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2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23 주일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제 1독서: 에제 33,7-9

제 2독서: 로마 13,8-10

 복음 : 마태 18,15-20



이 주일과 다음주일의 전례는 소위 ‘교회론적’담화(마태 18,1-35)의 일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흩어져 있던 많은 이야기들과 예수의 비유 말씀들을(잃은 양의 비유와 무자비한 종의 비유) 여기에 한데 모아 제시함으로써 자기 독자들에게 신자 공동체의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내적 생활의 ‘이상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다.

 이 담화의 내용에서 마태오 복음사가가 관련되어 있는 공동체내의 크리스찬 생활의 확실한 상황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 공동체는 순진무구한 자들이나 성인들의 공동체도 아니요 신앙상으로 ‘원숙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출세 제일주의가 판을 치고 일부 야심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배욕을 키워나가고 있었으며 ‘보잘것없는 이들’ 즉 실망과 좌절의 시련과 위기에 부딪혀 흔들리는 나약한 신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다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공동체 전체와 특히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중대한 공동생활의 문제들을 야기시키는 범죄자들조차 현저하게 많았다. 교회내의 형제애는 개인간의 공격감정과 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원한의 감정 등으로 뒤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되겠는가?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상기시키면서 교리교사요 사목자의 자격으로 자신의 공동체에 특히 다음과 같은 두가지 관점에 있어서 실천적인 충고를 한다 : 즉 이해하는 마음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결국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유일한 ‘규범’이어야 할 사랑의 두 가지 관점에 불과하다.

 어째서 이 모든 것이 오늘날에도 세계도처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물론 더 나아가 그것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전체 교회에도 필요한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오늘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복음은 우리가 조금 전 언급한 바와 같이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신앙생활에 있어서 나약한 사람들인 ‘보잘것없는 이들’을 존중하고(18,5-11)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떠나버린 사람들에게 친절하라는(“잃어버린 양”: 12-14절) 교훈적 가르침에 뒤이어 나오고 있다.

  오늘 복음은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죄에 떨어지게 하거나 또는‘성인들’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될 교회에 불안과 불신을 조장할 만큼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를 다루고 있다.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죄짓는 이’를 그의 운명에 그대로 맡겨버릴 것인지 아니면 그의 일에 개입해야 할 것인가?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다:“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그러나 듣지 안거든 한사람이나 두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라’는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5-17절).

  몇몇 권위있는 성서사본과 불가타 성서에도 이 첫 대목(“누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은 공동체내의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의 결핍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실제로 이에 대한 대답은 조금 뒤에(21-22절) 나오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서는 그 본질상 인정할 수 없고 또 공동체 전체의 영적 성성과 내적 일치를 위협하는 어떤 중죄에 관한 문제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형제를 다시 ‘얻기 위해’ 일련의 판단 절차에 의뢰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 :‘kerdáinein\'(얻다)라는 동사가 랍비들의 세계에서는 공동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학자들에 의해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실천적 관행은 꿈란 공동체에서도 이행되었던 바로 그런 것이었다(F. Gnilka, Die Kirchedes Matthäus und die Gemeinde von Qumran, in Biblische Zeitschrift, 7 1963, pp.54-56).

  맨처음 시도해야 할 방법은 보다 세심하고 우애적이어야 한다:“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15절). 형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굴욕감을 주지 말고 그로 하여금 애정의 공감대를 되찾고 다른 형제들과의 일체감이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방법이 좀 서툴거나 신중하지 못하게 되면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경직시켜 자존심이나 분노를 폭발시킬 우려가 있다.

  그래서 만일 일이 성사가 안되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라”(16절)고 한다. 이것은 모세법 자체가 재판심리를 위해 정해놓은 소송 절차이다(신명 19,15 참조). 하지만 여기에서의 권고 핵심은 그 과정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혀 화해를 촉구하는 노력을 확대하라는 데 있다 : 목적은 여전히 ‘형제를 얻는 것’(16절)이다.

  이 두 번째 시도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에 그 문제는 공동체 ‘전체’에 위임되어야 한다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17절).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ekklesía라는 희랍어 개념은 분명히 구성원 전체와 특히 집단을 권위있게 대표하여 말할 책임을 지고 있는 윗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지방 공동체를 뜻한다. 이것이 형제를 다시 찾아 얻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고발의 행위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잘못을 깨닫고 다시금 공동체의 건전한 구성원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마지막 비탄에 젖은 호소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오직 이 마지막 시도조차 실패한 후에야 전형적 유다식 표현 형태를 빌어 그 죄인을 파문에 처하게 된다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사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밖의 사람들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본래 고유한 의미에서의 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적 상황 즉, 어떤 규범보다는 공동체 생활의 본질 자체를 해친 자신의 죄를 깨달으려 하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미 범한 ‘교회’로부터의 실제적인 이탈을 인식케 하는 데 있다.



ꡒ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다ꡓ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은 공동체가 가지는 권한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임하신 생명적 구조와 은총의 부에서의 이탈이냐 아니면 일치냐를 권위있게 판단해줄 수 있는 그 ꡐ권한ꡑ을 정당화하고자 한다:“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ꡓ(18절).

  우리는 이 말씀들이 이미 앞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지는 것을 들었다(16,19):이것은 그리스도가 지금 와서 전에 베드로에게 주었던 것을 빼앗아 모든 사람들에게 준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교회가 진정 자기규제의 권한은 분명 예수께서 설정하신 방법에 따라 이루어지며―예를 들어 베드로와 열두 사도의 권한처럼―복음의 다른 대목에서도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은 구성원 각자가 모두의 선익에 공동책임을 지는 완전한 공동사회의 형태 그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자기 독자들에게 복수형으로 말하기에 앞서(“너희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ꡓ) 계속해서 ꡐ너ꡑ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ꡒ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를…ꡓ)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만일 교회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라고 한다면 형제들에 관한 일에 있어서도 ꡐ나ꡑ라는 일인칭의 위치에 서게 됨으로써 나와는 별개의 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잘못을 내 잘못으로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잘못들이 실제로 공동체 자체의 모습을 더럽히고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대해 느낄 수 있는 매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권위는 오직 이러한 공동 책임의 의미를 촉진시키고 조장할 의무를 지닌다.

  교회 안에서 세례받은 모든 이들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과 더불어 하느님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을 통해 원하시거나 또는 원하지 않으시는 바를 잘 알아들으려고 노력함으로써 ꡐ맺고ꡑꡐ풀어나가는ꡑ충만한 조화 속에서 그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켜나가기로 노력한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이점에 관해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그렇듯 빨리 끝나버린 교황직에 선출된(1978년 8월 26일) 다음날 전세계에 보내는 첫 번째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ꡒ현세의 고통스러운 문제들에 대하여 공동책임을 지고 응답해야 할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호소해오고 있고 또 유일하게 구원을 보증해줄 수 있는 ꡐ영혼의 지원ꡑ을 온 세상에 베풀어야 할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ꡓ



ꡒ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ꡓ

 이와 같은 ꡐ공동체ꡑ로서의 교회에 대한 언급은 그 다음에 이어 나오는 두 구절에서 더 명백히 그리고 더 내면화되고 있다. 그 두 구절의 내용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말해온 사실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높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ꡒ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ꡓ(19-20절).

 ꡐ둘이나 셋ꡑ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공동체를 떠들썩한 군중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으신다. 오직 하느님만이 당신 교회를 불러모으신다. 그러므로 그 수효는 그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오히려 중요한 사실은 기도를 통하여 같은 원의 같은 요구를 똑같은 믿음과 사랑의 결합 속에서 바칠 수 있을 만큼ꡐ그리스도의 이름으로ꡑ서로 결합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작은 공동체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ꡒ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ꡓ(19절).

