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 2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22 주일

        19. 함세웅 신부(다)/ 32        20. 김몽은 신부(다)/ 33

        21. 강길웅 신부(다)/ 35        22. 김신호 신부(다)/ 37

        23. 최희수 신부(다)/ 39        24. 강영구 신부(다)/ 42

        25. 오만은 모든(다)/ 45        26. 자기를 높이는(다)/ 47



19.         연중 제22주일   루가 14,1.7-14 (다) 겸손의 길

                                                          함세웅 신부



 영세한 사람이면 누구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신앙을 떠드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확고 부동하게 믿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깊은 확신도 없고 기본적인 반응도 없이 입으로만 믿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은 ‘사도신경’에 나타나 있는 볼 수 없는 사실들을 전부 완전히 믿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입으로만 말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뜻을 알며 자기의 소신을 다해서 진리로 삼습니다. 때로는 굳은 신앙을 가진 분들도 신앙의 시련 속에서 의심도 가져 보며 많은 고통을 받기도 하나 그들의 극심한 고통은 결국 그들에게 신앙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분명히 말해 주었고, 또한 사랑과 생활이 신앙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지능에 속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믿기 위해서 아는 것이며, 신앙에 동의하는 것은 성총의 능력 아래서의 지적 행동인 것입니다. 굳은 신앙을 가졌다면 성세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 잘 깨달아 용감히 그 일을 ‘선택’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선택하고도 후에 자꾸만 그 선택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은 신앙이 약해진 까닭입니다. 순교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용감히 선택함으로써 그들의 ‘선택의 불변’을 실제로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지상적인 것을 사랑함에 있어서 주님의 뜻에 맞도록, 주님의 뜻에 따름으로써, 이 모든 것을 실로 주께 향한, 주께 온전히 의지하고 매달리는 그러한 사랑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나 그 사랑은 주께 대한 사랑 속에 있는 것이기에 주님께 대한 사랑 안에 묶여지고 그 사랑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 속에 있어 나름대로의 특징하는 일, 특기가 다르나 이 모든 것이 종국에는 천주님 안에 있고 천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며 당신을 위한 살아 속에 있어야 하므로 신앙과 사랑은 하나로 향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루가 14,11) “위대한 자 되리만큼 도리어 자기를 낮추라, 그러면 주 대전에 은총을 얻으리라”(집회서 3,8) “내 마음이 양선하고 겸손함을 배우라”(마태오 11,29)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야고보 1,20)

“온화한 언사는 동료를 많게 하며 원수의 마음도 누그러지게 한다”(집회서 6,5)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줄로 생각지 말라. 두려워하건대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시는 천주님 앞에 네가 남만 못할까 하노라. 네가 무슨 좋은 일을 하였다 하여 교만하지 말라. 네가 무슨 선한 것이 있다면 남들에게는 이보다 더 선한 것이 있을 줄로 생각하여 겸손한 마음을 보존토록 하라. 네가 너를 모든 사람 밑에 둔다고 조금도 해가 없지만 한 사람이라도 너를 높이게 되면 해로울 것이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항상 평화가 있으나 교만한 자의 마음에는 분노와 질투심이 자주 일어난다”(준주 성범 1권 7,3)


“너는 네가 원하고 바라는대로 되지 않는다고 번민할 것이 무엇이냐? 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도 그렇지 못하고, 너도 그렇지 못하고, 세상에 있는 사람으로는 그러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왕이나 교황이라 할지라도 무슨 걱정이나 괴로움이 없는 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면 남보다 좀 낫게 지낸다는 자는 누구냐? 그는 천주님을 위하여 고통을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준주 성범 1권 22,1)


“남의 조그마한 잘못을 책하면서도 나의 더 큰 잘못을 상관치 않고 지낸다. 남들 떄문에 내가 얼마나 큰 괴로움을 받아 참게 되는지는 꽤 빨리 깨닫고 헤아리지만 내가 남에게 끼치는 괴로움은 쉽게 깨닫지 못한다. 자기 사정을 올바르게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은 남에게 대하여 엄하게 판단할 것이 없을 것이다”(준주 성범 2권 5,1)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만족을 누리기 쉽고 평화를 누리기도 쉬울 것이다. 네가 칭찬을 듣는다고 더 거룩해지지도 않고 책망을 듣는다고 더 천해지지도 않는다. 너는 그대로 너다. 너는 네 속이 어떠한지를 잘 살핀다면 다른 이가 너를 가지고 무엇이라 하는지 상관치 않을 것이다. 사람은 겉을 보고 가치를 헤아리나 천주님은 마음에 깃든 것을 보신다. 사람은 행동을 살피고 천주님은 그 뜻을 살피신다. 항상 잘하면서도 자기를 변변치 못한 자로 여기는 것은 겸손한 마음의 자세이다”(준주 성범 2권 6,3).











20.       연중 제22주일  루가 14,1.7-14 (다) 부자(富者)와 빈자(貧者)

                                                      김몽은 신부



 1. 물질에 대한 그릇된 생각


문화의 발달에 따라 사람들은 옛날보다 잘 살게 되었고, 옛사람들이 맞보지 못했던 문명의 혜택을 입고 있으며, 지구는 좁아졌고, 우리나라도 동서남북으로 모두 일일 생활권으로 좁혀졌다.


그런데 여기에 따르는 가공할 부작용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만연돼 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무서운 것은 물질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이다. 물질주의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그 첫째가는 폐단이다. 그 결과는 어떠한 수단을 쓰든, 어떠한 방법을 강구하든 돈만 벌명 그만이라는 사고로 낙착되고 말았다. 요즈음 일어나고 있는 온갖 부정축재가 일부 드러났지만, 사실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따름이다. 교육계에서도 연달아 재산의 횡령과 부도사건이 일어나고, 심지어 종교계에서까지 불미스런 사건이 야기되고 있다. 금융계의 부정은 10억대에서 100억, 아니 1000억대로 그 단위가 비약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들은 2세에까지 영향을 주어 고등학생에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학생깡패가 동교생들의 금품을 갈취하는가 하면, 그것이 두려워 중학생이 자살까지 해야만 했다. 어디까지 몰고 갈 것인가 참으로 개탄해 마지않는다. 누가 어떻게 우리 어린 새싹들을 좀먹게 했는가? 누가 우리 사회를 이렇게 부패케 했으며 타락케 했는가? 그 진범은 “물질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온 인류가 물질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원자탄이 인류를 멸망시키기 전에, 인류는 그 그릇된 생각으로 인해 멸망하고 말지도 모른다.



2. 부자의 빈(貧)과 빈자의 부(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탐내는 부정축재자들이 늘어가고 있는데, 사실 그들은 하나의 환상을 쫓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은 진정한 부자가 아니라, 부의 노예가 된 정신적인 빈자이다. 설령 그들이 원하는 물질적인 부자가 되었을지라도, 그들이 원하는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키지는 못하기에 여전히 빈자로 있는 셈이다. 더욱이 물질이나 금전의 한계성을 모른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정신적 빈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아무리 부자라 해도 하루에 밥 열 그릇을 못 먹고, 동시에 두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없고, 일시에 두 곳에 가 있을 수는 없다. 그들이 매입한 무수한 토지를 진정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는 그곳을 경작하는 사람들이며, 그 산림을 드나드는 나무꾼이며, 산새나 다람쥐나 산짐승일 뿐이다.

 자신이 사들인 토지나, 은행에 예금한 고액의 예금통장이나 고가(高價)한 보석 등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부자로 자처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은 부자로 착각하고 있는 빈자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마음의 평화가 없고, 항상 불길같이 타오르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끝없는 욕망의 희생물이 돼가고 있으며,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에 불안과 공포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것을 조금이나마 얻어 가지려고, 혹은 빼앗아 가려고 그의 둘레에 모요들긴 하지만, 아무도 부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없다.

