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2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25 주일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제1독서: 이사 55,6-9



제2독서: 필립 1,20-24.27a



복 음: 마태 20,1-16



  주님과 거래를 한다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그분의 신비나 그분의 태도를 파악했다고 여기는 그 순간 그분은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 또다시 알 수 없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문제를 던지신다:그분은 항상 저편에 계시며 우리가 그분에 대해 할 수 있는 상상을 훨씬 초월해 계시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제 2 이사야서 작가가, 곧 귀양살이에서 돌아가게 될 행복감에 젖어 정치적 재건과 명예 회복은 물론 바빌론의 원수들에 대한 복수 까지도 계획하고 있었던 자기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계산과 감정을 고쳐먹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오늘의 제 1 독서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다:“‘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간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 55,8-9). 하느님의 ‘길’과 ‘생각’은 마치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근시안적인 인간들의 계획을 무한히 초월하는 그분의 구원적 태도와 계획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히브리인들이 귀양살이에서 돌아왔을 때에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의 표지가 드러나기를 바라시면서 그들에게 마음의 ‘회개’를 요구하셨다: 고향에 돌아옴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귀향은 정치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사건이었다. 즉 그들은 고달프지만 항구하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추구함’에서 구체적인 그분의 모습을 만나야 했다: “야훼를 찾아라. 만나주실 때가 되었다. 그를 불러라, 옆에 와 계신다.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리라”(이사 55,6-7).

 ‘회개’는 여기서 두 가지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적극적으로는 ‘주님을 찾는 일’이요(호세 5,6; 아모 5,4 참조) 소극적으로는 죄를 ‘떠나는 일’이다(7절 참조).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들이 살았던 역사적 사건의 ‘영신적’ 차원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귀양살이의 체험은 그들에게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들의 마음’에 그대로 사로잡혀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느님 야훼께서는 예언자를 시켜 그들의 생각과 삶의 방법을 완전히 바꾸라고 권고하신다:“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8절).





“하늘 나라는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가는 것에 비길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일반적인  판단과 가치평가와 행동의 형태까지도 완전히 뒤엎어놓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전해주고 있는 각기 다른 시간에 포도원에 불리운 포도원 일꾼들의 아주 생생한 비유에 의해 상당히 회화적인 형태로 입증되고 있다: 이것은 잠시 후에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그 이유가 마태오 복음사가의 신학적 관점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는 명백한 표지이다. 더 많이 일한 일꾼들의 기대는 물론, 그 당시의 ‘정의’의 규범에도 어긋나게 그 주인은 모든 일꾼들에게 똑같은 품삯을 지불함으로써 먼저 와서 더 오랫동안 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들게 일한 사람들 사이에 불쾌감과 불평을 야기시킨다.

  이 비유의 전반부는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들을 각기 다른 시간에 불러들이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마태 20,1-5).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5-7절) 즉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도 그와 같이 하였다.

  여기까지는 일과가 끝날 무렵에 사람을 불러들였다는 것 외에는 주인의 행동에 별다른 이상한 점은 없다. 그리고 이 마지막에 사람을 부른 것도 일이 급해서(포도 수확기라고 생각해 본다면) 동원 가능한 모든 노동력을 필요로 했으리라는 의미에서 설명이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비유의 의도 자체는 일꾼들의 고용시간이 현저하게 달랐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막판에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12절) 사람도 있다.

  이처럼 비유의 전반부는 후반부에서 서술될 ‘주인’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길 수 있는 준비를 아주 능숙하게 갖추어놓고 있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받아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8-16절).

  문학적으로 볼 때, 여기서 마지막 온 사람들로부터 품삯을 지불하도록 하는 의식적 배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먼저 온 사람들로 하여금 계약한 것보다 더 받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고 있으며 또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았을 때 실망감과 아울러 공개적으로 불평을 털어놓게 하는 준비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불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그 주인의 말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13절.15절). 그러므로, 한편으로 볼 때 그 계약조건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주인이 자신의 선하고 관대한 마음에 연유하여 어떤 사람에게 더 베풀고 있다는 점에서 ‘정의’의 규범을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그 주인의 ‘선한 마음’은 더 많이 일한 사람들에게 ‘질투심’을 야기 시키고 있다. 분명히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수고한 자기들에게도 그러한 선한 배려를 해주지 않은 데 대한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선성’이 차별적이라면 어떻게 보면 그것도 ‘불의’의 한 형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비록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한 자비를 베풀기는 했어도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한 일은 없다고 하는 그 주인의 찬양받아 마땅한 ‘의로움’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예수의 자서전적 단편



