘의 음식을 드렸다는 뜻입니다. 이 유혹사화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무릇 위대한 인물들은 명성을 날리기 전에 크나큰 시련을 겪으면서 그 위대함이 더욱 돋보이게 마련인데, 예수께서도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사탄의 끈질긴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 유혹을 극복하고 새로운 메시아 시대를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2. 갈릴래아 전도 시작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다음 갈릴래아 지방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친히 다스릴 때가 임박했으니 이스라엘 백성은 서둘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께로 돌아선다는 뜻이고, 믿음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이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때때로 시련도 겪고 유혹도 받게 됩니다. 무릇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도 크나큰 시련과 유혹을 겪곤 했지만,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도 시련과 유혹을 겪으셨습니다. 따라서 시련과 유혹은 더욱 더 성숙한 신앙의 길로 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겪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정입니다.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방향을 바꾸어 서둘러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련을 견뎌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시련을 이겨 낼 때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주실 것입니다”(야고 1,12).

                                                       서울대교구 홍보실













34.               사순 제1주일 <마르 1,12-15> (나) 사랑하면 자꾸만 주고 싶어져



동물학자 콘라드 로렌츠는 여러 동물을 키우면서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여 그것들의 행동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새끼거위가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움직이는 물체를 따라가는 행동이 각인(刻印)된다고 주장하는 각인이론을 구축했습니다.



즉, 알에서 부화된 새끼거위들은 처음 만나는 움직이는 물체를 제 어미로 알고 한 줄로 늘어서서 따라가는 행동을 보였답니다. 그는 자신을 어미로 알고 따라다니는 거위 사진을 공개하면서, 부화 즉시 거위의 이런 행동이 형성되면, 후에 제 어미를 보고서도 어미거위는 따라다니지 않고, 로렌츠를 어미로 알고 계속 따라다니는 생의 초기에 일어나는 각인(刻印)의 중요성을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초기에 형성된 행동은 일생 고쳐지지 않는다고 하여, 그의 학파 학자들은 인간도 초기경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했습니다. 동물에게도 초기에 각인이 된 행동처럼, 인간에게도 초기, 즉 어린시기에 경험된 것은 일생 동안 고쳐지기 어렵다고 했고, 모든 발달심리학자들이 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발달심리학적 용어로는 발달의 기초성이라고 하여, 옛말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라고 인간의 모든 기초는 어릴 적에 다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로렌츠는 까마귀를 키우는 이웃집에 놀러 갔는데, 마침 발정기에 이른 까마귀가 이웃과 얘기하는 로렌츠의 입에 지렁이를 집어넣으려 했습니다. 로렌츠가 이를 피하자, 이번에는 로렌츠의 귀에다 지렁이를 집어넣었답니다. 까마귀의 이런 행동을 로렌츠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암컷 까마귀를 만난 적이 없이 사람과 함께 살아온 까마귀는 구애대상도 사람을 택합니다. 또한 발정기에 이르러 이성에게 구애할 때는 반드시, 무엇인가를 먹여주려고 합니다.” 즉 구애하고 싶은 대상에게 자기가 즐겨 먹는 것을 아끼지 않고 먹여주는 사랑의 행동을 먼저 보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엄마는 자기 아기에게 가장 좋은 것을 자꾸 먹이려고 합니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하고 자기 논에 물 들어가는 것하고는 아무리 많아도 아깝지 않다’는 것이 제 어머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되어보니, 제 어머님의 말씀은 진리였습니다. 과식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먹이고 싶은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모든 어머니의 마음일 것입니다.



어느 분이 재혼하고 싶어하는 시아버님께 여자를 소개시켜 드렸는데, 금방 돌아오셔서 점심을 차리라고 하셨습니다. “왜 금방 오셨어요? 그분께 점심이나 대접하시지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차 한잔으로 충분한 여자에게 뭐 점심까지”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 교회에 보내는 첫번째 편지 중 13장에서 사랑의 본질에 대해 간파했듯이, 안 먹겠다고 화를 내는 자식이 괘씸한데도, 다시 먹이고 또 주고만 싶어지니, 하느님도 우리한테 그러실 테지요. 부모가 되어서 우리의 부모이신 하느님을 좀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안진 클라라/서울대학교 교수, 시인





 35.                 사순 제1주일 (나) 사순절의 주인공

                                                 최영철 신부    



투쟁해야만 하는 현실   



지난주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이라 하여 머리에 재를 얹으며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말로 이루어지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었고, 오늘이 그 사순절 제1주일이 되는 날이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부활을 준비하기 위한 40일 동안의 희생과 보속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40이란 숫자는 성서의 여러 군데에서 사용되는 숫자이다. 예를 들어서 구약에서 모세가 10계명을 받기 위해서 40일간 재를 지킨 일과 엘리야가 40일간 호렙산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재를 지킨 일이라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간 광야에서 재를 지키면서 기도하신 일이 그것이다. 오늘 복음의 내용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40일간 광야에서 재를 지키면서 기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유혹을 받으면서 사탄과 투쟁하는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다.