  

한편 그들은 그 풍성한 돈으로 예술품을 사들이기는 하지만, 결코 그 예술을 이해한다든가 음미할 줄을 모른다. 이른바 정신적․문화적 걸인일 뿐이다. 하물며 그들에게 인생을 윤택케 하는 창작이나 발견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여유 따위가 있을 수 없다. 가끔 가다 몇푼의 의연금을 내놓고도 자기의 이름을 파는 계산된 자선을 하기는 하지만 참다운 동정과 인간으로서의 애정을 모르며, 관대함과 순결함의 기쁨을 알 길은 더욱 없는 것이다. 계산된 자선이 아니라 참 사랑으로 베푸는 기쁨을 체득한 조건 없는 희시(希施)는 물질의 부보다 몇 만배 더 고귀한 부인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인 빈자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정신적으로 부자일 수가 있다. 돈많고 권력있는 사람이 더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을 보았을 것이며, 불안과 공포 속에 사는 것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참다운 부를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도 외면하고 등한시한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하늘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물질의 노예가 된 자들에게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역설과도 같은 것이지만, 어떠한 물질적 빈곤 속에서도 정신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동양의 성현들도 안빈낙도를 읊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도 즐거움은 그 속에 있다.” 즉 양심의 평화, 명징(明澄)한 심사(心事), 애정과 선의, 자연과 미와 창작의 의욕 등은 한없는 인생을 부요케 한다. 이런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으로서, 이것을 얻지 못한 빈자는 이중으로 빈자가 되는 셈이다.



3. 참다운 부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다. 따라서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혈안되어 있는 곳에는 참다운 부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재산을 축재하고도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기 때문에 그는 항상 가난하고 채울 길 없는 탐욕으로 해서 언제나 걸인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획득했다고 생각한 재산이 그를 행복하게 해준다든가 그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불안과 초조, 이기심과 탐욕의 제물이 되고 만다. 따라서 참다운 부란, 양심의 평화,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진정한 사랑과 존경을 받은 일이며, 참으로 세상의 빛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부는 축재한다든가 소유한다든가 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얼마나 이웃에게 많은 것을 나누어주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실로 소유의 다량에 의해 부가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나누는 것으로 인하여 헤아려져야 할 성질의 것이다. 











21.       연중 제22주일  루가 14,1.7-14 (다) 낮은 곳에 계신 하느님

                                                            강길웅 신부



“겸손하여라. 그러면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


오늘 제1독서(집회3, 17-19: 28-29)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습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이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만한 자의 불행에는 약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또 오만한 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도 겸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낮아져야 합니다. 억울해도 내려가고 손해가 나도 낮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바로 밑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라틴어로 겸손을 ‘후밀리따스’(humilitas)라고 합니다. 이 말은 ‘후무스’(Humus)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후무스는 흙, 즉 땅이라는 말입니다. 땅은 모든 것을 다 안아줍니다. 어떤 것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온갖 잡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땅은 그 불순물들을 모두 정화시키면서 만물을 성장시켜줍니다. 마치 하느님 같습니다!


노자는 또 물을 최고의 선으로 바라봤습니다. 물은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스스로 올라가려고도 하지 않으며 기회만 닿으면 내려갑니다. 그리고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둥근 그릇에 들어가면 둥근 모양이 되고 네모난 그릇에 들어가면 또 네모꼴 모양이 됩니다. 그러면서 물은 만물을 키우며 생의 기운을 줍니다. 물도 꼭 하느님과 같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내려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요즘같은 세상에서는 턱도 없이 ‘밑지는 장사(?)’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저마다 올라가려고 합니다. 어떤 세상인지 가만히 있으면 당하고 손해봅니다. 자기 분수보다 더 확대하여 선전도 해야하고 젠체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팔리며 그래야 알아줍니다. 세상이 그처럼 사악해졌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올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언제고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올라가다 스스로 헛디뎌 떨어지기도 하지만 옆에서 기어이 붙들고 흔들어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올라가면 멀미나고 피곤합니다. 그리고 내려가면 손해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진정 올라가는 길입니다.


제가 있던 본당에 두 자매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한 자매는 너무 똑똑합니다. 본당신부가 한마디 하면 세마디, 네마디를 합니다. 자기 주관이 너무 세서 누구의 말도 안들어갑니다. 그런데 다른 자매는 자기 주장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도 “예”요, 저렇게 해도 “예”합니다. 그리고 정히 할말이 있으면 끝에 가서 살짝 한 마디만 붙입니다.


그런데 묘합니다. 똑똑한 자매만 만나게 되면 피곤합니다. 그리고 그쪽에서 뭔 부탁이라도 들어오면 기어이 거절하고 싶습니다. 자기는 이쪽 말을 안 들어주기 떄문입니다. 그런데 겸손한 자매만 보면 괜히 마음이 편하고 신이 납니다. 그리고 그쪽에선 뭔 부탁이 없어도 항상 그녀를 돕기 위해서 제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옛날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기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똑똑한 체 하기 때문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죄인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진정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볍씨를 파종하기 전에 먼저 소금물에 담급니다. 그러면 싹을 틔울 수 있는 좋은 볍씨는 아래로 가라앉지만 쓸모도 없는 쭉정이 볍씨는 위로 뜨게 됩니다. 그래서 농부는 볍씨를 고른 다음에 좋은 것만 모판에 뿌립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시험해 보면 가벼운 사람은 위로 뜨게 마련이며 무거운 사람은 또 아래로 내려앉게 됩니다.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을 밑으로 볼 수 있기 떄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올라가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는 결국 아무것도 못 보고 닫혀진 세상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좀 부끄러워도 내려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진 자들이 하느님을 참되게 만날 수 있습니다.



겸손이야말로 모든 덕의 어머니이고 또 하느님 앞에 첫째가는 의무이기도 합니다. 겸손한 자는 절대로 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교만한 자들이 밥먹듯 하는 일이 넘어지고 떨어지는 일입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밑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한 자 되도록 합시다. 하느님이 바로 낮은 곳에 계십니다.











22.     연중 제22주일   루가 14,1.7-14 (다) 자신을 낮추는 복된 사람들

                                                           김신호 신부



  인간이 모여 이룩한 사회 안에는 문화의 상이성에 기초하여 조금씩 다른 양상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간 역사 속에서 형성된 관습이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관습은 알게 모르게 새로 태어난 사회의 일원을 그 사회에 맞는 사람으로 형성시키는 데에 한 몫을 하게 된다.



  우리도 이러한 관습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관습에 기초한 생활습관과 삶의 형태가 사회 안에서 직접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도 사람들이 모이는 결혼식 같은 잔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모여든 축하객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요즘은 결혼식에 초청을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고지서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므로 기쁜 마음으로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의무를 이행하는 것 같은 마음에서 결혼식에 참석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참석하다 보니 준비해 가지고 간 축의금을 건네주고는, 결혼식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준비된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또 다른 결혼식에 가보기 위하여 바쁘게 떠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결혼식도 대부분 주일에 이루어지고 있는데, 꼭 그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주일과 같이 사람들이 쉬는 날 결혼식을 올려야만 축의금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 주일과 같은 쉬는 날을 택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므로 봄철이나 가을철과 같이 결혼식이 많이 거행되는 시기에는, 주일에 미사참여자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현상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많게는 몇 십통의 청첩장을 받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예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의 편의를 위하여 자기의 은행계좌번호를 청첩장에 인쇄하여 돌리기도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러한 현상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고유한 관습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체, 형식만이 존재하게 되어, 오히려 사람을 귀찮게 하고, 사람의 잘못된 심성만을 확인시키는 씁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청첩장은 세금 고지서



 그러나 나이든 기성세대가 경험한 결혼식 잔치는, 전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먼저 잔치가 계획되면, 친지나 친척들이 모이고, 모여든 친척이나 친지들은 모두가 한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어 행사를 즐거운 마음으로 치렀던 것이다. 이 같은 잔치에는 관습에 따른 질서가 있었고, 이러한 질서에 따라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 따른 역할을 이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나 항렬이 높은 친척은, 당연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치에 따라 자리를 차지하며, 중요치 않거나 초대받지 못한 상태에서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아주 낮은 자리, 즉 마당이나 또는 마당 귀퉁이에 자리잡고, 잔치에 참석하는 기회를 갖게되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이 초대받은 혼인잔치는, 우리의 잔치 모습과 매우 비슷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혼인잔치에 참석하면 자신의 위치가 확정되지 않거나 또는 순위가 모호할 때는 큰소리도 내고 하면서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은근히 사람들이 알아주도록 간접직접 시위를 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사람들은 여실히 드러내고 있고,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자신의 위치나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행동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낮은 자리에 앉으라\”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것은 겸손의 기본이 될 수 있는 요소다. 더구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하느님께 내세울 만한 것이 조금도 없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간이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하느님 대전에서 높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못난 사람이 될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느님이 높여주는 복된 사람이 될 것이다.