  분명히 이 비유는 만일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먼저 말씀하셨을 때 부여하신 의미와 그 뒤에 복음사가가 자기 독자들에게 적용시키면서 부여한 의미 등 여러 가지 차원에서의 의미를 제쳐놓고 경직된 형태 안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정도로 적용되고 있지 않은 듯 여겨질 수 있는 ‘정의’와 또한 ‘선성’의 엄격한 도식적 체계를 넘어서 들여다 보게 되면 그 밑바닥에서 하느님의 행위는 예측할 수 없으며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고, 완전히 무상적이며, 요구하기보다는 항상 무엇인가를 베풀어준다는 근본적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먼저 온 일꾼들과의 관계도 오직 그 주인의 주도적 초대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이 더 많이 일했다면 그 자체가 그분의 은총이요 자비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원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이 비유는 그리스도의 한 자서전적 단편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당시 사회상을 반대하시며 당시 사회에서 배척받고 소외당했던 모든 사람들―마태오와 자캐오와 같은 세리들, 죄인들, 환자들, 나환자들, 중풍병자들, 비천한 사람들 등―을 받아들이셨다. 엄격한 율법준수로 특별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오히려 제쳐놓으신 듯 싶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를 비난하고 그분께 반발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이 어떻게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가를 보여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변호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 즉 맨 꼴찌에 해당되는 사람들도 받아들이신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차별대우하시기를 원치 않으시며 진정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어떤 시간에라도 모든 사람이 당신의 포도원에 들어오도록 하신다.

  하지만, 끝에 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심으로써 먼저 온 사람들을 제외시키신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그분 앞에서 내세우는 특별한 공로 내지는 특권의식을 배제시키고자 하셨을 뿐이다.

  한가지 특권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보다 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정확히 말해 멀리서 와서 고통을 당했거나 또는 보다 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처럼―에게 유보되어야 할 가장 위대한 사랑의 특권이다. 아버지는 탕자인 작은 아들에게 지극한 배려를 해준다. 그러나 그것이 큰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아들은 그 아버지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루가 15,31-32).

  만일 하느님의 사랑이 모두에게 고루 베풀어진다면 어째서 언짢게 여기거나 시샘을 하는 것일까? 예수께서는 비록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의 특권이나 이익을 감소시킬지라도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고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의 권리에 대해서가 아니라(왜냐하면 아무도 그런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그분의 자비와 사랑에 대해서만 생각하라고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시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나중에 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을 저술했을 당시 초기 교회내에서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일고 있었다: 엄격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반드시 유다교의 종교의식을 거쳐야 하느냐, 아니면 사도 바울로가 팔레스티나 지방 밖에 세운 공동체에서 실천적으로 가르쳤던 것처럼 세례를 통해 표현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만으로도 충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사도행전 15장은 교회내에 발생한 이런 심각한 문제가 유다교적 율법으로부터의‘해방’이라는 관점에서 해결되고 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갈라 6,15).

  오늘의 비유는 이러한 논쟁의 핵심에 위치하게 되면서, 더 이상 예수를 반대해온 자들을 겨냥하기보다는 신자들을 겨냥함으로써 특별히 ‘교회론적’의미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스승 예수의 태도보다는 오히려 이교도들의 세계에 직면하고 있는 교회의 태도를 옹호하는 내용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시간’에 온 일꾼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말하며, 반면에 무엇인가 더 보상받고자 하는(즉 특권을 내세우는) 먼저 온 사람들은 유다인들을 말한다.

  복음사가는 그들의 헛된 주장들은 무시해버리고 오히려 하느님과 인간들의 관계가 보다 근본적으로 뒤바뀌어져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방인과 유다인들을 구별하거나 차별대우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처럼 그분 앞에서 자기의 특권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마지막 자리에 두실 것이다. 이것이 이 비유를 끝맺는 마지막 문장이 지니고 있는 극적인 의미이다:“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16절).

  순전히 자신들의 공로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로는 구원에서 제외되리라는 위협이 담겨있다(로마 9,30-33 참조). 루가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다음 문맥에는 적어도 그러한 의미가 들어 있다:“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루가 13,29-30).

  또한 교회 안에서는 모든 것이 무상이다: 성녀 루치아나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의 순수한 동정성, 베드로나 바울로의 치명을 통한 증거, 성아우구스티노나 샤를르 드 후꼬 신부의 회개, 성토마스 아퀴나스나 안토니오 로스미니의 신학적 자식 등 모든 것이 무상적 선물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나 공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시는 분은 오직 그분뿐이시다: 중요한 것은 일이나 봉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존재의 매순간에 우리 각자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사랑과 신뢰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무상적 사랑을 투자한다면 최고의 소득도 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겸손되이 신뢰심을 가지고 오직 그분의 심판과 판단에 그 결과를 맡겨야 한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수고에 대한 어떤 보상을 요구하는 그 정도의 입장에 있다면 우리는‘고용된 일꾼’의 신분으로 바뀌어‘자녀’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은총인 복음을 등지고 인간을 자만심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께서 비난하신 율법의 멍에를 다시 짊어지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제 2 독서는 사도 바울로의 영신적 특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도 주님의 포도밭에 늦게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구원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로마 9,16)는 사실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도직에 온전히 자신을 바쳤고 어떤 예표(감옥살이, 심한 육체적 고통 등)에 의해 거의 확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던 죽음의 문제에 직면해서도 주님의 뜻을―그것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행할 마음자세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만약 계속 살게 된다면 복음선포와 자신의 생활체험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널리 알릴 것이고, 죽게 된다면 더 이득이 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더욱더 충만히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사도로 불러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될 때만이 즉 주님의 지극히 풍성한 사랑에 완전히 젖어들 때만이 자기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다. 첫째가 되느냐 꼴찌가 되느냐 또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로지 의미가 있는 것은 어떤 장벽이나 심지어 죽음의 장벽에 의해서도 막히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자신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로에게 한 가지 원의가 있었다면 그것은 형제들에게 보다 유익한 존재가 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는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으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서는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확신이 섰기 때문에 나는 살아 남아서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지내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켜주고 기쁨을 더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십시오”(필립 1,20-27).

