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사순 제 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사순 제 4주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제 1독서 : 1 사무 16, 1b. 6-7. 10-13a

제 2독서 : 에페 5, 8-14

복 음 : 요한 9, 1-4

태생 소경에 관한 이야기는 요한 복음사가에 의해 서술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가운데서 특별히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이야기들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아주 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오시어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보게 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이 처하게 될 눈멀음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조차 고쳐주실 수 없는 ‘소경’ 들이 있다. 즉 자신들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것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이에 대해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이 아주 안타까운 표현으로 끝을 맺고 있다 :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 41).

 그러므로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주제는 다른 주일에서처럼 ‘빛’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요한 복음 첫머리에서 명백히 강조하고 있듯이 서로간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빛과 어둠 사이의 ‘대립’에 관한 것이다 :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한 1, 5)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빛과 어둠의 대립은 사도 바울로가 제 2독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어둠’ 속에 살다가 세례를 통하여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 살게 된”(에페 5, 8) 그리스도 신자 생활의 초기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존 매순간순간 마다에 펼쳐지고 계속된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우리에게 “빛의 자녀답게” 살며, “모든 어둠의 행위”를 어디서든 또 누가 행하든지 고발하고 단죄함으로써 피하라고 권고한다 :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십시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행위에 끼어들지 말고 오히려 그런 일을 폭로하십시오”(에페 5, 8-11).

 이처럼 빛과 어둠의 대립은 흔히 비밀리에 (‘숨어서’ : 12절) – 공적으로 단죄를 받을까 두려워서든지 또는 보다 더 큰 악을 성취시킴에 있어서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든지 – 계획되고 실행되는 ‘어둔’ 행위에 대한 ‘고발’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찬들의 책임도 또한 그만큼 커진다. 말하자면, 각자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빛의 증거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불의한 일들 특히 선, 이익, 필요성, 예술, 발전 등을 표면상의 이유로 내세우며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런 모든 악들(예를 들어 성의 해방, 일부 공연예술, 낙태의 합법화, 폭력, 부패한 정치체제 등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발할 수 있는 ‘예언적’ 소리가 되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 신자는 ‘빛’의 선포자요 증거자로서 짊어져야 할 그러한 역할이 어떤 어려움과 투쟁의 필요성을 동반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러한 것들을 회피한다면, 본질적으로 ‘빛’에로의 부름이며 더 나아가 그 ‘빛’ 속에서 걸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종의 죽음에서 생명에로의 ‘부활’과 같은 세례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제 2독서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잠에서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어주시리라’는 말씀이 이 뜻입니다”(14절).

 바울로가 인용하고 있는 이 구절은 이사야서에서 어렴풋이 그 흔적을 찾아 볼수 있지만(이사 60, 1과 26, 19) 분명히 세례예식에서 반드시 사용되었던 고대 그리스도교 찬미가의 일부였다는 사실에 미루어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알아들을 수 있다 :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의 모범을 따라 세례를 통하여 죽음에서 생명에로 그리고 ‘어둠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체험을 해야 하며 그 체험은 단 한 번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나 다시는 죽지 않으시는” (로마 6,9) 그리스도의 경우에서처럼 그들의 존재 전체를 통하여 입증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셨는데…”

자, 이제 요한 복음사가가 아주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상당히 긴 오늘 복음을 비록 짧게나마 좀 더 자세히 음미해 보자.

 문학적으로 볼 때 감정, 느낌, 반응, 대립적 상황등이 아주 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완벽한 작품이다. 우선 태생 소경에 관한 기적이 극히 간결하게 서술되고 있다 :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마나셨는데…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다(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이다).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다”(9, 1. 6-7).

 그 사람이 태생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를 묻는 사도들의 질문은 단지 예수께서 행하실(2-3절) 권능에 의한 선한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하는 사실에다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곧 이어서 그 질문의 내용 자체보다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이끌어들이고자 하는 여러 가지 다른 질문들이 계속된다 : 제일 먼저 군중이 소경에게 묻고 있고(8-12절) 그 다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13-17절) 또 이어서 그의 부모들과(18-23절) 그 소경 자신의 물음이 (24-34절) 계속되고 있다. 그 장면은 소경과 그를 고쳐준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그 소경의 “주님, 믿습니다”라고 하는 신앙 고백의 장면과 뒤이어 계속되는 예수의 아주 신랄한 해석으로 끝난다(35-41절).

 이야기 전체에서 똑같은 사실을 두고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두 가지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 하나는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특히 정신적으로까지 전체적인 ‘밝음’의 상태에 서서히 이르고 있는 태생 소경의 태도요, 다른 하나는 사실의 진실성이 거듭 입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명한 사실을 부정하려 하고 또 신적 현존의 징표를 확인하기를 고집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요한 복음사가 보통 ‘유다인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태도이다. 보기를 간절히 바란 소경은 눈을 뜨게 된 반면, 하느님과 그분의 법을 온전히 안다고 자처하던(“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 28절)자칭 예언자들은 장님이 되고 만다!

  이처럼 하느님의 ‘심판’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지향에 대해 내려진다. 이제 이 점에 눈을 돌려 보자.


‘빛’으로서의 신앙   

요한 복음사가는 태생 소경의 태도를 통해 거칠고 불합리하고 모순투성이인 그리스도 신자의 평범한 신앙의 여정을 기술하고자 한다. 단순히 예수께서 침을 뱉아 갠 흙을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시는 이상한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 : 위생학적으로 볼 때 이미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을 오히려 멀게 할 수 있는 그런 행위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경은 믿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고 그 결과 보게 된다.

 이 이야기는 요르단 강물에서 일곱 번 몸을 씻고 나병으로부터 치유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2열왕 5장)를 상기케 한다. 기적을 이루어주는 것은 실로암 연못이나 요르단강의 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또는 그 말씀을 드러나게 하는 예언자이신 예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이다!

 신앙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모든 적대 행위와 거짓된 논리를 물리쳐 이긴다. 그 태생 소경은 모든 사람들과 대립되는 입장에 있다 : 그의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그의 부모들까지도 유다인들 앞에서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을 두려워하고(22절)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돌린다 : “예, 틀림없이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저희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지금 보게 되었는지, 또 누가 눈을 뜨게 하여 주었는지는 모릅니다.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제 일은 제가 대답하겠지요”(20-21절).

 그 소경에게는 명백했던 사실을 부인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협잡이 이루어진다 :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는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면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는 사람도 있었고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을 보일 수 있겠소?’ 하고 맞서는 사람도 있어서…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16.24절).

 보다시피 문제의 쟁점은 결국에 가서는 어떤 설명이 가능한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에 관한 것이다 : 곤란한 문제를 일으키는 분도 그분이시고, 사람들간에 의견을 엇갈리게 하는 분도 그분이시다(16절). 기적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그분을 받아들일 때 따라오는 모든 결과와 더불어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운 문제들은 치유를 받은 소경에 의해 정확히 해결된다 : 그는 엄청난 연구나 세밀한 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위 ‘지혜로운 자들’ – 어제와 오늘의 신학자들일 수도 있다 – 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단순하다는 이유로 미처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실들의 명백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모세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지만 그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분명히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셨는데 그분이 어디서 오셨는지도 모른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28-33절).

 그 태생 소경의 신앙이 점점 명백해져 가고 있는 사실도 주목해 볼 만하다 : 그는 예수께 관해서 잇달아 질문을 받을 때, 처음에는 단순히 예수를 ‘예수라는 분’(11절) ‘예언자’(17절)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33절)이라고 하였는데, 마지막에 가서 그분을 혼자 만날 때는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 “눈멀었던 사람이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 믿습니다’ 하며 그는 예수 앞에 엎드렸다” (35-38절).

 여기서 그의 신앙은 완전해진다. 즉 그 태생 소경은 마침내 완전한 의미에서 ‘보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시력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라는 분’ 안에서 단순한 지성의 눈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신적 차원 즉 다니엘 예언자의 예언대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사람의 아들’(다니 7,13-14)이신 영광의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이와 반대로 유다인들이 볼 때 예수는 그저 한 ‘죄인’(24절)에 불과 하다 : 그는 “진흙을 개어 소역의 눈을 뜨게 해 주었기”(14절) 때문에 안식일을 어겼으며 또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29절)사람이어서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볼 수는 없는 사람이다. 유다인들은 태생 소경이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들의 합리적 사고를 혼란케 하고 당신 좋으신 대로 나타내 보이실 수 있는 하느님의  ‘판단’에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안식일이 라고 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 주는 것이 하느님께 부당한 일이 란 말인가? 아니 오히려 인간들에 대한 그분의 자비를 더욱 강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특별한 주님 날이 ‘안식일’이 아닐까? 그리고 행해진 기적 그자체가 어느 날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보다도(29 절 참조) 더 위대한 그분의 ‘말씀’이 아닐까?

 그러므로 참으로 눈이 먼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를 ‘죄인’으로 몰아 배척하고 있는 유다인들이다.

 그들은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의 눈이 먼 것은 그들의 탓이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미 단죄의 심판을 내리신다. 이에 관해 예수께서는 이야기 전체의 끝부분에서 당신 앞에 서 있는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에 펼쳐지는 극적인 내용을 강조하시면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39절).

 여기서 예수께서 이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5절). 이보다 앞서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8.12). 빛이 있는 곳에서는 밝은 빛을 받아 보기 위해 눈을 뜨는 것으로 족하다.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어둠 속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온전히 그의 탓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이 자기 스스로에게 내리는 단죄의 ‘심판’이다.

 인간들의 구원 또는 파멸은 이미 오직 그리스도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의 ‘빛’으로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능력 여하에 달려 있다.