악과 투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우리 인간도 악의 세력 속에서 끊임없이 그것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있음을 말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삶의 투쟁이라는 힘겨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눈만 뜨면 온갖 관심사가 성공해야 한다는, 실현해야 한다는 강박과 함께 시작하는 현실이 아닌가 한다. 생존경쟁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우리만치 사용되어 공부하는 것도, 일하는 것도, 모두 이 차원에서 해석되는 현실임을 부인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한마디로 투쟁적 현실이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나눔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데도 나눌 줄 모르는 인간관계에서 야박하고 몰인정한 사회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는 말이다.



물질적 가치가 지배적



투쟁적 가치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다. 그 투쟁의 재료는 두말할 나위 없이 경제적인 것으로서 정신적인 것까지 지배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 가져야 되는지 끝간 데 없는 경제적 투쟁의 현실이 지금의 우리의 생활양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인간의 발전이란 무엇인가?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회의스러운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발전! 선진국으로의 진입! 이라는 가치의 그 본질은 무엇인가?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일 수 있겠다. .

  

하지만 그것이 다분히 물질적 차원에 두어지는 데에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얼마나 더 편리해야 하튼지, 그리고 또한 얼마나 더 빨라야 하는지 그 끝이 보이지 않지 않은가, 발전의 개념과 가치를 여기에 두고, 정신 없이 경쟁적으로 치닫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제는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환경은 병들었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한마디로 우리 인간은 스스로 차별의 길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는 말이다. 그러한 현상을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피부로 그것을 느끼고 살고 있지 않는가?



나눔으로 악에서 해방



이제 우리는 인간의 발전과 선진국의 개념과 가치관을 바꾸어야 한다. 그 가치는 나눔에 두어야 한다. 나눔이 없는 인류공동체의 처참한 모습을 우리는 지금 생생하게 보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지구 한편에서 굶어 죽어 가는 어린이들과 그 사람들의 몰골을 보고 외면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리고는 우리의 낭비가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삶의 내용에 있어서 악과의 투쟁이라는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의 필요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나눔의 삶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사탄과의 투쟁이 악과의 투쟁이라면 현실에 있어서 그 악은 나눔이 없는 인간관계와 사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악과 투쟁하시어,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분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우리의 나눔의 삶은 악의 세력에서의 해방인 것이다.



이 사순절은 이러한 의미에서 시작의 때이고 이것의 주인공은 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36.                   사순 제1주일 (나) \’외통수\’는 없다

                                                         이원철 신부





어느 박물관의 한쪽 구석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 그림에는 인간과 악마가 장기를 두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림의 제목은 ꡐ장군ꡑ이었다. 인간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지혜, 통찰력, 경험, 정열을 동원하여 악마와 결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악마가 장군을 걸고 있는 장면이어서 악마가 이길 것 같아 보였다.

그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한 사람이 갑자기 펄쩍 뛰면서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ꡒ틀렸어. 장군이 아니다. 또 한 수가 있지 않은가! 아직 희망은 있어ꡓ 둘레에 모였던 사람들도 그제서야 그 그림의 장기판으로 눈길을 모았다. 인간은 외통수로 몰려 패배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장군은 당했지만 아직 꼼짝달싹 못하는 외통수는 아니고 또 한번의 수가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은 사순 제 1주일입니다. 재의 예식으로 시작된 사순절은 우리에게 참회와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 워 줍니다. 참회와 속죄는 우리 각자 뿐 아니라 공동체가 하느님의 지배에서 멀어지려는 모든 유혹에 대한 극복을 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유혹을 제 1독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ꡒ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다ꡓ 이러한 유혹은 오 늘 우리 각자에게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독서와 복음)은 한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이든 세 번이든, 몇 번째가 되든지 간에 새로운 출발을 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셨기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유혹을 물리칠 기회를 늘 주시는 것입니다.