23.   연중 제22주일   루가 14,1.7-14 (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최희수 신부



지난 여름은 무척 더웠습니다. 이제 아침, 저녁으로 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입니다. 한국의 가을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담장 주위에는 해바라기들이 태양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고, 교외로 나가보면 코스모스들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김장용 무우와 배추의 씨를 뿌릴 때입니다.

벌써부터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은 한가위 휴가에 대해 얘기를 나눕니다. 우리 선조들은 한가위 때, 햇곡식과 햇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들과 하늘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는 차례를 지냅니다.



자기의 때를 아는 겸손함



저는 중학교 다닐 때, 집에 약간의 논이 있었기 때문에, 농사에 대해 조금 경험이 있습니다. 약 3천평의 땅이었지만, 보기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상 논에 들어가 일을 해보면, 땅이 넓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게 됩니다. 또한 농사일은 하루아침에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해나가야 된다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비록 3,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농사를 지으면서 배운 것은 자연의 순리였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의 때(時)를 아는 겸손함입니다. 더운 여름에 하루가 다르게 자란 벼들은, 가을이 되면서 이삭이 영글고, 드디어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면 농부들은 기쁜 마음으로 낫을 댑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과 농부의 순수한 마음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농심(農心)은 천심(天心)이란 말도 이해가 됩니다. 순수한 마음이 없이 농사를 짓기는 힘듭니다.

  

농촌에 젊은이들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다느니, 농촌에 시집을 올 사람이 없어 농촌 총각이 비관 자살을 했다느니 하는 기사는, 이제 별로 특종기사가 아닙니다. 현대는, 머리가 비상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전부 대도시로 몰려들어, 그야말로 생지옥을 방불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봉급을 타면서 고향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영세민으로 전락하고 있는 도시 근로자들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요즈음 사회는 무엇이나 최고를 요구합니다. 가정에서는 자녀가 공부벌레이기를 원합니다. 인륜(人倫)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만을 강요합니다. 학교에서도 참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인격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지지 않는 요령만을 가르쳐줍니다. 그 결과 지금은 어른 무서운 줄을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하고 싶은 것은 다하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가 필요한 것은 움켜쥐려는 살벌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겸양지덕(謙讓之德)이란 말은 현대인의 큰머리(?) 속에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허공으로 사라지는 하느님의 말씀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바로 현대인의 기억 속에서 아득히 사라진 겸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더 겸손하여라.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집회 3,18)라는 말씀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겸손하게 되면 될수록 너는 더욱 훌륭하게 된다.\” 또한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집회 3,19)는 말씀은, 바로 현대인에게 충격적으로 선포하는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현대에는 옛날처럼 기적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똑똑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 25).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저히 남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으려 합니다. 더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기가 모르고 있는 것조차  \’아는 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지를 은폐하기 위한 무수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자기의 말도 할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남의 말을 들을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귀 기울여 남의 말을 듣습니다\”(집회 3,29).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말씀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너무 자신들의 얘기만 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은 허공으로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삶은 겸손함의 극치



예수님의 삶 자체는 바로 겸손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일생 중에서, 저에게 항상 묵상 주제로 남아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나자렛에서의 삶입니다. 공생활을 하기 전의 30평생 동안 묵묵히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아들로서의 신분을 지켰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 나자렛의 삶이 필요했겠습니까? 지식이 부족했겠습니까, 아니면 능력이 모자랐겠습니까?

  

한마디로 예수님은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때를 아무 불평도 없이 기다렸던 것입니다. 마치 누렇게 익은 벼가 농부의 낫을 기다리듯 말입니다.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예수님도 요셉과 마리아에게 고개를 숙이고, 순명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임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오직 자신의 때를 겸손되게 기다리는 자만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마태 18,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던 겸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14,11).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고백하는 솔직한 태도를 뜻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나약함을 하느님께 진솔하게 인정할 때,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하느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또 겸손한 사람은 이웃을 억누르려 하지 않고, 그들의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품어 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겸손은 정말로 하느님의 오묘함을 볼 수 있는 조건이며,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동시에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받지도 못하며 초대받을 수도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가장 값지고 아름다운 애덕임을 역설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갖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루가 14,14)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두고 사는 삶이, 바로 겸손한 삶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느님 나라의 삶입니다.

  

넓은 들판에 황금 물결이 넘실거릴 때를 미리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맙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자연의 순리를 보면서, 하느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존중하는 겸손한 태도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 14,11).











24.      연중 제22주일   루가 14,1.7-14 (다) 겸손-있는 그대로의 자신

                                                              강영구 신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강론을 하기 전에 먼저 제 자신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는 창원 반송 본당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만 주교님의 명에 의하여 여러분과 생활하기 위하여 지난 금요일에 부임한 강영구 루치오 신부입니다.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 이곳 본당에서 일하게 된 것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이며 섭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과의 만남이 참으로 축복된 만남이기를 바랍니다. 이곳 본당에서 여러분과 지내는 동안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여러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리스도인 곧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며, 예수를 주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신앙인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또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합니까? 방금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곧 우리는 한마디로 낮은 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앙인들이란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자기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마치 자기가 그 잔치의 주인공이나 되는 양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거만하고 오만스러운 인간이 되지 말고,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겸손한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도 윗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예수는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의 이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참된 겸손이 어떤 것인지를 묵상하고 우리도 진정으로 겸손한 신앙인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일이 겸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비굴하게 낮추고, 그것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겸손일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계산된 마음으로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행위도 겸손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만함이며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주제 파악을 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겸손의 첫걸음