‘빛’으로서의 세례

 모든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이 대목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대한 기술 외에도 그리스도교 신자 생활에 있어서 세례성사의 효과에 대한 가르침을 발견한다 :  그 소경이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뜨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 신자는 세례의 물을 통해 밝은 빛을 얻으며 그로써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또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며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생활의 의미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이미,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세례가 ‘빛’으로 제시되고 있다(히브 6, 4 ; 10, 32 ; 에페 5, 14참조). 그리고 그 주체는 교부들에 의해 폭넓게 취해졌다. 그 중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말을 여기 인용해 보자 :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빛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완전한 선물을 받아 불사불멸의 은총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을 가로막았던 어둠의 원천인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분명하게, 밝게 볼 수 있는 정신의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Pedagogo, Ⅰ,6).

 그 소경이 눈을 뜨게 된 연못의 이름도 요한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실, ‘실로암’이라는 명칭은 ‘파견된 자’(7절)라는 뜻이며, 요한 복음사가는 그 파견된 자라는 말을 성부께로부터 ‘파견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게 분명히 연결시키고 있다 : 그 소경을 낫게 한 것은 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실지로 히브리적 문형에 따르면 수동태라기보다는 능동태이다. 즉 파견된 자가 아니라 ‘파견하는 자’이다(실로암 연못에 물을 공급해주는 운하에 관련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세례는 하나의 커다란 ‘빛’이다. 그러나 그 빛은 우리 자신을 위해 붙잡아 둘 수 없는 빛이다 : 그 빛은 우리를 모든 사람들, 사물들, 사건들을 하느님 자신의 눈 즉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하는 빛이다.

 왜냐하면 오늘 제 1독서-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뽑히는 장면을 서술하고 있는-에서 읽게 되는 다음 구절의 내용은 항상 진실된 것이 때문이다 :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1사무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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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사순 제 4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1. 김한수 시몬

    1.1.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 1사무 16, 1ㄴ. 6-7. 10-13ㄱ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으로 세운 사울은(1사무 10장)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버림을 받았다(1사무 15장). 이제 사울 대신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새로운 임금이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된다. 본문은 1사무 16장에서 1열왕 2장까지 이어지는 소위 ‘다윗 왕위 계승사’의 시작 부분이다.

      ‘다윗 왕위 계승사’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를 왕위에 오르기까지 인도해 주시는지, 그리고 왕위가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계승되는지를 그리고 있다. 성서 저자는 역사의 객관적 사실을 묘사하기보다 하느님께서 여하한 곤경 가운데서도 당신께서 선택하신 다윗과 그 집안을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당신 백성을 인도하셨듯이 다윗을 통하여 역시 당신 백성을 인도하신다. 본문은 다윗의 통치가 인간적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구원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본문이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간 역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이다. 하느님께서는 여하한 인간적 장애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켜 나가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전혀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사람들의 판단과는 상관없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이를 선택하시어 그를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행하신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가 그분의 부르심에 충실하지 못할 경우에도 하느님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울과 다윗의 경우처럼 다른 사람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신다.


    제2독서 : 에페 5, 8-14

      오늘 독서는 서간의 교훈적 부분에 해당하고 있다. 소아시아 에페소의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가 서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공동체는  당시 영지주의 이단과 헬레니즘 문화권의 신비종교 추종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저자는 새로 신자가 된 성도들을 허황된 이론으로 유혹하는 이방인들의 잘못들을 지적한다. 이 성도들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지나간 과거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과거 삶에로의 복귀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영지주의자들이 그들의 높은 인식을 들어내기 위해서 즐겨 사용하던 ‘빛’의 개념을 바오로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인 그리스도 신자 실존을 위해서 사용한다; “여러분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8절). ‘주님 안에 빛의 자녀답게’라는 표현은 완전히 바뀌어진 인간 실존의 새 모습 즉 그리스도 안의 은총 어린 새 창조를 의미한다 할 수 있다. 존재론적으로도 완전히 새로워진 그리스도 신자의 은총적 실존에서 바오로는 새로운 실천 사항을 보고 있다;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습니다”(9절). 실제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높은 인식을 빗대면서 빛을 이야기했지만 그들의 삶은 열매 맺지 못하는 어두움의 행위만을 드러냈다(11절). 세상엔 언제나 사람들을 혼란케 하는 세계관과 기발한 종교적 착상 등 비슷한 경향들이 있어 왔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자들 가운데도 이들에 빠지는 자들이 많았다. 바오로는 에페소 신자공동체의 구체적 상황을 생각하면서 사목자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누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를 통하여 산다면 그가 세상의 빛(요한 8,12)인 것처럼 진실을 열매 맺으며 살게 되고,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자신은 빛을 지닌 빛의 증거자가 된다고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에 이 빛이 세상에 비칠 때 세상은 바른 길을 가게 되고 다시 사랑과 정의와 진리가 살아 숨쉬게 된다는 것이다.


    복 음 : 요한 9,1-41

      ‘태생 소경의 치유’ 대목은 이미 앞서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신 예수님의 말씀(8,12)과 문맥상 연결된다. 그래서 9,5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다. 하지만 전체의 전개나 흐름이 지난 주 복음,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4,5-42) 장면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는 예수님의 신원이 서서히 단계적으로 계시되면서 모든 사람, 즉 사마리아 여인뿐만 아니라 제자들 그리고 사마리아 도시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고 또 그분을 믿었지만, ‘태생 소경의 치유’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두 부류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나서 단순히 그분을 믿고 ‘주님’으로 고백하려는 태생 소경과, 단지 ‘안식일 법의 위반’이라는 사실 때문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 ‘죄인’으로 몰아붙이려는 바리사이들을 위시한 소위 ‘유다인’들이다. ‘빛’이신 예수님을 두고 완전히 다른 두 노선이 병행하고 있다. 빛과 어둠의 노선인 것이다. 그러나 빛은 어둠을 비추고, 그 어둠을 몰아낼 것이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한 1,5).

      태생 소경 이야기는 생동감이 넘칠 뿐 아니라 아주 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요한 복음 사가는 태생 소경의 태도를 통해 거칠고 불합리하고 모순투성이인 그리스도 신자의 평범한 신앙의 여정을 기술하고자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오시어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고 보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결코 ‘눈뜸’없이 ‘눈멀음’의 상태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조차 고쳐 주실 수 없는 ‘소경’들이 있다. 즉 자신들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혹은 자신의 아집과 독선, 집착, 소유욕 등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아루나찰라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가 지은 ‘마하라쉬와의 대화’라는 책에 보면 “신은 자만심에 차 있는 사람과 가장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신을 필요로 하지만 자만심에 찬 사람은 신 없이도 자신이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때로는 너무나 잘 본다고 하면서 잘 못 보는 사람들일 수 있다. 어쩌면 ‘눈뜬 맹인’인줄 모른다. 육적인 눈은 밝아 세상의 모든 것과 사물들, 즉 인사(人事)와 세상사(世上事)에는 온갖 지식과 견해를 갖고 있지만, 영적인 눈은 멀거나 희미해 그분을 알아보는데 더디거나 알아 뵙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엉뚱한 것을 두고 그것이 참 진리라고 보고 좇을지 모른다. “너희가 차라리 눈 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강론

    제대로 본다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두 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며, 눈을 통해 구분하고 판단합니다.  사람에게 두 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눈이 없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으며, 산과 강,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인들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사람에게 두 눈이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확인할 수 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눈을 갖고 태어났지만 소경이어서 볼 수 없다면 참으로 답답하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다면,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도, 자연의 아름다움도 보지 못한다면 그런 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면서 누리는 아름다움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애정과 연민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 시대에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불행이 그들의 부모나 혹은 자신들의 죄 탓이라고 치부해버렸습니다.  그들의 불행과 아픔을 외면하고, 오히려 죄인으로 몰아붙여 이중의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들이 죄인입니까?  오히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궁색한 변명이었습니다.  사회가 져야할 약자에 대한 책임을 율법이란 이름으로 교묘히 피해나가는 옹색한 책임회피였던 것입니다.  실상 어느 누구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의 장애일 뿐이며 그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병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 이라고 하십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치유되고 모든 사람이 누리는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더 특별한 은총이 베풀어져야 하고 사회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소경은 비록 유다인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비록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마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오히려 앞을 보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의 타락과 추함을 보지 못하게 되고, 그러니 남들보다 더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쉽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그런 눈은 없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한 두 눈을 갖고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마음과 욕심이라는 눈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소경이 차라리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눈이 없어도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훨씬 더 세상을 아름답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기심과 아집과 욕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모든 것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투정부리는 바리사이파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두 눈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제대로 보며 살아갑시다.  내 가족과 이웃이 함께 살아감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제대로 보고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내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제대로 보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참여합시다.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오늘 복음의 소경처럼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웃의 소중함과 자연의 소중함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두 눈을 가지고 마음의 소경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한 주간동안 우리 주위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가지고 살아갑시다.

  2. user#0 님의 말: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1. 말씀읽기: 요한9,1-4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시다

    바리사이들이 개입하다

    참으로 눈이 먼 사람


    2. 말씀연구

     눈먼 소경을 만나게 되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제자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죄 때문에 저 사람이 죄로 고통을 받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죄를 지어야만 병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병자들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나보다 조금 몸이 불편한 것뿐인데…, 나랑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은 부끄럽다고, 남의 시선이 의식된다고 성당에 나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시선을 그에게 던진 것일까요?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소경을 만나셨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에게 당신 자비의 손길을 펼치실 것입니다. 하지만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그를 죄인으로 단정 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을 죄의 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태생 소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죄 때문인지(아이가 뭔 죄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궁금해 하게 됩니다.