ꡒ하느님의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 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다.ꡓ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또, ꡒ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ꡓ는 악마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 는 곳에서도 하느님께 순종하고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유혹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40일간의 광야의 삶은 항상 유혹의 삶이며(마르 1,13참조), 그 손길은 늘 가까이에 있기에(루가 4,13 참조) 사순절을 시작하는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ꡐ외통수ꡑ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37.       사순 제1주일 <마르 1,12-15> (나) 회개하라! / 나를 죽이는 작업

                                                         함세웅 신부



어떠한 음(音이)든지, 특히 교향곡에는 늘 반복되는 음률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제곡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곡조나 기쁘게 하는 곡조, 또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환상에 빠지게 하는 그러한 음률이 사실은 모두 이 주제곡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연주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음악입니다. 성경에도 주제곡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주제곡을 위하여 인간의 역사, 하느님과의 관계, 모든 사건, 가정, 개인 등의 감정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나를 따르라\”(마르코 1,14-20)라는 말씀은 이러한 의미에서 바로 전 구원사의 정점이며 구원 음악의 주제곡입니다. 사실 구약의 전 역사를 통해 살펴볼 때 \’회개하라\’는 이 주제가 얼마만큼이나 강조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인간을 부르십니다. 일치하여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약합니다.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고 죄도 짓고 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의 첫 조건입니다.

이 잘못은 개인의 잘못 그것뿐이 아니고 한 가정, 또는 단체, 사회, 국기의 잘못 그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고러나 하느님은 잘못이 있다고, 죄인이라고 저버리시지 않고, 더욱 우리 인간을 부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나 희랍어의 \’회개\’의 어원적인 뜻은 \’길을 바꾼다\’, \’되돌아온다\’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또한 속으로부터 진정 우러나오는 내적인 것이며, 또 행동과 실천을 요구하는 외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 한 예로, 마음으로부터의 진정한 뉘우침이 있었기에 많은 고행자나 순례자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오랜 시간 동안 힘들어도 참고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회개란 무엇보다도 먼저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에 있습니다.

본능과 이를 억제하는 나의 의지, 선과 악, 하느님과 인간, 진실과 가식, 얕은 잔죄와 성실, 영원과 잠시,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란 이러한 인식만의 정립은 아니며, 그것은 행동을 요구합니다. 제일 어려운 내적 행동, 즉 이것이냐, 저것이냐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결정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또한 타협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고 다만 날카로운 칼을 주려고 왔다\”고 하신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양자간의 택일에서 또는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서, 타협 없이 하나를 베어 버려 의지의 인간인 나, 하느님께로 향한 나, 진실의 나, 성실함의 나를 키우는 작업이 곧 회개입니다. 따라서 회개란 생각하는 것이며 반성하는 것입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에 도취되지 않고 분심하는 사람에게 주제곡이란 더구나 무의미할 것입니다. 루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두 가지 기도에서 우리는 진정 반성하며, 겸손되이 \”주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솔직한 인간, 가식 없는 인간, 그는 역시 모든 사람에게 성실할 것이며 진실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자의 사랑입니다. “회개하고 나를 따르라!\” 아직도 주제곡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갈 곳이 어느 장소나 또는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느 곳에 계시든지 어떤 상태에 있든지간에 따라야 한다는 \’당위\’만을 일러줄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느 분인지 가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구분을 합니다. 33년간을 사셨다는 예수님의 생애 중, 30년은 숨겨진 사생활이었고, 3년은 공생활, 또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과 왕으로까지 대접받은 예수님, 고통과 죽음의 예수님과 기적과 부활의 예수님, 그렇다면 내가 믿는 그 예수는 과연 어떠한 예수입니까?

  

이 모든 구분을 총괄해서 미국의 유명한 쉰(Fulton Sheen) 주교는 \’십자가 없는 예수\’와 \’예수 없는 십자가\’로 양분하였습니다. 한 예로 서방 세계의 물질문명 사회, 안일과 향락만을 찾는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신앙인들은 \’십자가 없는 예수\’를 믿는 우리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세계, 똑같이 인간의 발전과 복지를 도모한다는 공산 세계, 소련이나 중공 등의 국가에서는 무작정의 제한, 수고, 노동만을 요구합니다. 이들에게는 희망이 너무나도 희미합니다. 이러한 상태의 상황을 그는 \’예수 없는 십자가\’에 비유하였습니다.