이며,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직한 마음으로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내려다보아야 합니다. 그랬을 때,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나는 내가 설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분간하게 됩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앉아도 되는 사람인지, 아니면 낮은 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자기의 행동이 어떠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따라서 겸손의 첫걸음은 정직함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로 바라볼 수 없고 그런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가정에서, 이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가 어디이며,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압니다. 터무니없이 비굴하게 자기 자신을 비하하면서 해야 할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이일 저일 온갖 일을 간섭하는 사람, 아무런 협조도 하지 않으면서 뒤꽁무니에서 남을 헐뜯기나 하는 사람,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면서 형제들을 비판하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또 자신의 위치와 그에 합당한 처신을 하지 않는 오만한 사람이 많은 곳에는 늘 미움과 싸움과 분열과 불화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만 합니다. 더불어 사는 것을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우리 가정이 그렇고 우리 사회가 그렇고, 우리 교회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모든 공동체가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려면, 그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자면, 가정 공동체 안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혹은 자기가 어떤 생활을 해야 할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또 남편으로서의 자신의 위치, 아내로서의 자신의 위치, 자식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 가정 공동체가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잘나고 똑똑한 남편, 잘나고 똑똑한 아내, 잘나고 똑똑한 자식들만 있는 집안은 얼마 못 가서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공동체만 그런 것이 아니겠지요? 주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설자리 앉을 자리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오만한 사람이 많은 사회 공동체, 그런 본당 공동체는 늘 말썽과 불화와 분열 속에서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이란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이며,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며, 나의 설자리와 앉을 자리를 구별하는 것이며,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 겸손이 또한 모든 공동체를 사랑과 일치로 이끌어 주는 가장 기본적인 덕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겸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덕이지만, 동시에 하느님 자녀답게 사는 데, 또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본적인 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자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리고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추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회개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루가 복음 11장 15절 이하에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 곧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오만 방자했던 작은아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떠나는 오만한 사람은 처음에는 제 마음대로 즐겁고 유쾌할지 모르지만, 그의 마지막은 불행과 비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난 작은아들은 돼지우리 가운데서 돼지가 먹은 구정물을 먹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작은아들이 자기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은 돼지우리 안에서입니다. 작은아들은 절망과 비참 가운데서 비로소 자기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됩니다.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들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작은아들은 그 때 눈이 뜨여서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자기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용서를 청하리라 마음먹게 됩니다.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된 그는 겸손해져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회심하여 새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 정직한 눈으로 자신을 거짓 없이 바라보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 성탄 기념 성당이 있습니다. 그 성당 안에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동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성당의 문은 너무 낮고 좁아서 몸을 굽히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되이 이 세상에 오신 예수의 탄생지에, 거만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겸손해지는 사람만이 그 성당에 들어가서 예수의 탄생지를 순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겸손한 사람만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는 오만한 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내침을 받게 됩니다.

  

또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을 아는 겸손한 사람은 다른 형제들의 허물과 약점을 참아 줄 줄 알고 용서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늘 오만하고 하느님 앞에 고개 숙이지 못하는 거만한사람이 이웃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흥을 보며 허물을 들추어 형제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지요.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란다.” 늘 교만한 사람이 자기의 모습은 보지 않고 형제의 허물만 보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일치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겸손한 사람, 자기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서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되기 위해서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끝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시작이자 바탕입니다. 끝으로 오늘 우리가 들은 제1 독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듣겠습니다.


 “너는 들어라. 매사를 유순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리라.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더 겸손하여라.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들에게만 드러내신다. 주님의 능력은 위대하시니, 비천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 영광은 빛난다. 오만한 자의 불행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뿌리가 그에게 깊이 박혀 있는 까닭이다. 총명한 사람은 격언의 뜻을 되새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귀 기울여 남의 말을 듣는다.”(집회 3, 17-20. 28-29).











25.      연중 제22주일   루가 14,1.7-14 (다) 오만은 모든 죄의 뿌리이다.



묵상 : ‘오십보 백보\’,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오십보 백보\’일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을 아는 사람? 결코 오만하지 않을 것이다, 오만? 모든 죄의 뿌리이고, 멸망으로 가는 문이다,



   새끼손가락도 없으면 병신이다



  하루는 손가락들이 모여 자기 자랑을 하기 시작하였다. 엄지손가락이 “그래도 손가락 중에는 내가 최고다. 항상 제일을 주장할 때나, 두목을 표시할 때는 나를 치켜드는 것만 봐도 알 것이다\”라며 자랑하였다.

그러자 둘째인 검지가 나서서, “하늘의 별을 가리킬 때도, 이것저것 지시를 할 때도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며 자기 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가운데 손가락인 장지가 나서면서, “그래도 키도 내가 제일 크고, 생긴 것도 내가 제일 멋쟁이가 아닌가? 뭐니뭐니해도 손가락 중에는 내가 제일이다\”고 하였다, 그러자 넷째인 약지가 나서면서, “병들어 약을 다려 먹을 때는 항상 내가 저어야 하고, 목숨이 위태로울 때, 막힌 혈(血)을 뚫으려면 내가 피를 흘려야 되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였다. 그러자 제일 작아서 보잘것없고, 쓸모 없어 보이는 새끼손가락이 가만히 듣고 있더니 “나도 중요한 약속을 할 때나, 귀를 후빌 때는 필요하고 내가 없으면 병신인데 ! \”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우스운 이야기는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제 나름의 자존심은 있게 마련이고, 또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보여도 모두 제 할 몫이 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제 잘난 맛에 산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착각은 “나는 주인공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위한 조연 내지 단역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대할 때도, 모든 사건을 볼 때에도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은 보지 못하면서, 남들의 얼굴 생김새, 몸매, 옷매무새, 걸음걸이,

말투 등등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한다. 이렇게 인간은 신체구조나 의식구조가 어쩔 수 없이 자기 중심적으로 보고 판단하고 살아가게 마련인지 모른다. 그래서 모두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할 수 있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남들이 보기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일이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바로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교만을 낳는 것이다. 여기엔 ‘나는 너와는 다르다\’, ’감히 나하고 맞먹으려고!\’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자만은 초등학교나 사춘기 학생들에게나 어울릴 유아적인 미성숙이 아닐까? ‘오십보 백보\’,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미 있다, 하느님 보시기에 돈 있고, 많이 배우고 잘났다고 뽐내는 인간들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우리는 온갖 위선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포장한 자신이 하느님 보시기에 어떨지를 자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오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나 두려움이 없는 증거다.



    교만은 악의 근원이고, 겸손은 덕의 근본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고 하신다, 누가 교만한 사람인가?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나 약점이 드러나면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디질 못한다. 누구나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지만, 오만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교만을 더욱 못 견디어 한다. 뿐만 아니라, 교만한 사람은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다. 오만한 사람은 누구나 그를 싫어하기에 참된 친구가 없고 고독하다. 교만 중에 가장 역겨운 교만은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다. 일을 좀 맡아달라고 부탁을 받으면, 내심으로는 ‘좀더 애걸하기를 기다리면서\’ 온갖 겸손한 어투로 사양하는 것은 참으로 역겨운 겸손이다.



  그러면 참된 겸손은 무엇인가? 참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선(비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겸손은 진실과 가장 가까운 것이다.

  오만 방자함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기에, 모든 죄악과 불행이 거기에서 나온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세상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 오만한 자의 불행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뿌리가 그에게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집회 3,19-29)고 하신다.



  반대로 겸손한 사람은 항상 맘의 평화를 누리고, 모든 덕이 싹틀 수 있는 토양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밥으로 내놓으셨다. 지극한 겸손이다. “마음이 양선하시고 겸손하신 주님, 저희 마음을 당신의 마음과 같게 하소서,\” 아멘.











26.        연중 제22주일   루가 14,1.7-14 (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추는 사람은



 내가 보스턴 대학에서 수년간 영문으로 작성한 박사학위 논문을 학교에 제출하고 나서, 미국인 친구에게 편지를 쓰던 중의 일이다. 문득 ‘오렌지’라는 단어의 철자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닌가! 얼른 사제관 안내실로 전화를 걸어서 자매님께 철자를 여쭈었더니, 「아이고, 우리 박사님께서 오렌지의 철자도 모르시는군요!」하시면서 ORANGE라고 또박또박 불러주셨다.



  나는 그 순간 부끄러움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깨달음에 감사를 느꼈다. 박사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르는 것을 즉시 질문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다. 그리고 즉시 질문하려면 자만심을 극복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겸손도 필요함을 실감했다. 사실 질문할 능력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수 있는 겸손의 덕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하느님의 선물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거나 학식이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는 배우려 하지만,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이로부터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와 비슷하게 권력자나 부자가 높은 자리에 앉고, 평민들은 낮은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만드셨으며,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해주신다. 예수님은 이 평범한 진리를 황금률로 표현하기도 한다. 「네가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바 그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 말씀을 분석해보면, 남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과(A), 그 바라는 바를 남에게 해주는 것(B)을 동등하게 여기라는 말이기도 하다. 즉 나의 바람과 남의 바람을 동일시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나와 남이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죄에 물든 우리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에 남보다 내가 더 중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남보다 윗자리에 앉고 싶고, 남을 인정해 주기에 앞서 내가 인정받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잔치 집의 손님들은 저마다 윗자리에 앉으러 한다. 누구든지 윗자리에 가고 싶지만 그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만일 내가 윗자리에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아랫자리로 몰아내는 셈이다. 그러므로 윗자리에 앉는 사람은 예수께서 제일 중대한 계명으로 가르치신「네가 남에게서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라」는 황금률을 지킬 수 없게 된다.