    2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유대인들은 죄를 지으면 병을 얻게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생각이 바로 오늘 이 질문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눈이 멀게 되는 병고는 죄에 대한 벌로 나타납니다(창세 19,11). 신명기 28,28에도 하느님의 계명과 규정을 소홀히 하는 이들이 받는 벌을 “미치게 하시고 눈멀게도 하시고 정신을 잃게 하실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소경을 보는 관점은 그 사람이 어느 한 때 죄를 지었거나, 아니면 부모가 범죄 하였기 때문에 소경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탈출20,5;신명5,9). 그런데 이런 논리라면 엄마 뱃속에서 죄를 지으면 어떤 죄를 지을까요? 분명 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죄로 아이가 눈이 멀었다면 그것 또한 불합리한 것 아니겠습니까?


    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세상에 현존하는 사탄의 힘의 표시로 말씀하기도 하시지만 결코 특정한 병이 개인이 지은 죄의 결과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를 다 부정을 하십니다. 이제 당신의 자비를 드러내시겠지요. 그 소경에게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어둠의 힘이 더욱 당신 주위에 몰려드는 것을 깨달은 예수님께서는 그 어둠이 당신을 덮칠 때는 당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즉 당신의 지상에서의 삶이 마칠 때까지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셔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라고 표현된 것은 교회가 항상 경험해야 되는 세상의 적대와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의 일을 계속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을 밝힙니다. 빛은 숨을 것을 드러내고, 잃은 것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며,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빛으로 보는 것입니다.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기적은 두 가지의 다른 행동으로 시작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침으로 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셨을까요? 사실 우리야 눈에 흙이 들어가면 안보이겠지만 소경은 눈에 흙을 발라도 안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눈을 감은 채 당신을 따르라고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냥 씻으라고 했으면 분명 안 씻었을 지도 모릅니다. 마치 엘리사가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에게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할 때 불평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에게 진흙을 빚어 눈을 바르는 의식을 하는데, 초대교회에서는 이것을 세례의 표시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진흙을 바라는 것 자체가 오래 전부터 세례의식이었고, 침을 사용하는 것은 나중에 와서 예식의 한 부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 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행동은 당시 민간요법을 따라 하시면서 그에게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면 그도 분명 불신으로 흘렀을 것입니다.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실로암(또는 실로아)은 본래 “물을 내어보냄” 또는 “수로, 운하”인데 사도요한은 “파견된 자”라고 의역하여 그리스도와 관련을 짓습니다. 이 못은 예루살렘 도시 남동쪽에 위치한 기혼 샘물의 저수장으로서 오늘날도 그 흔적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실로암이라는 이름을 파견된 자로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을 의미하게 하였습니다. 곧 소경은 예수님의 뜻에 해당하는 이 못의 물로 자기를 씻도록 초청되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치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태생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치유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태생 소경이니 눈을 뜨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해봤을 텐데. 그리고 이제는 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고 살았을 텐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으니 그는 우리 신앙인들의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따르게 된 다는 것을 태생소경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사람들은 그를 보고 놀랐습니다. 소경으로 구걸하던 사람이 멀쩡하게 걸어 다니니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치유 받은 소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만 합니다.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하지만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나에게만 불가능한 것이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10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사람들은 눈을 뜨게 된 소경에게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얼마나 좋으냐고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누가 제일 기뻐하겠냐고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먼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1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있는 그대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대로 했더니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그 눈을 뜨게 된 소경은 나에게도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믿고 있다면 믿는 대로 해보시오! 그러면 구원 받을 것입니다. 믿음이 이뤄질 것입니다.


    12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여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디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함을 잊고 있습니다. 너무도 기쁜 그는 지금 그가 눈을 뜬 그 자체에 빠져 있었습니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관계있는 사건을 조사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였습니다. 사람들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기에 눈을 뜬 소경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로 데려 갑니다. 부모에게 데려다 주지 않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데려 갑니다. 이들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태생소경의 치유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리석게도…,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이라 하여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치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음으로 미뤄야 하는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분명 미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일 그런 기회를 잡게 된다면 분명 치유를 받을 것입니다. 남의 일이기에,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기에 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측은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 사람. 그는 지금 기쁨을 나눠야 하는데 어느덧 죄인처럼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께서 하라 하시는 대로 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다고 다시 한번 말하게 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었다면“당신들도 그분의 말을 들으면 나처럼 치유를 받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로 들었을 것입니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함께 기뻐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어떻게 눈을 떴는지 물어보고 있습니다. 사실은 먼저 기뻐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 사건의 경이와 기적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잘못을 꼬집어내어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면, 그래서 그가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군중은 두 편으로 갈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는 사람과 죄인으로 보는 사람. 인정할 것은 좀 인정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함께 기뻐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어떻게 눈을 떴는지 물어보고 있습니다. 사실은 먼저 기뻐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 사건의 경이와 기적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잘못을 꼬집어내어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우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면, 그래서 그가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18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기뻐해 주지 않고 오히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소경의 마음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소경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작당한 사기꾼일 것이라고. 그래서 소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내려고 소경의 부모를 불러서 묻습니다. 어리석게도…


    19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가끔은 거짓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수라고 하면서 그것을 눈에 발라서 보이게 되었다고 과장 선전을 합니다. 먼 타지에서 일어난 일을 선전하면 확인할 방법이 없기에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 한번 선전이 이루어지면 교회가 아무리 아니라고 진실을 말해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탄압한다고 말합니다.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기적은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는 데 있습니다.

     이제 이 기적이 참됨을 부정하고 싶은 이들은 부모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그들이 듣고 싶은 대답은 소경이 아니었다는 대답일 것입니다.


    20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부모는 자신들의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다고 진술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눈을 떴지만 두려움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자신들의 아이가 눈을 떴지만 그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서 대답을 회피합니다.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누가 아들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 모르겠다고, 나이를 먹었으니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이 말을 통해서 얼마나 유다인들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22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유다인 사이에서 파문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가장 가벼운 파문은 <네지하>라 하고 1주간 내지 1개월간 죄인을 특별히 다룬다는 일종의 견책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배척(냇도우이)으로서, 죄인은 1개월 동안 땅에 앉아서 상복을 입고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목욕하지 않고 향을 바르지 않고, 또 공적 기도에 참여할 수도 없었습니다. 셋째 (헤렘)은 가장 가혹한 것으로 그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고 재산 몰수도 포함할 경우가 있고, 범죄자와의 개인적 관계는 말할 나위도 없고, 모두와의 교재가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지지자, 또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벌을 내리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당시 유다 지도자들, 특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자들을 이단자로 여겨 회당(유다인 공동체)에서 영구히 추방했습니다. 랍비 가믈리엘 2세(90년경)때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저주를 18기도문(쉐모네 에스레)에까지 삽입했다고 합니다.


    23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이다.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라는 것은 다 자란 사람이니 법적으로 유효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소년은 13세가 되면 성년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소경이었던 그의 부모의 대답으로 인해 더욱 난처해졌습니다. 


    부모들은 유대인들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그의 부모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하면서 회피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도 얼마나 답답할까요?


    24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참으로 끈질긴 사람들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적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옳게 바라본 사람들의 목소리도 정작 죄인들의 목소리에 의해 묻혀 버립니다.

    “사실대로 말하시오”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야훼 하느님께만 영광을 드리도록 강조한 구약성경적인 표현입니다(1역대16,28-29; 시편65,2;67,35;이사42,12;바룩2,17-18;에제27,10).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께 자기 잘못이나 죄를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으로 언급되었습니다(여호7,19;1사무6,5;2역대30,8;예레13,16참조). 따라서 여기서는 치유된 자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안식일법을 위반한 죄인으로 말하도록 유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25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이 눈을 뜨게 된 소경은 기쁠 뿐입니다. 지금 그는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는 그의 부모들처럼 교묘하게 유다인의 지도자들의 함정을 빠져 나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죄인이냐 아니냐를 정하는 것은 자기의 권한 밖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만은 사실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지금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신 있게 말하는 이 소경이었던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나 또한 그런 소신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했으면 좋겠습니다.


    26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치유 받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모순을 찾기 위해 재차 묻고 있습니다. 아마도 심문을 잘(?)해서 거짓 자백을 얻어냈던 수사관들이 이 사람들의 수법을 잘 연구했던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은 다양하게 여러 번 시험해 보는 심문을 극찬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그랬겠지만 막상 예수님께는 죄를 덮어씌우기에 바빴던 것 같습니다.


    27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권력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소경을 고쳤는지 다시 말해 보라고 하여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소경은 분통이 터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남을 깎아 내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닌 듯 합니다. 결국 자기가 당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심한 모욕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모욕을 가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모욕을 받은 것 뿐 입니다.


    28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그들은 욕을 하면서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을 경멸하고 모세를 존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임은 수치이지만 모세의 제자임은 영예라는 뜻입니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이 대립된 당시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세의 제자라는 표현에서 바리사이들이 곧 율법학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바리사이계 율법학자들인 것입니다.

    29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기분이 상했습니다. 소경으로 구걸하던 사람한테 이런 모욕을 당했으니…, 그들은 화가나서 “너는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우리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말을 합니다. 자신들은 모르겠지만 이 말을 통해서 자신들이 눈을 뜨게 된 소경보다 못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시인하게 됩니다. 모세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제자가 모세의 제자보다 훌륭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들 입으로 고백한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를 모릅니다. 모세에게 당신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모르고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30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눈을 뜬 이는 이제 유다인들을 가르칩니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신앙에 관계된 모든 것들을 분별하고 해결해주면서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느님의 일을 식별할 줄 모르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31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 눈뜬 사람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납니다. ①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과 ②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의로운 이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치유기적을 행하셨으니 예수님은 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32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평생 소경으로 살아온 사람의 신앙이 평생을 신앙을 연구하고 신앙생활 해온 사람보다 훨씬 낫습니다. 진리란 복잡함에서 오지 않고 단순함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경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해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확고한 사실은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는데 성경을 공부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소경이었던 그는 답답했을 것입니다.


