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사순 제 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사순 제 2주일

        1. 경갑룡 주교(가)/2                     2. 최익철 신부(가)/5

        3. 조순창 신부(가)/7                     4. 윤민구 신부(가)/9

        5. 강길웅 신부(가)/12                    6. 변희선 신부(가)/14

        7. 김현준 신부(가)/15                    8. 오용환 신부(가)/17

        9. 최인호 작가(가)/18                    10. 본때를 보인 사건(가)/19

        11. 새로운 삶(가)/21                     



1             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가) 예수의 거룩한 변모

경갑룡 주교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은 사순 제 2주일입니다. 여러분이 조금 전에 들으신 바와 같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천상적 광경을 보고 너무 좋아서 그러한 환경에서 영원히 머물러 지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제자들은 그러한 휘황찬란한 천상 광경을 보기 직전까지 예수님의 그 뛰어난 권능과 권위를 직접 본 반면에, 캄캄하고도 답답한 시련을 많이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이기 때문에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변모를 보고 더 이상 지상에 내려가지 말고 시련과 불행이 많은 이 지상으로 더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예수님을 모시고 영원 무궁토록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램을 자기도 모르게 표했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간 틈을 내서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남해 낙도인 흑산도에 다녀왔습니다. 이 흑산도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목포에서 8시간 정도 여객선을 타고 가야 할 곳이었지만 얼마 전부터 “수중익선”이라고 하는 쾌속정이 생겨서 약 2시간만에 흑산도에 당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약 9,000명 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조그만 섬이고, 또 섬사람들은 대부분 고기를 잡는 어민들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10년 전에 최초로 골롬반회 신부님이 그곳에 들어가서 본당을 설립하고 많은 외국 원조를 받아서 낙도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도 짓고, 또 주민들의 생활을 돕기 위해 조그만 조선소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신부님들의 그 눈부신 활동으로 흑산도 도민들은 반 수 이상이 영세를 하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이 골롬반회 신부님들이 그 흑산도에서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처음으로 방인 신부님들이 그 흑산도를 인수받게 되었습니다. 한국 신부님들이라 외국 원조를 받을 수 도 없어 맨 손으로 그 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섬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방인 신부님들로부터는 더 이상 물질적인 어떤 혜택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까 신자들은 다 교회를 등지게 되었습니다.



학교는 더 이상 학교로서의 구실을 못할 뿐만 아니라, 제가 가보니까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다 깨져서 산산조각이 나고 그야말로 황폐할 대로 황폐한 상태였고, 바로 성당 밑의 조선소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그런 상태에 있었지요. 그래서 광주 대교구의 교구장님은 할 수 없이 그 본당의 신부님을 철수 시켰습니다. 그래서 약 반 년 동안 본당 신부님이 없이, 그야말로 내버려진 본당으로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신부가 없게 된지 6개월만에 그 곳의 몇몇 교우들이 주교님을 찾아갔습니다. 아마 주교님께 눈물로서 호소를 했던 것 같습니다. 참 신앙의 재건을 해 보겠으니 우리에게 목자를 보내 달라고 교우들은 호소했겠지요. 주교님을 세 번 찾아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당을 비운지 6 개월만에 젊은 신부 한 사람이 선발되어서 그것에 부임했습니다. 그분이 현재 본당 신부로 있는 고 야곱이라는 아주 젊은 신부였습니다. 그곳에 부임한지 약 7-8개월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곳에 가 있는 동안 아침에는 미사가 없었습니다. 어민들인지라 아침에는 일하러 나가야 되기 때문에 저녁 미사가 있었는데, 그 섬에는 전기가 없었습니다. 초롱불과 촛불로 어둠을 밝히고 지내는 미사에 7-80명의 교우들이 참례하러 왔습니다.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성가책을 손에 들고 아주 우렁차게 성가를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흐뭇한 분위기 속에서 미사를 드려 본 일도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흑산도 교우들은 참 신앙의 뿌리를 박기 시작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어느 날은 미사가 끝나고 난 후에 그곳 사목위원 18명이 전원 참석해서 저에게 지금 흑산도 교회의 현황과 자기들이 꿈꾸고 있는 어떤 미래의 계획 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는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곳 남자들에게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한 사람도 자기의 직업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이 없답니다.



그 만큼 일정한 직업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일거리가 있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동네 사람들끼리 어울려서 술이나 먹고, 이것이 하루의 소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할 수밖에.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매일 미사에 참여하는 등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에 신앙이 저나된 지 10여 년만에 비로소 참 신앙의 뿌리가 박히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그 사목위원들이나 일반 교우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제가 느낀 것은 “저들은 더 이상 교회에서 물질적인 무엇을 기대하지 않는구나” 하는 것과 저들 자신의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그 지역 사회에 교회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 야곱과 베드로와 요한은 타볼산에서 이 지상에서 볼 수 없었던 화려한 광경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둡고 암담한 시련이 많은 이 지상에서 내려가지 말고 그만 거기서 영원 무궁토록 안주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타볼산에 데리고 올라가시기 전에 저들이 예수님의 무수한 기적과 권위를 보고 우쭐할 때마다 장차 자신이 악당들의 손에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되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했습니다. 십자가 없이 오늘의 복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찬란한 타볼산의 믿음을 갖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도, 또 십자가가 없는 부활도 참된 의미에서 있어서 믿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믿는 것도,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참된 의미에서 있어서의 크리스천의 믿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을 때, 좌․우편에 도둑 두 사람이 똑같이 못 박혀 있었습니다. 좌편의 도둑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당신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당신도 살리고 나도 살려 주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을 믿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조건으로서 자기를 살려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발 밑에 있던 무수한 군중들도 예수님에게 “당신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오.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 아래에 있는 무수한 군중들이 자기를 믿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신 채 그대로 십자가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 많은 크리스천들 가운데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과 같은 믿음을 가진 분들이 많다고 하면, 지나친 단정이 될까요?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일본․한국 기타 여러 나라에서 우후죽순처럼 많은 종교가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종교가 신생되고 있습니다. 새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똑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많은 종파의 그리스도교가 있습니다. 열 집 건너 교회가 있고, 무슨 교회 무슨 교회 이루 그 이름을 다 헤아릴 수 가 없을 정도로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 모든 종교들마다 그 종교에 출입하는 교우들에게 아름다운 약속을 합니다. 무슨 약속을 합니까?



바로 오늘 타볼산에서와 같은 그런 믿음을 약속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병이 없어지고 집안에 우환이 없어지고, 원하는 모든 일들이 다 성취된다는 그러한 약속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신자들까지도 그러한 약속을 하는 종교로 전향하는 그런 신자들도 있습니다. ‘나에게 무엇을 약속해 주신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 나를 살려 주신다’ 하며 그리스도 좌편에 있던 도둑과 같이 나를 살려주시는 그리스도만 믿으려 합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 부활이 없는 그리스도는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지내고 있는 이 사순절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하는 기간이고, 또한 우리 믿음의 뿌리가 십자가라면, 그 뿌리에서 솟아난 결실과 꽃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가 이 꽃인 부활을 맛보기 위해서,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서 뿌리를 키우는 것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처음 낙도의 도민들은 타볼산의 그리스도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뿌리가 없는 믿음이었기에 그 믿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여러분도 좌편의 도둑처럼 십자가 발 밑의 군중과 같이, 여러분을 살려주는 그리스도만을 믿는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참 믿음이 못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있기 위해서는 내가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를 너희도 같이 져야 한다고.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갈 때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우편에 있던 강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나를 살려달라 하지 않고 주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주님을 있는 그대로의 주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당신이 영복소에 가시거든 저를 잊지 말고 저도 데려가 달라.”고 하였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우편에 있는 강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복소에 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뿌리입니다. 이 뿌리를 우리는 사순절 동안 키워야 하겠습니다.











2            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가)  예수의 거룩한 변모

최익철 신부



산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아주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거룩하게 변화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산이었으며, 모세가 십계판을 받기 위해 올라갔던 곳도 산이었습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과 가르침을 내리신 곳도 산에서였고, 주님이 늘 기도하시고 또 승천하신 곳도 산이었습니다. 구약의 우리 성조들이 제단을 쌓아 하느님께 제사를 올린 곳도, 숱한 수도자들이 수덕한 곳도 또한 산이었습니다.



산은 깊은 침묵의 무게를 지니고 있으며 자기의 깊은 내면의 모습에 눈 돌리게 하는 힘을 지녔습니다. 이 산이 상징하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올라가는 인간의 부단한 노력 즉 상승 과정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산을 오르는 작업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어느 날 어떤 원숭이가 건너 마을에 놀러 가다가 도중에서 원숭이 한 마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숭이의 눈은 애꾸였습니다. 길을 가던 원숭이는 그 처음 보는 애꾸 원숭이가 신기해서 자꾸 놀려댔습니다. 애꾸 원숭이는 원숭이대로 자기와 다른 눈을 한 원숭이가 신기했습니다. 둘이는 서로 병신이라고 하면서 싸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땅만 쳐다보고 사는 외교인들을 애꾸라고 보면 어떨까요? 땅과 하늘을 동기에 쳐다보고 사는 두 눈을 가진 우리는 자칫하면 그 많은 애꾸들 틈에 끼어 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병신 아닌 병신으로 만들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이 세속에 묻혀 살고 있지만, 저 애꾸들처럼 세속에 속한 자녀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속한 자들이며,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자녀의 착한 행실은 그 아버지의 기쁨이며 자랑입니다. 자연히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사랑받게 마련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위로 향해 오르기를 요청하고 계시고 새롭고 변화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변화에 말려들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타볼산에서 주님의 형상이 변화되어 거룩한 모습을 보여 주시듯, 우리도 이 사순절 동안 무엇인가 달라져서 달라지는 그 모습만큼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 바울로는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변화될까요? 그것은 보속의 길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보상으로 어떠한 형태로든 고행을 해야 되겠지요.