우리가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그 예수, 그분의 십자가가 없다면, 그는 정녕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무의미합니다. 우리를 구원했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그 십자가, 그분의 십자가만 있고, 희망의 예수가 없다면 우리는 이 역경, 고통 속에서 그만 짓눌려 질식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는 십자가상의 예수이며, 또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예수의 십자가 길입니다. 이것은 곧 \”너희는 죽지 않으면 결코 살지 못하리라\”하신 예수님의 역설적 진리를 더욱 강조할 뿐입니다.

  

나를 죽이는 작업을, 우리는 내적 갱신, 통회로써 이룩하고 참되게 사는 작업을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실천해야 합니다 “뭐, 저런 것도 천주교 신자야?\” 하는 책망과 핀잔을 제3자로부터 듣기에 우리는 이웃을, 하느님, 예수님의 교회로 인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장애물이나 되지 않았었는지 반성하면서, 신앙인답게 성실하고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새로운 다짐과 함께, “회개하고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38.          사순 제 1 주일 (나해)  은혜의 사순 시기  

                                                강길웅 신부





교회는 \’예수 부활\’이라는 감격의 대축제를 바라보면서 40일 동안의 긴 준비기간을 갖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성서에서는 주로 부족하지 않고 꽉 찼다는 숫자로서 특히 어떤 시련이나 희생의 기간 을 다 채운 의미를 말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예수 부활을 40일 동 안 준비하며 그분의 수난을 묵상한다는 것은 교회가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기간 속에서 기도와 희생을 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분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주님 대전에 가지 고 나갈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뿐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마련한 이 사순 시기를 참으로 뜻 깊게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아무리 백번, 천번 부활하신다 해도 자기 자신이 부활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사순절은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옛날 노인들은 사순 시기에는 천당문이 활짝 열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1년 내 좁게만 열려있던 천당문이 이때만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기도로써, 특히 주 예수님의 수난으로써 활짝 열려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노인들은 가급적 사순절에 돌아가시는 것을 은근히 원하셨으며 어떤 노인이 정말 사순절에 운명하시면, “그 노인 참 복 있다.\”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마 사순 시기의 은혜로움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썩어빠진 세상을 홍수로 벌하신 다음에 노아를 통해서 새 세상을 열어 주셨다는 말씀과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리라는 그분의 약속이 나옵니다. 그 약속의 표가 바로 무지갭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새 삶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변화된 새 생활 안에서만 축복의 무지개가 뜨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 예수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 시기의 거룩한 의미입니다.



어떤 형제가 TV를 너무 좋아해서 저녁만 먹으면 식구들과 채널 문제로 자주 다투곤 했습니다. 한번은 회사에서 보너스를 탄 김에 더 큰 TV를 구해서는 자기 방에 놓고 혼자만 편하게 보곤 했습니다. 그러자니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가정에서 대화가 없어지니 서로 가 소외되는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고 나중에는 가정이 왜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뒤늦게 이 친구가 정신을 차리고 TV를 없애고 가족들 끼리만의 시간을 오붓하게 갖게 되자 가정에 축복의 무지개가 뜨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에 묶여져 있는지를 잘 모릅니다. 알아야 뉘우치고, 깨달아야 회개를 할 텐데 모르기 때문에 평생 고 치지 못하는 마치 배냇병신마냥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들어가서 자신을 깊이 바라봐야 합니다. 자신 을 알 수 있을 때 보람된 삶을 창조할 수 있으며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을 때 미래를 옳게 설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회개를 설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는 회개의 의미를 보다 깊이 새겨 들어야합니다. 탕자(루가 15, 11 ~32참조)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자 쫓겨날 줄 뻔히 알면서도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참모습입니다. 기차를 잘못 탔으면 바로 바꿔 타야 합니다. 엉뚱한 기차 안에서 아무리 사정하고 매달려 봐야 기차는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의 잘못된 것을 알면 표시가 있어야 합니다. 옛날 요나 의 설교로 니느웨가 임금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단식과 재를 지켰 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며 또한 세관장 자케오가 자신이 잘못 산 것을 깨닫자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듯이 우리 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회개의 모습을 주님께 보 여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사순 시기에 자신의 마흔 가지 죄를 하루에 한 가 지씩 반성하면서 지냈다고 하며, 또 어떤 자매는 기도해 주고 도와 줘야 할 대상 마흔 명을 선정해서는 하루에 한 사람씩을 위해 봉헌했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바로 이 시기에 술을 끊고 담배를 끊으면서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하나씩 찾아서 희생으로 봉헌하는 신덕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순 시기는 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인생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은혜의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의 때입니다.



마음을 고쳐 먹고 은혜의 하늘을 활짝 열도록 합니다.










