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집(프란치스꼬)

 

김(金)사집 프란치스꼬는 덕산 고을 베방고지의 양가에서 태어나서 열심히 글을 배워 짧은 시일 안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할 만한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천주교에 들어오자 인간의 학문은 집어치우고 오직 신심생활에만 몰두하였다. 기도와 독서가 그의 낙이었다. 타고난 슬기와 보기 드문 총명을 가진데다가 모범적인 행동을 겸하고 보니, 오래지 않아 이웃간에 큰 명성과 권위를 떨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영향력을 전교하는 데 이용하여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무식한 자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여 주고, 그가 말로 가르치는 것을 먼저 실천하는 만큼 그의 말은 그만큼 더 잘 받아들여졌다. 그는 즐겨 희사를 하였다. 새 옷을 장만하면 입던 옷을 곧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다. 그는 동네의 곤궁한 이들을 자상하게 도와 주며, 어떤 산모나 불쌍한 병자가 필요한 조그마한 위안을 얻을 수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즉시 그런 것들을 보내 주니, 불쌍한 사람들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아버지처럼 여기게 되었다. 자기 부모에 대한 효성도 그만 못하지 않아, 부모에 대한 본분을 손톱만큼도 어긴 일이 없었고,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 상중(喪中) 2년 동안을 철저하게 육식을 삼갔다. 글씨를 잘 쓰는 그는 천주교 서적을 많이 베껴 책을 살 수 없는 교우들에게 필요한 책들을 거져 주었다.


  이와 같이 착한 행실이 가득한 생애로 김사집 프란치스꼬는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에 힘썼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가 베낀 책이 많이 압수되었으므로 맨 첫머리에 관헌에게 통보되었다. 배교자 두 명이 그의 명성에 끌린 것처럼 꾸미고 와서 책을 몇 권 사겠다는 핑계로 그의 집을 살펴보고 간 뒤 얼마 안있어 포졸들을 데리고 그를 잡으러 왔다. 김사집 프란치스꼬는 우선 자기 고향인 덕산 읍으로 압송되었다. 관장은 그가 배교할 의사만 있으면 이내 놓아주리라고 약속하였으나 그는 ꡒ위대하신 하는님을 섬기는 제가 어떻게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ꡓ하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그에게 몇가지 고문을 시키고 포졸직으로 강등시켜 옥으로 다시 보냈다. 다시 불려나온 김사집 프란치스꼬는 매를 맞으면서도 여전히 굴복하지 않으니, 이번에는 매질하는 천한 직책을 그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자기 아이들에게 이런 편지를 써 보냈다. ꡒ천주와 성모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 가도록 힘써라. 그리고 나를 다시 볼 생각은 하지 마라.ꡓ이것을 보면 그는 이미 결심이 되어 있었고, 마음 속에는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0월에 해미 진영으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았다. 그러나 형벌로도 그의 항구한 마음을 바꿀 수 없으므로, 그해 12월에 도(道)의 병영이 있는 청주로 다시 이송되었다. 이 길은 그에게 혹독한 형벌이었다. 몹시 추운 날씨에 무거운 칼을 쓴 채,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몸으로 180리 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그의 백발은 어깨 위로 흐트러지고,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옷을 적시고 그것이 살에 말라 붙어서, 그가 한발 한발 떼어놓을 때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심한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이 무서운 형극의 길이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김사집 프란치스꼬는 인종과 마음의 평온을 잠시도 잃지 않았다. 그는 곧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22일(1월 25일) 장터로 끌려나가 뭇사람의 구경거리가 되고 곤장 81도를 맞은 후에 조용히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 목격한 증인들의 말을 들으면, 그의 신덕과 망덕과 애덕이 끝까지 가장 열렬한 것 같았으며, 그의 마음은 철석같이 굳었었다 한다.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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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김(金)사집 프란치스꼬는 덕산 고을 베방고지의 양가에서 태어나서 열심히 글을 배워 짧은 시일 안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할 만한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천주교에 들어오자 인간의 학문은 집어치우고 오직 신심생활에만 몰두하였다. 기도와 독서가 그의 낙이었다. 타고난 슬기와 보기 드문 총명을 가진데다가 모범적인 행동을 겸하고 보니, 오래지 않아 이웃간에 큰 명성과 권위를 떨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영향력을 전교하는 데 이용하여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무식한 자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여 주고, 그가 말로 가르치는 것을 먼저 실천하는 만큼 그의 말은 그만큼 더 잘 받아들여졌다. 그는 즐겨 희사를 하였다. 새 옷을 장만하면 입던 옷을 곧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다. 그는 동네의 곤궁한 이들을 자상하게 도와 주며, 어떤 산모나 불쌍한 병자가 필요한 조그마한 위안을 얻을 수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즉시 그런 것들을 보내 주니, 불쌍한 사람들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아버지처럼 여기게 되었다. 자기 부모에 대한 효성도 그만 못하지 않아, 부모에 대한 본분을 손톱만큼도 어긴 일이 없었고,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 상중(喪中) 2년 동안을 철저하게 육식을 삼갔다. 글씨를 잘 쓰는 그는 천주교 서적을 많이 베껴 책을 살 수 없는 교우들에게 필요한 책들을 거져 주었다.

      이와 같이 착한 행실이 가득한 생애로 김사집 프란치스꼬는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에 힘썼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가 베낀 책이 많이 압수되었으므로 맨 첫머리에 관헌에게 통보되었다. 배교자 두 명이 그의 명성에 끌린 것처럼 꾸미고 와서 책을 몇 권 사겠다는 핑계로 그의 집을 살펴보고 간 뒤 얼마 안있어 포졸들을 데리고 그를 잡으러 왔다. 김사집 프란치스꼬는 우선 자기 고향인 덕산 읍으로 압송되었다. 관장은 그가 배교할 의사만 있으면 이내 놓아주리라고 약속하였으나 그는 ꡒ위대하신 하는님을 섬기는 제가 어떻게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ꡓ하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그에게 몇가지 고문을 시키고 포졸직으로 강등시켜 옥으로 다시 보냈다. 다시 불려나온 김사집 프란치스꼬는 매를 맞으면서도 여전히 굴복하지 않으니, 이번에는 매질하는 천한 직책을 그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자기 아이들에게 이런 편지를 써 보냈다. ꡒ천주와 성모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 가도록 힘써라. 그리고 나를 다시 볼 생각은 하지 마라.ꡓ이것을 보면 그는 이미 결심이 되어 있었고, 마음 속에는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0월에 해미 진영으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았다. 그러나 형벌로도 그의 항구한 마음을 바꿀 수 없으므로, 그해 12월에 도(道)의 병영이 있는 청주로 다시 이송되었다. 이 길은 그에게 혹독한 형벌이었다. 몹시 추운 날씨에 무거운 칼을 쓴 채,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몸으로 180리 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그의 백발은 어깨 위로 흐트러지고,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옷을 적시고 그것이 살에 말라 붙어서, 그가 한발 한발 떼어놓을 때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심한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이 무서운 형극의 길이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김사집 프란치스꼬는 인종과 마음의 평온을 잠시도 잃지 않았다. 그는 곧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22일(1월 25일) 장터로 끌려나가 뭇사람의 구경거리가 되고 곤장 81도를 맞은 후에 조용히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 목격한 증인들의 말을 들으면, 그의 신덕과 망덕과 애덕이 끝까지 가장 열렬한 것 같았으며, 그의 마음은 철석같이 굳었었다 한다.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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