    33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어찌 보면, 이것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지한 사람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주 작은 꼬맹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을 모른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소경을 쫓아냅니다. 이들은 고의적으로 어둠 속에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이 보이자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들. 이 모습은 일상생활 안에서 많이 들어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아이들을 혼내는 부모님들의 모습 안에서. 말문이 막혔을 때 배우자를 공격하는 모습 안에서…, 그래서 이제는 아이들에게 화를 낼 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네가 잘못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부족해서 화를 내는 거야!”

    바리사이들은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불행을 부모의 죄로 돌리고, 그를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몰아세웁니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쫓겨난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그는 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이 죄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체험한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소개를 하십니다. 이 소경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초자연적인 인물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습니까? 라고 물어보시지 않고, 자기 자신을 약간 숨긴 채 “사람의 아들”로 당신을 표현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의 준비자세를 시험해 보기 위한 방법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치유 받고 회당에서 추방당한 그를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를 찾아와 만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를 믿음으로 이끌고자 하심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매일 우리가 드리는 기도 또한 이 기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당신께로 더 많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그런데 나와 소경의 차이점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꿇어 절을 하면서 말합니다.” 믿습니다.” 하지만 나의 응답은 “믿습니다.” 하고 답하지만 굻어 절하지는 않습니다. 치유 받은 이의 온 마음은 예수님께로 가 있지만, 나는 입술만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치유된 자로 하여금 충만한 믿음을 갖도록 자기 자신을 분명히 계시하십니다. 믿음의 마지막 단계는 예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즉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다한 다음에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렇게 되기를 늘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이제 소경이었던 그는 사람의 아들로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게 됩니다. 이제 눈을 뜬 그는 믿음의 눈까지 뜨게 됩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립니다. 하느님께만 드릴 경배자세를 예수님 앞에서 취함으로써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계시자, 곧 구세주로 믿는 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39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현존과 계시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분명히 결정하도록 요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님의 심판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불신으로 인해 심판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사람들 가운데서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로 구별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심판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십니다.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소경)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태생소경은 예수님으로 인해 육신의 눈 뿐 아니라 신앙의 눈까지 뜨게 되었으나 외적으로 볼 수 있는 자들은 영적이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보는 것은 하느님 빛의 영역으로 이끄는 믿음을 말합니다. 보지 못하는 것은 빛을 거절하고 어둠의 세력에 빠져버린 불신을 가리킵니다. 불신자들은 결국 보지 못하게 되고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어둠 속에 계속 머무는 자들은 소경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그럼 아닌 줄 알았단 말인가? 예수님의 행위를 보고도, 소경이었던 그러나 이제는 볼 수 있는 그를 보고도 믿지 않았으니 눈 뜬 장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눈은 있으되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시기에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러 오셨지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시력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오심은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들이 한 행동이 감추어지도록 어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오심은 그들을 더욱 깊은 암흑에로 빠져들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이 본다고 하는 것과 예수님이 본다고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본다고 자처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니 그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고집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신앙인이면서도 계산하면서 살아가는 아직 소경에 불과합니다. 좀더 정확한 계산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영생을 위해서 확실한 계산을 해야만 할 때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따뜻하게 그의 손을 잡아 주고 있습니까? 오시는데 얼마나 어려우셨냐고 말 한마디 건네고 있습니까?


    2. 나는 볼 눈이 있는 사람입니까? 눈을 뜬 장님입니까? 보고 있다면 내가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있습니까?

  3. user#0 님의 말:

     

    사순 제 4주일


            1. 홍성만 신부(가)/2                     2. 강길웅 신부(가)/3

            3. 변희선 신부(가)/5                     4. 함세웅 신부(가)/7

            5. 김현준 신부(가)/8                     6. 권지효 신부(가)/10

            7. 김정진 신부(가)/12                    8. 하느님 사랑의 눈/14

            9. 스스로 소경된 사람/16         10. 하느님의 시선으로/18

            11. 최인호 작가/19                 

    1.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고요함은 신앙의 눈을 보존한다”

    홍성만 신부


    예수님께서는 소경에게 눈을 밝혀주시는 기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라고 선언하셨고 치유 받은 소경은 시력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깨달을 수 있어 “주님 믿습니다” 하고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한편 “우리들의 눈이 다 멀었단 말이요” 하고 대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대답하십니다. “당신들이 차라리 눈 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당신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요약입니다.

    지금 소경은 태양 빛을 받아 주위의 모든 사물을 다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새로운 빛이 그에게 비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육체적으로 소경을 도와주셨으나 궁극적으로 그를 영혼의 고뇌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소경을 치료해 주는 복음은 구원의 빛을 향하여 한발짝씩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2000년 전에 있었던 소경을 낫게하는 이 기적이 지금 나한테는 무엇을 뜻하는지 각자 자기에게로 눈을 돌려봅시다. 지난 겨울 방학 어느 추운 날이었습니다. 이때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성모병원 옆 구름다리에는 어느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떨면서 지나가는 행객에게 동정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동전 두세개 덜렁 놓고 가는 것이 상례였는데, 그 날은 두세개 놓고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부터인지 남매같이 보이는 두 국민학교 꼬마가, 내가 구름다리 한쪽 끝에서 그 앞에 오는 그때까지, 아기 안고 있는 어머니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두 꼬마는 주머니 속에서 100원짜리 동전 하나씩을 정성스레 놓고 서로 손잡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나도 이어 주춤거리며 100원짜리 하나를 놓고 힘없이 내려가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2000여년전 제자들이 예수께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합니까?” 학도 물었을 때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도 못들어 갈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걸인이 얼마나 불쌍한가를 또 도와줄 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이 꼬마들이 돈을 많이 보태주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더욱 아닙니다. 다만 이 동정을 요구하는 사람을 보는 꼬마들의 마음(눈)과 나의 마음(눈)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인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꼬마의 눈에는 진정 불쌍하고 자기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많으니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되먹지 않은 이론 때문에 또 자주 보는 습관 타성 때문에 꼬마가 느끼는 것과 같은 연민과 아픔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지금 나는 되먹지 못한 이론이나 타성에 눈이 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문 1975년 4월 16일자에는 미국에 입양된 월남 전재 고아를 태운 대형 수송기가 사이공 공항을 이륙한 후 사고로 추락하여 127명의 고아를 죽인 대 참사를 알리고 있습니다. 한 귀여운 아기는 보모의 젖가슴을 꼭 쥔채 죽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추락 현장에는 월남 민간인이 있었으나 구조에는 거의 협력을 하지 않고 담요 몇 장이 눈에 띄자 훔쳐간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는 어린 시체를 옮겨가면서 거의 눈물이 없었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월남인들이 우리 인간을 대표한다는 생각지도 않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우리 인간 마음의 눈이 점점 흐려져 간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마음을 가리우는 갖가지 공해가 있으니 즉 소음, 전쟁, 나태, 흥분된 생활과 경쟁, 명예, 권력, 범람하는 광고 등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어 비타협주의자에게 환영되며 인간 마음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2000년전 예수님께서 행하신 소경을 치유하신 기적을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알고 실천해야겠습니다.

     우리는 고요함으로 지켜지는 작은 섬을 창조하지 않는 한 우리 마음의 눈은 빛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뵈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고유의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치료하는 조용한 시간 기도시간을 하루에 적어도 15분은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하느님께서는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당신 자신을 들려 주실 수도 있고 그리스도는 잠겨진 분으로 들어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가장 평범하지만 확실한 방법은 진정으로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도의 시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소경은 “주님! 나는 믿습니다” 하고 직접적인 대화를 함으로 신앙의 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멘.






    2.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영적인 눈을 뜨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Ⅰ사무 16,1b.6-7.10-13a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다)

    제2독서 에페 5,8-14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리라)

    복 음 요한 9,1-41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 왔다)


    하느님의 눈은 사람의 눈과 같지 않습니다. 달라도 엄청나게 다릅니다. 마치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에서 어른들의 눈과 아이들의 눈이 서로 다른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느님의 눈빛을 조심스럽게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무엘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을 찾아 머리에 기름을 부으려 했을 때, 그는 사람의 외모만 보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이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꾸 엉뚱한 사람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으려 했습니다. 몇 번의 실수 끝에 다윗을 보고서야 그가 비로소 점지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눈은 늘 불완전하여 자주 실수를 범합니다. 하느님의 예언자였던 사무엘이 그러했다면 범인인 우리의 어리석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 눈을 속이지만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의 눈을 속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편견과 아집에 묶여 있기 때문에 판단하는 각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소경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이 닫혀져서 시력을 잃은 사람만을 소경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돈에 눈먼 사람은 돈만 보이며 술에 눈먼 사람은 술만 보입니다. 도박에 미친 사람은 화투짝만 보이며 여자에 눈먼 사람은 또 여자만 보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더 소중하고 올바른 것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눈뜬장님이 됩니다.


    전에 저의 선배로서 초등학교 교감을 하신 분이 있었는데 그의 부인은 정숙한 여인이었으며 인물도 좋았던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20년 가까운 부부생활에서 별 문제가 없었는데 어느 날 일이 생겼습니다. 남자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새 여자는 정말 교양도 없고 인물도 천한 여자였습니다. 그래도 교감은 그 여자에 빠져 부인과 자녀들을 버렸습니다.