  그리스도의 무상적 사랑이 사도 바울로로 하여금 형제들을 위하여 온전히 자신을 바치도록 강력히 부추기고 있다. 바울로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한 사람들도(1고린 15,10 참조)특별한 상급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오직 하느님만이 주시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가 이미 상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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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25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25주일


    제 1 독서 : 이사 55, 6-9

    제 2 독서 : 필립 1, 20ㄷ-24. 27ㄱ

    복     음 : 마태 20, 1-16ㄱ


    제 1 독서 : 바빌론 유배 중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제2 이사야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시켜 준다.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는다. 옆에 와 계시는 그분을 만날 채비를 서둘러야 한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회개라는 전제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각자 제멋대로 가던 길을 돌이켜 그분께 돌아가야 한다.


    제 2 독서 : 필립비서는 사도 바오로가 감옥에 갇혀있던 중에 쓰였다. 그러나 이 서간은 한 수인(囚人)이 누리고 있는 절대적인 자유를 증언하고 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다는 것이고 죽는 것도 이득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그리스도의죽음과 부활에 실재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참여하는 사건이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죽음이 그리 두렵지 않을 것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죽음이 다가온 것을 알고 담당 의사에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여행 가방은 이미 꾸려놓았습니다. 떠날 순간이 오면 지체하지 않고 떠나고 싶습니다.”


    복     음 : 포도원 일꾼들이 품삯에 대해 불평하는 이야기이다. 불평하는 일군들이 꾸중을 들은 이유는 그들이 받은 것에 대한 불만족 때문이 아니라 늦게 온 일꾼들이 많이 받은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13-15절). 그에 대해 포도원 주인은 너그러운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초대 교회에서의 유다인과 이방인을 비교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늦게 교회 안에 들어왔지만 유다인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결국 초대 교회에서의 논쟁은 이 이야기에 제시된 방법대로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하느님의 기준과 인간의 기준이 결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준이 자기 몫을 자기가 찾아가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기준은 사랑과 자비로서 인간의 척도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즉 분배적 정의와 선성, 자비와의 차이점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신비는 바로 구원의 은총과 연결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구원이 결코 물리적 척도나 양으로써 제한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자비로서 가능한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야훼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이 재앙이나 곤경으로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무의미하게 살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바로 그때 새로운 것을 시작하시고 무언가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1849년 어느 날, 세관의 검사관으로 일하고 있던 나다니엘 호손은 다니던 세관에서 파면 당했습니다. 그해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호손이 지지하던 민주당이 패하는 바람에 민주당원이었던 호손은 일자리를 잃게 된 것입니다. 호손은 몹시 상심했습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면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아내 소피아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이야기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겨우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피아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반갑게 호손을 맞이했습니다. 환한 미소로 자신을 맞이하는 소피아의 얼굴을 보니 호손은 더욱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차를 마시면서 호손은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소피아, 오늘 나는 세관에서 파면 당했소. 모두가 나의 무능력 탓이요. 미안하오.” 몹시 실망할 아내의 모습을 바로 볼 수가 없어 호손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두 눈을 찻잔에 고정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소피아의 탄성이 들렸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 이 얼마나 기쁜 일이에요!” 호손은 깜짝 놀라 소피아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힘없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내가 글을 쓰는 동안에 무슨 돈을 먹고산단 말이오?” 그러자 소피아는 책상 쪽으로 가더니 서랍에서 작은 가방 하나를 꺼내 호손 앞에 내밀었습니다. 가방 안에는 현금 뭉치가 들어있었습니다. “아니, 이 돈이 어디서 난 것이요?” 호손이 놀라 소리쳐 묻자 소피아가 대답했습니다 “난 당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위대한 작품을 쓰리라는 걸 알았죠. 그래서 매주 당신이 생활비로 주는 돈에서 조금씩 모아놓았답니다. 이 돈이면 충분히 일년은 지낼 수 있어요.” 호손은 감동해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소피아의 이런 신뢰와 격려로 나다니엘 호소은 위대한 미국 소설의 하나인 「주홍글씨」를 쓰게 되었습니다.

