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5주일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셨다
제1독서 : 에제 37, 12 – 14
제 2독서 : 로마 8, 8 – 11
복 음 : 요한 11, 1-45
우리가 이 사순절 마지막 몇 주간 동안 접해오고 있는 특별한 의미와 ‘상징적인’ 내용이 담긴 요한복음의 몇몇 이야기를 되짚어 본다면 거기서 우리는 점진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그분은 무한한 행복을 갈망하는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이시다(사마리아 여자와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 또 그분은 우리의 어둠을 밝혀주시는 ‘빛’이시다(태생 소경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오늘 바야흐로 그분은 ‘생명’을 소유하고 계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 안에 있는 권능과 힘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이신다(라자로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
분명히, 사순절 전례는 이 모든 내용을 주님의 은총의 도우심을 받고 있는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로부터 ‘풍성하게’ 생명을 얻기 위해(요한 10, 10참조) ‘물’과 ‘빛’의 원천이신 그분께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내적 변화의 모델로서 이해하여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보다시피, 그 여러 가지 ‘상징’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로 모아지고 있으며 마침내 ‘생명’이라는 것에서 그 의미가 최고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바로 그 생명을 무엇보다도 갈망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 인생의 나약함과 덧없음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작가도 다음과 같이 하느님께 소리 높여 기도 하였다 :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보옵나이다”(시편 35, 10).
사순절은 사순절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다시말해 비록 무수한 죽음과 고난의 시련을 겪는다 할지라도 – 바울로의 표현대로(로마 8, 13등을 참조) – 빠스카 ‘부활’이라는 밝은 목표를 향해 아주 힘차게 정진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려…”
사실 이 주일의 전례 전체는 놀랍게도 생명 – 순수한 상태에 있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체험을 통해 거듭 태어남으로써 더더욱 간절히 열망하고 꿈꾸는 그러한 생명 – 에 대한 찬미에 집중되고 있다.
그 생명을 통하여 마치 아픈 뒤에 건강을 되찾았을 때와 같이 모든 것이 더 아름답게, 풍요롭게 그리고 맛스럽게 새롭게 보이며 또한 감격적인 기쁨에 차게 된다! 그리고 우리를 위기와 곤궁에 몰아넣었던 그 모든 것을 더더욱 소중히 여기게 된다.
제 1독서는 에제키엘서에 나오는 ‘마른 뼈들’에 관한 커다란 환시(37, 1-14)가운데 결론 부분만을 전해주고 있다. 마른 뼈들은 바빌론 귀양살이에 보내져 가까운 결론 부분만을 전해주고 있다. 마른 뼈들은 바빌론 귀양살이에 보내져 가까운 시일내에 고국에 돌아올 희망이 완전히 ‘말라버린’ 히브리인들의 처지를 뜻한다 : “너 사람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에제 37, 11).
여기서 오늘 전례의 독서 대목이 이어진다 : 에제키엘 예언자는 귀양살이의 고통을 거쳐 이스라엘이 재건되리라는 것과 멀지 않아 조상들의 땅으로 되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예언한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은 마치 무수히 많은 죽은 이들의 무덤이 열린다고 하듯이 대단히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에제 37, 12-14).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돌려주는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창조의 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13절). 또 그렇기 때문에 ‘영’의 기운을 불러들인다. 여기서 말하는 영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살게 하는(창세 1, 2 ; 2, 7참조)생명의 ‘영’이다 : “보내시는 당신 얼에 그들은 창조되어,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시편 103, 30).
이 장면은 비록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집단적 재건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어떤 면으로 볼 때는 ‘개인적’ 부활(다니 12, 2 ; 2마카 7, 9-14.23-36 ; 43-46참조) – 라자로의 부활을 상징적 예표로 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되는 – 의 개념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또한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재건이 무엇보다도 특히 ‘영신적’인 사실이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에제키엘 예언자는 바로 앞장에서 하느님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에제 36, 26).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생명과 죽음은 무엇보다도 특히 영적인 것에 속한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이다”
성바울로도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한 오늘의 짤막한 제 2독서를 통해 이 점에 관해 언급하며,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육체를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라고 권고하고 있다.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결합시키시는 바로 그 힘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휩쓸어갈 죽음으로부터 조차 해방된다 :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로마 8, 10-11).
어떤 의미에서 여기서 우리는 에제키엘의 예언이 실현되고 있음을 본다 :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너희로 하여금 다시 살게 하리라”(에제 37,14).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새로운 사실은 이미 지금 이 순간부터 ‘하느님의 성령’이시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성령’(로마 8, 9)이신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의 영신 생명을 양육하여 길러주신다는 점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불어넣어주시는 이 풍부한 생명력을 통하여 죽음의 공간을 서서히 좁히심으로써 우리의 ‘육신적’ 부활 그 자체를 위한 터전을 마련해 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성령의 ‘능력’ 안에 살므로써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로마 8, 14)것이다. : 이것이 죽음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며 이로써 우리는 종말의 부활을 획득 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할 수 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11, 1-45) 라자로의 부활이 라는 놀라운 기적에 의해 더욱 확실하게 입증되고 있다. 내용은 상당히 길지만 아주 평이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다만 몇 가지 기본적인 내용에 대한 주석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예수와 라자로 그리고 그의 가족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에 찬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다 : 라자로의 두 자매는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오빠의 병에 대해 알린다 :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3절). 또 예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알리실 때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21절)라고 하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던가 봅니다”라고 말할 만큼 비통한 마음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신다(33-36절). 또 요한 복음사가 자신도 그 나름 대로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고 계셨다”(5절)고 한다.
바로 이러한 깊은 애정적 관계와 라자로의 두 자매들이 예수께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전했을 때 예수께서 처음에 취하시는 분명 무관심한 태도는 서로 아주 대립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예수께서는 베다니아에 가시기를 전혀 서두르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의도적인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 “그러나 라자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지내셨다”(6절). 그리고 예수께서 베다니아에 도착하셨을 때는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뒤였다(17절). 라자로의 누이 동생들은 예수를 대단히 신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좀더 일찍이라면 뭔가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1. 32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라자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타는 그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종말에 있을 부활을 생각할 뿐이다 :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24절).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많은 사람들도 예수께서 늦게 오신 사실을 비난한다 :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37절).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정반대의 태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물론 기적을 고대하는 강한 심리적 긴장감의 분위기를 아주 능숙하게 야기시키고 있는 복음사가 자신의 문학적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복음사가의 그러한 의도 외에도 죽음을 ‘극화시키지 않음’으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어떤 뚜렷한 신학적 지향도 있다. 예수께서는 마치 당신 자신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기나 하신 듯이(히브 2, 15 참조) 슬퍼하시지도 않고 서둘러 친구의 무덤에로 달려가시지도 않는다. 예수께서는 비통한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창조의 질서에 있어서 죽음이 야기 시키는 비극적인 내용과 실질적인 공포감을 느끼셨지만 또한 그 죽음이 마침내는 극복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에 그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시고자 하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친구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4절).
물론 예수께서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에 의해 ‘영광을 받으실’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기적을 이루시리라는 사실을 무덤에서 ‘돌’을 치우라고 명령하셨을 때 “벌써 냄새가 납니다”(39절)하고 성급히 말하면서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마르타에게 힘주어 말씀 하신다 :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특히 당신 자신의 죽음 – 복음사가가 곧 이어서 이야기하고 있듯이(“그 사람이 많은 기적을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대로 내버려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 : 47-48절) 바로 라자로를 부활시킨 기적이 보다 더 직접적인 화근이 되어 더 빨리 초래되는 -에 의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즉 그분은 부활에 의해 영광을 입게 될 당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최대의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이것이 요한 복음사가가 전체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신학적 주제이다.
그렇게 때문에 분명히 요한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라자로의 부활의 기적은 예수께서 죽음을 지배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고자 할 뿐만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곧 다가올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역사를 미리 상징적으로 예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본다면 라자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형’과도 같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라자로에 관한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공관복음의 전승에서 예수의 변모에 관한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비길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 수난에 앞서 어쩔 줄 몰라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예표를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이 전혀 생각지 못하는 십자가의 깊은 의미 곧,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길이며 패배가 아니라 승리에 이르는 길인 그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주고자 하신다”(B. Maggioni, in I Vangeli, Cittadella Ed, Assisi, p.153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오늘 복음 전체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 마르타의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엄숙한 언명에 담긴 깊은 의미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예수께서는 라자로를 부활시키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신 스스로 부활하시고 또한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을 위한 부활의 원천이 되시기 때문에 ‘부활’이시다. 또한 ‘생명’이시기에 즉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존재를 생성시키는 원천이시기에 ‘부활’이시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은 그분이 모든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오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께서는 마르타에게 모든 기적과 또 기적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근본원리인 믿음을 요구하신다 : “예수께서 ‘너는 이것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마르타는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26-27절). 그 결과 본문의 논조와는 거의 무관한 듯한 이 믿음에 대한 요구가 실질적으로는 그 본문의 내용을 설명해주고 해석해주는 본질적인 요소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모든 참된 제자들 안에 이미 ‘부활’을 현존케 한다. 따라서 마르타조차 믿고 있었던 것처럼(23절)마지막 날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다) :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 또 이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 신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이미 영원히 부활이신 그리스도께 일어났던 일들 그 자체를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활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반대인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는 눈앞에 다가와 있는 빠스카를 통해 거행하게 될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죽음 특히 영신적 죽음을 슬퍼해야한다 :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이 부딪치는 불확실성과 어려움과 괴로움을 모른 체하지 않으면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주고자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사순절이 담고 있는 신랄하면서도 깊이 있는 의미이다.