    이때 주의의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은 눈이 멀었다.”하며 아까워했습니다. 남자는 정말 실력있는 교감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교직에서 쫓겨났고 그리고 그는 그 여자와 어디론가 줄행랑을 쳤는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이 닫히면 보이지가 않으며 보여도 헛된 것만 바라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세상을 올바로 보고 있다고 하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태중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소경은 태어나면서부터 천대받던 거지였습니다. 버려진 인간이었고 구걸이나 했던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에게 침으로 흙을 개어 눈에 바르니 눈이 열려서 세상을 똑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주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일종의 죽은 인생이 살아난 것입니다. 절망의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것이며 밑바닥에 버려진 존재가 위로 건짐을 받아 구원된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을 처음부터 알던 사람들은 다 놀라고 감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그 능력의 위대함에 머리를 굽혔습니다. 가슴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평생 불구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엄청난 사건은 보질 못하고 오직 그 사건이 안식일에 이루어진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어 트집을 잡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율법을 무시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인인 것처럼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그랬듯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시비 걸고 방해합니다.


    이상합니다. 눈먼 사람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믿음을 고백하는데 눈뜬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보며 죄인 취급합니다. 그럼 누가 진짜 소경입니까. 이때 예수님이 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그러면 여러분은 ‘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못 보는 사람입니까. 제가 언젠가 단식을 열흘간 한 일이 있는데 그때 뱃속을 꽤 여러 날 비우고 보니 과연 무엇이 맛있는 음식인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세상에 맛없는 음식이 없었습니다. 찌개 속에 빠진(?) 멸치 한 마리가, 배부를 때 먹던 갈비나 생선회보다도 훨씬 맛있었습니다. 오죽잖은 깍두기 하나에서 단물이 철철 넘쳤습니다. 이를테면 음식에 눈을 뜬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 눈뜨고 신앙에 눈을 떠야 합니다. 이 사순 시기에 진정으로 은혜의 새 모습을 바라봐야 합니다. 눈만 뜰 수 있다면 가난이나 질병이 결코 불행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눈을 뜹시다. 지금 잘 보인다고 착각하지 말고 예수님께 매달리고 매달립시다. 사순 시기는 눈을 뜸으로써 죄를 벗는 시기입니다.






    3.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라져서 돌아왔다

    변희선 신부


    필자는 예수회라는 남자 수도회 소속의 신부인데, 아직도 약 6개월간의 수련을 더 받아야 정회원이 될 수 있다. 이 수련을 제3수련이라고 부르는데, 예수회는 제3수련을 책임지는 수련장을 특별히 영성과 인격에 있어서 탁월한 분을 임명한다.


    현재 미국 예수회에서 유명한 제3수련장인 래리 길릭 신부님은 소경이다. 원래는 예수회의 평수사로 있다가 교황님의 윤허로 사제가 되셨고, 지금은 영적 지도자로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다.


    길릭 신부님께 피정 지도를 받은 많은 신부님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시는 이야기의 내용에는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우선 길릭 신부님은 수련자의 이야기를 아주 세심하고 정성스레 들으신다. 단지 수련자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그 목소리를 통한 마음과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


    둘째로, 수련자가 한 말들을 아주 잘 기억하신다. 심지어는 수련자마저 잊어버린 말까지도 기억하신다는 것이다. 이 점은 피정자가 자기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보다 지도자가 더 관심을 기울였을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셋째로, 피정자에 대하여 선입견을 갖지도 않을 뿐더러 속단을 내리지도 않으며, 가능하면 피정자 자신이 하느님의 뜻과 자신의 내면에 대하여 스스로가 깨닫도록 배려하고 기다리신다.


    그러면 길릭 신부님이 처음부터 이토록 탁월한 영적 지도자였을까?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부님께서 소경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영적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많은 시간과 여러 가지의 노력과 깨우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로, 남의 목소리만을 통하여 마음과 영혼의 소리를 들으려면, 우선 오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의 이야기가 조금만 길어지면 참지 못하고 중단시키려한다. 대개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상대방의 겉모습과 표정에 따라서 나름대로의 선입견 범위 안에서 말을 듣고 해석한다.


    그러나 소경이면서도 수십 년간의 영적 수련을 통하여 기다림과 인내를 체득하신 길릭 신부님은 비록 수련자의 표정과 외모는 보지 못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마음과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


    둘째로, 상대방의 이야기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려면,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와 관심이 필요하다. 세상의 온갖 못된 사람들을 겪으면서도, 인간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으려면, 사람을 영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이 조금만 잘못하거나 실수를 범해도 금방 단죄하거나 불신하기 쉽다. 결국 인간을 근본적으로 신뢰하기 위해서는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영적인 눈을 필요로 한다.


    셋째로, 수련자가 하느님의 뜻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는, 그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하느님의 은총과 역사하심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웃을 자신의 편견과 이기적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소경인 길릭 신부님은, 신앙(영혼)의 눈으로 피정자 안에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려고 부단히 기도하고 노력하시는 분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경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고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었다(요한 9,6). 그런데 편견과 불신에 사로잡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소경을 집요하게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세 단계에 걸쳐서 자신의 눈이 열리는 것을 보여준다.


    첫 단계에서, 소경은 예수님을 자기의 눈을 뜨게 도와준 좋은 분이라고 말한다(11절).

    「육안(肉眼) 열림」 둘째 단계에서 소경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답변한다(17절).

    「심안(心眼)의 열림」 셋째 단계에서, 소경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고백한다.

    「영안(靈眼)의 열림」「주님, 믿습니다(38절)」. 많은 사람들이 육안(肉眼)에만 집착한 나머지,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은 흐리거나 먼 상태이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듯이 우리 자신의 눈이 잘 보인다고(41절)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나는 마음과 영혼의 장님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먼저 마음과 영혼의 눈을 뜨십시오. 그리하려면 육체의 눈을 맹신하는 습관을 버리고 믿음의 나라로 들어가십시오」






    4.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맹인를 보게 하심/ 눈을 떠 보아라

    함세웅 신부


    고래잡이 배가 넓은 바다를 헤쳐가고 있습니다. 꼭대기 조타실에선 선장이 망원경을 들고 망망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윽고, 멀리 수평선에서 고래의 모습이 잡힙니다. 선장은 흥분하여 소리칩니다. “고래다! 고래가 나타났다!”선원들이 서둘러 장비를 챙깁니다.

    배는 전속력으로 고래를 쫓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래잡이 배에도 눈이 밝은 사람은 있어야 합니다. 고래잡이뿐만이 아니라 어디에도 눈 밝은 사람은 꼭 있어야 합니다. 집안에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집안 식구 중 누가 남모르는 걱정거리를 갖고 있나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에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교회가 자라나고 있는지, 겉모양은 교회이면서 속은 일반 사회 단체와 똑같아지는 것이나 아닌지, 잘 살펴보는 눈 밝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에도 있어야합니다. 정치한다는 자들이 백성을 업신여겨 자기 배만 채우고 앉아 있는

    것이나 아닌지, 백성들이 치는 세금은 제대로 백성들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 몇몇 돈 많은 자들과 그들에게서 호사스런 대접을 받는 썩어빠진 권세자들이, 가장 애국자인 것처럼 거들먹거리지나 않는지, 이 나라 백성이면서도 어디 멀고 먼 나라에서 귀양 온 사람처럼 한숨만 지으며 살아가는 이는 없는지‥‥ 잘 살펴보는 눈 밝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눈 밝은 사람이 있는,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대접받는 가정, 교회,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멀리, 그리고 밝게 보는 눈! 무엇보다도 시대를 알아보는 눈을 활짝 떠야 합니다.


    서쪽 하늘에 구름이 일면 비가 온다는 것은 잘 알면서 바로 자기네 앞에 메시아의 날이 이르렀음을 몰랐기에 어리석은 유다의 백성들은 정치꾼들의 꾀임에 넘어가 “예수를 십자가에!” 하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눈이 멀면(盲目) 어디서나 비극을 불러 올 뿐입니다. 사랑도 눈먼 사랑은 사람을 잡습니다. 충성도 눈먼 충성은 나라를 망칩니다. 신앙도 눈먼 신앙은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눈을 떠 밝게 보아라” (79.1.28)






    5.          사순 제4주일   요한 9, 1-41 (가)  겉 보기와 속 보기

    김현준 신부


    사람은 타협하려고 하면 타협 가능한 자신과 타협하기도 하고, 속이려고 하면 속일 수 있는 타인을 속이기도 하고, 숨으려고 해도 숨을 수 없는 하느님 앞에서도 숨으려 한다.

    사람의 이런 속성은 상대방이 나를 완전히 속까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때문에 기인한다. 완전히 보지 못하기 때문에 속임과 억지도 가능하고, 속까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식별하기가 어렵고, 숨어 있는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눈이 어두워 앞을 보지 못하든, 사물이나 글에 어둡든 보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소경이라고 한다. 무엇을 보지 못하느냐에 따라 소경도 어떤 소경이냐로 나누어진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의 태생 소경이든, 사고나 병으로 인해서든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소경이다.

    글을 불 줄 몰라서 ‘눈뜬장님’이라 불리는 소경이 있다. 글을 모르기에 책을 봐도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라는 것밖에 모르는, 모든 것이 검게 보이는 ‘까막눈’을 가진 사람을 ‘눈뜬장님’ 혹은 ‘까막눈이’라고 한다.


    사랑의 소경이 있다,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였기에 타인에게 사랑을 줄 줄 모르는, 마음이 이기적이어서  타인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다.