    나다니엘 호손의 아내, 소피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하느님 은총의 힘입니다. 절망의 순간에서도 자기 남편에게 힘과 격려를 해주고 남편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미래를 대비하였던 마음,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는 위로와 격려의 마음인 것입니다.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베푸시어 회개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준비시켜 주시고 시간과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주시는 분이 바로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시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는”(이사 55, 7) 분이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키고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 그분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새 삶으로,  새로운 길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오로가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필립비서를 쓰면서 절규하였던 그 마음, 즉 “그리스도는 내 생의 전부”(필립 1, 21)라고 고백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겠노라고 한 그 마음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과 자기를 철저히 비우는 마음 앞에서 무엇인들 두려워하겠으며 과거의 삶이나 지나온 나날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늦게 주님을 알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무슨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이것은 곧 주님의 포도밭에 불림받은 일꾼으로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필립비서를 들려주는 사도 바오로, 그도 주님의 포도밭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구원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이 자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로마 9, 16)라는 사실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모든 것을 그분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는 일, 그것만이 우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해주고 있는 각기 다른 시간에 포도원에 불린 포도원 일꾼들의 생생한 비유는 그 당시 사회상을 풍자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사회상을 반대하시며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고 배척당했던 모든 사람들-마태오와 자캐오와 같은 세리들, 죄인들, 나환자, 중풍병자, 비천한 사람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엄격한 율법 준수로 특별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오히려 제쳐놓으신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를 비난하고 그분께 반발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이 어떻게 자신을 통해서 드러나는가를 보여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변호하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 즉 맨 꼴찌에 해당되는 사람들도 받아들이십니다. 진정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어떤 시간이라도 모든 사람이 당신의 포도밭에 들어오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끝에 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 먼저 온 사람들을 제외시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분 앞에 내세우는 특별한 공로 내지는 특전 의식을 배제시키고자 하셨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비록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의 특전이나 이익을 감소시킬지라도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고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의 권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분의 자비와 사랑에 대해서만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일찍 알게 되거나 늦게 알게 되거나 상관없이 정말 온 마음을 다해 묵묵히, 성실하게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는 자세만이 요구될 뿐입니다. 그러면 품삯, 즉 구원의 은총은 덤으로 주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 25 주일


            1. 최익철 신부(가)/ 2          2. 조순창 신부(가)/ 3

            3. 최기산 신부(가)/ 5          4. 서경윤 신부(가)/ 7

            5. 강길웅 신부(가)/ 8          6. 김몽은 신부(가)/ 10

           

    1.            연중 제25주일   마태 20,1-16 (가) 포도원 품삯 

                                                          최익철 신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겨자씨는 십자화과에 속하는 채류 식물로서 자라면 3미터나 크고 줄기는 뻣뻣하며 가지는 휘청거려서 새들이 집을 짓고 겨자씨를 쪼아먹기도 할 정도가 됩니다.

    그 작은 씨가 크게 자라서 나무 같은 초목을 볼 때 그 엄청난 차이 때문에 이것을 비유삼아 보잘 것 없는 겨자씨 같은 첫 교회가 그 나무같이 번창할 것임을 예언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도 말구유에 태어나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살아 겨자씨 같았지만 오늘에 와서 그 이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그분이 세우신 교회는 끊임없이 뻗어 나가고 있음을 누구나 다 목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나 시작에는 보잘 것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도 한 세포에서 이 만큼 자란 것 같이 식물이나 동물의 성장을 보면, 또 사고의 원인과 결과의 차이를 보면 겨자씨와 겨자나무의 예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겨자씨를 보며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의 포도원은 교회이며 그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시기는 각각 다르며 또한 그 부르심에 응하는 우리의 자세도 가지각색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어느 시기에 부르시건 동등하게 대우해 주십니다. 다만 받아 드리는 우리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품삯 즉 하늘나라는 고용 당초에 밝혀졌던 것이고 그 약속이 이행되면 그것으로서 만족한 것입니다.


    젖을 먹는 아기에게 맛있는 김치를 먹일 수는 없고 간장 그릇에 죽을 담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대접에다가 컵에 가득 든 물을 채운다면 채워지지도 않을 것이고 대접도 불만이 클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접에 가득 찼던 물을 컵에다가 다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린 시기, 맡은 일, 양의 대소 등은 주인에게 맡기고 맡은 바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 열성을 보이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다가서는 생활이 아니고 나태와 안이함으로 땀 흘리지 않는다면 정당한 품삯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건강과 재산, 시간과 재주, 그리고 지위만 믿고 멋대로 생활한다면, 또 영세를 받았다는 사실만 가지고 하느님 이르신 계명과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언약된 품삯은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갓 영세한 자들의 신앙이 겨자씨만 하다면 이 신앙의 씨를 가꾸어 선행의 많은 가지를 뻗게 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겨자씨 만한 신앙을 들어 우리의 믿음을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우리에겐 그 작은 씨 만한 믿음도 갖지 못한 게 아닙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믿음만을 생각했지 교회의 사명은 잊고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그것 하나 가지고 천당에 갈 수 없습니다. 사랑을 나누는 자라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공동체 역시 교회를 발전시키지 못하며 사명감이 없을 때 인간은 타락하기 쉽습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성숙되고 보람있는 사람이 되며 그것은 또한 교회의 발전이고 성장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아래 우리가 한 형제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나 혼자만이 만족하는 생활이 아니라 미신자가 신앙을 갖게 되고 신자는 이미 가진 신앙을 잘 키워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된 기쁨을 함께 나누십시오.