1. 김한수 시몬
1.1. 사순 제5주일
제1독서 : 에제 37, 12ㄴ-14
에제키엘 예언자의 설교 대상은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는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이 바빌론의 1차 침공을 받았을 때에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바빌론에서 에제키엘은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당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하여 예언하였다(에제 4-24장). 실제로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성전이 파괴되며 나라가 망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하게 되었다. 그러자 에제키엘은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 예고와 함께(에제 25-32장) 이스라엘의 재건을 예고한다(에제 33-48장). 본문은 이 마지막 부분에서 취한 것이다.
본문이 들어 있는 에제 37장은 소위 ‘마른 뼈들의 환시’로 이스라엘의 재건과 남북왕국의 재통일을 예고하고 있다. 마른 뼈들은 유배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데 이 백성의 재건이 두 가지 형상으로 묘사된다. 1-10절에서는 넓은 계곡에 바싹 마른 채로 가득히 널려 있는 뼈들이 하느님의 숨(영)에 힘입어 힘줄이 붙고 살이 오르며 살갗이 씌워져 다시 살게 된다. 하느님의 영께서 죽은 뼈들과 마찬가지인 이스라엘 백성을 유배 생활에서 해방시키시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환시인 것이다. 11-14절은 이 뼈들이 온 이스라엘 집안이라고 해석하면서 유배 생활을 무덤에 비유하고 있다. 이 무덤에서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주님을 다시 알아 모시게 되리라고 예고한다.
본문은 오늘 복음서가 전하는 라자로의 부활과 관련하여 선정된 말씀이다. 죽어서 무덤 속에 누워 있던 라자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여 부활한 기적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말씀인 것 같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죽은 상태에 있는 백성을 당신 영과 말씀의 힘으로 되살리시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을 믿는 이들을 죽음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시키시어 생명을 주신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 하느님의 영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곧 생명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 생활에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체험하였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의 여정에서 많은 곤경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 생명의 희망을 선포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라자로의 표징을 통하여 당신을 믿는 이들 역시 반드시 새 생명으로 부활하리라는 약속을 들려주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부활의 희망 안에서 사는 삶이다.
제2독서 : 로마 8,8-11
바오로는 그리스도 신자의 삶을 표현하기 위하여 ‘육’과 ‘영’의 대조 개념을 끌어들인다: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4절). 이 ‘육과 영’의 상반적 대조는 바오로가 자기 서간에서 즐겨 사용하는 주제의 하나이다(갈라 5,16-24). 특히 바오로의 인간학을 설명해 주는 전형적인 개념들이다. 오늘 대목에서도 두 개념은 서로 일치할 수 없는 상반되는 내용을 가진 실재로서 신학적 주요 사상이 된다. 두 개념의 상반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함이 인상적이다.
바오로는 에제키엘 예언서(37,12-14: 제1독서)의 출애급 상황을 자신의 그리스도론적 종말론적 입장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바빌론 귀향자들에게 무덤을 열어 백성을 끌어올린다는 구상적 표현은 가나안 귀환을 위한 위로의 말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바오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는 담보로 알아듣고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는 보장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전환점으로 그 자체 인간들을 분열과 결단으로 치닫게 하는 도전이 되고 있다. 그분의 복음은 세상에 도전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바오로가 말하는 소위 “그리스도의 사람”(9절)은 육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들은 벌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도전하는 성서(기쁜 소식)에서 우리는 꺼지지 않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향한 전환점이 되고 있다.
복 음 : 요한 11,1-45
앞의 두 주간의 복음에서 우리는 점진적인 계시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무한한 갈증을 풀어 주시는 ‘생명수’이시고(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어둠을 밝혀 주시는 ‘빛’이심을 보았다(태생 소경 치유 사화). 드디어 그분께서 ‘생명’이심이 드러난다. 그분께서는 ‘생명’을 소유하고 계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이 계시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곳이 라자로의 소생 사화이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일곱 개의 표징(기적) 중 최고봉은 ‘라자로의 소생 사건’이다. 이 사화에서 당신을 ‘부활이요 생명’으로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계시 말씀(25-26절)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말씀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입증된다. 하지만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이제 예수님의 죽음은 결정적인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의회를 소집하고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기로 결의한다. 이렇게 볼 때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예형이 된다고 하겠다.
죽음은 인간이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높디높은 장벽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죽음의 장벽을 뛰어넘고자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해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인간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 계신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것을 가능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은 육체적인 소생만이 아니고 결코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렇게 볼 때 ‘라자로의 소생’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라 생각된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목전에 두고 불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예표를 보여 주심으로써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일깨워 주셨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길이며 패배가 아니라 승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가르침이다.
◎강론
“너는 나를 믿느냐?”
“사람아,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사순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며 머리에 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순 첫 주에는 세상이라는 험난한 광야에서 악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주에는 타볼산의 변모를 통해서 주님께 대한 두렵고 떨리는 체험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셋째 주에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주님이야말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실로암 못에서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순5주일인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죽은지 나흘이 지난 나자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다섯 주간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아니 이 사순절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정작 무엇을 바라시는 걸까? 무엇 때문에 그런 복음들을 이 사순절에 들려주었을까? 왜 여러 차례의 기적들을 보여주고 심지어 죽은 사람마저 살려내는 기적까지 보여주셨을까? 하고 되불어 봅니다. 왜 그랬냐고 누군가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이것은 놓치지 않아야 할 물음입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 이 사순 시기에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는 결국 어디를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바로 나 자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자로를 살려내시면서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나를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말 제대로 알고서 믿는 것인지? 그저 소문으로만 듣고 믿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이 사순절 내내 그걸 나한테 묻고 계셨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자로가 무덤에서 살아나는 광경을 들으면서 그냥 한 쪽귀로 흘려버리시진 않으셨는지요? 그건 2000년 전 성서 속의 이야기일 따름이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반문하신다면,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의 본 뜻은 아직도 나한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체, 올해도 사순절만 그냥 지나버린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왜 나에게 예수님은 그런 물음을 묻고 싶어 하신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기적을 다 보여주었어도 참으로 주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극소수였기 때문입니다. 늘 믿는다고 하면서도 조금만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 닥치면 쉽게 주님의 등을 돌리는 우리 자신 때문입니다.
그 많은 기적을 보여주었을 땐 ‘주여, 주여, 믿습니다’ 하고 쫓아다니던 수 만 명의 사람들도 주님의 고통과 십자가 아래서는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순 기간 내내 다양한 복음을 통해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나를 정말 믿느냐?”하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묻고 계셨던 것은, 결국 우리를 위해서 대신 지고 갈, 피눈물의 십자가 속에서도 나를 믿고 따르겠느냐는 다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제 다음 주는 성주간입니다. 찬란한 기적은 간 곳도 없고 참혹한 고통과 피범벅이 되신 몰골의 주님께서 높다랗게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입니다. 남은 한 주간만이라도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성주간을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죽은 나자로를 살리신 주님께서 다시 한 번 나에게 물어오는 질문에 기꺼운 맘으로 말씀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하고 말입니다. 혹시 믿음이 부족하다면 이 미사 중에 믿음을 더해달라고 도움을 청하도록 합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
1. 말씀읽기: 요한11,1-45
2. 말씀연구
오늘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살려 주십니다. 라자로의 부활을 통해서 나 또한 믿음을 통해서 부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부활을 위해서도 예수님께 믿음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1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님과 친분이 있던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진 올리브 산 동편 기슭에 자리한 베타니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와는 다른 곳입니다.
라자로는 “하느님이 도와주신다”란 뜻을 지닌 엘 아자르의 준말 라자르가 그리스어로 발음된 것으로 당시에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베타니아 출신 라자로란 표현은 역사상 실재인물이었음을 뜻합니다.
2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와 그의 자매들과 각별히 지내셨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집에 머무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닦아 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3 그리하여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라자로가 죽어가자 동생들은 예수님게 사람을 보냈스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그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고 알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님의 자비를 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친교가 있었던 그녀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셨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라자로의 병을 알리면서도 예수님을 걱정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다고만 알려 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겨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짧은 알림에는 “신중하고도 깊은 신뢰에 찬 열렬한 소망과 기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죽어가는 이를 주님만이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4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전갈을 들으셨지만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다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라자로는 예수님을 자비를 통하여 살아나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의 권능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현존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은 불과 연기로, 폭풍우 속의 번개와 천둥으로, 시나이 산에 이는 바람으로, 지진으로, 천국의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은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모든 일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병을 기적을 통하여 아버지를 계시하는 계기로 간주하시는데, 그 기적은 라자로를 무덤 밖으로 불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 이 기적 사건은 유다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사형시킬 최후의 결단을 내리도록 자극할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청하는 이의 기도를 한번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불쌍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는 예수님! 다가오면 누구든지 반겨주시는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와 두 여동생을 사랑하셨습니다. 나 또한 예수님께로 다가간다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편애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편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드린 사람들은 사랑, 그 이상으로 받게 됩니다. 차고 넘치도록 받게 됩니다. 결코 편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묵으셨습니다. 이것은 라자로와 그의 두 여동생을 많이 사랑하셨다는 이야기와는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지체하신 이유는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라자로의 병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를 만들어 줄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7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이틀이 지난 뒤에야 예수님께서는 유다로 돌아가시려는 계획을 알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로 가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일을 하러 올라가시려는 것입니다.