  만일에 황금률을 지킬 마음이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윗자리를 남에게 양보해야 한다. 그러나「왜 나만 황금률을 지켜야 하는가?」, 「상대방도 황금률에 따라서 나에게 윗자리를 양보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누가 먼저 윗자리를 양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예수님의 답변을 들어보자.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명료하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14장 11절).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자이며 황금률을 어기는 사람이다. 그는 현세적이며 눈앞의 이익에만 눈먼 소경이다. 그러나 현명한 신앙인은 당장에는 손해인 듯해도 남을 먼저 높이면 결국 나도 높아진다는 것(사랑)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결국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황금(사랑) 법칙은 겸손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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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 22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주 제 22 주일


    너는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말라


    제 1독서 : 집회 3,17-19. 28-29


    제 2독서 : 히브 12,18-19. 22-24a


    복음 : 루가 14,1. 7-14


    해설

    예수께 있어서는 일상의 모든 것이 가르침의 계기가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를 루가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식사토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대하고 있는 짤막한 두 개의 비유는(루가 14,7-14) ‘잔치’라는 평범한 행위에 내포되어 있는 어떤 태도나 습관 또는 상징적인 의미를 소재로 해서 보다 드높은 어떤 실체 내지는 보다 깊고 보편적인 어떤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뒤이어 즉시 나오는 세 번째 비유 –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응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비유(14,15-24) – 도 같은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잔치’를 우정, 인간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등에 대한 표현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이상의 모든 내용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어떤 조그만 사실이라도 소재로 삼으실 수 있으신 예수의 교육학적 노련미를 알려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한 메시지에로 개방되어 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 있어서는 인간적인 모든 것들이 신적인 것에로 나아가는 길, 즉 신적인 것의 상징 또는 예표와도 같다. 그 때문에 예수께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함께 먹는다고 하는 인간적 체험을 종말론적 메시아의 잔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도(루가 14,15-24 참조), 성체성사를 설정하심에 있어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오늘 그 두 개의 비유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 두개의 비유는 우리가 식사에 초대받을 때나 또는 다른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할 때 – 이런 일들은 어쩌다 있는 일들이다 – 취해야 할 사회적 행동 규범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과 크리스찬 생활의 잔치 – 최고의 순간은 말할 것도 없이 성체성사의 거행에 두고 있는 – 에 참여해야 할 우리의 태도에 대해 가르쳐 주고자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 다른 무엇보다도, 모두가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초대받은 다른 이들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신다. 이와 같이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자기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말인가!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이렇듯 가련한 어리석은 행동을 보시고 다음과 같이 비유로써 말씀하신다 : “누가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말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겨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에 내려앉아야 할 것이다.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앉게’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는 당신은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8-11절).

    랍비들의 전승 가운데도 거의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연회예법’에 관한 규범이 있었다 : “너에게 맞는 자리에서 두세 자리 정도 멀리 자리를 잡고 ‘윗자리로 오르시오’ 하는 말을 기다려라. ‘아래로 내려가시오, 아래로 내려가시오’라는 말을 듣기보다는 ‘윗자리로 오르시오’라는 말을 듣도록 하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내용은 구약성서가 가르치는 지혜로운 체험에 속하기도 했다 : “임금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높은 사람 자리에 끼어들지 말아라. 높은 사람 앞에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 올라오십시오’ 하는 말을 듣는 편이 낫다”(잠언 25,6-7 ; 집회 31,18 참조).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황하는 입장에 놓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실천적 행동에 대한 조언에 불과한 것이였다.

    이어 반해 예수께서 주시는 ‘연회예법’은 좋지 않은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깨달아야 할 권고 그 이상의 것이다. 다만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열망을 그리고 있는 비유를 뒷배경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말해 주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짓이나 위선으로 자신을 자랑하여 내세우지 말고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 마지막 구절이 그 점을 설명해 주고 있다 :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높이는 자를 낮추시고 스스로 낮추는 자를 높이신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올바른 사람으로 자처하고 자기의 특권을 뽐내어 주장하는 사람을 하늘 나라에서 제외시키신다. 그 반대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을 받아들이신다.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집회 3,19). 겸손한 사람의 비천함이 곧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첫째 조건이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에 관한 비유도 동일한 문장으로 끝난다. 이 비유에서 바리사이파 사람은 마치 식사에 초대받은 이들이 그랬듯이 하느님 앞에서 첫자리를 차지하고자 하였으나, 세리는 그러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한다. 그래서 세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A. Stöger, Vangelo secondo Luca, vol. Ⅱ, Citta Nuova Ed., Roma 1969, p.33).

    그러므로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제시하시는 생활의 규범은 겸손이다. 즉 겸손을 토해서 오직 낮은 자리를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은총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람의 행위이다.

    사실 복음의 내용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사실은 ‘윗자리로’(10절) 불러 올리시는 분이 곧 하느님이시라는 점이다. 구원의 모든 계획과 그 계획안에서 우리가 차지할 자리는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취해야 할 유일한 태도는 아무 것도 내세우지 말고 온전히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손에 우리 자신을 내맡긴다면 그분이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분이 원하신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보다 상좌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이 예수께 일어난다. 그분은 첫째이시지만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필립 2,9). 예수께서는 이 점에 대해 최후만찬 석상에서 사도들이 서로 첫자리를 차지하려고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힘주어 말씀하신다 : “너희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더 높은 사람이냐? 높은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와 있다”(루가 22,26-27).

    하느님 나라에서 인정받는 유일한 위대성은 겸손과 봉사 바로 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가장 낮은 사람이 되거나 또는 그들 가운데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분명 그때 우리는 가장 첫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우둔함은 오늘날의 크리스찬들과 사도들까지도 첫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를 계속할 만큼 크다.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이 초대받으신 잔치를 이용하여 당신의 가르침을 더욱 확대시켜 나가시면서, 얼핏 보아 관대한 행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이기주의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 그런 행위들에 내포되어 있는 사심과 계산을 버릴 것을 가르치신다 :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 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그러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갑아 주실 것이다.”(12,14절).

    예수께서는 그 이상하고도 역설적인 연회예법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반복해서 제시하고자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회적인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되는 생활규범을 제시하고자 하신다. 일반적으로 인간관계에서 보면 사람들이 예외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이 배척을 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특별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루가가 제시하고 있는 예증은 단순하지만 예수 시대의 유다인들의 사회에서, 성전에서의 종교적 봉사조차 제외되었던 사람들의 범주를 망라하고 있다. 예를 들어 꿈란 공동체는 손이나 발이 없는 사람, 불구자, 귀머거리, 벙어리 같은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레위 21,17-21 참조).

    그러면 어째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바가 사회관습에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는가? 근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동기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로는 ‘무상성’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네가 네 친구들이나 친척들을 식사에 초대한다면 그들도 너를 초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너는 이미 네가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게 되는 것이다(12절). 이처럼 ‘베푼 것을 도로 받게 됨’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네가 하는 행위의 진실성을 잃어버리게 할 가능성을 낳게 된다. 왜냐하면 항상 부차적인 목적을 계산에 넣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는 잔치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바로 역에 함정이 있을 수 있다고 예수께서는 지적하신다. 그 반대로 만일 네가 가난한 이, 불구자, 절름발이 등을 초대한다면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14절).