  교회의 힘은 수자나 또는 그 조직적 위계적 구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 하에 결합되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바치는 ꡐ기도ꡑ의 능력에 있다. 만일 이것이 말 그대로 참된 사실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의 모든 사목적 실천방안이 완전히 뒤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 표현은 더욱더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다. 왜냐하면 교회가 생겨나는 궁극적 뿌리를 지적해주고 있기 때문이다:ꡒ단 두세 사람이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ꡓ

  하느님은 불러모으시지만,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시고 믿는 이들 가운데 함께 자리하시어 그들을 가르치시고 타이르시며 그들 안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여기서 고찰되고 있는 것은 특별히 장엄한 어떤 전례의 순간이 아니라, 교회가 자기 현존의 매순간순간에 지녀야 할 본질 자체이다. 즉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만이, 오직 이렇게 할 때만이 교회는 이루어질 것이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께 일어난 사건처럼 외적인 실체이기보다는 내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세울 수 있는 모든 체계를 항상 넘어서 있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제1장의 제목이ꡐ교회의 신비ꡑ라고 붙여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ꡒ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보초로 세운다ꡓ



  다른 두 개의 독서 내용은 지금까지 전개해온 내용에 대비시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에제키엘서의 의한 제1독서에서는 야훼께서 그 예언자에게 이스라엘 가문 전체의ꡐ보초ꡑ로서의 책임에 대해 상기시키고 있다. 만약 그가 타일러주지 않아 죄인이 회개하지 않는다면,ꡒ그 죄인은 자기 죄값으로 죽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그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죄인에게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주었는 데도 그가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 죄값으로 죽겠지만 그는(예언자) 죽지 아니하리라ꡓ(어제 33,8-9).

  그러므로 에제키엘 예언자는 모든 형제들의 봉사를 위해 있다:그가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전하는 일 뿐이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개개 신자들의 책임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가 앞서 말한ꡐ공동체성ꡑ이라고 하는 사실은 하느님이 베풀어주시고 또한 우리 각자에게 요구하시는ꡐ봉사ꡑ의 척도에 따라 모두가 공동책임을 진다는 의미이다.



ꡒ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ꡓ



  교회론적 가름침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는 제 2독서는 교회 안에 보다는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로마 13,1-7)그리스도 신자들의 생활 규범이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목숨을 다해서도 갚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의무라고 한다!ꡒ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ꡓ(로마 13,8-10).

 교회는 사목자들이건 평신도들이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ꡐ법ꡑ으로서 사랑이라는 법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ꡐ자리ꡑ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ꡒ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ꡓ(마태 18,20)는 그 말씀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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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23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23주일


    제 1 독서 : 에제 33, 7-9

    제 2 독서 : 로마 13, 8-10

    복     음 : 마태 18, 15-20


    제 1 독서 : 에제키엘서 33-39장은 예루살렘 멸망 후(기원전 587-573년)의 예언에 속하다. 예루살렘 멸망 전에 행해진 예언 (1-24장)에는 심판과 단죄가 대부분이지만 33-39장에는 복구와 희망이 가득 차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뽑으시어 백성을 가르치고 백성을 위한 보초와 전령의 역할을 맡기셨다. 에제키엘은 유다인들이 바빌론에 유배 중인 아주 어려운 시기에 이런 역할을 맡아서 성실히 그 임무를 완수했다. 그때는 유배 중인 백성이 절망하고, 민족의 일치가 점점 허물어져 가는 때였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보초로서 예언자가 해야 할 일을 명시한다. 보초는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백성에게 비상 나팔을 불어주어야 한다. 만일 보초가 비상 나팔을 불지 않아서 백성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적군에게 목숨을 잃는 사람이 생긴다면 보초는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보초로서 길을 잘못 가고 있는 죄인에게 옳은 길을 가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만일 예언자가 죄인을 타이르지 않았다면 그 죄인이 죽은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제 2 독서 : 사도 바오로 서간의 많은 부분은 유다인들의 율법주의와 싸우는 데 할애되어 있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 신자들을 박해했던 경험이 말해 주듯이 이런 율법주의는 사람을 완고한 태도 속에 가두어 버린다는 것을 사도 바오로는 알고 있었다. 주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발견한 덕분에 그는 이런 율법주의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다. 이제 참다운 율법이 무엇인지를 사도 바오로는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웃 사랑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복     음 :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일치이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한마음으로 기도할 때 어려움을 극복하고 비로소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쿰란 공동체의 규칙서에도 잘못한 형제에 대한 규정이 있는데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15-17절은 죄인을 공동체에서 즉시 내쫓으려고 했던 열성저인 초대 교회 신자들을 자제시키는 내용이다. 일단 감싸 안으려고 노력하고 형제적 사랑으로 교정하도록 애쓰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앞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 존재하게 될 어려움과 분열 상황을 알고 계셨고 또 그런 어려움을 통해서 결국에는 일치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일치의 직무를 맡기셨다. 제자들은 주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주님께서 이루신 일치의 직무를 계속해야 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말씀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사명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형제들의 잘못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대화와 관용으로써 그들을 감싸 안고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와 유혹에 떨어지기 쉬운 인간 삶의 모습은 평신도나 수도자, 성직자 다 마찬가지이고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습니다. 몇 년 전 미국의 아틀란타 대교구 교구장인 유진 마리노 대주교가 비키 롱(Vicki Long)이란 여 가수와 스캔들을 일으켜 환속한 충격적인 사실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시 뉴스위크(News Week)지에서는 “죄악이 대주교에게도 왔는가?”라는 기사의 제목을 달고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었는데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도 ‘죄’라는 점에서는 예외없고, 항상 ‘죄’와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교리에서는 삼구 즉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마귀, 세속, 육신이라고 가르치면서 항상 경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언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언자가 잘못된 형제나 그릇된 길을 가고 있는 자들의 잘못을 이야기해 주지 않고 그들이 잘못했을 때에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만, 그렇기 않았을 때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예언은 다가올 모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여 제때에 자기 백성들이 삶의 길, 회개의 길을 걷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고 그가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는, 자비와 용서의 주님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깨우쳐주어야 할 사명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사명의 완수를 위해서 우리는 모두 공동체로서 책임감과 연대성 아래 서로 충고하고 잘못을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때에는 본인도 죄책감을 전연 느끼지 않게 되고 모든 것이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또 본인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합니다.

    스페인의 아라곤 왕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보석상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주인과 값을 흥정하고 있는 동안 신하들을 보석들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게를 나섰을 때 보석상이 당황한 얼굴로 뒤쫓아 나왔습니다. 아주 비싼 다이아몬드 하나가 없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신하들 모두에게 보석 가게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왕은 보석상에게 소금을 가득 채운 항아리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각자 소금 항아리에 주먹을 넣었다가 꺼내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항아리의 소금을 탁자 위에 쏟았더니 과연 소금 속에서 다이아몬드가 나왔습니다. 왕은 관대한 사람이었으므로 다이아몬드를 훔친 사람이 창피를 당하지 않고 잘못을 뉘우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입니다. 분명 다이아몬드를 훔친 사람은 왕에게 감사하였을 것이고 진정으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면서 개인적으로 왕을 만나 용서를 청했을 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일깨워 주는 것은 단순한 단죄와 심판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훨씬 넘어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아무리 다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바로 사랑이라고 강조하면서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이 쉬워 이웃 사랑이지 참으로 어렵고 힘든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특히 자기 몸이 고달프고 괴로울 때 사람은 먼저 짜증부터 내게 마련이고 괜히 아무것도 아닌 일에 언성을 높이고 신경질을 부리게 됩니다.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할 바를 다하고 충고해 주며 사랑으로 감싸주는 사람이야말로 율법을 완성하는 자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특히 이웃의 잘못을 깨우쳐주는 방법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1대 1의 대화, 그것도 안되면 두세 사람과의 그룹 대화, 또 그것마저 안되면 교회에 알리고, 그것도 안되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간주하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죄 지은 형제에 대한 ‘형제적 충고’를 할 책임이 있지만 그것을 끝내 거부할 때에만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단합을 위해서 그 형제를 제명 처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경우라 할지라도 공동체는 그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욕하고 비난하기는 쉬워도 기도하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서로 기도해 주는 것이 바로 형제애인 것입니다.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에 손상을 끼치는 형제는 공동체의 전체적 이익을 위해 과감히 제거해야 하지만 그 형제의 궁극적 구원을 위해서는 아낌없는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을 구현하는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슬퍼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함께 웃어주고 기뻐해야 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기에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동병상련의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중에 어떤 형제가 잘못되었을 때 그를 꾸짖고 비난하기에만 열중하지 않았는지, 나 자신만 옳고 남은 그릇되었다고 스스로 편견에 떨어지는 잘못은 범하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사랑과 관용의 정신으로 우리 이웃의 잘못을 형제적 충고로 올바로 잡는 데 전력을 다하도록 굳게 결심해야 하겠습니다.