8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제자들은 불평을 털어 놓았습니다.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다에 가시면 예수님께 닥쳐올지도 모르는 위험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랑이의 입 속으로 왜 스스로 들어가려고 하시는지 제자들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날이 저물기 전에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양이 비추고 있는 한 길을 가는데,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계속 가시던 길을 가셔야만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마련해 놓으신 지상생활의 기간이 아직 남았기에, 유다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의 때가 다가오면 그 때 비로소 유다인에게 잡혀 수난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10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예수님께서 유대지방을 여행하신다는 것은 사실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낮과 밤의 의미를 잘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낮에 돌아다니며 이 세상의 빛(예수님)을 보기 때문에 다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낮 동안(하느님께서 일하도록 주신 시간동안)에는 다칠 위험(구원을 잃을 위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11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잠들어 있다는 것은 죽음의 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깨운다는 것은 죽음의 잠으로부터 깨워 일으킨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다는 뜻입니다.
12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가기 싫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잠이 들었다면 곧 살아 날 것이니 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13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위한 주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배려인 것입니다.
14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라자로는 죽었다.” 분명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집에 머무실 때 제자들도 함께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생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다는 것이 놀랍고, 또 그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즉시 라자로에게 가시지 않으신 것도 놀라웠을 것입니다.
15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예수님께서 라자로와 함께 계셨다면 라자로는 죽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곳에 없었으므로 라자로는 죽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실 것이니, 죽은이의 부활을 본 제자들은 믿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해 주실 것만을 생각하시는 것 같스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라자로에게로 가자고 말씀을 하십니다.
16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유다인들을 만난다는 것은 또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굳히신 것을 알아차린 토마스는 어떠한 위험을 당할지라도 스승을 따르겠다고 결심할 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에게도 그런 결심을 갖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토마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에 빠질지라도 감수할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 또한 예수님과 함께 생사를 같이한다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17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곧 묻어 버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흘 동안 근처에서 떠다니다가 사라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죽은 라자로를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께서 지체하신 이유가,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한 친구를 도와주는데 있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8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1 스타디온은 185미터입니다. 그러므로 약 3킬로미터 정도 되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많은 유다인들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습니다. 지금의 신자나 비신자들이 그러하듯이 상가집은 꼭 가서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먼저가신 분을 위해 기도해 줍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와 있었습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오시는데 예수님을 마중하러 나가지 않은 이유는 오빠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컸기 때문일 것이고, 예수님께 대한 서운함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상황도 알고 있었지만 가까운 곳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해 주지 않으신 예수님께 조금 서운했을 것입니다. 아니 오빠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원망했을 지도 모릅니다. 가까운데 계시는데 오시지도 않고, 큰 능력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오빠를 죽게 내 버려 두심에 대해서…, 그래서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죽은 오빠를 예수님께서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믿고 있지만 믿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이라는 말의 의미를 사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유한한 나의 모습을 자꾸 하느님께 투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부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신앙에 대한 확신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의지를 마르타에게 알리십니다. 라자로를 살리시겠노라고. 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살아난 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르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교리를 고백합니다.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마르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살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마르타가 고백한 것은 마지막 날에 죽은 이들이 소생되리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이 고수하였던 믿음입니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음의 지배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영혼과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이것을 마르타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믿는다면 라자로는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에는 늘 믿음이 따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나 또한 예수님께 믿음을 보여 드려야 하겠습니다.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르타는 즉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믿는다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믿는다고.”라자로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28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마르타는 주님의 의지를 조용히 마리아에게 알려 줍니다. 그러나 마르타가 귓속말로 속삭인 일은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마리아가 곧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본 유다인들은 그녀가 울기 위해서 무덤을 찾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동정하고 위로하기 위해 뒤를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직까지 마을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29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찾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슬픔에 잠겨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마리아. 처음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리아는 집에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일수도 있겠지만 슬픔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예수님께 대한 원망이 있었기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타가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을 알리자 그때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슬픔에 가려서 알아채지 못했지만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시는 예수님게서 오셨다는 것. 이제 마리아는 힘을 내어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
30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마리아와 마르타가 당신께로 오게 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님께로 급히 나가는 것을 유다인들은 무덤에 가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슬퍼해 주기 위해 마리아를 따라 나섰습니다.
32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이르자마자 그 앞에 엎디어 마르타와 같은 말을 되풀이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라자로를 사랑해주셨던 예수님 앞에서 오빠를 생각하면서 다시 울음을 터뜨렸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슬픔에 가려서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던 그녀도 오빠의 죽음이라는 큰 슬픔 앞에서 눈이 가려졌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원망하는 듯한 말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시지 않아서 오빠가 죽었습니다. 왜 안 오셨습니까?”그런데 하느님을 내 마음대로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물어야지 내 뜻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쉽게 저지르는 잘못중의 하나라는 것을 꼭 기억합시다.
33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마리아도 울고, 또 유다인들도 울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북받치는 이유는 나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과 라자로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눈물까지 흘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인간적인 슬픔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노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과 병고에서 보았던 사탄의 손길, 즉 어둠의 권세를 향한 분노였습니다. 이제 세상의 통치자인 어둠의 권세는 예수님께서 받으실 영광과 아버지께로의 귀환으로 말미암아 내쫓기게 될 것입니다.
또한 마음이 산란해 지셨다는 것은 사랑하는 라자로를 살리려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이 사건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는 유다인들의 마음을 아시는 그 고통이 교차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이 기적을 통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품게 될 것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어디에 묻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심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 와서 보십시오.”하고 대답합니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눈물을 흘리셨다는 그리스말은 소리 내지 않고 운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감정이 북받쳐서 큰 소리로 운다는 것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그분의 인간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어머니와 같은 깊은 애정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36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본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무척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것을 본다면 나 또한 예수님께 사랑을 드리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쪽을 보기에 시기와 질투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37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그들 중 어떤 이는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자로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예수님께 놀라운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눈먼 사라믜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부닝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부활 가능성은 그들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왜 예수님께서 그를 구하기 위해 좀더 빨리 오시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것입니다.
38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시신을 자연동굴 또는 인공으로 바위에 판 동굴 속에 묻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돌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 무덤은 동굴이엇는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습니다.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죽은 이를 일으키시려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돌을 치우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봐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누가보기에도 불가능합니다. 벌써 썩어서 냄새가 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돌을 치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황당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하고 말씀을 드립니다.
40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즉, 돌을 치우라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내 생각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되는 것은 내가 안 되는 것이지 예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41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은 궁시렁 거리면서 돌을 치웠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이것은 기적을 일으키도록 능력을 형식적으로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갈망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아버지께서 들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라자로를 부활시킨 기적을 포함하여, 무엇이든지 예수님께서 청하시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그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그분의 일을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나 또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노력하고, 그렇게 기도하며, 그것을 이루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42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일이라고 부르는 기적들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아버지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 차려야 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기도는 라자로를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 즉 생명을 주는 일에 대해 기쁨을 표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이 말씀은 마치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모습이 보여 지는 것 같습니다. 말씀 한마디에 생겨나는 모든 것들. 이제 그 말씀대로 될 차례입니다.
44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제 기적이 일어납니다. 죽은 라자로가 손발은 베로 싸 매인 채, 또 얼굴은 수건으로 감긴 채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가운데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옵니다. 라자로의 부활을 통하여 믿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기적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즉 영적인 죽음을 깨울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표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풀어 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라자로를 자유롭게 해 주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놀라움에 사로잡힌 유다인들에게 자기네 손을 가지고, 기적을 만지며, 다시 살아난 라자로가 귀신이 아니라 뼈와 살이 있는 라자로임을 확인하게 하시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생명 그 자체이시고, 인간들에게 나누어 주는 생명이시며,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이어서 죽음으로 인하여 결코 파멸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안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본다면, 아니 가까이에 있는 거울을 통하여 나 자신을 바라본다면, 나에게 해 주신 엄청난 기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눈을 감지 말고, 귀를 막지 말고,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들을 바라봅시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을 봅시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합시다.
3. 나눔 및 묵상
1. 내가 만일 마리아와 마르타였다면 예수님께 어떻게 말씀 드리겠습니까? 오빠 라자로가 아프고, 사람을 보냈지만 예수님께서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빠가 죽은 지 삼일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어떻게 말씀드리겠습니까?