    여기서 분명히 나타나는 사실은 오직 진실되고, 단순하며, 티없이 맑은 뜻으로 행해지는 행위만이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즉 다른 어떤 부차적이 목적들이 행위 자체를 파괴시킬 수 없는 그런 행위만이 가치를 갖게 된다. 유일한 ‘보상’은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14절) 주님께서 주실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과 행동의 ‘무상성’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의 행위는 겸손을 통해 위대하게 된다. 즉 내 행위에 파고들어 부추겨주는 선성을 통해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니게 된다.

    둘째로는 순수한 무상성 외에도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그 사회 속에서 바로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크리스찬들이 늘 진실되이 받아들여 오지 못한 가르침이다. 이미 성야고보의 편지 –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사상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서라고 여겨지고 있는 – 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전례집회 때조차 차별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그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야고 2,1-4).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 바로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일컬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는 노인, 기형아, 지체부자유자, 마약중독자, 감옥에 갇힌 이, 피난민들일 수 있다 – 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도 겸손의 행위이며 마지막 자리를 택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그 잔치석상에서 ‘윗자리에 오르라’는 초대를 받게 될 것이다.

    오늘 제 1독서에 나오는 구약성서상의 ‘지혜’의 가르침도 비록 시간적으로는 아주 먼 것이긴 하지만 이미 복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쳐 주고 있다 :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우대하시니 비천한(겸손한) 사람에 의하여 그 영광이 빛나기 때문이다”(집회 3,18-20).

  2. user#0 님의 말:

     

    연주 제 22 주일


    너는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말라


    제 1독서 : 집회 3,17-19. 28-29


    제 2독서 : 히브 12,18-19. 22-24a


    복음 : 루가 14,1. 7-14


    해설

    예수께 있어서는 일상의 모든 것이 가르침의 계기가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를 루가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식사토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대하고 있는 짤막한 두 개의 비유는(루가 14,7-14) ‘잔치’라는 평범한 행위에 내포되어 있는 어떤 태도나 습관 또는 상징적인 의미를 소재로 해서 보다 드높은 어떤 실체 내지는 보다 깊고 보편적인 어떤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뒤이어 즉시 나오는 세 번째 비유 –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응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비유(14,15-24) – 도 같은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잔치’를 우정, 인간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등에 대한 표현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이상의 모든 내용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어떤 조그만 사실이라도 소재로 삼으실 수 있으신 예수의 교육학적 노련미를 알려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초월한 메시지에로 개방되어 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 있어서는 인간적인 모든 것들이 신적인 것에로 나아가는 길, 즉 신적인 것의 상징 또는 예표와도 같다. 그 때문에 예수께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함께 먹는다고 하는 인간적 체험을 종말론적 메시아의 잔치를 표현하기 위해서도(루가 14,15-24 참조), 성체성사를 설정하심에 있어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오늘 그 두 개의 비유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 두개의 비유는 우리가 식사에 초대받을 때나 또는 다른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할 때 – 이런 일들은 어쩌다 있는 일들이다 – 취해야 할 사회적 행동 규범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과 크리스찬 생활의 잔치 – 최고의 순간은 말할 것도 없이 성체성사의 거행에 두고 있는 – 에 참여해야 할 우리의 태도에 대해 가르쳐 주고자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 다른 무엇보다도, 모두가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초대받은 다른 이들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신다. 이와 같이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자기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말인가!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이렇듯 가련한 어리석은 행동을 보시고 다음과 같이 비유로써 말씀하신다 : “누가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말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겨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에 내려앉아야 할 것이다.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사람이 와서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앉게’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손님들의 눈에는 당신은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8-11절).

    랍비들의 전승 가운데도 거의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연회예법’에 관한 규범이 있었다 : “너에게 맞는 자리에서 두세 자리 정도 멀리 자리를 잡고 ‘윗자리로 오르시오’ 하는 말을 기다려라. ‘아래로 내려가시오, 아래로 내려가시오’라는 말을 듣기보다는 ‘윗자리로 오르시오’라는 말을 듣도록 하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내용은 구약성서가 가르치는 지혜로운 체험에 속하기도 했다 : “임금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높은 사람 자리에 끼어들지 말아라. 높은 사람 앞에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 올라오십시오’ 하는 말을 듣는 편이 낫다”(잠언 25,6-7 ; 집회 31,18 참조).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황하는 입장에 놓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실천적 행동에 대한 조언에 불과한 것이였다.

    이어 반해 예수께서 주시는 ‘연회예법’은 좋지 않은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깨달아야 할 권고 그 이상의 것이다. 다만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열망을 그리고 있는 비유를 뒷배경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말해 주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짓이나 위선으로 자신을 자랑하여 내세우지 말고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 마지막 구절이 그 점을 설명해 주고 있다 :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높이는 자를 낮추시고 스스로 낮추는 자를 높이신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올바른 사람으로 자처하고 자기의 특권을 뽐내어 주장하는 사람을 하늘 나라에서 제외시키신다. 그 반대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을 받아들이신다.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집회 3,19). 겸손한 사람의 비천함이 곧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첫째 조건이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에 관한 비유도 동일한 문장으로 끝난다. 이 비유에서 바리사이파 사람은 마치 식사에 초대받은 이들이 그랬듯이 하느님 앞에서 첫자리를 차지하고자 하였으나, 세리는 그러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한다. 그래서 세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A. Stöger, Vangelo secondo Luca, vol. Ⅱ, Citta Nuova Ed., Roma 1969, p.33).

    그러므로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제시하시는 생활의 규범은 겸손이다. 즉 겸손을 토해서 오직 낮은 자리를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은총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람의 행위이다.

    사실 복음의 내용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사실은 ‘윗자리로’(10절) 불러 올리시는 분이 곧 하느님이시라는 점이다. 구원의 모든 계획과 그 계획안에서 우리가 차지할 자리는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취해야 할 유일한 태도는 아무 것도 내세우지 말고 온전히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손에 우리 자신을 내맡긴다면 그분이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분이 원하신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보다 상좌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이 예수께 일어난다. 그분은 첫째이시지만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필립 2,9). 예수께서는 이 점에 대해 최후만찬 석상에서 사도들이 서로 첫자리를 차지하려고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힘주어 말씀하신다 : “너희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더 높은 사람이냐? 높은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와 있다”(루가 22,26-27).

    하느님 나라에서 인정받는 유일한 위대성은 겸손과 봉사 바로 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가장 낮은 사람이 되거나 또는 그들 가운데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분명 그때 우리는 가장 첫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우둔함은 오늘날의 크리스찬들과 사도들까지도 첫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를 계속할 만큼 크다.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이 초대받으신 잔치를 이용하여 당신의 가르침을 더욱 확대시켜 나가시면서, 얼핏 보아 관대한 행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이기주의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 그런 행위들에 내포되어 있는 사심과 계산을 버릴 것을 가르치신다 :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 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그러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갑아 주실 것이다.”(12,14절).

    예수께서는 그 이상하고도 역설적인 연회예법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반복해서 제시하고자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회적인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되는 생활규범을 제시하고자 하신다. 일반적으로 인간관계에서 보면 사람들이 예외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이 배척을 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특별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루가가 제시하고 있는 예증은 단순하지만 예수 시대의 유다인들의 사회에서, 성전에서의 종교적 봉사조차 제외되었던 사람들의 범주를 망라하고 있다. 예를 들어 꿈란 공동체는 손이나 발이 없는 사람, 불구자, 귀머거리, 벙어리 같은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레위 21,17-21 참조).

    그러면 어째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바가 사회관습에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는가? 근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동기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로는 ‘무상성’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네가 네 친구들이나 친척들을 식사에 초대한다면 그들도 너를 초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너는 이미 네가 베풀어준 것을 도로 받게 되는 것이다(12절). 이처럼 ‘베푼 것을 도로 받게 됨’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네가 하는 행위의 진실성을 잃어버리게 할 가능성을 낳게 된다. 왜냐하면 항상 부차적인 목적을 계산에 넣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는 잔치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바로 역에 함정이 있을 수 있다고 예수께서는 지적하신다. 그 반대로 만일 네가 가난한 이, 불구자, 절름발이 등을 초대한다면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14절).