  2. user#0 님의 말:

    형제가 죄를 지으면

    1. 말씀읽기: 마태오 18,15-20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루카 17,3-3)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2. 말씀연구

    형제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내고 잘못을 깨우칠 때까지 외면하면 참 편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형제를 감싸 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가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용서를 베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쉬운 일은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니 기도하며 용서할 힘을 청해 봅시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한 형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형제가 잘못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화해를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단 둘이 만나서 타이르라고 하시는데 사실 그를 위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고맙다고 하기 보다는 “그래! 네놈은 어디 잘하나 보자!”라고 마음 품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옳은 말씀입니다.  그가 돌아서면 형제를 하나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니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천하자니 자존심 상하고,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 못 타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형제가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열심히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전부터 열심히 봉사하던 형제가 그 형제를 보고 조용한 곳으로 불러 타일렀습니다. “형제님! 너무 열심히 하시니까 주변 사람들이 기 죽어서 못하잖아요. 그러니 매일 미사 나오시지 말고 가끔 나오시고, 되도록이면 주일미사만 참례하세요. 그것이 형제님을 위해서도 좋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아요.”

    오히려 잘한다고 격려해 주고, 함께 하자고 힘을 실어 주어야 하지만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 아닌 경우”나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경우”에는 오히려 그를 배척하게 됩니다. 참으로 부족한 모습입니다.

     또 잘못을 말해주면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의 탓으로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그가 냉담할까봐 전전긍긍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 안에서 잘못을 범한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혼자서는 객관성이 떨어지고, 잘못을 범한 사람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게 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규율에 따르면, 증언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에 의하여 확인될 때에야 법적으로 유효합니다. “어떤 나쁜 짓이든 어떤 잘못이든,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증언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고소할 수 있다”(신명19,15). 여기서는 충고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고 최후의 비상수단을 연기시키기 위해서 법적인 절차라는 요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함께 사실을 증언하고 잘못을 범한 형제가 회개하도록 촉구할 때, 그리고 그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 형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그런데 누군가를 죄인으로 단정하는 것, 그리고 여럿이서 한 사람을 몰아세우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욥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친구 셋이 찾아와서 욥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욥은 답답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형제에게 다가갈 때 그도 마음을 돌려 하느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몰아세우면 그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될 것입니다.


     물론 가끔은 정말 “저 사람이 신앙인이라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까지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다가가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억지로 회개시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유의지를 침해할 마음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방인이나 죄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온다면 예수님은 맨발로 뛰어나가 그들을 맞아들이십니다. 즉 기다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교회 밖으로 떠났다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회개를 위하여 인내와 친절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싫어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① 일이 있을 때는 늦게 와서 말로 다 때우고, 성당에서는 열심한 것 같은데 밖에 나가서는 온갖 나쁜 일과 나쁜 말은 다 하고 다니면서도 안 그런 척 하는 사람.

    ② 상대방을 평가하거나, 애써 일한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며 잔소리가 많은 사람

    ③ 함께 있으면 굉장히 친한 것 같은데 돌아서서는 내 욕과 흉을 보는 사람, 그리고 자신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닌 척 하는 사람

    ④ 인사를 받으려고 하고 잘난 척 하고 인사를 해도 외면하고 안 받아 주는 사람

    ⑤ 성당 안에서 잡담하며 떠드는 사람, 휴대폰을 사용하는 사람

    ⑥ 성당 안에서 남을 말을 하는 사람

    ⑦ 성당에 지저분하게 휴지나 매일미사 책을 버리고 가고, 컵이나 담배꽁초 등을 버리는 사람

    ⑧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는 사람.


    그리고 신앙인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① 봉사할 때 함께 해 주는 사람

    ② 어디에서나 만났을 때 손을 잡아주며 반갑게 인사해 주는 사람

    ③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다정한 사람

    ④ 아무 말 없이, 어떤 상황에서든지 묵묵히 함께 하면서 도와주는 사람

    ⑤ 웃으면서 기쁘게 반겨주고, 진실하게 이야기 하는 사람

    ⑥ 진실하게 기도하고, 성가를 기쁘게 부르는 사람

    ⑦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묵묵히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

    ⑧ 믿음이 없는 나를 가르쳐 주고, 이끌어 주며, 신앙에로 초대해 주는 사람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사도들은 베드로사도와 똑같이 권한(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16,19)을 받았습니다. 물론 하나의 차이는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후계자를 갖습니다. 베드로의 자리를 이어받는 교황은 교황에서 교황으로 그 특권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용서와 징계를 통한 구원에로의 초대, 즉 교회의 구원 활동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측면에서 내가 그를 용서해 준다면 하느님께서도 그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것. 그래서 나를 통해서 그가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내가 상대방에게 용서를 청하지 않는다면 그가 나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나 또한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공동체가 형제  자매의 구원을 위하여,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서 청한다면 분명 들어주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합시다. 진실한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고, 공동체의 기도를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시기에 그 기도는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예수님께서 내 옆에 계심을, 우리 공동체와 함께 계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드린 기도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확신시켜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도합시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기도합시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해봅시다. 형제 자매들의 구원을 위하여.


    3. 나눔 및 묵상

    1. 누군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내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형제 자매들의 신앙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3. user#0 님의 말:

     

    1. 안광훈 세자요한

    1.1. 연중 23 주일(가해)


    제 1 독서 : 에제 33,7-9  <주 석>

    7절 :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 이 말씀은 그 나라의 주민들이 파수꾼을 뽑고 그에게 직무를 맡기지만, 여기서 야훼가 직접 예언자를 어떤 직에 임명한다. 이로 인해 그는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이 된다. 즉 에제키엘이 경고해야 하는 분은 적이 아니라 바로 야훼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야훼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에제키엘은 이를 공개적으로 경고할 것이다.

    8-9절 : 에제키엘은 이 말을 듣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자에게 그는 자신의 이제까지의 행위로 인해 멸망하리라고 가르쳐주는 경고를 함으로써 그 말의 무게를 더욱 더 무겁게 했다고 생각된다. 이 구절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일종의 ‘권고, 권유, 경고’, 곧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경고의 말을 건네는 것임이 분명하다. 예언자가 수용해야 하는 것은 어떤 공동체를 향한 막연한 설교가 아니라 백성 가운데 위협받고 있는 바로 이 사람을 향해 엄습해 오고 있는 위험에서 그를 구해내기 위해 일러주는 권고이다.