2.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슬퍼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느낌을 함께 나눠 보면서 예수님께의 라자로를 향한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사순 제 5주일
1. 김정진 신부(가)/2 2. 김광식 신부(가)/3
3. 강길웅 신부(가)/6 4. 변희선 신부(가)/8
5. 김현준 신부(가)/9 6. 도현우 신부(가)/11
7. 권혁시 부제(가)/12 8.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14
7.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17 9. 라자로야, 나오너라/17
11. 최인호 작가/19 12. 무덤을 열다/20
1.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죽은지 나흘이나 된 라자로를 부활시키신 드라마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전 복음 성서를 일별 해보면 예수님이 세 번 죽은 사람을 소생케 해 주신 것을 압니다. 즉 과부의 아들과 백부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라자로의 소생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이면에는 지극히 큰 교훈이 깃들여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죽은 사람까지 부활시킬 수 있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고 생사 문제에 관하여 훨씬 능가하신 분이시란 점을 뚜렷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죽음이란 인간 사회에 커다란 비극이요 죄악의 벌이요 모든 것을 종식시키고 종말을 고하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이란 것입니다. 헌데 예수님은 오늘 이 같은 죽음에서 라자로라는 한 인간을 되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란 가장 비참하고 죄악의 벌인 구렁텅이에서 인간을 구출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즉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요한 11,25) 하고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자 여러분! 요즈음 사순절에는 우리 모두 영신상으로 재생하는 시기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죄악과 악습에 죽고 예수님을 따라 성령 안에서 부활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이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단 죽어야만 소생이라는 새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악이란 무덤에 묻혀야 합니다. 또한 이기심, 사리사욕, 탐욕, 물질욕, 명예욕 등 자기 중심의 생활양식의 무덤에 단단히 묻혀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리하여야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에서 소생할 수 있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 여러분! 죄악에 죽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우리 죄악을 참회하고 회개하며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같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육체적인 것에서 마음을 돌려 영신적인 것으로 마음을 쏟게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물에 시간과 정력을 기울이는 것보다 천상의 것과 신앙 면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경이야말로 곧 우리의 정신적인 재산이며 소생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예수님은 죽은 라자로를 부활시키시기 전에 당신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관하여 말씀하셨고 마르타로부터 신앙의 고백을 받았습니다. 마르타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저는 믿습니다.”(요한 11,27) 라고,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거나 어떤 병을 고쳐 주시거나 할 적마다 언제든지 믿음을 요구하시며 당신의 혜택이나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보셨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딸을 고쳐 주실 적에도(마태 15,28),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자가 12년간이나 하혈증으로 앓던 병이 날 적에도(마르코 5,34) 그들의 믿음이 필요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참다운 믿음은 또한 우리에게 성령과 생명을 줍니다. 죽은 라자로에게 생명을 주셨듯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안겨 주십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생명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사순절을 통해서 점차로 굳세어지고 깊어지지 않는다면 라자로의 부활이든 예수님의 부활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부활이 별로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의 정신을 따라 죄악을 참회하지 않고 극기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순절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도 허망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죄악으로 인해서 죽은 우리를 부활시키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도록 예수님께 열심으로 기도 바칩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죄악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예수님께로 돌아가서 부활절 계명을 지킴으로써, 즉 판공성사를 열심히 봄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도록 합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신생활의 쇄신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함으로써 우리가 죄악으로 말미암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것이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2.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
김광식 신부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 적은 없으십니까? 인간은 누구나 죽은 사람 앞에서는 으레 너그럽고 관대합니다. 아마도 죽은 자는 이 이상 우리를 못살게 굴거나 손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평소에 사이가 나빴을지라도 비록 악인이었을지라도 죽은 다음에는 애도의 뜻을 표하고 살아 있을 때 좀 더 잘해 줄 것을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부분적이나마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라자로가 죽어 있음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우리와 친분이 두터웠다거나 평소에 존경하고 사랑하던 사람이라면 그 슬픔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고 머지않아 내 차례가 온다는 것을 피부로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한편 인간은 죽음에 대해 조금씩은 공포를 갖고 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이 만일 지금 당장 죽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렇게 두렵고 어떻게 생각하면 무섭기까지 한 죽음을 이기는 방법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사실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영생에로의 첫 발을 디뎌 놓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영생에로의 관문을 통과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영벌을 받는 시작이 될까 두려워서 입니다. 신념 없는 삶이, 신앙 없는 삶이 바로 죽음을 무섭게 하고 있습니다.
약 2년 전 저는 제가 평소에 존경하던 사회적으로도 저명한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그는 불행히도 주의 사람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을 너무 믿었던 탓인지 신앙 갖기를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너무도 비참하여 아직도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그는 죽는 순간 평상시에 갖고 있던 그의 고상하고 덕망 있는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나는 안 죽어! 내가 왜 죽어!” 하며 눈을 크게 뜨고 큰 소리로 괴롭게 울부짖다 죽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념 없는 삶의, 신앙 없는 삶의 최후라고 생각됩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 영생을 얻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저는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 중인 어는 사형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신문지상을 통하여 공개된 포악 무도한 살인자였으므로 누구 하나 그와 접촉하기를 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에서 성세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된 후부터는 그의 생활은 놀랄 만큼 변화되어 갔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언제 죽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자기 죄의 대가를 달게 받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몇 번이나 거듭해서 저는 받았습니다.
또한 짧은 기간이나마 그리스도를 알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고 하며 비록 교도소에 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결국 교수대위에 서게 되었고 죽는 순간에도 영생을 얻는다는 확신의 미소를 띠며 성가를 크게 불러 주님을 찬양하면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교도소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비록 사회에서 버림받은 죄인이었지만 참된 신앙을 가짐으로써 죽음을 통해 새 삶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앞에서 말한 저명인사의 죽음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죄인인 사형수의 죽음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죄에서 해방시켰음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라자로를 부활시키신 것은 바로 성세성사로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된 우리들이 죄에서 부활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부활하기 위해서는 마르타와 같은 신앙고백 즉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저는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이 요구됩니다.
라자로가 죽은 후 그녀의 오빠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믿으라고 마르타에게 요청하신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의 힘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는 자는 결코 죄의 구렁텅이 속에서 허덕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만일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한 마르타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와 언제나 함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혹시 하느님을 선택함으로써 그 외에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세속의 재물․명예․권력에만 온갖 신경을 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봅시다. 하느님보다는 세속 사물에만 관심을 갖게 될 때 우리는 다시 죄악 속에 죽게 될 것 입니다. 우리가 만일 다시 죄악 속에 죽어 간다면 사랑하는 라자로의 죽음을 보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듯이 하느님의 아들딸들인 우리의 죽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생활해야겠습니까? 구원의 시기, 은총의 시기인 사순절인 요즈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우리는 어떻게 지내야겠습니까? 같은 형제들 안에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세속 사물에만 신경을 써야되겠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우리가 성세성사를 받을 때 말한 신앙고백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특히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인 만큼 극기와 보속으로 우리의 죽음을 잘 예비하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희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여 다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누리도록 합시다.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3.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죽은 자여, 일어나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에제 37,12b-14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내리라)
제2독서 로마 8,8-11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복 음 요한 11,1-4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오늘 복음에서 죽은 라자로에게 외치신 주님의 우렁찬 목소리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무덤 속에서 주님의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실 믿고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것도 바로 끝 날에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함입니다. 거기에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으며 희망이 있습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어 상여에 실려 나갈 때에도 예수께서는 그 앞에 가셔서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삶과 죽음이 바로 예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분에게만이 참된 생명이 있고 부활이 있습니다.
인간이 죽으면 허무로 돌아갈 것인가. 이것은 많은 이들이 죽음 앞에서 가져 보는 공통된 두려움입니다. 죽음이라는 어두운 문을 통해서 인간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 흙으로 가는가. 흙으로 가면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정말 허무인가. 이처럼 인류는 죽음이라는 수수께끼 앞에 영원히 혼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걷혔습니다. ‘죽음’에 외치신 예수님의 목소리 앞에 허무는 사라졌으며 죽음 그 자체도 세력을 잃었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삶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죽어서도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심은, 당신이 장차 보여 주실 그 엄청난 사건인 부활을 암시해 줍니다. 썩어서 냄새가 났던 라자로가 다시 살아났듯이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죽었다가 그처럼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인류를 죽음에서 구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뜻깊게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얼마나 큰 감격스런 외침입니까. 살아 생전의 모든 감격적인 사건을 합쳐 봐도 부활의 감격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만큼 죽음에서의 부활은 전 생애를 보상해 주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구약의 경우에 보면, 죽은 자가 다시 살게 되리라는 믿음은 크게 발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과 내세의 삶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현실만이 중요했으며, ‘지금, 여기서’ 잘먹고 잘사는 것만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이나 시련은 큰 불행이었습니다. 고통은 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를 일시에 전도시키셨습니다.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직접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삶은 지금 여기에서 잘사는 것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못 먹고 못사는 사람들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럼 누가 과연 잘사는 것이냐. 부활의 새벽을 차지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의 삶을 산 것입니다.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우리는 그래서 살아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봐야 합니다. 영광을 볼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믿음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보았습니다. 믿었기 때문에 죽은 오빠가 살아나는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뭘 믿느냐.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길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믿으면서도 술에 묶여진 사람이 있고 화투에 갇힌 사람이 있으며 춤바람에 탈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탐욕과 쾌락에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사치나 허영, 오만함과 불친절이라는 흙 속에 묻힌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육신의 두 눈은 멀쩡하게 떠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죽음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죄중에 빠진 우리 자신이 무덤 밖으로 뛰어 나와야 합니다. 얽어매고 있는 끈을 용기있게 풀고 나와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부활의 아침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금년 사순절에 어떤 자매가 저를 찾아와서는 “뭘 주저하고 있느냐. 빨리 나오너라.”하시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답니다. 이 자매 는 몇 달 동안 주일 미사에도 나오지 않고 신앙을 쉬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고해성사를 보고 나더니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신앙이 죽은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부활을 준비하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예수님이 백번 부활하신다 해도 우리 자신이 부활의 새벽을 승리로 맞이하지 못 한다면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잘살았다는 인생의 가치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죽음에서 벗어나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사순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4.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아버지의 눈물
변희선 신부
내가 눈물의 의미를 깊게 배운 것은 아버님의 눈물을 통해서다. 나에게 중요했었던 사건들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 적어도 네번의 큰 눈물을 흘리셨다. 물론 아버지의 나를 위한 눈물은 더 많았을 것이지만 말이다.