그렇게 하면 죄의 보속 뿐 아니라 죄에 대한 증오감을 갖게 되어 내 의지를 재무장시킬 수 있게 됩니다. 감각이 사로잡는 세력에서 벗어나게 되고 지혜로운 정신적 위생으로 외부의 죄악과 내심의 정욕에 물들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일치하게 되고 인류를 구원하시는데 협력하게 됩니다. 고행하면 특히 은총이 나에게 스며들어 내 안에서 꽃이 피게 됩니다. 즉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러한 거룩한 변화를 내 안에 반드시 불러 와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우리의 생활을 점검하여 자기 스스로 행할 수 있는 보속의 길에 충실해 주기 바라며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라고 이르신 그리스도의 말씀따라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 변화되신 사건을 마음에 새기며 그 크신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신이 인간이 되시고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되신 그 살에 깊이 묻히십시오. 성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성자는 성부의 말씀에 어떻게 따르셨는지 여러분은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생각해 보십시오. 성부께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마태 3,17; 17,5)”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부자 관계에서 오는 자연적 사랑말고 사랑 받으실 만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성부의 말씀과 뜻을 , 그것도 당신만 훨씬 못한 우리 인간을 위해서 과감하게 완수하신 순종입니다. 명하신 이사악의 희생을 면케하시면서 당신 아들 예수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토록 멀리 해 주시기를 애원했던 피땀 흐르는 고통을 감당토록 하셨습니다. 12군대나 되는 천사를 동원해서라도 처치해 버릴 수 있었음에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피의 잔>을 찌꺼기까지 마시신 것은 정말 사랑 받으실만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뜻이라면 추호도 어김이 없이 한 점, 한 획까지 정확하게, 지체없이, 의욕적으로 이룩하신 것을 보면 성부 우편에 앉으실 수 있는 끝없는 영광을 누리실만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빛나는 영광에 이르자면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으라(마태 17, 5)”하신 성부의 말씀대로 우리는 전 생명을 내놓으시면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가르침에 감사하며 따라야 될 것입니다.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 잘 알기 위해서 여러분은 열심히 성서를 읽으며, 그때 그때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잘 받아 들여 실천해야 될 줄로 압니다. 그래서 그 높은 산에 오른 우리는 변모된 예수님을 본 사도들의 기쁨과 황홀을 맛보게 될 것이고, 마침내는 아버지로부터 <내 마음에 드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 열심히 산을 오르십시오. 그리고 만나게 될 험준한 골짜기도 잘 견디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단지 성서를 읽는 것만으로 충족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말씀을 외우는 것으로 하느님 말씀을 순종한 것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죽음까지도 순종하였습니다. 죽음으로 이르는 순종은 순종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정의와 진리대로 사는 것이 곧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그에 부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일치-하느님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3             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가)  예수의 거룩한 변모

조순창 신부



우리가 사는 오늘의 시대는 흔히 가슴이 뭉클하고 코가 시큰한 감도에는 둔하고, 오히려 놀라운 충격을 요구하는 현실이라서, 음악이나 미술이나 문학도 감동보다 충동적이고 노골적인 굵은 선이 더 인상적이며, 그래서 믿음의 생활에서도 감명보다는 감격적인 강론과 실천을 더 찾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인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 은 놀라운 감동과 충격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로부터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에 수난의 예고를 하신 다음, 엿새 후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예수님의 하느님으로서의 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많은 신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따라 타볼산에 이르러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러 이곳에 오셨고, 이 시간은 은혜있는 시간입니다.



제1독서(창세:12/1-42)에서는 하느님의 분부를 따른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야훼의 말씀을 들은 75세난 아브라함이 짐을 꾸려, 낯선 땅으로 향해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두려움 없이 나섰기에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로께서는 감옥에서 유서와도 같은 사목 서한을 사랑하는 협조자 디모테오에게 보내면서,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을,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에페소서 4장 1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에 모습이 빛나고 눈부셨고, 그 때 하늘의 빛나는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만 이는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생명을 주신 것이 부르시기 위함이요, 복음을 듣고 신자된 것이 부르심의 응답이었으며, 우리 마음과 양심의 소리로 선행을 하게 함이 부르심이요, 거짓 중에서 진실을 찾고, 공포와 억압 속에서 평화를 찾고, 불의와 부정 속에서 정의를 찾고, 억압과 지배 속에서 자유를 찾고,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나, 교회 복사에 불림이 하느님의 부르심이며, 이를 따라 응답함이 구원의 지름길입니다.


느님의 부르심에 나선 우리의 모습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구태의연한 고집과 자기 중심의 이기심과, 자만과, 이수에 대한 무관심이나, 선입관에 의한 판단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하느님 따르는 길에 나선 신자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겸손하고 성실한 마음과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얼마 안 있어서 있을 수난 중에 제자들이 흔들릴 것을 염려하셔서, 깊은 인상과 함께 다가올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사건 후에 수난의 길을 가십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너무나 어려운 것입니다. 적당히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으나, 신자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사랑하시기 때문에 더 큰 시련을 주시는데, 이는 더 큰 행복에 우리를 불러 주시고, 거기 참여시키시려는 의미 때문입니다. 우리는 희망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희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름으로써만 이루어지기에, 고통스러워도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순절에 하느님께서 내게,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 한 주간,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 뜻대로 삶으로써, 우리 삶과 내가 변화되고, 우리의 가정․교회․사회가 변화되어 희망이 넘치는 한 주일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4              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가)  예수의 거룩한 변모

윤민구 신부



오늘은 사순 제 2주일입니다. 벌써 우리기 사순절을 맞은지도 열흘, 전 사순절 기간의 1/4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에 쫓기다보니까 그저 성당 올 때나 사순절이지 우리의 생활에서 사순절의 의미가 도외시되기가 쉽습니다. 더구나 많은 분들이 사순절의 의의를 너무 좁게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먼저 사순절의 의미를 밝혀보고 오늘 성서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 하면 즉시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고 또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한 고통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가볍다느니 우리는 더 고생을 해야 하느니 이야기합니다. 또한 실제로 단식재, 금육재를 지키고 술, 담배를 끊고 자선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행동은 사순절의 본래의 의미, 본뜻이 되지 못합니다. 단지 사순절의 목적을 위한 방법의 부산물일 뿐입니다. 그러면 사순절의 본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순절의 “사순”이란 말은 40일이란 뜻입니다.

성서에는 이러한 40일이 퍽 여러 번 나오는데, 그것들은 모두 중대한 사건을 앞에 놓고, 그것을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것들을 살펴 보면,

첫째로 노아시대 홍수를 들 수 있습니다. 그때 이 세상에 40일 동안 비가 내렸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여러분이 십계라는 영화에서 보셨겠지만,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일 동안 기도와 단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셋째로는 엘리아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호렙산으로 가기전에 40일 동안 단식을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넷째로는 지난주일 우리가 읽은 성서에 나오듯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고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다섯째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 역시 40일 동안 이 세상에서 활동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상으로 제가 다섯 가지로 열거했습니다만, 이 다섯 가지를 합쳐보면 몇 가지 결론이 나옵니다.



먼저 예수님의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은 사생활을 끝내고,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공생활을 준비하시느라 40일 동안 단식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을 준비시켰습니다. 사순절의 첫째 의미는 이렇게 준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또한 우리 자신들의 부활을 준비하고 더 나아가서는 부활의 증인 될 것을 준비하는 때인 것입니다.

그 다음 모세와 엘리아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40일 기도와 단식으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사순절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와 단식등 고행을 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제 셋째로 가장 중요한 노아시대의 홍수를 봅시다. 노아시대에 세상은 극도로 타락해서 죄악이 범람하고 정의와 도의는 땅에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하느님의 의노를 금치 못 하시고, 세상을 멸망시키시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 양심대로 사는 사람 딱 하나, 노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아에게는 미리 말씀하셔서 피신할 배를 준비케 하시고 세상에 40일 동안 비를 내리셨습니다.



이로써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죽고 말았습니다. 40일 홍수 이후에는 이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이 세상에 근본적인 변화가 왔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범람하던 죄악은 물과 함께 소멸되었고, 이 세상에는 노아와 함께 선만이, 의로움만이 남았습니다. 이것이 사순절의 가장 큰 뜻입니다. 이 세상에 죄악을 멸망시키고 진리만이, 정의만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순절의 의미입니다. 사순절 동안에 우리는 근본적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오늘의 성서 말씀들을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이 빛나고 사도들은 얼떨떨해서 쓸어졌는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이 들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농토도 많고, 목축도 많아 행복한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느님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라함에게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이대로 지내면 아무 걱정없이 편안히 지낼텐데, 일가 친척 버리고 고향도 버리고 어딘지도 모를 타향 땅으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 굶을지, 잘 먹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곳으로 가라니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용감히 결단을 내렸습니다. “가자. 하느님의 말씀이니까 그대로 따라 시행하자.”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떠나라! 이 결단이란 담배끊고, 술 끊고 하는 식의 결단이 아니라 그 보다도 훨씬 깊고 큰 생활 방식의변화를 촉구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노아시대 홍수후 세상에 변화가 왔듯이 말씀입니다.



각자에게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떠나란 말씀은 같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나는 현재 상태가 만족하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현재상태로 충분하기 때문에, 현재 상태에서 떠날 필요가 없다.” 고 이야기할 분은 없을 줄 압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예수님의 제자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끊임없이 회개와 참회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생활방식을 어떻게 고쳐야 할 것인가?

이것만 말씀드리고 오늘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현시점에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생활을 고쳐야 할 것인가를 살피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는 지금의 생활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으나 우선, 저는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도 세계에서 매초 25명씩 죽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병들어 죽거나, 늙어죽거나, 교통사고로 죽는 수가 아니고, 굶어 죽어 가는 숫자입니다. 1초에 25명씩 굶어 죽어갑니다. 선진국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는 고기 덩어리를 반만이라도 이 굶어 죽는 이들에게 던져 준다면, 아마 이들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사는 집 개만큼도 못 얻어먹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 인간은 모두 한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아무도 이 세상을 자기 힘만으로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이기주의자가 아닌가? 나만을 위해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사람이 줄을 섰거나, 말거나 새치기를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주머니에서 봉투를 건내 주고, 받지는 않는가?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나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이런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우리 한국인의 가장 큰 병폐입니다.



