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主歌辭의 變遷 樣相
천주가사의 작품연대를 규명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그 저자가 자신의 이름이나 연대를 밝히지 않은 작품이 많고 그 전수의 과정 속에서 많은 부분 사용자들에 의해 손질되어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밝혀진 작품 속에서도 친저성이 의심되는 작품이 있어 더더욱 정확한 창작 연대를 밝히는 작업을 어렵게 한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제시한 천주가사의 年代分類는 현대까지 두가지 작업이 있다. 이는 河聲來의 敎會史 중심의 분류와 吳淑榮의 天主歌 중심의 분류이다. 전자는 ①敎會 創建期의 作品들(1777-辛酉迫害 전),②迫害 및 傳敎時代의 作品들(辛酉迫害-1876),③信敎自由時代의 作品들(1876-1930년대)의 분류이다. 후자는 ①崔도마神父 저술기(1850-1860),②박해가 종식되고 신문화 운동이 전개된 시기에서 1906년 경향신문에 발표된 노래들과 기타 노래들(1880-1910),③한일합방 이후 1924년 8월 민 덕효 주교 이름으로 ꡔ조선어 성가집ꡕ이 나오기까지의 노래들(1910-1924)의 분류이다.1) 오숙영의 분류 방법은 비록 가사의 가장 확실한 형성 연대는 1850년대2)라 할지라도 1850년 이전의 작품들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과 1860년에서 1880년 사이의 공백을 설명하지 않는 등의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주기에 본고에서는 교회사와의 연관성을 생각하면서 하성래의 3단계 분류법을 따르기로 한다.3) 그러나 제 2기에 있어서는 1850년대를 전후하여 천주가사가 본격적으로 창작되며 작품수나 내용 등에 있어 이전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기에 세분하여 살펴야 한다는 점을 덧붙여 제한하는 바이다.
하성래에 따르면 제 1기는 신유박해 이전의 작품들로서 1777년 天眞菴 走魚寺의 교리연구 모임에서 신유박해까지로, 이 시기는 挑戰하는 외부세력에 신앙의 합리성을 辨白하는 辨神論的 護敎論과 自然道德的 倫理生活을 敎育하는 시기여서 初步的인 교리를 觀照하고 있었다.4)
이 시기에 천주교를 반대하는 주장과 천주교를 옹호하려는 주장이 각기 다양한 표현방법을 택했으며, 국문가사를 양쪽에서 다 마련하였다. 천주교를 반대하는 闢衛歌辭에는 李家換의 「警世歌」, 李基慶(1756-1859)의 「闢衛歌」 등이 있고, 전도 혹은 옹호하는 입장의 天主歌辭는 李蘗의 「天主恭敬歌」,丁若銓(1758-1816)의 「十誡命歌」 등이 있다.5) 이벽은 「천주공경가」를 지었는데 천주를 공경해야 할 이유를 누구나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한편 유학의 기존질서는 침해하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정약전의 「십계명가」는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함께 1779년(정조 3년)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교리를 풀이한 내용이 좀더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다. 이 작품을 보면 천주가사를 지은 의도가 천주교를 옹호하자는 데만 있지 않고, 교리를 쉽게 풀이해서 한문을 모르는 일반 신도도 믿음을 다질 수 있게 하자는 것이 또한 긴요한 과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6)
이밖에도 천주교의 원리를 사언 장편한시로 읊은 이벽의 「聖敎要旨」,7) 정약종의 국문으로된 저술인 「主敎要旨」,8) 한문으로 저술된 黃嗣永(1775-1801)의 「帛書」 등이 있다.9)
제 2기는 박해 및 전교시대의 작품들로서 신유박해 이후에서 1876년 韓日丙子修好條約까지를 다룬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시기는 다시 둘로 나뉘어질 수 있는데 그 분기점은 대략 1850년대로 잡아야 할 것이다.