 39.           사순 제1주일 <마르 1,12-15> (나) 세수는 매일 하십니까? 

                                                          김영진 신부


광산촌 본당신부 시절, 모니카의 집이라는 조그만 가정 양로원을 만들어 수녀님을 모셨는데, 어느 날 방문을 하였더니, 할아버지 한분이 내게 수녀님 욕을 해대며 불평을 털어놓았다. 이유인즉 “무슨 놈의 세수를 매일 하라고 성화를 부리는지 화딱지가 난다\”고 말씀하는 것으로 보아, 아침마다 세수를 하라는 수녀님과 안 하겠다하는 할아버지와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당신 편을 들어줄 줄 알았던 신부가 “할아버지! 세수는 매일 하는 것이에요. 그래야 냄새도 안나고 깨끗해 보이시잖아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삐져서 옆으로 돌아앉으며 “나는 이 집에 오기 전에는 3년 동안을 세수 한번 안하고 살았었는데, 누구 하나 날 보고 냄새나고 더럽다는 사람이 없습디다\”라고 말씀하는 게 아닌가. 나는 속으로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할아버지 곁으로 가서 어깨를 주물러 드렸다.

그리고는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지금은 세수를 하기 싫으시지만 한 1년만 계속하시다 보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밥맛도 좋아지시고 건강하고 더 예뻐지실 거예요\”라고 말씀드리며 달랬다. 생각 같아서는 “세수하시지 말고 그냥 사세요\”하고 말씀드리고 싶었으나, 다른 노인들을 위해서라도 깨끗한 모습으로 살도록 신신당부를 드렸다.

  

이 이야기는 비록 하찮은 것이긴 하나, 3년간 세수를 안했어도 더러움을 몰랐다고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기에 나누어 본다.

세수한지 오래될수록 더러움을 모르듯이, 냉담한지 오래될수록, 또 고해성사 본지 오래될수록, 죄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지 않은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또 그것을 뉘우치고 뉘우침을 행동으로 보이는 고해성사에 임한다는 것은, 언뜻 보기엔 쉬운 듯해도, 3년 동안 세수 한번 안했어도 냄새나고 더럽지 않았다고 말하며, 세수를 안하겠다고 수녀님과 아침마다 싸우던 할아버지의 고집과 신념을 깨뜨리는 것만큼 어려운 것일 수 있다.



날마다 목욕하는 사람은 하루라도 목욕을 못하면 끈적거리고 가려운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한달이나 1년씩 목욕을 안하는 사람은 끈적거림도 가려움도 더러움도 모를 뿐 아니라, 하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내일하지 뭐\”하며 미루게 된다.                



영혼의 얼굴을 닦으시나요



영혼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과 멀어진 지 오래된 사람일수록 잘못한 것도 부족한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하듯 매순간 영혼의 모습을 바라보며 닦아낼 곳은 닦아 내야 한다, 3년을 세수 한번 안하고 살던 할아버지께서 냄새와 더러움을 모르고 살았듯, 오랜 시간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 앞에 비추어 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반성할 것도 회개할 것도 고해성사 볼 것도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하루에 한번씩이라도 자신의 삶을 하느님 앞에 비추어 볼 때, 깨끗한 영혼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천주교회에서는 요즘 사순절이라는 시간을 정하여 게으르고 소홀히 하였던 삶을 반성하게 해주고 있다. “해마다 오는 것인데 뭐\”하고 생각하지말고 또 술, 담배, 텔레비전, 고스톱 등을 삼가는 외형적인 노력에서만 끝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자주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매순간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놓아 드리는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은 순간을 놓치면 영원을 놓칠 수 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는 상품광고도 있듯이 말이다. 사순절은 회개와 반성을 요구하는 순간이요 기회다. 미루고 게을리 하며 안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들에겐, 사순절이라는 순간과 기회는 단지 죽은 사건일 뿐이다.

  

옛날 영국의 색슨 왕국 내에 반란이 일어나,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싸웠다. 왕은 가는 곳마다 반역의 무리들을 퇴치하고 왕국 내에 다시 평화를 이루었다. 승리를 하고 왕궁에 돌아온 왕은 이상한 명령을 하였다. 그 명령은 “내일 아침 왕궁 앞에 있는 정문에 촛불을 켜 놓아라.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라. 반역에 가담했던 무리들이라 하더라도 그 촛불이 다 녹아서 꺼지기 전에, 잘못을 뉘우치고 가까운 포도청에 가서 자수를 한다면, 누구나 무조건 용서해주리라\”하는 것이었다.