    우린 사랑․신앙의 소경

    신앙의 소경이 있다. 눈을 떴기에 사물도 분간하고, 글도 알지만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다, 자기의 좁은 눈으로 자기의 선입견 속에서 모든 것을 보기에, 자기 눈과 속보다 더 큰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 하느님과 관계 맺지 못하기에 하느님은 없다고 하면서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다.


    사순 제4주일,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태생 소경을 완전히 고쳐주시며 그와 대화를 나누시는 예수님을 본다. 이 태생소경 치유 사건을’통해 예수님은 어둠에서 빛을 보게 하는 ‘생명의 빛’으로 드러나시며 어떤 사람이 진짜 소경인지도 드러난다,

    태생 소경, 그는 오늘 복음에서 ‘소경’으로 아홉 번이나 거명되며 예수님, 이웃 사람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다섯 번 만남을 가자면서 숨어있는 사실을 드러내는, 누가 진짜 소경인지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는 눈을 뜨기 전에는 죄인으로 드러난다.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러 드느냐”(요한 9,34)며 조롱과 멸시를 받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있다.


    눈을 뜨면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낸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소경 됨을 죄에 대한 벌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흔한 잘못된 선입견이 뒤집어진다. 태생 소경의 경우, 그것은 “자기의 죄 탓도 부모 의 죄 탓도 아닌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요한 9, 3) 도구로 나타나고 있다.


    눈을 뜬 후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낸다. ‘파견된 자’란 뜻을 지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으라”는 분부대로 눈을 씻음으로 눈을 뜬 그는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라는 것을 드러내어 증거한다.”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증거한다.


    태생 소경은 육체의 눈을 뜨면서 신앙의 눈도 점점 밝아진다, 눈을 뜨게 해준 예수께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처음에는 단순히 “예수라는 분이 나를 낫게 했습니다”라며 객관적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질문을 거듭 받을수록 자기와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을 느끼며 고백한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마침내 자기 믿음의 주인으로 생명의 주인으로 신앙 고백한다. “주님, 믿습니다.”(요한 9, 38)


    당신의 길이 최고야”

    그렇다. 태생 소경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그의 여정이 우리 신앙의 역사이다. 우리도 세례를 통하여 ‘생명의 빛’을 받았고 예수님을 겉보기로 만나지 않고 속마음을 헤아리며 만나는 신앙인이 되었다.


    겉보며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질문은 많이 하나 인정하지 않는다. 큰소리로 서로 올바로 본다고 다투기까지 하지만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실천도하지 않는다. 반면 상대방의 속마음을 헤아리며 속을 보이며 사는 사람들은 질문보다 “당신이 최고야”하며 먼저 인정을 해준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낮선 얼굴이 아닌 친밀한 반려자의 얼굴로 곁에 있어준다,


    오늘, 사순절을 통하여 부활로 이끌어주시는 예수님께 “당신의 길이 최고야”하며 속마음을 드리자. 그리고 희생과 보속의 사순절,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속마음을 열어 보이자,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다보시기 때문이다. (1사무 16,7)






    6.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진짜 소경”

    권지효 신부


    이 자리에 오인 여러분 중에는 소경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정말 소경이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소경이란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면 그는 소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보지 못하느냐에 의해서 어떤 소경인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햇빛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있습니다. 눈에 병이 났거나 상처가 나서 앞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은 책을 봐도 흰 것과 검은 것 밖에는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까막눈이라고 합니다.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베토벤 교향곡과 하이든 교향곡을 들어도 그 곡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 마음의 소경도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천대만 받아 온 고아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정을 받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을 모르는 소경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신앙의 소경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신앙의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없다고 까불어 대면서 돈만 벌어 재미있게 살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가련한 소경들입니다.

    이렇게 소경은 각양각색입니다마는 소경이 되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그 이유란 보지 못 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소경은 눈꺼풀이 붙었거나 각막이 흐려졌거나 또는 시신경이 마비되어 그것들이 햇빛을 가로막기 때문에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교만과 고집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자기를 부자라고 생각하면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기자신만이 이 세상에서 최고요, 돈과 명예만 있으면 아무 것도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구태어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잘 보고 있다고 하는 장님을 고쳐 줄 수 없는 법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부족함과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을 뿌리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장님이면서도 장님인 줄 모르는 사람이 바로 진짜 소경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태생 소경 중에서 누가 진짜 소경입니까? 오늘 복음의 진짜 소경은 예수님이 고쳐 주신 태생 소경이 아니라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태생소경은 자기의 부족함과 죄를 깨닫고,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했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 죄를 부정하고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짜 소경은 자기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자기 재미만 찾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심없는 사랑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며, 자기의 좁은 소견과 선입관으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진리를 진리로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소경이란 자기 교만과 고집으로 눈이 멀어 하느님의 진리와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삶의 목적도 의미도 모르고 이 세상과 자기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진짜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자기가 장님이라는 사실을 겸손되이 하느님께 고백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빛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할 때 하느님은 자비의 팔을 내밀어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진짜 장님에서 하느님의 찬란한 빛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오늘 복음의 태생 소경처럼 “주님 믿습니다!” 하고 소리 높여 외칩시다. 우리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되이 예수님 앞에 무릅을 꿇고 “주여, 나의 이 두 눈을 뜨게 해주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진짜 소경은 자기 시력이 좋다고 으스대기 때문에 신앙의 빛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 잘 보고 있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의 두 눈을 뜨게 해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태생 소경처럼 우리도 우리의 교만과 고집 그리고 자기 만족을 버리고 겸손되이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과 부족함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신앙의 빛을 더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짜 눈을 뜬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차라리 눈 먼 사람이라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7.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맹인에게 시력을 주신 예수”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나면서부터 맹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시력을 주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이 그 맹인에게 시력을 주심으로 자비를 베푸신 것도 중요하지만 맹인을 보게끔 함으로 당신이 누구인지를, 즉 당신은  <세상의 빛>이시란 점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고쳐 주실 적에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9,5)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상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빛으로서 예수님은 영신상으로 눈면 우리의 소경됨을 고쳐 주십니다.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고 세속의 영화나 재물에만 눈이 어두운 것, 영원한 구원이나 생명보다도 현세 사물에 더 열중하는 것은 모두 영혼의 눈먼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이 어둡고 캄캄하고 답답한 암흑세계를 환하게 비추어 줄 수 있는 세상의 빛은 도처에서 절실히 요구됩니다.

    신자 여러분! 맹인은 얼마나 불쌍한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맹인은 자기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맹인은 자기 주위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저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나 강산을 보지 못하며 또한 모릅니다. 생존경쟁의 대열에서도 뒤떨어집니다. 헬렌켈러나 이 용복 같은 사람은 백에 하나 천에 하나 날까 합니다. 여하튼 맹인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불쌍한 인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눈먼 영혼들은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입니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우심을 깨닫지 못하고 죄악의 추함과 그에 따라 오는 벌을 알지 못하고 현세의 쾌락이나 행복보다 후세의 영원한 생명과 기쁨이 얼마나 더 큰 것인가를 판단하지 못하는 이들의 소경됨은 비극 중에서도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건데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서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내리기가 일쑤입니다.


    즉 어린아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백 리 길을 단숨에 달려오는가 하면 수없이 많은 태아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낙태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그외 간통, 살인, 강도 행위 등 끔찍스러운 사건이 끝없이 매일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종교를 반대하는 행위, 종교와 윤리를 반대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고 개인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사례가 허다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복잡하고 혼란합니다.

    신자 여러분! 이 난세에서 무난히 처세하기 위해서는 오늘 서간에서 성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인들에게 부탁한 것과 같이 <여러분은 전에는 어두움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페 5,8)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과 행위를 본받아야 합니다. 40일간이나 엄재하신 예수님은 사순절 동안 우리의 극기와 재계와 참회를 요구하십니다.


    심한 엄재는 보통 사람에게는 어렵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해 보려는 사람들은 종종 실패합니다. 우리는 간단한 자체로부터 시작합시다. 가령 어떤 날은 식사 때마다 소금을 치지 않고 다음 날에는 담배를 덜 피우고 약주를 더 마시고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는다거나 음식의 찬을 줄인다거나 시원한 음료나 과일을 사양한다거나 혹은 한 잔의 물이라도 참는다든지 하는 등 얼마든지 좋은 마음으로 속죄하며 공로를 세울 수 있습니다. 또한 남의 무례함과 귀찮음을 참고 자신의 병약과 실망 등을 참는 것도 좋은 고행입니다. 이같은 착하고 선한 일을 하는데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의지 박약으로 자꾸 연기합니다.<지옥은 좋은 지향들로 준비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보통으로 마귀는 사람을 유혹할 적에 죄스러운 생활의 계속을 제안하지 않고 오히려 좋은 습관을 시작하고자 할 때 그것을 연기하도록 교묘히 비위를 맞춤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합니다. 사탄이 어린 마귀에게 영혼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을 교습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함정에 빠져든 영혼이 많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어린 마귀를 불러 ‘어떤 이론을 사용했니?’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면목이 없이 된 어린 마귀는 ‘최선을 다했어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은 없다고 말했지만 효과가 없었나 봐요’ 하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되든 안되든 또 다른 마귀 하나를 보내보았습니다. 그 마귀는 ‘나는 지옥이 없다고 말하겠어요.