우선 1801년에서 1850년 사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신유박해의 결과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교회 내의 지도급 인사들, 남인 양반들, 학자들이 순교했거나 流配刑에 처해졌는데, 이들의 죄명은 거의 역적모반죄에 적용되었다. 그래서 家産이나 토지는 남김없이 빼앗겼고 처자는 대부분 벽지의 官奴婢로 풀려났으며, 심한 경우에는 3대까지 멸족을 당하였다.10) 이 안에서 간혹 살아남은 순교자들의 가족들이 인가가 드문 산곡으로 숨어 살았기 때문에, 박해 중에도 신앙 생활은 방해를 받지 않았다. 이렇게 모인 교우들이 부락을 이루고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또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순교로 조선 교회는 33년 동안의 목자없는 시대(1801-1834)에 접어 들어섰고 모진 박해의 과정 속에서 초창기 교회의 양반 계급 지도자들의 순교로 제 2세대의 지도층(양반 계층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중인 계급 지도자 등장)이 구성되었다.
이 시기에 저술된 천주가사는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다. 실상 성직자 청원운동을 위한 몇몇 편지를 제외하면 산문으로 저술된 작품도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다. 하지만 “혹심한 박해의 와중에서 교우촌을 형성한 조선 교우들은 수십 년 동안의 성직자 不在에도 스스로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갔을 뿐 아니라 또한 대외적으로는 자기들끼리 조선 교우 재건운동(1811)을 일으켜 교구를 설정하게 했으며, 선교사 영입 문제 등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능력을 가졌다”11)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충분히 천주가사 혹은 기타 작품을 기술하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12). 그리고 설사 어떤 작품을 기술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본격적인 천주가사의 본령이라할 천주가사가 형성되게 되는 밑바탕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할 것이다.
제 2기의 두번째 시기는 1850년대부터 1887년까지로 상정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천주교 교리 발전사에 가장 괄목할만한 시기였다. 8종 13편의 한글 신심서와 교리서가 편찬되어 대중에게 보급되었고 聖事 중심의 신앙 생활이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신심서의 간행은 부족한 선교사를 대신하였고 신심생활을 심화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13) 또한 1860년대는 신심서 발간작업을 위해 쌓아 온 작업들이 집성 수정되어 公刊을 보았고, 영혼 양식의 寶庫가 완공되는 시기였다,14)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건은 한국의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활동하였던 시기라는 점이다. 최 신부는 명목상으로는 두번째 신부라고 하지만 首先司祭인 김대건 신부가 귀국한지 일 년만에 체포되어 순교하게 됨으로써 사제로서 사목활동 기간이 몹시 짧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12년간의 긴 세월을 한결같이 본방인 사제로서, 불타는 정열로 사목과 포교 생활을 하였음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15) 최 신부는 모두 22편이나 되는 천주가사를 지었다. 후에 상세히 다루겠지만 그는 국내 신도를 상대로 교리를 풀이하고 믿음을 정비하는 방책으로는 가사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교리상 필요로 하는 내용을 모두 갖춘 가사를 저술한 것이다.16) 그리고 베르뇌(Berneux,張敬一) 주교, 南尙敎, 南鐘三의 가사가 각 1편씩 전해지는데 이 가사들은 국문 되풀림조의 특이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17) 이밖에도 작가를 알 수 없는 「피악수선가」,「강신부노래」,「신덕」,「망덕」,「애제」,「덕성」,「행선」,「옥중제성」등의 천주가사가 있다.18)
제 3기는 1876년 丙子修好條約으로 문호가 개방되기 시작하고 1886년 韓佛條約의 체결로 신앙의 자유를 얻고 地下敎會의 신세를 면하게 된 시기부터 1930년에 朴齊元이 「소경자탄가」를 저술한 시기를 상정한다.19) 이 시기는 다시 두개의 시기로 분리될 수 있다.