첫번째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말기에 왼손을 크게 다쳤을 때였다. 어머니의 설명에 의하면, 다친 나의 손을 본 아버지는 며칠 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 아버지도 아주 어릴 때, 당신의 오른손을 심하게 다치셨기 때문에, 특별히 나에게 더욱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대하여 요사이에야 깊게 동감하게 되었다.
두번째는, 초등학교를 마친 내가 서울의 혜화동에 있는 성신중학교(소신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했을 때였다. 시험을 치르기 전날 예비소집 때에 방학동안이 아니면 부모님도 못보고, 새벽에 일어나 찬물로 세수해야한다는 교장신부님의 설명을 듣고, 차라리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나로서는, 입학시험의 낙방이 아주 슬픈 일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의 이러한 묘한 마음을 잘 모르시는 아버지는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 석자가 안보이자 끝내 펑펑 우셨다. 그러니 철부지였던 내가 아버지의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근처의 식당에서 우족탕을 드시면서도 나의 낙방을 아쉬워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새겨져있다.
세 번째는, 오랫동안 여러모로 번민하고 망설이던 내가 드디어 결단을 내리고 예수회에 입회하기 위해서 집을 떠나던 날이었다. 아버지께 큰절을 올리자, 『한번 집을 떠나서 출가했으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말아라』 하셨다. 그 순간 아버지의 두 눈은 눈물로 가득하였다. 나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서 얼른 집을 나섰다.
마지막은, 아버지의 임종 때였다. 하루 종일 우리 가족들을 쳐다보시던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과장된 표현으로) 폭포수와 같은 눈물을 흘렸다. 결국 아버지는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숨을 거두셨다. 그리고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서 형님이 그분의 눈을 편하게 해드렸다
요즈음 나는 위에서 말한 아버지의 눈물들이 모두 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오래된 대중가요에서 「사랑은․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하고 있음도 동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눈물은 인간의 마음(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오늘의 복음을 보면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께서도 눈물을 흘리신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준다. 우선 그분이 죄 이외에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예수님도 우리 인간들처럼 연약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은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사랑과 감정의 소유자임을 입증해준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다쳐서 고통받고 있을 때에, 내가 시험에 낙방했을 때에, 내가 집을 떠나 어려운 수도생활로 들어갈 때에, 그리고 지상의 삶에서 서로 헤어질 때에 사랑의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도 당신의 친구 라자로가 죽었을 때에 역시 우셨다. 그리고 얼마 후면 당신 스스로도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것을 예감하시고 슬프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눈물은 그분께서 우리 인간들의 고뇌와 아픔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는지를 웅변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단순히 인간적 감정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사랑이 담긴 눈물은, 당신을 믿는 이들 모두에게 죽음을 넘어서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요한 11,25) 하느님 구원의 메시지이기도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땀은 우리 인간 구원을 위한 당신의 한없는 사랑의 처절한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할 것이다.「오늘도 우리의 죄와 고통과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사랑하올 주님! 비천하고 미약한 저희 죄인들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5.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김현준 신부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세가지 일을 해야 참 사람이다. 아들을 낳아야 하고, 책을 내야하고 나무를 심어야 사람으로 할 일을 한 것이다.”
이 격언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이 세상에서 무얼 남긴다는 데에 기준을 둔, 그래서 사람으로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격언인 듯싶다. 아들, 책, 나무 이 세 가지가 연결되는 공통점은 오래 남는다는 것, 따라서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요한 복음은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이며 ‘죽음과 부활’이 그 주제이다, 예수님과 라자로와의 관계는 오늘복음 안에서 매우 ‘돈독한’ 우정의 관계로 나타난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라는 마르타의 전갈을 받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돌에 맞을 위험을(요한 11, 8) 무릅쓰고, 라자로와의 우정으로 그를 찾아가신다 .예수님 자신도 “우리 친구 라자로”라고 부르고, 그의 죽음을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보시고, “눈물을 흘리시기”까지 하셨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과 비통한 마음을 라자로에 대한 우정뿐 아니라 당신의 죽음도 눈앞에 두셨고, 또한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대치시켜야 할 바로 그 죽음과 맞부딪치셨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당신 사명 완수를 위한 그 죽음을 눈앞에 두신 처지였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 잊을 수 없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체험을 한두 번씩 갖고 있다. 나도 지난해와 올해 토, 6개월 동안에 3번이나 거푸, ‘돈독한’ 관계에 있던 사람의 죽음을 체험했다.
나와 함께 살던 이 베드로보좌 신부의 갑작스런 교통사고에 따른 죽음, 나의 전임자셨고 옆 본당에 계셨던, 선교사로 42년 간 이 땅에서 봉사하시다 아침녘에 갑자기 돌아가신 임 요한 신부님, 같은 본당에서 같은 해에 나는 소신학교로, 당신은 대신학교로 입학하여, 같은 교구에서 사제생활을 하다, 과로로 쓰러진 황 요한 신부님의 죽음이 그러했다. 앞의 두 분은 내 손으로 염하고 입관했다, 특히 이 베드로 보좌 신부의 죽음 때에는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아, 하늘아!”, “하늘도 무심하지”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동터오는 새벽녘에 몸을 씻기고 닦고, 수단과 제의를 입히고 돌아와, 주일 새벽 미사를 드리러 제단으로 나올 때, “너는 제의를 입고 잠들었고, 나는 제의를 입고 너를 위한 미사를 드리고 있다니․..” 이 기막힌 현실에 죄인으로 면목 없고, 순서가 잘못된 생각만 들었다.
왜 하필 이 신부였을까? 이제 갓 서품 받고 일년밖에 안된, 첫 일터를 마지막 일터로 하고 떠나게 했을까? 이런 물음에 대해 레위기는 내게 이런 답을 주었다. 하느님께 바칠 제물의 조건은 ‘흠이 없는'(레위 22,21), ‘살아 있는'(레위 23,11), ‘일년 안된'(레위 9,3), 그리고 ‘쓸모 있는'(말라 1,14) 수송아지여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하느님 보시기에 제물의 조건에 가장 적합한 제물이 이 베드로 신부가 아니었을까, 라자로의 병이 “죽을병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듯. 사랑하는 오빠 라쟈로의 죽음 앞에서 그의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간청한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 이것을 믿느냐?” 하시며 라자로를 부활시키신다. “주께서 구원을 내리셨다”는 그의 이름 라자로(LAzARUS)에 걸맞는 부활의 은총을 베푸신다.
부활은 확신에 찬 믿음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부활이란 단순히 죽을 생명이 언젠가 되살아나는 생명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부활은 하느님께 대한 확신에 찬 우리의 믿음이며, 하느님께 온전히 내맡기는 우리의 봉헌이며, 하느님만이 가능하다는 우리의 희망이며, 그래서 죽음을 넘어 내게 다가오는 현재이며, 또한 영원한 미래이다. 그러하기에 부활은 매일매일 잠자리에 드는 것이 죽음이고, 아침이 오면 다시 일어나 햇빛을 보고 감사하며, 밥상에 앉은 가족을 선물로 받고, 일터로 나감을 은총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봄이 온다. 4월이 온다. 4월은 산천 어디를 둘러봐도 만물이 살아 숨쉬는 생명의 달이며, 또한 부활이 함께 하는 달이다. 나와 함께. 생명과 부활의 신비를 살아가는 나무 한 그루쯤 심는, 잊지 못할 사람을 생각하며 책 한 권 낼 수 있는 부활을 춘비하면 좋겠다.