그 시간과 기회가 지나가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초 한자루가 오래 타면 얼마나 오래 타겠는가.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도 이 한자루의 촛불이타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도 어떤 촛불은 일찍 꺼지기도 하지 않겠는가! 나라고 하는 촛불이 타고 있는 이 짧은 순간에 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받기 위하여 회개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할 일이 태산 같으니, 내일로 내년으로 미루면서만 살 것인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설파하신 첫 번째 강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 나온다. 회개란 쉬운 듯하나, 3년 동안 세! 수 한번 안했어도 더럽지 않더라는 할아버지의 고집과 신념을 깨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미루는 습관과 게으름에서 피와 땀을 쏟는 노력을 보일 때, 회개는 가능하다. 자신의 감옥을 만들고 있는 게으름과 교만, 이기심과 증오심을 부서뜨리고, 성실과 겸손, 사랑과 용서가 넘치는 광야로 나서기 위하여, 피땀 흘리는 회개의 노력이란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















40.       사순 제1주일 <마르1,12-15> (나)  「광야」라는 말과「사십일」이라는 숫자

                                                           김영남 신부



오늘 복음말씀은 양적으로 보아 매우 짧지만 신학적으로는 매우 의미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전반부에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유혹 받으시는 이야기가 나오고, 후반부에는 예수님의 공적 활동(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그 내용을 요약해주는 말씀이 나온다.



이 두 부분은 다같이 사순절 첫 주일을 지내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호소하는 바가 크다.

오늘 봉독되는 마르코 복음에 의한 예수의 유혹설화는 루가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에서와는 달리 매우 짧지만, 성서의 세계에서 깊은 상징성을 갖고 있는「광야」라는 말과「사십일」이라는 숫자를 사용하면서 의미 깊은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는 40이라는 숫자와「광야」라는 말은「성서」를 읽고 살던 사람들에게 「정화와 준비」를 상징하는 말이다.

예를 들면, 모세는 40주야를 시나이 산에서 지내며 야훼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하였으며 (출애 24,12~18), 엘리야 예언자는 이사벨 여왕의 박해를 피해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피신하여 자신의 사명수행을 위한 영적 힘을 새롭게 길렀고(1열왕 19,8),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은 에집트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전에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전전해야 했다(참조: 신명 8,2).



그런데, 특히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의하면「광야에서 유랑하던 시절은 하나의 “고통과 시련(유혹)의 시절”이었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어느 때 보다도 깊이 느끼며 믿고 살았던 하나의 “이상적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자신들을 구원하셨던 하느님 야훼를 잊고 바알 우상숭배나, 빈부격차, 권력의 남용, 부정부패 등으로 타락하기 쉬웠던 문명사회에서 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이 부족하여, 의지할 것이라고는 하느님밖에 없었던 곳, 그래서 하느님을 간절히 찾고 믿었던 광야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더 깊고 순수하게 간직했다고 회상하면서, 당대의 이스라엘백성에게「광야로 나오라」고 초대하였다.(예컨대 호세 2,16-17)



이제 막 시작한 사순(40일)시기도 일종의 「정화의 시기」이자 「준비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런 죄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그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을 특별히 묵상하면서, 우리에 대한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고, 죄로 얼룩진 우리의 삶을 정화시켜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할 수있기 위해 특별히 준비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사순절 시기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광야」로 초대하는 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적 활동(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면서 그 내용을 요약해 놓았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선포하신 내용을「하느님의 복음」이라고 부름으로써, 예수님이 선포한 소식이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사람들을「기쁘게 하시는(행복하게 하시는) 소식」이라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의 내용은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셨던「하느님의 나라(다스림)」을 간절히 기다려왔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언젠가「때가 되면」하느님께서 몸소 개입하시어 악한 인간들을 그 권좌에서 내쫓으시고, 당신의 정의와 자비를 세우실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고대해왔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그 때」가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기쁜 소식」의 선포는 동시에「회개하라」는 경고이며,「복음을 믿으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선포하는「기쁜소식」이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

서는「회개와 믿음」이 요청된다는 말이다.「회개하다」라는 말에 해당되는 히브리어가 본디「돌아서다」는 뜻을 품고 있듯이, 성서에서「회개」란, 지금까지 자기중심적으로 잘못 살아왔던 삶의 방향을 180도 완전히 돌러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순절이 이미 시작되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사순시기는 영적인 광야(빈들)체험의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사순시기 동안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어 놓거나, 방해하던 것들을 우리의 삶에서 말끔히 치워놓고 하느님을 위한 자리와 시간을 더 많이 마련해야 하겠다.