    여기서 분명히 나타나는 사실은 오직 진실되고, 단순하며, 티없이 맑은 뜻으로 행해지는 행위만이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즉 다른 어떤 부차적이 목적들이 행위 자체를 파괴시킬 수 없는 그런 행위만이 가치를 갖게 된다. 유일한 ‘보상’은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14절) 주님께서 주실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과 행동의 ‘무상성’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의 행위는 겸손을 통해 위대하게 된다. 즉 내 행위에 파고들어 부추겨주는 선성을 통해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니게 된다.

    둘째로는 순수한 무상성 외에도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그 사회 속에서 바로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크리스찬들이 늘 진실되이 받아들여 오지 못한 가르침이다. 이미 성야고보의 편지 –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사상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서라고 여겨지고 있는 – 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전례집회 때조차 차별행위가 이루어졌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그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야고 2,1-4).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 바로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일컬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는 노인, 기형아, 지체부자유자, 마약중독자, 감옥에 갇힌 이, 피난민들일 수 있다 – 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도 겸손의 행위이며 마지막 자리를 택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그 잔치석상에서 ‘윗자리에 오르라’는 초대를 받게 될 것이다.

    오늘 제 1독서에 나오는 구약성서상의 ‘지혜’의 가르침도 비록 시간적으로는 아주 먼 것이긴 하지만 이미 복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쳐 주고 있다 :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우대하시니 비천한(겸손한) 사람에 의하여 그 영광이 빛나기 때문이다”(집회 3,18-20).

  3. user#0 님의 말:

     

    겸손과 자선

    <말씀연구>

    1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빵을 잡수시러 바리사이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있었던 일이다. 그들은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잔치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평일에는 식사를 두 번 하였지만 안식일에는 세 번 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예배가 끝난 후에 먹는 점심 식사가 가장 잘 차려진 식사였습니다. “축제일에 백성들은 먹고 마시든지 아니면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한다.” 축제를 함께 지내기 위해서 손님들이 초대되었고, 그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과 이방인들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했으며, 그들의 허기를 채워 주어야 했습니다.

    회당의 종교 의식에는 유명한 율법교사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듣고 점심 식사에 초대하는 것이 관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 멋지신 분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시고, 그들을 비난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초대하면 기꺼이 응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모셔다 놓고 자신들의 입장을 강조하고, 꼬투리 잡으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씀이 참 와 닿습니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처럼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고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을 향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그들이 어떻게 윗자리를 택하는지 지켜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에 정통해 있었고, 그들의 집에서 열리는 잔치 자리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에 관한 대화가 곁들여졌습니다.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고대에서는 나이가 아니라 위엄이나 직위에 따라 손님을 앉히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손님들은 각자 자신이 내세우는 서열에 따라 자리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윗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니 교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식탁 자리에 관한 규칙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이 누구에게서 혼인잔치에 초대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시오. 당신보다 더 귀한 사람이 그에게 초대받았을 경우, 당신과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와서 당신더러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시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 때 당신은 부끄러워하며 맨 끝자리에 물러앉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마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높은 사람 앞에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이리 올라오십시오’하는 말을 듣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잠언25,6-7 참조). 그와 유사하게 율법교사들에게도 신중함에 관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네 자리보다 두세 자리 아래 앉아서 누군가가 네게 ‘이리 올라오십시오!’ 하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라. 이것이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는 말을듣는 것보다 낫다.”율법교사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서,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경우를 막기 위한 규칙이었습니다.


    10  당신은 초대받거든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시오. 그러면 당신을 초대한 이가 와서 당신에게 ‘친구여, 위쪽으로 오르시지요’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함께 음식상을 받은 모든 이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식탁 자리에 관한 규칙”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한 가지 진리를 표현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낮아져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의로운 체하는 그릇된 모든 주장을 피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춤은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성전에서의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떠 올렸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더 의로운 사람으로 하느님께 인정되었습니까? 교만한 바리사이입니까? 죄인이지만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세리였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인정할 줄 아는 이를 너그럽게 보아 주시고 높여 주십니다.


    11  사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겸손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간에도 누가 높은지 서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여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냉담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본당 신부님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서라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 남편을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전에는 참 열심히 다니시고 봉사도 하셨는데 지금은 신부님이 알아 주지 않는다고 성당에 안다니고 있습니다. 전화 한번만 해 주시면 나올텐데…신부님! 부탁드립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에게 전화를 해야 합니다. “형제님! 얼굴 뵙기가 왜 그리 힘듭니까? 성당에 나오세요…”하지만 그가 그렇게 성당에 나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나오게 해서 바꿔놔야 하겠지요.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낮추는사람으로…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것. 그것만 기억한다면 좀더 겸손해지지 않을까요?



    함께 밥을 먹는 다는 것은 관계가 있다든지, 서로 호감이 있는 경우에만 합니다. 모르는 사람과는 밥을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식당에서도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는 함께 앉기를 꺼려합니다. 직장의 구내 식당에서도 여기 저기서 혼자 먹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영어 회화에 보면 “여기 자리 있습니까? 앉아도 될까요?”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모르는 사람과도 앉아서 얘기할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그런데 한국말을 공부하는 외국인들도 이런 표현을 배우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더 나아가 밥을 사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밥 사주지 말고 관계가 아직 없는 사람들도 끼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주지 못할 형편에 있는 사람들도, 매일 얻어먹기만 하는 사람들도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일 수도 없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일 수도 없고, 사랑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그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미워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함께 하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일 것입니다. 그가 안 하면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자선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12  그러고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당신이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당신 친구들이나 형제들이나 친척들이나 부유한 이웃들을 부르지 마시오. 그러면 그들도 당신을 초대하여 갚을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모든 이기심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내가 이정도 해 주었으니 다음에 뭘 부탁해도 들어주겠지” “이 사람이랑 친해지면 도움이 되겠어” 그런 생각으로 사람들을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유혹이라는 것. 참으로 교묘하게 파고 들어옵니다. 있는 사람,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좋은 음식, 좋은 술을 대접해야 된다는 생각을 당연히 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 말씀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한 사람이 부하 직원들에게 “난 이런 술이 참 좋더라구”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에게 그가 좋아하는 술을 선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또 자랑삼아 말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그  수준에 맞춰 주더라구!” 그런데 그게 선물일까요? 뇌물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친구나 부자를 초대하는 것은 세속에서 흔한 예절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해 준 만큼 보상을 받게 되겠지만 하느님께로부터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비록 그들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고, 그들이 보답할 수도 없지만, 더 나아가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13  당신이 연회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불구자들, 절름발이들, 소경들을 초대하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식사에 초대한 그 주인에게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예의나, 보답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을 조심하라고. 정작 초대해야 할 사람들은 내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소경, 절름발이, 불구자…)이라고…,

    쿰란 공동체에는 팔 다리가 온전하지 못한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였고, 불구자나 귀머거리, 벙어리도 제외되었습니다. 귀먹은 벙어리, 소경, 저능인들에게는 성전의 희생 제사에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들은 공적인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14  그러면 당신은 복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당신에게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고, 베푼다는 것.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들은 사랑을 받았지만 물질적으로는 다시 되돌려줄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뻐하는 것뿐입니다. 그 사람에게 미안해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흐뭇해하시며 대신 갚아 주실 것입니다. 