6.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신성과 인성의 감미로운 결합
도현우 신부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에 바탕을 둔 고백이 아니라 성서에 근원을 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몹시 앓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서도 곧장 가지 않으시고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요한 11,4)라는 말씀만 하시고는 이틀동안 지체하셨습니다. 신성을 통하여 모든 것을 아셨을 터인데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셨나 하는 의구심을 가져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유있어 보이는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엎드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울부짖을 때 예수님께서도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던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라도 장례식장에서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상에서의 이별을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일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이 높아질 것을 알고는 계셨지만 인간으로서의 슬픔과 고통을 어찌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시고 곧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치셨던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그분의 인성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어서 드러나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빨리 바꾸어주고 싶었던 바람이 이 외침 속에 간절히 담겨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인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기에 이 바람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때 그 신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 이 과제 앞에서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죽음의 세력과의 처절한 투쟁이 못내 안타까워 우셨던 예수님은 사람이셨던 하느님이십니다. 궁극적으로는 행복하게 될 것을 알지만 그 과정의 아픔을 아시기에 더욱 비통해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것은, 그분은 우리를 보며 그저 안타까워만 하시는 ‘높으신 분’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을 용감하게 먼저 가셨으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 가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벗’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본성, 곧 하느님으로서 누리시던 그 모든 것을 우리들도 누릴 수 있게 하시려고 당신을 낮추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의 방법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알려주시고 증거하셨던 예수님은 하느님의 따스하고 강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7.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귀한 진주
권혁시 부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이다” 하시며 당신을 충실히 따르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고 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보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여 영원한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영광의 날도 두 주일이 남은 사순절의 종반에 접어들었습니다.
해마다 지내는 사순절은 교회 전례상의 형식적인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그분에 대해 미지근하고 게으른 나의 신앙생활에서 탈피하여 광명의 빛을 맞을 준비를 하고 그분의 고통을 묵상하고 일깨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희망이 없다면 우리 신앙의 노력은 헛된 것이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우리의 목적이요 목표이기에 모든 신앙은 부활과 영생에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이 기간을 더욱 거룩하게 복음의 정신에 입각하여 내 마음속에 하느님의 주도권을 확립하여 고난의 길로 나아가시는 주님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어느 날 대왕이 감옥소의 수인을 찾아가서 너무나 여윈 청년을 보고 “너는 어찌하여 삼 개월 동안에 이렇게도 얼굴이 못쓰게 되었느냐?” 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대왕이여! 삼 개월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죽는 날을 기다리기란 정말 너무나 괴롭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왕은 살 방법을 하나 가르쳐 주겠으니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신하를 시켜 기름을 그릇에 넘치도록 가득 담아오게 한 후 기름을 조금도 쏟지 않고 도성 내의 모든 시가를 돌아 왕궁까지 오면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마지막 길이니 만치 받아들고 경관의 감시 하에 돌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날은 그 도성의 장날로 사람들이 우굴거려 극히 곤란함에도 조금도 축내지 않고 잘 돌아왔습니다. 이때 왕은 청년에게 “오늘은 장날인데 어떤 것이 많더냐? 어느 거리에 큰 상점이 많더냐? 어떤 사람들이 시장에 모였더냐?” 하며 여러 가지의 물음을 연발했으나 청년은 매 번 “모릅니다” 라고 대답하매 왕은 노발대발하며 “온 시가지를 돌았다는 말은 거짓말이구나! 온 시가지를 다 돌았다면서 아무 것도 모를 법이 어디 있느냐!” 하며 고함을 쳤습니다.
청년은 빌면서 “저는 목숨을 살릴 길이 이 기름 그릇에 있기 때문에 전심전력을 다해 이 기름만 보면서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대왕은 “오냐, 네 말이 옳다. 이제는 죽지 않고 살리라. 생명은 그렇듯 귀하니라” 고 했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이야기가 좀 길었습니다만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한 애착을 잘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청년은 결국에는 죽어 없어질 잠시 지나가는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그런 어려운 일을 하는데 있어 그는 자기 생명이 곧 기름 그릇에 달려 있다는 생각 외에는 좌우도 돌아 볼 겨를이 없이 오로지 기름만 내려다보면서 걸었습니다. 대왕의 말대로 생명은 과연 귀중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시작에서부터 동요하지 않고 주님께만 향하는 종점을 맞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현세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안식처가 아니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대왕이 청년에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처럼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길을 가르쳐 주셨으니 그 길만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현세의 배금주의, 관료주의, 쾌락주의 등은 우리를 질식케 합니다. 청년이 시장에서 여러 가지의 유혹을 받았던 거처럼 우리도 세상의 온갖 것들에 유혹을 받으나 우리의 마음은 요지부동하게 하느님께만 향해야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의지를 송두리째 요구합니다. 이 요구에는 각자의 권리까지 포함됩니다. 권능을 누리는 자도 세상을 수인(囚人)이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감옥이라고 생각할 때 그의 생활은 달라질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느님을 위해 가정이나 사회나 정계에서 이웃 형제에게 봉사하면서 얼마나 자주 무엇을 포기해야됩니까!
이 포기는 “어느 무엇”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포기하는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성서에서도 말하듯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숨은 보배가 묻힌 밭을, 귀한 진주”를 차지해야 합니다. 누가 감히 그리스도처럼 수고, 수난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의 영광은 산꼭대기에 있기에 거기를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철저하게 또 성실하게 그분을 따르면 영원으로부터 마련하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현세의 생활에서 오는 모든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8.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우리는 빠스카의 정점인 부활에로 향한 사순절 여정의 막바지 단계에 와 있습니다. 심연의 고통과 삶의 고뇌, 그리고 아픔과 비극을 가져온 아담의 원죄에 대하여 우리는 사순 첫 주일에 묵상했습니다. 고독한 유배의 땅에 사는 인간은, 그러나 하느님께 새로운 소명을 받으며 미래의 땅을 개척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은 부모와 고향을 떠나 하느님의 말씀에 신뢰하며 약속의 땅으로 향합니다. 이것이 제2주일의 묵상 내용입니다.
노예살이에 시달렸던 유다인들이 그것을 박차고 갈대 바다를 건넜지만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울부짖자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바위를 쳐 갈증을 푸는 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제3주일의 1독서 내용입니다.
그리고 지난 4주일에는 다윗의 선발과 함께 빛의 의미를 묵상했고, 그 빛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임을 우리가 체험했습니다. 죄, 믿음, 물, 빛, 이 모든 주제들은 구원사의 핵심을 일깨워주는 표현들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을 멀리 떠난 인간이, 스스로 개척하며 되찾아가야 할 힘든 여정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며, 마땅히 거쳐야 할 당위적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사순 제5주일의 주제는 생명의 회복, 곧 부활입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물리적 또는 자연적 삶을 넘어선 그 어떤 영원성을 암시한 하느님과의 일치, 영원한 삶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구원이란 바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가는 행위일 뿐 아니라 보속과 속죄를 통해 처음의 상태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다운 것을 창출해내는 것을 뜻합니다. 때문에 구원은 곧 새로운 창조입니다.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유다는 바빌론의 침공(기원전 609년-587년)에 의해 멸망되고, 성전이 무너지며 왕과 제관들이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합니다. 멸망과 폐허, 이 암담한 현실이 바로 에제키엘 예언자가 살던 시대입니다. 예언자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하고 성전에서 행했던 경신례의 장엄성, 그것이 하느님 영광의 반영일진대 그것을 회복해야 하겠다는 뜨거운 열망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엄연한 현실, 바빌론에서의 수모, 실망, 좌절을 뼈저리게 체험합니다. 포로와 유배의 삶은 곧 죽음입니다. 뼈가죽만 남은 상태에서 예언자는 그 어떤 꿈을 보고 있습니다. 자유와 해방 그리고 부활입니다. 예언자는 엄위하신 하느님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앙상한 마른 뼈들이 생기를 찾고 살아 움직인다는 소식입니다. 노예가 자유를 꿈꿀 수 있고, 나라를 빼앗긴 유다가 해방을 그릴 수 있고 무덤에 묻힌 뼈들이 생명에의 회귀를 바랄 수 있다는 기쁨의 소식입니다. 희망의 이 메시지는 바로 부활의 메시지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결정적 구원을 앞당겨 체험케 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고통과 죽음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하느님께서 이 어려운 현실을 극복케 할 힘을 꼭 우리에게 주실 것이며 그 때문에 자유와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선언했습니다. 죽음과 유배 중에 부활과 해방을 선포한 예언자의 정신은 바로 짜증스럽고 한심한 우리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와 힘을 줍니다.