      

    교회가 누룩이라 한다면 우리 각자는 그 누룩의 발효작용의 직분을 충분히 발휘하여야만 합니다. 나하나 안에 그냥 만족하는 태도이어서는 부풀어 일으키지도, 본질을 유지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사명을 잊지 말고 세상 구원을 위하여 나를 내어놓읍시다.





    2.     연중 제25주일   마태 20,1-16 (가) 포도원 품삯 

                                                                    조순창 신부


    드높은 가을 하늘, 따가운 태양 아래서 오곡이 익어갑니다. 하늘과 땅 사이는 멀면서도 맞닿은 셈인데, 땅을 딛고 하늘을 향해 선 우리도 하루의 일과와 한 생애 안에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먼 인생 여정에서는 먼 일과 걱정과 고난이 갈수록 태산같아 끊일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제 1독서에는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이,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보다 높고,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보다 높은 만큼,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하느님을, 어느 때는 ‘무자비’하고, ‘무능’하고, ‘편파적’이고, ‘없으면 좋겠다’ 하여도 끝내 놓은 하늘이듯 자비로우십니다. 불의한 자 그 가던 길을 돌이키고, 허영에 들뜬 자 그 생각을 고쳐서 야훼 하느님을 찾고, ‘야훼께 돌아와 자비와 용서로 구원을 얻으라’고 희망을 주십니다.

      

    제 2독서에는 구원의 신비를 깊이 깨달은 사도 바울로께서는 ‘생애의 전부가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답게 살라’고 격려하십니다.

    아직도 우리는 드높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 생의 중심은 가족, 건강, 재물, 명예, 사업, 일이며, 신앙과 하느님은 우리 생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하게 됩니다만, 오늘 복음에서 다시 우리를 하느님의 포도밭의 일꾼으로 불러 주시며, 우리가 땀흘려 일한 대가 만큼만이 아니라, 더 큰 자비로 ‘후한 축복이 있으리라’는 희망과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습니다. 그것은 일찍 하느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민족을 말합니다만,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온 이나 아침 미사 참여자라고 할 수 도 있습니다. 9시쯤은 젊을 때 로마 중심의 교회를 의미하고, 12시, 오후 3시는 장년 시절이나 전교 지방 교회 또는 낮 미사를 뜻하며, 오후 5시는 노년기나 미래의 종말 가까이에 불릴 이들 또는 저녁 미사를 뜻합니다.

      

    날이 저물면 인생의 끝날에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약속대로 하루 일의 대가와 축복을 주셨는데, 품삯으로는 하루 생활에 넉넉한 1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내 일생의 두 번일 수 없는 생, 한 번으로 족한 생에, 충분한 대가로 영생을 주시어, 하느님의 기쁨에 참여케 되는 것입니다.

      먼저 불린 이도 약속된 상당한 값을 받고,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서 있다가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이들도 주인의 자비로 후한 품값을 받고 기뻐할 것입니다. 먼저라고 자만치 말고, 나중이라고 위축됨이 없이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일을 충실히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온 이들이 투덜거렸는데, 이것은 바리사이인 율법학자들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뜻에 이해 관계 없이 불평 불만하는 이들이 있는데, 높은 어버이 은공을 모르는 불효자와 같은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68년에 지금의 이 성당이 완공되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으나, 많은 결함이 있어서 수리 공사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용과 기술적 어려움 등으로 해서, ‘새로 짓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성전을 새로 짓기로 확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해 6월 가정 통신문을 발송하고, 7월 1일 성전 건립기도를 시작했고, 금년 부활에 성전 건립금의 신청서를 봉헌하여, 700세대가 하느님께 약속하신 헌금은 2억 4천만원이 되었습니다.


    믿을 만한 공간사에 설계를 의뢰하였고, 여러 가지 자료 조사도 하여, 기본 계획과 기본 설계가 8월초에 다 되었습니다. 사목 위원들과 여러 차례 검토하고 의논한 다음에, 교구청의 의견도 듣고, 교구청의 지시대로 단순 실용성 재구상을 하였고, 그에 따라서 설계가 늦어지고, 기금 봉헌금이 부족하여, 공사가 미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두 하느님의 뜻으로 믿고,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새 성전을 이룩합시다. 하느님의 높은 자비를 믿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선열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아서, 포도밭의 일꾼으로서 완공합시다.