우리 모두 이번 사순절을 기해 이런 그릇된 생활 방식을 떠나서 우리 모두가 형제임을 깨닫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 주는 그러한 생활방식으로 완전히 바꿉시다. 마치 노아시대 40일 홍수후에 이 세상의 온갖 죄악이 없어졌듯이 우리 사회에서 이기주의, 개인주의를 없애자는 말입니다. 이것이 담배끊고, 술 끊고, 다방에 안 가는 것보다 몇 배가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겪은 것과 같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 용감히 현재의 우리의 약점에서 떠납시다. 다시 한번 아브라함에게 또한 우리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아~멘.











5         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가)  고난을 이겨내는 체험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창세 12,1~4a (하느님 백성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소명)

제2독서 Ⅱ디모 1,8b~10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빛나게 해주십니다)

복 음 마태 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다)



우리가 한 세상 걸어가노라면 소중한 체험을 도처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당신의 사랑이며 또한 고달픈 길을 은혜로써 걸어갈 수 있는 큰 축 복이 됩니다.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많은 경우 우리는 그 값진 것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듣고도 듣지 못하며 보고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여정이 다 비슷합니다. 누구는 좀 부유하게 살면서 편하게 걸어가고 있고 누구는 또 좀 가난하게 살면서 외롭게 걸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그 길이 실제로는 모두 비슷합니다. 부자에게도 고난이 있을 수 있고 가난한 길에도 눈부신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눈을 어디에 뜨고 귀를 어디에 열고 있느냐가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 그의 모습이 환하게 빛나면서 제자들을 놀라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목소리가 구름 속에서 들려 왔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 자 신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아주 소중한 체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독서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축복이 나옵니다. 거기서 하느님은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큰사랑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생전에 얻은 땅은 자기 마누라 무덤자리 조금뿐이었으며 또 자손 역시 아들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느님의 축복과 약속은 무엇이냐. 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후손을 약속해 주셨는데 그 후손을 아브라함은 보질 못합니다. 또 넓은 땅을 약속해 주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땅도 얻질 못합니다. 그러면 그 축복과 약속의 의미는 무엇이냐. 그것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모든 축복이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언하셨는데 하느님 은 그 아들을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랑하신다고 하시고 는 곧장 죽음의 길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는 말씀의 뜻 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어찌보면 아주 고달픕니다. 너무 외롭고 또 눈물납니다. 차라리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세속에서 더 떵떵거리며 내멋대로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간섭 안 받고 눈치 안 보며 신간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뭔 지,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뭔지 눈에서 피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눈물이 없다면 그 가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축복은, 고난과 슬픔이 없다면 그 의미가 상실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선 우리로 하여금 그 역경을 이겨나가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좋은 체험을 마련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변모의 사 건도 그런 것이고 또한 아브라함이 체험한 내용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가정에 젊은 어머니가 갑자기 병을 얻어 일찍 죽게 되었는데 큰딸이 겨우 열 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딸에게 그랬습니다. “너는 나이가 열 살이라도 이제 이 집에선 네가 어머니 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없어도 네가 동생들을 잘 돌보고 키워야 한다.\” 그때 그 딸 밑으로 동생이 셋이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큰딸은 어머니의 말씀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열 살밖에 안된 딸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맡기신 그 자체가 딸에게는 너무도 감격스런 소명이었으며 그리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에너지였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 내 마 음에 드는 딸이다.\”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 딸에게 늘 들려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큰딸은 정말 자기 동생들을 잘 키웠으며 셋 다 대학까지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결국은 성공해서 백악관의 비서관으로 들어갔습니다. 벌써 오래 전의 얘기지만 그녀의 전기를 읽었을 때 그 것은 참으로 큰 감동이었습니다. 사랑은 고달픕니다. 그러나 사랑을 믿는 자들에게는 절대로 고달프지 않습니다.



우리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라는 목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듣는 사람하고 못 듣는 사람하고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납니다. 우리가 귀만 열면 그분의 목소리 는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6       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가)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다

변희선 신부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강원도 홍천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집에 내려가 어머니와 함께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장롱 속에서 오래된 아버지의 흘로 사진과 면바지를 보았다. 사진은 30대 초반의 미남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세련된 양복과 구두를 신고 자신감 있게 활짝 웃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어머니의 설명에 의하면, 아버지의 면바지는 일정말기에 최고의 멋쟁이들이 입었던 옷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시고, 급기야는 3년 동안이나 누워서 지내셨다. 나는 병들어 초라한 아버지를 지켜보면서「그 옛날의 멋쟁이의 모습은 어디 갔으며, 아버지의 참 모습을 무엇일까?」하고 상념에 빠졌다. 더욱이 임종하신 아버지의 시신을 입관하는 장면에서, 사제인 나로서도 허무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약 3년간이나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분의 여러 모습들을 보았을 것이다. 성서를 보면,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의 기적들을 행하셨고, 성전에서는 잡상인들을 내치셨으며, 죄인들과 음식과 술을 드셨고, 창녀가 당신의 발을 눈물로 씻도록 하셨고, 눈물을 흘리셨으며, 재판을 받으셨고, 온갖 모욕과 매를 맞으신 후에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것들을 경험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고난 한 가운데에서 뛰어드셔서 인간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당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드러내셨다. 그리고 당신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통하여 가장 하느님다움이 무엇인지도 보여주셨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도 자기중심적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을 갖고있다.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은 인간의 속 모습보다는 겉모습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남녀의 성차별, 나이의 차이, 피부색, 직업, 지위의 높낮이, 성직자 평신도의 구분, 외모 등등에 따라서 사람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80년대초에 한국에 오셔서 서강대학교를 잠시 방문하셨을 때의 일이다. 나도 수녀님이 과연 어떤 분일까 궁금하기도 하여 운동장에 달려갔었다.

수녀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얼굴에 주름이 많으시고, 체격은 아주 왜소하신 수도자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학생들에게 에워싸인 채, 담담한 미소로 겸손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시던 데레사 수녀님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 그 자체였다. 마더데레사 수녀님을 통하여 나는 분명히 어떤 빛과 인간의 참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참 모습을 보았다. 『얼굴은 해와 같이 빛

나고 옷은 눈부셨다』(마태오 17장 2절). 이것은 제자들이 이제까지 보아왔던 예수님

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당신의 수난이 가까운 시점에서 당신의 진면목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을까? 여러 가지의 뜻이 있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사순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순절은 우리들의 잘못된 습관들에서 벗어나는 때이다. 특별히 사람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고 겉모습에만 집착하여 판단하는 우리네의 악습에서 벗어나 거듭나야하는 때이다.

그것은 인간의 참 모습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깨달을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나는 사순절 동안에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분의 모습을 새롭게 정립하련다. 젊은 시절의 멋쟁이 모습이나, 병드셨을 때의 모습이나, 시신이 되어 관속에 놓인 모습이나, 단지 그분의 겉모습일 뿐, 아버지의 참 모습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거듭나는 만큼 새롭게 비추어질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통하여 하느님의 빛을 보여주십시오」











7               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가) 나의 뒷모습은?

김현준 신부



오늘 우리에게, 집 세 채도 괜찮다고 허락된다면 어디일까? 하나는 고향에, 또 하나는 서울에, 그리고 또 하나는 제주도나 설악산이 있는 속초가 아닐까? 속초에 살려면 2월의 폭설과 3월의 바람을 조심해야 하지만, 오늘 베드로가 “괜찮으시다면 제가\”(마태 17,4)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과 같이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곳은 타볼산이다,



베드로는 산이 좋아서이기보다 예수님이 너무 멋져 보이시어, 같이 살고 십다고 고백한다. 너무 멋지신 예수님의 모습은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시게\” 변하신 모습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파라오로부터 야훼 하느님을 향하여, 억압의 이집트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을 탈출시킨 모세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한 엘리야와 이야기하고 계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로, 그 신원이 밝히 드러났다,



회개와 속죄로 신앙생활을 쇄신하며 희생과 극기를 실천하는 사순절에 난 데 없이 초막과 빛나는 얼굴은 왜 나올까? 모세와 엘리야는 왜 나타나고, 하늘의 소리는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그 정확한 답을 오늘의 미사 감사송에서 듣는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엿새 전에 미리 알러주시고, 이제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 영광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으니,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게 됨을 증명해 주셨나이다\”라고 노래한다. –



한알의 밀알이 썩어

 예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사순절의 의미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영광의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수난의 의미를 알아듣도록 해준다. 무엇보다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해주려는 교육적인 의도를 담고, 또한 제자들도 곧 당하게 될 수난에 잘 참여하게 하기 위하여 미래에 받게 될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거룩한 변화‘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 재현하는 미사 성제 안에서도 볼 수 있다, 미사 성제 안에서 예수는 한알의 밀알 모습으로. 땅에 떨어진다. 땅에 떨어진 밀알은 썩어 열매 더부룩하게 달린 밀 이삭으로 변모된다. 이 밀 이삭은 또다시 그 형태를 달리하는 밀가루로, 밀가루는 빵으로 변모되어 우리 손으로 제단에 올려진다. 이 빵은 사제의 손과 기도를 통하여 ’거룩한 몸(聖體)\’으로 변화된다.



성체는 우리의 양식으로 또 우리가 받아 모심으로 ‘우리 몸\’으로 변모한다.

그렇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아야 될 것도 있어야하지만, 바람직한 모습으로 변하기도 해야 한다, 오늘 복음 안에서 만나는 ‘거룩한 변모\’를, 매 미사 안에서도 체험하는 우리 또한 변모되어야 한다. 한알의 밀알에서부터 거룩한 빵으로 변모되어 내게 오신 예수님 모습에, 내 생활과 얼굴을 비추어 보며, 그에 맞갖은 나의 변모를 이루어야 한다, “괜찮으시다면\” 나의 가장 아까운 그 무엇까지도 나누고 희생할 결심을 해야한다. 



내 방에는 루오가 75세 때 그린 ‘거룩한 얼굴\’이 박혀 있는 상본이 있다. 나의 서품날짜와 기념 성서 구절이 뒤에 박혀있는 사제서품 기념상본이다. 루오의 이 ’거룩한 얼굴\’은 나의 사제생활과 얼굴이 어떻게 변모하여 왔는지를 묻고 있다. 앞모습뿐 아니라 뒷모습까지도 거룩한지 묻고 있다. 반성의 기도시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남에 대해 뒷말을 하지 않았는지? 자존심으로 모이고 열등감으로 뒤틀리지는 않았는지?