그리고 불필요하고 시끄러운 외적 및 내적 소리도 제거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똑똑하게 우리의 삶에 들려오도륵 해야하겠다.













41.       사순 제1주일 < 마르 1, 12~15>(나)     유혹 받는 예수님      

                                                       신은근 신부



  

사순절이 되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시점에 교회는 사순절을 시작한다. 봄의 계절

처럼 다시 출발하라는 암시다. 지난 수요일 우리는 재를 받으며 사순절의 의미를 묵상하였

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결국은 아무 것도 갖고 갈 수 없다는 운명이 아닐는지,

삶의 속도를 늦추고 믿음의 점검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금년은 특별히 새로운 천년대가 시

작되는 해가 아닌가.

  

새로운 출발 – 말은 쉬워도 행동은 어렵다.

지난날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마음만 먹는다고 될 일은 아니다. 자신을 괴롭힌 사건과 사람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먼저 자신이 변해야 한다. 지난날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으로 바꿔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출발이 가능해진다. 은총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사

순절을 은총의 시기라고 했다.



지난날을 없었던 것으로 여기며, 지난날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건강한 일이다. 운명을 바꾸는 행위다. 이것을 공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때가 바로 사순절이다. 사순절이란 예수님의 죽음과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가. 잊어버리고 용서하는 것이다.



지난날의 아픔과 괴로움을, 어려웠던 체험들을 하느님께 맡기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게된다. 이것이 사순절의 큰 의미다. 금년 사순절 우리는 이것을 실천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다. 그분이 어떤 유혹을 받으셨던가.

당신은 왜 사서 고생하려 하는가. 당신은 왜 쓸데없이 십자가를 지려하는가. 천상의 막강한 능력을 지닌 당신이 어째서 약한 사람이 되고, 약자 편에 서려고 하는가. 어찌하여 당신은 쉬운 길을 제쳐놓고 그토록 황당한 길을, 그토록 무모한 길을 가려고 하는가. 아마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분처럼 우리도 유혹을 느낀다. 예수님을 유혹한 사탄이 우리라고 그냥 둘 리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유혹 받으셨기에 우리가 유혹받는 것은 당연하다.

십자가를 지기싫은 유혹, 억울하게 참지 말고 마음대로 하라는 충동의 소리, 그 모두가 당연한 유혹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유혹을 물리치셨다.



사순절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이 십자가를 묵상해야 한다. 삶의 불협화음을 받아들이고, 내게 주어진 시련들을 나의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이 십자가를 져야한다. 이것이 다시 시작하고 서로 출발하는 행위의 첫 걸음이다.

  사순절은 삶의 어두운 때를 묵상하는 시기다. 인생에서 잘 나가던 시기보다 암울하고 힘들었던 시절을 묵상하는 때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결과로 주어진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는 때다. 그리하여 운명 속에 깊숙이 들어와 계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시기다.



그런 사람은 현실의 모든 삶을 쉽게 그분께 맡길 수 있다. 사순절 동안 이 묵상을 계속한다면 누구나 변화를 체험할 것이다.

아이의 세계가 유치하다고 바로 건너뛰어 어른이 될 수 없다, 청년기의 방황이 괴롭다고 청년기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과정을 철저하게 거쳐야만 비로소 다음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사순절을 어영부영 보냈는데 부활의 은총이 살아있는 힘으로 다가올 리 없다.



다시 출발하는 마음으로 사순절의 첫 주간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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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나해 사순 제 1주일 주일 강론 모음

  1. user#0 님의 말: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

    1. 말씀읽기: 마르코1,12-15


    2. 말씀연구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가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시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을 보내신 다음 당신의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나 또한 내 일을 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늘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12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개인적인 생활을 접고, 이제 메시아로서의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위해 세례를 받고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물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의지를 더욱 굳게 하시고, 3년간의 공생활을 준비하시도록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유혹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행동으로 하느님을 택하고, 헛된 사탄의 약속을 물리쳐 버리라고 귀중한 모범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직 모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메시아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몰랐으니까 예수님을 자신의 부하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겁도 없습니다.^*^


    ① 빵의 유혹

     먼저 사탄은 40일 동안 단식을 하신 상태인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런데 굶주렸을 때 돌을 빵으로 만들어서 먹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아들임을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증명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② 권력의 유혹