    3.     연중 제25주일   마태 20,1-16 (가) 동등한 품삯    

    최기산 신부


    어떤 구교우가 ꡒ천국에 가면 우린 조금 나은 상급을 받겠지요?ꡓ라고 물었다. ꡒ천만에요ꡓ라고 대답하자 실망한 눈초리로 ꡒ우린 한평생 주일이면 꼼짝없이 성당에 가야했고, 나쁜짓은 물론 욕도 안하며 살았는데, 제멋대로 한평생을 살다가 늘그막에 영세한 사람과 같은 급을 받다니 너무 하잖아요!ꡓ라고 응답했다. 그럴싸한 이야기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시기에 늦게 영세한 사람이나 일찍 영세한 사람이나 똑같이 대하실 것이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해야 한다. 내가 1년 먼저 영세했으면 1년간 나는 더 행복한 사람이었어야 한다. 신앙생활이 짐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들 주변엔 영세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고, 마지못해서 억지로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또 성직자와 수도자는 어떠한가? ꡒ우리는 오로지 주님만을 위해서 생을 바쳤는데 색다른 상급을 주시겠지!ꡓ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모두가 1데나리온을 받는 것이다. 과거엔 성직자나 수도자가 구원에 있어서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위치를 고양시켰다. 그래서 그런지 공의회 이후에 많은 이들이 성직을 떠났다. 구원에 소위 이점이 없다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냐고 반문하면서 떠났을 것이다.


    포도원에 뽑힌자 우리나라도 인력시장이 있다. 새벽이면 날품팔이 하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자기를 불러주기를 기다린다. 그 중에서 정말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절박하기 그지 없다. 그러므로 어서 빨리 자신이 뽑히기를 숨죽이며 기다리고, 막상 뽑히고 나면 긴 숨을 내쉬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에도 인력시장이 있었다. 포도 수확철이 되면 일손이 바빠진다. 익은 포도를 빨리 수확해야지 그대로 놔두면 터지기도 하고 짐승들의 습격을 받기도 한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새벽 인력시장으로 나갔다. 거기서 일거리를 찾아 서성이는 사람들을 자기 포도원에 보냈다.


    1데나리온을 하루 품삯으로 정했다. 적어도 1데나리온은 받아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침 일찍 일꾼으로 뽑혔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공치는 날도 있기 때문이다. 인력시장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피를 말리는 것이었다. 포도원 주인은 9시에 나가서 아직도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이는 사람을 뽑아서 일터로 보냈다. 그에게도 1데나리온을 주기로 했다. 이렇게 낮 12시, 오후 3시에도 인력시장에 가서 같은 품삯에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그들에게는 너무도 기쁜 일이었다.


    똑같은 품삯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하루 일을 끝내고 주인은 임금계산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3시에 온 사람부터 1데나리온을 받았다. 새벽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도 1데나리온을 받았다. 처음 책정한 금액이라서 법적으로 하자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해도 너무한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하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과 오후에 와서 몇시간 일한 사람의 품삯이 같다니 해도 너무 한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말했다. ꡒ내돈 내가 주겠다는데 무슨 말이 많으냐? 오후 3시에 온 사람도 1데나리온은 받아야 밀가루도 사고 우유도 사서 끼니를 때울 것이 아닌가! 내가 자비를 베풀겠다는데 왜 그리 시기심이 많으냐?ꡓ


    복음의 메시지 새벽부터 일한 사람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투덜거렸을 것이다. 법이고 계약이고 안중에 없었다. 사실 자신들만 하루종일 일하고 1데나리온을 받았다면 불평할 일이 없었다. 오히려 고마워했을 것이다. 불평의 원인은 시기심에서 온 것이었다. 인간의 심부에 뿌리내려 있는 시기심 때문에 우리네 인생사는 항상 시끄럽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찍 뽑혔을 때의 기쁨을 다 잊고 있었다. 남들은 일거리가 없어서 이골목 저골목을 어슬렁거리면서 피를 말리고 있을 때 그들은 당당히 일거리를 얻어서 일을 했는데도 그 기쁨을 다 잊어버렸던 것이다. 오히려 시기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는 마치 태어나면서 세례받은 구교우와 같은 경우일 수도 있다. 신앙생활을 하느라고 뼈골이 빠졌는데 죽기 전에 세례받은 사람과 똑같은 상을 받다니 말도 안된다며 남의 구원에 시기심을 일으키는 경우라면 비참한 신자일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 죄인, 창녀들을 사랑하셨다. 이를 본 자칭 의롭다는 자들이 불평하였다. 어째서 그들을 우리와 똑같이 취급하시려는가! 주님의 자비는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하기조차 힘들다. 주님은 참으로 후하신 분이다. 우리는 그분의 후하심을 불평하거나 시기할 자격이 없다.