    제 2 독서 : 로마 13,8-10  <주 석>

    8절 :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성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이란 성도들이 지불해야 하는 빚으로서 ‘다 갚음’이 없는 영원한 부채라는 것이다. 한편 ‘아무에게든지’라는 표현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대상이 ‘성도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다 이루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켄’은 현재완료형이다. 이는 사랑하는 순간 율법을 이룬 것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바오로가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9절 :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 바울은 율법의 예로 십계명을 들고 있다(6, 7, 8, 10계명). 바오로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율법인 십계명의 조항을 들어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 사랑이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가를 말해주려고 한다. 바오로는 사랑과 관련하여 이웃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항목들을 선택했거나, 아니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항에 해당되는 율법 조항을 들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는 ‘…을 하지 말라’하는 금령(禁令)이 ‘사랑’이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규범으로 대치되고 있음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 바오로는 (레위 19:18)을 인용하면서 사랑의 결정적인 가치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 계명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율법의 핵심이고 완성임을 명백히 보여준다(막 12:31;갈 5:14;약 2:8).

    10절 :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본문은 사랑의 소극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성도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사랑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이런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사랑도 강조되어야 한다.


    복 음 : 마태 18,15-20   <주 석>

    15절 : ‘이웃’은 유다교에서는 특별히 같은 동족을 말하고 ‘형제’는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 즉 공동체의 지체와 관련되어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그를 충고하는 자에게 행한 범죄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예수의 모든 제자들에게는 각 형제들에 대한 책임이 지워졌다.

    16절 : 한 두 형제의 조력을 통해 죄인을 보호해야 한다. 아마도 경고하는 사람이 부당할 수도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이 그 경고자가 발견하지 못하는 적절한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7절 : 죄인이 의도적으로 전 공동체의 권고를 ‘무시하고’ 정죄될 경우조차도 공동체 지도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마지막 말은 전체 형제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18절 :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공동체가 이미 판결문으로 선고한 것을 마지막 법정에서 효력을 갖게 하시는 하느님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18절의 법규는 분명히 심판은 단순히 언도되었고 그런 다음 하느님이 집행하는 것을 떠맡으셨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19절 : 유다교 공동체에서는 공동 기도를 위해서 최소한 열 명의 남자가 필요한 반면에,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이러한 규정이 폐지되었다. 두 사람의 기도라 하더라도 들어 줌이 약속된다. 공동체가 매고 푸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 확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문에서 가르쳤던 것과 같다.

    20절 :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임재 한다는 약속이다. 제자들은 그의 ‘이름’으로 모였다. 여기에서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만이 유일하게 세상으로부터 공동체를 갈라놓는다. 따라서 예수는 이제 율법을 대신하게 되는데, 율법에 대해서 어느 유다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이 함께 모여 율법의 말씀이 그들 사이에 있게 되면 임재하심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 이 복음서의 마지막 절이 예수의 임재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한다면, 여기에서는 기도가 이 계명의 중심에 속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연중 23주일 강론 (가해)


    찬미예수님!


     오늘은 교회 달력으로 보면 9월 순교자 성월입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인 9월에 우리 모두 순교자의 삶을 기리며 그분의 삶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그가 너의 말을 듣지 않거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의 잘못을 고쳐주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너희가 그렇지 않으면 그 친구가 잘못된 책임은 너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계속해서 교회에까지 알려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데도 그 친구가 듣지 않거든 그때 가서는 그냥 이방인처럼 놔두라는 것입니다. 즉 이때에는 너희의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이웃의 문제에 관심과 애정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까’ 하는 식으로가 아니라 우리는 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서로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태도로 대하지 않으면 그 친구의 잘못된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의 초점은 잘못하는 이웃에게 충고하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충고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즉 잘못한 형제를 보고서도 관심을 갖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는 우리의 이기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즉 우리 신앙인의 태도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상대방에게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을 갖고 그를 돌아서게 이끄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를 고치지 않으면 그냥 두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네가 해야 될 바를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중간에 포기하거나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그냥 둔다면 그 책임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신다는 것이 오늘 제1독서인 에제키엘서의 말씀입니다.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즉,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몫보다 그 잘못을 충고해주고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아 올 수 있도록 관심과 사랑을 끊임없이 베푸도록 우리를 촉구하신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제2독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와 둘째로 사랑이란 성도들이 지불해야 하는 빚으로서 ‘다 갚음’이 없는 영원한 부채라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말한 제1독서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잘못한 자보다 그를 충고하는 자에게 더욱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잘못한 것은 보상해 주면 그 관계는 끝이 납니다. 하지만 잘못된 사람들을 용서하고, 타이르고, 충고하는 등의 일은 끝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행위에 비롯하는 ‘빚’은 다 갚음이 없는 영원한 부채로서, 우리들의 삶 안에서 끊임없는 인내와 사랑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의 1독서와 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은 하나의 주제로 모아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잘못한 이들에 대한 태도로서 우리의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잘못됨을 꾸짖고 고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여 다시금 올바른 길로 돌아설 수 있도록 사랑으로 이끌어줄 몫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한다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마음을 모두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그 방법까지 말씀해 주십니다. 혼자서 하다가 안되면, 둘이나 셋이 함께 모여서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되면 교회에 알려 도움을 받으라 하십니다. 이렇게까지 해서도 안되면 그를 이방인처럼 대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단 두, 세 사람이라도 함께 모여 기도하면 당신께서도 함께하신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으십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의 몫이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으로 한 형제를 위하여 노력하라는 것으로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실 가톨릭 신앙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비록 그 일이 내 일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그 일로해서 비록 내가 손해 보더라도 기꺼이 관심을 갖는 행동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충고하거나 지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 자신도 죄짓고, 실수 많이 하고 헛점 투성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런데 나무라는 모습을 보면 진짜 애정적인 충고는 없고 지적하기 위한 판단이기에 도리어 상대방에게 상처나 모욕을 줌으로서 더 관계를 악화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대로 이웃 형제의 허물을 지적해 주기 보다는 그를 더 이해하고 받아주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그가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더라도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을 갖고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할 때 하느님은 분명 “우리가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이런 정성을 기꺼이 받아주시고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이웃의 잘못에 관심을 갖고 그가 돌아서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가 돌아서면 우리는 새 친구 하나를 더 얻는 것입니다.

  4. user#0 님의 말:

     

    연중 제 23 주일

            1. 김정진 신부(가)/ 2              2. 안충석 신부(가)/ 3

            3. 최기산 신부(가)/ 6              4. 강길웅 신부(가)/ 8

            5. 이병돈 신부(가)/ 10             6. 유진선 신부(가)/ 12

            7. 교구 주보(가)/ 13               8. 최인호 작가(가)/ 15

            9. 교회는 화해와(가)/ 16          

    1.         연중 제23주일   마태오 18,15-20 (가) 고립정신에서 일치에로,

                                                                김정진 신부


    예수님께서는 자나깨나 노상 사랑의 길을 가르치시고 하느님과 이웃에 관한 애덕 실천의 방도를 제시하십니다. 오늘도 영일 없이 사랑의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치시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어떤 형제가 당신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시오” 하시며, 형제적 권고 혹은 형제적 견책이 애인덕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함을 명시하십니다.


    남이야 어떻든 간에 무슨 상관이야 하는 사고방식이나,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신들 무슨 참견이야 하는 심리 작용은 사랑의 실천과는 거리가 먼 인사일 것입니다. 사사건건 남의 일에 참견하려는 몰상식한 수다쟁이 앞에서나 통하는 말투일지언정 화해와 평화의 길목에서는 영원히 사라져야 할 말버릇일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형제 중 누가 잘못하였을 적에 그저 비웃는 낯으로 방관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는 우리 형제요, 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그의 잘못은 나의 잘못이며 공동체적인 의식으로 하느님 앞에 연대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고립된 생활에서 나 하나만이 구령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멀리 추방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고 봉사하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선언한 우리는 진실되고 올바르고 의롭고 착한 것을 항상 생각하고 주장해야 되겠습니다.


    일보 전진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 서로 사랑함으로써 일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 상호 분열되고 질시하고 갈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형제들이 잘못할 적에는 사랑의 정신과 아껴 주는 마음으로 순순히 타일러 주어야 하겠습니다. 따스한 봄볕에 얼어붙은 얼음이 살살 녹듯이 그 완고하고도 괴팍한 이웃 사람의 마음이 고요함과 평화를 찾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형제 하나를 얻은 것입니다”(마태 18,15).