예수와 유다의 얼굴

“악마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제일 고심했던 인물은, 예수와 유다의 얼굴이었다. 다빈치는 성당의 청년 성가대원인 베드로 반디네루를 예수님의 모멜로 삼았다. 유다의 얼굴을 찾기는 더욱 어려웠다.

  어느 날 로마 거리에서 그 얼굴을 찾았다. 화실에 데려와 살펴보니 전에 알던 사람같았기에 이름을 물었다. “당신은 전에 나를 모텔로 하여 그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바로 베드로 반디네루 입니다.\”



예수님 얼굴이 그동안의 교만과 방탕으로 유다 같은 얼굴로 변한 것이다. 괜찮으시다면 이 사순절에 우리 모두 거울 옆에 예수님 얼굴을 붙여보자. 그리고 거울을 불 때마다 예수님 얼굴에 내 모습도 비추어 보자. 뒷모습까지도 거룩하고 아름다운지 물어보자. 











8           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가)  한잔 더 하면서 머물지 뭐

오용환 신부



“…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신부님, 나가서 간단하게 한잔…” “안되는데…”

그러면서도 몸은 어느새 사람들을 따라 일어서고 있는 나의 모습. 본당에서 여러 회합에 참여하다 보면 마지막에 흔히 있는 일이다. 생각은 하느님 말씀에 사로잡혀 생활하기를 바라지만 많은 경우에 나를 붙잡는 것은 마음속에서 울려오는 먼 하느님의 소리이기보다는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들리는 소리일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그러니 딱 한잔만…’이라는 핑계로 그들과 어울리게 된다. 하지만 막상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하다 보면 ‘한잔 더 하면서 머물지’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하고, 결국 나를 주저앉히는 이 생각과 “초막 셋을 지어 여기서 지내자”는 베드로의 요청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게 된다.



교회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묵상할 것을 권고하는 한 해의 9분의 1 사순시기. 굳이 사순시기가 아니더라도 오늘의 복음은 신앙인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다. 예수님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바라보지 않고 일부분만을 떼어 바라보고 마음대로 판단하여 그 중 편안한 곳에만 머물려고 하는 것. 그것은 가족과 고향을 떠나 예수님과 거리에서의 피곤한 삶을 함께하다가 지친 베드로의 속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느새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하고 안주하며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얼핏 드러난 영광은 지금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는 데는 더없이 좋은 마취제이며, 일상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것보다 편하고 좋은 것이 마음에 먼저 와 닿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고난과 영광, 과정과 결과가 결코 둘이 아님을 가르쳐주신다. 성실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며 하느님 아닌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않고 허허로이 떠나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고난은 영광의 과정으로서 또 영광은 고난의 결과로서 서로가 각각 서로의 뗄 수 없는 작은 조각이라는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고난 가운데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만큼 편안한 상황에서도 언제든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기꺼이 떠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언제 어느 자리에 있든지 베드로와 같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루가 9,33) 함께 지내자고 하는 실수는 하지 않을 테고 그만큼 스스로와 이웃, 하느님에게 편안한 사람이 될 텐데…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을 “떠나라. 그럴 때에만 너의 이름은 세상에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라고 이해한다면 오해일까?











9             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가)  십자가 없는 예수

최인호 베드로/작가



성서에 보면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의 입장으로 보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렸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신 주님의 말씀은 정말 뜻밖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극단적인 표현을 본 제자들은, 이후 주님께서 두 번이나 더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셔도 다만 슬퍼하거나(마태 17,23) 깨닫지 못해 묻기조차 두려워했을 뿐(마르 9,32)이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준엄하게 꾸짖으셨던 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마태 16,23) 즉 십자가 없는 주님의 영광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난에 대해 첫번째 예고를 하신 지 엿새 후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십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눈부시게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얼마 전 수난에 대한 첫번째 예고를 하신 것처럼 이번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영광의 모습을 예고하십니다. 수난에 대해서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던 베드로가 이번에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계시는 주님(루가 9,32)께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주님, 언제까지나 여기서 함께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여기에 초막집을 지어드릴 테니 그런 불길한 말씀 같은 것은 집어치우시고 천년만년 함께 사시지요.” 그러나 베드로의 이 말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한 말”(루가 9,33)에 지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이 이루려 하시는 일, 즉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영광은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예수’를 따르고 ‘십자가 없는 영광의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했던 어리석은 제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베드로도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이후 변모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강림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우리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영광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그분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으므로 하늘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예언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느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한 것입니다”(2베드 1,16-21).











10            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가)  본때를 보인 사건



중국에는 여러가지 무술이 전해지고 있는데, 각 무술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사부로서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사부가 되기 위해서는 제자들 앞에서 본때를 보여야 한다, 어떤 무술 사부가 10여년간 그의 실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제자들은 약간은 실망하고 과연 우리 사부가 능력이 있는 분인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점차 의구심이 강해지면 제자들 중 일부는 다른 스승을 찾아 나설 것이다. 이 지경이 되면 사부는 진짜 본때를 보여야 한다. 다시는 제자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강력한 힘과 능력을 보여줘야한다. 예를 들면 제자들이 당해낼 수 없었던 적을 일격에 무력화시킨다든가, 혹은 제자들 전체와의 한판 대결을 통해 본때를 보여야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부이신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예수께서 전도여행을 떠나실 때도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께서 “나는 반드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리라\”는 수난 예고를 하셨다.(마태 16,21-28 참조)

이 말을 들은 베드로가 나서서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하고 말씀드렸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라는 표현일 것이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되게 야단치시면서 자신을 따르는 일이 무엇인지 가르치신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참으로 뜻밖의 말씀으로 들렸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멋진 스승을 두었다고 좋아했던 제자들이다. 왜냐하면 사부께서 기적도 행하시고 병도 고치셨기 때문이다. 사부의 기막힌 능력에 반하여 가족도 버리고, 직업도, 고향과 친구도 버린 제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찬물을 끼얹는 사부님의 말씀에 정신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제자들은 슬펐다. 사부님께서 처참히 돌아가셔야 하고, 자신들 역시 십자가를 져야 하다니, 그렇다면 자신들의 희망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자신들이 선택한 사부가 참 메시아인가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본때를 보이고자 하셨다. 제자들의 선택이 않았음을 인식시켜 주시려고,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고자 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중 대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셨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땀도 나고 숨도 가빠오지만 그래도 산은 구약시대부터 하느님과 더 가까운 감을 느끼게 하는 거룩한 장소다.



정상에 오르시자 예수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하였다.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고 했다. 옷은 빛처럼 눈부셨다고 했다. 그리고 죽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서 얼이 빠진 사람처럼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변모된 모습을 보자 너무 황홀하여 거기에 초막을 짓고 세분을 모시겠다고까지 말했다.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황홀했던가 보다.



복음의 메시지

혹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장차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뵙게 될 그 모습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변모는 예수께서 단지 지상적 존재만이 아니라 천상적 존재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또한 부활할 육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예시한다.(I고린15,43: 2고린 5,4 참조)



우리에겐 때로 예수님께 대한 불신의 마음이 솟아나기도 하지만, 그분은 영원하신 하느님이시요 천국에서 마주 뵈올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산에 오르는 것은 땀도 나고 다리도 아프다. 주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는 그냥은 안되는가 보다.



우리도 주님을 뵙기 위해서는 영적인 산에 올라야 한다. 계속해서 정상을 향해 올라야 한다.땀도 나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설악산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울산바위를 오르겠다고 나선다. 처음 얼마동안은 힘차게 내딛는다. 발걸음도 가볍게 휘파람도 불면서 올라가지만 흔들바위 근처에 다다르면 많은 사람들이 포기 각서를 낸다. 땀도 나고, 다리도 아프고, 숨도 차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또 다른 이유를 대기도 한다. 올라가 봤자 무슨 수가 나는 것도 아닌데, 먹고 즐기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르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라는 시 구절이 있다. 우리는 제자들이 황홀해하던 바로 그분을 뵙기 위해서, 오늘도 비탈길을 걸어야 한다. 쉬지 않고‥‥











11         사순절 제2주일   마태 17,1-9 (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감\”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사순절을 피정기간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이 차지하시고 계신 자리가 어디인지를 묵상했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이는 세상에서 오는 유혹 때문입니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욕을 하느님 대신 섬기고, 이들을 혼자 독점 향유코자 하는 것, 더 많이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잘못의 근원임을 아셨을 깃입니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으로 주신 것이기에, 잘 선용하는 것은 바로 남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한 주일 여러분의 삶의 한가운데에 하느님께서 자리 잡으셨으면, 이제 사순절 두번째 주간의 묵상 주제를 드리겠습니다. 이 주간에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삶\”이 주제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 1독서는 아브람에게 이르시는 야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우르라」고 부르는 곳에 살았는데, 이곳은 여러 우상신을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있는 사원에는 어린이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바로 오늘 독서에서 읽은 앞쪽에는, 아브람 아버지 데라가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길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르를 떠나는 이유는 설명이 없습니다.