여․야 정치인들이 인간의 가치를 혼동하고 허튼 일을 하고 있을 때 숱한 젊은이들이 감옥에서, 수사 밀실에서, 학교에서, 광장에서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 민주화는 꼭 이루어져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신념과 다짐만이 우리에게 기쁜 내일을 보장해 줍니다. 예언자는 어두운 현실을 이길 힘을 예고한 사람이며, 하느님은 그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제2독서인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영육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역설적 진리를 기초로 한 삶의 원리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 이루어질 영원한 삶을 선언하셨으며 이것을 예수를 통해 실현하셨습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이 힘을 성령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모든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세례를 통해 의화(義化)시키며, 희망을 통해 부활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이며 십자가 구원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상태에서 “아직 아니”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 그 중간에서 신앙인은 기쁨을 확인하면서도 긴장 가운데에서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 선조들의 삶을 통해 교훈을 얻고, 미래 하느님의 나라를 앞당겨 체험함으로써 희망과 긍지를 지니는 것,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를 나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며 순간 순간이나마 하늘의 기쁨을 체득케 하는 그분이 바로 성령임을 우리는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요한복음은 라자로를 부활케 하신 예수의 기적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과는 다른 방법으로 예수의 생애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복음 서두에서 요한은 창조를 연상케 하여 그리스도가 바로 새로운 창조주, 구원자임을 암시하며 구원의 역사가 바로 빛과 어두움, 영육의 투쟁임을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특히 창조의 일곱 단계를 연상하면서, 예수의 일정과 행적을 일곱으로 요약 정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새로운 표징, 곧 일곱 가지의 기적(① 가나 기적(2,1-12) ② 고관의 아들 치유(4,43-54) ③ 베짜타못의 중풍 병자치유(5,1-9) ④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6,1-15) ⑤ 물위를 걸으신 기적(6,16-21) ⑥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9,1-34) ⑦ 라자로의 부활(11,1-45)) 을 통하여 당신이 우리의 구세주임을 확인해 주십니다. 그것은 단계적인 것으로 생명을 주는, 라자로의 부활로 장엄하게 끝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룩할 승리의 부활을 앞당겨 체험케 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미래를 보증한 확인조치라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란, 생명에로의 단순한 회귀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과 죽음을 너머 영원한 미래,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며 그분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전적인 봉헌이며 이를 통해 가능해진 그 어떤 비약을 뜻합니다. 그것은 내면적, 초월적 삶에로의 접합이며, 전이입니다.
사랑의 체험, 세례를 통한 체험, 믿음을 통한 비약, 순교를 가능케 하는 결단, 이 모든 것이 바로 성령의 힘과 영원한 가치를 확인해 주는 요소들입니다.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두렵고 불안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활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믿습니다. 우리 안에 부활의 씨앗,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성령을 통해 영원히 살 수 있는 삶의 양식을 우리 모두 깨닫게 하시며 또한 그 삶의 증거자가 되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9.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
눈물을 가장 많이 흘리게 하고 마음을 가장 모질게 도려내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요, 그이와의 갈림이다. 라자로를 무척 사랑하신 까닭에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그지없는 눈물을 자아내고 비통에 잠기게 하였다. 이 고통은 아마 십자가의 고통과 버금갔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애써 지은 것,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인 작품이 망가지거나 허사가 되었을 때, 예컨대 부모나 자식을 잃었을 때,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전지와 전능으로 빚은 영혼이 죽으면 정말 달랠 길 없는 고통에 젖어 드신다. 때문에 예수님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은 그칠 날이 없는 것이다.
약속하신 하느님의 영광도 죽어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살아야 한다. 살자면 그야말로 사나 죽으나 그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어야 한다. 이 믿음 때문에 태생(胎生)소경도 세상을 보고 죽은 라자로도 죽음에서 되살아났다. 이 믿음 하나로 이루어진 기적의 이야기는 복음서에 숱하다. 믿는 조건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전능이 가능했다면, 믿음이 없을 때 그 전능은 묶이고 사장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수난이요 죽음이다. 이래도 우리는 무관심할 것인가? 엄마에게 전적으로 내 맡겨진 아기 같은 조건 없는 믿음이 있을 때만이 주님께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셨듯이 우리도 함께 살게 하실 것이다.
10.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라자로야, 나오너라!
죽음은 슬픈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의 죽음은 그 슬픔이 더 크고 오래 지속된다,
언젠가 뉴욕 외곽에 있는 공동묘지에 간 적이 있다. 다양한 묘비들이 있었다. 그 중 나의 시선을 끈 것은 1년을 살다간 아기의 묘비였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가야, 잘 가거라. 천국에서 만나자.” 너무나 인상적인 묘비였다.
젊은 부부가 그 아이를 묻고 얼마나 울었을까?
사람은 죽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서서히 썩어간다. 진시왕의 무덤이든, 이름 모를 어느 병사의 초라한 무덤이든 그 안에 들어있는 시신은 똑같이 썩어 흙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나마 공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님의 친구 라자로
라자로는 예수님의 친구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3k쯤 떨어진 베다니아라는 곳에서 두 누이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들은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던가 보다.
예수님은 자주 그곳에 들러 쉬어 가시곤 했다. 우리도 우리 자신, 우리 가정, 우리 교회를 베다니아의 라자로의 집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자주 오시어 편히 쉬어 가실 것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전도를 하고 계실 때의 일이다. 라자로가 병들었다는 연락이 왔다. 예수님께서 며칠이 지난 뒤 베다니아로 가보니 이미 라자로는 죽어있었다.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났다.
한국은 사람이 죽으면 3일장이나 5일장을 지내지만 중동지역은 하루만에 묻어버린다.
왜냐하면 너무 더워서 빨리 부패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장례문화가 더 좋은지, 그들의 장례문화가 더 나은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단 한가지 한국도 여름엔 시신이 쉽게 썩기 때문에 냄새가 진동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런데도 문상객 때문에, 혹은 다른 이유 때문에 3일장이나 5일장을 지내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시신을 냉동실에 보존한다면 예외지만 말이다.
어쩠거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누이동생들은 너무 슬퍼서 울었다.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고 성서는 전한다. 그 분은 정이 많으신, 동정심이 많으신 분이시다. 지금도 우리의 눈물 앞에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장례를 치른 지 나흘이나 지난 무덤 앞에서 명령하셨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 중의 기적이다. 죽었던 사람이 얼굴은 수건으로 감기고 손밭은 베로 묶인 채 무덤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라.
복음의 메시지
라자로는 잠을 자고 있던 사람처럼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무덤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산 것은 아니다. 또 죽어서 묻혔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를 잠시 살려주셨다.
그가 영원히 사는 것은 공심판 때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믿는 사람들도 모두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부활시키심으로써 우리에게 해답을 주셨다. 사람이 죽더라도 주님을 믿은 사람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고, 즉 인간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죽어도 아주 죽은 것이 아니다. 마치 겨울나무, 겨울풀 같다고나 할까?
겨울에 북풍 한설이 몰아치면 대부분의 나무들과 풀들은 죽은 것 같다. 잔디밭에도 죽음이 넘치는 듯하다. 그러나 생명은 살아있다. 언젠가 봄볕이 따사로워지면 생명은 움튼다. 어떤 나무는 수백년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영원히 사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굳게 믿어야한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히브 11,6) 그렇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7)고 우리도 고백해야한다.
죽어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사람의 무덤 앞에서 살아나을 것이라며 믿으라고 했을 때,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상식의 차원이나,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간의 상식을 넘는 것이고 신비로운 것이다.
11. 사순 제5주일 요한 11,1-45 (가) 베드로의 눈물
최인호 베드로/작가
엘 그레코(El Greco)는 스페인이 낳은 화가입니다. 원래는 그리스 사람이었는데 일찍부터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아 로마에서 수학한 후 나중에는 톨레도에 정착하면서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그림은 종교화와 초상화가 대부분이었고 색채와 명암의 교묘한 대비로 인해 모든 화면에는 엘 그레코 특유의 황홀한 흥분 상태가 감도는 독특한 그림입니다. 수많은 빼어난 종교화를 남겼지만 그 중에서도 ‘베드로의 눈물’(1605~1610년 제작)이란 작품은 걸작 중의 걸작입니다.
왼쪽 팔목에는 주님으로부터 약속받은 “하늘나라의 열쇠”(마태 16,19)를 건 채 두 손을 꼭 마주잡고 허공을 우러러보고 있는 베드로의 얼굴은 엘 그레코 특유의 길쭉한 얼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흰 머리칼과 얼굴 가득한 턱수염, 완강한 근육을 가진 어부 출신의 베드로는 알 수 없는 허공의 한 점을 우러러보고 있는데 그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 매일 새벽 첫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일어나 기도를 하고 몹시 울었다고 합니다. 항상 수건 한 장을 가슴에 넣고 다니며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을 생각할 때마다 뉘우쳐져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울었으므로 베드로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서 항상 짓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엘 그레코가 그린 ‘베드로의 눈물’이란 작품이 걸작으로 손꼽힌 것도 알 수 없는 허공을 우러러보며 울고 있는 베드로의 비통한 표정이 초자연적인 영성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 베드로가 처음으로 울기 시작했던 것은 새벽닭이 운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주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으므로”(루가 22,61) 비로소 주님의 눈과 마주친 베드로는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올라 슬피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베드로의 눈물에 앞서 또 한 사람의 눈물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눈물입니다. 주님은 평소에 사랑하시던 마리아 자매와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신 후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주님의 눈물. 우리는 울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우리는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냄새가 나는 라자로처럼 비참하고 절망적일 때 우리는 문을 걸어 잠그고 흐느껴 웁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문밖에서 울고 계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이제 그만 나오너라.”
베드로가 주님의 으뜸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눈물을 엘 그레코의 그림처럼 ‘베드로의 눈물’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제 눈에도 주님처럼 눈물이 넘쳐흐르게 하소서.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베드로처럼 흐느껴 울도록 하소서. 눈물로 우리는 영혼을 정화시키어 하느님의 영광 속에 죽음의 동굴을 벗어나게 하소서.