    이 같은 헌신적 봉사, 즉 사랑과 인내의 권면이나 책망은 우리 모두를 한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으로 만들며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백성으로 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과 생활 태도야말로 우리에게서 죄악의 자취를 감추게 하고 이로써 우리는 다시금 서로 하나가 되고 또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가 만일 죄인들이 회두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타이르지 아니하고 경고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죄인이 되고 벌을 받게 된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 점에 대하여 강력히 말씀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에게도 빛을 져서는 안되겠지만 서로 사랑해야 할 빛만은 어제나 여러분에게 남아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율법을 다 지킨 것입니다”(로마 13,8) 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겨 놓았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양떼들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고 다른 사람들에게 냉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터놓고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며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화해이며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이상의 말씀과 같이 우리 서로 사랑의 마음으로 남을 격려하며 권고하며 형제적 책망을 통하여 이웃 사람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있어 방해가 되고 암적 존재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이기주의이고 배타주의입니다. 인간은 본래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어느 현인이 말하기를 “참된 우정은 지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배” 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불행할 적에 위로해 주고 낙심할 적에 용기를 북돋아 주며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는 동고동락하는 미풍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멋진 인생을 영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이런 인생의 진의를 잘 알고 계십니다. “당신들 중의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청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은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 나는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마태 18,19-20) 하고 말씀하시며 단체적인 경신 행위나 단합적인 신심행사가 얼마나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예수님과 일치한 생활인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기도생활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보다 바람직한 것은 가정에서도 가족이 함께 조석으로 기도 바치는 습성을 기르고 성당에서의 공동신심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마음의 자세가 무척 아쉽기만 합니다. 이제 10월에 들어서서는 본당 각 구역 단위의 미사와 성경 공부 등 신심행사의 모임이 있게 됩니다.


    이 때마다 20명 내지 30명 가량의 열심한 우리 신자들이 모이곤 하지만 때로는 대여섯 명이 모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 이상 모인 곳에 우리와 같이 계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2.            연중 제23주일   마태오 18,15-20 (가) 용서하는 사랑,

                                                              안충석 신부


    오늘 복음성서에서 첫째 교훈은, 어떤 형제가 우리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형제적 사랑으로 타이르며 참고 기다리며, 용서하는 사랑을 증거 할 수 있는 증인 세 사람이나, 교회 공동체를 동원해서라도 회개시키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교훈은,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밝히심으로써, 우리 개인들은 먼저 다른 무엇보다도 교회란 공동체와 떨어진다면 주님과도 떨어진다는 엄연한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살인 강도 유괴 치한 등 강력 사건들의 연속이나 그 해결책은 속수 무책인 것입니다. 느느니 증오심만 팽배하여 극에 이르고, 나만 안 당하면 그만 이라는 공범자적 이기주의는 신문 뉴스 소식이 하루 지나면 휴지 쪽같이 내동댕이쳐 버리듯 무관심뿐입니다. 이에는 이빨로 악에는 더 큰 처벌만이 능사가 된 죄와 벌의 악순환으로 희생자만 늘어갑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한 개인이거나 공권력을 가진 공동체나 인간다운 면과 인내로이 기다리는 용서하는 사랑으로 개과천선시키기보다, 이건 죄를 지었으면 일벌백계주의로 한 번 벌하여, 백 가지 범죄를 막겠다는 죄와 벌의 악순환뿐이니, 인간을 구해야겠다는 구석은 털끝만큼도 없지 않습니까?


    어떤 왕이 법을 하도 많이 만들어 자기 백성을 꼼짝달싹도 못하게 매어 놓기만 하더니, 결국 자기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하여 자동 처단되었다는 것입니다. 무릇 생명체 있는 지렁이에서 쥐와 인간에 이르기까지 풀어놓는 데 없이 매어 놓기만 하고, 막다른 구석으로 몰기만 하여, 극에 달할 때 꿈틀거리고 덤비려는 본능밖에 더 남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 성서 장면처럼 참고 기다리는 사랑, 그것도 모든 사실을 증언하는 세 사람이나 교회 공동체 사관을 내세워 용서하는 사랑, 대화하는 아량, 풀어놓으려는 줄기찬 어떤 사랑의 표시가 이 땅에서 볼 수는 없는 것입니까? 한 집안 일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기 자녀들에 대하여 부성애와 진실된 사랑을 앞세우지 않고 훈계한답시고 야단치고 벌주는 것만 일삼는다면, 오히려 반발과 빗나가기가 일쑤라는 것을 우리 일상생활에서 신물이 나도록 되씹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한 개인이고, 한 가정이고, 한 공동체고 한 나라고 간에 인간을 규칙이나 벌이나 처벌로써만 다스릴 수 있는 것이 만만코 아니고, 진실로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움직여 다스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충고하거나 바로 잡아주는 개인이나 단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바로 잡은 것이 국민의 여론뿐이었듯이, 우리 국민 각자 스스로 밖에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 작품, ‘장발장’이란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은 굶주린 창자에 빵 한 조각을 훔쳐먹은 죄로 전과자란 누명을 썼기 때문에, 어느 누구 하나 오늘 복음 성서 장면처럼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이, 그의 현주소는 언제나 감방뿐이었습니다.


    자기 형벌을 다 마치고 나와도 살 곳이 없이 성당의 신부님한테 처음으로 인간적인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배은망덕으로 은촛대를 갖고 달아나다 경찰에 잡혀 죄인으로 신부님 앞에 끌려 나오게 됩니다. 물론 그 때 신부님은 죄에 대한 벌을 법대로 처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 신부님은 저 죄 많은 인간은 처벌로서는 더 이상 될 수 없고, 그 인간 영혼을 구하는 길은 사랑의 진실, 진정한 마음과 정신으로 그를 움직이는 용서하는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깊은 선의로 “그 은촛대는 내가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가슴이 뭉클해 오고,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진정한 사랑, 진실에 접한 장발장은 180도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돌아서서 시장이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큰 일을 하였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처벌의 양만 몇 배로 늘인다면 해결할 수 없으리 만큼 현실지경이 극에 이를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정말 인간다운 인간 진정한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인간 같은 인간의 용서하는 사랑이 털끝만큼도 없어서, 저 감옥을 메운 수많은 장발장들이 죄와 벌의 악순환 속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이 땅에서 매어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인 채로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어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풀린 채로 있을 것입니다.” 복음 성서를 한 마디로 줄인다면, 주님의 자비와 용서하는 사랑으로 우리는 어떻게 인간답게 되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잘못한 일이 있는 형제 자매들이 우리들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다시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 중에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합하여 기구하여 청하면 무엇이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여서 일치와 화해, 사랑의 공동체가 될 때, 주님과 함께 있는 공동체로서 그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이렇게 주위 제단에 묘여서 미사 드리고 있는 것도 우리 교우 공동체가 서로 사회적으로 일치와 화해하고 있다는 표시이며 자신의 가슴을 치며 용서하는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세성사 때나 저 고백소에서 천주님께 우리가 범한 무수한 범죄를 탕감 받은 엄청난 빛을 진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들은 남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베풉니까? 우리 자신의 보속을 주의 기도문, 성모송 몇 번 바치는 것으로 다 기워 갚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생활로 기워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죄악으로 입은 상처를 정말 났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서로 용서하는 복음을 실천하는 길뿐입니다. 대화가 진실로 서로 통할 때,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겁도록 용서하는 사랑만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며, 용서 못하는 처벌로서는 빗나가며 반발하는 인간을 만듭니다. 과연

    누가 우리를 인간 같지 않은 인간으로 만들었단 말입니까?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분명한 대답을 하시고 돌아가셔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의 가슴이 뭉클하도록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 있게 용서하는 사랑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아멘.