옛 히브레아 기록을 보면, 아브람이 불에 태워져 우상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하단이라는 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곳에도 같은 풍습이 있었답니다. 여기서 아브람은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람은 하느님의 분부대로 길을 떠났습니다. 옛 세상에서 새 세상으로의 탈출이며 출발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새 삶이, 그러나 고생스럽고, 쉽지 않을 삶이 시작됨을 상징합니다.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이 세상의 온갖 것을 다 떨쳐버리고, 산꼭대기에서 예수님은 변모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는 장면을 제자들이 목도합니다. 모세는 누구입니까? 그는 하느님을 대면하였던 이였고, 이집트의 압제와 학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이였으며, 율법을 상징하는 구약의 큰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누구였습니까? 그는 우상숭배에 빠진 왕과 이스라엘을 구한 예언자 중 예언자였으며, 불 마차를 타고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위대한 인물로, 구약의 예언자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와 같은 새로운 광경에 황홀하여 그곳에 계속 머물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곳을 떠나 산밑으로 제자들과 함께 내려갑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떤 삶을 산 분들입니까? 아브람(후에 아브라함), 모세, 엘리아, 예수님, 이 분들은 모두 자신들이 있던 자리를 떠나 새로운 삶의 장소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된 분들입니다. 도망일수도 있고, 구출일수도 있고 ,해방일 수도 있고, 은신일 수도 있고, 그 형태는 다르나 모두가 새로운 곳으로 가셨던 분들입니다. 새로운 곳의 출발이 항상 좋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궁극에는 좋은 결과가 나타나나, 그 과정에는 고생과 고충이 수반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에 다다를 때까지, 40여년을 광야를 헤메이며 고생한 것을 우리는 모두 압니다. 하느님과 같은 영광을 지니셨던 예수께서, 변모한 그 산에서 내려와 걸어가신 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길은 고난과 수난, 치욕과 수치의 길이였으며, 결국은 범법자로 재판받아 십자가에서 처형된, 인간으로서 가장 비천하

고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오늘 제 2독서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부르셨다는 뜻이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삶,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며, 새로운 삶이란 다름 아닌 고통이 수반되는 삶이란 뜻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고난으로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세상 일로 고난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일로 고난 받는 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매일 때일 새로운 출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무런 변화 없이 주저앉아서, 습관적으로, 똑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 지루하고 심심해서 세상의 잔재미를 좇아서 사는 것은 아닙니까? 돈 벌고, 큰집 장만하고, 자가용 사고, 휴가 때는 놀러 다니고, 그렁저렁 살면서, 주일날 성당에 나와 40분 동안 하느님 생각하는 척 하다가, 도로 평상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요? 장사나 사업이 잘 안되면, 가족 중에 누가 아프기나 하면, 애들 대학 입시 때나 되면, 제대 앞에 쪼르르 달려가 맡겨 놓았던 복이나 재수를 되돌려 달라는 식으로, 하느님께 그저 졸르기나 하는 삶은 아닙니까? 재물, 권력, 명예를 지켜주는 파수꾼 신으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느님의 일로,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하느님 때문에, 진정 뜨거운 고난과 고통을 받고있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삶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갈등과 고뇌와 고통과 수난의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에는 이렇게 뜨겁게 고통받는 그리스도와 함께 아픔을 겪어야 하는 기간입니다.



지금까지의 안락과 편안과 자족과 위안과 만족한 삶으로 부터 새로운 삶인 고뇌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엄하게 함으로써, 단식과 금육, 호화스러움과 포만함을 버림으로써, 절제된 생활을 합시다. 그리스도처럼 오늘날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불쌍하니까 동정으로 도와주는 값싼 자기위안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까지도 내어놓고 나눌 때, 진정한 사랑이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이 주간에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묵상하시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 당신의 길을 가게 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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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사순 제 2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사순 제 2주일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였다

    제 1독서: 창세 12, 1-4a 


    제 2독서: 2디모 1,8b-10


    복음: 마태 17,1-9

    오늘, 사순 제 2주일에는 세 개의 전례주기(A해.  B해. C해)가 다같이 각기 다른 세 개의 공관복음의 내용에 따라 예수의 변모에 관한 장면을 전해 준다. 어째서 그 당시 베드로가 느꼈던 것과 같은 억제할 수 없을 만큼 들뜬 기쁨의 감정이 아니라 뉘우침과 회개의 분위기로 이끌어가고 있는 이 엄숙하고도 깊은 사념의 시기에 들어서자마자 이렇듯 메시아적인 찬란한 빛과 환희로 가득 찬 장면이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지극히 아름다운 오늘의 감사송이 해주고 있다고 생각 된다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시고,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으니,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게 됨을 증명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오늘 우리에게 예수의 변모에 관한 이야기를 제시하는 데는 ‘교육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 즉 우리가 사순절의 의미를 부활축일에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게 될 부활의 ‘영광’이라는 마지막 종착역의 관점에서 알아듣도록 하고자 한다. 이것은 분명, 엄숙하고도 절제 있는 생활을 회피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활의 ‘영광’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도록 그러한 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에 의한 예수의 변모에 관한 이야기

    마태오 복음사가는 비록 마르코복음(9,2-10)에 근거를 두고 있긴 하지만 그 전통적인 사료들을 아주 자유로운 형태로 재편집하면서 그 가운데서 특히 ‘묵시문학적’ 특징들을 강조하며 또한 다니엘에서 적지 않은 대목을 이끌어 들이고 있다(다니 10,1-11 등 참조) : 예를 들어, 예수의 얼굴이 해오 같이 빛나고 그의 옷이 빛과 같이 눈부시다든가, 제자들이 두려워서 땅에 엎드린다든가, 예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두려워말고 일어나라고 하시는 등등의 장면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신비와 ‘초월성’의 의미를 자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인간적 체험과는 다른 세계, 다른 실체에 속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를 통하여 그 나라를 이루고 있으며 그 나라의 특징을 말해주는 모든 ‘표징’들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충만하게 드러나고 있다.

     모세, 엘리야와 같은 과거의 뛰어난 인물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나라의 구성원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느님의 나라는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성을 발견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참여와 현존을 통해 이루어지며 풍요해지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나의 실체임을 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하느님 나라의 건설은 그리스도 혼자의 힘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그 자체적 설명만으로는 넉넉지가 못하다. 그리하여 이 묵시문학적인 장면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과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밝히 알려주기 위해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려온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태 17,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즉시 세 제자들 즉 예수께서 이 특별한 체험을 하도록 선택하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여전히 일상적인 예수를 대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해 그 신비의 의미는 중단되고 만다 :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은 너무도 두려워서 땅에 엎으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모두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을 때는 예수밖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6-8절).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마술이나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더구나 예수 자신이 이러한 사실을 당신의 부활 전에는 퍼뜨리지 말라고 하신다 :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하고 단단히 당부하셨다”(9절).

    부활의 영광의‘예표’로서의 예수의 변모

     어째서 일까? 만약 그 금령이 적어도 성서 본문의 내용 그대로, 남아 있는 사도들까지도 겨냥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면 그 금령의 동기는 전혀 분명치가 않다. 아마도 그 동기를 우리는 한편으로는 예수의 변모가 ‘장차 올’ 세상의 결정적 영광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부활의 신비의 예표와 같다는 사실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영광스럽고 환희에 찬 짧은 순간의 신비 -베드로가 무한정 연장시키고자 했던 :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4절) – 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장차 하게 될 예수의 부활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 신비를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또한 ‘지상의’ 예수와 ‘영광의 주님’ 사이의 ‘영속성’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부활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분명 예수의 변모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졌던 그 두 가지 체험을 강하게 연결시켜주는 고리역할을 한다. 즉 변모하신 예수는 제자들의 열정적인 상상력이나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창조된 어떤 환상적인 가공 인물이 아니라 이미 앞서 소유하고 있던 신적 ‘영광’을 신비스러운 변모의 사건이 보여주고 있듯이 지금 이 순간 찬란히 드러내 보여주는 한 ‘구체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까닭에 많은 학자들은 예수의 변모를 ‘선행적’ 빠스카 체험이라고 한다.

     이 모든 내용은 우리가 지금 대하고 있는 성서 대목이 놓여 있는 정확한 위치를 생각해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당하게 될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와 그 즉시 이어지는 베드로의 항변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통해 당신을 따르라는 권고 :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 (마태 16,21-28) 뒤에 곧바로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예수께서는 수난 뒤에 찾아올 영광된 미래가 있고 또 그분 안에서는 야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사명과 이미 다니엘이 예언한(다니 7, 13-14) ‘사람의 아들’ 로서 갖게 될 영광스러운 종말의 심판자로서의 사명이 서로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오직 빠스카의 체험을 통해서만이 그리스도의 단일한 인격과 단일적 체험이 지니고 있는 그 대립적 양면성을 함께 결합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사실상 적어도 존재론적 차원에서 2 천년 뒤의 그리스도교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성부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사 42, 1 ; 마태 3, 17참조)이라고 온 세상에 장엄하게 선포한 그 소리에 덧붙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절)고 한다.

     이 말은 하느님의 마지막 결정적인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러 올 제 2의 모세로서 기대되는 미래의 예언자의 모습을 상기 시킨다 :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너희를 위하여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신명 18, 15 참조).

     여기서 ‘듣는다’는 그 말은 문맥 전체상으로 볼 때 보다 더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즉 그것은 신앙의 빛에 의거하여 그리스도를 겸손과 영광 그리고 죽기까지 당한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함께 지니고 계시는 분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외적으로 분명 모순되지만 생명적인 가치와 체험들이 깊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능력을 뜻한다. 그래서 ‘듣는다’라는 말은 ‘다시 체험하다’, ‘다시 살라’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긴장과 찬란한 조화의 요소를 도시에 갖추고 있는 사순절의 전체적 의미가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네 고향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라함의 소명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오늘의 제 1독서 내용도 결국은 똑같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12,1-3).