12 사순절 제 5주일 요한 11,1-45 (가) 무덤을 열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사람들은 살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나, 죽었다가 살았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살다가 죽는 것보다는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을 어떻게 흔히들 믿고 있느냐 하면, 이렇게 살아난다는 것은 세상 끝날 때에나 가능하다고 믿고도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이에 대하여 좋은 묵상 주제가 됩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라자로의 부활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은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에제키엘서에 나오는, 무덤을 열어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내어 고국에 돌아가게 한다는 야훼의 말씀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에 그런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제 2독서의 사도 바울로의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도 같은 내용입니다.
우선 복음을 보면,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라자로는 마지막날 부활 때가 아니라 잠시 후에 살아났습니다.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서도 같은 내용입니다. 에제키엘은 바빌론의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데, “나 이제”라는 말을 씁니다. 이 이야기는 에제키엘이 공동묘지에 서서 한 것이 아니라, 마른 뼈들이 널린 계곡 속에서 환시를 보고 난 체험을 바탕으로, 살아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죽음은 생명이 중단되었다는 뜻입니다. 생명이 중단되면 숨이 없어지고, 움직임이 정지되며,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희망이 없고,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화냄도 사라지며, 절망과 암흑과 좌절과 포기만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는 차거워 지고, 곁국 메말러 지다가 스러져 버립니다.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어도, 혼은 죽어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봅니다. 동물처럼 먹고 자고 꿈틀거리지만, 혼과 숨을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딩도 솟고, 자가용도 늘었고, 번들번들한 옷들로 차려입고, 바쁘게 움직이나 그 안에는 건전한 얼이 사라졌고, 도의나, 도덕도 땅속에 묻혔고 인정과 우정도 메말랐으며, 살벌한 탐욕의 번쩍이는 눈과 ,약자를 괴롭히는 무쇠주먹과, 가난한 이들을 등치는 불의만이 있다면 그 사회는 죽은 무덤입니다. 이 무덤은 조용하며, 아무도 반대의 소리를 내지 못하고, 올바른 진리의 빛은 꺼지고, 의로운 분노도 사그라진 침묵과 어둠과 고요 함 뿐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이 소리는 무덤을 여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입니다. 죽어 썩은 냄새가 나는 무덤에 대고 질러대는 노도와 같은 소리입니다. 그 어둠에서, 그 침묵에서, 고요함에서 떨쳐 나오라는 생명의 소리입니다. 그리고는 묶인 손발과 수건으로 감긴 얼굴을 풀어주어 가게하는 해방과 치유의 소리입니다.
바로 바빌로니아의 포로생활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인들에게 혼을 불어넣고, 무덤을 열어 해방의 소식을 전하는 에제키엘서의 말씀도 같은 소리입니다.
무덤을 열고, 생명을 살리고, 어둠을 물리치고, 묶인 것을 풀어주고, 진실의 입을 열게하는 것은 무덤과 죽음과 어둠과 억압과 거짓의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신 것은, 단순한 살리심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나야 할 일이 당장 일어났기에, 단순한 일이 아니었으며, 라자로라는 사람의 부활도 단순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라자로란 말은 “어쩔 수 없는,” “희망 없는” 그렇기에 “하느님이 도우신”이란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즉시 관계기관 회의를 소집하고 대책을 마련합니다. 대책회의의 결론은 이렇게 났습니다. 예수를 그대로 두면, 로마군인들이 이스라엘을 짓밟으리라는 예견을 하고, 대사제 가이파는 이렇게 결정을 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 낫겠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즉시 수배령이 내려져 예수는 더 이상 유다 지방에서 드러나지 않게 다니시고, 광야 근처로 숨으시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라자로의 부활에 이어서 45절부터 57절까지 이 내용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신비를 보게됩니다. 무덤을 열어 생명을 주시는 분이 이제 무덤의 죽음을 이기기 위하여 무덤으로 가시는 신비입니다. 즉 스스로 자원하신 죽음은 강요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가져온다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제 사순절의 정점에 도달하여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같이 참여하는 성주간이 되겠으며, 새로운 주간의 시작인 그 다음 주일에는 부활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에서 부활하시는 부활축일을 체험하시게 됩니다. 사순절 시작과 함께 당부하였던 가난한 이들과 가진 바를 나누는 헌금봉헌은 다음 주에 있겠습니다. 준비하여 봉헌토록 하십시요.
이번 주간의 묵상주제는 “우리는 어떻게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 부활할 것인가” 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여, 우리를 죽음의 그늘에서 나오시게 하시고, 묶인 것을 풀고, 주님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사순 제 5 주일
제 1 독서 : 에제 37, 12b-14
제 2 독서 : 로마 8, 8-11
복 음 : 요한 11, 1-45
제 1 독서 : 기원전 587년 바빌론으로끌려가던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숫자가 도중에서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미래는 더욱 암담했다. 이제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은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제키엘 예언자가 나타나 희망을 불어 넣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시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낙관론이다. 마른 뼈들은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뜻한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듯 이스라엘 백성도 포로생활의 무더믕로부터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가게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주님으로 알아보는 표지이다.
제 2 독서 : 바오로에게 있어서 육(肉)은 자기 자신 안에 폐쇄된 인간, 자기 욕망만을 채우려는 인간을 뜻한다. 반면에 영(靈)은 성령을 통한 새로운 삶의 형태를 뜻한다. 새로운 삶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세상으로 정향될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는 주 하느님과 결합되어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은 성령을 따라 살 때 가능하다.
복 음 :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일곱 번째 기적인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는 우리를 부활의 신비로 한층 더 이끌어준다. 이텍스트는 참으로 극적인 인간 소생의 드라마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5단계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점진적 전개 방식을 채용하는데, 각 단계의 마지막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말짓게 구성해 놓았다.
1단계(1-4절)는 라자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상황 설정이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4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실제로는 라자로가 죽을 병이 훗날 예수님을 죽일 병이 될 것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부터 먼저 생각하고(“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다음에 당신 자신의 사명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아울러 곤경에 처한 이웃을 잊지 않으신다.
2단계(5-16절)는 라자로의 죽음을 말한다. 라자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도 주님께서는 이틀이나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르셨다. 그 동안 기도하며 신중한 결정을 내린 후에 비로소 베다니아로 향하셨다.
3단계(17-27절)는 마르타와의 만남이다. 마르타의 간청과 고백에 주님의 유명한 말씀이 뒤따른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25절).
4단계(28-40절)는 죽음 앞에 선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심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35절). 바로 이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 내셨다.
5단계(41-44절)는 라자로의 소생이다. 아버지께 기도를 올리신 다음 무덤에 누워있는 라자로를 예수님께서 불러내신다. 삼베를 두른 채로 무덤에서 나온 라자로를 보고 “그를 풀어주어가게 하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라자로 소생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보인다.죽음의 사슬에서 우리를 풀어주어 생명의 길로 가게 하실 것임을 주님께서 미리 암시하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이제 사순절도 절정에 접어들어서 얼마 안 있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는 성금요일을 맞게 되고 이어서 부활 성야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사순 제3주일부터 4주일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모습이 결정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생명의 빛을 주시는 분으로, 그리고 오늘 복음(요한 11, 1-45)에서 죽은 라자로를 몸소 살리심으로써 당신이야말로 생명을 주는 분임을 알리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생명인데, 이 생명을 주는 분이야말로 가장 거룩하고 놀라운 분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분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선물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고마운 분임은 명명백백한 일입니다. 생명은 바로 인간이 살아있다는 징표가 되는 것이요 삶의 뿌리가 되는 것이기에 이 생명을 다루는 사람도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의사가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사제는 육체적 생명보다 더 소중한 영적인 생명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사랑과 화해를 심는 평화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섭리하심이 깃든 이 생명,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생명임을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을 통해 몸소 보여주시고,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밝혀주셨으니 존경과 찬미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라자로가 죽어가고 있다고 알려주었을 때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될 것이다.”(요한 11, 4)라고 하시면서 죽음 앞에 초연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계시던 곳에서 이틀 동안이나 더 계시다가 베다니아로 가셨을 때는 이미 라자로가 죽어서 묻힌 지 나흘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라자로의 동생 마르타가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요한 11, 21)라고 아쉬움을 표하자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 23)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그녀는 세상 마지막 날에 살아나리라는 일반적인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권능으로 지금 당장 라자로가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의 현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옆에서 빈정대는 것도 아랑곳없이 무덤으로 달려가 눈물을 흘리면서 성부께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요한 11, 42)라고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라자로야, 나오너라!”하고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여기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무덤에 누워있던 라자로가 수의를 입은 채 그대로 걸어 나옵니다.
신앙의 신비와 기적, 이것은 바로 그분이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임을 보여주신 그 자체였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부활의 예표로 이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에제키엘서에서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에제 37, 13)고 한 하느님의 말씀이 신약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 야훼가 한 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말리라.”(에제 37, 14)는 주님의 엄청난 말씀을 우리는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실상 우리는 육체를 따라서 살아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고 참으로 살아있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살리신, 부활하신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죄와 정욕과 온갖 욕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들여 성령과 더불어 살도록 해야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을 초월하는 삶이요, 천년을 하루같이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