전반부라 할 1910년까지의 가사의 특징을 살펴보면, 개인의 영성에서 우러난 고백록적인 自歎歌류와 개화를 권면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제 2기의 가사들이 단편적으로 구전 또는 필사되어 오다가 편집된 시기이기도 하다.20) 이 무렵에 들어온 개신교는 찬송가 이외의 노래를 마련하지 않았지만, 천주교는 가사를 짓던 관습을 그대로 이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1891년의 작가 미상의 「忠孝歌」21)와 金起浩가 1899년에 명동성당 낙성을 기념해 지은 「聖堂歌」가 있고22) 이밖에 대부분의 작품들은 <경향신문>을 통하여 발표되었다.23)
후반부라 할 1910-1930년대는 교회가 안정을 찾은 시기이다. 가사의 특징은 계몽을 위한 교육적 가사와 교회 행사에 사용할 목적으로 작사된 것을 비롯하여 개인의 감사, 찬미, 참회, 회고 등 그 내용이 다양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24) 하지만 인쇄된 형태로 발표되기 시작하고 작품 수는 많아졌으나, 최양업 신부의 전례를 능가하는 새로운 작품군이 마련되지는 않았다.25)
천주가사의 최종연대에 대하여서는 본고에서는 1931년에 창작된 박제원의 「소경자탄가」를 최종연대로 보는 견해를 따르기로 한다. 물론 이 당시 <경향잡지>에 발표된 대표적인 작품으로 남종삼의 손자인 南相喆의 「쥬년 략가」26)가 있고 심지어 195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화산 천주교회 전교회장 강한태의 「군소리」라는 천주가사도 보인다. 하지만 이는 강한태의 「군소리」 등은 천주가사의 殘影으로 이해되어야지 천주가사를 1950년까지 소급시키기에는 부족하기에 대체로 천주가사는 1930년대를 고비로 소멸한다 할 것이다.27) 박제원은 1887년부터 전라도 지방의 전교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1928년 불행하게 眼盲하여 1931년 78세 때 자기 작품을 입으로 부르고 받아쓰게 하여 수편의 가사28)를 남겼다. 이 작품에 최종 연대를 두는 이유는 ①가사의 소재, 의식구조, 생활감정, 어투 등이 개화의 영향없이 古風을 띠고 있고 唱歌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②작가가 교회의 수난을 체험한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데 있다.29)

天主歌辭의 變遷 樣相
천주가사의 작품연대를 규명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그 저자가 자신의 이름이나 연대를 밝히지 않은 작품이 많고 그 전수의 과정 속에서 많은 부분 사용자들에 의해 손질되어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밝혀진 작품 속에서도 친저성이 의심되는 작품이 있어 더더욱 정확한 창작 연대를 밝히는 작업을 어렵게 한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제시한 천주가사의 年代分類는 현대까지 두가지 작업이 있다. 이는 河聲來의 敎會史 중심의 분류와 吳淑榮의 天主歌 중심의 분류이다. 전자는 ①敎會 創建期의 作品들(1777-辛酉迫害 전),②迫害 및 傳敎時代의 作品들(辛酉迫害-1876),③信敎自由時代의 作品들(1876-1930년대)의 분류이다. 후자는 ①崔도마神父 저술기(1850-1860),②박해가 종식되고 신문화 운동이 전개된 시기에서 1906년 경향신문에 발표된 노래들과 기타 노래들(1880-1910),③한일합방 이후 1924년 8월 민 덕효 주교 이름으로 ꡔ조선어 성가집ꡕ이 나오기까지의 노래들(1910-1924)의 분류이다.1) 오숙영의 분류 방법은 비록 가사의 가장 확실한 형성 연대는 1850년대2)라 할지라도 1850년 이전의 작품들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과 1860년에서 1880년 사이의 공백을 설명하지 않는 등의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주기에 본고에서는 교회사와의 연관성을 생각하면서 하성래의 3단계 분류법을 따르기로 한다.3) 그러나 제 2기에 있어서는 1850년대를 전후하여 천주가사가 본격적으로 창작되며 작품수나 내용 등에 있어 이전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기에 세분하여 살펴야 한다는 점을 덧붙여 제한하는 바이다.