    그러면 그들을 꼭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도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마침내 사탄은 자기의 제일 보좌요, 노련한 전문가인 브림스토운이라 부르는 자를 보냈더니 수천의 타락한 영혼들이 불타는 함정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했느냐?’, ‘하느님은 없다. 지옥이 없다고 말했니?’ 하고 사탄이 물으니까 ‘아니요, 서두를 필요 없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라고 브림스토운은 이를 드러내고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8.        사순절 제 4주일 요한 9,1-41 (가)   “하느님 과 사랑의 눈”


    오늘은 사순절 네번째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눈과 사람이 보는 눈이 다릅니다. 같은 사람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눈은 중요합니다. 사물을 보니까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눈을 통하여 사람됨됨이가 들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눈속임이 많습니다. 모든 상품의 부가가치는 모양과 색깔에서 부터 대부분이 옵니다. 때깔고운 야채나 과실은, 실상은 몸에 해로운 농약 투성이고, 고운 포장과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여진 식품은, 화학약품 투성이의 해로운 음식입니다. TV 광고는 눈을 현혹시킴으로써 구매충동을 일으키고, 훼손은 바로 눈의 약점을 이용한 상술일 뿐입니다.


    세상은 점점 본질 즉 알맹이보다는 외모 즉 포장을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본질을 귀히 여기고 포장이나 치장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됨됨이가 제대로 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눈을 통하여 사람 됨됨이가 드러난다는 말이 맞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깊은 묵상주제가 될 만 합니다. 예언자 사무엘은 王을 선택하여야 하는데, 아는 것이라고는 베들레헴의 이새 가문에 야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왕의 후보자가 있다는 사실 뿐 이었습니다. 이 집에 가서 이새의 아들 중 엘리압을 보니, 바로 왕으로 적합해 보였습니다. 잘 생기고, 튼튼하고, 똑똑하고, 재치 있고, 멋진 수염과 넓은 어깨, 당당한 태도, 근엄한 모습을 보고 왕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집안에 있던 일곱 아들을 차례로 보았지만, 야훼 마음에 드는 왕은 없었습니다. 결국 들판에서 양치기하던 막내아들 다윗을 만나고서야 왕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눈은 사무엘의 눈과 달랐던 것입니다. 형들을 제쳐놓고 막내둥이가, 튼튼하거나 장엄한 아들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또 다시 읽게 됩니다. 맹인은 흔히 죄의 벌을 받은 죄인으로 생각되어 보잘것없는 인생으로 천시를 당했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으니 다른 사람들처럼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께 가까이 갈 수도 없고, 항상 뒤 처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시고,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 드러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맹인은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너무나도 담백하게 이렇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그리고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서슴없이 부르게 되었습니다. 학식있고, 율법의 전문가이며 똑똑하다는 이들은 눈을 멀정히 뜨고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거지 맹인은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사람을 보시지 않으시며, 하느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잘나거나 똑똑한 사람들이 아닌 법입니다. 우리가 지닌 가치판단의 기준은 하느님의 눈에는 가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시작부터 세상 마칠 때까지 불변한 진리입니다.


    한가지 예를 듭시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면 인간의 상식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부터가 상식을 초월한 일입니다. 인간 가운데서 가장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말구유에서, 여행 중 주막에서 태어나십니다. 이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러 간 천사가 제일 먼저 찾아간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로마 총독, 유데아 왕, 대제사장, 귀족, 대학자들이었습니까? 천사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이었던, 밤새 양떼를 돌보던 양치기 머슴들에게 갔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 자리에 탄생하신다면 2000년 전의 천사들은 이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제일 먼저 알릴까요?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국회의원, 재벌회장, 대법관, 장군들일까요? 아니면 교황님, 주교님들일까요? 아마도 지금도 추운 길거리에서 포장마차 하는 아저씨나, 달동네 가난한 이들, 아니면 야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공장노동자가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 이들은 양치기며 어부들이고, 맹인이며 , 절둑발이 이고, 나환자들이고, 폐병환자들이며, 가난한 농부이고, 노동자들이며, 달동네 도시빈민들입니다. 하느님은 잘난 엘리압보다 막내 다윗을 택하셨으며, 잘난 눈뜬 바리사이과 사람보다 눈먼 거지를 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눈은 우리 눈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가난하고 소외 받고 눌리운 사람들을 동정하거나,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관심을 갖거나, 그들과 상종하거나, 그들과 함께 하려고 하면 무엇이라고 낙인을 찍히는지 아십니까? 예수께서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 길이 잡히고, 고문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터무니 없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가는 수난의 가시밭 길이며 , 종국에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까지 알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쓴잔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마시고, 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것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속사업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머리로 알아듣기 힘든 하느님의 구원 역사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가장 값지고 귀중한 이들은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보는 것과는 정반대로 보잘것없고, 보이지도 않고, 보여도 눈길 주기 조차 거부한 그러한 이들이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천대받는 사람들, 세상에서 위험하다고 단죄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번 한 주일 묵상 주제는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나도 선택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눈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을 보게 하여 주소서 ” 아멘.





    9.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스스로 소경이 된 사람들


    젊은 시절엔 희미한 불빛 아래서도 깨알같은 글씨를 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40대 중반에 이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경을 써야 작은 글씨를 읽을 수 있다. 50줄에 들어서면 점점 더 안경알의 두께가 찐빵처럼 두꺼워져야 한다. 이상한 것은 먼데 있는 것은 잘 보이는데, 가까이에 있는 것이 잘 안보인다는 것이다.


    나이가 먹으면 자기자신만 보지말고, 먼데 있는 이웃을 살펴보고 그들을 걱정하고 살라시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눈을 내리 뜨고 자신만을 볼 것이 아니라, 멀리 저 하늘의 하느님을 바라보고 살라시는 하느님의 뜻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만하다. 어쩠거나 눈이 흐릿하면 여간 불편한것이 아니다. 하물며 소경이 된 사람들의 고통이야 어떠할까?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은 그 나름대로 적응이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간에 소경이 된 사람의 답답함은 필설로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슬람교도들이 준 교훈

    요즘은 의슬이 발달하여 웬만한 병은 퇴치될 수 있다.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은 각막이식수술이나 안구수술을 받아 시력을 찾기도 한다. 의사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시력을 찾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 당연하고 그들 모두가 다 시력을 하루 빨리 얻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뜻밖의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가슴이 왠지 찡하고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그런 이상한 경험이었다.

    분명치는 않지만 약 15년 전쯤의 일이다, 성지순례단을 따라서 예루살렘을 간 적이 있다. 때마침 거기엔 나의 은사이신 안 신부님께서 ‘예수님 무덤성당’에 계셨다. 반갑게 그분을 만나뵙고, 신부님의 안내로 여기저기를 방문하였다.


    서쪽 문을 지나 이슬람교도들이 장사를 하는 시장을 통과하기 전 나는 신부님께 질문하였다. “신부님, 여긴 이상하게 소경들이 많네요?” 내가 질문하는 동안에도 60대쫌으로 보이는 잘생긴 소경 하나가 안내인의 손을 잡고 지나가고 있었다.

    신부님은 내게 “그 사람들은 열심한 이슬람교도들인데, 그들의 성지인 ‘메카’에 다녀와서 스스로 눈을 멀게 한 사람들이야, ‘메카’를 보았으니까 이젠 세상에서 다른 것을 볼 것이 없다는 거지. 다른 것들을 봄으로써 눈이 더러워지기 전에 눈을 멀게 한거야. 대단하잖아!”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참으로 이상한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 날 종일토록 그 이야기를 되새기곤 했다. 심지어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 내 눈을 찔러 소경이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 김이 빠져서 나 자신의 부족한 믿음을 슬퍼하였다.

    아직도 나는 내 눈을 멀게 할 수 없으니 계속 나의 부족한 믿음을 슬퍼할 뿐이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신다. 그 날이 안식일이라서 안식일에는 의료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생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소경은 육신적으로 눈을 떴으나 영적으로도 눈을 떠야 한다.

    영적으로 눈을 뜬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굳은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에게 예수께서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는 “선생님, 믿겟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주님, 믿습니다”하며 그는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는 영적으로도 눈을 떴다.


    영적으로 눈을 뜬다는 것은 바로 “주님, 믿습니다”를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영적인 소경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눈을 뜨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도 예수님은 성당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내게 말씀하신다. “영적인 눈을 뜨라.”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적인 눈이 점점 더 흐릿해져 가는 신앙인들이 많아지는 느낌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스스로 자신의 눈을 쩔러 소경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우린 무언가 해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기를 좋아하는 것을 좀 자제하는 것은 어떨까? 아마 그것은 텔레비전이 될 수도 있고 잡지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 중 오랜 시간을 헬레비전에만 정신 솓으면 영적 양식이 되는 기도도, 성서 읽기도 사랑의 실천 기회도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영적인 눈은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다,


    사순절이다.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서 작은 것이기는 하지만,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줄이고, 맹인들의 고통을 자주 생각해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줄 생각도 해야 할 것이다.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서는 나만의 의지로서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10.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하느님의 시선으로


    오늘의 전례 말씀에서는 내가 바라는 이익, 나의 선입관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만나야 함을 가르칩니다.

    제1독서의 사무엘과 다윗의 만남은, 하느님의 시선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무엘은 다윗의 형 엘리압의 용모와 신장을 보고 마음속으로 ‘바로 여기 야훼께서 기름부어 성별하실 자가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잘생긴 사람에게 호감이 가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무조건 호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보다도 더 깊은 혜안이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외형적인 용모나 감정적인 선입관을 뛰어넘어 누구나 똑같은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시며 그들의 마음을 바라보고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사람들의 대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된 소경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예수님께 대한 미움의 감정에 휩싸여 그 소경마저 함께 미워하고 배척합니다. 그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다인들의 마음 한구석에 이미 예수께서는 ‘우리와 다른 이’라는 선입관과 미움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복음에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열려가는 소경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체험과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다인들의 엇갈리는 반발속에서도 그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기적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예언자로, 예언자에서 주님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자신의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그는 하느님께 감사할 줄 알고 하느님께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성서에 나오는 소경의 기적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하느님의 은혜에 대해서 얼마만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시인은 한 송이 꽃이 곱게 피는 것을 보고도 기적이라고 하듯이, 일상에서 늘 있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체험들에 대하여 얼마만큼 마음을 열고 생활하는가에 따라서 하느님의 시선에 얼마나 더 가깝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느덧 사순시기의 반을 넘었습니다.