    3.        연중 제23주일   마태오 18,15-20 (가) 공동체의 임무 ‘충고’

    최기산 신부


    젊은이들의 꼴불견을 보다 못해 백발의 노인이 그들을 꾸짖다가 망신을 당하거나, 교수가 학생의 잘못을 꾸짖다가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심심치않게 듣게 된다. 이쯤 되면 ꡐ동방예의지국ꡑ이라는 간판이 떨어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슬픈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느니, 살아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느니 하고들 격론을 벌이기도 하는가 보다. 이러한 격론이 있다는 자체도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구원 역사 속의 충고들 어른이 젊은이들의 잘못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젊은이들은 충고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사회는 건강하지 않을까? 독재자일수록 칭찬만을 찾았다. 성군이 되는 것은 옆에서 칭찬만 해대는 신하 무리들을 과감히 쓸어버리고 충고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을 두루 배치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충고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충고는 소태처럼 쓰기 때문이다.


    어떤 신자가 말을 너무 잘해서 연사로 이곳저곳에서 강연하게 되었다. 그의 말솜씨는 그야말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 하면서도 힘차 많은 사람들이 감명받았다. 그래서 박수를 많이 받았다. 몇년이 지난뒤 그를 따라다니던 사람이 내게 말했다.ꡒ신부님, 우리 선생님이 이상해졌어요.ꡓꡒ왜요?ꡓꡒ어디가서 강론하고 나면 우선 우리들이 잘하셨다고 말씀드려야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ꡓ나는 그때 생각했었다.ꡒ그의 운명이 바뀌겠군!ꡓ결국 그는 계속 박수소리에 속고 있었다. 자신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충고같은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교권을 문제 삼기 시작하고, 자신이 왕이 되고 말았다.


    구원 역사 속의 충고들 원죄는 따먹지 말라는 충고를 무시한데서 시작한다. 노아의 홍수가 그랬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그들을 잡아죽이기까지 했다. 그 결과는 언제나 비참하였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아브라함은 조카며느리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충고했건만 그는 무시하였다. 결과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창세 19장참조)


    예수님은 성서를 통해서 우리더러 회개하기를 계속 충고하신다. 하느님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하라, 제일 사랑하라, 인간을 사랑하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충고를 듣고 있는가?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의 문제들


    구약의 전통대로라면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 공동체내에서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견책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ꡒ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ꡓ(레위 19,17) 그러나 남이 보는데서 하지말고 단 둘이서 얘기하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남들이 들으면 소문이 무성하게 퍼지고, 명예가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 때문에 오해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말하기 쉽기 때문에 옛부터 침묵은 금이라고 했을 것이다. 남들이 듣는데서 충고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나가서 입에서 냄새가 날 때까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지껄여댈 수도 있기에 혼자서 조용히 충고하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두세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라도 그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고집을 세우고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공동체 앞에 그의 문제를 가져와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사람의 잘못을 타일러 주는 문제에 집요하게 대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한사람의 잘못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끝장을 보려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미꾸라지 한마리가 우물안을 다 더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면으로는 한 인간의 존재가 너무도 귀하기에 그를 끝까지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교회공동체의 일이라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스스로 죄없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다. 부족하기에 충고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내게 충고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나는 인간성이 시원치 않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포기한 사람이다. 남들이 나를 포기한 사람이라면 나는 불쌍한 사람이다. 내게 충고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충고가 받아들여졌을 때 서로간에 막혔던 벽은 무너진다.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충고하기를 좋아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충고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아내도 남편에게 충고할 수 있어야 한다. 남편은 당연히 아내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도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자식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ꡒ아빠, 술 잡수시고 오시면 안돼요ꡓ 이렇게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딸이 얘기할 때 그것은 하나의 충고일 수 있다.


    하나의 충고를 소홀히 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충고를 싫어하게 된다. 매일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충고하시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아홉번의 칭찬 뒤에 한번의 충고라 해도 싫어하는 자세였다면 바꿀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ꡒ주님, 충고하기보다는 충고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되게 하소서.ꡓ






    4.    연중 제23주일   마태오 18,15-20 (가) 충고는 보초의 임무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에제 33,7~9 (네가 그 죄인에게 타일러 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

    제2독서 로마 13,8~10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복 음 마태 18,15~20 (그가 너의 타이르는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군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아도 보초 경계를 게을리 한 지휘관은 용서받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라도 작전의 실패와 보초 경계의 태만은 차이가 큽니다. 작전의 실패는 최선을 다하다가 실패한 것이지만 보초 경계의 태만은 그 자체가 이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보초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에 의해서 전체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보초는 항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며 위험이 있을 시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재난 을 피해야 합니다. 일찍 알렸는데도 그에 대응치 못해서 사람들이 다치면 그것은 그 사람들 잘못이지만 알리질 못해서 사고를 만났다면 그것은 순전히 보초 책임입니다.


    예언자는 시대의 보초입니다. 위험이 있을 때 그는 두려움 없이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보초로서 소임받은 내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은 그 고달픈 직무 때문에 왕과 백성들에 게 미움을 받아 참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보초의 임무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유신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가 있었습니다. 그때 정부 주도하의 언론 매체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국민투표에서도 거의 100% 가까운 지지표를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교회의 주교님과 몇몇 신부님들이 정부 정책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유신철폐’를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도전이었으며 사리를 분간하지 못 하는 무모한 행위로까지 보였습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까지도 그때의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공격하고 비난했습니다. 정부가 어련히 잘 하고 있는데 왜 교회가 정치에 간섭하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한 나쁜 여론이 빗발치듯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주교님 한 분과 신부님들 몇 분이 투옥되었으며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야 우리는 그분들이 옳았으며 백성은 유신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수는 우둔합니다. 한마디로 군중은 어리석습니다. 앞에서 누가 얼굴을 가리고 거짓말을 하면 그것이 옳은 줄 압니다. 그래서 전체 가 잘못된 길을 옳은 길인 줄 알고 착각 속에 걸어갑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충고를 받아들이는 아량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보초의 말을 듣지 않고 충고를 외면하면 그는 망합니다. 혼자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도 망치고 백성도 망칩니다, 그러나 충고를 듣는 것도 어렵지만 충고를 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유럽에서 어떤 왕이 낮잠을 자는데 왕궁 뒤에 있는 방앗간의 풍차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자 짜증이 생겼습니다. 화가 난 왕은 신하를 시켜 풍차를 부숴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하들이 달려가서 그 풍차를 부숴 버리자 방앗간 주인이 나와서 “왕은 백성의 아버지인데 자녀들이 생업에 힘쓰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재산을 부숴 버리다니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며 한탄했습니다.


    신하들이 이 말을 왕에게 전하자 왕은 방앗간 주인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풍차를 다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왕이 바로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대왕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충고의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을 수 있고 실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충고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사실 자기 자신을 잘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신보다는 옆에서 더 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고를 받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큰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솔직한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에겐 모두 보초의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잘못은 지적하고 고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남이 잘못되고 있는데도 충고하지 않고 바로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공범잡니다.


    불이익을 당한다 해도 틀린 것은 지적하고 고쳐 줄 때 그가 참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훌륭한 보초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손상된다 해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로마 13,8) 이 사랑이 바로 보초의 의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5.          연중 제23주일   마태오 18,15-20 (가)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이병돈 신부


    충고해야 할 신자들의 임무를 일깨워 줌

    한 사형수가 형 집행 전에 이렇게 유언을 하였습니다. “내가 한 생을 비참하게 마치게 됨은 어느 면으로 부모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나의 부모님은 언제나 나의 편이었지요. 특히 잘 못을 저질렀을 때도 충고나 매질을 한 번도 안 하셨을 정도로 나의 편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죄의 타성에 물들어 나쁜 짓에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되었기에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지요. 부모님의 맹목적인 사랑이 결국 나를 파멸 시켰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는 속담이 있듯이, 따끔한 매와 충고는 한 인간을 성숙시키는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충고의 의무와 충고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한 형제가 잘 못을 저질렀을 때, 타인에게 알리어 이웃으로부터 소외시키기 전 우선 본인에게 솔직히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할 때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잇도록 둘이나 셋의 도움을 받아 잘못을 시정해 주도록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 즉 그 잘못을 제지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나 공적인 권위를 가진 자에게 알리어, 그 잘못을 시정해 주도록 해야합니다.


