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순

 

김백순에 대항 자세한 내용을 적은 기록은 없다. 또한 예비 신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본명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에서 보아 그는 1801년 4월 20일에 순교한 김건순(金健淳․요사팟)의 종형(從兄)으로 열심한 교우였으며, 주님을 믿고 끝내는 굳센 용기로써 순교한 사람이었다.


  김백은 어릴 적부터 서울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아 가난을 면하고 공직을 얻을 생각밖에는 없었다. 1636년(인조 14)에 정승이었던 그 조상 중의 한 사람은 여진족들이 조선과 명을 갈라놓는 강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라고 하는 그들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나라와 임금께 바친 이 조상의 충성심으로 인하여 그에게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그 후손들에게도 정문을 세울 허가가 주어졌다. 이 두 가지 영예는 그것을 받는 사람의 후손들에게 빨리 출세할 수 있는 칭호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순전히 야심적인 견지에서 글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김백순에 대하여 자비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던 하느님께서 그에게 참된 영광과 행복을 원하는 마음을 차차 불어넣어 주셨다. 거기에 이르기 위하여 그는 성현들의 철학서를 읽기 시작하였으나, 그것들의 모호한 점으로 그의 마음에는 의심이 생겨 그것들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노자(老子)의 글과 다른 글에서 사람이 죽어도 아주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그는 스스로 새로운 도리와 학설을 만들어 몇몇 친구에게 설명하였다. 그 내용을 들은 친구들은 ꡒ자네 말은 매우 이상하군. 아마도 자네는 그 모든 것을 서교(西敎)에서 인용한 것 같군ꡓ하고 지적하였다. 이 지적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는 이제 ꡒ우리 지혜를 초월하는 모든 것이 서교에서 왔다고 말하니, 그 종교에는 무엇인가 아주 위대하고 비상한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ꡓ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김백순은 천주교인들과 상종하기 시작하였고, 2년 동안 그들의 교리를 검토하고 깊이 연구한 후에 천주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천주의 말씀으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온 마음을 바쳐 천주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고자 하였다. 그에게 권고를 받은 그의 어머니도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속이 좁고 야심이 많아 남편의 영예를 항상 갈망아여 오던 그의 아내는 자신의 희망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분을 참지 못하여 비난과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그러나 어떠한 일에도 김백순은 자기가 입교한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어느 날 그 친척 중 한 사람이 천주교에 대하여 질문을 하자, 그는 큰소리로 ꡒ이것은 참되고 위대한 도리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따라야 하니 나처럼 입교하시오ꡓ라고 대답하였다.


  또 하루는 외숙부가 그에게 와서 온갖 방법으로 그를 유혹하다가 어쩔도리가 없음을 알고, ꡒ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ꡓ하고 말하였으나, 김백순은 ꡒ숙부와 의절(義絶)을 하더라도 저는 천주님과 의절을 할 수 없습니다ꡓ라고 조용히 대답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친구들은 그와 상종을 하지 않기로 의논하였다. 그리고 그의 친척들도 집안에서 그를 내쫓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용감한 신입 교우는 모든 것을 무관심하게 보며, ꡒ내가 천주를 안 뒤로는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으니 내 마음이 마치 산과 같다ꡓ라고만 말하였다.


  1801년 봄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체포된 후 그에 대한 신문 내용은 전하여지지 않지만, 그의 결안(結案)대로 한다면 형벌로 인하여 잠시나마 심약한 말을 한듯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러한 말을 큰소리로 철회하고 끝까지 굳센 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김백순이 옥에서 성세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리는 순교(殉敎)로서 이를 대신한다는 혈세(血洗)가 그를 참다운 교우로 만들었을 것이라는데 의심하지 않는다. 이렇듯 그가 천상으로 올라갈 권리를 얻었을 때의 나이는 3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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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순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김백순에 대항 자세한 내용을 적은 기록은 없다. 또한 예비 신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본명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에서 보아 그는 1801년 4월 20일에 순교한 김건순(金健淳․요사팟)의 종형(從兄)으로 열심한 교우였으며, 주님을 믿고 끝내는 굳센 용기로써 순교한 사람이었다.

      김백은 어릴 적부터 서울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아 가난을 면하고 공직을 얻을 생각밖에는 없었다. 1636년(인조 14)에 정승이었던 그 조상 중의 한 사람은 여진족들이 조선과 명을 갈라놓는 강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라고 하는 그들에게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나라와 임금께 바친 이 조상의 충성심으로 인하여 그에게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그 후손들에게도 정문을 세울 허가가 주어졌다. 이 두 가지 영예는 그것을 받는 사람의 후손들에게 빨리 출세할 수 있는 칭호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순전히 야심적인 견지에서 글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김백순에 대하여 자비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던 하느님께서 그에게 참된 영광과 행복을 원하는 마음을 차차 불어넣어 주셨다. 거기에 이르기 위하여 그는 성현들의 철학서를 읽기 시작하였으나, 그것들의 모호한 점으로 그의 마음에는 의심이 생겨 그것들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노자(老子)의 글과 다른 글에서 사람이 죽어도 아주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그는 스스로 새로운 도리와 학설을 만들어 몇몇 친구에게 설명하였다. 그 내용을 들은 친구들은 ꡒ자네 말은 매우 이상하군. 아마도 자네는 그 모든 것을 서교(西敎)에서 인용한 것 같군ꡓ하고 지적하였다. 이 지적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는 이제 ꡒ우리 지혜를 초월하는 모든 것이 서교에서 왔다고 말하니, 그 종교에는 무엇인가 아주 위대하고 비상한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ꡓ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김백순은 천주교인들과 상종하기 시작하였고, 2년 동안 그들의 교리를 검토하고 깊이 연구한 후에 천주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천주의 말씀으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온 마음을 바쳐 천주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고자 하였다. 그에게 권고를 받은 그의 어머니도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속이 좁고 야심이 많아 남편의 영예를 항상 갈망아여 오던 그의 아내는 자신의 희망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분을 참지 못하여 비난과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그러나 어떠한 일에도 김백순은 자기가 입교한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어느 날 그 친척 중 한 사람이 천주교에 대하여 질문을 하자, 그는 큰소리로 ꡒ이것은 참되고 위대한 도리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따라야 하니 나처럼 입교하시오ꡓ라고 대답하였다.

      또 하루는 외숙부가 그에게 와서 온갖 방법으로 그를 유혹하다가 어쩔도리가 없음을 알고, ꡒ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ꡓ하고 말하였으나, 김백순은 ꡒ숙부와 의절(義絶)을 하더라도 저는 천주님과 의절을 할 수 없습니다ꡓ라고 조용히 대답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친구들은 그와 상종을 하지 않기로 의논하였다. 그리고 그의 친척들도 집안에서 그를 내쫓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용감한 신입 교우는 모든 것을 무관심하게 보며, ꡒ내가 천주를 안 뒤로는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으니 내 마음이 마치 산과 같다ꡓ라고만 말하였다.

      1801년 봄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체포된 후 그에 대한 신문 내용은 전하여지지 않지만, 그의 결안(結案)대로 한다면 형벌로 인하여 잠시나마 심약한 말을 한듯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러한 말을 큰소리로 철회하고 끝까지 굳센 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김백순이 옥에서 성세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리는 순교(殉敎)로서 이를 대신한다는 혈세(血洗)가 그를 참다운 교우로 만들었을 것이라는데 의심하지 않는다. 이렇듯 그가 천상으로 올라갈 권리를 얻었을 때의 나이는 3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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