    그 동안의 삶은 어떠했는지 반성하면서 참으로 주님을 알아본 소경처럼 우리의 신앙도 더욱 깊어지도록 이 사순시기를 잘 지내야 하겠습니다.






    11.                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가)  실락원

    최인호 베드로/작가


    존 밀턴(1608-1674)은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이 자랑하는 대시인입니다. 대학시절에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라틴어를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졸업한 뒤에는 대륙으로 건너가 이탈리아에서 갈릴레오를 만나 우정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후 청교도혁명으로 공화제가 수립되자 고국으로 돌아와 크롬웰의 비서로 들어가 붓을 통해 군주체제에 강력히 대항하는 투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도 보람없이 왕정이 복구되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과로로 인해 실명당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기적적으로 처형을 면한 밀턴은 이때부터 전생애를 통해 구상했던 「실락원」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성서를 소재로 아담과 이브의 타락과 낙원추방을 묘사하여 인간의 원죄를 주제로 하고 있는 이 대서사시는 눈이 먼 밀턴이 입으로 구술하고 그의 딸이 받아쓰는 고통 속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실락원 처음에 밀턴은 다음과 같이 자신이 쓰려고 하는 서사시의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 시의 대주제(大主題)의 높이는/ 영혼의 섭리를 밝히고자 함이요/ 또한 사람에게 신의 도리를 옳게 전하고자 함이다/ 먼저 말하라/ 무릇 하늘도 그대의 눈을 가려 숨길 수가 없도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패배해 사형수가 되었고 눈까지 먼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하늘이 자신의 눈을 가려 영원한 신의 섭리를 숨길 수가 없음을 깨달은 밀턴은 신의 도리를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붓대신 입으로 불후의 명작을 토해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밀턴은 육체의 눈이 먼 순간 마음의 눈이 떠진 것입니다.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거지에게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른 후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게 함으로써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유다인들은 이 기적을 믿으려 하지 않고 생트집을 잡아 거지를 회당 밖으로 쫓아냅니다. 심지어 그 거지를 낳은 부모조차도 두려워서 자신의 자식을 모른 체합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본 사람은 아이로니컬하게도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그 거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서 “주님, 믿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믿음으로써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심안(心眼)까지 얻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자신들을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유다인들은 실제로 눈앞에 있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소경이며,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거지 소경은 오히려 눈밝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눈이 잘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한순간의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1고린 7,31). 다행히 우리는 이미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얼굴을 씻고 영적인 마음의 눈을 뜬 ‘파견된 자’들입니다. 밀턴이 비참한 패배와 육체의 눈이 먼 고통 속에서 비로소 마음의 눈을 뜬 것처럼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영적인 눈도 이 세상을 향한 육체의 눈이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향한 영적인 눈이 밝아졌을 때에 우리는 죄를 지음으로써 쫓겨난 실락원에 “오늘 정녕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루가 23,43).


  4. user#0 님의 말:

     

    사순 제 4 주일


    제 1 독서 : 1사무 16, 1b. 6-7.10-3a

    제 2 독서 : 에페 5, 8-14

    복     음 : 요한 9, 1-41


    제 1 독서 : 아말렉족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리품을 거두어 온 사건 때문에 사울 왕은 사무엘 예언자로부터 버림을 받았다(1사무 15장). 그후로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사울에게는 예언자가 떠난 것이 하느님께서 떠나신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후로 사울은 서서히 몰락하고 다윗이 등장하게 된다.

    사무엘 상 16장은 다윗이 어떻게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는가를 말해 준다. 형제들 가운데서도 가장 보잘것없던 다윗을, 양을 치던 목동을 사무엘이 기름 부어 성별(聖別)했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모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이요 주도권이다.


    제 2 독서 : 빛과 어둠을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 신자의 윤리를 말하는 텍스트이다.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다가 이제 빛의 세계로 넘어온 그리스도 신자들은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위치를 위로 올려야 밝은 빛을 볼 수 있듯이, 뜻을 하늘에 두고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 살아야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을 수 있다.


    복     음 :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9, 1)의 처지는 희망이 없는 세계, 어둠 속에 갇힌 한 인간의 절망적인 처지를 잘 말해 준다. 남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본인도 그렇게 체념하고 이 세계에 젖어 살았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빛의 세계가 열린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라고 사람들이 묻는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라는 것이 주님의 대답이다. 궁극적으로 죄의 본질은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측면에서만이 이해가 가능하다. 죄는 오로지 하느님의 과분한 은총을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다.

    우리는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에서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스스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이들은 종교적인 자기 만족에 빠져 태생 소경을 단죄하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할 뿐더러 그 표징을 거부한다.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하는 맹목적인 태도이다.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소경의 부모와 이웃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을 알아보았지만 그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여론의 압력이나 위에서 내리누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태도이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예수님께로 결단을 내리는 태생 소경이다. 치유의 표징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기 삶 안에 개입하신 하느님의 행위를 인정하는 태도이다.

    태생 소경은 스스로 눈이 멀었음을 인정하고 치유 받기를 원했다. 결국 그는 치유를 받고 빛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온전히 보게 된 것은 신앙을 통해서이다. “주님, 믿습니다.”(9, 38)라는 신앙 고백 덕분에 그는 온전히 고침을 받고 온전히 보게 되었다.


    눈을 떠라!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사순 제4주일로 기쁨의 주일, 장미주일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통한 죽음과 부활의 여정에 있어서 반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잠시 쉬며 나머지 여정을 더욱 기쁘게 가기 위한 다짐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요한 9, 1-41)은 지난 주일의 “생명의 물”에 이어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소경을 낫게 하신 치유의 기적을 통해 빛과 어둠이 어떻게 다른가를 뚜렷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화가가 쓸쓸한 저녁 풍경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어둡고 침침한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외딴집 한 채가 앙상한 나무 사이에 서 있고 땅은 녹다 만 눈덩어리들로 지저분했으며, 여기저기 웅덩이들이 깊이 패어 있었습니다. 깊은 비탄과 외로움이 풍기는 춥고 황량한 경치였습니다. 그러나 화가가 작은 집 창문에 노란 불빛을 그려 넣자 그 황량하던 경치는 마술을 부린 것처럼 생기를 띠어, 비로소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따뜻하고 활기찬 곳으로 변했습니다. 빛과 관련되는 이 이야기는 빛이야말로 생명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빛은 하느님을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홀로 불멸하시고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 분”(1디모 6, 16)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에도 빛으로 예언되었고(“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이사 9, 1; 마태 4, 16), 그분 자신도 세상의 빛(요한 8, 12)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 빛 자체이신 분이 어둠으로 가득 찬 절망의 인간, 소경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그 흙을 소경의 눈에 발라 주고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소경은 오직 믿음만으로 그 연못에 달려가 자신의 눈을 씻음으로써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몰랐을 때는 바로 소경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죄를 지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뉘우칠 필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씻어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치유된 소경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고쳐 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인정함으로써 성전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다시 만나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고 “믿습니다.”(요한 9, 38)라는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영적으로도 온전히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소경을 치유해 주었고 신원이 불분명하다고 해서 예수님과 눈을 뜨게 된 사람을 거부하여 스스로 눈뜬 장님이 되었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혀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모르고 옹골찬 고집으로 일관, 자신의 눈멂을 인정하지 않은 어리석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이런 눈뜬 장님이 너무 많습니다. 성당에서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집에 돌아가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 주교님이다 높은 사람이 오면 열심한 신자인 체하면서 사순절을 맞아 ‘십자가의 길’ 기도나 선행 한 번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 세속적인 일이나 자기 신원에 관계되는 일에는 모든 정성을 기울이면서 성서 한 번 보지 않는 사람, 성체 조배나 피정에는 요리조리 빠지면서 친목 모임이나 노는 일에는 기를 쓰고 찾아다니는 사람, 천주교를 취미 생활 단체나 친목 단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중 그 얼마나 쇄신의 긴박성을 감지하고 있는지, 본당 내의 많은 단체들, 레지오 마리애, 꾸르실료, 성모회, 매리지 엔카운터, 성서 모임, 성령 쇄신 등의 여러 단체와 회원들이 얼마나 뜨거운 소명의식으로 불타고 있는지, 자신들의 단체 발전에만 관심을 쏟은 채 타단체와의 협조에는 인색하지는 않는지, 어려움에 빠진 이웃을 외면하면서 로사리오 9일 기도를 바치다가 하루라도 거르면 큰일나는 줄 알고 있는 너무나도 미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지,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의 참된 복음의 가르침보다는 어느 성모상에서 흘러나왔다는 눈물에 더 쏟고 있지는 않는지, 태양이 빙빙 돌며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는 일 등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본질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는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눈뜬 장님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라는 제도의 벽을 넘어서서 기꺼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고백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더럽고 야비하고 치사한 것들을 폭로하여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에페 5, 10-13).

    야훼의 영이 이새의 다른 일곱 아들을 물리치고 여덟째였던 다윗을 선택하였던 것에서 나타난 것처럼 “하느님은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고 속모양을 꿰뚫어 보시는 분”(1사무 16, 7)이시니 오직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빈껍데기의 신앙, 눈뜬 장님의 신앙이 아니라 살아있는 능동적인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영적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어 빛이신 그분 안에서 영원한 삶의 기쁨을 누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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