1.1.1. 제 1기(1777-1801)
하성래에 따르면 제 1기는 신유박해 이전의 작품들로서 1777년 天眞菴 走魚寺의 교리연구 모임에서 신유박해까지로, 이 시기는 挑戰하는 외부세력에 신앙의 합리성을 辨白하는 辨神論的 護敎論과 自然道德的 倫理生活을 敎育하는 시기여서 初步的인 교리를 觀照하고 있었다.4)
이 시기에 천주교를 반대하는 주장과 천주교를 옹호하려는 주장이 각기 다양한 표현방법을 택했으며, 국문가사를 양쪽에서 다 마련하였다. 천주교를 반대하는 闢衛歌辭에는 李家換의 「警世歌」, 李基慶(1756-1859)의 「闢衛歌」 등이 있고, 전도 혹은 옹호하는 입장의 天主歌辭는 李蘗의 「天主恭敬歌」,丁若銓(1758-1816)의 「十誡命歌」 등이 있다.5) 이벽은 「천주공경가」를 지었는데 천주를 공경해야 할 이유를 누구나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한편 유학의 기존질서는 침해하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정약전의 「십계명가」는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함께 1779년(정조 3년)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교리를 풀이한 내용이 좀더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다. 이 작품을 보면 천주가사를 지은 의도가 천주교를 옹호하자는 데만 있지 않고, 교리를 쉽게 풀이해서 한문을 모르는 일반 신도도 믿음을 다질 수 있게 하자는 것이 또한 긴요한 과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6)
이밖에도 천주교의 원리를 사언 장편한시로 읊은 이벽의 「聖敎要旨」,7) 정약종의 국문으로된 저술인 「主敎要旨」,8) 한문으로 저술된 黃嗣永(1775-1801)의 「帛書」 등이 있다.9)
1.1.2. 제 2기(1801-1876)
제 2기는 박해 및 전교시대의 작품들로서 신유박해 이후에서 1876년 韓日丙子修好條約까지를 다룬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시기는 다시 둘로 나뉘어질 수 있는데 그 분기점은 대략 1850년대로 잡아야 할 것이다.
1.1.2.1. 제 2기 전반부
우선 1801년에서 1850년 사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신유박해의 결과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교회 내의 지도급 인사들, 남인 양반들, 학자들이 순교했거나 流配刑에 처해졌는데, 이들의 죄명은 거의 역적모반죄에 적용되었다. 그래서 家産이나 토지는 남김없이 빼앗겼고 처자는 대부분 벽지의 官奴婢로 풀려났으며, 심한 경우에는 3대까지 멸족을 당하였다.10) 이 안에서 간혹 살아남은 순교자들의 가족들이 인가가 드문 산곡으로 숨어 살았기 때문에, 박해 중에도 신앙 생활은 방해를 받지 않았다. 이렇게 모인 교우들이 부락을 이루고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또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순교로 조선 교회는 33년 동안의 목자없는 시대(1801-1834)에 접어 들어섰고 모진 박해의 과정 속에서 초창기 교회의 양반 계급 지도자들의 순교로 제 2세대의 지도층(양반 계층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중인 계급 지도자 등장)이 구성되었다.
이 시기에 저술된 천주가사는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다. 실상 성직자 청원운동을 위한 몇몇 편지를 제외하면 산문으로 저술된 작품도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다. 하지만 “혹심한 박해의 와중에서 교우촌을 형성한 조선 교우들은 수십 년 동안의 성직자 不在에도 스스로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갔을 뿐 아니라 또한 대외적으로는 자기들끼리 조선 교우 재건운동(1811)을 일으켜 교구를 설정하게 했으며, 선교사 영입 문제 등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능력을 가졌다”11)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충분히 천주가사 혹은 기타 작품을 기술하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12). 그리고 설사 어떤 작품을 기술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본격적인 천주가사의 본령이라할 천주가사가 형성되게 되는 밑바탕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할 것이다.