     사탄은 예수님을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 성전 꼭 데기로  모시고 갑니다. 높은 탑 아래에는 성전의 광장이 있었는데 그 광장에 있는 이들은 모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힘으로 세상을 뒤엎을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마음이 있으셨다면 굳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사명을 바꾸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어기게 만들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 세상을 죄의 사슬에서 풀어 준다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4,7)


    ③ 재물에 대한 유혹

     사탄은 한편의 영화를 보여주듯 그렇게 세상을 보여주며 유혹을 합니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4,9) 언제나 써먹는 유혹이요 거짓말입니다. 사탄은 이런 약속을 실행할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으로 얼마나 웃으셨을까요? 자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또한 재물을 가지고 구원사업을 펼칠 계획이 있으셨다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4,10)


     예수님께 사탄은 완패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완승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빵으로 만들어 드실 계획이 있으셨다면 굳이 단식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세상에 군림하는 메시아로서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이셨다면 굳이 인간이 되지 않으셨을 것이고, 악마에게 절하여 재물을 얻으려 하셨다면 굳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유혹에서 벗어납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유혹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의 유혹을 물리치면 또 하나의 유혹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그 유혹을 물리치면 어느덧 내 마음 안에는 지나친 믿음의 오만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유혹을 이겨내는 방법은 예수님처럼 단호하거나 그 유혹으로부터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지를 알아봅시다.

    황진이는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고 했지만 결국 유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찾아간 사람은 바로 그 당시 선승으로 지족암에서 30년동안을 면벽참선한 지족선사였습니다. 지족선사는 생불이라고 불릴 만큼 덕망이 높았습니다. 황진이는 서경덕을 시험해 본 뒤에 지족선사를 시험해 보려고 지족암으로 찾아갔습니다. 황진이가 제자로서 수도하기를 청하니 지족선사는 여자는 원래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처음부터 거절을 하였습니다. 황진이는 며칠 있다가 다시 소복단장으로 청춘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암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지족선사가 머무는 옆방에다 침소를 정하고 자기의 죽은 남편을 위하여 백일 간 불공을 한다고 하면서 밤마다 불전에 가서 불공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황진이가 손수 축원문을 지어 청아한 목소리로 축원문을 처량하게 읽으니 그야말로 천사의 노래와도 같고 선녀의 음률과도 같아서 아무 감각이 없는 돌부처라 할지라도 놀랄만 하였습니다. 하물며 감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누가 감히 귀를 기울이고 듣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며칠 동안을 계속하여 불공축원을 하니 지족선사가 처음에는 무심하게 듣다가, 하루 이틀 들을수록 자연히 마음에 감동이 생겨서 그 30년의 면벽을 깨고 파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십년공부 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지족선사가 예수님의 유혹대처법을 알았더라면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쳤을 것입니다. 지족선사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유혹대처법은 “냅다 튀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포티파르의 아내의 유혹에서 냅다 튀듯이 그렇게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만이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만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자만 다음에 오는 것이 바로 파멸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의 유혹 뒤에 갑자기 지나친 믿음의 유혹이 있고 마지막에 오만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 오만은 경계를 늦춘 인간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가장 무서운 함정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유혹과 맞서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불리할 것 같으면 무조건 도망가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이 포티파르의 아내가 유혹하자 도망친 것처럼 그렇게 도망쳐야 합니다. 유혹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 기회를 봐서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00%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유혹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행동으로 하느님을 택하고, 헛된 사탄의 약속을 물리쳐 버리라고 귀중한 모범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모범을 우리 함께 따릅시다. 사탄은 교묘합니다. 이 유혹은 유혹받는 자의 가장 아픈 급소를 찌릅니다. 남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려고 할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은총으로 남을 구하려고 할 경우에도 상대의 상태를 잘 알고 있으면 그를 신앙에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예수님께서는 40일간을 광야에서 보내신 다음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일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기 시작할 때는 마침 요한이 헤로데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즉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일을 모두 마친 것입니다.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이니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다면 결국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통하여,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당신 백성과의 계약을 통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백성들을 다스리셨습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특별한 것을 의미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분께서 다스리셨지만 이제 약속하셨던 것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메시아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병자들이 치유되고, 악령을 몰라내고, 죄의 용서와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게 되는 때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구원의 때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그 구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표징을 감지한 이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숙제는 바로 “회개”입니다. 세리나 창녀를 비롯하여 어느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으십니다.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는 이 “하느님의 복음”은 절망에 빠져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사랑의 손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은 바로 회개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예수님과 같은 유혹을 당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요? 내가 가장 잘 넘어가는 유혹은 무엇일까요?


    ②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무엇이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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