    특히 그 잘못이 한 단체와 주위 사람들의 질서를 파괴할 정도로 중대하면, 더더욱 질서를 지키기 위해 공권자에게 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책임을 진 사람은 알 권리가 있고 단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한 대책을 강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서도 잘못이 시정되지 않는다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십시오.


    예수님 시대에 이방인이나 세리 분명 죄인으로 배척받고는 있었습니다. 그들도 구원에서 제외된 것은 아닙니다. 세리였던 자케오가 회개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충고와 교회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언젠가는 회개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라는 묵시적인 뜻이, 오늘 복음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형제 중 잘못한 이에게 충고해야 할 의무는 크리스천적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은 현세에 살고 있는 한 누구나 남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고, 또 한 타인과 필연적으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이라면 그는 인간의 도리를 무시하는 것이고 자기 모순이며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자라면 타인에 대해 무관심 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자라면 타인에 대해 무관심 할 수는 없습니다.


    타인에게 사랑을 쏟는 태도는 적극적 의미로는 타인이 잘 되도록 협력할 것이며 잘못이 있을 때는 충고하여 잘못이 없도록 인도하는 것이겠습니다. 타인의 잘못에 대하여 수수방관하거나 무관심하다면 타인은 결국 구원의 빛을 잃게 되며, 수수방관한 그리스도교 신자는 방조죄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형제 중 누가 잘못이 없도록 협조하기를 당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데전 3,1-5). 이런 예는 성경 여러 곳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고쳐 주거나 충고해 주는 의무는 중대합니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자에게 따라오는 임무이며, 그 도움의 효과가 크면 클수록 의무 또한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충고하는데 있어 비판을 위한 비방이 되어져서는 결코 아니 되겠습니다. 충고는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명백히 하는 판사의 판결문이 아닌 사랑이 넘치는 사랑의 호소요, 함께 나누는 고통이며 염려입니다.


    판사의 판결문이나 의사의 진단은 어느 죄인, 환자의 상태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결코 공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찬 충고는 판결해 주고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닌, 함께 치유되길 희망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는 공감의 터전에서 이룩됩니다. 따라서 충고는 형제애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충고는 인내와 지혜를 요구합니다.


    한 번이 아니라 거듭거듭 회개할 때까지 계속 되어져야 합니다. 왜냐면 사랑은 모둔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며, 가실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고전 13,7). 그리고 충고는 때와 상황에 맞게 그리고 적절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때와 상황을 알지 못하는 의사가 집도하여 환자를 죽일 수 있고 과도하게 투약하여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듯이 충고라도 각자가 지혜롭게 판단하여서 적시에 적절히 해야겠습니다. 이제 충고하는 우리가 아니라 충고 받는 우리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흔히 자기의 과실이 타인에게 드러내 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충고 받기는 더더욱 싫어합니다.


    그러나 환자가 자기의 병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거나 의사의 권고를 무시할 때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여야 하며 타인에게 개방적이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잘 못할 수 있고, 우리도 이 범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이러한 인간적 나약성을 시인함으로써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비울 줄 모르는 자, 교만한 자는 이웃을 잃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마저 잃게 됩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형제적 사랑으로 이웃에게 충고합시다. 또한 겸손한 마음으로 충고를 받아들입시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갈 때에 그를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그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것이고 또 자기 자신이 많은 죄를 용서받게 될 것입니다(야고 5,19-20).






    6.           연중 제23주일   마태오 18,15-20 (가) 종교와 양심,

                                                 유진선 신부


    그리스도는 하늘을 버리고 인간을 위해 대가없는 봉사자 희생자로 나타났습니다. 인간 복귀를 위한 창을 열어제쳤고 그래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창기나 잔악한 무리를 벗삼았습니다. 인간을 위해 일생을 살았고 인간이 유일한 가치의 기준임을 가르쳤습니다. 부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찾아 왕사성을 버렸고 그리고 고행을 했습니다. 정각(正覺)을 얻은 뒤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했고 가르쳤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자의 요소는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종교의 설자리가 그래서 있게 됩니다. 그것을 소박하게 표현하자면 양심이라 할 것입니다. 잔인한 강도의 마음속에도 성자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수도자 속에도 강도는 기다리고 있다는 헤르만 헷세의 말은 지당합니다.


    사실 현실세계를 살고 그 세계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때가 묻기 마련이고 그래서 죄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빈곤과 질병에 의한 불행을 우리는 자신의 일만큼 절박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거지 아이가 양단치마를 붙잡고 위협하는 것을 보면 괘씸도 하나 실상은 저 자신들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시켜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 아이들에게 교양과 도덕을 요구할 양심과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저 짓밟히는 인생 앞에 깊은 참회가 필요합니다.


    서울역 앞에는 거지 아이들이 우글대고 종로와 명동에는 뉴모드의 멋쟁이들이 우글댑니다. 이 남루한 소년들에게서 받는 피해와 불쾌를 저 호화한 무리들의 그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거지를 불쌍히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헐벗고 굶주리는 것 때문만이 아닙니다. 만고에 한 번 태어난 인생이 그 인격을 무시당하는 데에 있습니다.


    부화기에서 시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병아리 떼는 오늘의 인간상의 상징입니다. 봄볕 아래 새끼를 품는 어미 닭과 어미를 따르는 병아리를 보면 바로 사랑의 극치이며 미의 극치입니다. 어미 없는 병아리 떼, 부모 없는 후레자식들의 홍수시대(부모들이 부모 노릇을 안해서 생긴 후레자식의 홍수시대), 이 후레자식들에 의해서 오늘의 모든 비극은 벌어집니다.


    인간생활의 현실에서는 선의보다도 악의가 백배나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넘어뜨리고 짓밟고 속이고 앞지르고… 그래야만 성공이 있고, 그래야만 행복이 있다고 합니다. 인생의 경기장에서는 선의란 지극히 무력합니다. 주먹질이 오고가지 않고는 살수가 없는 시대, 속임수나 에누리 아니고는 장사가 옳게 안 된다는 사회, 행길가에서 다방에서 버스간에서 하루에도 몇 차례 화통이 터지고 목에 핏대를 올려야 하는 우리의 오늘날의 이 생활에서 선의란 말을 입에 담는 것부터가 얼마나 쑥스러운 노릇이며 얼빠진 것일까요?


    오늘날의 이 사회에서는 한갓  치렛감밖에 되지 않는 선이, 갖가지 불미부정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자행되고 있어도 이를 타파할 용기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크게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때묻게 하고 공범자라는 죄의식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기도와 설교의 소리는 충천하지만 그 설교 그 기도문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입니까?


    인간의 인간다운 면목은 참회하는 마음이고 올바로 행동하는 자세에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따라 뉘우치고 자기 본분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인들이 가르친 교리이고 윤리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인의 의미를 바르게 살자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인 아닌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양심의 거울에 먹칠을 하고 살기를 자처할 사람은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심은 편견이 아니어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나의 종교관은 자명해집니다. 양심을 강조하는 노력이 종교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편견이 없는 양심입니다. 자기 집착이 없는 양심입니다. 양심에 부끄러움 없는 일을 할 때 하늘을 향해서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천국은 찾아지고 신이 있다면 신과도 만나는 것이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7.      연중 제23주일   마태오 18,15-20 (가) 믿는 우리가 먼저

    교구 주보


    오늘 복음은 신자 공동체의 현실을 지적함과 동시에 이상적인 공동체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복음의 전반부는 형제가 죄를 짓거든 고쳐주라는 말씀이고(마태 18,15-18) 후반부는 함께 청하면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이다(19-20절).