     여기서도 야훼 하느님의 부르심을 직접 처음으로 받고 있는 아브라함이 무한히 뛰어 넘어야 할 긴장과 고통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감쌀 수 있는 영광과 ‘축복’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새로운 고향 새로운 땅을 차지하고 셀 수 없는 하늘의 별들보다도 무수히 많은(창세 15, 5참조)무리의 선조가 되기 위해 ‘자신’의 고향과 땅과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처럼 ‘번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가 모든 것을 – 자기의 혈육까지도 – ‘근본적인 끊어버림’은 번창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에 대한 끊어 버림이 아니라 오히려, 나약한 인간적 지성과 예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와 전능하심에 의해 마련된 새로운 삶의 설계를 용감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인간의 활력을 마비시키거나 무기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활력을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무한한 빛과 무한한 힘에 개방시켜 강화시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을 줄’알았다. 그래서 그는 배수진을 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찾아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났다. 그리하여 새로운 역사의 주기가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를 거쳐 우리에게까지 이르고 있고 또한 마지막 종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 그 새로운 역사의 주기는 참된 구원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으며 이 세상을 악행과 증오가 가득한 편협한 ‘흙덩이’(Dante, 「신곡」; 천국편 ⅩⅩⅡ, 151)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찬란한 ‘서막’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그분의 뜻에 순응하는 도구가 되는 모든 사람들의 역사적 주기이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정의가 깃들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다” (2베드 3,13). 신앙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분의 사랑과 정의의 계획에  보다 더 적합한 현실과 상황을 이루어 나가는 놀라운 일을 그분과 더불어 시작한다. 이런 까닭에 오직 신앙만이 미래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유토피아’라고 생각되는 것이 이 지상 위에 보다는 사람들이 마음속에 먼저 자리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통하여 생명을

    환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러한 쇄신과 변화의 힘을 충실히 또한 용기있게 선포되는 복음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그 복음 속에는 ‘우리의 공로’로써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루어주실 수 있는 ‘구원’에 대한 선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로는 아마도 전교사명을 수행하던 중에 만난 수 많은 어려움 때문에 두려움에 싸여 있었던 제자 디모테오에게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하느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나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은총은 천지창조 이전에 벌써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없애 버리시고 복음을 통해서 불멸의 생명을 환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2디모 1,8-10)

     그 옛날 타볼산에서 “그리스도의 얼굴”(2고린 4,6참조)위에서 찬란히 빛나던 그 빛이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에게 ‘불멸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그분의 ‘복음을 통하여’ 빛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든 크리스찬은 항상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끊임없이 ‘변모’되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순 제 3주일


    제 1독서 : 출애 17,3-7

    제 2독서 : 로마 5, 1-2. 5-8

    복 음 : 요한4, 5-42

     이 주일의 전례를 지배하고 있는 물에 관한 주제는 여러 가지 뜻 과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의 의도는 사순절의 ‘신비’가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인 내용을 보다 더 강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에제키엘서의 유명한 한 대목을 노래하고 있는 오늘의 입당송에서는 물이 성령과 더불어서 인간들을 그들의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는 ‘메시아적’ 산물로서 나타나고 있다 : “내 너희 가운데서 섬김을 받게 될 때… 내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리리니, 너희는 온갖 더러움에서 깨끗하여 지고 나는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리라”(에제 36,23. 25-26).

     제 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모세에게 ‘불평을 했을 때’ 바위에서 솟아난 물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출애 17,3-7).

     여기서 물은 생명의 본질적 요소로서 간주되고 있다. : 광야는 모든 생명력의 원천이 고갈되어버린 장소로서 물과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

     물이 없이는 죽고 만다! “어째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출애 17,3). 절망 속에 있었지만 그 백성들은 죽음의 운명에 항거하며 하느님께 기적을 요구한다. : 마실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 남기를 바란다는 표지이다! 이 점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엮어내는 무수한 불충실의 비극적 역사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유일한 적극적 관점이다.

     그 다음,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는 놀라운 복음의 내용은 온통 물이라는 표지하에 전개 되며, 그 상징적 의미를 영적으로 무한히 발전시켜 그리스도와 하느님 자신이 이 지상을 풍성히 먹여 살리는 생명의 ‘원천’이시라는 사실에 이르고 있다 : 목마른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을 ‘목말라’하시며 당신을 받아주기를 요구하신다. 마치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것 처럼!


    예수께서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   

    사마리아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요한복음 고유의 대목들 가운데 하나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 이야기를 통해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론적’ 신비를 깊이 추구함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고유한 주제들 가운데 몇 가지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그 이야기는 실제적으로 볼 때 몇 개의 이야기체 형식의 구절들로 짜여 있는 두 개의 중요한 대화 (앞의 것은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이고 뒤의 것은 제자들과의 대화이다 : 4,7-26그리고 31-38)를 내포하고 있다. 이 두 개의 대화는 잘 알려져 있는 요한의 문학체계에 따라 전개 된다 : 예수의 정체는 점진적으로 밝혀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진짜 정체를 서둘러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침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인간의 결단이 이루어진다 :그 결단은 인간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며, 그의 생활 설계를 변경케 하고 그로 하여금 과거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하게끔 한다. 그것은 ‘회개’의 선물이며, 그 회개 때문에 하느님-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은 믿는 이들을 인도하시는 새로운 ‘영적인 분’으로 나타나시게 된다.

     아주 길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운 내용을 담고 있는 오늘 복음을 철저히 다 분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중 가장 근본적인 몇 가지 내용 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의 ‘목마름’의 신비를 보자 : 그 목마름은 육체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의 시카르라는 동네에 이르셨다…거기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먼 길에 지치신 예수께서는 그 우물가에 가 앉으셨다. 때는 이미 정오에 가까워 있었다. 마침 그때에 한 사마라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요한 4, 5-7).

     구약성서에서 보면 우물이나 샘터에 관한 이야기들이 성조들과(창세 24, 10-25 ; 26, 14-22 참조) 모세와(출애 2, 15-21참조) 그리고 출애굽 기간 동안의 선민들 자신 등의 여러 생활(출애 15, 22-27; 17, 1-7등 참조) 속에서 적지 않이 전개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물이 흔치 않았고 귀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우물가에’ 가 앉으신다는 것은 그 지나간 역사전체가 그분께로 흘러가 모아지고 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곧 보게 될 것처럼 ‘참다운’ 물은 결국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바로 그 순간 예수께서는 정말로 갈증을 느끼셨다 ; 때는 ‘정오에 가까웠고’, 예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방의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먼 길을 여행하시느라 지치셨다. 바로 그 순간 한 여인이 큰 물동이를 들고 물을 길으러 왔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예를 갖춰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7절).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유다인이 자기에게 마실 물을 청하였기 때문에 깜짝 놀란(9절) 그 여인은 바로 그 순간에  정말로 신선한 물이 필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두 사람의) 역할이 뒤바뀌고 있고 대화는 우의적 성격을 띄게 된다 :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10절). 그러나 그 여자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선물’을 아주 통속적이고 공리적인 어떤 것으로 돌려버리려고 한다 :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15절) ; 인간의 욕망은 항상 보잘것없는 것이어서 무한한 것을 자기 자신의 편협한 마음의 늪 속에가 가두어 두려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때 예수께서는 이미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그 여자를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 우선 그녀에게 무한한 은총의 문을 열어주시고 그다음에는 그녀에게 무한한 은총의 문을 열어주시고 그다음에는 그녀의 비참한 도덕적 생활의 심연을 열어 보여 주신다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 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14, 14. 17-18).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는 데는 항상 어떤 장애물 있다 : 그것은 그분의 선물이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니라 해맑은 ‘진리’와 ‘사랑’의 현존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음을 느끼는 악의 교묘한 저항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영원히 살게 할’(14절)샘솟는 물이라는 상징적 개념이 어째서 이 모든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나!

     사실, 그 샘솟는 물은 한 편으로 볼 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를 암시한다 :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 10). 또 다른 한 편으로 볼 때, 물은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는 순간에 우리 안에 풍성히 부어주실 성령 – 그리스도의 구원사업 자체를 완성시켜야 할 분으로서 – 의 ‘선물’도 암시한다 : “그 명절의 고비가 되는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는 일어서서 이렇게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 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그때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와 계시지 않으셨던 것이다”(요한 7, 37-39).

     성령의 선물로써 믿는 이들은 만약 우리의 마음이 편협하지만 않다면 이미 한없는 진리와 사랑의 완전한 ‘충만성’, ‘역동성’ 그리고 계속적인 성장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물의 상징적 의미에 의해 대화의 내용은 보다 더 깊어지지만 여전히 그리스도론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 그리스도는 갈증을 풀어주고 생명력을 부여하는 ‘물’이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도 기다리던 종말의 때의 예언자이신 – 과의 새로운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께 좀 더 궁국적인 사실을 보여 달라고 촉구하고 있는 그 여인은 자기 생활의 비밀스런 일들이 드러나게 되자 자신에 대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하느님께 드려야 할 참된 예배의 장소에 관한 토론을 시작 한다 :   “우리 조상은 저 산(Garizim)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 네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20절). 다른 문제들 말고도 이 문제는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이 대립되었던(9절 참조)여러 가지 이유들 중 하나였다. 예수께서는 그녀와의 대화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지점에서 지극히 엄숙하게 단언하신다 :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21-24절).

     주께 올바르게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장소’를 바꾸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훨씬 더 중요한 사실에 있다 ; 이제부터는 예배 자체가 내용상으로 또 의미상으로 바뀐다. 더 이상 하느님은 인간들이 가까이 가려고 희생과 기도로써 비위를 맞춰드려야 하는 그런 ‘멀리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 그분은 마치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당신 성령과 진리의 말씀을 주시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가까이’다가와 계시고 직접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이시다. 사실, ‘영적으로 참되게’라는 표현은 흔히 구약의 예배에 있었던 순수 물질적이고 외적인 예배에 대립되는 내적이고 영신적인 예배를 뜻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안에 거처사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신 ‘진리’의 빛에 비추어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예배를 뜻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새로운’예배가 바로 지금 즉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이 순간’에 시작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예배의 ‘새로운 의미’의 동기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된 동기는 바로 예수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사실, 오직 예수를 받아들일 때 그것이 곧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예배는 그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 아니 바로 그분 자신이 ‘새로운 예배’이시다.

     “이처럼 20절에서 그 여인에 의해 제시된 주제는 생략되지 않고 예수께서는 여전히 참된 예배의 자리, 참된 성전에 대해 대답해 주고 계시다 : 그러나 지금 우리의 성전은 예수이시며 이 순간부터는 이 성전이 그리짐(Garizim)산성과 예루살렘의 지성소를 대신한다”(I. De La Potterie, Gesu verita, Marietti, Torino 1973, p.47).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이시다”

    여기서 계시는 완결된다. 낯선 유다인이 말한 사실들의 내용 또는 계시를 사마리아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에 연관시키는 그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대답하신다 :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그러자 그녀는 기쁨과 놀라움에 차서 동네로 달려가 모든 사람들에게 알린다 :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들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 모여 들었다”(29-30). 이 전체 문맥에서는 요한 복음사가의 보편주의적 관심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 비록 예수께서 엄숙히 단언하시는 것처럼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는’(22절)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구원은 유다인들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 즉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을 다 포용한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의 신앙 고백은 이 같은 사실을 명백히 말해준다 : “우리는 당신의 말만 듣고 믿었지만 이제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42절).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자신들과 스승을 위해 양식을 구하러 동네에 갔다 돌아온 제자들과 예수의 보다 짤막한 대화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들도 거의 사마리아 여자처럼 예수의 신비는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다!