    하느님 나라는 주님께서 당신 마음대로 후하게 주시는 선물이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무엇을 잘했기 때문에 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비와 햇볕을 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1데나리온의 선물을 모두에게 주실 것이다. 곧 모두에게 같은 하느님 나라의 선물을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 감사드릴 뿐이다. 문제는 새벽이든 오후 3시든 포도원 일꾼으로 뽑히는 것이 중요하다. 태중교우든 늘그막에 영세했든 회개하여 주님의 교회에 뽑히는 것이 중요하다. 주인께서 데려가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 기다림은 믿음이고 회개고 희망이다.






    4.           연중 제25주일   마태 20,1-16 (가) 하느님의 품삯

                                                           서경윤 신부


    「맨 나중에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 그들의 품삯(한 데나리온 씩)을 치러주시오」 (마태 20,8)

      

    내가 만일 지금 죽는다면 하느님 앞에서 어떤 품삯을 받게 될 것인가 궁금합니다. 나의 내면적인 개인 생활은 부실하니까 어쩔 수 없고, 그래도 일생 동안 수도회에 소속하여 살았고, 또 잘하든 못하든 성직에 봉직했으니, 어느 정도 그 공로는 참작이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수도회에 입회한지 35년에다가, 사제 생활 25년이 어디 여간한 것입니까? 아무리 엄하신 하느님이셔도 이 부분만은 그 공로를 인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원들에게 지급하는 봉급액을 책정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 기준은 애매합니다. 물론 고용자는 한 푼이라도 많이 받으려하고, 사용자는 회사의 이익을 한푼이라도 더 남기자면, 인건비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큰 회사에서는 해마다 임금 투쟁을 위한 노동쟁의도 발생하지만, 소규모의 작은 회사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지곤 합니다. 이래서 급여를 책정하는 기준이 잘 마련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이상(理想)은 제시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회사를 위하여 일을 했으면, 그 대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돈으로 생활이 가능한 만큼이라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최저 임금액을 제시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사는 고용자 개인의 능력과 회사에 공헌한 실적에 따라 대가를 지불하면 됩니다. 이때 그 능력이나 공헌도를 돈으로 책정한다는 것이 대단히 애매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체로 입사한 순서대로 승진의 기회가 주어지며, 근무한 햇수에 따라 호봉을 정하고 급여를 책정하게 됩니다. 이 방법은 다른 면으로 대단히 불합리한 방법입니다.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이 반드시 회사에 대한 공헌도가 크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면에서 야구 선수들에게 적용하는 연봉제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용자 봉급은 개인의 능력과 사용자에게 끼친 공헌도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 주인은 고용인들에게 지급한 임금은 아주 합당한 결정입니다. 우선 한 「데나리온」라는 금액이 최저 임금인 듯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한 「데나리온」씩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도밭 주인이 보통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면 아침부터 일했다고 해서 별로 하느님께 보탬이 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한 것이 고용인에게는 영광이요 은총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하신 분이라 말합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거기에 더 보탤 수도 뺄 수도 없음을 뜻합니다. 누구가 아무리 열심히 큰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는 보탬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찬미가 주께 필요하지 않은 줄 아오나, 주께서 은혜를 베푸셨기에 감사드리오니, 우리의 찬미가 주께 보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 구원에 유익이 되나이다」 (평일미사 감사송 4).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한 것이 하느님께 무슨 큰 공헌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고, 그분께 새경을 쳐서 받으려 하는 것은, 하느님과 흥정하자는 사람들로서, 바로「바리사이파」사람들의 소치였습니다.

      

    35년동안 수도원에 적을 두고 25년동안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했다고 무슨 응분의 보상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어떤 보상을 기대한다면 이것은 바로「바리사이파」의 정신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물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하느님께서 나에게만 특별히 더 많이 계산해 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하느님께서는 아쉬움 없이 일용할 양식을 주셨고, 또 주님의 포도밭에서 봉직할 수 있게 해 주심이 내게는 영광이며 은총일 따름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오로지 이 은총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뿐, 무슨 보상 타령이나 하면서 앉아 있지 말고 부실한 나의 내면적 삶이나 부지런히 추슬러야 하겠습니다.