    1. 형제적 충고

    형제적 충고는 옛 이스라엘 백성이 실천해 온 율법규정이다. 레위기는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19,17) 라고 가르친다. 에수께서도 이 전통을 이어받아 공동체 내에서 어느 형제가 잘못을 하면 형제적 충고를 하라고 권고하신다. 그래도 듣지 않거든 두세 사람을 증인으로 세워 사실을 밝혀 잘못을 교정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에서 재판 때에 증인 두 사람을 채택한 선례를 따른 것이다(신명 19,15 참조). 이런 노력도 수포로 돌아갈 경우에는 공동체 전체 의견에 맡겨야 한다. 만일 끝까지 공동체의 충고를 듣지 않거든 공동체에서 쫓아내라는 말씀이시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근본의도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죄나 고발이라기 보다 형제가 잘못을 깨닫고 다시금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마지막 호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로의 말처럼 “주님의 날에 그의 영혼이 구원을 받도록 하려는 것”(1고린 5,5)이 오늘 예수님 말씀의 취지이다.


    2. 함께 모여 기도하면

    잘못한 형제를 교정할 때 두세 사람의 힘을 빌리라고 했듯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다 들어주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려고 모인 곳에는 부활하신 예수님도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함께 간구하므로 하느님께서 더욱 잘 들어주실 것이 분명하다. 야훼 하느님께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에 함께 계신다. 더욱이 같은 믿음과 사랑의 결합속에서 기도할 때에는 오죽하시겠는가?

    3. 교회란

    교회란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 모인 하느님의 백성이자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인 각 개인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처지에 맞게 활동한다. 그러나 각각 독자적인 주체가 아니고 합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숙명적인 유기체이다. 공동체의 한 부분이 아프면 나도 아파하고, 즐거우면 나도 즐거워 하는 것이 각 지체의 도리이다. 하느님께서는 잃은 양들을 다시 찾기 바라신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 또한 나를 괴롭힌 형제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우쳐 친교의 공동체로 돌아오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다. 신앙으로 한집안이 된 우리 “믿는 식구들”(갈라 6,10)이 먼저 형제애를 실천하려고 애를 써야겠다. 이렇게 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공동체의 형제관계 속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8.      연중 제23주일   마태오 18,15-20 (가) 이방인

    최인호 베드로/작가


    카뮈(Camus, 1913-1960)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소설가이자 극작가로,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아버지를 잃고 귀머거리인 어머니 밑에서 빈곤 속에 성장했습니다.

    프랑스가 독일 점령하에 있던 1942년 7월에 29세의 청년 카뮈는 「이방인」(異邦人)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총아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부조리성을 통렬히 비판한 그는 「이방인」을 통해 실존주의 문학의 거두(巨頭)가 되었으며, 1957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자동차사고로 죽은 20세기의 훌륭한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특히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쩌면 어제였을지도 모른다’로 시작되는 「이방인」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무감각한 청년이 장례식 다음날 여인과 정사를 하며 햇빛이 눈부시어 아랍 청년을 살해하고, 두려움없이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이방인의 부조리와 절망, 그리고 인간 실존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헤친 20세기 최고의 걸작입니다.

    소설의 제목 「이방인」은 성경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이방인’이란 말은 ‘다른 나라에 살고있는 사람’을 뜻하지만 유다인의 세계관에서 나온 말로 하느님이 유다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여 선민(選民)으로 내세웠다는 사상에 입각하여 유다인이 아닌 이들을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도 이방인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 5,47) “너희는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마태 6,7). “그러므로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마태 6,25). “그들이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


    여기서 주님이 사용하신 ‘이방인’은 유다인들처럼 유다인이 아닌 이들을 지칭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지 않는 비그리스도교인을 가리키는 용어임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가 무아지경 속에서 “베드로야, 어서 잡아먹어라”는 신비한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나(사도 10,13) 바울로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은 “나는 너를 이방인의 빛으로 삼았으니 너는 땅 끝까지 구원의 등불이 되어라”(사도 13,47)는 명령을 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 중에서 인간의 부조리를 파헤친 카뮈의 「이방인」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20세기의 비극은 이처럼 무신론적 허무주의와 유신론적 물질주의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무신론적 허무주의는 공산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사라진 듯하지만 카뮈의 「이방인」에서 보듯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부재, 절망, 쾌락의 탐닉, 가치관의 혼돈, 밑도끝도없는 폭력과 광기는 오히려 한층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비록 유다인은 아니지만 이방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가 이방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단 두세 사람이라도 모인 가정이야말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임을 깨닫고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1세기를 살 모든 인류의 단 하나의 희망인 것입니다.






    9.    연중 제23주일   마태오 18,15-20 (가) 교회는 화해와 일치의 공동체


      얼마 전 들은 한 신자분의 신앙체험이다. “저는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교회에 오는 모든 신자들이 마치 천사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잘 알고 지내던 한 자매가 갑자기 나를 찾아와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나는 순수한 형제적 사랑으로 그 사람에게 아주 큰돈을 꾸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그 자매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나는 너무 큰 배신감을 느꼈고, 더 비참한 것은 같은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교회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일년정도를 병상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되었는지 그 곳 성당의 신자들이 환자방문을 왔습니다. 나는 냉담하게 그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도 연세가 지긋하신 신자 몇 분이 계속 저를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함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 한구석도 미움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를 찾아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신자로부터 받은 상처를 다른 신자들을 통해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늘 함에 계시는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립니다”.


       잘못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역할


      오늘 복음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부터 오늘까지 가능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론이 중요하게 나타나는 복음이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잘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바로 잡아야 하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지상의 교회는 아직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다. 거룩한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는 미성숙하고, 단점을 보유하고 있는 공동체이다. 교회도 인간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잘못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교회는 사랑과 믿음 안에서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우선은 잘못한 형제가 부끄럽지 않도록 둘이서 이야기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충고를 듣지 않을 때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동원하여 견책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단호하게 가르친다. 이것은 교회의 충고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올바른 길에 들어서지 않는 이들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즉 많은 기회를 주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들은 그들의 척임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 모두의 책임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교회의 중요한 특성은 공동체에 있다. 즉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친교를 드러내는 것이다. 죄인들의 회개와 충고를 위한 기도는 초대 공동체의 의무였다. 기도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


     초기 교회 공동체는 성전 뿐 아니라 신자 집에서도 기도를 함께 바쳤다. 기도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즉 교회가 인간적인 모임이 아니라 신앙의 모임의 성격을 띠는 것은 함께 기도하는 데 있었다. 교회가 참다운 공동체로서 일치와 친교, 그리고 복음을 실현하는 힘의 원동력은 바로 기도에 있었다.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참다운 의미의 공동체라고 할 수 얼다. 또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문제들도 이 기도 안에서 해소되고 해결될 수 있다. 기도하는 것은 바로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가장 잘 닮을 수 있는 방법이다. 실제로 주님께서도 늘 제자들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우리 교회의 모습이 너무 세속화된다고 걱정한다. 교회가 대형화되고 물질문명의 영향으로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가 하는 뼈아픈 반성도 함께 있다. 사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공동체이다. 함께 산다고 무조건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한 마음, 한 몸이 되는 일치와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 특히 도시의 교회는 그러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지고있다.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 그리고 세속 안에서 힘있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그저 인간적인 모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가정도 예외는 아니다. 크고 작은 어느 공동체든 문제가 없을 순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문제의 해결 방법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다. 기도로서 사랑과 일치, 용서의 관점, 즉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기도를 통해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도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표현이다. 신앙이란 바로 하느님께 신뢰하는 삶을 의미한다. 나는 교회 공동체, 그리고 나의 가정, 내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가? 혹시 순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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