    친한 사람들, 있는 사람들을 멀리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이 미움을 초월하고, 개인적인 이해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실행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한 몫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잔치에 관한 규칙은 이제 하느님 나라의 천상 잔치에 관한 규칙이 됩니다. 초대 교회는 이 규칙이 또한 주님의 만찬례에서도 준수된다는 것을 깊이 확신하였습니다. 바오로사도는 고린토 교회의 신자들이 주님의 만찬에 모여와서는 저마다 각자가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어 치웠기 때문에 술에 취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굶주린 채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곳 교회를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려고 그러는 것입니까?”(1고린토11,20-22). 야고보 사도는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그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믿바닥에 앉든지 하시오’하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야고보서2,2-4).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는 성찬례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이 성찬에서 인간은 거지와 다름없지만 “죄의 용서를 위한”(마태26,28) 음식을 먹고 마십니다. 의인이나 죄인이나 모든 이는 부활합니다. 하지만 부활했을 때 받을 상은 각각 다르게 될 것입니다. 상을 받을 사람도 있고, 벌을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상을 받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내가 함께 식사하고 선물을 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 입니까? 내가 미워하는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과도 식사하십니까?


    2. 다른 이들로부터 접대성의 식사나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그리고 내가 접대를 했다면 접대할 때의 내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4. user#0 님의 말:

     

    겸손과 자선

    <말씀연구>

    1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에 빵을 잡수시러 바리사이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있었던 일이다. 그들은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잔치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평일에는 식사를 두 번 하였지만 안식일에는 세 번 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예배가 끝난 후에 먹는 점심 식사가 가장 잘 차려진 식사였습니다. “축제일에 백성들은 먹고 마시든지 아니면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한다.” 축제를 함께 지내기 위해서 손님들이 초대되었고, 그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과 이방인들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했으며, 그들의 허기를 채워 주어야 했습니다.

    회당의 종교 의식에는 유명한 율법교사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듣고 점심 식사에 초대하는 것이 관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 멋지신 분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시고, 그들을 비난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초대하면 기꺼이 응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모셔다 놓고 자신들의 입장을 강조하고, 꼬투리 잡으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씀이 참 와 닿습니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처럼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고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을 향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그들이 어떻게 윗자리를 택하는지 지켜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에 정통해 있었고, 그들의 집에서 열리는 잔치 자리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에 관한 대화가 곁들여졌습니다.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자신의 지식을 내세우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입니다. 고대에서는 나이가 아니라 위엄이나 직위에 따라 손님을 앉히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손님들은 각자 자신이 내세우는 서열에 따라 자리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윗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니 교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식탁 자리에 관한 규칙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이 누구에게서 혼인잔치에 초대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시오. 당신보다 더 귀한 사람이 그에게 초대받았을 경우, 당신과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와서 당신더러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시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 때 당신은 부끄러워하며 맨 끝자리에 물러앉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마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높은 사람 앞에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이리 올라오십시오’하는 말을 듣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잠언25,6-7 참조). 그와 유사하게 율법교사들에게도 신중함에 관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네 자리보다 두세 자리 아래 앉아서 누군가가 네게 ‘이리 올라오십시오!’ 하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라. 이것이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는 말을듣는 것보다 낫다.”율법교사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서,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경우를 막기 위한 규칙이었습니다.


    10  당신은 초대받거든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시오. 그러면 당신을 초대한 이가 와서 당신에게 ‘친구여, 위쪽으로 오르시지요’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함께 음식상을 받은 모든 이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식탁 자리에 관한 규칙”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한 가지 진리를 표현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낮아져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의로운 체하는 그릇된 모든 주장을 피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춤은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성전에서의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떠 올렸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더 의로운 사람으로 하느님께 인정되었습니까? 교만한 바리사이입니까? 죄인이지만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세리였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인정할 줄 아는 이를 너그럽게 보아 주시고 높여 주십니다.


    11  사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겸손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간에도 누가 높은지 서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여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냉담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본당 신부님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서라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 남편을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전에는 참 열심히 다니시고 봉사도 하셨는데 지금은 신부님이 알아 주지 않는다고 성당에 안다니고 있습니다. 전화 한번만 해 주시면 나올텐데…신부님! 부탁드립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에게 전화를 해야 합니다. “형제님! 얼굴 뵙기가 왜 그리 힘듭니까? 성당에 나오세요…”하지만 그가 그렇게 성당에 나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나오게 해서 바꿔놔야 하겠지요.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낮추는사람으로…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것. 그것만 기억한다면 좀더 겸손해지지 않을까요?



    함께 밥을 먹는 다는 것은 관계가 있다든지, 서로 호감이 있는 경우에만 합니다. 모르는 사람과는 밥을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식당에서도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는 함께 앉기를 꺼려합니다. 직장의 구내 식당에서도 여기 저기서 혼자 먹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영어 회화에 보면 “여기 자리 있습니까? 앉아도 될까요?”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모르는 사람과도 앉아서 얘기할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그런데 한국말을 공부하는 외국인들도 이런 표현을 배우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더 나아가 밥을 사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밥 사주지 말고 관계가 아직 없는 사람들도 끼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주지 못할 형편에 있는 사람들도, 매일 얻어먹기만 하는 사람들도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일 수도 없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일 수도 없고, 사랑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그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미워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함께 하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일 것입니다. 그가 안 하면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자선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12  그러고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당신이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당신 친구들이나 형제들이나 친척들이나 부유한 이웃들을 부르지 마시오. 그러면 그들도 당신을 초대하여 갚을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모든 이기심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내가 이정도 해 주었으니 다음에 뭘 부탁해도 들어주겠지” “이 사람이랑 친해지면 도움이 되겠어” 그런 생각으로 사람들을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유혹이라는 것. 참으로 교묘하게 파고 들어옵니다. 있는 사람,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좋은 음식, 좋은 술을 대접해야 된다는 생각을 당연히 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이 말씀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한 사람이 부하 직원들에게 “난 이런 술이 참 좋더라구”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에게 그가 좋아하는 술을 선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또 자랑삼아 말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그  수준에 맞춰 주더라구!” 그런데 그게 선물일까요? 뇌물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친구나 부자를 초대하는 것은 세속에서 흔한 예절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해 준 만큼 보상을 받게 되겠지만 하느님께로부터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비록 그들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고, 그들이 보답할 수도 없지만, 더 나아가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13  당신이 연회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불구자들, 절름발이들, 소경들을 초대하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식사에 초대한 그 주인에게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예의나, 보답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을 조심하라고. 정작 초대해야 할 사람들은 내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소경, 절름발이, 불구자…)이라고…,

    쿰란 공동체에는 팔 다리가 온전하지 못한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였고, 불구자나 귀머거리, 벙어리도 제외되었습니다. 귀먹은 벙어리, 소경, 저능인들에게는 성전의 희생 제사에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들은 공적인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14  그러면 당신은 복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당신에게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고, 베푼다는 것.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들은 사랑을 받았지만 물질적으로는 다시 되돌려줄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뻐하는 것뿐입니다. 그 사람에게 미안해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흐뭇해하시며 대신 갚아 주실 것입니다. 

    친한 사람들, 있는 사람들을 멀리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이 미움을 초월하고, 개인적인 이해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실행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한 몫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잔치에 관한 규칙은 이제 하느님 나라의 천상 잔치에 관한 규칙이 됩니다. 초대 교회는 이 규칙이 또한 주님의 만찬례에서도 준수된다는 것을 깊이 확신하였습니다. 바오로사도는 고린토 교회의 신자들이 주님의 만찬에 모여와서는 저마다 각자가 가져온 음식을 먼저 먹어 치웠기 때문에 술에 취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굶주린 채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곳 교회를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려고 그러는 것입니까?”(1고린토11,20-22). 야고보 사도는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그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믿바닥에 앉든지 하시오’하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야고보서2,2-4).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는 성찬례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이 성찬에서 인간은 거지와 다름없지만 “죄의 용서를 위한”(마태26,28) 음식을 먹고 마십니다. 의인이나 죄인이나 모든 이는 부활합니다. 하지만 부활했을 때 받을 상은 각각 다르게 될 것입니다. 상을 받을 사람도 있고, 벌을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상을 받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내가 함께 식사하고 선물을 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 입니까? 내가 미워하는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과도 식사하십니까?


    2. 다른 이들로부터 접대성의 식사나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그리고 내가 접대를 했다면 접대할 때의 내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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