    5.         연중 제25주일   마태 20,1-16 (가) 하느님의 넉넉한 품삯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5,6~9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제2독서 필립 1,20c~24.27a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복 음 마태 20,1~16a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어른들의 생각은 어린이들의 생각과는 다르며 부모의 뜻은 자녀들의 사고로써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훨씬 더 높고 더 넓으며 더 깊습니다. 더구나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우리 식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복음서의 내용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묵상을 제시해 줍니다.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아침에 일찍 온 일꾼은 유대인을 말하고 저녁에 온 일꾼은 이방인이라는 해석을 합니다. 어떤 이는 또 말하기를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이 아침에 온 일꾼이요 세리, 창녀, 죄인들이 저녁에 온 일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일찍 세례받은 자들이 아침에 온 일꾼이요 늦게 세례받은 이들이 저녁에 온 일꾼이라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9월이 되면 포도를 수확하게 되는데 이 때가 되면 장마가 시작되기 때문에 포도를 제 때에 거둬들이지 못하면 그 해의 수확은 망치게 된다고 합니다. 포도가 물에 녹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를 시간에 늦지 않게 거둬들이기 위해 급하게 서둘러야 하는데 비록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할 사람이라도 서로 다투어 불러들여 일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를 당혹하게 만드는 한 가지 이상한 사건은 아침에 일찍 와서 하루종일 수고한 자나 저녁에 늦게 와서 한 시간 일한 자나 주인으로부터 받는 품삯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확실히 불공평합니다. 일꾼들의 불평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주인의 처사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실 주인은 분명 선하게 일을 처리했습니다. 품삯을 깎지도 않았으며 다만 늦게 온 자들도 하루의 품삯을 넉넉하게 주었을 뿐입니다. 어찌 보면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일한 자는 자기들이 고집 부려서 늦게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몰라서 못 왔으며 일을 시켜 주지 않으니까 하고 싶어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 시간의 품삯만 주었다면 그들 식구는 굶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한 시간의 품삯으로는 집에 돌아가서 식구들을 만날 체면이 서질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후한 처사를 베푼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크시기 때문에 인간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주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지만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잘못되어 있어도 이타적이시고 당신보다는 인간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이 천당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당에 가 봤더니 꼭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없고 지옥에나 빠졌으리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의젓하게 동산을 거닐고 있더랍니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했더니 자기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평생 죽을죄만 짓고 살다가 죽기 전에 우연히 신부님을 만나 통회 한 번 한 것밖에 없는데 하느님의 처사가 너무도 감격스러워 자기가 천당에서 하는 일이란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엔 연옥엘 가 봤더니, 저 사람은 벌써 천당에 갔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공연한 불평을 하면서 고통을 겪고 있더랍니다. 아니, 당신이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하느냐고 했더니 그 사람 대답이 글쎄, 천당에 갔더니 창녀, 강도, 사기꾼 등이 판을 치고 있기에 하느님의 처사가 너무도 못마땅하고 속이 뒤틀려 그리로 왔다고 하더랍니다.


    물론 꾸며진 얘기지만,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이 크시다고 우리가 언제까지나 게으름을 피워서도 안됩니다. 해는 언제고 서산에 떨어지듯이 마지막은 불시에 다가오며 그때까지 일자리를 찾지 않고 얻지 못한 자들은 받을 품삯이 없어서 불행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리 수고해도 하느님의 품삯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모두에게 주시는 은총은 거저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입니다. 따라서 많이 일한 사람은 이미 축복을 풍성하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소견머리 없이 자신의 공로를 따지지 말고 기쁨과 은혜로써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넉넉하게 채워 주십니다.






    6.          연중 제25주일   마태 20,1-16 (가) 포도원 품삯 

    김몽은 신부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며 모두가 행복해지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플라톤도 “행복하게 살지 않는다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행복하게 살려는 의지는 인간 삶의 근본적인 욕망인 것 같습니다. 인생은 외부적인 것에 의해서 좌우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물질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에만 두지 말고 내면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둘 때 인생의 모든 면이 달라질 것입니다.

      

    성서에도 “욕심이 잉태하면 죄악을 낳고, 죄악이 자라면 죽음을 가져온다”(야고버 1,15)고 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플라톤의 말을 받아서 “인간이 아무리 행복하게 산다해도 영원히 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행복은 남을 행복하게 해줄 때 얻어지는 행복입니다. 물질적, 현세적, 일시적인 것(돈, 명예, 권력, 탐욕) 등에 의해 얻어진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참다운 행복이란 서로 위해 주는 삶을 뜻합니다. 「목숨을 바치고도 아깝지 않은 사랑」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성서에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위해 주고, 서로 섬기며, 서로 아껴 주고, 서로 감사하며 산다면, 이 세상은 하루아침에 행복한 낙원으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봉사하기는커녕 봉사 받기만 하고 살아 왔으며 다시 말씀드려 이기주의자로만 지내왔습니다. 자기 혼자서만 잘 살겠다고 남을 밀치고 살아갈 때,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엄연한 실례로서 몰지각한 부유층의 사치와 부패는 오직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만 안일하고 방탕한 쾌락을 누리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좀더 이웃을 생각하고 남에게 봉사할 줄 알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사치와 부정부패, 불신사회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대인의 고민, 초조, 불안, 소외감 등은 이 봉사의 가치와 기쁨을 모르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사랑의 불을 놓는’ 봉사자로서 일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영광된 일이며 참된 삶이며, 참된 기쁨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우리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행복이란 곧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하는 생활을 해 나가는데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참다운 행복을 찾아 얻어 누렸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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