1.1.2.2. 제 2기의 후반부
제 2기의 두번째 시기는 1850년대부터 1887년까지로 상정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천주교 교리 발전사에 가장 괄목할만한 시기였다. 8종 13편의 한글 신심서와 교리서가 편찬되어 대중에게 보급되었고 聖事 중심의 신앙 생활이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신심서의 간행은 부족한 선교사를 대신하였고 신심생활을 심화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13) 또한 1860년대는 신심서 발간작업을 위해 쌓아 온 작업들이 집성 수정되어 公刊을 보았고, 영혼 양식의 寶庫가 완공되는 시기였다,14)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건은 한국의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활동하였던 시기라는 점이다. 최 신부는 명목상으로는 두번째 신부라고 하지만 首先司祭인 김대건 신부가 귀국한지 일 년만에 체포되어 순교하게 됨으로써 사제로서 사목활동 기간이 몹시 짧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12년간의 긴 세월을 한결같이 본방인 사제로서, 불타는 정열로 사목과 포교 생활을 하였음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15) 최 신부는 모두 22편이나 되는 천주가사를 지었다. 후에 상세히 다루겠지만 그는 국내 신도를 상대로 교리를 풀이하고 믿음을 정비하는 방책으로는 가사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교리상 필요로 하는 내용을 모두 갖춘 가사를 저술한 것이다.16) 그리고 베르뇌(Berneux,張敬一) 주교, 南尙敎, 南鐘三의 가사가 각 1편씩 전해지는데 이 가사들은 국문 되풀림조의 특이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17) 이밖에도 작가를 알 수 없는 「피악수선가」,「강신부노래」,「신덕」,「망덕」,「애제」,「덕성」,「행선」,「옥중제성」등의 천주가사가 있다.18)
1.1.3. 제 3기(1876-1930년대)
제 3기는 1876년 丙子修好條約으로 문호가 개방되기 시작하고 1886년 韓佛條約의 체결로 신앙의 자유를 얻고 地下敎會의 신세를 면하게 된 시기부터 1930년에 朴齊元이 「소경자탄가」를 저술한 시기를 상정한다.19) 이 시기는 다시 두개의 시기로 분리될 수 있다.
1.1.3.1. 제 3기의 전반부
전반부라 할 1910년까지의 가사의 특징을 살펴보면, 개인의 영성에서 우러난 고백록적인 自歎歌류와 개화를 권면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제 2기의 가사들이 단편적으로 구전 또는 필사되어 오다가 편집된 시기이기도 하다.20) 이 무렵에 들어온 개신교는 찬송가 이외의 노래를 마련하지 않았지만, 천주교는 가사를 짓던 관습을 그대로 이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1891년의 작가 미상의 「忠孝歌」21)와 金起浩가 1899년에 명동성당 낙성을 기념해 지은 「聖堂歌」가 있고22) 이밖에 대부분의 작품들은 <경향신문>을 통하여 발표되었다.23)
1.1.3.2. 제 3기의 후반부
후반부라 할 1910-1930년대는 교회가 안정을 찾은 시기이다. 가사의 특징은 계몽을 위한 교육적 가사와 교회 행사에 사용할 목적으로 작사된 것을 비롯하여 개인의 감사, 찬미, 참회, 회고 등 그 내용이 다양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24) 하지만 인쇄된 형태로 발표되기 시작하고 작품 수는 많아졌으나, 최양업 신부의 전례를 능가하는 새로운 작품군이 마련되지는 않았다.25)
천주가사의 최종연대에 대하여서는 본고에서는 1931년에 창작된 박제원의 「소경자탄가」를 최종연대로 보는 견해를 따르기로 한다. 물론 이 당시 <경향잡지>에 발표된 대표적인 작품으로 남종삼의 손자인 南相喆의 「쥬년 략가」26)가 있고 심지어 195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화산 천주교회 전교회장 강한태의 「군소리」라는 천주가사도 보인다. 하지만 이는 강한태의 「군소리」 등은 천주가사의 殘影으로 이해되어야지 천주가사를 1950년까지 소급시키기에는 부족하기에 대체로 천주가사는 1930년대를 고비로 소멸한다 할 것이다.27) 박제원은 1887년부터 전라도 지방의 전교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1928년 불행하게 眼盲하여 1931년 78세 때 자기 작품을 입으로 부르고 받아쓰게 하여 수편의 가사28)를 남겼다. 이 작품에 최종 연대를 두는 이유는 ①가사의 소재, 의식구조, 생활감정, 어투 등이 개화의 영향없이 古風을 띠고 있고 唱歌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②작가가 교회의 수난을 체험한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데 있다.29)