     예수께서는 음식을 좀 드시라는 제자들의 권유를 거절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32절) 그래서 그들은 어떤 다른 사람이 예수께서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다고 생각한다(33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 말씀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이해시키시려고 애쓰신다 :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온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내말을 잘 들어라.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 거두는 사람은 이미 삯을 받고 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알곡을 모아들인다. 그래서 심는 사람도 거두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이다. 과연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거둔다는 속담이 맞다. 남들이 수고하여 지은 곡식을 거두라고 나는 너희를 보냈다. 수고는 다른 사람들이 하였지만 그 수고의 열매는 너희가 거두는 것이다”(24-38절).

     물이라는 상징적 개념으로부터 ‘양식’이라는 상징적 개념에 이르기 까지 두 가지가 다 생명적 요소들이다. 신앙의 세계는 우리들의 매일매일의 체험 속에서 그 접붙일 자리를 발견한다 : 우리들의 체험들은 결코 그 자체 안에 충분한 설명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내용은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성부의 ‘뜻’ 그리고 그에게 완성하도록 맡기신 성부의 ‘일’(34절)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 ‘일’이란 어떠한 것일까?

     문맥 전체로 볼 때 그것은 예수께서 당신 사도들을 파견하시고 있고 또 사마리아인들 가운데서 이루어진 그 결과가 상징적 예표처럼 나타나고 있는 ‘전교사명’을 말한다 : “그러나 내 말을 잘 들어라.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35절).

     그러므로 때때로 분노나 절망같은 감정에 휩싸여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바로 거기에 구원에 대한 간절한 원의가 있을 수 있다. 좌절하거나 실망하고 있는 젊은이들, 착취당하고 소외당하고 있는 가난한 이들, 방치되거나 내팽개쳐진 병든이들, 자만심에 가득 차 무질서하고 방향감각을 잃은 생활을 하는 지식인들, 이미 자신들의 부와 포만감에 싫증이 나 있는 향락가들, 이 모든 불쌍한 군중의 ‘기다림’에 과연 교회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참으로,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과 진리에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외치는 소리에 우리 크리스찬들이 귀를 막고 있는 것일까?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히 교회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거나 절망 속에 빠져 있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구원에 대한 원의와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는 보다 나은 크리스찬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보다 훌륭한 ‘복음 선포자’가 되어야 한다! 그 둘은 결국 같은 일이다.

      






  2. user#0 님의 말: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1. 말씀읽기: 마태17,1-9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마르 9,2-10 ; 루카 9,28-36)

    2. 말씀연구

    보통 만화 영화의 주인공은 변신을 합니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나 특별한 때 변신을 하여 평화를 지킵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자신들의 본 모습을 감추고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확고한 힘을 주기 위해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가이사리아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고백했습니다. 변모에서는 하느님이신 아버지께서 세 사도들 앞에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선언하고 예수님께 순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낙담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들어 높이기 위하여 변모는 몹시 시기적절했습니다.


    가끔은 우리도 변신합니다. 화가 나면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마귀의 모습으로, 마음이 편해지면 그 누구보다도 순진한 양으로. 어떤 것이 진짜 내 모습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변신했을 때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는…


    1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탈출 24,16에 보면 야훼의 영광이 시나이 산 위에 머물러 있어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 야훼께서 그 구름 속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 위로 데리고 올라간 이들 가운데서 이름이 명기된 사람들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 이렇게 세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도 세 명 뿐입니다. 교회의 으뜸인 베드로, 열 두 사람 중 최초로 예수님을 위하여 피를 흘리게 될(44년) 야고보, 그리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요한. 이 세사도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게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여드레쯤 지나서(9,28)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첫 날과 마지막 날을 계산하면(빵의 기적, 수난 예고의 전후) 여드레가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계산하지 않으면 엿새가 됩니다.


     전통적으로 영광스러운 변모의 장소로 숭배된 갈릴래아의 다볼 산은 확실히 오늘날까지도 선뜻 하느님의 발현 사건, 즉 현세적 실 상황에서 하느님 세계의 현시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장엄한 자리입니다.

     어느 성경 학자는 이 산이 헤르몬산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산 높이는 2,793미터로 쉽게 오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산이라는 설도 있지만 다볼산이라는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다볼산은 높이가 562미터이며 나자렛 동남 지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드레론 평야에서 본다면 300미터 남짓한 산이라고 합니다. 현재에도 아라비아인이 “산”이라고 하면 이 산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 산은 반로마 형명당시(66-70년) 요새화되었다고 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스라엘이 가장 훌륭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세보다도 더 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리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결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 속죄양,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이러한 메시아를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변모는 사람의 아들에 의한 심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알려주셨던 그 영광을, 한 순간이나마 보여줌으로써 사도들의 마음에 신뢰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가이사리아에서 주신 계시를 보충하고 완성하고 또 예수님이 완전히 영적 메시아이심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묵시록에 나오는 비유에서 의인의 얼굴은 태양이나 달, 별, 번갯불에 비기고 있습니다. 또한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는 것을 어느 고사본에서는 “눈과 같이”(원문에는 “빛나고”로 되어 있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과 같이 라고 한 것은 팔레스티나의 한낮의 반사광선이 얼마나 흰가를 본 일이 없는 사람이 고쳐서 기록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예수님. 오늘 예수님의 변모는 기도 중에 일어납니다. 나 또한 기도를 한다면 변화될 것입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온화한 모습으로…, 지금 헐크의 모습이라면 다시 온화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겠습니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사도들은 잠시 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그들의 눈앞에는 엘리야와 모세, 그리고 너무도 눈부신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대표하고 있는 율법과 예언자, 곧 구약 시대가 예수님 옆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때 모세의 권위 이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메시아의 길을 개척하고 이것을 이스라엘에 알릴 역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나타남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이음, 또 율법과 예언이 그리스도께 종속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복음으로 구약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완성하고 옛 예언을 실현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대화의 내용은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제사.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사도들의 마음에서 십자가의 걸림을 없애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생 못 잊을 장면을 보게 된 사도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고 마침내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그렇게 죽게 될 것입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모세와 엘리야가 머물고 예수님께서 지금부터 자기 나라를 넓히리라는 상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좌우지간 베드로는 이 놀라운 광경에 너무 매료되어 이 빛나는 인물들에게 머물기를 청합니다. 그는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그는 이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행하고 싶어 했습니다.


     세 개의 초막은 초막절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메시아적이고 종말론적인 기대와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축제 주간은 구원의 시기를 미리 기뻐하는 때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과 다른 두 제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천상적 인물들을 위해서 초막을 짓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들은 그 초막 앞에서 노숙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예언하신(8,31)이후에 그가 보인 태도와 유사합니다. 그때 그는 그러한 과정과 목적을 단념하시도록 예수님께 간청하였고, 여기서는 그 빛나는 인물들이 머물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맛을 찾아서 헤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디 가니까 좋더라 하면 우르르 몰려가고, 저기 가니까 기도가 효험이 있더라 하면 그쪽으로 몰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가 주는 맛에만 중점을 두면 안 됩니다. 그 맛을 통해서 그분께서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그 기쁨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난과 죽음 앞에서 힘을 내라고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떤 맛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손과 발이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구약에서 구름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실 때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율법을 주셨을 때 구름이 시나이산을 뒤덮고 있었습니다(탈출24,15). 모세가 장막에 들어 갈 때 구름이 내려와 머물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지도자와 말씀을 하셨습니다(탈출33,9-11). 옛날 시나이산에서와 같이 다볼산에서 하느님께서는 구름을 통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으라고. 하느님께서는 직접 예수님께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소개하십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에도 세례자요한의 귀에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마르1,11).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지켜보십니다. 이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행복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 간에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수난예고를 하실 때 안 된다고 펄쩍 뛰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은 것만을 찾지 말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얼굴을 땅에 댄다는 것은 존경심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계시를 듣고 존경하고 두려워했습니다. 하긴 구름,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존엄하기 비길 데 없는 광경, 이것은 제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 것 같습니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가까이 오셔서 손으로 어루만지시는 행위. 이것은 친구와 같이 다정한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졌지만 예수님만은 변함없이 계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하느님만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엄청난 체험을 하게 된 사도들. 아무 말도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너무 기쁘거나, 너무 슬프거나, 너무 당황스러울 때, 우리는 아무 말을 못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은 마음 깊이 이것을 간직하고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메시아께서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을 아직 그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아하! 그 말씀이었는데 내가 못 알아들었구나!”하고 무릎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변모를 말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영광에 찬 변모를 말하면 수난의 괴로움을 믿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군중들에게 그릇된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군중들은 고통 받는 메시아를 받아들일 준비를 아직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부활 후에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입니다. 메시아의 고통과 죽음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 모든 상황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모습인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더욱 경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눈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하긴 말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아마존강에서 악어와 수달 모녀가 싸우는 장면이 방영되었습니다. 어미 수달은 악어와 맹렬하게 싸웠고, 급격히 힘이 빠진 악어는 결국 수달모녀에게 꼬리를 뜯겨 먹는 장면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니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그것을 본 친구가 하나 있어서 다른 친구들도 긍정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세상에는 믿기 어려운 것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또한 지금 예수님의 변모를 얘기 해 준다면 잘못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사도들의 믿음을 떠받쳐 주는 증거의 하나가 됩니다. 멀지 않아 사람의 손에 넘겨질 예수님을 보아야 할 제자들은 지금 아버지의 손에 계신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셨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시지만,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선언하고 계셨다는 것을 제자들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나도 가끔은 천사의 모습처럼, 때로는 헐크의 모습처럼 그렇게 변합니다. 어떤 때 그렇게 변합니까? 신앙인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어떻게 변화되어야 합니까?


    2.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여줄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받아들이지 않으니 침묵해야 할까요?


  3. user#0 님의 말:

     

    1. 김재덕 베드로

    1.1. 사순 제2주일(가해)


    제1독서: 창세 12,1-4a 

    제2독서: 2티모 1,8b-10 

    복음: 마태 17,1-9


    제1독서 해설

    [1절]: 아브라함은 떠나라는 명령을 주님께로부터 받는다. 그가 떠나야 하는 곳은 창세 2-11장에서 묘사된 인류의 불순종과 죄악의 상황을 암시하는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이다. 그리고 그가 가야 하는 곳은 주님께서 보여 주실 땅이다. 곧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왔던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2-3절]: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신다. 다섯 번에 걸쳐 하느님께서 내리실 복이 언급된다. 고대 근동인들에게는 가장 큰 복으로 여겨졌던 많은 후손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다. 이 구절은 창세 15장과 17장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후손의 약속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또한 창세 11장에서 스스로 자기들의 이름을 크게 떨치고자 했던 인간의 시도를 흩으셨던 것과는 반대로 아브라함에게는 하느님께서 친히 큰 이름을 약속하신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시는 복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복의 중개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결국 아브라함을 통하여 인류에게 구원을 위해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4절]: 아브라함의 순종 정신이 간결하게 묘사된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난다. 아무런 이의도, 의심도 없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인류가 걸어왔던 길과 단절하고 새로운 길을 향해서 떠난다. 지난날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그분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배반의 연속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전혀 반대의 자세를 보여 준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되는 데에 인간이 기여할 수 있는 기본자세이다. 이 순종은 믿음을 동반한다.


    제2독서 해설

     바오로는 티모테오의 전권에 대해서 자세하게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부끄러워하지 않도록(7-9절) 그에게 준 능력과 같은 특수한 선물을 강조한다. 티모테오에 대한 바오로의 함축적 관심은 여러 곳에 나타난다. 티모테오는 바오로의 후계자(2티모 4,5-7)로 보이는 것 외에도 가르치고(2티모2,15), 어떤 질문에 대해선 결정을 내려주고(1티모 5,19) 전례를 이끌고(1티모 2,1-12) 교회 내 공직자를 임명하도록 위임을 받는다(1티모 3,1-13; 5,22).

     교계의 기능을 두 가지 관점에서 요약해 볼 때, 하나는 복음에의 봉사이다(10-11절). 즉 교계의 구성원은 그가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책임을 위임받는 한에서 기존 공동체에 대한 권위를 행사한다. 그리고 둘째는 죽음을 이기고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를(神人)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다. 한마디로 교계에 속한 사람(사제단)은 공동체를 관리하고 전례를 이끌어 가고, 교리를 가르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ad intra) 생명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아야 했다(ad extra).


    복음 해설

     [영광스러운 변모]: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17,2)고 적고 있다. 원문에서는 “눈부셨다”가 아니고 “희게 되었다”이다. 저자는 묵시문학적 표현을 빌어 예수님의 변모를 서술하고 있다. 다니 12,3에서 종말에 부활한 의인들의 모습이 변하리라고 보았고, 묵시 1,14-16에서 파트모스 섬에서 요한에게 발현하신 예수님의 모습도 이와 같았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또는 눈같이 희었으며…… 얼굴은 대낮의 태양처럼 빛났습니다.” 또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후 그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사람들이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탈출 34,29-35; 참조 2 고린 3,7)는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 묵시문학에서 “흰색”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색으로서 신성과 초월성을 나타낸다. 특별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또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묵시록에서 “그들은 하얀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거닐 것이며”(3,4)라든지 “승리하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며”(3,5)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전승을 토대로 해서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첫째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엘리야는 벌써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1-12). 물론 복음서 저자는 여기에 “그제야 제자들은 이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7,13)고 덧붙이고 있다. 두 번째 전승은 말라기 예언서이다: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3,23).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2열왕 2,11-13). 또 모압 땅에서 죽은 모세에 대해서도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묻혔는데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오늘까지 아무도 모른다”(신명 34,5-6)고 되어 있다. 이 두 전승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겠다.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바로 하늘로 올라갔고, 모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전승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 이들은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어 세말에 다시 그들이 다시 오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거룩한 변모시에 이들의 출현은 ‘거룩한 변모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나타날 주님의 영광의 현시’임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이 하느님의 손에 의해서 죽지 않고 바로 하늘에 올라가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예수님을 불의한 죽음에 그냥 부쳐두시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시리라는 암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본다.

    -강 론-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 17,9)


     오소서 성령님! 오늘 제1독서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자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살던 땅에서 떠나는 장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그에게 준 능력과 같은 특수한 선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변모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상으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았을 때, 오늘 말씀을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자신의 고향에서 떠납니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떠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인간적인 판단이나 조건 등을 따지지 않고 그저 단순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곧, 나는 하느님 말씀을 순수하게 따르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의 것들, 예를 들면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준비들, 세상적인 모든 걱정들 등을 나의 몫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느님의 몫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제1독서는 우리가 믿음을 갖는데 있어서 세상적인 판단과 기준 그리고 걱정들을 모두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의 믿음에 세상적인 것들을 집어넣지 마십시오. 그냥 단순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삶으로 실천해 보십시오. 성경이 고백하고,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들을 반드시 성취시켜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제2독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은 티모테오가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 선포에 동참하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고통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기쁘게 복음 선포에 동참하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제2독서가 전하고자 하는 믿음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열정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라고 고통 속에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열정을 고백하는 것처럼, 어떠한 고통이 온다고 할지라도 말씀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게 고통이 있다면, 그 고통 때문에 너무나 힘들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수록, 하느님의 말씀을 놓지 마십시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고통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힘을 얻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욥도 고통 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그러면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 17,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산 위에서 본 것만으로 당신을 영광의 메시아로 받아들이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메시아 임무를 수난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완수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즉 수난과 죽음 없이 영광의 부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모든 삶을 체험하기 전까지 침묵하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믿음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믿음은 바로 기다림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믿음의 특성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이 조금만 형식적으로 흘러도 하느님을 느낄 수 없다고 너무나 쉽게 고백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나 일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었을 때, 너무나 소중한 믿음을 포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기다리십시오. 내가 어떠한 상태에 놓이든지, 또한 나에게 어떠한 고통이 다가오든지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은 보다 성숙해지고, 믿음을 통해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고, 오히려 고통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기다리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에는 조용히 성체 앞에 앉아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성찰해 보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내가 그동안 사람이나 일 때문에, 또는 나에게 다가오는 고통 때문에 소중한 믿음을 너무나 쉽게 다루었다면, 오늘 이 순간부터는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내가 가진 믿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겠다는 결심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 17,9)

  4. user#0 님의 말:

     

    사순 제 2 주일


    제 1 독서 : 창세 12, 1-4a

    제 2 독서 : 2디모 1, 8b-10

    복     음 : 마태 17, 1-9


    제 1 독서 : 창세기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11장을 하느님께 거역하는 역사라고 한다면 12-50장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죄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확대되어 오다가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붙어 그 불길이 잡히기 시작한다.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지체없이 순종한다. 그 동안 의지하며 살던 아버지의 집을 떠나 끝없는 방랑의 길로 들어선다. 그 당시 떠돌이는 아무런 권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카인은 하느님께 하소연했고, 하느님께서는 카인을 보호하는 표시를 해주었다(창세 4, 13-15).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표도 없다. 그는 하소연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길을 떠났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순종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 덕분에 만민이 축복을 받게 되었다.


    제 2 독서 : 이 텍스트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는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계획을 실현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새로운 소식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스스로 밝히신 적이 있다.“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루가 4, 43).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결국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이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다 보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디모테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함께 고통에 참여하자고 권고한다. 복음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복     음 : 거룩한 변모 사건은 사람의 아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를 밝혀 준다. 스승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이해할 수 없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영광스런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다. 그리고 그의 말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 후에야 과거사건의 의미를 깨달았다. 하느님께서 드러내 보이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들의 영적인 장님 상태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직후에 거룩한 변모 사건이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메시아 사상에 대한 정화 작업을 시작하신 셈이다. 그분은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고통받는 종으로서 고통을 통해 시작하신다는 것을 명백히 하신다. 그러므로 거룩한 변모 사건은 유혹이야기(지난 주일이 복음)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고통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자들도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자, 일어나 갑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절은 40일 간의 피정 기간이라고 합니다. 피정이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떠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을 향해서 세상을 떠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정을 하기 위하여 자기가 머물던 집, 직장, 학교, 본당을 떠나 한적한 장소에서 오직 기도에만 전념하며 마음을 가다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한마디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 주제입니다. 제1독서는 아브람에게 이르시는 야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 살았는데 이곳은 여러 우상신을 섬기는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있는 사원에서는 어린이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제1독서의 앞부분(창세 11, 31-32)에는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길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곳을 떠나는 이유와 설명이 없습니다. 옛 히브리 기록을 보면 아브람이 불에 태워져 우상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하란’이란 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곳에도 역시 같은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브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 1). 아브람은 하느님의 분부대로 길을 떠났습니다. 이는 옛 세상에서 새 세상으로의 탈출이며 출발이었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새 삶이, 그러나 고생스럽고 쉽지 않은 삶이 시작됨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마태 17, 1-9)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야고보의 동생 요한 등 세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거룩한 변모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압정에서 탈출, 해방시켰으며 엘리야는 우상 숭배에 빠진 왕과 이스라엘을 구한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자들과 이야기하는 장면에 제자들은 그만 넋이 빠져, 그곳에서 천막을 치고 그들과 더불어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산밑으로 제자들과 함께 내려가셨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부단히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난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곳을 향한 출발은 설레임과 함께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새로 택한 길이 도망 혹은 은신일 수도 있고 새로운 출발, 구원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지체없이 길을 떠난 아브라함,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40년간을 광야에서 헤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 높은 산에서의 영광된 모습에 머물지 않고 떠나야 했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이 모든 이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나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나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라.”고 권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 주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이 부르심은 새로운 삶에 대한 부르심으로,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곳, 희망과 꿈이 잇는 구원의 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을 찾아서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나 예언자들이 취하였던 모습입니까? 아니면 현실 안주 내지 자기 도취에 빠진 생활입니까? 같은 죽음이라도 의롭고 거룩한 죽음이 있는가 하면, 아무 의미 없이 생활고나 세상살이의 어려움 때문에 비관에 빠져 자살하는 것과 같은 죽음도 있습니다. 참으로 대조적인 죽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답게 말하고 행동하며 어떤 경우에도 진리를 저버리지 않고 서로 고통을 나누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떠남이요 출발입니다. 우리 모두 아무 두려움 없이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복된 땅으로 출발합시다. 자, 일어나 갑시다. 세상의 먼지를 툭툭 털어 버리고 저 높은 곳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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